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
상은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정원군(定遠君)으로 휘는 이부(李琈)인데, 추존되어 원종이 되었다.】 장자이다. 모후는 인헌 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로【 연주 군부인(連珠郡夫人)이다. 추존되어 왕후가 되었다.】 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만력 을미년 11월 7일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탄생하였으니, 당시 왜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 선묘(宣廟)께서는 이것이 한 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크게 애중하여 궁중에서 길렀고, 친히 소자(小字)와 휘(諱)를 명하고 깊이 정을 붙였으므로 광해가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너그럽고 굳건하여 큰 도량이 있었다. 여러 번 자급이 올라가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져서는 더욱 겸양하면서 덕을 길렀다. |
처음 광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선묘께서 바꾸려는 의사를 두었었는데, 결국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를 원수처럼 보아 그 시기와 의심이 날로 쌓였다. 적신 이이첨과 정인홍(鄭仁弘) 등이 또 그의 악행을 종용하여 임해군(臨海君)과 영창 대군을 해도(海島)에 안치하여 죽이고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왕대비의 아버지이다.】 멸족하는 등 여러 차례 대옥(大獄)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상의 막내 아우인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도 무고를 입고 죽으니, 원종 대왕이 화병으로 돌아갔다.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는 등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
선왕조의 구신들로서 이의를 두는 자는 모두 추방하여 당시 어진 선비가 죄에 걸리지 않으면 초야로 숨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하였다. 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히어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도가 없이 가혹하게 거두어들임으로써 백성들이 수화(水火) 속에 든 것 같았다. |
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웠으니, 경진 및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사 중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 하고자 하였다. 곧 전 동지(同知) 김류(金瑬)를 방문한 결과 말 한 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이었다. 그 후 경진이 전 부사(府使) 이귀(李貴)를 방문하고 사실을 말하자 이귀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크게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및 문사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
임술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이끌어 중군(中軍)으로 삼아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모의한 일이 누설되어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음으로써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신경진과 구인후 역시 당시에 의심을 받아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다. 마침 이서가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되어 덕진(德津)에 산성 쌓을 것을 청하고 이것을 인연하여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다가 이때에 와서 날짜를 약속해 거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훈련 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당시 정승 박승종(朴承宗)과 서로 인척이 되는 사이라 뭇 의논이 모두들 ‘도감군(都監軍)이 두려우니 반드시 이흥립을 설득시켜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이 흥립의 사위였으므로 장유가 흥립을 보고 대의(大義)로 회유하자 흥립이 즉석에서 내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 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도 편비(褊裨)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坡州)에서 회합하였다. |
