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서부 유럽 가운데서 가장 넓은 면적 55만 평방미터나 되는 나라로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한 넓이의 2.5배가 넘는 나라로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벨지움, 스페인등 8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지정학적인 특성상 유럽의 전 역사에 걸쳐 소용돌이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며 1789년 현대 민주주의의 정신을 담은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 평등, 의회정치, 시민권, 사유재산권 등의 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789년 7월14일, 파리 시민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국민의회는 봉건제도 폐지를 채택하고 “인권선언”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공포정치가 계속 되다가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 하다가 1870년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하자 파리 시민의 궐기하여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권이 들어섰지만 72일 만에 무너지고 20세기 초에 걸친 제3공화제 아래에서 눈부신 발전
을 하고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서 1년에 75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 제1의 관광 대국이 된 세계 최강 대국의 일원이 되었다.
루르드 (LOURDES) 성모님 발현 성지
파리 몽파르나스역을 10시10분에 출발하는 TGV를 탑승하고 포도산지인 보르드를 경유하여
루르드에는 15;42분에 도착하니 예수성심수녀회 루르드 원장수녀님이신 김 그라시아 수녀님이 마중 나오셔서 반가웠다. 수녀님의 안내로 토마스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바로 숙소를 나와 수녀님의 안내로 성녀 벨라뎃다 일대기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교황 비오 10세 지하 대성당(100주년 기념 대성당)에 가니 성체강복 미사가 집전되고 있어, 미사와 성체강복을 받은 후 마사비엘 동굴로 가서 기도를 하고 숙소로 왔다.
이 루르드 성지는 프랑스 남쪽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의 산록에 위치한 인구 1
만의 작은 마을로서 이곳에서 성모마리아는 1858년 2월11일 -7월16일 사이에 3월 18, 19, ,
20, 21, 23 이곳에 발현을 계속하였으며, 25일에는 이곳에 성당을 세우라고 말씀하셨고
28일에는 눈병을 앓던 남자가 그 샘물에 눈을 씻자 당장 나았다.
이렇게 7월16일 까지 18회에 걸쳐 성모 마리아께서 벨라뎃다 수비루(1844-1878)소녀에게
발현 후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명해 진 것이다.
먼저 벨라뎃다에게 열여덟 번이나 발현하셨던 곳이 마사비엘 동굴이다. 이곳이 .성모님께서
발현한 성지이다. 리용시의 조각가 파비슈가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신 모습을 자세히 듣고 조각하여 만든 작품으로 그것을 마사비엘 동굴 안에 안치하고 1864년 4월 4일에 축성 했다 오늘날까지 세상에 유명한 루르드의 성모상이 바로 이것이다..
14살의 연약한 양치기 소녀 벨라뎃다가 친구 및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들로 나가
개울을 건느려고 양말을 벗을 때였다. 아주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견줄수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 저만치 서 계시는 것이었다. 별 말씀 없이 부인은
아기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결함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을 지닌 채 푸른 띠를 나부끼며
정성스레 합장한 손으로 묵주 알을 굴리고 ,깨끗한 맨발로는 두 장미꽃을 밟고, 눈은 황홀
하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계셨다. 벨라뎃다는 그이가 누구이신가를 아직 모르며 다만 그
아름다움 모습에 도취되어 마음속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어 같이 기도를 바치고 영광송이 끝나자 그 귀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후 벨라뎃다는
집에 돌아와서 양친과 본당 신부님께 그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2월 14일 벨라뎃다는 그 귀부인에 대한 정에 못 이겨 재차 마사비엘을 가서 그녀는 예상
한 대로 또 귀부인의 발현을 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호기심으로 그를 따라간 다른 사람
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때의 벨라뎃다의 탈혼 상태에 놀라 그와 소리를
합쳐 묵주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귀부인의 발현은 2월11일부터 7월16일 갈멜산
의 성모의 축일까지 18회나 되었다.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신앙심으로 벨라뎃다를 따라
동굴에 가는 사람은 점점 증가하여 종종 수백만 명에 달한 때도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벨라뎃다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25일 성모 영보축일에 16번째 귀부인의 발현을 본 벨라뎃다가 “오,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옵니까?“하고 여쭈어 보니까 귀부인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벨라뎃다
에게 발현하신분이 성모 마리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성모 발현의 목적에 대하여 벨라뎃다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신부님께 말하라”라고 분부 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
를 위하여 기도 하라“ 고도 명령하셨으며, 다시 벨라뎃다 개인에 대하여는 ”나는 반드시 너
를 행복하게 하여 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이다“하고 고
마운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2월 25일 9회째 발현에서는“ 샘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라 ”고 명령 받았다. 벨라뎃다는
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짓한 곳을 파보니까 과연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
것이야말로 후에 많은 병자를 영적으로 낫게 하고 , 매일 12만2천4백 리터의 물을 내게 하
는 루르드의영적수 또는 기적수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 비오9세가 1854년 선포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 교의를 확인하신 마리아는 기적의 샘을 솟게 하셨다. 즉 벨라뎃다로 하여금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이 귀한 그 지방의 마사비엘동굴에 샘물을 파게하시고, 그 물로 불치의 병자들이 속속 치유하기 시작 하셨다.
7월 16일 최후의 발현이 있은 후 그 교구의 주교는 신학자, 과학자, 의학자등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발현의 사건에 대하여 충분한 신학적, 과학적인 조사를 하도록 명
하였는데, 4년간 세밀한 조사를 한 후 그 결론은 각 위원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도저
히 설명할 수가 없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일치하였다.
동정 마리아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에 공인 되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원죄없는 잉태”의 성모상이 1864년 최대의 성황리에 안치 되었다.
그 당시 벨라뎃다의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벨라뎃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하여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양육할 형편도 못되었다.
소유하고 있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방앗간마저 빚 때문에 저당 잡혀서 그야말로 끼니도 잇기 어려울 정도의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서 벨라뎃다는 이웃 마을의
아기를 잃은집에 얹혀서 15개월이나 살다가 온 적도 있었다. 벨라뎃다는 그런 집의 맛 딸
이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벨라뎃다는 그녀의 일생 동안 고통을 주었던 천식을
앓고 있었다. 워낙 가난한 집이라서 겨울이면 제대로 난방이 안 되어 그녀는 보다 난방이
잘 되는 이모 집에서 겨울을 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감방에서도 6식구가 생활하였다.
