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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김용매
거리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린다. 나무들은 그동안 빨아들였던 수액을 휘발시키며 기나긴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바싹 마른 낙엽은 바람결에 따라 뭉텅이로 몰려다닌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딸, 미진이는 어디에 있을까. 딸은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후 집을 나갔다. 휴대전화를 가져가지 않아 연락할 방법이 없다. 딸을 생각하니 몸도 마음도 춥다. 혜숙은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오늘은 딸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리라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G 대학교 맞은편 골목에 들어섰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70~80년대 풍경이 펼쳐졌다. 좁은 골목길은 동물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굽어 있고 작은 방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밀집해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취생이거나 아르바이트생이거나 어르신이라고 얼마 전 TV에서 보도를 봤다. 한적한 뒷길로 들어섰다. 철학관이나 대나무에 오방색 깃발을 꽂은 점집이 꽤 보였다. 혜숙은 점집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앞날과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사치라는 생각에 마음을 꾹꾹 누르며 그 앞을 지나쳤다. 혜숙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마음의 갈피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주소를 들고 집을 찾기란 만만치 않다. 아파트 조사는 사람을 만나면 90%가 끝난 셈이다. 주택가는 건평 수와 대지 평수도 다르고 상가가 있으면 상가 넓이를 빼야 한다. 시간이 두 배 이상 필요하다. 363-2와 363-3번지가 요도(要圖) 상에는 분명히 있는데 찾을 수 없다. 그럴 때는 통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던 총 관리자의 말이 생각났다. 통장을 만나러 갔다. 통장이 골똘히 요도를 봤다. 골목을 빠져나와 363-1과 맞붙은 데를 찾아 골목길을 에돌아 뒤쪽으로 간다. 번지수가 다르지만 두 집이 나타났다. 빠진 집을 조사구에 넣었다.
혜숙은 딸도 가까운 곳에 있는데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딸이 쳐다봐 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챙겨 주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마음이 아프다고 했을 때, 자신의 슬픔에 겨워 못 본 척, 못 들은 척한 것을 후회한다. 남편 장례식 치르는 동안 공허하고 차갑던 딸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딸의 충격도 자신 못지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왜 안 했는지 뼛속까지 저리고 아프다.
혜숙의 친구 경자가 집 가까이 살고 있다. 경자의 딸이 미진과 친구였다. 미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종종 연락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이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혜숙은 밥을 위해, 미진을 위해 오늘도 차가운 거리를 종종거렸다.
“자, 여기를 주목하세요.”
총 관리자가 외쳤지만, 조사원들의 웅성거림에 이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혜숙은 총 관리자와 조사원들을 바라봤다. 조사원들의 입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사무실 안을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혜숙은 40여 명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로 숨이 막혔다. 자리에서 일어나 환풍기를 돌렸다. 동사무소 지하 회의실이 용암동 인구 주택 총 조사상황실이다.
지난달, 혜숙은 인구조사원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신청했다. 인구 주택 총 조사에는 전수와 표본이 있었다. 혜숙은 표본을 맡았다. 전수는 나이와 생년월일, 가구주와의 관계, 학력, 주택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을 조사했다. 표본은 그 집안을 잘 아는 성인이 대답해야 할 정도로 문항이 많았다. 오 년 전의 주거지와 직장명, 직장 지위와 근무부서, 주거의 형태와 임대료, 혼인 관계, 고령자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하는가, 민감하게 생각할 부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원들에게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과 필기구가 들어 있는 노란 가방이 지급됐다. 관리자는 조사구 경계를 확인시키고 요도를 나눠 줬다. 요도는 필요한 길과 건축물을 자세히 그린 도면이었다. 거기에는 항공사진으로 찍은 건물들이 500분의 1로 축소되어 있었다.
“우선 요도를 들고 각자 조사 구역으로 가세요. 거처 및, 가구 번호를 부여하고 안내 전단을 배부하세요. 그리고 대문 우측 위에 가구용 스티커를 가구 수대로 부착하면 됩니다.”
