|
<27일>
새벽 2시-. 우리 팀 중에서 가장 먼저 잠을 깬 것은 사진부 이영배기자였다.
[탕] [탕] 총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읽을 수 있었다.
왠지 다른 날들이 총성과는 달리 예감이 달랐다. 동시에 잠이 달아났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담배에 손을 댔다. 불을 그어대는 순간 카랑카랑한 20대 여자의 마이크 소리가 새벽 광주시내를 찢는다.
{계엄군이 들어온다} {총기를 나누어주고 있다} {시민들은 도청으로…} 마이크를 잡은 여자의 음성은 10여 분간 계속됐다.
그것도 잠시-. 총소리가 시내에 진입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 맨 나중에 잠을 깬 조남준 기자 등 우리 팀 셋이 서로 중얼댔다. 동시에 섬광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수습위원장 김군, 헌혈을 호소하던 청년, 총을 들고 도청 정문에 섰던 고교생 차림의 청소년 등등…. 또 도청은 폭파되지 않을까?
총소리는 계속됐다. 잠시 끊겼다가는 다시 요란했고 요란했다간 다시 끊어졌다.
새벽 4시-.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광주 KBS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돌아온 병사] [콰이강의 다리]
총소리는 5시12분 일단 끊어졌다.
방송은 계속됐다. {군은 4시30분 현재 시가지를 완전장악했다} {폭도도 소탕됐다} {시민은 라디오를 청취하시고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외국인도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공무원은 7시30분까지 출근하시오} {출근하지 않는 공무원은 근무지 이탈로 간주하겠다} 이어 5시25분에는 계엄분소장의 첫 담화가 발표됐다.
{군은 지난 21일 철수한 후 일주일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 동안 군이 진입하지 않기로 시민대표들과 약속했으나 성과가 없었으며 불량배·깡패·전과자 등이 시민군을 조직, 이적행위를 해 어쩔 수 없이 진입했다…<중략>…군은 성공리에 작전을 끝냈다. 시민은 질서회복에 앞장서 달라}는 내용이었다.
담화는 2-3번 계속 되풀이됐다. 행진곡도 연이어 신이 나 있었다.
6시에 작전 전황을 알렸다. {사망 2명, 체포 2백7명, 민간인 피해는 없다}고.
퍽이나 다행스럽게 느꼈다. 꼭 그렇게 피해가 없기를 원했다.
9일째 광주사태를 취재하며 지켜봤던 우리 팀은 너무나 많은 죽음을 대했고 목격했기 때문이다.
6시10분쯤 여관 밖이 조금은 시끌했다. 이내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군화소리가 들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 302호인 우리 방이었다. 왠지 우리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을 열었다. M16을 든 군인 2명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서청원 반장이 프레스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다시 주민증을 요구했다. 세 사람의 주민증을 건네 줬다. 얼굴에 땀방울이 계속 흐르는 이 군인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되돌아섰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은 방으로 들어가란다.
우리는 여관에서 꼼짝도 못했다. 답답했다. 취재도 하고 본사에 송고해야 될텐데 여관 전화마저 불통이고 식사는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담배마저 떨어져가고 있었다.
9시30분, 우리를 찾는다고 계엄군이 전해줬다. 공무원을 빙자해 출근했던 박래명 위정철 두 주재 기자가 궁금히 여기고 우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히 여관에 있던 책임자가 박기자와 안면이 있는 군인이어서 여관에 투숙했던 우리는 도청 앞에서나마 취재할 수 있었다.
시가는 전날과는 판이했다. 시위대들이 지키던 도청은 군인이, 총을 메고 거리를 질주하던 시위대 대신 군인이 거리를 각 요소요소에 지키고 있었다.
용케 빠져 나온 다소의 시민 외에는 거리는 허전했다. 도청 출입은 일체 통제됐다.
우리 팀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채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도청 앞 인도에 주저 앉았다.
오후 3시쯤 군버스가 도청 앞에 헌병 선도차의 호위를 받으며 섰다. 비행기편으로 이날 서울서 내려온 각 신문사의 국방부 출입기자와 사진기자들이었다. 동료 박기자가 보였다. 마치 군복무중 휴가를 얻어 귀향했을 때 친구를 만난 그런 반가움이었다.
우리 팀은 비로소 이들과 함께 도청에 들어갔다.
신원이 확실치 않아 도청 옆 뜰에 안치되어 있던 10여 구의 시체 옆에 어제까지도 살아있던 젊은이들이 15구의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우리 팀은 이날 본사에서 내려오는 조연흥 차장 등 다른 팀과 교대하기 위해 본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광주에 온지 꼭 9일 만이었다. 돌아보니 지난 9일간의 여러 일들이 우리의 뇌리를 스쳐갔다. 총소리, 시가지의 어지러움, 유가족의 통곡, 시위대의 함성 등….
그러나 혼란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슬기롭게 대처한 광주시민의 높은 시민 의식에 끝없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하루 빨리 광주 시민의 마음의 상처를 씻게 해야겠다고….●
-------------- 사건기록의 첫날인 18일 부터의 기록입니다. --------------
<18일>
● 오전 9시쯤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학교에 들어가려다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
● 오전 11시30분쯤 학생들은 광주역 거쳐 번화가인 금남로로 들어갔으며, 숫자는 2백 명쯤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농성하며 {김대중 석방하라}고 구호 외쳤다. 기동경찰, 길 양쪽에서 다가서며 페퍼포그(체류탄) 발사, 해산시킴.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충장로, 대림동, 동산, 산수 등 5개 파출소를 파괴.당시
● 오후 3시 광주 학생회관 앞에서 학생들 페퍼포그차 1대를 전복시켜 화염병으로 불태움.
● 오후 4시 계엄군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 전역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을 연행 시작.
● 오후 4시30분 공용터미널 앞에서는 기타 갖고 가는 학생,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도. 헬기 3대 공중에서 비행(대학생 집결지 파악하는 듯).
● 오후 5시 계엄군이 조선대, 전남대 등 2개 대학교와 광주교대 등 7개 전문·초급대 진주함.
● 밤 8시까지 1백49명 연행설(경찰에 57, 군에 92명)
● 밤 8시15분까지 1백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은행 뒤쪽에 모여 있었으나 별일 없었다. 일부 계엄군은 시민들이 학생 감싸면 {너는 뭐냐}고 구타.
● 밤 8시30분 계엄군은 연단병력으로 증강. 광주 시외 변두리와 대학가에 군인들 막사 쳐. 학교 정문에는 8명씩 무장하고 경계, 시가지 요소요소에 군인 배치.
● 밤 9시부터 통금한다고 지방 방송 통해 방송, 통금 실시.
<19일>
전반적 상황 메모
* 금남로는 완전 교통 차단 상태.
* 도청 앞 기동경찰 바리케이드 치고 군병력 요소요소 경계, 배치.
* 외신 카메라 기자들 눈에 띄기 시작.
* 포고령 위반 집중 단속.
*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해산시키자 골목으로 피신. 경찰이 청년 10명을 해산시키자 계엄군이 경찰관 윽박질러. 이들 청년들을 길 한복판에 앉혀 놓고 구타.
● 오전 11시부터 탱크진입, 30명 무릎 꿇려.
● 12시쯤 거리는 완전히 통행이 끊기고 군은 블록마다 차단.
● 오후 1시40분 트럭 18대분의 병력진입, 그 뒤 후속부대 진입, 진입 과정에서 학생·시민 4천-5천명이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에 모여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2시20분). 경찰, 최루탄 발사. 학생·시민들 도로변의 화분대(길이 1·5m, 폭 40cm), 공중전화박스, 버스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길 가운데 바리케이드 설치, 제1교회 공사장 기름 2드럼에 불질러, 하나는 폭발.
도서관서 학생 연행
계엄군(트럭 8대분), 버스에서 학생들 끌어내 구타. 도서관에서도 학생 끌어내. 군인 점심 먹으러 간 사이 시민 집결.
19일 오후 상황
* 시내 거의 철시, 차량 완전통제. 건물·도서관·식당 등도 뒤져 젊은이는 트럭으로 실어 가.
* CBS차 1대, MBC차 3대, 승용차 2대를 불질러. 시민·학생들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앞, 금남로통 등 3개소에서 군인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 한 곳에 시민·학생 2천명 정도씩.
* 대동고, 중앙여고 수업 거부하고 데모할 기미 보이자 군인들 출동, 학교를 둘러싸 학생들 나오지 못하고 있음.
*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시민들 가정집, 가게 등에 뛰어들어 숨어.
● 오후 3시 광주 유지들 도청에 모여 부지사에게 무차별 구타에 항의, 이런 일 다시 없도록 건의해 달라고 요청.
● 오후 7시40분 광주고속터미널 앞, 1천 여명이 공중전화박스와 대형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 쳐. 경남 넘버 단 화물트럭 불질러.
● 오후 7시45분 유동에 있는 대형 아치 불질러.
* 시민들 몽둥이와 곡괭이 들고 군경과 대치하다가 군이 증원되자 흩어져.
* 9시경에는 거리에 인적 끊겨.
<20일>
● 오전 10시 별다른 상황 없음. 요소요소에 집총 군인들.
* 사망자 3명설. 시민들은 30-40명 죽지 않았겠느냐며 분노. 다방 등서 수군수군, 상가 점포 절반은 철시.
치안본부 발표
5월18일, 19일 이틀간 광주에서 연행 5백17명, 부상(경찰) 6명(중상 1명), 임동파출소 전소, 19일 서울역에서 41명 연행.
오전 12시15분 서청원 기자 송고
* 파악된 사망자 3명 : 적십자 병원에 김종철 김형렬(29·백운동) 두 명. 한 명은 신원 밝혀지지 않고 19일 오후 6시 사망했다는 것만 알려져.
* 부상자는 전남대 부속병원에 23명, 기독병원 4명, 조선대 부속병원 2명. 전남대부속병원에 있는 김영찬(19·조대부고 3년)은 19일 오후 4시30분 계림파출소 앞에서 총격받고 왼쪽 배 관통상을 입었다 함. 시민·학생들에 의하면 중태인 사람은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자 늘어날 듯하다고 함.
* 요소요소에 군·경찰 배치, 현저한 움직임 없음. 상가 3분의 1철시, 시민들 분노. 언제 폭발할지 모름.
오후 2시30분 서기자 송고
* 19일 오후부터 전남·북에 걸쳐 내리던 비 오늘 오전에 멈춰. 시민들 {내 아들, 내 동생 어떻게 됐나} 신문사·방송국·경찰서 찾아다녀. ○사단에 시민·학생 1천여 명 연행설. 시민들 의견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느냐. 가면 갈수록 희생만 커진다} {계엄군을 교체해야 할 것 아닌가} 시민과 군인, 서로 적대감 느끼는 듯.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었는데 타도 사람으로 바꿨다]는 소문도 나돌아. 시민들이 저제 집단적·무차별적으로 당해 거리에는 나오지 않고 있음. 오늘 밤 게릴라식으로 군으로 붙을 우려.
* 오후엔 상가 3분의 2철시. 현재 중동지역에 군인들 가택 수색(대학생)한다는 소문. 광주에 유학보낸 서울 학부모들 사태 궁금해 광주에 내려와.
* 군인 한 명이 적십자 병원 앞에서 죽었다는 소문-학생들이 [나쁜 놈] [죽일 놈]이라고 욕하며 따라가다 개천에 떨어져 시민 학생들이 돌로 쳐 죽였다고 함.
* 오늘 밤 지켜봐야 할 듯. 사진은 4시40분에 서울에 도착 예정.
오후 4시20분 서기자 송고
● 오후 4시20분 금남로 2가 가톨릭 센터 앞에서 8백여 시민·학생들이 애국가 부르며 농성. [계엄해제] 외쳐. 계엄군 최루탄 발사, 일단 해산. 광주고 앞에서 4백여 명 계엄군과 대치.
* 번화가 충장로 등 교통차단. 골목길에서 계엄군·경찰이 시민 접근 차단.
* 배명인 광주지검 검사장 말에 의하면 어제(19일)까지 9백8명 연행(고등학생 13명, 대학생 4백95명, 시민 4백명). 이중 1백67명은 오늘 오후 석방한다고.
* 전남도 계엄분소, 전남 부지사·검사장·교윢감·목사·신부소집. 기관장등이 {데모 진압방법 너무 지나치다. 이 때문에 시민·학생들이 반발했다. 시민 선무가 급선무다. 석방할 사람은 빨리 가려 석방시키라}고 대책 건의. 계엄분소 대단히 고무적 반응. 실마리 조금씩 풀리는 듯.
* 오후 4시50분
광주 최계원 지사장 기사 고치고 추가할 내용 불러옴.
* [연행학생 1백67명을 오늘 중에 석방]을 [연행 학생과 일반시민 중 1백67명…]으로 고치고
* 추가 [계엄분소는 또 앞으로도 계속 주동자가 아닌 자는 선별 처리해서 석방한다고 밝히고 주동자는 엄히 다스린다고 발표했으며, 소요가담자 중 경상자는 군에서 치료하고 있고 중상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광주주재 조광흠 기자 송고
금남로 2-3가에 시민, 학생 모이기 시작. 4시에 3천여 명 [계엄철폐]외치며 애국가 합창, 일부 연좌 농성. 군인들 밀고 내려와 5시쯤 3백m 밀려 금남로 3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군과 대치. 철책 토관 드럼통으로 바리케이드, 곧 강제 진압할 듯.
서기자 송고
광주시내 중심가 최루가스 꽉 차. 조선일보 지사(동구청 건물에 위치)도 근무 못할 정도. 군인들 지사건물 앞에서 못나가게 해. 군인 수백 명이 지사 근처에 깔려 있음.
● 오후 6시 택시운전사 2백여 명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계엄군을 몰아내겠다고 결의.
시내버스 2대와 택시 2백대를 앞세우고 충장로 3가따라(데모대 운집해 있음) 전남도청 앞으로 헤드라이트 켜고 돌진중.
● 오후 7시쯤 충장로 3가에서 경찰과 군과 대치 진행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사태는 19일 택시운전사 4명이 시민을 실어나르다 계엄군에게 적발, 군이 {왜 학생들을 태워 주느냐}며 운전사 끌어내리고 구타. 이로 인한 반발.
오전 서로 연락 취해 모인 듯. 광주시민들은 {어저께 계엄군 나오라} 심히 흥분.
데모대 나올 때마다 박수치고 성금내고 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된 듯.
최지사장 송고
동원차량 금남로에 버스 15대. 도청 향해 50여m 앞에 버스 1대 군이 페퍼포그 쏘아 멈추게 하고 타고 있던 학생들 연행. 일부는 공용터미널 앞에서 트럭 앞세우고, 또 노동청 앞에는 택시 15대가 밀려와 대치. 남광주 쪽에서 등 4면에서 도청으로 차량데모.
19일 사태후 운전사들 흥분.
서기자 송고
도경과 도청 중심으로 4개의 도로 나있다. 그 방향으로 압축, 제일 심한 곳이 금남로. 버스 10대 트럭 4대 택시 1백여 대가 1천여 시민 뒤따르며 도청 앞 5백m까지 육박.
다른 3개 방면도 택시 앞세운 2백-3백여 데모군중이 도청 향해 진격하다 페퍼포그에 주춤. 대치.
● 오후 7시20분 광전교통소속 전남5아 3701 시내버스를 타고 고교생차림 2명과 운전사가 경찰관 앞으로 돌진. 도청 앞 광장까지 갔다. 차를 세우고 도망가다 경찰에 잡혀.
● 오후 7시45분 도청 앞 광장까지 집결, 군중은 태극기 흔들고 구호 외치면 도청 쪽으로.
최 지사장 송고
● 7시부터 금남로 거리에 버스 8대 대형 트럭1대 택시 50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까지(관광호텔) 진출. 구호(계엄해제)외치다.
● 8시쯤에 차안에 최루탄 발사하며 군인들이 강제진압. 8시에 물러나 군인들과 대치 중. 상당수 연행, 진압방법이 어제와는 달리 완화. 군인들 태도 누그러진 듯. 변두리 곳곳에서 차가 몰려와.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오후 6시 금남로 일대 수 만. 통운 대형 트럭 1대 버스 10대, 택시 70대가 4열로 도열. 도청 앞으로 진격, 관광호텔 앞까지 나갔다 페퍼포그에 차를 버리고 물러나. 계엄군이 차 유리창을 다 부수고, 주택가로 밀려난 데모대들이 [시민들 나오라]고 유도. 9시 이후에도 계속될 것 같다.
● 오후 8시30분 데모대들 소방차 여러대 뺏어 도청 앞에 모여 계속 사이렌 울리고 있음.
송기자 송고
● 오후 7시40분부터 40분 동안 소강상태.
● 오후 8시10분에 2-3대 소방차 탈취해 사이렌 울리며 금남로 도경앞 6백m 앞까지 돌진하면서 데모가 가열됨.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 5천-1만여 명 몰려 있다(8시40분 현재). 어제의 계엄군 목표로 갔다 함(예방키 위해). 도청 3갈래 길이 완전히 가득차 있다. 대치망 뚫리면 도청을 방화할 가능성.
● 오후 8시50분 데모군중이 시청에 침입, 점령(시청은 도청에서 6km 동북으로 떨어져 있음).
● 오후 8시부터 광주 MBC(도청에서 1km), KBS(도청에서 2km, 광주역 앞)가 방송중단. 시민 접수한 것 같다. 전일방송, CBS는 나와.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9시40분에 MBC 방화, 소방차도 못오고 타고 있다. 9시에는 학동 파출소와 그 앞에 있던 사이카 2대 전소. 노동청 앞에서 택시 1대 전소. 방화가 늘 것 같다. MBC는 빌딩이라 광주시내에서 다 불길이 보여 시민이 흥분할 것 같다.
서 기자 송고
● 오후 10시부터 데모대가 폭동화. MBC방화. 순경 강정우 등 4명이 도청 앞에서 돌진 버스에 깔려 사망(3명은 서기자 눈으로 확인) 2명 중상.
이들 순경들은 도청에서 2백m 떨어진 노동청 골목에 포진해 있다가 불을 지른 버스에 깔려, 이 버스를 다른 버스가 밀어 중상 순경은 앰뷸런스가 실어 가려해도 빠져 나가지 못해.
이 일대 버스 불탄 것만 4대. 도경을 중심으로 극렬히 데모. 군대는 포진하고만 있다.
밤 10시30분 서기자 송고
* 도경, 도청 함락 직전. 데모대들 도청 뒷담을 곡괭이로 허물고 있음. 도청에 있는 간부들이 대피. 생명의 위험이 있어 교육위원회로 피신 (서기자, 광주주재 위정철 기자). 도청을 중심으로 데모군중 2만-3만명 포위. 오늘밤 광주시내 큰 일 날 듯. 대단히 긴박한 상태. 시민들도 나와 지켜보는 상태. 경찰관, 군인들 포위 당하고 있음. 시민도 귀가 않고 있어 폭발 일보직전.