그런데 이이반(李而攽)이란 자가 그 일을 이후배(李厚培)·이후원(李厚源) 형제에게 듣고 그 숙부 이유성(李惟聖)에게 고하자, 유성이 이를 김신국(金藎國)에게 말하였다. 이에 신국이 즉시 박승종에게 달려가 이이반으로 하여금 고변(告變)하게 하고 또 승종에게 이흥립을 참수하도록 권하였다. 이반이 드디어 고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는데,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曲宴)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승종이 이흥립을 불러서 ‘그대가 김류·이귀와 함께 모반하였는가?’ 하므로 ‘제가 어찌 공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자 곧 풀어주었다. |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류가 대장이 되었는데 고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포자(捕者)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元斗杓)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 하자 김류가 드디어 갔다. |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告變書)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兵使) 이괄(李适)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이르러 전령(傳令)하여 이괄을 부르자 괄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 |
상이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서 이서(李曙)의 군사를 맞았는데, 사람들은 연서를 기이한 참지(讖地)로 여겼다. 장단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宋英望)·신경유(申景裕)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7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前軍)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여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의병이 바로 궐내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문(後苑門)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簾]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하였다. |
상이 인정전(仁政殿) 계상(階上)의 호상(胡床)에 앉았다. 궁중의 직숙관(直宿官)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왔는데, 도승지 이덕형(李德泂)과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 두 사람은 처음엔 모두 배례를 드리지 않다가 의거임을 살펴 알고는 바로 배례를 드렸다. 명패(命牌)를 내어 이정구(李廷龜) 등을 불러들이니, 새벽에 백관들이 다 모였다. 박정길(朴鼎吉)이 병조 참판으로 먼저 이르렀는데, 판서 권진(權縉)이 뒤미처 이르러 ‘정길이 종실(宗室) 항산군(恒山君)과 함께 군사를 모았는데, 지금 들어왔으니 아마도 내응할 뜻을 둔 것 같다.’라고 하였으므로 곧 정길을 끌어내어 참수하였다. 항산군을 잡아다 문초하니, 혐의 사실이 없어 석방하였다. 그런데 정길은 당연히 참형을 받아야 할 자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참수를 통쾌하게 여기었다. |
그리고 상궁(尙宮) 김씨(金氏)와 승지 박홍도(朴弘道)를 참수하였다. 김 상궁은 선묘(宣廟)의 궁인으로 광해가 총애하여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또 이이첨의 여러 아들 및 박홍도의 무리와 결탁하여 그 집에 거리낌 없이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참형을 받았다. 홍도는 흉패함이 흉당 중에서도 특별히 심한 자라 궐내에 잡아들여 참수하였다. 광해는 상제가 된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도망쳐 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있는 것을 국신이 와서 고하므로 장사들을 보내 떠메어 왔고, 폐세자(廢世子)는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
상이 처음 대궐에 들어가 즉시 김자점(金自點)과 이시방(李時昉)을 보내 왕대비(王大妃)에게 반정한 뜻을 계달하자,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史官)도 없이 이처럼 직접 계문하는가?’ 하였다. 두 사람이 복명하여 아뢰자 상은 곧 대장 이귀(李貴)와 도승지 이덕형, 동부승지 민성징(閔聖徵) 등에게 명하여 의장을 갖추고 나아가 모셔오게 하였다. 이에 이귀 등이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 사실을 진계하며 누차 모셔갈 것을 청하였으나 대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이에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갔다. 유사가 연(輦)을 등대하고 위의를 베풀었으나 상은 이를 모두 거두라 명하였다. 교자에 오르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고 말만 타고 가면서 광해를 떠메어 따르게 하였는데, 도성 백성들이 환호성을 울리면서 ‘오늘날 다시 성세를 볼 줄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
상이 경운궁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서청문(西廳門) 밖에 들어가 재배하고 통곡하자 시위 장사 및 시신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상이 곧 엎드려 대죄하자 자전(慈殿)이 하교하기를, |
“능양군(綾陽君)은 종자(宗子)이니 들어와 대통을 잇는 것이 마땅하다. 막대한 공을 이루었는데 무슨 대죄할 일이 있겠는가.” |
“혼란 중에 일이 많고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비로소 왔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
하니, 자전이 전국보(傳國寶)와 계자(啓字)를 바치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귀가 주달하기를, |
“자전께서 마땅히 정전(正殿)에 납시어 대신을 불러 국보를 전하소서. 어찌 성급하게 국보를 들여 사람들의 의심을 사겠습니까.” |
하니, 자전이 누차 재촉하였다. 상이 좌의정 박홍구(朴弘耉)를 명하여 국보를 받들어 들이게 하였으나 오랫동안 하명이 없었다. 상이 한참 동안 땅에 부복해 있다가 야심한 때에 이르러 군신들에게 이르기를, |