총 관리자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근데 나는 우리 집하고 가까운 데를 조사구로 해주지, 버스를 타게 생겼네.”
짧은 단발머리에 안경을 낀 호박꽃 같은 수더분한 조사원이 입술을 삐쭉댔다. 혜숙이와 호박꽃은 같은 팀으로 옆자리에 앉았다. 호박꽃의 불만이 도화선이 되었을까. 여기저기서 조사원들 불만이 쏟아졌다. 원룸이 많아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겠다, 벌판에 집들이 서너 채 있어 차량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기름값 보조는 없는지, 다른 사람보다 가구 수가 많다고 투덜댔다. 혜숙은 요도를 자세히 살폈다. 집 주변의 아파트 두 동과 G 대학교 근처의 주택가였다.
“집이는 불만 없어?”
호박꽃이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혜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남들은 17일간의 아르바이트라고 가볍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그녀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을 해야 했다. 좋고 나쁘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바쁘게 일을 하면서 남편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까지도 덜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전에 인구조사 할 때 경험담인데, 아침저녁을 찾아가도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서 점심에 갔제. 젊은 남자가 빤쓰만 차고 문을 열더라고. 한쪽 눈을 감고, 나는 안 봤으니까 옷이나 걸치고 나오소. 그랬더니 그 사람이 식전 해장부터 할망구가 잠 깨운다면서 문을 닫고 들어가는데 어찌나 부아가 치미는지 혼났당께.”
호박꽃의 말에 폭소가 터졌다.
“어떤 여자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는데 30분이나 기다려도 조사에 응하지 않더라고. 할 수 없이 집주인의 도움을 받았지. 집주인이라고 하니까 그제야 문을 열어 주더라고. 근데 말이여 친척이라며 성인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서 생활한다고 생각해 봐. 그것이 어떻게 친척이냐고 그럴 때는 내가 결혼 시켜 버려. 인구가 줄어든다고 난리 아닌가. 빨리빨리 결혼해서 생산을 시켜야지.”
선배 조사원의 말에 혜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생활과 개인 정보 때문인지 집에 있으면서도 조사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원룸이 많은 지역은 수사관들이 잠복하는 것처럼 골목에서 기다렸다.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을 쫓아가도 조사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한 조사구가 대략 70가구였다. 조부모와 같이 삼대가 사는 집은 손꼽을 정도였다. 편부모 가정과 1인 가구와 가족이 아닌 남남으로 이루어진 가구가 상당히 많았다. 장년층의 남녀가 가족이 아닌 남남으로 살거나, 동남아시아나 외국 여성과 결혼한 가정도 있었다. 재혼가정도 많이 있어 달라진 결혼 풍속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날 조사할 구역을 끝내면 상황실로 복귀했다.
책상에 앉자 조사표를 정리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혜숙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인구조사를 그렇게 해요?”
“예. 무슨 말씀인지요.”
“생년월일하고 나이, 이름은 주민등록상에 나와 있을 것이고, 남북 이산가족을 알아서 뭣 하려구. 집은 건축물대장을 보면 될 것이고 어느 직장을 다니는지 왜 말해야 하냐고, 사생활 침해를 하는 이유나 알아봅시다.”
남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북소리처럼 귓전을 두드렸다. 표본조사에 대한 불만이었다. 혜숙은 이 조사는 저출산, 고령화, 주거의 질과 복지 등을 위한 중요한 자료로만 활용될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럼 정부의 정책을 위해서는 국민의 사생활은 아예 없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조사요. 혹시 선거에 이용하려는 거 아니요?”
혜숙은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꼭 필요한 조사라고 아는 대로 설명을 했다.
“인구조사에 몇백억의 홍보비를 쓴다면서, 그 돈으로 조사나 하지.”
남자는 숨을 씩씩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혜숙이 대꾸할 틈도 없었다. 불만 섞인 전화가 종종 왔었다. 남자가 대부분이었다. 여자들은 조사에 적극적인 데 비해 남자들은 대체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경제가 어려운 탓인지 집에 있는 남자들이 많았다. 아줌마들이 얼마나 제대로 된 조사를 하겠냐며 대놓고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었다.