밤 11시5분 서기자 송고
● 10시55분 광주역쪽에서 군인들이 수백 발 발포하고 있음. 취재접근 어려움. 중요서류, 직원들이(도청) 옮김. 총쏘고 시민 함성 소리…무법천지 공포의 도시. 유탄피해 우려. 도청에서 서기자 탈출. 사진기자 이영배시 지사 쪽에 있는 듯.
발포 피해 상황 아직 모름.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중심지에서 (금남로)데모주력시민들이 강제진압 (군인이 페퍼포그 쏘아)으로 흩어짐. 중심지 옥상에 사진기자 이영배씨와 같이 있음. 광주 시청 옆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 발 유탄 50여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안보여. 공포위협 사격인 듯.
<21일>
새벽 1시40분 광주 위정철 기자 송고
● 새벽 1시15분 전후해 광주세무서에 불길이 올라 세무서 곁에 2개 주유소가 있는데 여기의 휘발유와 경유를 빼 불을 질러. 노동청-국세청 사이 현장에 여자 1명 남자 1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음. . 계속 함성발포. 도청 주변에서 계엄군이 장갑차로 밀어붙이고 있다.
새벽 2시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동사무소 스피커와 앰프를 떼 차에 달고 외곽지대를 돌면서 도청으로 집결하라고 방송하고 다녀. 여자 목소리.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충돌. 총소리가 계속 나. 도청에서 2백m 떨어진 곳에서 애국가.
오전 10시30분 서기자 경비전화 연락
* 고장이란 이유로 시외전화선 절단. 데모군중 장갑차 1대, 군지프 4-5대 뺏어 도청 반경 5백m내에 군경이 사수하고 그 외의 천지는 완전히 무법지대.
* 광주시장, 데모군중 설득하려다 군중에 납치설. 변두리지역 축제분위기. 새벽에 KBS 불에 탔고, 현재 2명의 시체를 리어카에 실어 태극기 꽂고 돌아다녀. 오늘 낮과 밤이 고비될 것 같다.
시경 경유 현지 기사 접수 ( 이부분은 기자 아닌 군,경찰이 쓴 기사임)
* 오전 10시30분 도청에 있는 주요 기밀서류를 헬기로 대피시키기 시작.
* 오전 10시48분 군 헬기에서 방송, [공수단 병력을 철수시키겠다. 시민도 협조해달라] 그러나 시민의 호응은 없음.
* 오전 10시50분 도지사·시장도 헬기에서 설득 방송. 광주시민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설득하고 있으나 효과가 전혀 없음.
* 오전 10시53분 시민들 아시아 자동차를 두 번째 습격. 가스장갑차 1대를 탈취, 시내로 진입.
* 오전 10시56분 서울에서 경찰소속 대형 헬기로 2l 들이 CS액(코와 귀를 자극하는 액체) 10통짜리 20박스 수송. 이 비행기로 민간인 시체 1구와 중상자 2명 싣고 출발. 오늘 중으로 도청, 도경 함락될 듯. 비밀문서 후송은 이에 대비한 것. 경찰과 군인의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
경찰 : 동료들이 살상당하자 [왜 이런 식으로 지휘해서 피해를 입히느냐]고 공공연히 불만 토로.
군 : 땅을 치고 통곡하는 모습 보임.
①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②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나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 현재 데모군중은 10만 정도. 금남로에 5만 정도가 몰려 있고 자동차들은 이들을 도경, 도청 쪽으로 수송 중.
* 전남대 학생회에서는 제일교회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어떤 폭력과 방화도 막아야 한다. 광주 시민의 긍지를 살리자]고 설득. 그러나 효과 없음.
* 70노인까지 거리로 나와 [왜 죄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고 흥분. 전반적인 현상은 갈수록 악화.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느낄 정도로 험악. 전남일보, 전남매일, 직원들 출근 안하고 못하는 등으로 신문 발행 못함. 금남로에 있는 관광호텔 외국손님 대피, 광주시장은 피납모면.
낮 12시 서울시경 林 伯 기자 접수( 이부분은 기자 아닌 군,경찰이 쓴 기사임)
* 전남지역 학생 총연맹 이름으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하기로(전단). 각 대학별로 집결지 만들어 행진 집결키로. 주민들은 통·반별로 플래카드 만들어 참가요청.
* 오후 1시 도청, 함락 직전. 함락될 경우 통신 완전 두절될 듯. 곳곳에서 불길. 인근 읍면에서도 몰려오는 것 같은 움직임.
군중들의 구호 : [지방색이 웬말이냐] 기자들도 군중들이 [기자들 때려 죽여라] 구호 때문에 피신, 연락이 어려운 상태.
오후 2시20분 서기자 경찰경비전화로 치안본부 기자실에 전화
* 12시45분 시민에게 발포. 1명 사망, 수명 부상. [이 이상 연락할 길 없다]며 끊었다고. 치안본부 3부장실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오후 1시3분 군중이 도청으로 몰려와 가스탄 발사했다고.
오후 3시 서기자 서울시경으로 송고
* 오후 1시 발포명령 도경 쪽에 포위돼 있던 군·경이 군중에 총을 쏘기 시작.
옥상마다 군인이 올라가 총 쏘고 있다. 사상자? 수백발 쏘았다.
주변에는 시위대가 여전히 장악. 자동차 트럭 2백여 대 몰고 다니며 경찰도 도청 사수 각오로 임하고 있다. 교도소 무기고 탈취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 있어 군·경이 대비하고 있다고.
* 발포동기 : 12시40분쯤 도청에서 5백m 떨어진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 몰고 도청 향해 진격. 군경 3명 사상설. 자세한 상황 모른다. 무서워 나갈 수 없다.
오후 3시15분 입전
학생들이 나주에서 예비군 무기고 탈취, 무기 40정과 실탄 갖고 와 군·경과 시가전 벌이고 있다.
타사 정보 종합(20일 밤 및 21일 상황 상보)
* 20일 자정 광주세무서 점거, 무기고 탈취, 카빈, M16 수십 정을 중고생들이 들고 다니고 있음.
* 오전 9시 동구 광천동 아시아 자동차를 2천명이 기습, 자동차 3대 탈취, 금남로 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 9시50분 제일은행 앞에서 군중 1만여 명 중 대표 김범태(27. 조대 법과 1년) 전옥주(32. 여) 등이 도청 상공국장실에서 지사 및 광주 시장과 협상.
요구조건 : ① 도지사가 군중 앞에 나와 공개사과하라 ② 연행학생·시민 석방 ③ 입원학생 생사와 소재 알릴 것 ④ 계엄군은 낮 12시까지 철수할 것 ⑤ 계엄분소장과 협상 주선할 것.
장형태 지사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다. 나머지도 책임지고 수락하겠다}면서 10시에 대표자 3명 돌려 보냄. 그러나 분위기는 계속 고조(한때 시장 납치설).
* 전옥주는 밤새운 데모 주동자로 조대 무용과 중퇴하고 마산에서 무용학원 경영. 고향에 왔다가 유혈 사태보고 데모에 가담 주장. [시민들에게 마구 총질한 것은 용납할 수 없고, 이를 지시한 책임자도 용서할 수 없다] [일단 계엄군을 철수시킨 후 데모군중의 질서를 정리하여 계엄 철폐를 위해 끝까지 평화적 시위를 벌이겠다. 내 동생도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 20일 밤 9시50분 동구 하길동 주택가에서 계엄군이 덮쳐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곤봉을 휘둘렀다. 경향신문 박옥재(41)기자가 중상을 입는 등 수십 명 부상.
* 21일 오전 데모 계속 [광주시민 단결하라] 외치고, 여고생들도 태극기 들고 앞장, 주부, 꼬마들도 각목, 갈쿠리 등을 데모대에 건네주고, 도청 도경이 고립돼 군·경은 헬기로 진압 화기 공급. 고속버스 시내에 못 들어오고 있음.
21일 오전 총리실 입전 보고
* 9시20분 아세아자동차 공장 장갑차 1대, 군용차 30대, 기타 10대 탈취. 한국은행과 가톨릭센터 사이에 5천명이 각목들고, 군지프 2대, 그레이하운드 1대를 앞세운 채 행진. 시체 2구 손수레에 싣고 마이크로 [계엄군은 시체 인도하라]고 방송.
* 인명피해 : 경찰 1백15명(사망 4, 경상 90명), 군(사망 1, 중상 5명).
* 도청 : 버스 1대와 차고 전소, KBS, MBC 전소, 광주세무서 방화, 세무서 무기고 탈취(카빈 17정).
* 오늘 새벽 군병력 1천5백 명 서울서 광주로 출발.
* 군장갑차 1대가 군중에게 탈취됐다고. 아나운서실에서 변칙적으로 뉴스모아 방송하고 있음.
오후 4시 총리실 입전 보고
* 군중들이 카빈 3백정으로 무장, 전남 의대와 경찰국쪽으로 진출중.
* 오후 4시10분 광주 지원동 석산 화약고서 다이너마이트 1상자 탈취 시내로 진출중.
* 나주경찰서 무기피탈 내용 : 카빈 7백80정, M1 2백35정, 실탄 4만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 군 트럭과 버스 30대 동원, 30명씩 분승하여 영광으로 무기탈취자 출동.
* 화순경찰서 무기도 피탈.
역전파출소서 카빈 8백정 수류탄 일부 피탈. 파출소장 납치. 또 다른 파출소 카빈 2백정.
총리실 정보비서실 입전 보고
* 오후 4시15분 시위대 전남의대 12층 옥상에 LMG 2대 설치, 5백m 떨어진 도청향해 발사중. 소방차 1대에 석유를 만재, 도청 방화위해 진출중. 일신방적 무기고에서 카빈 1백50정 피탈.
* 오후 4시21분 호남집중 무기고에서 카빈 1백80정, 실탄 9백발(화순), 승주지서에서 카빈 40정 탈취. ○○사단 병력지원 차 출동.
* 오후 4시25분 한국화약에서 화약 6트럭분 수송치 못함(경찰쪽으로). 서울 시내 중·고생 내일(22일) 오전 봉기한다는 정보있어 시교위, 문교부가 총동원, 교사 비상동원, 무마작업중.
총리실 보고
* 오후 4시 시위대를 카빈 3백정으로 무장, 전남의대에서 경찰국 쪽으로 진출중.
* 오후 4시10분 광주 지원동 석산 화약고에서 다이너마이트 1상자 탈취. 시내로 진격중. 나주경찰서 무기 피탈 내용, 카빈 7백80, M1 2백35, 실탄 4만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군 트럭과 버스 30대를 동원, 30명씩 분승, 영광으로 무기탈취자 출동, 화순경찰서 무기피탈, 역전파출소 카빈 8백 정, 수류탄 일부, 파출소 소장납치, 또 다른 파출소, 카빈 20정.
* 오후 4시45분 전남방적서 카빈 1백89정 탈취
* 오후 4시51분 전남연초제조창 무기고 탈취(수량미상).
* 오후 5시15분 상황악화로 도경상황실 폐쇄.
목포 주재 박흥서 기자, 부산 경유 보고
* 21일 오후 2시30분 광주서 시민 학생들이 전남 5아 1059 등 광주고속버스 6대와 승용차 2대에 분승, 목포 도착.
* 6시 현재 버스 1대 [계엄해제]등 외치며 시내 돌아다녀. 연도엔 3만여 명이 나와 박수로 환영. 밤엔 심각할 것 같다.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다.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아직 파괴는 없다.
목포에서 서울, 광주 시외전화 안된다. 서울에서 전화해 주기를 바란다(밤 9시에 전화해 달라).
오후 6시 여수주재 이만영 기자 연락
* 광주에서 학생 시민이 여수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 전 경찰 비상. 여수경찰서는 유치인 33명, 보호인 15명 등 48명을 순천교도소로 호송중. 여수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목포 주재 박기자 통화내용
* 20일 밤 9시 이후 KBS, MBC TV 중계가 중단(광주에서 중계해주는데 중계시설이 부서진 듯).
* 21일 오후 4시 목포 MBC에 광주학생을 실은 버스 1대가 도착, 안으로 들어갔다가 부수지 않고 그냥 나왔다.
* 오후 6시 광주 학생들 철수. 목포 학생(고교, 대학) 시내버스 7대, 시외버스 1대 탈취.
* 오후 6시15분 서울행 특급열차(8시15분 출발 예정)가 2시간 전에 미리 출발.
* 오후 7시20분 군용 헬기 1대 10분간 목포역 상공을 중심으로 정찰 비행 후 사라짐.
* 오후 8시 목포 학생들 시청 유리창 심하게 부숨.
* 오후 9시30분 흰머리띠 두르고 각목 든 사람들, 전남 5아 1060호(광천여객 소곡)에 [김대중 석방하라]는 플래카드 걸고 목포 시내 누비고 다닌다.
목포 박기자와 21일 자정 통화 내용
*21일 오후 9시 학생 1백여 명 목포 경찰서에 들어가 유리창 부수고 뒤뜰에 세워 둔 트럭(호송차) 1대 등 불태워.
* 오후 9시-10시 사이 영해, 대의 , 역전, 연동 파출소 기물 파손.
* 오후 9시20분-10시 사이 3차례에 걸쳐 목포 MBC 유리창, 기재 일부 파손.
* 오후 9시30분부터 MBC 정규방송 중단.
* KBS 초소와 현관 유리 깨짐. 목포 역전 부근 도로에 깨진 유리조각 널려.
* 오후 4시-5시쯤 일부 다방에서 데모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해 모금했다는 설.
* 밤 12시30분 현재 시내버스, 공단의 통근버스, 덤프 트럭, 용달차, 8t트럭 등 20여 대에 학생들이 나눠 타고 시위하고 있음(22일 아침 정각, 목포 박기자와 통화키로 했음. DDD는 안되고 106번 불러 통화 바람).
<22일>
목포 박기자와 통화내용
* 새벽 1시20분 무안동 코롬방다과점, 수퍼마케트 일원 식품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빵, 음료수를 실어가.
* 새벽 2시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
* 새벽 3시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불통, 시외·시내 버스 불통. 중·고 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시민호응 안해. 시내상가 모두 철시. 군대는 안보여. 학생들은 질서지켜. 마이크로 [자중하자].
오전 10시40분 서기자 광주 도경국장관사에서 경비전화로 송고
* 서기자 눈으로 확인한 학생, 시민 사망자 20명.
* 총격전(시가전)은 21일 오후 4시부터 시작.
* 21일 오후 7시-8시30분 사이에 도청, 도경에서 군철수, 조선대 쪽으로(1만여 명). 도청 도경은 시민이 접수, 일반인 접근 금지 시켜. 학생들은 [헌혈하자]고 전단 뿌려(22일 오전).
* 오전 10시50분 수만시민이 도청 앞에 모여 궐기대회. 총리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 수백명이 총 휴대. 시민들이 경찰 페퍼포그차, 장갑차들을 몰고 질주하고 다녀. 경찰 헬멧 등 장비도 학생들이 쓰고 다니고, 어제 시가전은 예상 이외로 심하지 않았다. 군이 철수하면서 경찰 무장해제, 경찰 간부들 권총도 빼앗아가. 그래서 경찰 불만이 심하다. 무장해제당한 경찰, 사복으로 바꿔입고 광주를 빠져나가.
22일 오전 현재 거리는 학생과 시민뿐. 곳곳에 핏자국, 불탄 자동차 잔해 등이 널려 있고, 22일 계엄사령관의 광주사태 발표는 시민들을 자극, 흥분시켰다.
중앙지, 광주지방지 없고 이곳 방송도 안돼 전주 KBS 방송을 듣고 있다. 학생들은 강경파(군이 우리를 쏘는데 우리만 당할 수 없다), 온건파(무기휴대 반대, 난폭한 행동반대)로 나뉘어 있음.
12시에 총리가 온다는 소문. 총리가 오면 학생·시민·군·경찰·총리협상. 협상이 잘되면 풀리고. 계엄사 발표 때문에 군이 들어오면 큰 충돌이 있을 것이다.
21일 도청, 도경 시민 인수 후 공공건물 파괴 전혀 없다. 기자가 사진 찍으면 박살. 도경국장집도 가정부 혼자. 이곳도 위험하여 피신하고 싶다. 다른 기자들은 빠져나갔다. 21일 오후 3시 이후 현지에서 전화하는 기자는 자신뿐. 신변위협 느끼고 있다.
오전 11시40분 내무부 보고
* 도청서 부지사, 기획관리실장, 내무국장이 학생대표들과 협상중. 도청은 학생들이 지키고 있다.
순천 상황
열차가 이리까지 밖에 못간다. 여수-서울간은 운행. 순천-목포간은 두절. 21일 밤 승주군 송강면 지서에 10여 명이 와 무기를 내놔라. 무기가 없자 유리창을 부수고 이불을 가져갔다.
오후 2시 여수 이기자
* 현재로는 조용. 민심은 안좋아. 중·고등학교 휴교령. 목포 관공서 모두 접수된 듯. 여수에서는 전화 안돼. 어제 광주에서 여수쪽으로 온다던 시위군중은 벌교까지만 왔다가 강진으로 돌아 강진 전경대 중대본부 무기고 접수, 무기 등 싣고 광주로 되돌아 가. 화순탄광에서도 화약 등 갖고 광주로 갔다는 소식.
오후 3시50분 목포 상황
* 목포역 옥상에 [광주 시민의 피를 보답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김일성 오판말라] 플래카드 걸려 있고. 대형 소방차 1대, 해군 지프 1대, 제일영동교회 선교용 버스1대를 타고 다닌다. 법원, 검찰에도 난입, 부숴(오늘 새벽). 목포서 버스 11대가 광주로 합세하러가 (오늘 아침).
* 오후 1시 오창근 목포대학장, 시내야당인사, 종교인, 이병대 시장 등이 모처에 모여 난폭해져가는 데모를 건전하고 평화적 시위로 설득키로 결의.
* 오후 3시 목포역 광장에 나와(시장은 제외) 군중들을 설득(4천여 명). 군중들이 박수쳐. [시내 대학생부], [고등학생부] 플래카드, 1천여 명이 이들을 앞세우고 평화적 시위, 연도에서 시민들 박수. 무기 든 사람들은 별도로 다녀, 이들은 호응안해 두갈래. 은행, 관공서 철시. 23개 중·고교가 무기 휴교령. 국민학교도 학교부근 학생들만 일부 등교했다가 곧 돌아가.