발현 첫날의 상황은 그녀가 발현 전체를 기술하도록 요청하여 이를 꼼꼼히 잘 기록했던
에스뜨라드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858년 2월11일 “재의 수요일” 전주의 목요일이었는데 날씨가 아주 추웠습니다. 저녁식사
를 마치고 어머니께서 저희들에게 집에는 더 이상 땔나무가 없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동생 뜨와네뜨와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강가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잘못하면 가브 강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친구인 잔느아바디가 우리
집에 남동생을 찾으러 왔는데 우리와 같이 가겠다며 남동생을 집에 데려다 두고 다시
와서 우리와 가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망설이셨지만 세 명이니까 가도 좋다고
승낙 하셨습니다. 우리는 처음엔 잔 나뭇가지들이 종종 발견되던 공동묘지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날따라 그 곳에선 아무것도 발견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브 강 근처까지 가는 옆길로 갔고 뷔예 다리에 도착해서는 강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나을지 내려가는 것이 나을지 고심 했습니다. 우리는 일단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산길을 따라 메라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사비 방앗간 옆 무쉐 드 라 피트의 농지로
들어갔습니다. 이 농지의 골은 마사비엘 동굴 맞은편인데,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방앗간
수로가 있어서 우리는 양말을 막 벗으려는 순간 갑자기 폭풍우 같은 큰소리가 들려 왔
읍니다. 계속해서 양말과 신발을 벗을 때 첫 번째와 같은 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놀라서 꼿꼿하게 서 버렸습니다. 동굴 쪽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 마치 센바람이 ,불듯이 동굴입구의 덤불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생각하고 말할 기력도 잃어 버렸습니다.
거의 동시에 동굴 안에서 금빛 구름이 나왔고 잠시 후 젊고 아름다운,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적이 없는, 정말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서 입구의 장미 덤불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저를 보고서는 미소를 짓고 가까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저의 어머니처럼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눈을 비비면서 떴다 감았다 해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계속 미소를
지으며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 주었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묵주를 꺼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여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승낙의 표시를 했고 그 분도 오른 팔에 걸치고 있던 묵주를 손에 들었습니다. 로사
리오 기도를 하려고 손을 이마에 대려고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께서
성호를 긋고 나서야 저도 같이 따라서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께선 제가 혼자 기도하도
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분은 손가락 사이에서 로사리오를 만지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단이 끝날 때마다 저와 함께 영광송을 했습니다.
로사리오가 끝났을 때 그 여인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금빛 구름도 사라졌습니다.
그 여인은 16-17세 정도의 젊은 아가씨 였으며 흰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 부분에 겉옷 밑단
까지 흘러내리는 푸른 색 띠를 매고 있었습니다. 흰 색 면사포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면사포 안에는 허리 뒤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엿 보였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는데 발까지 내려 온 겉옷이 발을 덮고 있었으며 겉옷이 겹쳐진 단에는 노란 색 장미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발에 꾸며진 장미의 빛깔처럼 금색 고리로 연결된 흰 로사리오를 오른팔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사라지자마자 잔느와 여동생이 동굴로 돌아와서는 제가
그들이 떠난 장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녀들이 저를 바보
라고 놀렸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돌아갈 것인지 아닌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물을
건느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물이 마치 설거지 할 때의 것처럼 따뜻했습니다. 발을 말리
면서 잔느와 여동생 마리에게‘ 그렇게 떠들 필요 없어, 너희들 생각처럼 물이 차갑지 않아’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차갑지 않다니 다행이구나. 얼마나 차가웠는데 하는 것 이었지요.
잔느와 마리에게 혹시 동굴에서 이상한 것을 못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니
했지요. “왜 그러는데?‘하고 물어 왔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퉁명스럽게 답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잔느와 마리에게 비밀로 해 달라며 동굴에서 생긴 이상한 일을
이야기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이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루르드에 순례하는 자는 날로 증가하였다.
프랑스 국내는 물론 멀고 먼 외국에서도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이 성지를 방문하고 그 동굴 앞에 무릅을 꿇고 성모님의 전달을 간구하며 영육간 많은 은혜를 받는 사람은 이루 헤아릴수 없고 그 영수의 효능으로 난치병을 회복한자가 그 수를 모를 정도로 다수에 달한다.
루르드의 성모의 전달로 은혜를 받은 신자들 중에는 감사의 헌금을 한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헌금으로 성모님의 원의대로 그곳에 건립한 화려한 성당은 1876년 7월2일 축성
되었다. 그 후로 그곳을 참배하는 순례자는 한층 더 많아 1933년의 발현 75주년에는 150만 명, 2003년에는 500만 명이상에 달하였다고 한다.
병자의 완치는 모두가 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루르드 의국조사위원이 조사한 바에 의
하면, 최초의 55년 동안에 기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4,445건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루르드를 순례하는 병자가 모두 다 완치된다고 할 수 없지만 누구든지 많은 위안을 얻고 병고를 잘 참게 된다는 것은 일반이 인정하는 바이다.
벨라뎃다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길다르느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으며, 35세를 일기로 1879년 선종하였고 1925년 교황 비오11세에 의해 시복 되었으며, 1933년 12월8일 역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로써 벨라뎃다는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성모님께서 벨라뎃다에게 “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이다”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마사비엘 동굴(MASSABLELLE)
성모님께서 1858년2/11-7/16일 사이에 어린 소녀 벨라뎃다 수비루에게 18번 나타나셨던 장소이다. 성모님상은 동정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바로 그 모습이며, 그 자리에서 성모님께서
피레네말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벨라뎃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 주셨다. 동굴안에는 성모님상이 안치되어 있고, 근처에 분홍 장미꽃, 밖에는 샘이 솟아 나온 자리에 식수시설과 침수하는 건물이 있다..
(미사시간: 06:00, 09:45, 23:00)
침수실(Les picsines)
가브강을 따라 동굴을 지나가면 샘물로 많은 순례객 들이 씻을 수 있도록 1955년에 지은 목욕실이 있다. 지금부터 5년 전 2000년 9월에 루르드성지 필자는 침수하려고 2-3시간을 기다렸으나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아쉽게 침수를 못하고 갔었다. 이번에는 루르드에 4일간 시간이 있어 꼭 침수를 하려고 목욕탕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면서 내가 살아온 삶과 지은 죄를 반성하면서 봉사자의 안내로 입구에 들어가 옷을 벗고 나의 몸 아래 부분을 가리고 “성모송”을 암송하고 나니 봉사자 두 사람이 나를 뉘어서 침수한다.
침수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동안 자기 죄를 반성하고 주님께 용서를 빌고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다. 기분이 아주 상쾌하고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임 유리안나는 나보다 먼저 침수를 마치고 나왔다. 뒤따라 박 토마스 아퀴나스, 이 프란치스코형제님, 임 사장님이 침수를 하고 나오셨다.