하자, 군신들이 극력 간하여 말렸다. 조금 후에 자전께서 사군(嗣君)을 인견하겠다고 명하였다. 이에 상이 내정(內庭)으로 들어갔고 여러 장수도 모두 따라 들어갔다. 자전이 선왕의 허좌(虛座)를 설치해 놓았는데, 상이 재배하고 통곡하니 시신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이에 자전이 침전에 납시어 발을 드리우고 어보(御寶)를 상(床)에 놓은 다음 상을 인도해 들어갔다. 상이 엎드려 통곡하자 자전이 이르기를, |
“통곡하지 마시오. 종사의 큰 경사인데 어찌 통곡하시오.” |
하였다. 상이 자리를 피해 배례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
“대사가 아직 안정되지 않아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왔으니 신의 죄가 막심합니다.” |
“사양하지 마시오.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내가 기구한 운명으로 불행하게도 인륜의 대변을 만나, 역괴(逆魁)가 선왕에게 유감을 품고 나를 원수로 여겨 나의 부모를 도륙하고 나의 친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나의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나를 별궁에다 유폐하였소. 이 몸이 오랫동안 깊은 별궁 속에 처하여 인간의 소식을 막연히 들을 수 없었는데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소.” |
“역괴는 선왕에 대하여 실로 원수이다. 조정에 간신이 포진하여 나에게 대악의 누명을 씌우고 10여 년 동안 가둬 놓았는데, 어젯밤 꿈에 선왕께서 나에게 이 일이 있을 것을 말하시더니 경들이 다시 인륜을 밝히는 것을 힘입어 오늘을 볼 수 있었다. 경들의 공로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하였다. 군신들이 속히 어보를 전할 것을 청하자, 자전이 이르기를, |
“미망인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실로 상제(上帝)의 영험이 있어서이다. 사군은 상제(上帝)께 배사(拜謝)하시오.” |
“이런 거조를 하는 것은 몹시 미안한 일이라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어보를 전한 후 사군께서는 마땅히 밖으로 나가 흉당을 잡아 다스려서 민심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
“사군이 즉위한 후 의당 종묘에 고유할 것이니, 어보를 전하는 것이 몹시 급합니다.” |
“어보를 전하는 것은 큰일이니 초라하게 예를 행할 수 없다. 명일 서청(西廳)에서 예를 갖추어 행할 것이다. 또 중국 조정의 명이 없으니 어찌 정통성이 있겠는가. 우선 국사를 임시로 서리해야 한다.” |
하였다. 도승지 이덕형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
“국가가 위태하여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사군께서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해 몸소 갑주를 입고 이 대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이 이미 귀부하고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보를 전하는 일을 밤이 깊도록 결단하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만약 속히 국보를 전하여 위호를 바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난국을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빨리 국보를 전하여 신민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
“어보를 받는 데는 절차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이처럼 늦은 밤에 급박히 전수하겠는가. 경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대신과 상의하리라. 그리고 어떤 어보를 전해야 하겠는가?” |
“소신보(昭信寶)와 수명보(受命寶)를 전하심이 마땅하겠으며, 유서보(宥書寶) 역시 전수해야 합니다.” |
“신은 재덕(才德)이 없어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
“왕실의 지친이며 신민이 추대하니 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군은 이로부터 성주(聖主)가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큰 복이다.” |
하고, 곧 승전색(承傳色) 김천림(金天霖) 등에게 명하여 어보를 받들어 무릎꿇고 상에게 전하게 하였다. 상이 절하며 어보를 받자, 시신이 아뢰기를, |
“이미 어보를 전해 받았으니 속히 정전(正殿)으로 나아가 대위(大位)를 바룸이 마땅합니다.” |
“처음에는 예를 갖추어 조용히 전수하려 하였으나, 경들의 말을 어길 수 없어 이와 같이 행하였다.” |
“역괴의 죄를 아시오? 내 덕이 박하여 모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으로써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국가가 거의 망하게 되었었는데 사군의 효를 힘입어 위로는 종사를 안정시키고 아래로는 원한을 씻게 되었으니 그 감격스러움이 이 어찌 끝이 있겠소.” |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 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亡靈)에게 제사하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
“예로부터 폐출된 임금은 신자가 감히 형륙(刑戮)으로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桀)·주(紂) 만한 이가 없었으되 탕(湯)·무(武)는 이를 추방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내리신 하교는 신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
