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태사랑
배성희
넓은 대지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작은 몸을 움츠리며 산에 오르기 시작한지 어느덧 두어 달이 지났다.
산에 오를 때마다 늘 새로움으로 반겨주는 자연은 우리의 마음을 호기심으로 가득 채운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표어를 야무지게 내걸고 시작한 운동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며 산을 오르내린다.
앞 다투어 피어나서 서로의 빛으로 광채를 발하며 온통 산길을 환하게 비추는 벚꽃 길을 순자언니와 둘이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오르면 바위 위에 혹시 하얀 머리카락과 흰 수염을 날리는 신선이 서있지 않을까?” “우리가 빨리 올라가서 만나볼까?”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걷는다.
상춘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며 꽃길에서 이리 저리 포즈를 취하며 연신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니 이마에 땀이 흐르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헉헉 거리면서 도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한발씩 내딛어 언덕을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고 있는데 순자언니 주머니에서 유행가 가락이 경쾌하게 흘러나와서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언니가 좋아하는 벨소리가 열심히 걷는 우리를 잠시 웃게 만들었던 것이다.
언니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서 발신자를 보더니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는다. 언니 목소리는 약간의 콧소리가 섞였고 초봄의 볕에 그을리어 불그스름한 볼이 더욱 상기되어 시집가는 새색시의 볼처럼 곱다.
한참을 통화하고 끊는데 얼굴에 행복한 빛이 넘쳐난다.
언니가 하는 말은 “영감이 주책이 없다니까 늙어가지고” 하면서 하하하 웃는다. “글쎄 나보고 산에 오면 자기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라고 하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얼굴 보러온데” 하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저씨 남편은 우리가 올라가는 반대쪽 산속 숲을 정리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멀리서 윙윙 벌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힘든 일을 하시면서도 잠시 쉬는 시간에 운동하러 산에 오르는 아내에게 전화로 행복 배달을 하신 것이다.
기계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저기 기계소리 들리지 우리 집 아저씨가 저기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나보고 자기가 일하는 곳에 가까워지면 자기 이름을 부르라는 것이지” 하면서 함박웃음을 웃는다.
산 중턱에 올라와 따뜻한 바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려고 하는데 저만치서 서너 명이 무리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언니는 저기 우리 동네 사람들 오는데 얼굴이라도 보고 올라가자고 하였다. 나는 그러게요 하면서 같이 기다렸다가 만나서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언니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을 시작하였다.
“우리 집 양반이 저기 기계소리 나는 곳에서 일하는데 나더러 가까이 오면 자기 이름을 부르라고 하네. 내 얼굴 한번 보면 힘이 나서 일을 훨씬 잘할 것 같데” 하고 기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러자 거기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봉덕아! 봉덕아! 하고 큰소리로 아저씨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허공에서 메아리만 대답할 뿐 아저씨는 대답이 없고 기계소리만 윙윙거렸다.
언니는 배시시 웃으면서 “들리지도 않아 저기 위에서 기계로 일하는데 들리겠어? 그냥 주책을 부린 것이지”이렇게 말하고 힘차게 발을 내딛으며 우리 이제 올라가세 하면서 앞장서서 걸었다.
‘저리 좋아할 줄 알았으면 언니가 아저씨 이름을 불러보도록 북돋을 걸’ 언니의 꿍꿍이 속셈을 알고 나는 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언니의 가벼워진 발걸음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고 있는데 멀리서 윙윙거리던 기계 소리가 멈추고 또다시 언니의 주머니에서 경쾌한 음이 울렸다. 아저씨가 쉬는 시간에 다시 전화하신 것이다.
어디쯤 왔느냐고 아저씨가 묻자 언니는“많이 올라왔어 당신 일하는 가까운 곳에서 동네 사람들과 같이 큰소리로 봉덕아! 봉덕아! 하고 불렀는데 안 들리던가요? 왜 대답을 안했소.”하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저씨는“기계소리 때문에 못 들었는데 더 크게 부르지 그랬는가. 그쪽으로 가지 말고 나 있는 쪽으로 와서 얼굴 한번 보여줘 보고 싶어”하고 능청스럽게 말씀하신다.
“싫어! 일하는 사람한테 뭐 하러 가는가? 일하느라고 보지도 못 할 거면서 일 끝나고 보면 되지” 언니는 전화를 끊고 방긋이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언니는 힘들게 살았던 때를 말하며 젊었을 때는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살림 하느라 정신없이 살다가 이제는 아이들이 다 커서 제 갈길 가고 둘이서 남은 지금이 제일 좋다고 했다.
부부가 늙어지면 망태사랑이라고 하더니 순자 언니 부부를 두고 하는 말 같다. 노년에 부부가 나누는 깊은 사랑이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해 주었다.
오늘 저녁은 우리 아저씨가 좋아하는 겉절이 만들어 드려야겠다고 하시며 서둘러 가는 언니의 발걸음은 가볍고, 그 뒤를 헉헉 거리며 따라가는 나의 등에는 땀이 나서 축축한 느낌이 닿았다.
- 2020년 전남여류문학 연간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