루르드는 기적도 일어나지만 순례객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많은 환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기적수를 먹고, 그 물에 목욕을 한 후에 장애인들이 건강을 되찾고 난후에 버리고 간 수 많은 목발들이 걸려 있다.
촛불행렬
저녁식사를 마치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수난 받으시고 돌아가신 길을 어둠이 깃든 시간에 마치고, 마사비엘동굴 앞에 오니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단들이 모여 드는데 한손에는 촛불을 켜들고, 다른 한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드리며 각국에서 온 단체별로 장애인과 휠체어를 탄 환자들이 선두에 서서 깃발을 앞세우고 진행 대에서 흘러나오는 성가와 묵주 신공의 선창소리를 들으며 대성당 앞 광장까지 질서 정연히 행렬을 하는 모습, 각 나라마다 언어와 피부색은 다르지만 수만의 순례객의 모습은 하늘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무사히 루르드의 순례일정을 마치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는 회개와 용서, 사랑과 믿음을 굳건히 하게 되어 회원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성모발현 대성당(Crypte, 원죄없으신 잉태 대성당)
3월 2일 성모님께서 13번째 나타나시어 본당신부에게 가서 “여기에 성당을 짓도록 하라” 고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성당으로, 제대는 성모님 발현 장소의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당 양쪽의 유리창은 발현 당시부터 1876년 루르드 성모상의 역사까지를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좀 더 위쪽 유리창에는 세상 태초부터 교황 비오 9세가 성모무염시태 신비를 정식 교의로 발표하기까지의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대성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커다란 대리석판에는 오랜 조사가 있은후 루르드 성모님의 발현을 인정하는 따르브의 로랑스주교님의 사목교서가 새겨져 있으며, 로랑스 주교는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실제로 벨라뎃다에게 나타나셨다고 선언 하셨다.
( 미사시간: 07:00)
지하성당
대성당 아래에는 먼저 세워진 성당이 있다. 로랑스 주교는 벨라뎃다 현존 당시인 1866년 5월19일 이 대성당에서 첫 번째 미사를 드렸으며, 이 성당 건축을 위해서 일할 때 벨라뎃다
아버지도 그 작업에 종사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이 성당 제대에는 늘 성체를 현시하여 신자들이 찬미와 조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로사리오 대성당(Basilique Du Rosaire)
이 대성당은 성모님 발현후 30년이 훨씬 지난 뒤에 완성되었는데, 항상 묵주를 손에 들고
벨라뎃다에게 나타나신 동정 성모님을 위해 특별히 로사리오 대성당(매괴의 대성당)으로 봉헌 된 곳입니다. 이 성당은 1901년에 축성되었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형으로 지어진 내면은 묵주의 15현의를 뜻하는 작은 15개의 성당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성당에서 성모님의 신비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미사시간: 10:00, 11:15, 18:00)
비오 10세 지하 대성당(Basilique St-Pie X)
성모화관 동고상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깊이 200m, 넓이 80m, 3만 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지하 대성당이 있다. 이곳에서 대축일에 전례, 세계 각국의 신부님의 집전으로 미사를 하며, 세계 각국의 순례단들의 신심행사와 행렬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성당의 특징은 기둥 없이 성당이 건설되었고 지붕은 잔디밭이며 배를 뉘여 놓은 모습이다.
(미사시간: 09:30, 17:00-18:00 성체강복식)
십자가의 길(CHEMIN DE CROIX
1912년 1,530m의 거리를 두고 언덕위에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졌다. 각 처마다 청동으로 조각된 2m 높이의 상들이 있다. 누구나 이 언덕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대사를 얻어 은총의 상태에서 거룩한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다. 또 한편 병자 순례단을 위한 십자가의 길은 가브강을 따라 목욕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개방시간: 06:00-21:00)
트르와(TROYES)
트르와 사랑의 성모 수녀회
프랑스의 동북쪽에 있는 상파뉴 지방에서 1840년 Paul Sebastien MILLET신부님에 의해
창설되었다.
창립자 밀레신부님은 가난한 이웃들을 찾아가 자신의 옷이나, 생활용품을 나누어 주기 까지 하며 저녁식사가 냄비 채로 굶주리는 가정을 위해 보내지는 상태까지 헌신적으로 나눔을 실
천하셨다. 특히 제대로 간호 받지 못하고 버려진 환자들, 무지와 무관심으로 혼자 내버려둔 어르신들과, 갈 곳 없이 버려진 고아들을 도와줄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몇몇 여성들이 밀레신부님의 지향에 함께 할 의향을 보이자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와 돌보아 주었다”는 복음 말씀을 실천하고자 수도원을 창설하게 되었다.
창립 초기 수녀들은 가정에 들어가 환자들을 치료하고 임종을 지켰다. 전염병환자들을 보살피다가 많은 수녀들이 감염으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수녀원에서는 단순 소박함으로 더욱 가정 안에서 깊숙이 들어가 활동하게 되고 시대에서 필요한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결과 수녀회는 급속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더욱 많은 곳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나는 밤낮으로 마음을 태우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의 파괴되어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로 인해 결국은 신앙까지 잃게 되는 것입니다.”
“교황 비오9세께 보낸 밀레신부님의 편지 중에서”
수도회는 수녀들의 삶을 균형적이고 영적으로 이끌어 주며 또한 그들이 능력과 자격을 갖추어 가정에서 필요한 치료나 여러 가지 여건, 시대, 장소에 적합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밀레신부님은 고통받는 환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강생을 보았고 그것은 곧 우리들의 삶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모욕당하는 당신 아드님의 고통으로 연민의 정이 충만하신 성모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한다. 일치된 공동체의 삶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이루어진다.
복음적 삶을 살면서 기도로서 또는 영적이나 물리적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며 그리스도와 함께 애덕의 사도직은 우리와 늘 만나게 되는 가족들 안에서 단순함과 겸손함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프랑스 본원으로 입회한 한국수녀는 18명으로 종신서원자: 6명, 유기서원자 ; 9명, 청원자: 3명이 교육중이거나 선교활동을 프랑스, 아일랜드, 이태리, 그리고 한국에서 가정에서 봉사를 통하여 복음화사업에 일조를 하며 활동 중이다.