“자성(慈聖)께서 폐군에 대하여는 천륜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아들이 비록 효도하지 않더라도 어머니로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교는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
“내가 사군과 함께 정전으로 나아가면 나의 원한을 씻으리니, 지금 사군이 즉위하여 나의 마음을 본받아 나를 위해 복수하면 효라 이를 만하다.” |
“백관들이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
“사군은 이미 장성하였소. 어찌 백관들의 지휘를 받으려 하오.” |
“사군께서 궐내에 드시어 지금 날이 새어가는데, 아직까지 즉위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장사(將士)와 군민이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속히 밖으로 나가소서.” |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수 없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
“옛날에 중종께서 반정하시고 폐왕을 우대하여 천수를 마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
“경의 말이 실로 옳다. 그러나 역괴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으며, 그 적모(嫡母)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구비하였다. 어찌 연산(燕山)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시해하였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 |
“사람을 죽이는데 몽둥이로 하든 칼로 하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왕께서 병들어 크게 위독하였는데 고의로 충격을 주어 끝내 돌아가시게 하였으니 이것이 시해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간역(奸逆)의 무리가 외방에 흩어져 있으니 뜻밖의 변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속히 즉위하여 교서를 반포하고 제때에 체포하여 군정(群情)을 진무해야 합니다.” |
“별당은 선왕께서 일을 보시던 곳이라 이미 궁인으로 하여금 청소를 하게 하였다.” |
하였다. 상이 일어나 절하고 물러나와 별당에서 즉위하여 일을 보며 밤을 새웠는데, 시신 및 장사들이 칼을 차고 숙위하였다. 광해는 약방(藥房)에, 폐세자는 도총부(都摠府)에 안치하고 군사로 지키며 사옹원으로 하여금 음식을 공급하게 하였다. 영건(營建)·나례(儺禮)·화기(火器) 등 12개의 도감(都監)을 폐지하고 의금부와 전옥서를 열어 죄인들을 모두 방면하였다. 당시 이이첨의 무리 중에 도망쳐 숨은 자가 많아 군인을 풀어 수색해 체포하였다. 또 그 죄를 면제받을 마음으로 앞을 다투어 진알(進謁)하였는데 모두 결박하여 구속하였다.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에게 하유하여 평안 감사 박엽(朴燁)과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경상(境上)에서 처형하게 하였으며, 또 여러 도(道)의 조도사(調度使) 김순(金純)·지응곤(池應鯤)·김충보(金忠輔)·왕명회(王明恢)·권충남(權忠男)·이문빈(李文賓) 등을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
박엽은 성품이 혹독하고 처사가 패려하였다. 유덕신(柳德新)의 사위로서 궁중과 결탁하였다. 일찍이 수령이 되어 사사로이 헌상하여 아첨하였고, 평안 감사가 되어서는 영합하여 총애를 굳히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었다. 기이한 완호품을 날로 궁중으로 실어들였으며, 의복과 음식을 법도에 지나치게 사치하게 하고 징세를 혹독하게 하며 사람 죽이기를 초개처럼 쉽게 하여 한 도가 텅 비게 됨으로써 그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그가 효시되는 날에 이르러서는 한 도의 백성들로서 서로 경하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 그의 관을 쪼개고 시신을 난도질하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
정준은 정조(鄭造)의 아우로서 그 위인이 흉험하고 간교하였다. 이이첨의 심복이 되어 흉역의 논의를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급기야 본주(本州)에 건너뛰어 제수되어서는 오로지 뇌물을 바쳐 아첨하는 것을 일삼고 탐욕을 부리며 토색질하니 온 경내가 원망하고 괴로워하였다. 그리고 노적(奴賊)과 사사로이 서로 내통함으로써 중국 조정의 의심을 샀었다. 이에 이르러 효시되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
김순은 본래 미천한 서얼인데 윤휘(尹暉)와 임취정(任就正)의 심복으로 궁중과 결탁하여 동지중추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취정 등이 김순을 해서 조도(海西調度)에 차임하자, 그는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사족을 능욕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온 도내가 구란(寇亂)을 만난 것보다 더 쓸쓸하였다. 당시 감사였던 정립(鄭岦)이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였고, 영건 도청(營建都廳) 권첩(權怗)이 상소하여 극력 개진하였으나 광해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조야가 모두 분개하였다. 급기야 금부(禁府)가 처형을 청하자 상이 본도에서 참할 것을 명하여 한 도내의 민심을 통쾌하게 하였다. 응곤 등의 죄악도 김순과 같으므로 함께 참형을 명하였다. |
당시 제주 목사 양호(梁濩)가 흉당을 아첨하여 섬기면서 탐욕과 학정이 특히 심하여 한 섬의 백성들이 물과 불 속에 든 것 같았으므로 역시 잡아다가 처형할 것을 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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