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식 목사님 주장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나?”를 반론함
사계四季 (2012.06.02. 00:15)
[홍정식 목사님 주장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나?”를 반론함], 이 글은 ‘인터넷 신문 {크리스천 투데이} 2007년 2월 15일자에 실린 홍정식 목사님 인터뷰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나?]’를 비평한 글입니다. 제 제2 모母 교회인 목포 제일교회, 목포 제일교회 동문들이 모인 {Daum} 카페에 쓴 글입니다. 개혁(장로) 교회 목사에서 신사도운동가로 변신하신 홍 목사님께서는 제 청년 시절 “성경은 만고불변의 진리이지만, 신학은 날마다 바뀌는 다만 설일 뿐이다.”는 주장과 함께 각 개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해 깨닫는 간증, 간증 나눔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목사님입니다. 즉, 개혁 교회 신학을 추론에 지나지 않는 학문 정도로 여기며 개혁 교회 교리를 적대시하셨던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현재는 신비주의 신사도운동으로 예장 합신에서 제명당하신 목사님입니다.
이 반론 글을 읽으시면서, ‘[로마서 강해 25]에서 엉터리 성경원어 해석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1장] 가르침을 짓밟으셨던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님, “개혁 신학을 버렸다.” 선언하신 김성수 목사님, 그분이 어떤 과정을 밟을 수 있으신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경은 만고불변의 진리이지만, 신학은 날마다 바뀌는 다만 설일 뿐이다.”는 주장에 담긴 숨은 뜻으로서 미혹, 그 위험성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홍정식 목사님 인터뷰가 실린 {크리스찬 투데이}는 이단 옹호 언론임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이 글 논지들입니다.
하나님 백성 영적 부흥이 낳는 물질 축복, 곧 부富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의를 구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더하시는 하나님 선물일 수밖에 없다.
부富가 반드시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에 적힌 이스라엘 역사, [신명기]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신명기]에 적힌 하나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지켰고 어겼나?’ 하는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솔로몬의 영화, 부富를 보며 우리가 얻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富를 자기가 낳은 것으로 생각한 솔로몬의 물신숭배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홍정식 목사님 사고는
홍 목사님 물신숭배를 드러낸다.
극한 환경(가난)에서도 바울 사도와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다.
홍정식 목사님과 신사도운동은
개혁(장로) 교회 신학(교리)을 두고 “설設, 추론推論”으로 말하며 사탄시한다.
신사도운동 교리 “오직 은혜의 구원”은
개혁 교회 ‘돌트 회의’에서 “이단 가르침”으로 정죄를 받은 ‘알미니안 교리’다.
홍정식 목사님과 신사도운동은
‘계시 종결’을 가르치는 개혁 신학(교리)을 사탄시함으로써 ‘직통 계시’를 주장한다.
알미니안 5 대 교리 핵심은
“오직 은혜의 구원에는 인간의 선택이 따른다.”다.
총신대 김희보 학장 ‘문서설’을 꼬투리 삼은 1979년 가을 예장 합동 제64회 총회 분열,
홍정식 목사님께서는 이 분열을 무척 경멸하셨다.
‘모세오경 모세 저작권’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사신死神신학 ‘문서설’은
‘모세오경 모세 저작권을 인정하셨던 주님’의 ‘신성 파괴’를 그 목적으로 한다.
교회일치주의자들 “교회 연합을 위해 무거운 교리의 짐에서 벗어나 가벼운 교리의 짐을 지자.”는 주장에서
“가벼운 교리의 짐”은 ‘알미니안 교리’를 뜻한다.
그리고 “무거운 교리의 짐”은 ‘개혁 교회 교리’를 뜻한다.
‘직통 계시’를 주장하며 개혁 신학을 사탄시하는 신사도운동가들은
‘계시 종결’ 교리를 가르치는 개혁 교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을
‘신사도운동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한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직통 계시’를 이야기하신 홍정식 목사님 간증은
‘비판할 수 없는 신神적 권위’를 가진다.
예장 합신은
홍정식 목사님을 ‘예장 합신 목사 명부’에서 삭제하고,
과천 새서울교회(담임목사: 홍정식)도 ‘예장 합신 명부’에서 삭제했다.
개혁(장로) 교회라면, ‘개혁 교회 교리에 충실한 목사인가?’를 분별해서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목사’를 모시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장로’들 소임이다.
“복음은 능력과 함께 간다.”는 말은
“능력은 복음과 함께 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과거에 홍정식 목사님께 ‘은혜의 빚’을 진 사람들로서
홍 목사님 현재가 홍 목사님 과거를 폐하지 못하도록
‘홍 목사님 돌이킴’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개혁 교회 ‘계시 종결’ 교리를 풀어 가르치고 있는 ‘최낙재 [계시와 성경]’: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훈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도록 다른 것을 강조하면
그는 계시 전달자로서 자격이 없다.
************
홍정식 목사님 주장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나?”를 반론함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면 부유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나?”라는 홍정식 목사님 물음은 헛된 물음이다. “예수님께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자이셨다면 복음을 전파하기가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이 헛된 물음 인 것처럼···.
(지난 2007년 2월 6일)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하신 홍 목사님 간증 내용은 우리나라 개혁(장로) 교회 교인 많은 수가 쉽게 경악할만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2월 15일) ‘인터넷 신문 {크리스천 투데이}에 실린 홍 목사님 인터뷰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나?]’에 담긴 내용은 미혹(마태복음 24장 24절)하는 내용이다. ‘경악했던 개혁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인터뷰 내용ㅡ경악케 했던 내용을 위장하기 위한 내용, 그름을 옳음으로 꾸미기 위한 내용이긴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옳은 내용인 내용ㅡ을 보고 경악했던 마음을 돌이킬 사람이 많으리라.’는 점에서···.