, 2000년 9월 송 안젤라수녀님의 종신서원식에 다녀간후 4년 만에 트르와를 다시 방문하게
허락하여주신 하느님께 너무나 감사하며 제에게는 영광스럽고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일행은 저의 안사람, 임 율리안나, 박 토마스 아퀴나스, 김 세실리아, 이 프란치스코
형제님과, 영어선생님 임사장님(앞으로 영세하면 “요셉”)과 함께 트르와 역에 도착하니
이 베네덱타수녀님과 프랑스수녀님이 마중 나와 주셨다. 수녀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방문한 이 트르와는 샹빠뉴 지방의 세 도시중 가장 매력적인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민가가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는 도시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이 도시는, 1524년 대 화재로 도시가 전부 타 버렸다. 그 후 재건하였다. 타 버린 허허벌판에서 다시 일어난 도시는 완전복구, 미술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답게 조성된 호젓한 마을에 유난히 웅장한 쌩 피에르 에쌩폴 대성당이 있는데, 성당 내에 스테인드 글라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또한 트르와 사랑의 수녀원도 있는 프랑스의 지방 도시이다. 이곳에서 조금가면 대형 아울렛이 있다. 이 아우렛 패숀에는 그릇, 욕실용품, 의류, 운동복등 다양한 아이템이 매장별로 나뉘어 있어 알짜 쇼핑을 하기에 좋다. 대부분 할인율이 20-40% 정도 로 높은편이다. 파리의 동역(GAREDE LEST)에서 트르와행 열차를 타고 1시간30분정도가서 CENTRE COMMERCIAL 행 셔틀 버스로 갈아타고 간다.
입점브랜드: KOOKAI, ZARA, KENZO, TIMBERLAND, BALLY, NIKE등
허 루피나수녀님 종신서원식
15:00시에 거행되는 허 루피나 수녀님의 종신 서원식에 참석하니 우리의 좌석은 가족석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트르와 교구 주교님을 비롯하여, 파리에서오신 한국 신부님, 파리 외방선교회신부님(1956년부터 8년간 공주에서 사제생활을 하신신부님), 제주에서 오신 허 수녀님가족
들, 허 수녀님 오빠 허 신부님을 비롯하여 15분의 신부님과 트르와 수녀원의 수녀님과 초청 인사들로 성당이 꽉 차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허 루피나수녀님은 1993년에 프랑스에 오셔서 1998년에 수녀 서원을 하시고 2004년 9월에 종신서원을 하는 아주 똑똑한 제주출신 수녀이다. 오빠는 제주교구 신부님이고 3대가 가톨릭 집안으로 성가정에서 태어난 귀재이다.
엄숙한 가운데 5명의 수녀님의 갱신식과 허 루피나 수녀님의 종신 서원식이 개최 되었다.
미사중에 “주님께서 베드로사도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고 물어보시며 믿음을 확인한 복음을 허 신부께서 우리말로 봉독하시고, 한국수녀님들도 우리말로 성가를 부르니 우리나라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것 같았다. 서원식이 끝나고 강당에서 다과회, 운동장에서는 환영행사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저녁 만찬에는 주교님, 참석했던 주교님, 허 루피나 가족 12명, 트르와의 수녀님과 화기애애하게 만찬을 즐겼다. 우리자리는 맨 앞자리에 마련하였기 때문에 허 루피나수녀님과 말씀을 나누는데 너무나 똑똑하고 하느님께 종신서원을 약속하는 각오,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는 꽃다발을 준비하여 수녀님의 종신서원을 축하해 드렸다. 만찬이 끝난후 박사장 침실에서 내일 일정을 상의하고 트르와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파리(PARIS)
파리는 프랑스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 모두가 예찬하고 사랑하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특히 빅톨위고는“ 파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라는 것에 이론을 제시할 여지가 없다 라고 말 했으며, 시인 보들레르는 모든 것 , 추한 것 까지도 매력으로 변하는 곳이 파리라고 극찬 했다. 이렇듯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에 매혹되고 파리를 사랑하고 파리를 찬미하여 왔다. TV나 영화에서도 그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고 있다. 이렇게 유명한 도시는 필자는 1988년 처음으로 회사에 봉직 중 해외출장으로 경유지로 몇 시간 머문 후, 2000년 9월에 유럽 성지 순례 중 하루를 보내고 이번에는 여러 날 파리의 유명한 명소를 좋은 벗들과 관광하게 되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샹제리제거리(Avenue des Champs-Elysee)
샹제리제거리는 파리의 대표적인 거리로 개선문에서 콩고트 광장까지 너비 124m, 약 2km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도로 양쪽에는 플라타나스와 마로니에 가로수가 아름답게 늘어서 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때가 되면 이곳은 거리의 가로수들을 장식한 엄청난 양의 전구 불빛으로 그야말로 불바다를 이뤄 훌륭한 야경을 연출하는 것을 TV를 통하여 많이 보아왔다.
콩코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까지 찬란했던 그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거리의
색다른 매력이라면 현대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멋진 고급 상점들과, 은행, 오피스 영화관,특급호텔, 초일류급 레스토랑, 노상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고급 부띠끄인 챨스주르당, 겔랑,쟝 프랑코페레, 입셍로랑,과 르노자동차 전시장등 화려한 거리 고급스런 패숀 감각이 뛰어난 거리로 낮이고 밤이고 관광객이 넘쳐흐른다..
저녁이 되면 개선문의 조명이 켜지면서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화려한 조명은 황홀하고 노천카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정담을 나누며 추억을 만들고 있다..
우리도 개선문을 지나 고급 안경점, 양품점, 화장품상점을 쇼핑 한 후 숙소로 갔다.
개선문(Arc de Triumphe)
1806년 프랑스 군대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 건설하기 시작하여 약30년 만에 왕성한 기념 건축물이다. 1805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연합군과 맞서 싸운 오스티틀리츠 전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개선문은 높이 약 50m, 폭 45m 로 벽면에는 각 대전에 참가했던 600여명의 장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원래 이 개선문이 세워져 있는 샤들 드골 에뚜왈광장은 다섯 개의 길이 나 있는 오거리 였는데 1854년 파리 도시계획 담당한 오스만남작에 의해 12개의 길이 나게 되었다
세느강 유람선
화려한 조명을 비추며 세느강을 다니는 유람선만 바라보아도 낭만적인데 우리는 바도무슈를 타고 세느강을 유람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저녁에는 바람이 쌀쌀하여 약간 추웠으나 콩고트 교에서 쉴리교 까지는 파리의 역사적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세느강의 동쪽 강둑과 세느강 중심부에 있는 시테섬을 지나가면,석양의 에펠탑과 파리시내의 고풍스런 노틀담성당, 루브르박물관, 콩시에르주리, 최고재판소, 생트 사펠성당등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전경이다. , .