G 아파트 정자에서 아침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다.
“어이 아줌마 술 한잔하고 가시지, 인구조사 돈 받고 한대며, 여기 사람들 많으니까 한꺼번에 조사하고 술값 좀 내놔 봐.”
불콰한 낯빛의 남자가 혜숙의 어깨에 매달린 인구조사 가방을 보며 아는 척한다. 혜숙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여자 찾을 필요가 없다니까 가까이에서 찾아.”
홍일점인 여자가 남자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웃는다. 그녀의 나풀거리는 붉은색 곱슬머리 파마머리는 얼굴과 같은 빛이다. 눈가의 시 푸르뎅뎅한 멍 자국과 번들거리는 빨간 입술이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치마를 입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모양새에 혜숙이 시선을 돌렸다. 정자 바닥에는 김치 가닥과 국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제가 바빠서 나중에 하겠습니다.”
혜숙이 몸을 아파트 방향으로 돌렸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쫓기듯 102동 출입구로 들어섰다.
된장찌개 냄새에 혜숙의 얼굴이 풀어졌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했던 신경들이 부드러운 솜털로 변한다. 복도식 통로에 휠체어를 탄 여자가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얼굴은 구슬같이 반짝거리며 팽팽하다. 손은 닭발처럼 곧게 뻗어 있다. 손가락 끝부분으로 갈수록 길이가 짧고 두께는 얇아져 손끝이 삐쭉 빼쭉 깎은 연필 같다. 또 발은 발등에 달걀을 올려놓은 것처럼 볼록 솟아 있고 발끝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녀가 혜숙을 빤히 쳐다본다. 혜숙은 가볍게 묵례를 한다. 101호 벨을 누른다. 벨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장 났나 싶어 다시 누른다. 문이 벌컥 열렸다. 키 큰 남자가 고개를 내민다. 뒤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났다. 혜숙이 돌아보니 그녀가 웃고 있다. 101호 내부는 현관에서 방까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색색의 전구가 매달려 있다.
“인구조사 왔습니다.”
남자가 무표정하게 혜숙을 쳐다봤다. 잠시 후, 입과 손을 동시에 움직인다. 물속에서 붕어가 뻐금거리는 것처럼 소리가 나지 않는다.
“거기 벙어리야. 중학교까지 다녔다고 하니까 글로 써 주면 대답할 거야.”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서 얼굴을 디민다. 101호 초인종을 누르면 전구에 불이 들어와 방문객이 왔다는 것을 알고 총각이 나온다는 부연설명도 덧붙인다. 혜숙이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 앞에서 남자에게 조사표와 작성 요령이 나와 있는 본보기를 펼쳐 줬다. 한 장의 조사표가 그의 이력을 알려준다. 나이는 38세 미혼 지난 일주일 동안 일을 못 했고 한 달 전부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상태다.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는 사회로 나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 메모지에 적힌 일자리를 부탁하는 글귀가 혜숙의 가슴을 울렸다. 1인 가구라서 조사표 작성이 금방 끝났다.
102호 벨을 누른다. 안에서 반응이 없다. 휠체어 여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혜숙의 뒤를 따라다닌다.
“102호는 돈 벌러 가서 저녁에 오는데.”
“아주머니는 몇 호 사세요?”
“나 105호에 살지. 우리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조사하려면 안으로 들어와.”
조사원 안전 수칙에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문구가 있다.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될 수 있으면 응답자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라는 교육을 받았다. 혹시 모를 성범죄에 대한 예방책이다. 휠체어 여자가 엉덩이를 쭉 빼고 허리는 반으로 굽힌 채로 방 안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방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은은한 방향제 냄새가 났다. 안방과 주방, 휠체어가 지날 정도의 통로와 작은 방과 샤워 부스가 있는 화장실이 있다. 실 평수로 7평 정도 된다.
“가구주가 누구예요?”
