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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로브그리예의 가장 최근의 영화이며, 그 작품 자체 만으로도 혹은 중요한 한 작가의 지적 발전의 과정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로서도 흥미를 끄는 작품이 라틴 거리의 조그만 영화관에서 매표소의 매상고를 거의 올리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상영되었다.
(중략)
* 알랭 로브그리예가 쓰고 직접 감독한 L'Immortelle- 불멸의 여인은 1963에 발표한 작품이니까 그리 최근의 영화라고는 말할 수가 없겠다. 작가는 이 작품 외에도 '유럽 횡단 특급(1966)과 쾌락의 점진적인 활주(1974), 불장난(1976) 등의 영화를 발표한 바가 있다. 02년 19일에 우리는 이미 작가의 부음을 접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본고의 저자인 골드만 역시 죽었다. 골드만의 죽음과 함께 급격히 쇠락한 발생론적 구조주의의 영향은 그의 부인 안니 골드만의 저서 '영화와 현대사회'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일차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영화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회상시켜 보여준다. 터어키의 한 국립 중학교 lycee'의 선생인 한명의 프랑스인(우리는 이사람을 화자라고 부르자)이 어느 정도 단편적으로 또한 아주 무질서한 방식으로 그가 그 나라- 그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에서 한 여성- 그는 이 여성의 이름도 주소도 사회적 배경도 알지 못한다- 과 함께 겪게 되는 다소 새디 . 매저키즘적인 성격을 가진 괴상한 사건 하나를 회고한다. 그녀는 그의 삶 속으로 유성처럼 들어왔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길고도 헛된 오랜 탐문을 한 후에 그 주인공은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갑자기 그녀를 만나게 된다. 아주 놀란 표정으로 그녀는 그를 설득해서 자기 차를 타게 하고 한밤중의 긴 드라이브를 떠난다. 갑자기 도로 중간에서 그 영화의 곳곳에서 이미 나타난 적이 있던 수수께끼의 남자가 데리고 다니는 두 마리 개들 중의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공포에 질린 그 젊은 여자는 차를 나무에 들이받고 죽게 된다. 후에 화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알어났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터어키적>이라고 부르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자기의 위치에 대해, 라이fp Laile'와 이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yj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결국 그는 중간도매상에게서 발견한 그 차를 사서는 똑같은 코스로 달려서 첫번째 사건이 일어난 바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상황 속에서 죽게 된다.
이렇게 개략적으로 그려 보면 이 사건 일화는 진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그물망 위에서 로브 그리예는 자신의 전 작품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미 「지난 여름의 마리앙바드에서」 구조화시킨 바 있는 문제一즉 주체와 비인간화된 물상화의 세계와 인간의 희망적 가능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一를 다시 한번 집어 올린다.
이 영화 내에서 라이레Laile' 혹은 레이라 Leila(그녀의 이름은 확실하지 않고 영화 중에서 여러 번 변한다)는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 전체 구조 속에서 아주 정확한 기능을 가진다. 그녀는 환상적인 차원이며 때로는 현실적이고 때로는 비현실적이며,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실현하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비록 영화 속에서는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이 무엇인가를 원하고 희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로브- 그리 예는 낭만주의자는 아니다.3) 그는 환상적인 것에 예민한 희망이 한실적인 일상생활의 세계에 독립되어 있지도 앉으며, 단순히 그 세계에 소외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 중에서 로브 그리 예는 우리에게 단지 비유적인 요소들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세계는 환상에 적의를 가진다. 그것은 뚱뚱하고, 말이 없는 수수께끼의 한 부르조아가 데리고 다니는 엄청나게 큰 두 마리의 사나운 개들과 해변가에서 한 어부의 말없는 응시, 채석장에서 노동자들의 적의를 품은 태도에서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은 지속적인 위협의 분위기를 이루어 낸다.