노틀담 대성당(CATHEDRALE NOTRE -DAME DE PARIS)
노틀담 대성당은 시테섬 동쪽에 우뚝 서 있다. 대성당은 어떤 각도에서 바라
보아도 웅장하고 아름답다. 특히 정면의 광장에서 바라보는 광경이 가장 좋으며,
되블 다리와 생 미셜다리, 세느강의 유람선 위 같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정면으로 바라보아 오른쪽이 남 탑이고, 왼쪽이 북 탑이며, 높이는 똑같이 69m 이다.
두 탑 사이에 높이는 90m의 뾰족탑이 있고, 그 밑 중앙에 장미의창(LA ROSE )
이라고 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성조의 장엄한 이 대 건축물은 800년 동안 파리와 함께 살아온 파리의 상징이며
프랑스 초기 고딕 건축의 최고 걸작품이다.
노틀담이란 성모 마리아를 가르키는 말로서 지금은 카토릭의 성지중에 하나이다.
이곳에 처음으로 성당이 건축 된 것은 4세기경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노틀담 대성당
의 기초를 닭아 초석을 놓은 사람은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쉬리였다.
그가 1163년 대성당의 초석을 놓은 이래 170여년동안 우여곡절을 겪다가 1330년경
에야 겨우 완공 되었다.
그 후 귀족들이 경쟁적으로 재물을 기증하게 되자 노틀담 대성당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국왕 루이 16세의 혼례식이 이곳에서 거행됨으로써 명실공히 왕가의 대성당으로
굳혔다. 이후 1430년에는 영국왕 헨리6세의 프랑스왕 대관식이 있었고, 프랑수아2세
(1558)와 앙리4세(1572)의 혼례식 등 수많은 국가적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1793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파괴 위험을 겪기도 했다.
나포레옹 1세가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뷔올레 르딕에 의해 1844-1864 사이에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노틀담이란 우리의
어머니란 뜻으로 파리를 성모님께 봉헌한 기념성당이다. 파리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파리시의 가장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노틀담 성당의 정면은 수직 기둥에 의해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낮은 곳에
세 개의 문이 있다. 정면의 중앙부분은 방사성으로 두 개의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데
장미꽃 무늬 유리창의 직경이 10m이다. 중앙 한편엔 동정녀와 아기예수가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다른 편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다.
노틀담의 중앙 문에는 최후의 심판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고의 성상과 사도
들의 동상이 있는가 하면, 대조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축복받은 모습과 저주
받는 모습도 있다. 노틀담의 오른쪽 문은 성녀 안나의 문으로 불리는데, 성 마르셀의
동상이 있으며, 이 성당을 지은 모리스 주교님의 동상도 있는가 하면 루이 13세의 동상
도 있다. 노틀담의 왼쪽 문은 동정녀의 문이라 일컬어지는데, 세 개의 문 중에서 가장
정교한 문이다. 윗 편의 초생달 모양의 판에는 죽음과 영광, 그리고 성모의 승천 등이
있다. 노틀담의 성당의 내부는 퍽이나 인상적이다. 9,000여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이 성당
은 길이 130m, 폭 48m, 높이 35m, 이며, 화려한 13세기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비롯하여, 그밖에 6,000개의 파이프로 구성된 오르간도 이곳의 명물이다.
PLACE DU PARVIS DE NOTRE-DAME
RER-B,C선: 생 미샐 노틀담역 하차
M(4번): CITE역 하차 .
몽마르트언덕(Montmarte)
몽마르트는 파리 북동쪽에 있는 높이 130m정도의 언덕이다. 이 언덕위에 있는 새하얀 샤크레퀘르 대성당은 노틀담대성당, 에펠탑, 개선문등과 파리의 관광 명소이다.
사크 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E-COEUR)
(예수 성심 대성당)
로마 비잔틴 양식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1876년 ,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한 뒤
실망에 빠져 있던 파리 시민들에게 용기와 위안, 정신적인 희망을 주기 위해
가톨릭교도들이 모금한 4,000프랑의 기부금으로 건축하기 시작하여 40년이나
걸려 1919년에 완공 되었다.
흰색의 돔, 독특한 로만 비잔틴양식의 이 성당은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에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파리 시를 굽어보고 있다..
정면의 현관은 현란한 조각으로 장식 되어 있으며, 중앙의 돔의 높이는 80m인데
돔에서는 파리의 전 시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개선문을 비롯하여
에펠탑, 블로뉴숲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콩고트광장과 세느강이 내려다 보인다.
건물 양쪽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아름답다. 몽마르트로 오르는 돌계단은
윌레트 광장 옆에 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서쪽에는 몽마르트의 수도원의 부속 성당인 생 피에르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12세기말에 완성 하였는데 로마네스크의 대리석 두리기둥과
스테잉드 글라스가 유명하다.
메트로(2번): ANVERS역, PIGALLF역 하차
에펠탑(TOUR EIFFEL)
사이요궁에서 분수를 향해 내려와 퐁디에나를 건느면 바로 에펠탑이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엔지니어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 3개 층으로
건설한 이탑의 높이는 321m(제1전망대: 57m, 제2전망대: 115m, 제3전망대 274m),,.12,000개의 쇠 조각을 250만개의 리벳으로 결합하여 만든 철 구조물이다.
7년마다 새로 페인트칠을 하는데, 한번에 40톤의 페인트가 든다. 탑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전경은 매우 아름답다. 레스토랑, 기념품점, 영화관뿐만 아니라 리셉션,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는 구스타브 에펠홀도 있다. 특히 밤에는 조명을 바다 야간에는 더욱 아름답다.