7시10분 광주 서기자
* 사망자 56. 데모군중이 시체 56구를 관에 넣어 도청 앞 광장에 놓고 7시부터 추도식. 시민, 학생사이에 강·온이 맞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것 같다.
통신 보도 내용
* 22일 오후 4시30분쯤 광주시내 국군통합병원 부근에서 데모군중틈에 끼여 있던 30대 여간첩 용의자 1명을 시민들이 붙잡아 대치중인 군인에게 인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민에 따르면 이 여인은 지난 19일 밤 데모때 [여기저기에 불을 질러야 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것을 수상히 여긴 데모학생들이 그녀의 행동을 계속 주시하던 중 이날 붙잡아 카메라 1대와 함께 군에 신병을 인계했다는 것.
10시25분 목포 박기자 전화
* 오후 4시30분 목포역 광장에 목포대학생 2백여 명 모여 평화적 시위를 위한 궐기대회를 갖고 3만여 명의 시민들에게 집으로 들어가도록 호소했다. 학생들은 또 무기를 휴대한 젊은이들에게 목포에는 계엄군이나 경찰관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데 여러분이 공포를 쏘고 다니면 시민들이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며 카빈이나 M1탄피 등을 회수했으나 일부는 계속 공포시위를 하고 있다.
* 오후 5시40분 목포청년회의소 회원들 30여 명도 [민주시민의 대행진] [현실을 슬퍼합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목포대학생들과 함께 무기회수 운동과 함께 평화적 도보시위를 했는데 연도의 3만여 시민들은 이들에겐 박수로 호응했으나 무기를 들고 자동차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외면했다.
* 목포→서울 기차나 버스통행이 안되자 목포해안에선 1인당 1만원씩 받고 소형 모터선으로 30명만 모이면 목포에서 군산까지 수송하고 있음(군산서 서울 가는 것은 차편이 있음).
* 오후 10시30분 자동차 시위자 등 4백여 명, 무기일부와 수류탄 회수 못했음.
밤 10시30분 서울시경에 보고된 내용
* 대학생들은 협상 받아들였으나 일부 시위군중들은 반대하는 입장(현지 도청의 모 부이사관의 말). 학생대표들, 도청에서 계엄 분소장과 이야기 중이다.
학생들은 현재 사태가 크게 벌어지자 겁도 나고 해서 뒤로 물러서는 상태. [이제 우리는 모르겠다]는 식이라는 것. 현재 총기는 약 3천5백 정 정도가 시민들 수중에 가 있는데 회수된 것은 2백-3백정뿐이고 나머지는 시위군중이 갖고 있는 듯, 지금도 시가지 곳곳에서는 간간이 총성이 들림.
* 도청광장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추도식하려 했는데 오후 10시30분쯤에는 1천여 명으로 줄어들었음. 시체는 도청 앞 광장에서 관에 넣어 늘어 놓고 있으며 과격한 말들이 나오고 있음.
* 관에는 죽은 사람의 사후사진이 붙어 있는데 연고자를 찾기 위함인 듯. 사망자 중에는 고교생들도 있는 듯, 수습대책위원회는 학생들과 협의에 진전이 없자 귀가하고 있음. 총리의 헬기가 상공으 지나쳐 가자 시민들은 [허수아비 총리하고는 상대 안한다] [오려면 책임자가 오라].
* 관 옆의 시민들과 총기를 가진 시민들은 아직도 과격. 오늘은 소강상태로 넘길 듯. 그러나 내일은 모른다.
<23일>
S 신문 취재팀 서울시경 연락내용
시위 군중들이 소지했던 무기회수 시작. 많은 학생 시가지에 나가 쓰레기 치워. 대부분의 시민 거리청소.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해 얘기 나눠. 총격에 놀란 시민 일부 보따리 싸 시외로 나가는 모습도. 일부 과격시민·학생들은 수습대책위의 수습방안에 불만을 품고 오전 10시 현재 도청 앞 광장 등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해 사태 낙관 못할 상태.
* 학생들은 21일 밤에 접수했던 도청과 도경청사를 23일 아침 도와 경찰에 내주었다. 도직원 일부도 출근했다. 과격파 시위군중들은 도청과 전신전화국을 불태우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학생들이 만류.
오전 8시30분 광주 서기장 시경중계로 서울 林 伯 기자집에 전화
* 서기자 확인한 사망자 명단
<도청 뒤뜰 43구> 이중 17명 이름 확인, 미확인 26명.
임규수 김호중 정민구 정학근 홍성기 나종기 정창용 조남진 조사천 이상자(여) 박금희(여) 김재환 박기현 임순춘 양주접 전종호
<전남대 22구> 김안복(36) 김정웅(39) 박기웅 이세호 박기형(16) 신정대 최승희(여 21) 김재수 김호중 정민규(23) 최영호
오전 10시40분 광주 서기자 일반 전화
* 현재 학생들과 시민대표, 도청 간부들 협상 중. 어제부터 수습나섰으나 뚜렷한 결론 못내려. 수습전망 흐려.
* 이 전화로는 더 이상 기사 부를 수 없다.
오전 11시 동아일보팀 치안본부 전화
* 수습대책위 15명→10명으로 줄었다.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 등 20명 추가. 30명으로 다시 구성. 여고, 남고생 등 3백여 명이 스크럼짜고 시위. 구호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언론 각성하라]
부녀자들 거리에 솥 걸고 시위자에 밥. 총기는 절반가량 회수.
오전 11시 이현구 차장 통화
* 11시 현재 서기자 등 지사에 나와 있고, 건강하다, 별일 없다는 말. 23일 오전 중에 조금 회복되었고 학생들은 무기회수 시작, 강도 등 범죄까지 뒤집어쓰지 말자고. 그러나 회수된 무기를 군에 돌려보내자, 학생들에게만 나눠주자는 양론.
도청 간부 등 직원 출근해 일 보고 학생들은 거리 청소하고 있다. 시민들 도청광장에 모여 대표들이 타협하는 동안 끼리끼리 강·온 양론.
또 시민들은 미국무성 성명(미국이 진압군 차출하는 것 양해했다는 내용)의 의미가 뭐냐고 궁금해해. 시민대표들 사망자 장례절차 논의중.
* 오전 5시 학생, 시민들이 나와서 거의 청소를 하고 난장판이었던 금남로를 말끔히 치웠다. 그러나 불탄자동차의 잔해 등은 그대로 남아있다. 학생들은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등으로 나뉘어 수습중인데, ▲ 장례반은 시체 43구가 안치돼 있는 도청 후정에 사망자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 보내고 있고, 사망자 중 신원 미확인자를 찾기 위해 가족들이 우왕좌왕 ▲ 총기회수반은 12시 현재 8백여 정 총기를 회수 ▲ 차량 통제반은 시위군중들이 몰고 다니는 버스, 장갑차, 페퍼포그차 등에 대해 함부로 못 몰고 다니도록 단속하고 있어 무질서한 차량통행은 통제됐다.
* 오전 5시부터 도청 앞 광장에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 12시 현재 약 7만-8만명이 운집해서 도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의 회의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대책위원회들은 오전 10시부터 도지사실에서 회의중에 있고 위원은 30명(지역 유지들 중심)으로 늘렸고 독립투사 최한영씨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수습위원들은 22일 계엄사와 합의한 7개항의 내용을 문안으로 작성해서 마이크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를 공지하기로 하고, 학생들에 대해서도 설득을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내무국장실 옆방에서 학생대표들은 회의를 열고 있으며, 대표들 중 온건파는 수습대책위의 의견을 따르자는데, 한편 강경파는 계엄령 철폐 등 기본적 문제가 관철될 때까지는 끝까지 투쟁하자고 주장해, 의견 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사태 수습은 난항.
그러나 강온을 막론하고 광주시내 질서 회복을 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어 대학생 7백-8백명(여대생 50여명 포함)이 23일 12시 현재 하얀 헝겊에 [대학생]이란 완장을 두르고 질서 회복에 나서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은 대책위의 합의를 받아들여서 사태를 수습하자는 것이 아니냐?}는 우리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오산이다. 군부대에서 연행학생 79명을 석방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무기를 회수하여 반환할 것을 대책위를 통해서 요구했지만 석방한다고 해도 다시 잡아갈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우리는 계속 투쟁할 것이다}고 했다.
학생들은 총기를 회수하여 이를 반납치 않고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총기를 학생들만 갖고 학생들이 치안을 맡아 자체 경계를 맡겠다는 움직임이 크다.
22일 스케치
* 22일 새벽 학생들이 계엄군 소속 김○○ 상사를 광주시 지원동 다리부근에서 붙잡아 군작전을 들은 후, 다른 곳에서 붙잡은 전경대원 2명과 함께 계엄사에 넘겼다. 3층 이상 건물들은 오후 8시만 되면 모두 소등했고, 일부 불량배들에 의해 변두리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22일 도청광장에 모였던 군중들은 오후 8시쯤, 각자 귀가했고, 4백-5백명 학생들, 청소년들이 남아 시가지를 돌면서 치안을 맡았다. 유가족들은 시체 옆에서 밤을 새웠다.
* 22일 오후 2시쯤 광주전화국에 무장청년 1명이 들어와 전화국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학생들이 잇달아 들어와 이를 저지, 학생들이 경비를 섰다. 사태가 누그러지자 학생들은 국내기자들에 대해 태도가 나아져 기자들에게 학생대표들이 [증표]를 주어 도청에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전히 도청출입은 통제중.
23일 스케치
학생들은 경찰이 버리고 간 무전기를 듣기도 하며 도청 광장에는 부서진 문짝을 세워놓고 사망자 사진을 붙여, 유가족들이 구별하도록 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박충훈 총리서리의 발언에 분개, {광주시민이 어째서 폭포냐}고 흥분하고 있으며 취재를 하는 외신기자들에게 박수를 치고 학생들이 취재 안내까지 해주고 있는가 하면 {국내신문들은 뭐 하느냐}고 국내언론에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
* 23일 12시 도청광장 뒤쪽에는 군경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헬멧, 경찰봉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또 주민들은 쌀을 살수가 없어서 이웃집 쌀을 꾸어서 먹고 있으며, 중심 지역 시민들은 대부분이 변두리로 피난하고 있다.
* 23일 학생과 군인이 대치중인 곳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가는 길목. 이 지점은 화정동 고개로 시민·학생들은 판문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탱크 2대로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으며, 5백m쯤 떨어진 지점에서는 무장학생 30여 명이 대치 중에 있다. ▲ 광주시 지원동 길목 ▲ 여수, 순천 방면으로 빠지는 문화동 길목 ▲ 서울 방향 고속도로 진입로 ▲ 목표방향인 대동고교 앞
* 23일 오전 11시30분쯤 전남대 뒷산에서 교련복 차림의 학생 1명이 절반쯤 매장된 시체로 발견됨. 발견한 시민이 학생들에게 연락.
이 시체를 도청 광장에 갖다 놓고 흥분상태에 있다.
* 사망자 수는 오후 3시 현재 우리기자 확인 1백21명에다가 추후 서울서 파견된 조남준 기자가 통합병원에서 4명의 사망자를 확인해 총 1백25명이 확인됨.
23일 목포 상황
* 낮 12시30분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대학생연합회(대학 1개, 전문대 3개 중 2개 대학참여)와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 주최로 목포시민민주화 궐기대회를 열어 시민·학생 3만여 명이 모여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 등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1시간 동안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시가행진에 들어갔다가 오후 3시 다시 목포역 광장에 돌아와 성토중임.
22일 밤 목포 스케치
22일 밤10시쯤 학생과 시민이 합세하여 무장데모대가 탄 차량(버스 7대)에 올라 카빈 등 무기 2백80여 정을 회수했고, 또 광주여객 1대를 이용, 목포에 왔던 학생 30여 명에게서 카빈 17정을 회수했다. 한편 광주에서 왔던 학생들은 이병대 목포시장에게 {광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해 이 시장의 안내를 받아 학생 18명은 보내졌고, 나머지 7명은 영장을 발부받고 군에 입대를 않았던 학생으로 경찰에 보호 중에 있음.
* 23일 밤9시 목포역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갖고 시내 남녀 중·고·대학생·시민 5만여 명 횃불시위를 벌였다.
여고생 2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대열 중간에 서고 남녀 학생과 시민들이 좌우로 선 횃불대열은 시내 20km를 보행시위하면서 구호를 외치며 10시40분 역전광장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광장에 앉아 계속 연좌데모 중이다.
<24일>
오전 10시50분 광주 조기자 통화
* 학생대표들이 시민대표에게 지금까지 회수한 총기 3천여 정을 인계하고 시민대표는 이를 군에 전달키로 합의했는데, 학생 대표간에 이견이 있어 아직 인계 못하고 있다.
한편 군당국은 24일 낮 12시까지 무기를 회수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가져 오라, 그러면 과거는 불문에 부치겠다고 KBS 방송 통해 계엄분소장이 권고하고 있다(학생, 시민이 갖고 있는 무기는 4천여 정).
헬기로 전단을 뿌려(오늘 새벽). 이미 회수된 무기는 도청에 보관, 도청 지키고 있는 학생과격파들은 무기를 주면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느냐며 반발.
현재 광주시내는 2개의 대표위원회가 있어 시민들로 구성된 5·18수습광주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영), 학생수습위원회(위원장 김창길·전남대 농경과 3년). 시민대채위원회는 30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날마다 위원이 바귀고 영향력도 크지 않는 이 위원들은 23일 오후 3시에 대표 8명을 계엄분소에 보내 7개항 합의하고 7시에 돌아왔다.
이 타협에 따라 연행된 시민·학생중 34명을 인수해왔다. 이로써 군이 그동안 연행한 학생·시민은 9백97명중 40여 명을 남기고 모두 풀어줬다고 계엄당국이 말하고 있음.
학생위원회는 강·온으로 2원화. 온건파는 무기회수반납, 강경파는 무기반납하면 반항할 수 없다고. 군과 대치하고 도청을 지키는 측이 강경파, 온건파는 거리청소, 질서회복 호소.
* 23일 밤 2번에 걸쳐 교전. 밤9시쯤 지원동 화순가는 도로에서 교전 중 학생 5-6명 사망으로 알려져. 밤10시 국군통합병원입구 대치지역에서 교전 피해 양측 상황 몰라.
학생 온건파가 학생대책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우선 당국에서 광주시민학생들을 폭도로 몰아 붙이고 있고, 이 같은 원인은 학생·시민들이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기를 회수·군당국에 인계, 오명을 씻고 질서를 일단 회복시키자, 그 다음에 처음에 주장했던 정치적인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자고. 이에 과격파는 듣지 않음.
학생들의 분포는 과격이 더 많다. 24일 현재 일부 고교생, 과격시민들이 회수 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도청에 찾아와 총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이를 학생들은 간신히 제지하고 있음.
* 24일 오전 11시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는데 의견들이 서로 엇갈려 열지 못하고 있다. 23일까지 도청 앞 대형 스피커를 통해 상황을 알려주는 방송도 24일에는 중단됐다.
학생·시민들도 거리에서 수습한 시체 45구를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 중. 이 빈소에는 시민들이 보내온 조화도 쌓여 있고 도청 국기 게양대에는 조기가 게양돼 있다. 학생수습대책위에서는 치안유지반원들을 동원, 차를 타고 다니면서 총기소지자들에게 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반발이 심하다
시내 치안은 학생들이 맡고 있는데 어젯밤 학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 통행증 소지자에게만 통과허용, 차량들도 3백여 대에 일련번호를 붙여 번호부착차량만 운행토록 허가, 기타는 압류해서 도청 앞에 세워두었음.
도청·시청 등 관공서에는 총을 든 학생이 경비를 서서 학생들이 발급한 [秘]자 도장이 찍힌 출입증소지만 통과시키고 있음. 학생들은 청년회의소, 라이온서 클럽, 로터리클럽, 여성단체 등 민간단체들과 예비군 요원이 나와 함께 치안유지에 나서자고 권고중이다.
* 경찰관들에게는 시민·학생들이 {경찰에 반감을 갖고 있지 않으니 소속관서에 출근해서 근무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 23일 오후 6시부터 KBS 광주 탤리비젼이 방영을 재개했음.
* 22일 밤 박순휴 피부비뇨기과 의원에 약탈범이 들어가 3백여 만원 어치의 금품을 털어 갔고, 시내 변두리에서 약탈행위가 자행되고 있음. 시내 식료품 가게와 양곡상은 문을 닫고 있음. 식료품 시내 반입되지 않아 식량부족현상을 빚고 있다.
* 23일 밤 8시30분쯤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번져 모두가 피신하는 등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 23일 오후 4시30분 지원동 무등중학교에 군이 집결,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도청에 나와있던 간부들이 뒷담을 넘어 피신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
* 24일 낮 광주시내 표정은 표면상 평온한 가운데 군데군데 시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고, 일부 상가는 문을 열고 영업 중. 거리는 23일부터 시작된 청소작업으로 많이 깨끗해졌다. 노동청 사무소 앞에는 지난 20일 밤에 불에 탄 차량 7대가 아직 뒤집힌 채 있다. 시체가 안치된 상무관에는 유족들이 찾아와 울부짖고 있고, 학생 일부가 내일(25일) 시민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타협이 안되고 있는 형편. 도당국은 장례 방침이 결정되면 시설 등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아직 미결.
* 23일 오후 시민대표가 계엄분소장을 찾아갔을 때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거론했는데, 계엄분소장은 {사망자중에는 군이 발포로 죽지 않은 사람도 있다. 군인이 사용하는 총은 경찰과 다르니까 검시과정을 거쳐 군의 총에 맞은 시체에 대해서만 보상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
* 24일 오전 11시20분쯤 시민대표인 목사, 변호사, 신부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들고 군과 대치중인 40여 명에게 무릎을 꿇고 빌면서 총기를 버리도록 설득, 이들 모두를 도청을 데리고 왔는데 아직도 총을 버리지 않고 있다.
24일 오전 경향신문 취재팀 송고
소요사태 7일째를 맞은 광주시는 24일 3일만에 처음으로 총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 조용한 하룻밤을 지내고, 격노와 흥분에 휩싸였던 열기가 크게 누그러진 가운데 시민들은 수습의 길을 찾고 있다.
이날 오전에는 소요시민의 본부격인 도청은 무장청년들이 출입자를 엄격히 통제하는 가운데 전날에 이어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리고 무기, 차량 등의 회수와 반납도 학생과 시민에 의해 계속됐다.