휠체어 여자는 가구주가 본인이라고 하면서 음료수를 권한다. 남편과 사별했으며 초등학교 1학년 딸이 있다. 친정에서 물려준 재산이 조금 있지만, 생활보장대상자로 근근이 살고 있다며 얼굴에 그늘이 진다. 혜숙은 머뭇거리다가 병명을 물어봤다. 그녀의 치부를 묻는 것 같아 혜숙의 목소리에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대학교 다니던 오빠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어. 오빠가 대학병원에 입원했지. 내가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오빠 간호를 했잖아. 응급실 바닥에서 잤는데, 입이 돌아가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끓으면서 아프더라고. 그때 약을 제대로 못 써서 뼈가 녹으며 손발이 뒤틀어졌어. 결국, 오빠는 죽고 나는 평생 이렇게 병신으로 살게 되었지. 류머티즘성 관절염이야.”
휠체어 여자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래요. 고생했겠네요. 그래도 딸이 있어서 참 다행이네요.”
‘딸’이란 말에 휠체어 여자의 얼굴이 환해진다. 혜숙이도 딸을 떠올리면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모든 부모의 공통점이리라. 딸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언제쯤 딸과 살 수 있을까.
“내가 딸을 낳으려고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해. 부모님이 아들은 죽고 딸이 병신 됐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이여. 딸을 처녀 귀신 만들 수는 없고 새끼라도 있으면 의지가 된다고 신랑감을 물색했대. 신랑감이 아니라 종마였지. 30살 넘은 총각인데 폐병에 걸려서 몇 달 남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했어. 며칠 후에 우리 집 별채에다 신방을 꾸몄지. 임신 3개월 됐는데 신랑이 증세가 심해지니까 시댁에서 데려갔지. 나중에 죽었다고 연락만 받았지 뭐.”
혜숙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추임새를 넣듯 맞장구를 쳤다. 인구조사를 수월히 하려면 그 동네를 잘 아는 그녀와 같은 조력자가 필요하다. 319호는 시가와 친정 식구 합쳐 12명이 산다. 아파트 통틀어 대가족이라고 알려준다. 소문에 의하면, 그 집은 포개서 잘 거라면서. 407호는 아줌마하고 총각이 산다. 아무래도 애인 사이 같은데 친척이라고 우긴다. 인구 조사할 때 세밀히 좀 알아보라며 호기심을 드러낸다. 511호 할머니는 인기가 많다고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들어간다. 아들이 일찍 죽어 며느리와 산다, 집 안 통로에서 잠을 잔다고 하면서 혀를 찬다. 며느리와 손자들을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봐주는 천사라고 칭찬한다. 611호는 불량 소년 아지트라고 하면서 입을 씰룩인다. 또 정자에서 남자들과 술 마시는 여자는 1209호 여자였다. 남편이 중풍에 걸렸는데 수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장애인들이나 노인이 사는 집은 문을 잠그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벨을 누르고 인기척이 없으면 문을 잡아당기라고 알려 준다. 그녀는 101동에 대한 정보를 꿰차고 있다. 혜숙은 그녀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611호 벨을 누른다. 집 안에서 시끄러운 랩 음악이 들렸다. 다시 한번 벨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다. 문을 꽝꽝 두드렸다. 사람이 있다면 찰거머리 아니라 껌처럼 들러붙어서라도 조사를 해야 한다는 총 관리자의 말이 떠오른다. 조사를 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다.
“누구야?”
잠시 음악이 멈추더니 문이 열린다. 미진이 또래의 남자아이가 갈퀴 눈으로 째려본다. 그 아이 뒤로 대여섯 명의 남자와 여자애들이 혜숙을 쳐다본다. 눈동자들이 초점을 잃고 멍하게 풀어져 있다. 집 안에서 이상한 열기와 야릇한 냄새가 났다. 현관문을 열면 밖에서 안방을 거의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물이 담긴 페트병이 방 안에 여기저기 늘어져 있다. 담배꽁초가 페트병 속 물 위에 떠 있다. 비닐봉지와 접착제가 지저분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게 발 디딜 틈이 없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아이가 봉투를 벗는다. 페트병에 침을 뱉는다.