성경 신명기 28장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 영적 부흥은 피조물의 향상과 일치한다(참고: 이사야 11장 6절~9절)는 것과 하나님 나라 백성들 영적 타락은 피조물의 퇴보와 일치한다(참고; 마태복음 24장 7절 하)’는 것을 교훈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직업, 일)에 우리가 충성하는 일, 곧 영적 부흥에는 물질 보상이 뒤따른다(참고; 잠언 6장 6절~11절).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의를 먼저 구하는 영적 부흥에 하나님께서 더하시는 축복이다(마태복음 6장 33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하나님 백성들에게 선을 베푸는 분(시편 73편 1절)이시다. 그러므로 목자라면, 참된 목자라면 요한 사도처럼 양떼를 위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는 기도(요한 3서 2절)를 드리는 게 마땅하다. 또한 우리 역시,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나라, 그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 형통(건강과 일용한 양식)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만 한다(마태복음 6장 9절~13절).
영적 부흥에 따른 피조물의 향상···.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피조물의 향상(로마서 8장 18절~22절)···. 세계사에 나타난 그 실례로는, 칼뱅 종교개혁으로 태어난 프로테스탄트 정신, ㅡ이 정신을 놓고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ㅡ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직업관’ 같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일으킨 자본주의 발전과 근대과학 혁명’이다. 또한 성경역사에 나타난 실례로는, 다윗 왕 영적 부흥이 일으킨 솔로몬 왕 경제 부흥이다.
부富가 반드시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이어지는가?
그런데 솔로몬 왕 경제 부흥이 계속 하나님 나라 확장과 이어지는가? 물론,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발전과 근대과학 혁명이 계속 하나님 나라 확장과 이어지는가? 물론, 아니다. ㅡ이 문제는 여기에서 논하지 않는다.ㅡ 그리고 홍 목사님 바람대로 우리나라 교회 부는 하나님 나라 확장과 이어질까? 물론, 이 물음은 헛된 물음이다.
하나님 축복으로서 부···. 그러나 헛된 물음···. 무엇이 문제인가? 아니, 다윗 왕 순종으로 얻은 솔로몬 왕 영화, 부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답을 성경 한 구절로 대자면, 그 답은 신명기 28장 26절에 적혀 있다.
너희가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도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몇 사람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신명기 28장 26절)
그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불후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열왕기상 10장 23~24절), 세계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지혜를 성령의 은사로 받은 솔로몬은 어떤 하나님 말씀을 어겼는가? 우리는 열왕기상 11장에 적힌 솔로몬 왕 말년 우상숭배를 맨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맨 먼저 생각해야 할 사실은 열왕기상 10장 14절에서 10장 마지막 절에 적힌 솔로몬 왕 물신숭배다.
교만이 틈타자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富를 자기가 낳은 것으로 생각한 솔로몬의 물신숭배
열왕기상 10장 13절에서 10장 마지막 절에 나타나는 솔로몬 왕 물신숭배···. 즉, 부나 힘의 숭배···. 그리고 ‘이스라엘 헌법으로서 [신명기]’······. 외견상, ‘하나님 큰 은사인 솔로몬 왕의 지혜’를 언급한 열왕기상 성경기자는 이 구절들에서 ‘솔로몬 영화, 부나 군사력’을 열거함으로써 ‘솔로몬 영화’를 찬양하는 것처럼 보인다. 1)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에 적힌 이스라엘 역사, [신명기]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신명기]에 적힌 하나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지켰고 어떻게 어겼나?’ 하는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열왕기상 10장 14절에서 29절에 적힌 솔로몬 영화, 부를 [신명기]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신명기 17장 16, 17절에 적힌 하나님 율법을 이 구절들에 들이대면 솔로몬 왕의 교만, 불순종, 배도가 밝히 드러난다.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이백을 만들었으니, (열왕기상 10장 16절 상)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열왕기상 10장 18절 상)
은금을 자기를 위해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신명기 17장 17절 하)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사백이요 마병이 일만이천이라. (열왕기상 10장 26절 상)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 왔으니, (열왕기상 10장 28절 상)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신명기 17장 16절 상)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뜻하는 말···.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는가? 이 물음에 맞는 바른 답은 “이슬람이 현재 돈을 갖고 사회 저변을 얼마나 크게 확장하고 있는지 교회는 알아야 한다. 무슬림이 늘고 있는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돈이다. 이슬람도 돈을 갖고 세력을 확장하는데,”라며 “이슬람교처럼 교회도 돈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 하신 홍 목사님 주장을 반론하는 답일 것이다.
솔로몬 왕이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열왕보다 큰지라. 천하가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기 원하며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 (열왕기상 10장 24절, 25절)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을 인해 그분을 찬송하리라.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중략)···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장 10절~18절 상)
열왕기상 10장에 나타나는 솔로몬 왕 물신숭배···. 여호와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교만에 따른 물신숭배···.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는 관점에서 솔로몬 왕 지혜를 언급한 열왕기상 저자는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는 관점에서 솔로몬 영화, 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홍정식 목사님 물신숭배
{크리스천 투데이} 인터뷰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얻은) “돈이 있으면 사회변혁 운동을 할 수 있고 세상을 변화케 할 수 있다.” 하신 홍 목사님···. 우리는 가로 속 말씀을 뺀 홍 목사님 주장을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배금주의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신숭배라고도 부르는 배금주의···. 이 인터뷰에서는 “피터 와그너 책에 나온 내용이다.”며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며 한 발 뒤로 물러나셨지만, 이 배금주의를 위해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망령스럽게 예수님까지 들먹거리셨던 홍 목사님···.