이날 오후 전남북계엄분소장은 광주 지역의 시민들은 정오까지 국군통합병원에 무기와 탄약을 자진반납하라고 KBS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도청 앞 광장에는 무장청년들이 교통 정리와 경비를 맡고 있고 시민들이 간밤의 소식을 알기 위해 도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나 군중 수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
23일 오후 9시 이후부터 24일 아침까지 시내에서는 총성이 거의 들리지 않았으며 군과 대치중에 지원동(화순과의 통로)일대에서는 산발적으로 총성이 들렸고, 부상자를 내기도 했다. 이날 오전 6시30분쯤에는 신영미양(21. 용산동 280의 1)이 집 앞 도로에서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고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으며, 20대 청년 1명도 두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대 병원에 옮겼으나 중태다.
한편 24일 오후 5시 1만여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갖고 2시간만에 모두 해산했다. 이날 시민들 사잉는 군부대가 곧 시내로 진주하는 소문이 퍼져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기도 했다.
광주지역에는 지난 21일부터 신문·TV·라디오 등 보도기능이 끊겨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23일 오후 6시부터 KBS TV가 복구돼 광주사태를 집중보도했으나 시민들은 보도내용이 편파적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KBS TV와 라디오를 제외한 모든 보도기능이 4일째 마비되자 정부 및 계엄당국과 당국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하는 전단과, [투사회보]등 시위주동자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유인물만이 대향으로 나돌아 유일한 보도매체 구실을 맡고 있다.
사태 이후 이곳에는 AP통신, ABC, CBS, NHK 등 각국의 보도진이 들어와 학생들의 안내를 받아가며 취재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내 보도진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 사진기자들이 카메라를 탈취당하고 TV 녹화기를 빼앗기기도 했으며 길바닥에 끌려 다녀 부상당하기도 했다.
광주 시청은 23일부터 기능을 거의 회복, 약 4백 명 직원이 출근하여 각 동에 나가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민심순화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민원처리 업무는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도경과 광주경찰서는 24일까지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고 굳게 잠겨져 있고, 광주경찰서 정문에는 [본 광주 경찰서는 우리의 재산, 기물파괴는 세금의 과중, 스스로 보호합시다, 학생일동]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고, 서부경찰서에는 총을 든 청년 3명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한편 22일 밤 시내 변두리 지역에 강도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23일 밤에는 성사맨션, 동인동 아파트 단지 등에서는 자체방범대를 편성, 주민들이 시간별로 나눠 보초를 서기도 했으며, 일부 시민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 피난을 가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내 상가들은 문을 열어 시가의 모습은 다소의 생기를 되찾았고 광주에서 가장 큰 양동시장에는 23일 낮부터 야채류, 과일류를 리어카에 싣고 온 행상들이 수십 명 나타나 시장을 메웠다. 한편 모든 방면의 외부 교통이 완전두절, 농산물 등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끊여 시민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고, 특히 육류·생선류의 공급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한편 도청에 본부를 정한 주동시민들은 23일 탈취차량에 일련번호를 적어 차량통제를 시작. 시내를 횡행하는 무장차량의 숫자는 23일 오후부터 크게 줄어들었고 무장청년들은 도청 주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시민들은 연일 길목마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모여 사태의 추이와 수습책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으며, 무기탈취 이후 시위의 주동이던 대학생들이 전면에서 사라지고 대신 공원, 종업원, 무직 청소년 등이 총기를 휴대하고 거리를 누비게 되자 불안한 표정은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편 목사, 신부 등 성직자와 유지급 인사들은 24일 오전 6-7명식 조를 편성, 무장시위군중과 군이 대치하고 있는 지원동 두암동 농성동 등 외곽지역으로 설득작업에 나섰다. 이같은 조치는 전남·북 계엄분소장이 이날 정오까지 무기를 자진 반납하라는 시한부 담회를 발표함에 따라 계엄당국의 수습노력에 협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23일 오전부터 도청에서 무기를 자진반납받는 학생·시민 수습반은 무기반납장소를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정한데 대해 이는 적합치 않은 장소라고 주장. 자진반납받은 무기를 군에 인계할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수습반은 회수된 무기와 탄약의 정확한 숫자를 외부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회수된 무기 중에는 중기관총 2정을 비롯, M16 소총, M1 소총, 카빈소총, 수류탄, TNT, 통신기재, 페퍼포그 발사기 등이 포함돼 있다.
광주와 인접한 송정읍에서 20일 이후부터 22일 사이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 시위군중들이 탈취하여 몰고가던 차량이 전복 등 사고를 일으켜 2명이 숨졌다.
24일 광산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전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동곡교에서 시위군중이 몰고 가던 군용 진압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용수로에 전복 추락, 신원 미상의 청년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것이다. 또 21일 오후 11시쯤 송정읍 영광동에서 시위군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불을 질러 밀고 가던 대한통운 트럭이 노인 1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송정읍 사태는 23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부대가 진주 진압됐으며, 광산경찰서는 시위군중들로부터 28정의 무기를 회수했다.
전남의사협회(회장 김제권씨)는 {현재 광주시내 4개 종합 병원에서는 부상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밝히고 산소와 수술에 필요한 의약품이 부족하다고 밝히고 대한의학협회와 적십자 등에서 구호반을 편성, 광주에 내려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24일 오전 10시 현재 연행됐던 9백27명 가운데 8백94명이 풀려 나고 현재 33명이 풀려 나지 않았다.
오후 1시 서기자와 통화
* 계엄사 무기 반납 시한을 24일 낮 12시에서 오후 6시로 연장. 시체 45구가 안치돼 있는 상무관에는 유족이 흐느끼는 속에 일반 조객이 2백여m나 줄지어 기다리며 분향. 학생들, 전남일보 빌딩과 도청에 무기 회수반 설치, 군당국이 밝힌 총기 4천3백여 정 중 3천여 정 회수(24일 오후 1시 현재). M1, 카빈 등은 많이 회수되고 있으나, 권총 40여 정과 TNT 1백 개, 폭약 4상자는 거의 회수되지 않고 있다. 시가는 평온한 속에 시민들 도청 주변에 모여 학생들이 뿌리는 전단을 읽거나 마이크에 귀기울여 한 시민 {이젠 무엇보다도 질서회복이 문제다. 빨리 총기를 회수해서 정상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다른 한 시민, {정부에서 이번 사태 유발했다.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떻게 수습이 되겠느냐}는 회의론도.
* 23일에 이어 24일에도 시민들은 빗자루 들고 거리 청소. 시청 청소부들도 쓰레기 더미 치우고. 파손되거나 불탄 차량은 차주나 회사측에서 끌어가 거리는 한층 깨끗해졌다. 23일부터 기능을 회복한 시청에는 대부분의 직원이 나와 근무.
* 시는 이날 시비 3천 만원으로 영세민 6천 가구에 생활보조비 5천 원씩을 지급. 시는 또 종합 상황실 설치, 사망자, 행방불명자, 부상자를 동 단위로 파악 중.
* 각 병원에는 의료품이 부족, 산소는 24일 중으로 거의 떨어졌고 페니실린, 마이신 등 항생제, 포도당, 식염수 등도 태부족 상태.
* 낮 12시가 지나면서 사태 수습은 급진전,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 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던 헬멧 방석복 등 군경 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 오인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하여 반납하고 있다.
* 오전 11시20분쯤에는 시민 대책위원인 장세균 목사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 중이던 38명과 지원동에서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 1시간만에 무장해제 시키는 데 성공.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의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 대치하고 있다. 특히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 개와 버스·트럭·지프 등으로 바리케이드 치고 20여 무장대원이 지키고 있다. 4백여 시민들이 현장에 운집해 있으며 대원들은 신분 확인 후,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통과시키고 있다.
* 주택가에서는 시위대원들이 찾아가 {밥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며 학생들이 문을 두드려 쌀을 얻어 가는 모습도 보였다. 대책위는 도청 2층에 1천명 분을 공급할 수 있는 취사시설을 갖추고 학생등에게 식사를 제공.
* 학생 수습위는 오후 1시쯤 7개 요구사항을 초안, 민간 수습위와 협의하고 있는데 민간수습위원 대부분이 더 강경한 내용으로 하자고 제의, 난항을 겪기도.
* 7개 요구사항은, ① 이번 사태의 수습 전에는 계엄군의 투입을 금지한다 ② 이번 사태의 원인은 계엄군측의 시민 살상으로 인한 것임으로 인정하라 ③ 연행자 전원 석방 ④ 부상자, 사망자의 치료 및 보상 확약 ⑤ 차후 보복않겠다고 확약하라(사북 같은 보복이 있으면 안된다) ⑥ 복구가 가능한 시내 방송을 즉시 재개하고 사실 보도하라 ⑦ 상기사항의 보장아래 무장해제.
이에 대해 계엄분소장은 {개인적으로는 다소 과격했던 진압에 사과하나 공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위치가 아니다}, {보복은 절대 않겠다는 것을 보장한다}고 밝히고 있다고.
국방부 출입 조남준 기자 광주서 송고
* 5·18 수습대책위원회는 24일 오후 2시, 23일 계엄분소를 방문, 협의한 결과를 보고.
<내용> 문-계엄군의 시가진입을 일체 금지하라.
답-시민측이 먼저 발포하지 않는 한 시가진입이나 사전발포를 하지 않겠다. 또한 지금 시내엔 1명의 계엄군도 없다.
문-계엄군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을 인정하라
답-현장설명을 듣고 보니 과잉진압임을 시인한다.
문-연행자를 석방하라
답-연행자 9백27명 중 79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수습대책위의 요구에 따라 추가로 5월23일 오후 34명도 석방했다.
문-사망, 부상자의 치료와 보상은?
답-보상은 물론 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철저한 치료를 하고 있다(현정부가 발표함).
문-방송재개 및 사실보도를 촉구한다.
답-지역방송이 회복되는 대로 속히 사실 보도하도록 힘쓰겠다.
문-자극적인 어휘 사용을 금지하라(예 : 폭도).
답-순수한 시민을 폭도라 함이 아니요, 사태를 악용한 자를 말한다. 상부에 부드러운 어휘를 사용하도록 건의했다.
문-시외 통행로를 열라.
답-민간인은 출입할 수 있다.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면 보호해준다. 또 자동차나 무기휴대자는 접근할 수 없다.
문-사태수습 후 처벌을 금하라.
답-사태수습 후 절대 보복하지 않겠다(군지휘관과 대책위원회의 명예를 걸고 약속함).
계엄분소 부사령관이 24일 오후 2시 대책회의에 전화를 걸어와 단독으로 시내로 들어와 시민들에게 위의 약속한 사항을 재천명할 용의가 있다고 대책위측은 밝히고 부사령관이 자신의 신변보호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다고 말했다. 수습위는 부사령관의 요청을 시민과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이들의 승낙을 받는대로 시민대표를 계엄분소에 보내 부사령관을 데려올 예정.
24일 오후 5시 광주에서 서기자가 여수주재 李기자에게 행정전화로 송고한 내용을 여수주재 李기자가 다시 본사에 중계
24일 오전부터 도청 부지사실에서 학생대표와 시민대표들이 가진 수습대책위원회는 오후 5시까지 서로 의견 접근을 보지 못한 채 헤어졌다. 대책위원들은 일요일 다시 만나기로 했으나 계속 강·온이 맞서 전망이 어둡다. 화요일 오후 5시에는 계엄군이 광주시 동운동 공설운동장 앞까지 진입해 있다는 소문 때문에 일부 강경파 학생들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반환된 총기를 다시 나눠 달라고 요구하기도.
24일 오후 3시에는 23일에 이어 3만-4만의 시민이 도청광장에 모여 궐기대회를 갖고, [5·18시위는 폭도의 소행이 아닌 민중 봉기에 의해 일어났다]는 취지의 궐기사를 낭독. 이어 시민들은 오후 4시쯤 헤어졌다.
오후 5시 현재 많은 시민들은 도청 뒤뜰과 도청 앞 상무관에 마련되 시체 안치소에 몰려가 분향. 가톨릭대 광주교구회에서는 {우리의 모든 원한과 감정을 풀어버리고 민주적인 사랑과 단합으로 더욱 굳세게 정진하자}는 성명서를 냈다.
시내 곳곳에서는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기도. 학생수습위는 24일 오후 경찰 책임자와 연락, 경찰은 치안에 직접 나온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궐기대회의 열기 때문에 경찰의 시내 진출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광주 서기자 철수한다. 당분간 연락 어렵다).
오후 7시50분 여수 통해 송고된 광주상황
* 광주시내에는 오후 5시부터 궐기대회 마치고 도청 앞 광장과 시내 요소요소에 삼삼오오 서 있던 군중, 비가 오자 흩어졌다.
* 오후 8시부터 시내는 행인의 왕래가 뜸해지고 인적이 끊겨. 그러나 도청 옆 쪽 상무관에는 1백여 유족들이 지키고, 오후 5시부터 계엄군이 다시 들어온다는 루머 때문에 외곽지대 경비에 나서고 있다. 5시에 결렬됐던 수습대책위 시민·학생대표들은 6시부터 회의 다시 소집, 계속했다. 대책위는 ① 5·18사태의 근본적인 이념을 의거라고 정해야 한다. ②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예비군과 경찰이 나와 질서를 잡도록 조치해야 한다 ③ 사상자 전원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데 의견 같이 하고 지난 22일에 결의된 7개항과 함께 다시 계엄사측과 협의키로.
<26일>
26일 오전 11시 광주 기자 송고
* 24일 오전 11시20분쯤 수습대책위원들의 설득으로 광주 공업단지 입구 등 6개 지역에 대치하고 있던 데모 대원 등이 모두 철수, 도청으로 돌아왔으나 26일 새벽 4시부터 군인들이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던 시내 쪽으로 다시 진입, 압축해 들어옴으로써 강경하게 됐다. 이 때문에 수습의 전망이 보이던 광주사태는 더욱 혼란에 빠져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어감.
* 26일 새벽 4시쯤에는 광주시 동구 학운동 734의 1 최득철씨(52) 집에 10대 괴한이 침입, 최씨와 최씨의 둘째 부인 김소례씨, 아들 최현(7)등 3명을 총으로 살해. 주민들은 이들 일가족이 원한에 의해 죽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일요일인 25일 오전 9시쯤 도청 안에서, 소변을 보고 나오던 자칭 데모대 특공대장 장계범씨(24. 광주시 황금동 186)가 20대 괴한에게 독침으로 등을 찔려 쓰러졌고, 장씨와 같은 특공대원인 정상기(23)가 장씨의 상처난 부위를 입으로 빨아내다가 역시 중독, 전남대 부속병원에 옮겨 치료받음. 그러나 오후에는 둘 다 행방불명.
* 25일 오전 8시부터 시민들은 도청광장에 모여들기 시작. 오후 4시에는 5만여 명의 인파가 모여 궐기대회. 시민들은 애국가를 부른 후 사망자에 대한 묵념과 상황보고에 이어 전국학생 종교인 유가족 정부 군당국에 보내는 글을 낭독. 5시부터는 가두시위에 들어감. 이들은 [계엄 철폐하라]는 등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도청 앞을 출발, 금남로 신역, 광주고속버스 터미널, MBC 등을 돌아 도청 앞 광장에 집결. 시민등은 6시30분쯤 각자 흩어지기 시작. 7시쯤에는 거리 한산.
* 학생·시민 수습대책위원회는 회의를 열었으나 계속 강온이 맞서 진전사항 없음. 학생들은 도청 안에 있는 신원 불확실자를 가려 내기 위해 작업을 폈으나 별 효과 없음.
* 시내 곳곳에는 계속 수습대책위 등의 이름으로 각종 안내문이 나붙기 시작. 안내문은 ① 시민군을 믿고 적극협조해 주십시오 ② 질서 회복에 힘써달라 ③ 평상 생활로 복귀하자. 상가, 수퍼마켓 시장개시, 운수기관 차량운행 재개, 직장 정상 근무 및 학교 등교, 생필품 확보 및 안전수송 등을 호소했으나, 26일 현재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일요일인 25일 광주 각 교회에는 예배를 보는 자리서 부상자 돕기 1천만 원 모급운동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모금에 들어가 이날 하룻동안 1백만원 모금. 광주시내 목사들은 24일 저녁 초교파적으로 모금결의.
* 25일 오후 1시쯤에는 군통합병원으로부터 그 동안 모자랐던 환자 치료용 산소 1백여 통을 받아 전남대 병원 70통, 기독병원 30통 전달. 이 산소통은 전남의사회가 중앙에 의뢰한 것임. 이 날은 총을 든 청년들의 모습도 거의 눈에 안 띄었고, 광주 경찰서와 시내 일부 파출소는 경찰관들이 출근. 시민들과 함께 부서진 책상과 서류 집기 등을 챙기는 모습.
* 계엄분소는 25일 오후부터 26일까지 군검경 합동으로 기자 입회 아래 시체 검안 작업 펴기도.
오전 11시35분 趙기자 송고
* 25일 밤 9시 대통령 특별담화, 10시-10시25분 1백여 발 총성. 그룹마다 총기지급, 상황급박하자 1인에 1정 씩. 소문이 26일 오전 4시 화정동 통합 병원쯤에 있던 계엄군이 탱크 5대를 앞세우고 시내로 1km전진. 백운동 쪽에서도 대동고교까지 탱크 3대 전진. 고속도로 쪽도 무등경기장까지 1km 진격. 이 사실은 KBS서 방송. [시민들 동요 말라]라는 이유는 서울·목포간 도로 개통 위해.
수습대책위서 항의, 군이 들어온다는 소식따라 도청 경비 삼엄. 모두 총들고 일일이 확인. 오전 9시까지 궐기대회. 2만명, [계엄군이 약속 어겼다]고 성토.
* 시 외곽 양계장 사료 떨어져 닭이 죽어 나오고 소, 말, 개 줄 먹이가 거의 곤란. 계엄군 전진으로 대통령 담화 나가는데도 무시하는 듯.
목포 상황
* 목포시 민주화투쟁위원회는 26일 오전 10시 목포역 대합실에 민주화를 위해 꽃다운 나이에 숨겨간 광주학생·시민들의 영혼을 달래는 분향소를 설치했다. 시내고교 및 대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은 26일 오전 11시부터 역전광장에 모여 연좌시위를 하면서 줄지어 분향하고 있다.
* 25일 목포기독교연합회는 역전 광장에서 4천여 신도가 모인 가운데 구속 기도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광주시민 1천여 명에 대한 목포 지역교회의 신앙고백선언문을 낭독했다.
선언문내용은 [광주사건은 천인공노할 시민학살이다. 자유시민을 능욕하고 학살한 정부당국자와 시민 살해에 가담한 자를 지체없이 색출하여 납득할 수 있도록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
26일 상황 송고된 내용 종합
* 독침사건, 기자들이 의사에게 문의, [독약 침투 사실 밝혀지지 않았다]고. 학생들이 독침맞은 사람 신병확보, 경위조사 중(사태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독침을 맞았다는 장계범씨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종적 감춰) 조작 가능성 많다는 소문.