“어른들 안 계세요?”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재혼했는데, 왜요? 뭐 돈 받으러 왔어요? 아님 꼰대가 보냈어요?”
남자아이 말투는 어눌하지만, 말이 뾰족하다. 상당히.
“아니, 아줌마는 인구조사원인데 조사에 잠깐만 응해 줄래요?”
혜숙은 방안을 꼼꼼히 톺아봤다. 아이들이 무엇을 하나 궁금했고, 또래의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으로 걱정되어서였다. 접착제는 환각 물질 톨루엔이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접착제를 흡입하면 사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현실 망각 폭력성까지 생겨 청소년들에게는 독약과 마찬가지라고 알려졌다. 나중에는 시신경이 훼손되며 혓바닥까지 갈라져 세상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어지게 하는 유해 물질이다. 혹시 미진이가 있을까 싶어 고개를 길게 늘이고 살폈다. 미진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한숨이 나왔다.
“아이 씨팔, 그게 뭔데? 딴 집이나 알아보슈.”
남자아이가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간다. 혜숙이 다시 들르겠다고 했지만, 그 소리는 음악 소리에 묻혔다.
1209호 벨을 누른다. 기척이 없다. 문고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며 퀴퀴한 냄새와 온기가 혜숙의 몸을 덮쳤다. 혜숙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요?”
작고 힘없는 남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인구조사원입니다. 잠깐만 조사에 응해 주세요.”
“정자에서 마누라가 술 마시고 있을 테니 거기 가서 물어보시오.”
붉은 얼굴에 새빨간 입술이 생각났다. 조사에 잠깐만 협조해 달라고 다시 부탁한다. 혜숙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방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현관에는 남자 운동화 한 켤레와 여자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불투명 유리 사이로 커다란 몸피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모습을 드러낸다. 몸집은 크고 뚱뚱하며 머리는 민둥산이다. 얼굴이 동그란 호빵 닮았다. 왼손을 ㄴ자로 꺾은 채 떨며 왼발은 방바닥에 질질 끌고 넘어질 듯 말 듯 걸어서 위태롭게 보인다. 창백한 얼굴에 핏기없는 입술이 한쪽으로 올라가 있다.
“내가 몸이 불편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안으로 들어오시오.”
혜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부축해서 침대에 앉혔다. 그는 중풍을 맞았다며 한숨을 쉰다. 방안을 커다란 침대가 점령하고 있다. 거기에는 울룩불룩한 욕창 방지용 매트가 깔려 있고 귤껍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중풍은 음식을 조절하는 신경 기능이 떨어져 대체로 많이 먹는다고 누군가에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혜숙은 남편이 떠올랐다. 그의 사인은 뇌출혈이다. 그가 만약에 깨어났으면 1209호처럼 반신불수가 되었거나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남편이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딸도 집을 나가지 않았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 그녀는 시간을 과거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남편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오늘따라 남편이 더 그립다.
“인구조사는 나중에 하시오, 오늘로 인구가 하나가 줄….”
“네?”
혜숙은 제 생각에 젖었다가 얼른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잘난 마누라한테 듣고 내 이야기 좀 들어 주시오, 여편네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먹을 것을 감춰 놨다가 개밥 주는 것처럼 찔끔찔끔 주고, 아무 데서나 자빠져 자고….”
남자의 목소리가 굵어지면서 목에 핏대가 선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다. 혜숙은 겁이 덜컥 났다.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아저씨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제가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남자 얼굴이 흐려진다.
“역시 나와 잠깐이라도 함께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군, 마누라는 식충이 취급하고 딸년은 눈길도 안 맞추려고…. 부탁이 있는데 작은방 의자를 베란다에 갖다 놓고 창문 좀 열어 주시오. 답답해서 미치겠소.”