치유사역에 따른 감사헌금으로 부자이셨던 예수님···??? 치유사역에 따른 감사헌금으로 부유했던 사도들···??? “반드시 그렇다는 것이 아니었다.”면, 아예 이야기를 하지 마셨어야 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 하소연을 들어보자.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해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고린도전서 4절 11절 상)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장 27절)
극한 환경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던 바울 사도와 마케도니아 교회들
물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은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 모든 좋은 것과 함께해야 한다(갈라디아서 6장 6절). 즉,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은 가르치시는 분 물질 필요를 채워야 한다(빌립보서 4장 26절~18절. 참고; 민수기 18장 21절). 이것이 구약 십일조 정신에서 그 하나다. 그러므로 고린도서에 적힌 바울 사도 환경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함에도, 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홍정식 목사님 주장 “가난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나?”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헐벗고 주리고 목마른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셨던 바울 사도···.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했느니라. (고린도후서 8장 1~2절)
다음은 ‘황영철 {신비체험과 신앙} (서울: 도서출판 나비, 1988)’ 73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비논리적인 생각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신자가 번영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중략)···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풍요해야 하고, 지식이 많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은 물질주의 시대사조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그런 생각 배경에는 자기 행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속임이 숨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그가 정당하고 의롭게 살면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영광과는 무관하다. 그의 많은 소유는 그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할 뿐이다.
개혁 교회 신학(교리)을 “설設, 추론推論”으로 말하며 사탄시하는 신사도운동
“예수님은 가난하지 않았다.”며 부를 강조하는 미국 죤 아반지니 목사는 그의 책 ‘{십일조를 잘해도 왜 안 풀리죠?} 오태용 역 (서울: 베다니출판사, 1996)’ 253쪽부터 259쪽에서, 마태복음 15장 6절 “너희는 어찌해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 말씀을 폐하느뇨?” 하신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며 “부를 얻으려면 유전ㅡ전통: 조상들이 전해준 규례ㅡ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주장을 위 인터뷰에 나오는 홍정식 목사님 주장으로 바꾸면, “우리는 신학이란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학술이라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략)··· 굳어진 신학 전통만을 배우고 있어 하나님 나라 다양한 측면을 보지 못하고 배운 바에 어긋나면 비판하곤 한다. ···(중략)··· 신학이 너무 오랫동안 정체돼 있어, ···(하략)···”다. 그러면 아반지니가 말하는 “전통”, 홍 목사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신학의 전통”이란 자세히 무엇을 뜻하는가? “오직 하나님,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가르치는 칼뱅주의 교리, 개혁(Protest, 장로) 교회 교리다. 더 자세히 말하면, 보통 “개혁 교회 5 대 교리”라고 부르는,
“아담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잉태 될 때부터 죄인임으로 하나님 은혜 없이 사람 힘으로는 구원에 절대 이르지 못한다.”는 완전 타락(Total depravity) 교리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절대 은혜로 구원을 받을 사람을 창세 전에 이미 선택해 놓으셨다.”는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교리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반드시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불가항력 은혜(Irresistible grace) 교리와
“일단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은혜로 인내하게 하셔서 끝까지 그 구원을 지키게 하신다.”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교리다. ‘{돌트 신경}(1619년)’ 이 교리들은 우리나라 초기 장로 교회가 신조로 삼았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에도 잘 정리돼 있다.
“신학이란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학술이라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신 홍 목사님 주장···. “신학이란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의미의 모호성을 지닌 참 애매모호한 말씀이다. 그러나 홍 목사님 과거 주장들을 잘 아는 내가 이 주장에 숨은 행간 의미를 정확히 말하면, ‘신학이란 진리를 다루는 학술로서 추론에 의존하는 학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신학과 신앙은 분리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홍 목사님이 졸업하신 ‘총신신대원에서 가르치는 칼뱅(개혁) 신학은 추론에 지나지 않는 학설이다.’는 주장이다.
신사도운동 교리 “오직 은혜의 구원”과 알미니안 교리
추론에 지나지 않는 학설로서 개혁 교회 교리···, 이 말은 ㅡ‘내가 보기에는 진짜 추론에 지나지 않는 피터 와그너 주장들’을 홍 목사님께서 모두 따르시는지는 모르겠지만ㅡ 인터넷에서 ‘피터 와그너’를 검색해 검색한 자료들을 가지고 추론해서 내린 결론이다. 또한 이 말은 위 아반지니 책에서 얻은 결론이다. 특히, 아반지니에게 개혁 교회 교리들은 사탄의 교리다. 아반지니는 {십일조를 잘해도 왜 안 풀리죠?} 148쪽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루터는 믿음에 의한 구원과 오직 은혜로만을 공표했는데, 사탄은 물을 끼얹는 세례를 추가했습니다. 재세례파가 침례를 주장하자, 사탄은 무조건 선택과 예정을 덧붙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에 의한 구원과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교리를 무조건 선택 교리와 서로 다른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즉, 윗글에서 아반지니는 개혁 신학 무조건 선택 교리를 사탄시함으로써 알미니안 조건 선택 교리를 두둔한다. 그러므로 “루터”를 들먹거리며 아반지니가 말하는 “믿음에 의한 구원과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말에 담긴 내용은 개혁 교회에게 “이단 가르침”으로 정죄 받은 알미니안 교리다.
“신학이 너무 오랫동안 정체돼”, “굳어진 신학 전통만을 배우고 있어,”??????? 그럼 한때 “번영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신新오순절운동 신학은 굳어진 신학 전통을 타파한 새롭고 살아 있는 신학인가? “굳어진 신학 전통만”을 아직도 고집하는 외골수인 내 관점에서는 그들 신학은 과거 교회 역사에서 나타났던 그릇된 신학의 전통ㅡ정확히 말하면, 개혁 교회에게 비판을 받거나 정죄를 받았던 전통(교리)ㅡ들을 끄집어내어 발전하게 했을 뿐이다. 아니, 답습했을 뿐이다.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신사도운동과 홍정식 목사님
안타깝게도, “우리는 신학이란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학술이라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홍정식 목사님 주장조차도 과거 답습이다. 그 예로, 홍 목사님 이 주장은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 교회 교리를 무너뜨리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ㅡ사신死神 신학자들의 아버지들ㅡ이 약 1 세기 전에 했던 주장이기도 하다. 한 가지 예이긴 하지만, 이처럼 내 관점에서는 전혀 새롭지 않는 신학, 과거 답습일 뿐인 신학인데도, ‘개혁(장로) 교회 교리는 죽은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시는 홍 목사님에게 이른바 “교회성장 신학자”라는 피터 와그너, 그의 저술이나 신학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다.
