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제가 본당신부로 있던 모 본당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두 사람이 싸웠던 그날 말입니다.
만일 두 사람이 서로 같은 본당 교우라는 것을 알았었다면 싸움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얼굴 붉히는 일, 언성 높이는 일은 고사하고 세상에서 마음씨 좋은 어느 아저씨들 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껄껄껄 웃으며 서로 주차 자리를 양보 했을 것입니다.
Ⅱ. 어떤 자매님이 병자 봉성체를 가는 본당신부를 동행했습니다.
환자 자매님은 아랫입술은 찢어져 뒤집어져 있었고 이(齒)도 하나 부러져 있었습니다.
그저께 저녁, 사곡역 뒷골목에서 강도짓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아뿔싸!
그 날 밤 내가 그 길을 지나가고 있지 않았던가?
웬 아줌마가 누구에겐가 당하는 것을 느꼈지만 나도 害를 입을까봐 그냥 지나쳤는데 바로 그 아줌마가 지금 이 자매님이 아닌가?
물론 이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제가 상상해 만들어 낸 것 입니다.
어쨌거나 만일, 우리 교우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면 나는 그냥 지나치게 될까요?
Ⅲ.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우리 교우끼리는 얼굴도 알려고 하며, 이름도 외우고, 아는 척도 좀 하며 지냅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촌스럽습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기 때문에 다른 층에 사는 사람들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男子는 女子에게 좀처럼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女子는 男子에게 좀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남자인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여자는 나를 음흉한 늑대 취급할 것 같고, 여자인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남자에게 나는 헤픈 여자로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까?
이런 경우, 서로의 생각을 어려운 말로 ‘오해’ 또는 ‘내숭’이라 합니다.
Ⅳ. 우리 본당 공동체에서는 오해도 내숭도 없어야 합니다.
갓 세례를 받은 신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사 中 ?평화의 인사?는 이상한 인사라고 말입니다.
옆, 앞, 뒤, 서로 간이라도 빼줄듯 방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미사 後 성당 마당에서 마주치면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분위기로 바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사 시간에야 옆에 앉았기에 미사 순서에 따라 인사를 나눴지만 미사 後 마당에서까지“아까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어디 사십니까? 세례명이 뭡니까?” 다시 말을 건넨다면, 이건 마음에도 없는 내숭이거나 아니면 자기를 좋아하는 줄, 상대방이 오해할까봐 내가 미리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비자들이 성당에 나오면서 기존 신자들에게서 받는 느낌은, 자신들이 물건 팔러 온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얼굴을 돌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비자 여러분,
우리 교우분 中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좀 촌스러워서 그런 것이고 그것은 오해이니 오해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받아 섭섭해 했던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 새로 오시는 예비자들에게 또 그렇게 하니 이런 사태를 ‘악순환’이라 합니다.
Ⅴ. 같은 날 같은 성당에서 같은 시간에 미사를 드렸어도 우리는 서로 이야기 하지 않으며 우리는 서로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공동체는 문턱이 높고 낯설고 외로운 곳입니다.
그러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집 나가게 되는 것을 냉담이라 합니다.
외롭고 싶지 않으려면 레지오에라도 가입해야 합니다.
레지오에 가입한다고 해서 외롭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레지오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같은 레지오 단원이라도 만나게 되니 좀 덜 외로울 뿐인 것입니다.
같은 단원이거나 같은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서로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남입니다.
이미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모성당 공동체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Ⅵ. 사랑하고 존경하올 상모성당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신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것이 올해 본당 신부의 ‘본당사목지침’입니다.
이것은 가능하면 그렇게 노력해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내에서의 의무입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으로써 제가 이 본당에 오기 前, 여러분들이 이미 해오시던,
그러나 지금은 흐지부지해 있는 명찰 달고 미사에 참례하기 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반 모임과 미사 끝 공지 사항시간을 통해서 전달 될 것입니다.
Ⅶ. 올해 교구장님의 사목지침은 ?노인 복음화?의 해입니다.
우리 사회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초고령화 시대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 복음화는 노인들이 이 사회의 약자로서 인권을 침해당하거나 이웃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노인들에게서 나오는 지혜는 우리가 배우고 나누기 위한 마땅한 것이며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라.”는 하느님 계명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길에서 만난 노인이 본당 신자인지도 모르고 또 신자 노인을 만난들 이름도 성도 나이도 모르며 그 분이 할아버진지, 아저씬지, 청년인지? 할머닌지, 아줌만지, 처년지도? 모르면서 어떻게“노인 복음화”를 이룰 것입니까?
가톨릭 본당 내에서는 노인 소외가 아니라 노인 되기 전부터 이미 소외가 존재해 있습니다.
바로 성당에 처음 오는 사람들 그리고 세례 받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받는 기존 신자들 끼리끼리의 사람들로부터의 소외가 그것입니다.
친한 사람끼리라는 무리들도 소외받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잘 아는 친한 사람들도 끼리끼리 있을 때는 몰라도 그 중 단 한 사람만이 성당에 온 날에는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다른 친한 사람끼리 끼리를 만나면 그들도 기가 죽고 소외 받기는 똑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공동체는 노인이 되면 그 소외는 소외제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대접을 받게 될 가장 효율적인 방책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 본당의 젊은이는 노인을 알아야 하고 노인 또한 우리 본당의 젊은이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회에서는 서로 다 잘 알고 지낸다 합니다.
개신교를 따라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은 하느님의 같은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이행하기 위해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근원을 알고 기초를 다지자는 ‘본당신부의 2007년 사목 지침 실행’이 쑥스럽기도 하고 오해가 일어 날 수도 있겠지만 협조해 주시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