작은방 책상 위에는 책과 준비물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미진이와 같은 학년이다. 방바닥에는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다. 돌돌 말린 양말과 뒤집힌 옷들이 뒤엉켜 있어 까치발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를 꺼내 베란다에 놓았다.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칼이 되어 옷 속을 파고든다. 그가 고맙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다. 그의 동굴 같은 눈에 물기가 찬다. 그 눈을 보자 혜숙의 몸이 떨렸다. 아주머니 계실 적에 다시 방문하겠다는 인사를 하고 옆집으로 향한다.
1210호 벨을 누른다. 할머니가 밖으로 나온다. 혜숙이를 집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을 잡아끈다. 할머니가 노르스름한 호박 식혜를 조금 전에 만들었다며 혜숙이에게 건넨다.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따스함에 몸이 풀린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는 수세미같이 헝클어진 머리에 눈은 하얀 막이 한 꺼풀 덮여 있다. 앞니가 없어 자세히 듣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렵다.
“옆집은 아파트 청소해서 돈 벌지, 또 서방이 장애인이라고 보조금 받아서 금방 부자 될 것이여. 그래도 매일 쌈질이야. 나라에서 나같이 땅속으로 갈 날만 남은 늙은이를 도와줘야 하는데 맹칸 없이 쓸데없는 짓들만 한다니까.”
호적상 아들이 있어서 생활보장대상자가 안 됐다며 아들을 찾아 주든지 영세민으로 지정해 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다. 홀로 사는 어르신들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사람 그림자만 봐도 반가워한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혜숙도 독거노인 1순위다.
“개똥밭이라도 이승이 좋다고 했지만 온 삭신이 쑤시고 아파서 하루라도 빨리, 자다가 죽는 게 내 소원이야.”
할머니가 신경통약을 입안에 쏟아붓는다. 마치 과자처럼. 혜숙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집으로 향한다. 물기를 잃은 낙엽들이 발밑에 밟힌다.
혜숙은 저녁을 일찍 먹고, 두툼한 잠바와 장갑을 끼고 G 대학 조사구로 갔다. 가로등 불빛을 동무 삼아 골목 입구를 서성거렸다. 집마다 창문으로 보이는 불빛을 보면 혜숙의 가슴도 훈훈해졌다. 그러나 불빛이 없는 깜깜한 창문을 보면 가슴이 시렸다. 딸이 친구 집에서 불편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골목에 사람이 나타나면 걸음 보폭을 맞추며 따라갔다. 골목에 포주가 뜬 줄 알았다면서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다. 혜숙은 마음이 서글프다.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밤에 나오지도 않았고, 그런 소리도 듣지 않았을 텐데. 모두가 혜숙의 자업자득이다.
미진이가 중학생이 되자, 혜숙은 하루하루가 무료했다. 부업을 알아봤었다. 남편은 자신이 일을 더 하겠다며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했다.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혜숙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깜짝 놀랐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혔다. 그런 전화는 받지 않았었다.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미진의 음성이 세 음절 나더니 아무 번호나 누르라는 논평이 나왔다. 콜렉트콜 전화였다. 번호를 눌렀다.
“엄마, 나 친구네 집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곧 집으로 들어갈게. 엄마, 건강하세요.”
미진의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혜숙은 가슴이 울컥하고 목이 멨다. 순간 전화가 끊겼다.
“미진아, 미진아.”
혜숙이 미진이를 애타게 불렀다. 뚜뚜, 소리만 들릴 뿐 전화기는 이미 먹통이 된 뒤였다. 미진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을 한다. 연애 시절에 군인이었던 남편과 콜렉트콜 전화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휴대전화 벨이 또 울렸다. 혜숙은 전화기를 귀에 얼른 가져갔다.
“미진이 집에 들어왔지?”
경자가 미진이 안부를 대뜸 묻는다.
“방금 짧게 통화했는데 너 혹시 뭐 아는 것 있어?”
“아니. 우리 딸이 미진이 봤다고 해서….”