이 세계가 라이레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은 한순간도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녀도 이 세계를 의문시하고 있다. 그녀가 나타날 때 집들과 흉장(胸墻)들이 무너지고 마분지로 이루어진 사원의 연단이 세워지며 묘지와 지하통로가 여행자들을 위해 늘어나게 된다. 결국 그 세계는 그것의 현실성을 잃어버린다. 영화의 처음에서부터 그 세계와 환상은 서로가 배타적이ㅁ, 결국에는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세계는 라이레의 존재에 의해서만 존속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세계가 도로 중간에 나타나는 개에 의해 상징되듯이 마침내는 그녀를 없애버린다.
그러나 라이레는 ,육체적으로 정말 죽은 것인가? 또한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 영화 속에서는 그녀를 닮고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여성은 그 세계 속에서 그토록 융화되어 버려서 단순한 객체가 되어 버린다. 또한 제 3의 여성은 너무 두려움에 질려서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이야기 했을 때는 화자에게 라이레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녀는 죽었고, 살인자는 그라는 것을 화자에게 말하게 된다. 그를 자살로 몰아넣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이 분명히 서로 모순되는 진술들은 모두 진실이며 상호보족적이다. 라이레는 그 세계 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보호할 수 없었던 화자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녀는 화자를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 세계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녀는 살인(미리 예정된 사고에 의한)과 객관적인 현실로의 통합과 억압이라는 .삼중의 양식을 가지고 세계에 의해 죽었었고 지금도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많은 단편적이면서도 아주 의미 깊은 장면들에 대해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좀 더 상세한 분석 작업이 요 구될 것이다. 그러나 로브 그리 예가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어한 점으로 물상화되고 비인간적인 세계一라이레도 화자도 살아갈 수 없었던一는 사회의 모든 계층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되어야 한다. 그는 맨 먼저 이것을 영화 중의 중요한 순간에, 노동자들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르조아와 똑 갚은 적의를 가지고 그녀를 쳐다보는 장면一어떤 노동자가 관(棺) 하나를 어단가로, 아마 허가짜 무덤으로 운반해 가는 장면에 곧이어 나타나는 장면一 속에서 그녀가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표현한다.
확실히 그 영화는 아주 정연하면서, 변증법적이기조차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거의 동등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그것들을 정(正) . 반(反) . 합(合)으로 부른다고 해도 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 부분은 라이레의 출현을 회상하고 있다. 그녀의 존재는 그 세계를 무너트리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가 거기에 존재할 때 벽들은 무너지고 궁전들이 궁전들이붕괴되며 어부가가 사라지고 바닷가에 놓여 잇던 어부의 의자는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치 않게 되고 그 부르조아는 개를 데리고 있지 않게 된다. 때로는 리셉션 동안에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지나가고 그녀를 말살시켜 버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는 다른 곳에서 다시 나 타나서 자신의 <비한실화>시키는 행동을 계속한다.
두번째 부분에서는 라이레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을 역전한다. 그 세계는 자신의 현실을 다시 차치한다. 무너진 벽은 손상을 입지 않는 요새로 대체되며 인간들은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자의 말문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모호하고 회피적이다. 분명하게 그들은 그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라이레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와 그 세계와의 대립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들이 그녀를 회상하는 것에서 어떤 불안만을 맛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맨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라이레가 죽은 후에 화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려고 하며 잔체구조 속에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고 회상 속에서 그 이전의 장면들은 그때와는 다fms 모습으로 재생시킨다. 첫째 부분에서는 라이레와 그 세계와는 아무런 접촉도 가지지 않았다(기껏해야 해변에서 잠자는 동안에 그녀는 꿈 속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놀란 적이 있다). 그러나 화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기억들을 넘어서서 이 기억들을 변화시키고 교정한다. 이제 라이레와 그 세계와는 서로 연결되고 있다一 그리고 그녀는 그 세계에 의해 계속적으로 위협 당한다. 지하통로는 감옥 탑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부르조아는 이제 다시 첫째 부분에서는 실제로 데리고 있지 않던 개들과 함께 동반한다. 그리고 화자는 다시 창살 속에 갇혀 있는 라이레를 보게 되지만 그녀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즉 그 세계는 라이레의 존재를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화자는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그 영화에<영혼불멸>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하는 그 여성을 뒤따른다.