1. 과거에 내가 (목포 제일교회에서 ‘송인규 {참된 복}’과 ‘로이드 존스 {시편 73편 강해: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와 ‘로이드 존스 {하박국 강해}’를 그대로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종) 조용기 목사님을 비판한 죄를 두고 하나님께서 회개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회개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속죄헌금 천만 원을 하라고 하셨다. 속죄헌금을 했더니 수지맞는 장사였다. 왜냐하면 조 목사님의 ‘기도로 병 고치는 은사’가 내게도 임했기 때문이다.
2. 회개하고 난 뒤였다.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려고 내게 다가오셨다. 처음에는 주님 발만 보였다. 더 열심히 기도하니, 나중에는 주님 무릎까지 보였다. 더욱더 열심히 기도하면 배꼽까지도 보여주시지 않겠는가!
위 ‘1, 2’는 홍 목사님이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간증하신 내용에서 한 부분을 내가 요약한 것으로, 가로 속 파란색 글은 내가 더한 것이다. 나를 경악(?)ㅡ예상했던 일이었다.ㅡ하게 만든 이 간증에 여의도 순복음교회 많은 교인들은 “아멘!”으로 크게 화답했다.
“아멘!”, 이로써 홍 목사님 간증 내용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만큼은 새로운 계시로서, {성경}에 버금가는 공적 구속력을 가지게 됐다. 비꼬는 말이지만, 개혁 교회가 정경으로 인정한 신구약 성경 66 권에 홍정식 목사님 신新복음, 즉 두 귀로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생생한, 살아 있는 홍정식 목사님 간증이 더하게 됐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직접 계시 가능성을 주장하는데 그 중요한 논거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직접, 계시 종결을 교리로 확정할 때에는 하나님 능력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은 것이다. 계시와 관련된 개혁 교회의 이런 정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잘 표현돼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 방법들은 이제 그쳤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제1장]<1항 1절>
“오늘날도”??? 물론, ‘과거에도 계시 종결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위 인용문은 ‘황영철 {신비체험과 신앙}’ 39쪽에 적힌 글이다.
알미니안 5 대 교리 핵심
“인간은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중세 천주교 교리는 “연옥에 있는 사람을 천국으로 옮길 수 있다.”는 면죄부 교리로 발전했다. 그런데 칼뱅 종교개혁으로 태어난 개혁 교회는 구원에서 인간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물론, 이를 두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에서 인간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개혁 교회 교리’에 대항해 태어난 ‘알미니안 5 대 교리’다. 물론, 유럽의 개혁 교회들은 1619년에 돌트 총회(회의)로 모여 ‘중세 천주교 펠라기우스 행함 구원론의 아류로서 알미니안 5 대 교리’를 “이단 사설”로 정죄했다. 이 회의에서 ‘알미니안 5 대 교리’를 반박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른바 “칼뱅주의 5대 교리”라고 부르는 개혁 교회 ‘5 대 교리’, ‘TULIP 교리’다.
그런데 ‘개혁 교회 5 대 교리’에 반反하는 ‘알미니안 5 대 교리’, 그 핵심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믿음을 선택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오직 은혜의 구원에는 인간의 선택이 따른다.”다.
‘1979년 가을 예장 합동 제64회 총회 분열’과 홍정식 목사님
나를 경악(?)하게 했던 홍정식 목사님 간증···. 무엇이 홍 목사님 오늘을 태어나게 만들었을까? 그 하나는 홍 목사님이 과거에 무척 가슴 아파하셨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분열이 아니었을까? 바꿔 말하면, 홍 목사님 인터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나라 각 교파가 화해하는 역사, 교회 연합’을 바라시는 홍 목사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
내가 목포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9년 가을, 예장 합동 제64회 총회에서 교권욕에 사로잡혀 교단을 둘로 나눴던 교권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이 “예장 합동 신조로 삼는다.”는 개혁 교회 교리···. 1979년에서 1982년 1월까지 목포 제일교회 고등부, 청년대학부에서 한국대학생선교회 {열 단계 성서교재}로 우리를 이끄셨던 홍 목사님···. 그리고 그 이전, 교권욕을 감춘 채, 모세오경 저작 문제를 다룬 총신대 김희보 학장 ‘문서설’을 꼬투리 삼아, 예장 합동을 이른바 “주류”와 “비주류”로 나눠 버렸던 사건! ㅡ물론, 그때 예장 합동 모든 목사님들이 교권욕에 사로잡히셨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비주류 제1대 총회장으로 당선되셨던 목포 제일교회 김일남 담임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잘 해석해 잘 가르치는 사람은 전도사일지라도 자신보다 높일 줄 알고 키우려고 애쓰셨던 김일남 목사님께서는 교권욕이나 명예욕이 없으셨음을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안다.ㅡ
모세오경 모세 저작권을 부인하는 ‘문서설’의 최종 목표
내게는 충격이었던 영호남 교권다툼···. 그래서 내가 세례를 받은 내 모母 교회 목포 시온교회에서는 김원범 담임목사님께서 주류측 총회 서기로 당선되신 일을 두고, “교단이 나뉜 판에 총회 서기가 되신 것은 옳지 못하다.”며 비주류측을 옹호하시는 집사님들과, 주류측을 옹호하시는 집사님들이 욕까지 주고받는 말다툼이 벌어지고···. 새벽기도회를 날마다 참석하고도 하교 길에 항상 시온교회를 들러 기도했던 나는 우연찮게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그리고 충격을 받아 무교회주의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시온교회를 그만 다니게 됐다.