메트로: 비르아켐역 하차
루브르 박물관( MUSEE DE LOUVRE)
루브르박물관은 퐁뇌프의 오른쪽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끼고 나아가다 보면 궁전같은 건물이 나오고 왼쪽의 건물을 지나가면 거대한 유리 피라미트가 나타난다. 중세 때부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루브르는 1190년 릴리프 오귀스트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된 성채였다. 그러나 푸랑수아 1세는 이 위압적인 성채와 토굴 감옥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롭게 개조했다. 그 후로 프랑스왕과 황제들은 4세기에 걸쳐 이 건물을 확창하고 개량했다. 들어가는 입구 유리 피라미트는 최근에 건설하였다. 지하도로 내려가 티켓을 사고 안내도를 받은 다음 우리가 먼저 관람할 순서를 정 한 후 관람실로 들어갔다. 유명한 미술관에 들어가니 16세기 때 프랑수아1세가 다빈치, 티치아노, 라파엘 등 이태리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되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과 고대 이집트, 로마, 르네상스의 미술, 조각, 회화, 판화로 구성되었다. 세느강 쪽으로 있는 곳이 드농 미술관인데 1층은 헬레니즘시대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여기서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물부문이 시작되고, 2층으로 올라가면 그랜드갤러리에 이르는데 이곳에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진귀한 회화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18-19세기 프랑스회화, 14-18세기 이태리, 네델란드, 독일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소장품이 30만점이 넘는 방대한량의 세계 최대의 미술관 일 뿐더러 세계 구석구석의 미술품과 걸작의 예술품들을 망라해 놓아 미술관의 컬렉숀은 6개 부분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1): 고대 오리엔트부문( 1, 2층)
2): 이집트 부문(1,2층)
3): 그리스, 로마부문
4): 조각부문91층) ,중세 프랑스와 미케란젤로의 조각품
5): 르네상스이후 근세와 근대의 그림부문(2,3층)
6): 보석류와 공예, 가구류 (2층)
워낙 방대한 양이 전시되고 있기 때문에 하루, 이틀에 관람으로 모두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랑 갤러리, 반대쪽에 작은 갤러리가 또 있는데 들라크루아, 다비드, 쿠르베 등의 작품이 전시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대형그림으로 다비드의 “나포레옹의 대관식” 들라크루아의“키오스섬의 학살”등이 있고 언제나 사람들로 꽉차서 혼잡하지만 절대 유리관에 보관된 곳이 중앙 갤러리이다. 여기에는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성안나와 성모자”이 전시되어 있고 라파엘의 성모상도 전시되어 있다.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등을 보기 위해서는 3층으로 올라가야한다.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이박물관은 프랑수아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 프랑스 역대 국왕
들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프랑스혁명이후인 1739년 국민
의회가 소장품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서 정식 문을 열개 되었다. 정사각형의 요새였던
원래의 루브르성은 17세기에 있었던 필립 오귀스트 성곽의 일부였으며 샤를5세의 치정 하에
서 궁정도서관을 겸비하게 되었다.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는 100여개의 박물관이 있다. 프랑스 문화를 대표하는 루브르 박물관, 인상파 화가들의 명작을 감상 할 수 있는 오르쎄박물관등 대형 박물관에서부터 소규모 테마 박물관들이 거리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원래는 왕궁 이었는데 프랑스 혁명이후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파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지켜주는 대표적인 루브르 박물관은 증,개축을 거쳐 역대 왕들이
놓은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으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루브르의 상징이 되었다.
로뎅박물관(RODIN MUSEUM)
앵발리드 동쪽의 바렌 거리에 있다. 이 미술관은 1728년에 세워진 로뎅이 만년에 살다가 죽기 1년 전에 그의 집과 전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였다.
로뎅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생각하는 사람”, “지옥문”, “깔레의 시민들”, “입맞춤”과 그의 제자 동료, 연인 이었던 까미유 끄로델 의 작품 등 127개의 청동 조각품과 40여개의 대리석 작품등 불후의 명작들과 그가 수집한 고흐와 르누아르 모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작품중 “지옥문”은 인간의 온갖 괴로움을 그린 미완성의 대작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손질을 했다고 전한다.
베르사이유궁전(Chateau de Versailles)
찬란했던 절대왕권 절정기의 상징 베르사이유는 1682-1789년 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수도이자 통치본부였다.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왕권을 누렸던 루이 13세가 사냥을 위한 별궁으로 쓰던 것을 파리의 루브르궁에 싫증을 느낀 루이 14세(1661년)가 파리의 혼란을 피할 목적으로 정원사 르노르트, 건축가 르 브, 르브랑 등에 의해 1662-1710년까지, 50년에 걸쳐, 지은 방대한 규모의 궁전이다. 이 곳은 1682년부터 프랑스 혁명당시인 1789년 10월 6일 왕과 그 가족이 살던 곳이다.
루이 14세는 파리를 떠나 베르사이유에서 귀족들을 규합하는 계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전제 왕권의 기틀을 다졌다. 베르사이유에서 왕의 행동은 철저하게 프랑스궁전에 에티켓에 따라 행하여 졌고 궁내에서는 귀족들을 위한 축제와 파티가 연일 계속되어 이로 인한 궁전 문화가 전 유럽의 문화를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궁전은 19세기 보불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현재 베르사이유는 2차대전 후 복구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며 화려함에 극치를 보여준 당대의 최고의 작품이다. 이 곳에 있는 유명한 장소 몇 군데를. 소개한다.
왕의 거처(Grands Appartement du Roi)
왕의 거처는 수차례의 개조를 겪은 것으로 현재의 모습은 샤를 르 브렝이 그리스 로마 신화 상에서 태양(루이 14세의 문장)을 상징하는 아폴론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에 해당하는 일련의 방을 착안, 1671년에서 1681년에 걸친 작업 끝에 갖추어졌다. 북쪽 화단 방향에 일렬로 들어선 이 일곱 개의 방은 왕의 궁정 연회시 각기 다른 용도(식사, 놀이, 춤, 당구..)로 사용되었다. 왕이 대리석 안뜰 방향의 방에 기거하기 시작하는 1684년 이래 왕의 거처는 국왕의 알현과 궁정 유희 목적으로만 사용 되었다.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
베르사이유 궁전 가운데서는 가장 화려한 곳이다. 17개의 커다란 아취형 창문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맞은편의 17개의 커다란 아취형 거울이 서로 대치되어 있는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거울에 그대로 반사되어 방 전체가 눈부시게 화려하다.
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성의 서쪽 면은 거울의 방(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2.3m), 평화의 방, 전쟁의 방이 이루는 조화가 압권을 이루는 부분이다. 작업은 1678-1686년 까지 건축가 줄 아르두앵 망사르와 화가 샤를 르 브렝이 담당하였다. 둥근 천장의 그림은 루이 14세가 친정을 선언하는 1661년부터 니메그 평화조약이 체결된 1678년까지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거울의 방은 일상적으로는 왕이 성당으로 향하는 통로이자 왕과 왕비의 거처를 연결하는 통로였으며, 궁중 대 연회나 왕족 결혼식 및 대사 접견에 사용되었다.(본 행사시 왕좌가 거울의 방에 놓였다.)
왕비의 거처(The Queen's Apattment)
그 당시 화려한 생활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왕의 침실과 접견실 등 왕의 주거공간인 왕의 침실은 1715년 루이 14세가 77세 나이로 임종을 맞기도 한 장소이다.
왕의 거처와 동시에 개조된 왕비의 거처는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된다. 마리 앙투와네트를 마지막으로 여러 명의 황태자비들이 거쳐 갔으므로 수차례의 재작업이 이루어져 왕의 거처가 띠는 통일성과는 다른 다양한 장식형태를 볼 수 있다. 이 거처에서는 왕비가 공개적으로 생활을 했으며(대 침실에서 왕손 분만) 이후 보다 은밀한 사생활을 위해 빛이 잘 드는 정원방향으로 소규모 거처를 증축하였다.