세 부 모두가 우리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특히나 감동적이고 의미 깊은 장면으로 끝나고 있다.
1부를 끝맺는 라이레의 사라짐은 채석장 노동자들의 적의에 가득찬 응시와 관의 모습으로 두드러진다. 그녀의 재출현은 아주 분명히 그녀를 공포에 떨게 하는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 오는 것一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이 세계의 위협적인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에一과 마지막의 사고로 두드러지고 있다. 화자가 서서히 무엇이 일어났는가와 자기 자신의 책임감을 깨닫게 되는 3부는 화자의 자살로써 끝맺는다. 이것은 로브 그 리예의 작품 중에서 최초로 나타나 자살이다. 이제 작가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 발 것인가? 자살의 본질에 대한 긍정이 세계를 포기하고 환상 속에 위치하는 것인 로만티시즘으로?5)一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향해 가고 있는 하나의 해결책. 아니면 <영혼불멸>에서 그토록 가까이 다가간 비극으로? 아니면 물상화된 사회구조를 무자비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의 처음 소설들의 관조조인 사실주의로의 복귀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마지막으로 뚜렸하게 인간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인가?6) 단 하나의 사실만은 분명하다.
<영혼불멸>로써 로브 그리예는 하나의 전환점에 서 있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대단히 다른 입장에 서 있는一그가 몰두하고 있는 문제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것인- 작가 한 사람과 그의 입장을 비교해 보고 싶다. 장 폴 사르트르는 Jean paul sartre,자신의 최후의 희곡인 ‘알토나의 은둔자들’에서 몇년 동안 그의 희곡물들을 지배해 왔던 도덕적이고 겅치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그도 역시 처음으로 주인공의 자살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 작품은 유사한 전환점을 나타내고 있으며, 따라서 마찬가지로 이후의 발전과정에 대한 문제一 비록 아주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一가 제기된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들로서는 현대사회의 발전이 그토록 서로 다르고 그토록 서로 모순되는 두 작가를 동일한 난국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토록 유사한 두 개의 난국으로 이끌어 갔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 깊게 보인다.
- 루시앙 골드만. 「영화 영혼불멸」에 대하여
바다 Sensizlik / Candan Ercetin
알랭 로브그리예 별세 |
-한국일보 02/19 19:41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 |
20세기 중반 유행한 문예사조 누보 로망(nouveau roman)을 주도한 프랑스 소설가ㆍ 영화감독 알랭 로브그리예가 심장 질환으로 19일 타계했다. 향년 86세. 그는 객관적 사실 묘사와 심리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리얼리즘 소설 형식을 부정하면서 줄거리 가 없고 주인공 심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 누보 로망 양식을 개척, 세계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2년 프랑스 브레스트 출생으로, 국립농업기술학교 졸업 후 농림기사로 일하던 4 9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53년 장편 <고무 지우개(Les gommes)>를 출간하며 호평을 얻은 로브그리예는 55년 출간한 장편 <엿보는 사람(Le voyeur)>이 조르주 바 타유,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 등 당대 1급 비평가들의 지지로 비평가상을 수상 하면서 명성을 굳혔다. 이후 작풍을 전환, <질투(La jalousie)>(1957), <미궁 속에 서(Dans le labyrinthe)>(1959), <밀회의 집(La maison de rendez-vous)>(1965), < 황금 삼각형의 추억(Souvenir du triangle d'or)>(1978) 등 누보 로망 계열의 화제 작을 발표하면서 2000년대까지 꾸준히 창작을 해왔다. 로브그리예는 60년대부터 영화 작업에도 관심을 가져 <불멸의 여인(L'immortelle)> (1963), <거짓말하는 남자(L'homme qui ment)>(1968), <에덴동산과 그 이후(L'Eden et apres)>(1971), <당신을 부르는 그라비다(C'est Gravida qui vous appelle)>(200 6) 등 다수의 작품을 감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