* 26일 오후 3시 유족대표와 부지사가 도청부지사실서 [냄새나므로 빨리 장례치러야]말하고 이에 대해 부지사는 [힘있는 대로 돕겠다] [장지는 광주시 망월동 광주형무소 뒤 시립공원묘지, 시민장으로 하겠다] 유족들도 시민장 요구. 장례는 28일 예정. 22일 구성된 수습위가 26일 오후까지 자체수습에 별진전 못보고 있음. 이는 강온 대립 때문.
강경파는 [근본문제 해결 때까지 투쟁]이며 온건파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렸는데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 시위하면서 학생들의 주장 관철하자]고 주장.
이 같이 엇갈리는 가운데 광주사태는 수습이 어렵고 현재 상태로 1주일 이상 계속될 전망.
학생들은 26일 오전 5시 계엄군이 시내에 포진하자(화경동서 동성동까지 2km 진격 포위망 압축) 특공대를 조직하는 등 분위기 다시 경직.
강경파는 [계엄군이 다시 침입하면 도청에 있는 1천여 발의 수류탄과 광주의 절반이 쑥밭이 될 수 있는 TNT를 터뜨리겠다]며 위협.
대책위원들이 CAC에 찾아가 계엄군의 시내 진출을 항의하자 CAC는 대책위원들에게 외곽도로를 트기 위해 진출했을 뿐이며 광주시내 재 침투를 기도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퇴각했다.
KBS 보도가 말썽돼 학생들이 기사를 확인. 국내 기자들의 도청출입이 금지됐고 인질설이 나돈다.
대학생들은 25일부터 일선에 나서 26일 오전 9시에는 2만여 명이 참가, 궐기대회 갖고 훌라송 곡에 맞추어 [계엄 철폐] 등 외치며 가두시위.
또 고교생들의 시위참가 촉구하는 벽보 나붙기도. 대책위는 유명무실한 존재. 시민들도 사태추이 몰라 궁금해 항상 5만-10만명이 거리에 나와 있다. 학생들의 도청 경비 강화됐다. 수습위원들이 전원 대체되고 목사, 신부, 변호사들이 보강했다.
* 민주화운동으로 전환되고 있다(학생 요구 관철될 때까지 즉 민주쟁취 때까지 투쟁 계속하겠다는 것). 유인물, 가두방송, 대자보 시위 등 통해 민주주의 의식화 운동 벌이고 있다. 학생들은 민심을 어떻게 하면 [운동적 방향]으로 모으느냐에 주안점.
학생들은 생필품 확보를 위해서만 군과 타협할 수 있다는 등 지엽적인 문제만 협상하고 있다. {최대통령 담화 믿을 수 없다} 25일부터 시외곽의 시민군을 뽑아 도청으로 집결시켰다.
* 약탈과 살인 등으로 인한 시민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학생이 주동이 돼 문화 운동 벌이고 있다.
* 유가족에 대해 원호 대상자 취급요구.
* 시내 분위기는 계엄군이 들어와 오전에는 무겁고 경직돼 있었으나 군이 퇴진한 후에는 약간 안정 회복.
* 점차 강경파가 우세해가는 현상.
* 학생들간에는 {5일만 지나면 정권이 바뀌니까 계속 투쟁해야 한다}는 말 떠돌아.
* 천주교에서 19일부터 조위금 모금 시작, 1천만 원 모금 돼.
* 독침사건 보도와 [폭도운운] 때문에 KBS, 한국일보기자 도청 출입 금지 됐다.
여수주재 李기자 송고 내용
* 오후 6시 현재 광주시민 3만여 명이 자전거를 타고 행진을 하면서 지난 25일 내걸었던 7개항의 요구조건을 요구, 도청 앞 광장에서 시위.
7개항 ① 물러가라 ② 비상계엄 해제 ③ 민주정치발전 ④ 정치일정 단축 ⑤ 북괴 남침 야욕 분쇄 ⑥김대중과 민주인사 석방 ⑦ 5·18 광주시민봉기 희생자에 보상, 정치보복 않겠다는 것 법으로 보장.
* 합동장례식 29일에 하겠다.
* 장형태 지사 사의 표명.
<27일>
K 신문 송고 내용
* 계엄군 (편집자 주 : 이 병력은 도청을 덮친 공수부대가 아니고 시 일원을 장악하기 위해 도청탈환 뒤에 들어온 야전 사단인 듯) 27일 새벽 3시30분 집결지를 출발 △ 화순에서 도청 쪽으로 △ 송정리 방향에서 △ 시청과 서부경찰서 △ 담양에서 광주방면 등 4개 코스를 통해 각각 진입.
작전개시 1시간40분만인 5시10분 목표지점을 점령하고 7시까지 시가지 일원에 병력 배치 완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자 곳곳에서 요란한 총소리 계속 돼. 잠을 자던 시민들이 깨어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여, KBS 광주방송이 5시부터 {광주사태 해결을 위한 군 작전을 개시했다.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고 창문을 모두 닫아라}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자수하면 생명을 보장하겠다}등의 방송을 계속.
이에 앞서 3시쯤 자칭 시민이라는 사람이 가두방송을 통해 황급한 목소리로 [계엄군이 쳐들어온다. 시민들은 나와 항쟁하라]고 외쳐.
5시40분쯤 전남북계엄분소는 KBS를 통해 광주일원 옥내외 집회 금지, 습득, 발견한 총기 실탄 폭발물은 즉시 반납하라는 내용의 경고문 1호를 발표. 계엄분소는 또 {관공서와 군주요시설을 군이 점령 보호하고 있다. 소수잔당이 민가잠입을 기도하고 있으므로 시민들은 폭도들을 숨기지 말고 즉각 군경에 신고해달라}고 당부. {공무원들은 7시30분까지 소속 근무처로 출근할 것}도 지시.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시내전화는 4시간 완전 불통.
해가 뜰 무렵인 5시50분 10여 헬기가 시내상공을 선회하면서 작전을 지휘했고 공중 방송을 통하여 자수를 권유. 7시쯤 시민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 주변을 살폈고 대부분 잠바차림의 공무원들이 자전거 또는 도보로 출근하는 모습. 길목마다 구경나온 시민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계엄군이 종용.
도청에 진주한 한 계엄군지휘관은 {군이 시내에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신속하게 진입했다}고 말하고 {광주 공원과 도청에서 약간의 저항이 있어 총격전을 벌였으나 대항군이 매우 지쳐 있어 별로 응사하지 못한 채 5시쯤부터 투항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계엄군은 어둠 속에서 식별이 가능하도록 철모에 폭 5cm 정도의 흰 붕대를 둘렀고 전차와 차량에는 야광으로 된 대공표찰을 붙였다.
도청주변엔 전차 5대 경계, 정문엔 장갑차가 모여 있어. 계엄군은 도청주변의 고층건물에 대해 수색전에 들어가 9시부터 고층건물 옥상에 계엄군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8시쯤에는 도청 동쪽 동인 방사선 병원 안에서 전형식 군(20. 광주보건전문대 2년)이 계엄군에 투항했고, 8시40분 도청 앞 수협 전남지부 건물에서 카빈을 든 고교생 차림 5명이 투항. 도청 안에는 계엄군의 트럭 지프 등 차량과 시민들이 그 동안 탈출에 사용했던 군트럭 등이 뒤섞여 있었다.
정문에는 시민들이 만들어 놓은 화염병 2상자(40개), 경찰 방석모, 최루탄 등이 널려 있었다.
이날 교전에서 사살된 시체는 도청구내에 5구, YMCA 건물 앞에 1구, 황금동 3거리에 1구 등 7구가 목격됐다.
도청에 진주한 선발대 병력은 8시5분쯤 M16 소총의 탄창을 빼내 상황이 일단 종료되었음을 보여 주었고, 8시10분쯤 군 트럭이 도착, 도청주변에 진지를 구축, 이어 12대의 전차가 금남로를 통해 도청을 거쳐 남광주 역쪽으로 갔고 8시30분쯤 병력을 실은 트럭 3대가 도착 소대단위로 시내에 분산, 각 건물 옥상에 배치.
오전 11시 현재 광주시내 모든 교차로와 골목입구에 계엄군이 배치돼 있고 인적이 완전히 끊겨 적막 속에 있다.
KBS 송고 내용
* 26일 밤 11시 군 병력이 사복으로 시가지에 잠복. 이어 헬기로 병력을 계속 시내로 실어 나르면서 거리에 있는 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
* 27일 새벽 1시 병력 거의 시내 잠입.
* 2시 진압작전 개시. 탱크 장갑차 앞세우고 외곽에서 시내로.
* 2시15분 첫 총성과 함께 시가전 시작, 이후 계속 총소리 들리고.
* 3시10분 도청 쪽에서 여자 목소리, [광주시민 나오라]는 소리 들림.
* 4시 외곽지대로 빠져나간 데모대원과 군 사이에 계속 총성. 시가전은 도청쪽에서 가장 심했고 계속 외곽으로 확산.
* 4시15분 헬기와 정찰기가 뜨기 시작.
* 4시30분 도청을 비롯한 주요 공공건물을 군이 장악. KBS 광주방송국 [시민은 안심하라. 거리에 나오지 말라. 폭도롤 숨겨주지 말라. 시내 주요 공공시설은 군이 장악하고 있으며 도청과 광주 공원도 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별도의 공고가 있을 때까지 외출하지 말라]는 안내 방송 계속. 또 반항자들에게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즉시 자수하라. 자수하면 생명은 보장한다]고 방송.
* 4시40분 헬기로 군방송 시작. 전남북계엄분소 경고문 1호 발표.
[① 옥내외 집회는 일체 금한다 ② 공무원 전 행정관리 인원은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하라. 출근치 않을 경우는 근무이탈로 간주한다 ③ 습득 발견한 총기나 탄환 폭발물은 인근 경찰서나 파출소에 반환하라 ④ 이상과 같은 경고 위반시는 엄중 처단한다. 전남계엄분소장 소장 소준열]
* 6시 대략 총성은 사라졌으나 일부에서는 계속 산발적으로 총성 들림. 외국인에게 알리는 방송이 시작됨.
(KBS 방송 통해 영어로) [군작전이 시작됐다. 신분이나 업무여하를 막론하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 군은 외국인 보호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6시50분 계엄 분소장 담화.
* 7시5분 경비행기 2-3대 저공비행, 산발적으로 총성 들림.
* 7시20분 총소리 멎음. 외곽으로 빠져나간 무장대들이 시민들에게 [나오라] 외치는 모습 보임.
* 7시30분 총소리 완전히 멎음. 군인들 무장대가 숨어들 가능성이 있는 여관이나 여인숙 일반 가정등을 수색 시작.
방송 송고 내용
* 사망자 도청 내 회의실 앞 소사체 1구 무장시민군 지휘자로 보인다. 도청 뒤뜰 대학생 차림 1구, 도청민원실 계단 앞 시체 5구, 도청건물 옆 교련복차림 2구, 밤색 옷 차림 등 5구, 도청경비과 옆 학생차림 1구가 목격돼.
* 새벽 3시30분부터 총격전이 시작됐다. 데모대들이 점령하고 있던 도청을 탈환하는 한편 광주시내 전역으로 작전을 확대했다. 도청주변과 금남로쪽에서는 M1 카빈소총 M16 소리가 범벅이 돼 들려왔다. 또 폭음도 요란해 수류탄 폭발음인 것으로 추정된다.
* 새벽 5시가 지나면서 요란했던 총성이 줄어들기 시작해 5시40분쯤 거의 그쳤으나 사직공원 등 시내 변두리 일부지역에서는 총성이 간간이 들렸다. 폭음과 총성에 잠이 깬 시민들은 지척에서 나는 총소리에 공포감.
* 새벽 6시부터 KBS 방송을 통해 {폭도들은 진압됐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집 밖에 나오지 말라} 또 영어로 외국인에 대한 방송도 있었다. 방송은 {계엄군이 폭도 2명을 사살하고 2백7명을 체포했다. 폭도들은 진압됐지만. 일부 잔당들이 주택가에 침입하려 한다}고. 폭도들에 대해서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으나 거부하면 사살된다}는 경고방송도 있어. 또 비행기와 헬기에서도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시민들에게 공중방송을 계속. 날이 밝기 시작하자 밤새 불안했던 시민들은 창밖을 내다보고 조심스럽게 골목까지 나와 주위를 살펴보기도. 시민들은 골목길에서 이웃과 함께 지난밤 사태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며 큰길 쪽으로 나가려다 계엄군의 저지로 집으로 돌아가기도. {경찰과 공무원들은 오전 9시까지 소속 관서로 복귀하라}는 계엄군의 지시가 KBS방송을 통해 전해지자 오전 8시쯤부터 길거리에 출근하는 모습. 계엄군은 길 곳곳에서 통행인의 신분을 확인한 뒤 경찰과 공무원을 통과시켜줘. 광주경찰서에는 경찰관들이 사복차림으로 나와 업무를 보고 있으며 도경국장 등 경찰 간부들이 정상업무. 도청과 시청 등 무장 시민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건물에는 총알자국이 여기저기 박혀있고, 계엄군은 도청 앞에 탱크와 장갑차, 군트럭, 헬기 등을 포진시켜 놓고 밀집 경계를 하는 한편, 데모대가 달아난 지역을 집중 수색중.
* 오전 8시쯤에는 계림국교 맞은편 김명철 외과에서 의사가 문밖을 내다보는 순간 병원 안에서 한발의 총성이 났고, 근처에 있던 계엄군 3명이 급이 달아나. 계엄군 1명은 병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조금 뒤 카빈 1정과 청년 1명을 끌고 나와 길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몸수색.
* 오전 9시쯤 전남매일 앞에서 계엄군에 잡힌 청년 6명이 끌려왔고 30분 뒤 청년 7명이 다시 잡혀가. 계엄군은 도청 지하실에 있던 TNT 등 폭발물을 처리하는 한편 일부 외신기자들만 도청 안으로 들여보내 취재하게 했고, 내신기자는 출입통제. 도경, 도청 건물에는 경찰 작업복과 방패 김밥 등 음식찌꺼기가 곳곳에 널려 있었고, 유리창은 거의 모두가 박살나 있었다. 계엄군은 도청 옆 아스팔트에 연행돼온 청년들을 꿇어 앉혀 도청 옆 서쪽계단과 도경계단에는 핏자국이 1백여m씩 나 있고. 시민군 상황실로 쓰이는 도청 서무과에는 출입구 양쪽에 피가 흥건히. 책상 걸상에는 총알 자국.
* 9시40분 주영복 국방과 황영시 소준열 장군 등이 헬기 2대로 도청을 방문, 장형태지사로부터 도청 현황을 브리핑 받아.
* 9시45분쯤 계엄군이 연루자를 찾기 위해 가택 수색 시작.
광주주재 曺기자 송고내용
* 계엄군의 전격작전 성공. 21일 전남도청이 점거된 후 매일 저녁 나돌던 군진입설이 사실로 확인된 이번 작전은 [충정작전]으로 알려졌다. 이번 작전은 26일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무기양도 문제를 놓고 의견을 일치를 보지 못하고 내분을 벌이는 사이에 전개됐다. 군당국에 따르면 특전단을 중심으로 한 정찰대가 26일 밤 11시30분부터 도보로 시내로 투입되기 시작, 요소요소에 배치됐다. 정찰대 신호에 따라 27일 오전 2시 포진. 군의 진입을 알게 된 도청수비대는 도청 전방 1백m 떨어진 곳에 있는 YMCA에서 첫 사격을 개시. 곧이어 도청 안에 있던 수비대에서도 사격을 시작했고 3시15분 도청 앞 지프차에 가설된 스피커를 통해 여자가 {계엄군이 들어왔다. 시민들은 모두 나와 함께 싸우자}고 방송.
* 3시30분 특전단은 도청 담을 넘어 진입, 30분 동안 청사 내에 있던 학생들에게 사격을 계속. 이때까지 콩볶는 듯한 총성과 간간이 폭음이 들려.
* 4시쯤 보병부대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가지에 진입하기 시작.
* 4시30분 도청은 계엄군이 완전 탈환.
* 4시부터 KBS 광주 방송은 방송을 통해 반항자들에게 {주요 관공서와 시설이 군에 접수됐다. 가장 저항이 심했던 도청과 사직공원도 함락됐다. 많은 폭도들이 투항해 생명을 보장받았다. 총을 버리고 나오면 생명을 보장하되 반항하면 사살하겠다}고 방송. 방송은 계속 시민들에게 {군은 질서회복을 지원하겠다. 별도 방송이 있을 때까지 외출을 하지 말라. 폭도를 숨겨 주지 말라}고. 5시가 넘어서면서 시내 변두리 지역에서 총소리가 간간이 들렸을 뿐 총성은 멎었다.
* 5시10분 변두리에서 확성기로 {시민들은 나와서 싸우자}는 가두방송.
* 5시20분 다시 총성이 시작됐다.
* 5시40분 시내 곳곳에서 교전이 재개되어 총성이 계속.
* 5시45분 계엄군은 KBS 통해 경고문 1호를 발표. 내용 [① 전남 일원에 (가) 옥내외 집회금지 (나) 공무원 전원 출근 (다) 습득된 총과 실탄 폭약은 반납하라 ② 본 경고를 위반하면 엄중 처벌한다]
* 6시15분 시내 각 가정과 여관에 군인들이 들어와 가택수색,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은 모두 연행.
* 6시50분 헬기로 선무방송.
* 7시45분 변두리 지역에서 {시민 나와라 모두 싸우자}는 가두방송.
* 8시부터 계엄군은 시내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검색, 공무원은 보내고 시민은 귀가조치. 9시 넘어서까지 간간이 총소리가 들렸고 시가지외는 통행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KBS 방송은 계엄당국의 방송 중간에 행진곡을 되풀이.
* 오전 8시쯤 광주경찰서 소속 노병기 경장이 광주시 풍연동 자택에서 경찰서로 출근하던 중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르는 총탄에 맞아 복부관통상을 입고 사망.
* 9시40분 주영복 국방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등 군장성이 헬기편으로 도청에 도착, 상황실에서 작전 상황을 브리핑 받아. 계엄당국이 KBS방송을 통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번 작전 중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군인 4명이 부상, 2백여 명이 생포되었다고 했으나 오후 2시 현재 본사 기자가 목격한 사망자만도 도청본관 옆 9구, 도경민원실 앞 5구, 도경공보실 앞 1구 등 15구. 이들은 총상을 입고 있었으며 이중 도청 회의실에서 옮겨온 1구는 분신한 듯 새까맣게 타 있어. 계엄군을 이날 오전 도청지하실에서 TNT 11상자 도화선 2무더기, LMG 7정, 칼빈 5정, M1 19정, 최루탄 4백개, 실탄 10상자, 가스탄 2백개 등 회수. 도청 정문 수위실에서 1천여 정의 무기를 발견, 회수.