집에서 ‘성경의 권위’를 다룬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를 다룬 책들을 읽으면서 ‘무교회주의’는 옳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1980년 5월 광주학살로 찾아온 3 주라는 휴강 동안 ‘교회와 정치 관계’를 다룬 책들을 읽으며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소책자를 만들어 100 권 복사했다. 그리고 광주학살이 끝난 1980년 6월, 나는 이 소책자들을 들고 모母 교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모母 교회로 돌아간 뒤였다. (목포 제일교회를 다니던 급우) 임00를 따라가 홍정식 목사님께 ‘모세오경 저작권 문제’를 여쭸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고등학생인 네가 벌써 그런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다. 모세가 모세오경 저자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예수님을 내 구주, 내 하나님으로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며 나를 꾸짖으셨다. 그러나 김희보 학장 문서설 때문에 목포 시온교회도 결국 둘로 나뉜 때라서, ‘주류냐, 비주류냐? 어머니 교회로서 시온교회냐, 초등부 주일학교 시절 나를 예뻐하셨던 집사님 몇 분이 주축이 돼 새로 개척하신 교회, 시온교회에서 나간 교회냐?’를 고민하고 있던 나로서는, 모세오경 저작권 문제는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그 무엇보다도 ‘모세오경 독특성(신성)을 파괴하는 일은 예수님 독특성(신성)을 파괴하는 일과 이어진다.’는 점을 ‘성경의 권위’를 다룬 책들을 읽으면서 깨달았던 나로서는, ‘모세오경 모세 저작권 문제’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홍 목사님께서 나를 꾸짖으면서 하신 말씀을 나는 ‘{신약 성경}만으로도 우리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교회일치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가벼운 교리의 짐”
“예수님을 내 구주, 내 하나님으로 믿으면 그만 아니냐?”며 “신앙과 신학의 분리”를 주장하면서, “교회 연합”을 외치는 한국대학생선교회 같은 초교파 선교단체들이나 오순절 운동주의자들에게 각 교파 교리는 ‘교회 연합’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ㅡ1981년, 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웨스트민스터 대·소 요리문답} 같은 개혁(장로) 교회 교리를 신앙의 장애물로 여기며 적대시하던,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임00를 가르치시던 전남대학교 한국대학생선교회 간사님과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ㅡ 이른바 “큐티 생활”, 즉 신자 각 개인이 성경을 묵상해 깨달은 내용을 서로 나누는 성경공부를 강조하는 그들은 종교개혁의 빛 아래 “오직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그들은 “교회 연합을 위해 무거운 교리의 짐에서 벗어나 가벼운 교리의 짐을 지자.”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무거운 교리의 짐”은 무엇인가? 물론, 칼뱅의 종교개혁으로 태어난 개혁 교회 교리다. 그리고 “가벼운 교리의 짐”은 무엇인가? 물론, “신앙과 신학의 분리”를 주장했던 경건주의 신학 “예수님을 내 구주, 내 하나님으로 믿으면 그만이다.” 식 교리다. 그런데 웨슬리안이 대표하는 이 경건주의 신학이 받드는 교리는 무엇인가? ‘알미니안 5 대 교리’다. 이처럼 교회일치주의자들 그들이 말하는 “신학과 신앙의 분리”는 모든 신학(개혁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과 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개혁 신학과 분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교회 연합”이란 이른바 “칼뱅주의자들”을 뺀 연합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원에서 인간의 여지를 주장하는 알미니안 교리를 따르는 그들은 “불교 같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존재한다.”며, “불교 같은 다른 종교와 기독교 연합”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칼뱅을 사탄의 종 적그리스도로 보는, 개혁 교회 교리를 사탄의 교리로 보는 오순절운동주의자들, 신사도운동가들에게 개혁 교회 어떤 교리가 가장 사탄의 교리로 보일까?
신神적 권위를 지닌 홍정식 목사님 간증과
신사도운동 가장 큰 걸림돌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제1장]
다음은 ‘{영한대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나용화 역 (광주: 한국복음문서협회, 1979)’ [제1장]<6절 상>이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든지, 아니면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해 성경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다가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이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구원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는 신구약 성경 66 권으로 충분하다.”는 개혁 교회 ‘계시 종결 교리’···. 이런 계시 종결 교리를 [제1장]<제1절>부터 시작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리고 앞서 내가 요약해 적은 ‘간증 1’을 두고 홍정식 목사님께서는 ‘직접 계시가 아닌 마음속으로 깨달은, 마음속에 들려주신 음성이었다.’고 이야기하실지 모르겠지만,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하나님 직접 계시를 이야기하신 홍 목사님 간증···.
홍 목사님 인터뷰 기사에서 “이번 강연에서 주로 비판을 받았던 부분은 가난은 저주라는 것과 교회가 돈을 가져야 한다는 부분이었다.”는 것이 기자 질문이었다. 그런데 나를 경악(?)하게 했던 간증은 직접(직통) 계시를 이야기하시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아직 갈 데까지 다 가신 것은 아니지만, 갈 데까지 가셨구나.’라는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경악(?)이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홍 목사님 간증 전체는 비판할 수 없는 신神적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과거 교회 역사에서 보는 대로,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홍 목사님께서는 이단ㅡ물론, 계시 종결 교리를 믿는 개혁 교회의 정죄이겠지만ㅡ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 재림 날짜를 예언하고 믿었던 다미선교회처럼···.
