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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특별기고 여순사건에서 여순항쟁으로
이 글은 해방 이후 최초로 여순사건을 다룬 박사학위 논문이며 왜곡된 우리 현대사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료입니다. 현재까지 현대사의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좌우이데올로기의 대립, 보수와 진보라는 갈등의 진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며‘여순사건’을 하나의 단순한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항쟁적 의미를 부여한 논문입니다. 잡지의 분량 상 다 실을 수 없어 일부는 생략하였음을 죄송하게 생각하며 전체 목차와 생략한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 목차 >
1. 여순사건의 개요
2. 여순사건의 발발과 인민위원회의 활동
1) 해방전후 전남 동부지역의 사회운동 (생략)
2) 제14연대의 창설과 남로당의 군사정책
3) 군인봉기와 지방좌익세력의 참여
3. 봉기의 진압과 민간인학살
1) 군경의 합동진압작전
2) 민간인 협력자 색출과 학살
(1) 협력자 색출과 군법회의
(2) 공산주의자로 명명하기 (생략)
(3) 인명․재산 피해
4. 이승만정권의 반공공세와 반공체제의 구축
1) 이승만정권의 반공 공세
(1) 김구세력에 대한 견제
(2) 공산당 음모로서의 여순사건
(3) ‘여학생의 부대’의 신화
(4) ‘반공 국민’의 형성
① 여순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생략)
② 사진을 통해 본 언론의 보도시각 (생략)
③ 문인조사반의 활동
④ 종교위문단의 활동 (생략)
2) 반공억압체제의 구축
(1) 계엄령 발포
(2) 국가보안법의 제정
(3) 숙군과 학도호국단 (생략)
5. 결론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1. 여순사건의 개요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지창수를 비롯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은 단독선거․단독정부를 반대하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러 갈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남로당과 사전에 연락을 갖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14연대 남로당 당부 세포원들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봉기였다.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지역의 지역당까지도 사전에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봉기를 계획한 하사관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봉기를 일으킨 다음에는 어떻게 진행할지도 뚜렷이 정해진 바가 없었다.
14연대 봉기는 매우 빠르게 파급되었다.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동트기 전에 여수를 점령했고, 아침에는 순천에 진입하였다. 순천에는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관들이 봉기군을 막으려 애썼지만, 봉기군은 경찰보다 더 많이 불어났다.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파견대가 봉기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광주에서 진압하러 나온 4연대 소속 병사들도 봉기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몇 일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 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여 광범한 대중봉기로 발전하였다. 남로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여 식량배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세력 처단 등의 기초적인 행정을 시작했고, 학생들은 총을 잡고 봉기군을 원조했으며 여학생들과 여성 조직원들은 봉기군에게 밥을 해주는 등의 일을 도왔다. 남한의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대중봉기는 남한정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여순사건은 이승만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 맞는 정치적 위기였다. 하지만 여순봉기는 전남동부 지역에만 머물렀고 전국으로 파급되지는 못하였다.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을 몇 일간의 점령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봉기군과 진압군의 반복되는 점령과 재점령의 순환에 놓여 있거나 한 차례의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났다.
정부는 38선 경계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로 진압군을 편성했다.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군수, 인사를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군사고문단과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진압작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 진압작전은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 경력이 있었던 김백일, 백선엽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도 흔들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편의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였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채,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법도 제정되기 전에 실시된 계엄령은 반란지역의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할 수 있게 만든 ‘살인 면허장’이었다. 그 결과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보다 진압군이 점령했을 때, 민간인 희생자가 몇 배나 더 발생하였다.
해방 전후의 한국현대사는 서로 체제가 다른 분단정권의 수립으로 귀결된 까닭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또한 연구자에 따라 매우 다르다. 여순사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의 이승만정부와 언론 기관 그리고 국방부에서 간행한 공식 간행물 등은 여순사건을 여수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일으킨 군내의 쿠데타’라던가, 남로당 중앙이나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으며, 다른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여순사건에서는 좌익에 의한 경찰․우익인사 학살뿐만 아니라,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이러한 유혈적 결과의 책임은 봉기세력과 지방좌익세력들의 책임으로만 떠넘겨 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좌익의 폭력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평가는 편향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은 역사적 사실 규명이 미흡한 채, 편향적 해석만이 생산되고 유통된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향이 큰 사건일수록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연구 작업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그 필요성이 전혀 없다고 미리 재단하고 일방적인 해석만이 생산되고 유포되었던 이유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여순사건에 대해 가졌던 위기감과 대응방식이 이후 강력한 반공노선 아래에서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정부는 여순사건으로 닥친 위기를 진압작전으로 극복한 뒤, 반공사회 구축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반공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여순사건은 반공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고, 현재까지도 여순사건에 지식과 이미지는 당시에 형성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좌익세력의 폭력과 비인간성이 강조되었고, 심지어 좌익세력은 짐승이나 악마의 수준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진압작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 우익 청년단체원들은 공산주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애국자로 칭송되었고, 작전이 끝난 다음에는 훈장이 수여되었다. 반공이 애국이며, 반공 이외의 것은 체제위협이자 매국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2. 여순사건의 발발과 인민위원회의 활동
1) 해방전후 전남 동부지역의 사회운동(생략)
2) 제14연대의 창설과 남로당의 군사정책
제14연대는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몇 일 앞둔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新月里)에서 창설되었다. 신월리는 일제 말기에 일본 해군의 항공기지가 있던 곳이었다. 여수 구봉산 허리와 바다를 끼고 도는 외길 안쪽에 위치한 신월리 기지는 여수반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미군은 이곳을 앤더슨기지(Camp Anderson)로 명명하고, 14연대의 주둔지로 사용했다.