* 10시30분 도경수사과 지하실에 숨어 있던 고교생 3명 등 7명이 군에 의해 체포.
* 오전 11시10분쯤 시청에서 나온 긴급 소독차가 시체가 안치됐던 상무관과 도청 앞을 깨끗이 소독.
* 11시 10분 청년 3명이 전남일보 빌딩 안에서 카빈 1백 정을 지키고 있다가 끌려왔으며,
* 11시30분 YWCA에서 엽총 조명탄 방독면 등으 지니고 있던 청년 1명이 검거.
* 12시부터는 겨찰방석모 방석복 등 다중 진압장치와 실탄 카빈 등이 시내 곳곳에서 발견돼 도청으로 회수돼와.
* 12시10분 남자 12, 여자 6명 등 사직공원에서 계엄군에 붙잡혀. 신원이 불확실한 남자 10명이 연행돼.
* 오후 2시 현재 도청에는 5백여 명의 직원이 모두 나와 사후수습대책을 협의하고 있으며 시청에도 직원들이 나와 구호, 의료, 교통, 병역문제 등을 협의 중. 도청 복도에 있던 핏자국을 청소중. 특히 학생들이 상황실로 사용했던 도청 서무과 출입문 옆에는 10여발의 총알 흔적이 보였고 도청 본관벽 여러 군데 총알 흔적. 오전까지 도청 본관 앞 마당에 놓여 있다. 경찰버스 일반버스 백차 지프 등이 깨끗이 정리됐고, 학생들이 타고 다니던 덮개없는 지프가 회수됐고 전남일보 앞 게시판에 있던 대자보와 플래카드도 철거. 계엄군은 도청 정문 앞에 모래부대로 방어진지를 구축, 기관총을 걸쳐 놓고 경계 중. 그 옆에는 학생들이 사용했던 화염탄 2상자가 버려져 있었다.
* 2시 현재 광주 거리에는 일반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도청 앞에 국내외 기자 50여 명이 몰려 있을 뿐이다. 도청과 시청에는 각각 육군 대령이 경비책임자로 경계.
* 경찰은 이날 오전 7시부터 출근해 업무를 시작했으며 경비전화도 거의 정상기능을 회복. 경찰들은 21일 경찰국 청사를 포기하고 탈출 할 때 안명하 국장이 {알아서 피신하라}는 명령과 함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한 데 대해 치안 책임자가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고 뒤늦게 분개하는 모습들. 경찰들은 보복이 두려워 집으로 피신하지 못하고 친척집이나 친구집에서 보내고 이날 출근.
* 오전 10시부터 시체들에 대한 검시가 시작됐는데 도청에서 장남룡 광주지검부장검사 심한준 중령(CAC 법무참모) 군의관 드이 모여 검시.
현재 시체는 상무관에 69, 도청본관 옆 13, 국군통합병원 8, 상무대 6, 31사단 2, 군부대 2구 등이 안치. 이 시체는 검시 후 유족들에게 모두 돌려줄 방침.
曺기자 확인 1백23구(26일까지). 27일 15구, 27일 사망자 중 2명 신원확인-박병규(20·서울 은평구 수색동 30의 2·동국대 전자계산학과 1년 흉부관통상), 서호빈(20·여수시 만흥동 97의5)
전주주재 하명희 기자 송고 내용
* 전주 신흥고교생 1천5백여 명 27일 오전 9시 운동장에 모여 [비상계엄해제] [유신잔당 물러가라] [연행인사 석방하라] 등 구호 외치며 스크럼짜고 시위. 군·경 5백여 명 교문서 교외진출 막아. 학생들이 교내방송 통해 [여러분은 군인이기 전에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영원한 군인은 아니다]
통신 송고 내용
* 전남계엄분소가 국방부 기자들에게 브리핑한 내용 [이번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특공대 병력 3개여단, 공격조 2개. 시외곽은 보병 포병, 광주기갑학교 병력 등. 시위대가 탈취한 무기는 5천6백19정, 이미 3천5백 정 회수됐고 현재 도청 안에 2천여 정이 있어 미회수는 1백여 정. 계엄당국은 이날 작전으로 [민간인 여자 1명 사망, 3명 부상, 군피해 전사 1명, 부상 1명, 체포인원 2백95명과 13명 사살]로 발표했으나 사살은 17구로 밝혀졌다.
[수류탄 1백43개 회수, 폭약 3백파운드 등 회수]라고 발표. 이날 새벽 학생들이 안심하고 잠을 잘 때 기습을 통해 피신하거나 총격을 받았다. 도청에서 잠을 자던 광주사태 수습대책위원장 이종기 변호사는 군에 연행돼.
오후 5시55분 광주주재 曺기자 송고
* 계엄당국은 지난 소요사태 때 강경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홍남순 변호사를 군부대로 연행,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광주사태 수습대책위원장 이종기 변호사와 학생측 수습위원장 김창길(전남대 농경과 3년)도 연행, 도청 점거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조사중. 이 가운데 김군은 이날 오후 2시30분쯤 도청 앞에 자진출두 경비군인에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투항.
* 도청 안에는 이날 오후 그동안 산재했던 쓰레기를 치워 깨끗했으며 도청 앞 대로에는 오랜만에 제복을 입은 교통경찰관이 나와 정리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끌기도.
* 경찰은 27일 오전 트럭에 무기를 싣고와 간부는 권총으로 비 간부는 카빈총으로 모두 무장.
경찰은 정문에 가로 세로 2cm의 흰비표를 달았다가 오후부터는 계엄군과 똑같은 표시인 폭 2cm의 하얀 띠를 둘렀다.
* 도청 정문 앞에는 이날 오후부터 가족들을 찾기 위해 나온 부인 50여명이 서성거리기도 했다. 또 시내 4-5층 이상의 고층 건물 옥상과 아파트 옥상마다 계엄군의 모습이 보였다.
* 한편 도청 회의실에서 분신한 청년의 호주머니속에서 대변인 표찰과 외신기자 명함 10여 장이 나와 학생 수습위의 대변인인 것으로 신분이 밝혀졌다.
* 이번 사태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아시아 자동차 주식회사로 주로 차량의 손실로 46억 원의 피해가 있다고 회사측은 말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소방차 13대 고속버스 56대 등 모두 6백7대의 차량의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
* 전남도는 사태수습을 위해 박선홍 광주상공회의소 사무국장 등을 복구대책위원으로 위촉. 이날 저녁 첫 회의를 열 예정인데 이 위원회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한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를 파악, 중앙에 복구대책을 건의할 예정이다.
통신으로 들어온 내용
* 27일 오후 3시30분 광주지검은 전남북 계엄분소와 합동으로 5·18 광주 유혈사태의 사망자에 대한 검시에 나섰다. 일반검사 6명, 검찰관 6명으로 편성된 이 검시반은 4개조로 나뉘어 1, 2조는 상무관에 안치된 61구, 3조는 도청에 있는 26구, 4조는 시내병원에 안치된 시체를 검시하게 되는데 군통합병원에 있는 민간인 시체 16구는 계엄군의 광주진입 이전에 이미 검시가 끝났다.
합동 검시반은 이번 검시에서 △ 총상의 경우 총기종류를 식별 △ 신원확인 지문채취 및 사진 촬영 △ 총상부위를 가급적 천연색으로 촬영 △ 사망 일시, 장소, 사체 운반 안치 경위 등을 가리게 된다.
한편 26일 오후 학운동 일가족 피살체의 검시에 나선 검찰은 어깨와 이마 배 등에 총기로 난사당한 사실을 밝혀냈다.
* 낮 12시20분 주영복 국방장관일행이 헬기에 오르는 현장인 도청 앞 광장에서 40여m쯤 떨어진 담장위에서 고교생 차림의 청년 1명이 카빈총을 계엄군에 겨누다 붙잡혔다.
* 시민들은 공포의 10여 일을 겪고 난 뒤인지 총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당국의 사후조치에 따라 앞으로 어떤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우려.
광주주재 曺기자 전화
* 오후 8시20분 시내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하자 인적은 완전히 끊겨 시가지는 쥐죽은듯이 조용했고 간간이 건물 옥상에 경계를 펴고 있는 군인들만이 눈에 띄어. 오후 8시까지 도청 공무원은 퇴근하지 않은 채 복구대책 수립에 여념이 없는 모습들. 이날 밤 안에 도망간 잔당들에 대한 최후 소탕작전이 있으리라는 이야기가 경찰주변에서 떠돌고 있다.
* 10시 전화 9시 통금이후 완전히 인적 끊겨.
목포에서 1만명 정도가 횃불 데모, 밤 11시20분까지. 내일 오전 11시 궐기대회 다시 갖기로.
<28일>
오후 4시10분 목포 朴기자 전화
* 1주일 째 계속돼 온 목포시위는 27일 밤 9시 횃불데모를 마지막으로 끝났다(학생 시민 8천-1만 명). 28일 목포역 광장에는 그 동안 나붙었던 갖가지 구호가 말끔히 청소되고 그 자리에는 [슬기로운 시민, 새 목포 기상]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시위에 휩쓸렸던 학생들 대신 더위를 피한 노인들이 나와 소일을 하고 있음.
* 이번 사태로 통제를 받아왔던 여객선도 목포-용당간을 비롯, 상공, 목장 등 3개소를 제외한 32개 항로에 42편의 여객선이 정상운항을 했고, 문닫았던 시중은행도 오전 9시부터 정상업무에 들어가 평온을 되찾음.
횃불데모때 일부 난폭한 학생이 목포 시청 유리창 10여 장과 시내 상락동 태원관광사무실 유리창 5장을 파손했다.
<추기>
6월16일 오후 주영복 국방장관과 출입기자 간담회
* 31사단장 (6월5일 육본부인사)은 책임을 물어 교체했다(총기탈취 등).
* 광주사태 [유방]얘기는 처벌하기위해 조사했지만 사실 무근이 틀림없다.
21일 계엄군 철수시킬 때 고민했다. 당시 계엄사령관과 함께 CAC사령관과 통화했는데 절대 사격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그때 발포했으면 수 천명 죽었을 것이다. 23일 재탈환의사를 전해왔다(현지). 3군사령관 불러 상의한 후 [절대진입금지]를 명했다(당시 분위기 좋아). 현지에서는 [큰일났다]며 진입을 요구해 왔지만…. 25일 새벽으로 연기했다(당시 보안사령관과도 상의, 절대 진입금지를 각 계통으로 명령했다). 단 현지 부대장에게 지휘권을 안줬다. 25일 청와대에 올라가 광주행을 건의했다.
* 초기과잉진압문제-윤공희 대주교도 그러는데 자기도 직접 봤다며 지나쳤다고 하더라. 그러나 처음 명령은 최대한 자제하라 했지만 실제로 하다보니 그렇게 됐겠느냐. 애당초 원인은 데모하지 말라고 포고령을 내렸는데 왜 포고령을 위반하면서 데모를 했느냐. 그것이 원인 아니냐. 군이 사기가 떨어지면 다른 곳에서 일이 일어났을 때 막을 수 있겠느냐. 서울 데모 때도 내무장관의 군개입 요구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내무장관의 요구인데도 거절했다. 그래서 사이가 틀어졌다. 이번 광주에도 최규하 대통령에게 {[폭도]라는 용어 쓰지 마십시오} {불문에 붙인다고 하시오}라고 건의했다. 그런데 26일까지 무기를 버리고 자수하지 않았으므로 불문에 붙일 수 없다. ●
◆ 취재 메모
<20일>
가장 군중데모가 극렬했고 난폭했던 날이었다. 이날 광주에 도착한 서울 취재팀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오전에는 거리와 병원을 둘러보고 오후 1시쯤 금남로에 다시 나왔다.
오전까지만 해도 행인이 크게 눈에 띄지 않던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금남로 1가에서 4가까지 삼삼오오 모여 전날의 사태에 흥분하기도 했고 일부 시민은 흥분해서 전해주는 시민의 말을 열심히 듣기도 했다.
어떤 시민은 {공산주의와 독재 앞에는 굴하지 말자}고 했고 40대 장년은 {왜 버스나 택시 탄 청년까지 끌어내어 패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일부 시민들은 블록마다 경계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몰려가 {사람을 그렇게 무조건 팰 수 있느냐} {당신들은 동생이나 형이 없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군인들은 {우리는 어제 병력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 교체되었다}하면서 시민들에게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쉬 누그러질 것 같지 않았다. 시민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들은 인도로 더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오전에는 시민들이 {내 아들, 내 동생이 어떻게 됐나}하며 신문사·방송국·경찰서 등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했고 어떤 시민들은 병원으로 찾아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이 사이 계엄분소는 {연행학생, 시민 중 주동자가 아닌 자는 선별해서 석방하겠으나 주동자는 엄히 다스리겠다}고 밝히고 {소요가담자 중 경상자는 군에서 치료하고 있고 중상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오후 3시40분쯤 금남로 3가에 모였던 시민·학생들이 {계엄철폐} {연행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전날에 이어 다시 농성을 시작했다.
오후 5시쯤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내려오자 3백여m쯤 후퇴, 금남로 4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2천여 명이 군과 대치했다. 이때부터 금남로는 다시 가스로 가득했고 군중들은 철책, 드럼통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했다.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6시쯤에는 30여 명의 군인들이 시위대 중간을 차단하려고 한국은행 맞은편 골목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시민들을 때리지 말라}는 등 시민들의 집단항의를 받고 도청 쪽으로 되돌아갔다. 시민들은 되돌아가는 군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같은 시간, 광주 시내 2백여 명의 택시 운전사들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동료가 사상된 데 항의, 광진교통 소속 전남 5나 3706호 시외버스 등 5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헤들라이트를 켠 채 금남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6시40분쯤.
운전기사들은 데모군중을 헤집으며 군저지선을 뚫고 금남로 2가 광주관광호텔 앞(도청 앞에서 4백m 떨어짐)까지 돌진했다. 이곳까지 밀린 군인과 경찰은 차량에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터뜨리며 최후저지선을 확보했다. 도청 앞 광장과 도청 청사까지 가스가 가득했고 시위가 극렬해지기 시작했다.
협공당한 군경…치안공백 상태
한편 6시40분쯤에는 광주역 쪽에서 택시 화물트럭을 앞세운 시위대 2천여 명이 대인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몰려와 터미널 부근에서 잡석을 싣고 온 경남7다 6080호 트럭을 붙잡아 금남로 쪽으로 밀어붙인 뒤 불태웠다. 이들은 밤 8시쯤부터 기봉로를 따라 MBC 건널목 쪽으로 전진했다.
일단의 과격파들은 이때 대인동 광주 소방서를 점령, 소방차 3대를 끌어내 사이렌을 울리며 시가지를 질주했고 일부는 광주시청에 난입했다. 그러나 광주시청은 20여 장의 유리창만 박살이 났을 뿐 철거반장 등 일부 시청직원들이 데모대원들을 설득, 끝내 위기를 모면했다. 검찰과 법원도 일부 광주 출신 검사들이 데모대를 설득, 광주시청과 함께 피해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밤 8시부터 도청과 같은 건물 안의 도경은 완전히 포위상태였다.
금남로를 따라 택시·버스를 앞세운 데모대는 도청에서 4백여m쯤 떨어진 관광호텔 앞에, 또 다른 시위대는 도청에서 오른쪽으로 불과 1백여m쯤 떨어진 노동청 앞에, 또 다른 시위대는 도청에서 왼쪽으로 역시 1백여m쯤 떨어진 충장로 입구에 각각 포진해 있었다.
군인과 경찰은 3면에서 협공당하고 있었다. 도청을 제외한 외곽지대는 완전치안부재 상태였다.
이때부터 금남로, 기봉로, 충장로를 비롯, 외곽지대는 시위대들이 닥치는 대로 차량을 탈취, 운전하거나 불태우기 시작했으며 낮에는 없었던 스피커가 나오기 시작했다.
첫 음성은 여자였다.
MBC쪽의 시위대는 이 여자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전 시가가 온통 시위대의 함성으로 가득해 있었다.
9시쯤에는 학동파출소와 그 앞에 있는 경찰 사이카 2대, 노동청 앞에 있던 택시 1대가 불에 탔다. 9시40분쯤에는 MBC 건물에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폭동화한 것도 이때였다. 불에 타는 MBC는 보고만 있어야 했다. 화염병이 창문으로 던져져 불에 타기 시작할 때 건물에는 직원 2-3명과 1개 분대의 군병력이 있었으나 뒤쪽 비상계단을 빠져 겨우 피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방차도 접근할 수 없었고 이 건물은 밤새워 새벽까지 고스란히 40억-50억원의 재산을 삼킨 것이다.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함평경찰서 소속 강정용 순경 등 경찰관 4명이 순직하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도 MBC가 불타는 때와 거의 같은 시간이었다.
큰불을 보고 한층 흥분해서인지 일단의 시위대들이 버스에 불을 지른 뒤 또 다른 버스를 뒤에서 밀어 붙였다. 이 때문에 연일 데모에 지쳐 피로해 있던 강순경 등 6명이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치인 것이다. 동료들이 손발을 들어 상무대 앞으로 옮겼을 때 강순경은 이미 숨졌으며 옆구리를 치인 듯 작업복 하의에는 피가 흥건히 배어 있었다. 부상자 2명을 앰뷸런스에 실었으나 저지선을 뚫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엄청난 비극이었다. 이날 밤 노동청 앞 시위가 그만큼 극렬했다. 이 앞에서 불에 탄 차량만도 전남5아 1005버스 등 2대, 전남5가 1252, 랜드로버 택시 등 모두 12대였다. 이날 밤 10시쯤 도청에 남아 있던 간부급과 일부 직원들은 피신할 움직임을 보였다. 도청 뒷담이 시위대에 의해 헐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위대 틈에서 경찰저지망을 통해 도청으로 잠입하기는 쉽지만 시위대쪽으로 빠져나가기란 그리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신분을 막론하고 매도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리 팀은 어떻든 빠져나가기로 했다. 도청 직원들과 함께 도청 우측 도지사 관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시위대가 바로 지나쳤다. 10여분 간 머뭇거리는 사이 시위대가 훨씬 빠져나간 것 같았다. 우리는 무조건 길건너 주택가쪽으로 뛰었다. 도청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 팀은 본사에의 기사송고 장소를 도교육위원회로 옮길 수 있었다. 이때가 밤 10시30분. 모두들 피로가 몰려 왔다. 그때서야 끼니도 거른 채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을 때 광주역 쪽에서 이날 처음으로 총성이 우리기 시작했다(10시55분쯤).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 났다. 밖에 뛰쳐나가 보니 그것은 공포탄이 분명했다. 빨간 불덩이가 쉴새없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여자 목소리 따라 밤을 지새운 시위
<21일>
자정이 되는데도 시위대는 지칠 줄을 몰랐다. 전날보다 한층 대혼란 속에 시위는 가였됐다.