ㅡ‘홍 목사님을 두고 예장 합신 태도는 어떤가?’를 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 예장 합신 인터넷 신문 {개혁신보}에 따르면, “2004년 10월 1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경기중노회는 새서울교회 홍정식 목사를 노회 목사 명부에서 삭제하고 교회 명부에서도 교회명을 삭제했다.”고 한다.ㅡ
우리나라에서는 순복음 교단이 대표하는 오순절운동···. 환상, 예언, 방언, 치유 은사를 주장하는 오순절운동주의자들···. 개혁 교회 교리를 교회 분열의 씨앗으로 보는 은사주의자들···. 이른바 “교회성장 신학자”들에게 ‘개혁 교회 계시 종결 교리’는 그 어떤 개혁 교회 교리보다도 ‘교회 성장’ 이나 ‘교회 연합’을 막는 최대걸림돌이다.
장로교에서 장로들 소임 하나
교회 분열의 씨앗···. 우리는 이것을 직접 경험했다. 장로교라면, ‘장로교 교리에 충실한 목사인가?’ 를 분별해서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목사’를 모시는 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장로님’들 소임이다. 그러나 ㅡ모든 장로님은 아니었지만, 홍정식 목사님 추천으로 홍 목사님 후임으로 오신 전도사님, 목포 제일교회 주일학교 고등부 성경공부 때 칼뱅 {기독교 강요}에 나온 내용을 소개하기도 하시면서 개혁 교회 교리들을 가르치셨던, 1983년에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문답}을 우리 제일교회 주일학교 청년 대학부 성경공부 때 가르치셨던 조주석 전도사님을 “이상한 교리를 선동하는 전도사”로, “이상한 천국론을 선동하는 삯군, 이단”으로 여기셨던ㅡ 장로님들께서 그런 분별없이 교회 성장에만 눈이 멀어 ‘은사운동주의자이셨던 정갑진 목사님’을 김일남 목사님 후임으로 모심으로써, 둘로 나눠졌던 우리 목포 제일교회 역사에서 우리는 경험해야만 했다.
능력과 함께 가는 복음
“복음은 능력과 함께 간다.”는 옳은 주장···. 그리고 우리 목포 제일교회 역사에서 있었던 능력. 하나님 말씀을 하나하나 깨닫고, 그 깨달음이 우리 삶에서 하나하나 열매를 맺는 일에서 드러나는 능력···. 그러나 이와 다른 의미에서 능력···. 즉, 치유사역의 능력···.
1991년 봄, 정갑진 목사님께서 우리 목포 제일교회에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때 서울을 돈 버는 근거지로 하며 광주대학교 영어과 야간학부 3학년이었던 나는, “정갑진 목사님을 판단해 보라.”는 임00 강력한 전화 부름(?)을 받고 수업을 빠진 채 광주에서 목포로 갔다. 그리고 수요 저녁 예배에서 정 목사님 설교를 들은 나는 예배를 마친 뒤 임00에게 말했다. “타종교나 이단에게서도 환상, 방언, 예언 치유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로 전해진 하나님 말씀과 역사하신다. 정 목사님 치유사역을 판단하는 표준은 바로 이것이다.”며 정 목사님 치유사역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정 목사님 은사운동을 곧바로 정죄했다.
그리고 그 뒤 성남에서 살고 있던 친구 윤00ㅡ지금은 목사님이시기 때문에 존댓말을 써야겠지만ㅡ 집에서 윤00랑 나와 토론(?), 말다툼이 있게 됐다. 정 목사님 은사운동을 정죄한 나에게 “복음은 능력과 함께 간다.”며 정 목사님 은사운동을 옹호하는 윤00 때문에 생긴 말다툼이었다. 윤00 주장에 나는 ‘능력은 복음과 함께 간다.’는 논지로 반론을 폈다. 그런데 말다툼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급기야 “너는” (개혁 신학에 정통하시다는) “서철원 목사님께서 계시는 서울 청담동 개혁신학원에서 도대체 뭘 배웠냐?”는 인신공격성 내 못된 비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다툼은, 윤00도 정 목사님 은사운동을 소식으로만 들었던 때라서, “이번 여름방학 때 목포에 갈 거니까, 내가 목포에 가서 정 목사님 설교와 은사운동을 직접 듣고 보고 난 뒤 다시 이야기하자.”는 윤00 제안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제안대로 제일교회에 다녀온 윤00가 내린 결론은 “목포 제일교회는 장로교 간판을 내려야 한다.”였다. 윤00는 이 결론을 “송00 장로님께 말씀 드렸다.”며, “목포 제일교회 저대로 두면 안 된다. 네가 시간 나는 대로 목포에 가서 네가 아는 형제 자매들을 쑤시고 다녀라.”는 명령(?)을 나에게 내렸다. 그러나 나는 이 명령을 따르지는 않았다. 내 신앙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 때라서···. 1987년 6월 11일, 불자佛子셨던 아버지 갑작스런 죽음에서 받은 충격으로 교회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때라서···. “신학교를 졸업한 네가 쑤시고 다녀라.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석사 과정을 공부하는 네가 쑤시고 다녀도 안 될 판에, 내 말이 애들한테 먹히겠냐? 더군다나 나는 내 신앙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 주젠데.”라는 게 윤00 간절한 명령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그러면 지금 홍 목사님을 비판하고 있는 나는? 교회 출석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 신앙도 챙기지 않은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왜?
홍정식 목사님께 ‘은혜의 빚’을 진 사람들로서 우리 의무
얼마 전 일이다. 아내가 “서울 남서울교회를 다니셨던 교회 집사님이 하신 이야기”라며 “홍정식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님한테 무릎을 꿇고 회개를 했다.” 둥, 홍 목사님 소식을 나에게 전했다. 그런데 아내는 별로 반응이 없는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이00 형님이 이곳에 올리신 홍 목사님에 관한 글을 읽게 됐다.