왕과 왕비의 거쳐 천정화
왕의 거쳐 천장 장식은 샤를 르 브렝과 그 제작팀이 작업을 전담한 것으로 R-A, 우에스가 천장화를 그린 풍요의 방과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방,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방(G, 블랑샤르, C, 오드랑, Ch, 드 라 포스의 천장화), 전쟁의 신 마르스의 방(C, 오드랑, J-B,쥬브네, R-A, 우에스의 천장화), 신의 사자 머큐리의 방 혹은 침대의방(J-B, 드 샹펜느의 천장화), 아폴른의 방 혹은 왕자의 방(Ch, 드 라 포스,G, 블랑샤르의 천장화)까지를 포함한다.
왕비의 거처는 호화로운 침실(F, 부쉐의 천장화)과 귀족의 방(M, 코르네유의 천장화), 왕비의 대기실 혹은 만찬의 방(C, 비뇽과 A, 과예의 천장화), 왕비 근위대의 방(N, 코이펠의 천정화), 근위대의 연회실이었던 대관식의 방(J-L, 그로의 회화작품과 A-F, 카예의 천정화)으로 이루어진다.
전투의 방( The Hall of Battles, 불규칙 개방)
루이 필립에 의해 1837년 공개된 전투의 방은 왕족의 거처였던 성의 남쪽 면 2층에 있다.
루브르의 대진열실을 본 떠 지은 너비 13m, 길이 120m,에 이르는 이 방은 프랑스 군대의 승전을 기리고자 496년의 롤비악 전투부터 1809년 와그램 전투까지를 묘사한 33점의 회화작품, 82점의 군인흉상, 프랑스를 위해 죽어간 영웅에게 경의를 표하는 16개의 청동 각판이 전시되어 있다. 성의 관람은 부르봉가의 일족인 오를레앙의 루이 필립이 권좌에 오르는 7월 혁명 당시가 묘사된 1830년 방을 끝으로 마무리 된다.
스페인(SPAIN)
유럽의 남서쪽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해 주는 지리
적 특성으로 기원전 1000년 전부터 8세기경까지 계속된 외세의 침입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세계의 여러 위대한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로마인, 비시고도인, 아랍인등은 오랫 동안 스페인을 지배하면서 인종과 문화의 혼합을 가져왔으며 스페인 특성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근대 스페인은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여 페르란도왕과 이사벨여왕의 지배 하에 정치,
경제, 영토의 통일을 이룩하였고, 카를로스1세 황제 때는 유럽의 최강국으로 부상하였고,
펠리퍼 2세 왕은 뒤 이는 함스브르크 왕가의 계승과 함께 스페인은 유럽에서 위치가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나 예술에 있어서는 세르반데스, 깔떼론, 피카소등 불후의 예술가들을 배출
하였다.
스페인하면 유럽에서도 멀리 떨어진 정열적인 투우의 나라 라고 먼 느낌이 들었으나,
루르드에서는 피레네산맥만 넘으면 바로 스페인 땅이라 꼭 가 보고 싶었던 나라임으로
9/18일 06;42분 루르드를 출발 스페인 국경도시 이룬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가는 차
창가로 비추는 아침 햇빛 , 눈부신 태양, 이룬항은 너무나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10:30분에 이룬에 도착 비싼 예약료를 주고 스페인의 고대도시 팜플로나로 떠났다.
팜플로나(PAMPLONA)
오랜 성곽도시인 팜플로나는 로마의 총독이었던 폼페이가 만들었다고 한다. 9세기 이곳은
나바라왕국의 수도로 많은 유적이 있으며 이곳에서 유명한 축제 “산페르미네스”는 매년 7월6일-14일 까지 황소달리기 시합이 유명한데 특징은 끊임없는 파티로 광란의 축제이다. 작은 구시가의 모습은 고풍스럽고, 공원에 정원이 있어 상쾌하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이곳에서 신혼부부들이 결혼기념 촬영 장소로 유명하여 우리나라 덕수궁과 비슷하여 많은 신혼부부가 멋진 포즈를 취하며 좋은 추억의 장소를 남기고 있었다. 바로 옆에 성당 앞마당에서는 결혼 세레모니가 한참이라 피로를 풀겸 여성 댄싱팀, 남성들이 민속춤과 노래를 부르며 각종 악기로 흥을 돋구며 흥겹게 축하공연을 보았다. 옛 성과 구도시를 관광한 후 역으로 나와 역구내 레스토랑에서 생맥주를 마시기 너무 맛있었다. 팜플로나는 새로운 공장지대로 신설하는 공장도 많아서 인지 아파트를 많이 신축하고 있었다.
스페인사람은 정열적이고 친절하고 공원에서도 여러 쌍이 부등켜 안고 사랑의 행위로 키스
를 맛있게 하는 모습, 추하지 않고 싱그럽고 아름답다.
당초 이곳에서 숙박 예정 이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프랑스 파리로 가기 좋은, 산 세바스띠안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오후 18:49분 출발하는 열차로 예약하였으나 열차가 26분을 연착하여 07:25분 출발 산 세바스띠안에는 21:20분에 도착하여 관광안내소를 찾으니 없어 난감
하였다. 처음 온 곳이라 우선 이곳에 지형을 알기위해 구내 매점에서 시내지도를 사가지
고 숙소를 찾았으나 어딘지 몰라 무조건 역전을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가 숙소를 찾으려고 다리를 건느는데 젊고 발랄한 여성들이 여러 명이 있어 숙소를 물으니 친절하게 펜숀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을 알려주어 찾아 갔으나 모두 만원이라 여러 곳을 찾아 힘들게 숙소를 정했다. 산 세바스띠안의 거리는 휘황찬란하고 활기차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밝고 들뜬 기분이다. 펜숀을 들어와 보니 젊은 여성으로 숙소가 거의 차 있어 남녀 구분하여 하루를 묵게 되었다. 체크인을 한 후 주인의 소개로 레스토랑에 오니 음식이 푸짐하고 저렴하여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산 세바스띠안(SAN SEBASTIAN)
산 세바스띠안(바스크어 도노스띠아)은 스페인 북부지역의 대서양과 깐따브리아해 해안의
조개모양의 깨끗한 만에 자리 잡은 작은 항구로 산업과 금융의 중심도시, 고대도시로 고딕양식의 성당, 인구 18만 여명이 살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이다. 아름다운 모래를 가진 해수욕장은 스페인의 부자 들이 찾는 사치스러운 휴양지로 오랜 명성을 날리며, 가정적이고 따스함과 친절함이 있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이곳은 피레네산맥이 끼어 있는 여름 리조트이다.