우리 취재팀은 여자의 마이크 소리를 따라 불에 타는 MBC 쪽으로 다시 취재에 나섰다.
거리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깨어진 유리조각, 돌멩이, 파출소 등에서 끄집어 낸 부서진 집기 등 마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의 난장판 같았다. 일부는 거리에서 집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계속해서 시위대는 마이크를 잡은 여자의 지휘에 따라 노동청 앞쪽으로 밀려갔다가 다시 MBC쪽을 거쳐 광주역 쪽으로 반복하여 움직였다.
멜빵을 두른 청바지 작업복에 빨간 잠바를 걸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마이크를 잡고 20대 청년 2명을 시켜 1명은 스피커를, 또 다른 1명은 앰프를 들게 하고 움직였다.
어느 새 시위대에는 시민은 거의 없고 10대에서 2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쇠파이프·몽둥이·곡괭이·낫·화염병 등으로 무장했고 거리 군데군데 여학생차림의 학생들이 다친 청소년들을 응급치료해 주기도 했다.
MBC와 노동청 앞 등 시내 곳곳에는 불길이 계속됐다.
1시쯤에는 도청 뒤 서석동 광주세무서 본관과 별관이 불타기 시작했으며 이어 노동청 앞 도청차고에 방화했다. 차량 3대가 함께 탔다.
이때 시위대가 처음으로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창고에서 카빈 17정을 탈취했다. 유혈을 예고하는 첫 징조였다.
차고와 이웃한 주택가 주민들은 불길이 자기집에 와 닿지 않도록 지붕에 올라가 물을 뿌리는 모습이 불길 사이로 훤히 보였다.
다시 도교위 숙직실로 돌아와 본사에 마감 송고를 거의 끝낼 때 전화가 별안간 끊겼다. 시외전화가 완전히 불통된 것이다. 새벽 2시20분쯤이었다.
험악한 시위는 새벽 내내 계속됐다.
동이 트면서 마이크를 잡은 여자는 {광주 시민들은 오늘 아침 도청에 집결하자}고 외쳐댔다. 끈질긴 여자였다. 밤새워 구호 등을 외쳐댔던 그녀는 새벽에도 목소리는 전날 그대로였다.
광주역쪽에 다시 불길이 보였다. 시민들은 KBS가 틀림없다고 했다(새벽 5시30분쯤).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미 KBS는 불길이 온 건물에 번졌다. 불타기 30분전쯤 광주역에 끝까지 남아 있던 군인들이 철수한 뒤 역대합실에는 3구의 청년시체가 발견됐다. 시체를 본 시위대들이 광주역 기물과 유리창 등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KBS에 몰려가 방화했다는 것이다.
오전 6시쯤 MBC쪽에서 밤새워 시위한 1천여 군중들은 다시 금남로 4가 네거리쪽에서 농성에 들어갔으며 일부는 밤사이 빼앗은 고속버스·시내버스·트럭·승용차 등을 닥치는 대로 타고 시가를 질주하고 다녔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장갑차 타고 포진한 군에 돌진
데모대는 어느새 리어카에 시체 2구를 싣고 다녔다. 오전 7시부터 시민들이 다시 데모대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 했으며 이 사이 일단의 시위대들이 트럭으로 빵을 날라 시위대에게 뿌리기도 했다.
8시쯤 전옥주(32)로 알려진 여자 리더가 시민들에게 시체를 향해 묵념을 올리게 했고 시위의 정당성을 시민에게 호소했으며 광주시장과의 면담을 제의했다.
이날부터 각 기관은 문을 닫고 상가는 완전 철수했다. 중고교는 물론 국민학교도 자동휴교상태에 들어갔다. 전남일보·전남매일 신문제작이 중단됐고 지방방송도 모두 끊겼다. 관광호텔의 외국손님들도 대피했다.
9시부터 더 많은 군중이 금남로 4가로 집결했다. 이들은 군인의 과잉진압을 사과하도록 요구했고 현정부의 지도자들을 규탄했다.
10시부터 광주 공단내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와 군납품용 지프, 트럭 등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 장갑차를 이용, 군저지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페퍼포그와 최루탄에도 아랑곳없이 가톨릭센터 건물 앞까지 진출했다. 10시30분부터는 전날과 똑같이 도청을 3면에서 죄어 들어갔다.
사태가 위급한 것을 느낀 도청과 도경은 이때부터 기밀문서를 헬기를 이용,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0시50분 도지사, 시장이 헬기를 타고 {병력을 철수시키겠습니다. 시민 여러분, 질서를 지켜 광주를 살립시다}고 호소했으나 시민의 호응은 없었다. 다시 도청이 전날과 같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낮 12시 도청 점령설이 퍼졌다. 때를 같이하여 가톨릭 센터 앞에 포진해 있던 시위대들이 다시 장갑차와 트럭을 앞세우고 2백여m쯤 돌진, 관광호텔 앞에서 군인과 10여m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도청직원들이 뒷담을 넘어 하나 둘씩 피하기 시작했다. 우리 취재팀도 도청 앞 관광호텔 길건너 맞은 편 본사 광주지사 사무실로 피신했다.
낮 11시30분부터, [전남지역 학생총연맹]이름으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 궐기대회를 갖자}는 전단이 시내에 뿌려져 도청 점령설을 뒷받침했다. 시내는 예측을 불허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같은 상황은 광주 동구청 건물 3층 우리 지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순식간에 일어났다.
12시30분. 관광호텔 앞에서 10m 간격으로 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중 장갑차를 몰던 청년이 2, 3겹으로 포진하고 있었던 군인들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군인 4-5명이 쓰러졌다. 수없이 최루탄이 터졌다. 시위대가 다시 멈칫했으며 군인들은 쓰러진 동료를 데리고 도청 광장 앞 분수대로 퇴각했다. 대규모 살상을 예고하는 듯했다. 도청은 금새 점령당할 기세였다. 한마디로 살벌했다. 군인들은 분수대 앞에서 횡대로 도열했다.
외곽에서 불어난 무장시위군중
동시에 [탕] [탕] 군중들을 향해 수 없는 총탄이 퍼부어졌다. 정확히 21일 낮 12시55분이었다. 처음에는 공포인 듯했다. 우리 팀은 합의한 듯 책상 밑으로 엎드렸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과 빌딩으로 몸을 숨겼다.
총소리를 제외하고는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완전히 지사에 갇히게 됐다.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케비넷에 기대어 도청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의 군인들이 분수대 앞에 횡으로 앉아 금남로쪽을 향해 거총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총성과 함께 장갑차에 탔던 청년이 총탄에 맞고 그대로 넘어졌다(2시40분). 당시 사상자가 얼마였는지는 취재가 불가능했다.
지사에서 남아 있던 취재팀 5명은 사무실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우리는 동명동 서울팀이 투숙했던 여관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3시쯤 하나씩 지사 뒷골목으로 빠져 1백50m쯤 떨어진 광주경찰서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광주경찰서에서 우선 경비전화로 서울시경 기자실로 상황을 알렸다. 3시40분부터는 거의 전쟁상태였다. 총기를 입수한 일부 시위대들이 군인들을 향해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시가전 상태였다. 이때부터 기자들은 안전하게 취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3시50분, 일단의 시위대들이 서부경찰서에 난입, 총과 실탄을 요구하고 있다는 상황이 광주경찰서에 수신됐다.
4시에는 화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들이 트럭을 타고 광주시내로 재진입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4시5분, 지원동 탄약고에서 다이너마이트 1백 개와 폭약 4상자를 탈취해갔다는 전화 등이 잇달아 광주서에 걸려왔다.
광주시는 시시각각 위험과 공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뒤에 알려졌지만 시위대들은 이때 이미 장성·나주·화순·담양 등지에서 무기를 탈취,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보고 받은 광주경찰서장 등 간부들은 4시25분부터 무기없는 상황에서 시위대와 맞설 대책회의를 논의했다(전날 군에서 도경 및 광주시내 경찰서·지파출소는 무기를 회수해 감). 우선 윤병룡 서장은 각과의 기밀문서를 챙기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회의는 [적절한 시기에 철수해야 된다. 군병력을 요청하자]는 등 서로 엇갈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윤서장은 회의 도중 전화로 도경에 현재의 상황을 보고하고 1개소대의 군병력을 요청했다. 여의치 않은 듯 서장의 표정이 무거웠다. 당시 서에는 지원 나온 전투경찰요원과 경찰관등 1백여 명이 있는 것 같았다.
5시쯤 한 경찰 간부가 우리 팀에게 다가와 [신변을 보호할 수 없으니 피신해 달라]고 일러줬다. 총소리는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우리 팀은 경찰서를 나와 동명동 D여관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에서 외곽으로 빠져 나오자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지프와 트럭에 카빈 등으로 완전 무장한 청년들이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시민들은 공포에 질린 듯 말을 잃었다.
오후 4시쯤, 일단의 시위대들은 도청에서 직선으로 3백여m쯤 떨어진 전남 의대 옥상에 LMG 2대를 설치, 도청 쪽으로 사격을 시작했으며 군헬기에 사격을 했다.
또 일부 시위대들은 시내 남국민학교와 광주공원에서 청년들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사격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이제 소총소리는 시가지 전역에서 들렸다.
오후 7시30분쯤 광주경찰서 쪽에서 50여 명의 경찰관들이 군복차림으로 동명동 우리가 투숙해 있던 여관 앞으로 달아났다.
이때는 용케도 시위대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민가에 들어가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귀가했다 한다.
이날 도청에 있던 군인과 경찰들은 5시30분부터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광주경찰서 직원들은 먼저 전투경찰대원들에게 트레이닝복을 입혀 철수시킨 뒤 맨 마지막에 철수한 것이다.
이에 앞서 6시에는 20여 명의 시위대들이 트럭에 분승, 총기를 휴대하고 광주교도소를 습격하려다 이중 6명이 현장에서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7시50분부터 잠시 시내는 적막이 흘렀다.
여관방에 들어온 것은 8시쯤이었다. 여관방 전기불이 꺼진 것은 8시10분이었다. 여관집 주인이 [큰 건물은 위험하다]며 스위치를 내린 것이다.
이날 자정까지 시위대들이 타고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과 사이렌 소리가 계속 됐다. 총성도 계속 울렸다. 공포의 하루였다.
피 엉킨 인도에 파리떼만 윙윙
<22일>
오전 5시20분 시위대는 새벽부터 지프차에 스피커를 장치하고 주택가를 누볐다. {시민 여러분, 우리 모두 민주화를 위해 힘을 합해 싸웁시다}는 내용과 함께 7시 도청 앞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갖자고 외쳤다. 무장한 시위대가 탄 지프·트럭·버스 등은 주택가를 계속 누볐다. 어떤 청년들은 경찰데모진압용 철모에 군복차림이었으나 차량을 운전하는 어떤 청년은 눈만 남긴 채 복면을 하기도 했다. 트럭에 LMG를 장치한 중무장도 보였다. 시민들은 동이 트면서부터 대문 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웅성댔다.
지프를 타고 가던 시위대들이 [투사회보]란 프린트로 된 전단을 뿌렸다.
{광주시민의 함성은 각지에서 메아리쳐 장성·화순·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일부 시민들은 7시쯤부터 도청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8시에는 도청은 수천 명의 인파로 붐볐다.
시내는 엉망이었다. 곳곳에 불에 탄 트럭·버스·택시들이 뼈대만 앙상한 채 뒹굴고 있었고 금남로·동명로·기봉로·역 앞 등의 도로는 유리조각, 깨어진 거리미화용 화분대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불타거나 쓰러진 가로수, 부서진 전화박스 등이 마치 격렬한 전쟁이 치러진 폐허 같았다.
특히 금남로 2.5km에 이르는 인도 곳곳에는 피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고 본사 광주지사 뒷문앞에는 아직도 시멘트 위에 피가 흥건히 괸 채 파리떼가 윙윙거렸다. 건물 유리창 곳곳에는 총탄 흔적이 보였고 주인 없는 신발짝이 흩어져 있었다.
다시 평화로운 시위
온 시가지는 계속해서 무장한 시위대가 탄 각종 차량이 무질서하게 질주했으며 일부 시위대는 도청 건물 옥상에서 사주 경계에 임하기도 했다. 시위대들은 총길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도청 정문은 시위대들이 무장한 채 엄격히 출입을 통제했다. 모든 차량에는 [계엄해제]등과 격렬한 구호가 페인트로 쓰여졌으며 일부 차량은 [환자수송] [보급수송] [시민수송] 등으로 표시되기도 했다.
전남일보와 전일방송이 들어 있는 전일빌딩 정문은 트럭으로 셔터를 받아 4분의 1쯤 부서진 무장한 시위대들이 보호하고 있었다.
도청과 전일빌딩에 설치한 스피커에서는 {계엄철폐} 등 구호가 수없이 반복됐고 광주시민들 사이에는 {몇 백 명의 시민들이 죽었다} {서울서 2천 명의 학생들이 내려왔다}는 등 루머가 꼬리를 물었다.
학생들은 상자를 들고 다니며 환자치료비 모금을 했고, 일부는 시민들에게 헌혈을 호소했다. 많은 외신기자들이 취재에 열을 올렸다.
9시쯤 전남대 의대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시위대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통행은 자유로웠다. 영안실 앞에는 울음바다였다. 시체는 모두 18구였다. 병원측은 영안실이 비좁자 영안실 옆 공터에 텐트를 치고 시체를 옮겨 놓았다.
영안실에는 신원이 확인된 10구가 관안에 안치되어 있었고 텐트 속에 있던 8구의 시체는 광목으로 얼굴을 가려 놓았을 뿐이다.
{행여 내 가족이…}하는 시민들이 광목을 들춰 얼굴을 확인하다가 자기 가족이 아니면 안도의 숨을 토했고 자기 아들임을 확인한 50대의 한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기도 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아들 이름을 부르며 하늘을 바라보고 호곡했다.
이 병원에 입원한 40여 명의 부상자들은 병실이 모자라 복도가 입원실이 됐다. 대부분의 부상자는 20대 청년들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에 확인한 사망자는 전대병원 18명, 기독교병원 14명, 적십자병원 21명, 성요한 병원 2명, 시내의원에 3명, 조대부속병원 4명 등 모두 62명이었고 부상자는 1백50명이었다. 실로 엄청난 사상자였다.
낮 12시쯤, 도청을 중심으로 금남로는 수만 명의 시민들로 꽉 들어찼다. 10시50분쯤 도청 앞 광장에서 한 차례 궐기대회를 끝냈는데도 시민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정오가 조금 지나 우리 팀은 정문을 지키고 있던 한 대학생의 호의로 도청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층 도청 서무과에 임시로 마련된 시위대 상황실에서 도청 출입증을 받았다. 흰 백지(가로 4cm, 세로 2cm)에 도장이 찍힌 간단한 이 통행증을 소지한 후부터는 도청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왔다. 시위대는 도청 정문뿐 아니라 현관에서도 총을 메고 지키고 있었다.
도청은 크게 어지러워져 있었다. 경찰관들이 전날 철수할 때 버리고 간 작업복·군화·곤봉·최루탄·방패·철모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황급히 철수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시위대 중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버리고 간 작업복을 입고 있었으며 일부는 철모를 쓰고 다녔다. 어떤 청년은 군화를 신었고 트럭을 타고 다니는 많은 청년들은 방탄조끼를 걸치고 다녔다.
한편 도청 부지사실에서는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렸다.
최한영(독립투사)·박윤종(전광주시장)·이종기(변호사)·조비오(신부)·윤영규(YWCA 이사)·김상현(전대 교수)·이석연·장휴동(목사)·신용순 등 15명의 각계 인사가 모였다.
이중 위원장에는 이종기변호사가, 학생수습위원장에는 김창길(22·전대 3년)이 맡았다.
처음부터 수습대책위원회는 난항이었다.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일부는 정치적인 문제는 거론하지 말고 시위대의 무기를 회수하고 질서회복에 힘을 쏟자는 것이었고 일부는 어차피 이런 상황하에서는 정치적인 이슈까지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2-3시간 뒤 격렬한 토의 끝에 수습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8가지 사항에 합의를 보았다.
① 계엄군의 시가진입을 일체 금지하라 ② 5·18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을 인정하라 ③ 연행자를 석방하라 ④ 사망 및 부상자의 치료에 대책을 세우라 ⑤ 방송 재개 및 사실 보도 촉구 ⑥ 자극적인 어휘 사용 금지(예, 폭도) ⑦ 시외 통행로의 통로를 주라 ⑧ 사태 수습 후 처벌금지 등이었다. 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합의된 8개항을 갖고 오후 2시쯤 계엄분소장을 찾아가 해답을 갖고 돌아왔다.
5시부터 장*동 수습대책위원(광주청년회의소회장)이 도청 분수대 앞에 마련된 단상에서 계엄분소장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8개항의 합의사항을 알렸다. 시민들은 합의한 사항을 알릴 때마다 박수를 치고 환영을 표했다. 그러나 7개항까지 알리는 순간 20대 청년이 마이크를 빼앗고 {그같은 합의사항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태 수습의 전망이 흐려지고 있었다. 수습위원들도 허탈해 하기 시작했다.
5시55분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가 군중 틈에서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소리쳤다. 광장에 있던 시민들이 우왕좌왕 피신하느라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연행됐던 학생 79명이 시위대가 마련한 버스와 트럭에 타고 광장으로 오는 것을 오인한 것이었다. 실상 시위대들은 흡사 군인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어 밤에는 구분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연행에서 풀려 나온 학생들은 시민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전남북계엄분소는 18-19일 양일간 연행됐던 학생·시민 대다수를 21일부터 석방하고 있었다.
5시55분 일단의 시위대들은 지프와 반트럭 등 차량 5대에 전남대 병원에서 시체 18구를 싣고 도청광장으로 나왔다. 군중을 비집고 도청 분수대를 한 바퀴 선회한 시위대들은 도청 분수대 잔디에 시체를 옮겼다. 유족들은 관마다 향을 피우고 울부짖었다. 이어 6시30분부터 추도식을 거행했다. 한동안 광장이 숙연했으며 시체를 본 청년들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죽음의 참뜻을 실현하자}고 외쳐댔다.
이보다 앞서 일부 시위대원들은 21일 낙오됐던 공수부대 김모중사(25)와 전투경찰대원 2명을 도청으로 연행해 왔으며, 20일 오후부터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리드해 왔던 여자 전옥주를 역시 연행해 왔다. 학생 대표들이 있던 도 내무국장방으로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연행돼온 이 여인은 {자신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이 여인은 계속해서 {삼촌이 일개월 전까지 광주시내 모경찰서 간부였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확인할 길이 없자 학생들은 이날 오후 버스편으로 군부대로 이첩했다.