이00 형님이 올리신 글을 읽은 뒤였다. 그 글 출처인 인터넷 사이트 {뉴스앤조이}까지 들어가 홍 목사님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비난 댓글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00 형님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다른 동문들도 대부분 나와 한가지였겠지만, 홍 목사님은 한때 내가 좋아했던 분이기 때문에, 차라리 카페에 들어오는 동문들이 모르면 좋을 기사인데···.’라는 짧은 생각으로, 나는 아내에게 “에이, 00 형은 하필이면 카페에 저런 걸 올렸냐?” 말하며 이00 형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ㅡ이처럼 할 말이 많았음에도 다른 동문들 비판 댓글을 내심 바라며ㅡ 이00 형님이 올리신 글에 내가 댓글 하나도 쓰지 않은 까닭이다.
짧은 생각···. 우리는 우리 목포 제일교회에서 홍정식 목사님께 은혜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솔로몬의 배교가 구약성경 [잠언], [전도서] 같은 솔로몬의 저작들을 폐하지 못했듯이, 홍 목사님 현재가 홍 목사님 과거를 폐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한때 우리를 가르치셨던 분이라는 그 까닭 하나 때문에라도, 이 충격의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동문들이 먼저 알고 판단을 내린 뒤, 홍 목사님을 향한 여전한 사랑(참고; 갈라디아서 1장 6절), 홍 목사님께 첫사랑의 분노하는 마음(참고;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을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건만···.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우리가 사모했던 홍 목사님께 할 수 있는 도리, 빚진 자로서 도리이자 신앙의 도리이건만···. 빚진 자로서 도리, 안타까운 마음으로 홍 목사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참고; 사도행전 7장 60절과 8장 1절 스데반 집사님 기도의 응답으로서 사도행전 9장 1절~19절)해야만 하는···.
그리고, 지금은 삭제돼 없지만, 며칠 뒤 최00 형제ㅡ역시 존댓말을 써야겠지만ㅡ가 이곳에 올린, 인터넷 {크리스천 투데이}에 실린 홍 목사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됐다. 그런데 이 기사를 올린 형제가 다른 사람이 아닌 최00 형제라는 점에서 오해 소지가 있게 됐다.
오해 소지···.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천 새서울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던 친구, ‘최00 형제는 과거 새서울교회에서 홍 목사님 은사운동을 비판한 나머지 홍 목사님께 미움을 산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다른 동문들은 최00 형제가 홍 목사님을 두둔하려고 이 기사를 올린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최00 형제가 올린 글 댓글란에 홍정식 목사님 주장을 비판하는 짧은 글ㅡ이 반론 글 맨 첫 문단ㅡ을 남기게 했다. 그리고 ‘이왕 비판할 바에야 자세하지 않은 짧은 글보다는 자세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댓글을 지웠다. 그리고 이렇게 오늘까지 길게 쑤시게 됐다. 즉, 오해 소지가 한 가지 동기가 돼, 내 신앙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 주제일지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애쓰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11 회에 걸쳐 쓴 이 글···. 최00형제가 홍 목사님 인터뷰 기사를 삭제한 정확한 까닭은 모르겠지만, 인터뷰 기사가 삭제된 마당에, 모든 회원이 볼 수 있는 이 방에서 이 기사를 반박하는 글을 계속 올리는 게 부담스럽다. 그러나 ㅡ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글이긴 하지만ㅡ 이왕 시작한 글이니, 내 글은 한두 회원만이 읽는 까닭으로 우수회원 이상만이 볼 수 있도록 내가 설정해 놓은 {자유게시판 2} 방으로 가서, 글을 마무리 짓든지 해야겠다. 이 방에서는 개혁(장로) 교회 계시 종결 교리를 다룬, 독립개신교회 강변교회 최낙재 목사님 글을 마지막 글로 올린다.
최낙재 목사님께서는 수십 년 전, 예장 합동 광주신학교와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셨다. 또한 1979년 가을에 예장 합동이 나뉜 뒤, 교권주의에 반대하신 개혁 신학자 박윤선 목사님, 그분을 중심으로 세운 수원 합동신학원에서도 약 10 년 가까이 신학생들을 가르치셨다. 다음 글은 30여 년 전 총신대학교에서 펴낸 계간지 {신학지남}지에 [계시와 성경 2]3)라는 글 이름으로 실린 최낙재 목사님 글 일부분이다. 들여쓰기 없이 옮긴다.
------------
啓示와 聖經 (2)
계시의 성격을 좀 더 살펴봄으로 성경을 통한 은혜를 충실히 받고자 해 전호前號와 같은 제목의 글 속편으로 이 글을 쓴다.
* 계시의 중심은 그리스도 *
···(전략)···
그래서 우리 주변에 “나는 계시를 받았다. 누구누구가 어디 어디로 선교사로 떠나야 한다.”든지, “내가 주님 말씀을 들으니 지금 당장 이 회중 가운데 위암이 나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본다. 제한 있는 인간에게 초자연의 지식 갈구는 예나 다름없이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따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계시는 어떤 특성으로서 자체가 참 계시임을 입증하는가? 구약의 기초를 놓은 모세 시대에서 또 계시가 정점에 이른 신약 시대에서 각각 그 사실을 찾아보자.
<모세 시대>
신명기 18장 9절 이하를 보면 당시도 주위에는 초자연의 지식을 갈구하는 일과 이에 수응酬應(남의 요구에 응함)하는 활동이 많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에는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 계시가 항상 있어서 그 백성을 인도하기를 원해 예언자를 주시마라고 하셨다.
···(중략)···
이러한 주위 영향을 배제하고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시고 또 그 입의 말씀에는 계시로서 특성이 있어서 백성이 식별할 수 있을 것이라 하셨다.