혜숙은 경자가 미진에 대해서 숨기는 것 같아 계속 물어봤다. 경자는 미진이 안 좋은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다고 귀띔해준다. 안 좋은 친구라니, 혹시 일진 친구들일까, 아니면 가출을 해서 성매매를 하는 애들일까.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생겼을 때 한부모 가정 아이를 먼저 의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왕따나 폭력에 시달리는 일도 있다니 걱정된다. ‘안 좋은 친구’라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릿골이 아팠다. 집과 학교밖에 몰랐던 미진이라 믿기지 않았다. 미진이 집 근처에 있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경자가 위로한다. 미진이 가까이 있다니 다행이지만,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럴 때 남편이 곁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남편이 없음으로 친인척과의 관계가 끊어져 전적으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별이 없는 까만 하늘을 바라본다. 혜숙의 몸과 마음도 희망이 없는 까만 하늘과 같은 색이다.
다음 날, 혜숙은 어제 갔던 아파트를 찾아갔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술 파티가 열리던 정자가 조용하다. 여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남편이 구급차를 타고 가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뛴다. 휠체어 여자를 만나러 갔다.
“어이 동생, 왔는가?”
그녀는 혜숙의 손을 잡았다. 연필 같은 손가락이 구부려지지 않아 손바닥으로 잡았다. 혜숙이 친절한 사람 같다고 언니, 동생을 하자며 손에 힘을 준다. 동네에서 만나면 아는 체를 하라며 환하게 웃는다. 혜숙은 하나밖에 없는 딸도 집을 나갔는데 자신이 남을 배려할 수 있을까 몰라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대답을 대신에 한다.
“아파트에 무슨 일 있어요?”
“1209호 남자가 아파트 아래로 뛰어내렸당게.”
“어떡해!”
혜숙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동시에 온몸의 터럭들이 일어서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쿵, 소리가 나더니 사이렌이 울리고 아주 아주 징글징글했어. 살점이랑 피와 하얀 골이 널려 있는데 가엾어서 혼났네. 지금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거야. 계집년이 의자로 제 서방 잡아먹었어. 그래 놓고서 누가 의자를 베란다에 갖다 놨다며 울부짖는데 어처구니없었다니까. 집안에서 누가 거기에 의자를 갖다 놨겠어, 그렇게 할 사람이 저 밖에 누가 있냐고.”
그녀의 말이 허공에서 춤을 춘다. 혜숙은 정신을 가다듬는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정자를 향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기둥에 등을 기댔다. 심호흡하며 떨리는 가슴을 꾹꾹 눌렀다. 남편에 대한 죄책감에 한 개를 덧붙인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그때, 미진이 모습이 1층 입구에 얼핏 보였다.
“미진아!”
혜숙은 온 힘을 다해 그곳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미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변을 살폈으나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췄다. 혜숙은 6층까지 뛰어서 올라갔다. 미진이가 보이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611호가 불현듯 생각났다. 611호 문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남자아이를 밀치고 방안을 들여다봤다. 미진이 투명비닐봉지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다. 손에는 접착제를 들고 있다.
“미진아, 너 왜 이래! 뭐 하는 짓이야!”
혜숙은 신발을 신은 채 미진을 향해 돌진한다. 미진의 손에서 접착제를 낚아챘다. 그것을 방에다 패대기쳤다.
“내가 왜 이러냐고? 엄마가 더 잘 알 텐데.”
미진이 비닐봉지를 천천히 벗었다. 차가운 눈길로 혜숙을 쏘아봤다.
“뭘?”
“엄마가 아빠 죽였잖아. 나 아빠 돌아가신 날 엄마가 아빠한테 물 뿌리는 거 다 봤어. 그런데도 아빠를 죽인 엄마와 같이 살아야 하는 내가 싫어.”
“무슨 소리야, 내가 아빠를 죽이다니. 물은 아빠 정신 차리라고 했던 거야.”
“생까고 있네. 나 유치원 어린이 아니거든. 아빠 모시고 병원에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어. 그런데도 엄마는 아빠한테 물만 주고 잠자러 갔잖아.”
혜숙은 미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토록 혜숙을 죄책감에 떨게 했던 남편의 죽음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남편은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컴퓨터 게임을 했다. 혜숙은 친정아버지 제사에 갔다가 밤을 꼬박 새웠다. 더구나 생리가 터져 진통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남편이 안방과 붙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얼굴이 파리한 게 환자 같았다.