완벽한 초생달 모양의 해변에서 밤은 황홀하다. 밤이 되면 생기가 돌며 활기차며 거리의 노촌 카페나 레스토랑은 관광객으로 흥청댄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바스크족은 로마제국과 이스람교도 그리고 바다로부터 들어온 침략자
들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바스크족은 스페인의 파이스
바스크와 나바라 그리고 인접한 프랑스의 남서부의 페바스크에 수천 년간을 살아온
풍부한 문화와 자랑스런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 그들만의 언어와 독특한 신체의 외모를 갖고 있으나 이런 뚜렷한 정체성 때문에 스페인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바스크족은 독립을 원 하였으나 프랑코 정권시절 에는 바스크족이 잔인하게 억압 당 하자 ETA는 폭력 테러를 하게 되었고 1970년대 스페인 민주정권으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다.
자랑스런 바스크 지역사회는 도시 정비에도 대단한 주의를 기울이며 청결한 거리, 마약과
매춘이 없는 거리를 만드는데 힘쓰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 스페인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이곳은 프랑코정권 훨씬 이전부터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다. 놀랄만큼
여유롭고 활기차고 생기가 도는 이 도시는 아름다운 바이아델라 콘차만을 감싸 돌고 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해변, 그리고 지평선을 영원한 초록빛으로 물들게하는 태양과 절벽, 파도
소리, 우르굴성, 16세기의 산 비싼떼교회, 18세기 산타마리아 델꼬로교회, 꼰스띠뚜씨온광장,
미라마르궁전, 꼰차거리등 유명한 명소가 많다. 우르굴산은 바이델라 콘차만 동쪽에 솟아 있고 그 산위에는 낮은 성벽이 있고 예수님의 상이 발아래 펼쳐지고 있어 해변가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너무 아름답다. 관광객들은 해변에서 즐길수 있고 값싼 쇼핑도 할 수 있는 우아한 항구도시 이곳에서 산띠아고(야곱) 데꼼보스떨라까지 유럽인의 제1관광코스이며 매력적인 순례코스가 있으나 시간이 없어 다녀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유럽에서는 8세기 전부터 사도 야곱에 대한 숭배는 순례자들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은 영혼적인 이유가 우선이지만 순례코스에서 살고 있는 지방과 마을사람들의 친절, 다양한 문화, 경치에 대한 각자의 다양한 인상과 경험 그리고 순례기간동안 일어났던 에피소드등은 순례자가 줄 수 있는 풍부한 삶의 경험도 매력이다.
벨기에(BELGIUM)
브뤼셀(BRUSSELS)
벨기에의 왕국의 수도, 브뤼셀은 유럽 주요국가들 중에서 작은 나라 수도이며 천년이상의
역사를 가진 고도이다. 물론 파리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천년이란 도시의 연륜 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 곳곳에 중세시대의 건물이 가득하다. 또한 NATO본부가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중앙 광장이 있다. 서유럽 교통의 중심지인 브뤼셀의 인상적인 15세기 시장광장 그랑플라스는 수 공예품과 다이아몬드, 첨단공학기술을 지니고 있는 작지만 강한 나라 .
이다. 브뤼셀은 브라반트 평원의 심장부에 있으며 제네강이 남에서 북으로 시가를 가르고 .
있다. 17세기경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문인들이 이곳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라
고 평할 정도로 아름다움, 아기자기하고 활기를 가진 도시이다.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네델란드 암스텔담, 독일 베르린과 문헨, 스위스취리히 등지에서
국제열차들을 이용하여 쉽게 올수 있다.
빅토르 위고가 “세계 제1의 화려한 광장” 이라고 찬양했고 장꼭도는 “현란한 극장” 이라고
그랑플러스를 이야기 했다. 그 말대로 세로 110m, 가로 70m의 돌로 깔린 광장의 주위에는 중세로부터 아름다운 건물이 즐비하고 브뤼셀의 제1의 명소가 되었다.
이 건물들 중에서도 한층 크고 화려한 시청사가 있고 중앙에 뾰족탑은 90m가 넘으며, 탑 위에는 악마를 퇴치한다는 시의 수호천사 미카엘이 황금빛을 띠며 빛나고 있다.
그랑프라스에서 레띄보 거리를 따라 100m정도 가면 모서리에 조그마한 소년의 상이 있다.
이 소년의 상에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예부터 같은 모양의 석상이
이장소에 있었는데 벌거벗은 소년이 소변을 보고 있는 모양이 재미있어 시민들에게 브뤼셀의 명물로 알려졌다가 지금에 와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 지게 되었다.
생 미셀성당
브뤼셀에서 가장 오래되고 격이 높은 대성당이다. 1226년 착공하여 300여년에 거쳐 만들어진 벨기에에서 고딕 건축물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며 정면 부분이 현재 모양으로 완성된 것은 15세기 이다.
지극히 선을 강조한 구성인데다 약간은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70m라는 실제의 높이 이상으로 시가지 위에 솟아있다. 정면에 서서 이 성당을 올려다보면 장중한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스테인글라스도 유명하다.
순례기를 마치면서
1. 이번 성지순례를 통하여 교황님이 계신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물의도시 베네치아, 만년 설의 알프스의 영봉 융프라우요흐에서 Monchsioch-hutte(3650m) 까지 만년설 트레킹, 설산에서 미사, 스위스 툰호수에서 유람선 여행, 골드패스라인 열차를 타고 스위스의 아름다운전경, 성모님이 발현하신 루르드성지에서 침수와 촛불행렬, 스페인 산 세바스띠안 항구도시의 활기찬 모습 등 너무나 아름다운 세계적인 관광지를 무사히 다녀오게 하여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드립니다.
2. 성지 순례시 우리를 친철하게 안내하여주신 로마의 서 부제님, 루르드의 김 그라시아원장수녀님, 좋은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여주신 트르와 수녀원의 이사벨라총장수녀님과 모든수녀님, 로마와 파리의 민박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신 자매님, 모르는 길을 친절히
안내하여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그분들이 항상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3. 장기간의 자유여행이라 불편한일도 많았는데 회원들의 아무 불평 없이 협조하여주어 즐겁고 추억에 남는 여행을 하여주신 회원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4. 우리는 이번 순례를 통하여 조금 힘은 들었지만 세계 어느 곳이라도 찾아 갈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고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사랑을 배웠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유럽성지 순례기를 읽어주신 회원님과 모든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