1. 먼저, 약속하신 예언자에 대하여 살펴보자. ···(중략)··· 은혜로운 이 약속대로 필요할 때마다 이스라엘에는 예언자가 일어나 계시가 계속되고 더욱 풍성하게 됐고 마침내 세상 끝에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아들’[히1:2]이 나타나셨다. 그는 모든 예언자의 계열에서는 말씀 전달자일 뿐 아니라 자신이 ‘말씀’[요 1:14]으로서 계시의 정상을 이루신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리아 수가 여인도 메시아ㅡ예언자를 기다렸고[요 4:25, 비교-신 18:18] 빌립이 이 말씀을 예수께 적용했다[요1:45]. 하늘에서 난 소리가 신명기에 적힌 약속의 말씀 그대로를 예수님을 두고 반복하심으로 그 예언이 예수님에게 성취된 것을 알게 했고[마 17:5] 사도 베드로가 이 사실을 선언했다[행 3:22,23]. 이로 보면 그 약속된 예언자란 이스라엘 역사상 대대로 나타난 모든 예언자와 계시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 다음으로 이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은 어떤 특성을 가져 백성들이 그것을 주님 말씀으로 식별하고 복종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로, 이 말씀은 예언자가 여호와 이름을 띠고 고할 것이다[19절]. 이것은 형식상으로도 다른 무당류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충분한 분별 척도가 되지 못할 것임이 드러난다. 무당류 위험이 외부에서 있을 뿐 아니라 내부에서 여호와 이름으로 말할 거짓 예언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중요한 표지標識(어떤 사물을 표하기 위한 기록)가 될 만한 특성은 말씀의 내재 능력이다. 계시 말씀은 힘이 있어서 말씀한 것을 성취한다[22절]. 예언자 형식을 모방해 자기에게서 낸 거짓 예언자 말은 허망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나 참 예언자 말은 실효를 거둘 것이다.
또 하나의 표지가 될 만한 특성을 신명기 13장 1절부터 5절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예언자 형식을 띠고 일어난 자 말이 그대로ㅡ이 경우에는 이적과 기사로ㅡ 성취되기까지 해[2절]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백성들 마음이 그의 전하는 말을 계시 말씀으로 믿을만하게 된 경우가 있다. 이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분별력을 사용해 그를 좇지 말아야 한다. 중립 입장을 취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예언자 말을 청종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신 18:15,19] 그의 말을 듣든지 아니면 거짓 예언자임을 판별해야 한다. 이때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판별 척도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시며 종 됐던 집에서 속량해 취하신 너희 하나님”에 대한 이미 받은 계시,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5절]였다. 사람 눈을 현혹시킬만한 말의 성취가 있을지라도 이미 받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그에 따르는 인생의 도리에서 떠나게 하는 내용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서 없애야 한다.
···(하략)···
<신약 시대>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 계시가 단순히 “입에 두신 말”로서만 아니라 “육신”, 곧 인격체의 충만한 형태를 취했으며[요 1:14,18] “모든 날 마지막”에 주신 바 돼[히 1:2] 계시 종결성을 보게 된다. 온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밝은 빛을 얻으며 이후로는 누구나 이 빛을 받고 누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부족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기다리거나 찾아 헤맬 다른 빛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미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지키고 또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고전 15:2]. 또한 이질적인 내용을 복음의 이름으로 전하는 일에 대해 강경하고 엄한 경고를 내린다[갈1:8,9].
정오의 빛과 같은 계시가 있는 신약 시대에도 계시라는 이름으로 참 계시를 가리려는 활동이 있다. 사도 바울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까지도 있을 것을 말한다. [살후 2:9,10]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전하신 뒤에 사도와 예언자들이 그 일을 계승했고 “하나님께서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서 저희와 함께” 확증해 주셨는데[히 2:4] 사단의 일꾼들이 이를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양자 간 차이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참과 거짓을 식별할 것인가? 전자前者에는 이미 전한 복음의 진리와 거기에 담긴 사랑[살후 2:12,10]이 있다. 그러나 후자後者에는 이것을 소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사람 주의注意를 돌이켜 빛이 아닌 거짓 것에 쏠리게 한다.[살후 2:11]
이와 반대로 참 계시활동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를 자랑하려 한다[고전 1:24,31.고전 2;2]. 그분 영화로운 광채가 모든 사람에게 잘 비치도록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라.”[사 40:4]는 심정과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요 3:30]는 세례 요한 심정이 계시의 참된 일꾼 심정이다.사도 바울은 모범적인 이런 일꾼이었다. 그는 환상과 계시를 봤고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컸다. [고후 10:1,7] 그는 셋째 하늘로, 낙원으로 올라간 경험을 했다. 이러한 것들을 사람에게 말했다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요 참말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을 자각해 사람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비록 그것이 거짓이 아니요 사실일지라도, 덜 중요한 곳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그런 계시와 환상 말하기를 피했다.오늘날도 계시의 참된 전달자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시금석은 이것이다. 그가 계시를 전달할 때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든지 않든지 그리스도와 그분 교훈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도록 다른 것을 강조하면 그는 계시 전달자로서 자격이 없다.
* 계시의 유기적인 관계 *
···(생략)···
============
‘각주 번호 1)부터 2)’는 황영철 목사님 가르침을 기억해 그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이었다. 즉, 황영철 목사님께서 독립개신교회 성약교회 일반신자 시절에 쓰신 책, ‘황영철 {성령과 윤리: 성령에 대한 구속사적 연구}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4)’ 78쪽~81쪽을 기억해 쓴 글이다.
3) {신학지남 44권 1호} (서울: 총신대 출판부, 1977) 최낙재 [계시와 성경 2]에서. [계시와 성경], 이 글은 ‘최낙재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라.} (서울: 성약출판사, 2007)’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