“어디 아파요?”
“머리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 토는 나오지 않는데. 당신은 얼른 더 자.”
남편은 거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혜숙은 그의 등을 잠시 쓰다듬어 줬다.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다시 누웠다.
검푸른 바다 위에 조막만 한 배가 집채만 한 파도에 떠내려가고 있다. 남편이 그 배 위에서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녀는 해변에서 미진이와 같이 남편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다. 미진이 아빠 위험해 얼른 나와, 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만 뱅뱅 돌았다. 혜숙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꿈이었다.
“물, 물 좀 줘.”
신음 섞인 남편의 외침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잠결에 잘못 들었을까, 그녀는 남편을 찾았다. 안방에 있는 화장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가 변기통을 끌어안고 있었다. 남편이 다급하게 또 소리쳤다. 그녀는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남편에게 물을 줬다. 남편은 고개를 변기에 박은 채 헛구역질을 서너 번 했다. 혜숙은 남편의 등을 잠시 두드려 주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했다.
또다시 물을 찾는 그의 목소리에 혜숙은 일어났다. 그는 눈을 감고 거실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물을 건넸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좌우로 조금씩 돌리며 눈도 뜨지 않았다. 혜숙은 들고 있던 물을 그의 얼굴에다 뿌렸다.
“앗, 차가 차가워.”
남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서 물이 낙숫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지금 장난해. 겨우 잠들면 깨우고, 뭐 하자는 거야?”
혜숙은 남편에게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한편으로 정신 차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미안해, 자꾸 토 나오려고 해서 그랬어. 어서 가서 자.”
남편의 표정은 금방 울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수건을 던져 주고 잠을 자러 갔었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혜숙은 용수철 퉁기듯 벌떡 일어났다. 남편이 화장실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여보!”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몸을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가슴에 귀를 댔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물에 젖은 잠옷의 선뜩한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혜숙은 정신이 아득했다. 마치 남편의 선뜩한 몸을 만지기나 했던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들오들 떨렸다. 미진이도 언제 왔는지 아빠를 부르며 남편의 몸을 흔들었다. 전화기를 들고 혜숙은 울부짖었다.
“남편이 쓰러졌어요. 얼른, 얼른.”
혜숙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입안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든 열기가 얼굴에 몰려 용광로처럼 타올랐다. 미친 듯이, 남편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가슴에 귀를 댔다. 얼굴을 문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잠시 후 소방대원 두 명이 이동 침대를 들고 나타났다. 남편을 그곳으로 옮기는데 침대 옆으로 팔이 축 처졌다. 그녀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혜숙의 귀를 찢었다. 아니, 가슴을 찢었다.
응급실에 도착했다. 의사는 남편의 눈꺼풀을 열어봤다. 청진기를 가슴에 댔다. 몸을 뒤집더니 항문을 살펴봤다.
“병원에 오기 전에 사망했습니다.”
의사는 사망 진단을 내렸다. 혜숙은 천길만길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신 때문에 남편이 죽은 것 같아 모든 것이 귀찮았다. 미진이도 귀찮았다. 흔적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들었다. 남편을 뒤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아 거의 반 실성한 상태로 지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온통 세상이 암흑으로 보였다.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혜숙은 벌떡 일어나 미진을 가슴에 안았다. 미진이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혜숙은 두 팔에 더욱더 힘을 줬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미진의 몸이 통나무처럼 뻣뻣하다가 점점 나긋나긋해졌다. 혜숙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넘쳤다. 미진이도 울음이 터졌다.
그래, 인생은 실험(實驗)이 아니고 실행(實行)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삶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만도 만만한 것도 아니다. 열심히 사노라면 언젠가 빛나는 날도 있고 오해도 풀릴 터였다. 혜숙은 눈물을 멈추고 미진의 눈물을 닦아줬다.
혜숙은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앞으로 나갈 것이다. 미진이와 같이 희망을 향해 성큼성큼. -끝-
- 2020년 전남여류문학 연간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