날이 어둡기 시작한 7시부터 시민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발길을 돌리는 시민들은 빨리 수습되기를 기원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들의 걸음은 무척 칙칙해 보였고 불안한 그림자가 역력했다.
8시가 되자 도청 광장엔 시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분수대에 있던 시체는 도청앞 뜰로 옮겨졌고 일부 유가족들이 시체를 지켰다. 거리는 다시 시위대들이 장악했다.
차량은 꼬리를 물고 시내를 질주했다. 이날 밤부터 시외로 빠져나가는 화정동 공업단지 입구와 고속버스 진입로, 목포로 빠져나가는 백운동, 화순으로 향하는 길목인 지원동, 무등중학교 앞 교도소 입구 등 5개 지역에서 군인과 시위대들이 5백-6백여m의 거리를 두고 대치에 들어갔다.
밤 9시이후 광주 전시내는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었다. 시가지 중심지에서 시위대들이 통행인을 검문했다. 이날 밤 산발적으로 총성이 울렸지만, 비교적 평온을 되찾은 밤이었다.
<23일>
거리의 질서가 조금은 회복되기 시작했다. 새벽에 동성동과 상무동 일대에선 기관총과 소총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렸지만 시위대들은 오전 5시부터 시민들에게 거리 청소를 호소하고 다녔다. 많은 시민들이 빗자루와 삽을 들고 금남로 MBC앞, 역 앞 등으로 향했다.
난장판이었던 거리가 그런대로 말끔히 치워졌다. 길한복판에 누워있던 불에 타거나 파손된 차량들도 길옆으로 밀어 붙였다. 시민들은 오전 7시부터 전날과 같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고 변두리 시민들은 자전거로 도청 앞에 집결했다. 도청앞은 인파와 함께 자전거로 물결쳤다.
시민들은 {밤사이에 다른 변이 없었나}하는 궁금증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시위대가 탄 차량도 많이 움직였지만 전날보다는 반이상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한결 조용한 편이었다.
이날부턴 차량통행도 학생들이 발행한 통행증이 있어야 운행했고 무기가 본격적으로 회수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거리를 누비며 무기회수를 강력히 호소했고 대부분의 시민들도 학생들의 호소에 찬동을 했다.
학생들은 [상황실]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기동타격대] 등의 부서를 정해 움직였고 이날 오후까지 3천여 정의 카빈·M1소총과 LMG·많은 수류탄·실탄·화약고에서 탈취해갔던 TNT 등 폭약이 회수돼 도청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지하실 입구엔 2명의 시위대가 무장을 한 채 교대로 지키고 사람의 접근을 막았다.
도청을 중심으로 한 빌딩 앞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날 처음으로 전일빌딩 앞에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면서 [시민군]이란 말이 등장했다. 4개항으로 된 강령에는 ① 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② 시민군으로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③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④ 평소생활로 복귀합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후부터 시민군이란 말이 널리 인용되기 시작했다.
10시30분에는 남녀 고교생 1백여 명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전남대 뒷산에서 숨진 광주상고 2년 이성귀군(16)의 시체가 도청으로 옮겨지면서 한때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수습대책위원회는 22일 결의된 8개 사항외에 총기를 반납하지 않겠다는 일부 강경파 시위대들의 고집으로 별다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시민들은 경찰이 나와 질서회복에 힘써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오후 4시반부턴 대규모 궐기대회를 가졌으며 5시쯤에는 계엄분소장 명의로 된 경고문이 비행기에서 뿌려졌다. 이 경고문은 ① 시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집밖에 나오지 말 것 ② 무장 데모대는 무기를 반납하고 귀가할 것 ③ 시민은 불순오열에 동조하지 말 것 등이 담겨져 있었다.
이날도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루머가 퍼져 시민들은 일찍 귀가를 서둘렀고 8시부터는 무서운 적막이 온 시가를 뒤덮었다. 이날 밤은 총성도 멎었고 차량질주의 소음도 변두리 주택가에서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조용한 밤을 보냈다. 그러나 시민들의 실망이 조금씩 불안으로 이어져가는 날이었다.
[제2의 판문점] 세우고 대치
<24일>
23일 오후부터 내리는 비가 더욱 거세지면서 오전 10시까지 계속됐다. 비가 내린 뒤의 광주시는 한결 청결해 보였다.
계엄분소장은 이날 오전, 전날 오후 6시 개통된 광주 KBS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무기 소지자 중 광주시내 거주자는 국군통합병원에 반납토록 하고 기타지역은 군부대와 경찰서에 반납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담화는 계속 {무기를 반납하면 일체를 불문에 붙이겠으며 만약 시한까지 반납하지 않으면 중대 결심을 하는 괴로움을 없게 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민들도 무기반납을 원했으며 시위대들은 전일빌딩에 [무기회수반]을 설치하고 있었다.
비가 걷히자 이날도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시가지 미화요원들이 등장, 거리청소와 쓰레기를 치웠다. 중심지 일부 빌딩의 사무실 직원도 나와 사무실 청소를 했으며 중심지 다방과 음식점에서도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불에 탔거나 파손된 거리의 차량도 주인이 나타나 레커차로 하나 둘씩 공장으로 끌어갔다. 광주역에도 직원들이 출근, 구내를 말끔히 치웠고 역장은 전화선을 연결, 외부와 통화를 했다. 광주시도 시장을 비롯 전직원이 출근, 영세민대책과 피해 복구에 부심했다.
시민들도 겉으론 한층 밝아 보였다. 그러나 중심지와는 달리 군과 대치하고 있는 변두리 지역은 살벌했다.
그들은 5백-6백m 거리를 두고 군과 계속 대치해 있었다. 화정동 공업단지 입구의 경우 시위대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긴 1백50여 개의 대형 원목과 불탄 버스·지프·파손된 트럭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통합병원 쪽 군인과 계속 대치해 있었다. 20여 명의 시위대들은 거의 경찰 헬멧에 무장을 했으며, 이 일대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통과시켰다.
언제부터인지 시민들은 이곳을 [제 2의 판문점]이라 했다. 대치지역 시위대들은 인근 주민들의 호의로 식사해결을 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은 주로 삼익아파트 주민들이 맡았다. 한편 시내 각 병원은 이날부터 산소와 의약품이 달리기 시작했으며 전남의사회에서는 대한의학협회와 적십자사에 이를 요청했다.
송고때 만난 [젊은 눈빛]의 서슬
이날 오후 1시 자전거로 광주역·시청·공단입구·대치장소 등을 두루 살피고 난 후 우리 취재팀은 기사를 송고하다 큰 봉변을 당했다. 이번 사태 중 서울서 내려온 각 사의 기자는 물론 현지 기자들의 어려움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전화였다. 21일 새벽에 끊어진 시외전화(시내전화는 가능했음)는 계속 불통이었고 마찬가지로 시위대 차량을 제외하고는 기동력이 전혀 없었다.
기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 타기관을 통해 본사에 송고해야 했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취재해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정부 혼자만 지키고 있던 도청 간부의 집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며 겨우 송고했으며, 때로는 철도전화를 이용해야 했고 서울과 행정전화가 가설된 일부 도청 간부사무실을 찾아내어 송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0분간 송고하려면 전화가 뚝뚝 3-4번은 이유없이 끊어졌고 다음에는 아예 불통이 되어 버리곤 했다. 21일부터 이런 방법으로 간간이 송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더 이상 묘안이 안 떠올랐다. 그러던 중 우리 취재팀은 도경국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마침 문이 열려 있었다. 주인 없는 방이라 염치없고 죄스런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우리는 부속실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봉변은 바로 이때였다. 시경 기자실을 통해 5분쯤 본사 임백기자에게 기사를 숨가쁘게 부르고 있는데 문을 반쯤 밀치고 총을 겨눈 20대 시위대 2명이 {누구냐}고 소리쳤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리는 기자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중 1명은 탄환을 장전하며 {필요 없어, 나가!}하고 고함을 쳤다. 순간 손에 들었던 수화기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잠시 할말을 잊었다. 다음 옆에 있던 광주주재 조광흠 기자가 {나도 광주시민이오}라는 말과 함께 프레스 카드와 주민등록증을 보여줬다. 그들은 우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다시 한번 꽂아 놓고 복도로 사라졌다. 등 뒤에서 땀이 흘렀다. 손이 떨렸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을 때 이런 고함을 들었던 시경의 본사 임기자는 이쪽 사정을 어떻게 감지했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좀 쉬라}고 위로했다.
그날 당시 그 청년들의 눈빛은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우리 팀은 그 청년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때는 광주시민이든 아니든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송고를 끝낸 우리는 모두 도청을 나왔다. 그리고 지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날 오후 3시쯤 우리 취재팀은 국군통합병원에서 서울서 내려온 김대중 사회부장을 만날 수 있었다. 김 부장은 국방부 주선으로 서울의 각 신문사·방송 사회부장과 함께 비행기편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서울서 내려온 지 일주일만이었지만 왠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병원 정문 옆 잔디에서 겨우 20분간이었다.
무척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다. 김부장과 헤어져 철조망 바리케이드를 넘어 다시 시내로 들어와야 했다.
한편 이 날은 수습대책위원회의 장우석 목사 등이 대치장소를 찾아다니며 시위대들을 설득, 군과 대치를 풀게 했다.
이때부터 시위대는 야간에 군과 대치했던 장소를 순회했을 뿐 밤새워 대치하는 상황은 없어졌다.
이런 상황이 알려지자 시민드은 수습대책의 전망이 한층 밝아질 것으로 믿었다.
오후 4시에는 수만명이 도청 앞에서 전날과 같이 궐기대회를 가진 다음 7시부터 귀가했다.
이날 밤 9시, 광주 KBS방송은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를 발표했고 많은 시민들이 수습의 전기에 접어들었다고 안도하기도 했다. 이날 도청과 병원에 안치했던 시체 중 신원이 파악된 시체를 도청 앞 상무관으로 옮긴 후 많은 시민들이 분향했다.
[독침사건]이후 다시 총소리가
<25일>
대통령의 전날 담화에 기대를 걸어서 인지 일요일인데도 시민들은 오전 일찍 도청 앞을 꽉 메웠다. 그러나 아침부터 도청 시위대들의 분위기는 경직됐다. 출입증을 가진 기자나 여타 관계자들도 도청 출입을 막았다. 소위 [독침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오전 8시쯤 도청 1층 변소에 다녀오던 특공대장이란 시위대원 장모씨(24·광주시 황금동)가 괴한에게 등뒤를 독침에 찔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장씨는 마침 시위대원 정모씨(33·함평군)가 발견, 등뒤를 빨아주어 생명은 건졌으나 정씨도 함께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남대병원에 입원한 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결과 두 사람의 몸에서는 이상한 물질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에 따라 학생들은 이들을 수상한 자로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 군 등이 이날 오후 3시 무기반납식을 도청 앞 광장에서 갖기로 했던 것이 백지화됐으며 수습은 다시 강경파 시위대에 의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후 4시에는 한층 과격한 궐기대회를 가졌고 선두를 따라 시민들은 금남로→광주역전→MBC→도청광장에 이르는 6km의 시내를 시위했다.
수습대책위원들도 허탈해했으며 학생수습위원장 김군은 기자들에게 사퇴할 뜻을 표했다.
수습위원회는 늦도록 계속 대책을 협의했으나 밤9시에는 {끝까지 투쟁하자}며 강경파 시위대들이 수십 발의 공포를 쏘아댔다. 2-3일 동안 시내는 차량질주로 총소리도 별로 들리지 않다가 이날 밤 총소리는 시민을 다시 공포로 몰아넣었다.
수습위는 최선을 다했지만…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시위대들과 대치해 있던 시내 쪽으로 진입해 왔다고 시민들이 불안해했다. 시위대들도 수습위원회에 {군이 약속을 어겼다}며 항의(?)했다.
장우석 목사 등 도지사 집무실에서 밤새워 대책을 협의하던 4-5명의 수습위원들이 현장까지 달려가 이를 확인했다. 현장을 본 이들은 {우리 손으로 곧 사태를 수습하겠으니 계엄군을 다시 먼저 대치장소로 철수해 달라}고 계엄분소에 요청했다.
계엄분소는 {외곽통로를 트기 위한 조처였지 진입은 아니다}며 오전 8시에 먼저 위치로 되돌아갔다.
광주사태기간 동안 시민수습위원회에서 결과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들 옆에서 취재했던 우리는 이들의 노고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장목사 등 4-5명은 시위대와 함께 밤을 새우며 강경파들을 설득했고 일부 엉뚱하게 사태를 끌고 가려는 시민들에게는 수모를 참아가며 인내로 수습에 임했다. 또 장목사 등은 군인과 대치하고 있던 공단입구 등의 시위대원들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총기를 회수하거나 철수시켰다. 그들은 한결같이 더 이상 한 사람도 피를 흘리지 않고 수습을 하자는 숭고한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았다.
이날 오후 3시부터는 유족대표 8명과 부지사 사회국장 등이 부지사실에서 장례절차를 논의, 28일 장례를 시민장으로 치르기로 합의를 보았었다.
25·26일 상황으로 미뤄, 사태는 장기화될 전망이었다. 시민들도 퍽이나 지친 듯했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21일 변두리 여관이나 친척집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중심지 일부 시민들은 시간이 지나도 전망이 흐리고 도청 지하실에 있는 폭탄 등의 안전이 두려워 다시 피신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취재팀도 본사에 {사태 수습 전망 흐림}이란 기사를 송고했다.
이날 새벽 4시에는 최득춘씨(54)일가족 3명이 시위대에 가담했던 최씨의 아들이 쏜 총탄에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광주시민의 높은 의식에 찬사를…
<27일>
새벽 2시-. 우리 팀 중에서 가장 먼저 잠을 깬 것은 사진부 이영배기자였다.
[탕] [탕] 총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읽을 수 있었다.
왠지 다른 날들이 총성과는 달리 예감이 달랐다. 동시에 잠이 달아났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담배에 손을 댔다. 불을 그어대는 순간 카랑카랑한 20대 여자의 마이크 소리가 새벽 광주시내를 찢는다.
{계엄군이 들어온다} {총기를 나누어주고 있다} {시민들은 도청으로…} 마이크를 잡은 여자의 음성은 10여 분간 계속됐다.
그것도 잠시-. 총소리가 시내에 진입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 맨 나중에 잠을 깬 조남준 기자 등 우리 팀 셋이 서로 중얼댔다. 동시에 섬광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수습위원장 김군, 헌혈을 호소하던 청년, 총을 들고 도청 정문에 섰던 고교생 차림의 청소년 등등…. 또 도청은 폭파되지 않을까?
총소리는 계속됐다. 잠시 끊겼다가는 다시 요란했고 요란했다간 다시 끊어졌다.
새벽 4시-.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광주 KBS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돌아온 병사] [콰이강의 다리]
총소리는 5시12분 일단 끊어졌다.
방송은 계속됐다. {군은 4시30분 현재 시가지를 완전장악했다} {폭도도 소탕됐다} {시민은 라디오를 청취하시고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외국인도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공무원은 7시30분까지 출근하시오} {출근하지 않는 공무원은 근무지 이탈로 간주하겠다} 이어 5시25분에는 계엄분소장의 첫 담화가 발표됐다.
{군은 지난 21일 철수한 후 일주일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 동안 군이 진입하지 않기로 시민대표들과 약속했으나 성과가 없었으며 불량배·깡패·전과자 등이 시민군을 조직, 이적행위를 해 어쩔 수 없이 진입했다…<중략>…군은 성공리에 작전을 끝냈다. 시민은 질서회복에 앞장서 달라}는 내용이었다.
담화는 2-3번 계속 되풀이됐다. 행진곡도 연이어 신이 나 있었다.
6시에 작전 전황을 알렸다. {사망 2명, 체포 2백7명, 민간인 피해는 없다}고.
퍽이나 다행스럽게 느꼈다. 꼭 그렇게 피해가 없기를 원했다.
9일째 광주사태를 취재하며 지켜봤던 우리 팀은 너무나 많은 죽음을 대했고 목격했기 때문이다.
6시10분쯤 여관 밖이 조금은 시끌했다. 이내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군화소리가 들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 302호인 우리 방이었다. 왠지 우리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을 열었다. M16을 든 군인 2명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서청원 반장이 프레스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다시 주민증을 요구했다. 세 사람의 주민증을 건네 줬다. 얼굴에 땀방울이 계속 흐르는 이 군인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되돌아섰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은 방으로 들어가란다.
우리는 여관에서 꼼짝도 못했다. 답답했다. 취재도 하고 본사에 송고해야 될텐데 여관 전화마저 불통이고 식사는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담배마저 떨어져가고 있었다.
9시30분, 우리를 찾는다고 계엄군이 전해줬다. 공무원을 빙자해 출근했던 박래명 위정철 두 주재 기자가 궁금히 여기고 우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히 여관에 있던 책임자가 박기자와 안면이 있는 군인이어서 여관에 투숙했던 우리는 도청 앞에서나마 취재할 수 있었다.
시가는 전날과는 판이했다. 시위대들이 지키던 도청은 군인이, 총을 메고 거리를 질주하던 시위대 대신 군인이 거리를 각 요소요소에 지키고 있었다.
용케 빠져 나온 다소의 시민 외에는 거리는 허전했다. 도청 출입은 일체 통제됐다.
우리 팀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채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도청 앞 인도에 주저 앉았다.
오후 3시쯤 군버스가 도청 앞에 헌병 선도차의 호위를 받으며 섰다. 비행기편으로 이날 서울서 내려온 각 신문사의 국방부 출입기자와 사진기자들이었다. 동료 박기자가 보였다. 마치 군복무중 휴가를 얻어 귀향했을 때 친구를 만난 그런 반가움이었다.
우리 팀은 비로소 이들과 함께 도청에 들어갔다.
신원이 확실치 않아 도청 옆 뜰에 안치되어 있던 10여 구의 시체 옆에 어제까지도 살아있던 젊은이들이 15구의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우리 팀은 이날 본사에서 내려오는 조연흥 차장 등 다른 팀과 교대하기 위해 본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광주에 온지 꼭 9일 만이었다.
돌아보니 지난 9일간의 여러 일들이 우리의 뇌리를 스쳐갔다. 총소리, 시가지의 어지러움, 유가족의 통곡, 시위대의 함성 등….
그러나 혼란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슬기롭게 대처한 광주시민의 높은 시민 의식에 끝없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하루 빨리 광주 시민의 마음의 상처를 씻게 해야겠다고….●
--------------------------- 송고 내용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