14연대원으로는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김지회, 홍순석 등 좌익계 장교들과 지창수(池昌洙) 등의 하사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비사관학교 3기생인 김지회와 홍순석은 군기대(軍紀隊)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익 성향의 인물들만을 따로 뽑아 14연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다. 14연대에 창설에 투입된 기간 병사들은 광주에 주둔한 4연대로부터 차출되었는데, 이 병력에는 여수봉기를 주도한 인물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14연대가 4연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두 부대는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어서, 14연대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 4연대가 합류하기도 했다.
제4, 14연대에서는 경찰과의 물리적인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국방경비대는 무기지급, 계급장, 복장, 급식문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찰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있었고 군대로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경찰예비대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대 간부 대부분은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이어서 군 우위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경찰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가 겹쳐져 장교이던 사병이던 간에 경찰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에 경찰측에서는 경비대를 경찰 조직의 하부 기관쯤으로 보아 무시했고, 사상적으로는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했다. 한편 국방경비대 사병들은 과거 ‘일제의 주구’로서 활동했던 경찰들이 자신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자신들을 멸시하는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당시 경찰은 친일파 세력이 강력하게 포진한 반공 조직이었다. 경찰의 이러한 성격은 미군정이 일제 총독기구의 온존과 함께 일제하에서 관리와 경찰로 일했던 인물들을 유임시켰기 때문이었다.
군경충돌은 순천, 구례, 영암에서 일어났다. 이같은 군경충돌은 반민중적인 경찰에 대한 사병들의 비판 의식을 자연스럽게 고양시켰고, 언젠가는 한번 경찰을 응징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병사들은 경찰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일정하게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스스로의 결속력을 다져갔던 것이다.
여순봉기의 주동자였던 지창수는 부대원들에게 “경찰들이 쳐들어온다. 응징하러 가자”라고 말했고, 이런 외침에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동조했다. ‘친일파’ 경찰을 타도해야 한다는 슬로건은 사병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14연대는 여수와 순천에 진입하여 제일 먼저 경찰관과 우익인사를 처단했다.
결국 군경충돌은 국가형성과정에서 극복되어야만 했던 친일파 숙청이라는 과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국가 물리력의 주요한 부분을 점하고 있는 경찰에서 친일파가 확대 재생산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남로당은 군대에 좌익세력을 잠입시켰다. 장교에 대한 공작은 중앙당에서, 사병 공작은 각 도당에서 맡았다. 장교 선발과 교육배치 등의 모든 인사권은 중앙집권적으로 일원화되어 있었고, 장교들은 근무지 이동이 빈발했기 때문에 지방당에서는 장교에 대한 공작을 할 수 없었다. 장교와 사병 조직은 상호 관련이 없었고 두 수준을 매개하는 조직도 없었다. 또한 두 조직 간에는 성격 차이가 뚜렷했고, 같은 연대 내에 있으면서도 지도선이 다른 상황은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창수 등 하사관이 주도한 여수봉기 때 남로당 세포 장교들이 초기에 희생된 것은 누가 남로당원인지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장교 조직은 당 노선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스스로를 규제하는 편이었으나, 사병조직은 여수봉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당 노선과 상반되는 충동적이고 도전적인 면을 표출했다.
14연대가 창설되었을 때, 광주 4연대에서 파견된 70명의 기간요원들 가운데에는 정보기관에서 의심을 받는 하사관들과 사병들이 다수 끼어 있었다. 14연대 하사관그룹 중에서 지창수, 정낙현, 최철기, 김근배, 김정길 등은 남로당과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지 못했지만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동질적 인물들이었다.
장교 그룹에서는 김지회, 홍순석 등이 대표적이었고, 이 밖에도 다수의 장교가 중앙당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이들 장교그룹은 하사관․사병그룹과는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장교그룹 가운데 홍순석은 지창수에게 포섭되어 장교 중에는 유일하게 14연대 당부에 소속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14연대의 조직 책임자는 지창수였다. 14연대의 당 조직(당부)은 도당과 연결을 갖고 있었으므로 군당과 같은 수준의 단위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주둔지인 여수 군당과는 횡적인 연관을 전혀 갖지 못했고, 오직 도당과의 연락선만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지창수, 홍순석, 정낙현, 김영만, 이영회 등 14연대의 세포 책임자들은 연대 내에서 계속 모임을 갖고 단선단정반대운동의 필요성 등 일반적인 정치정세와 사업방향을 토의하곤 했다. 홍순석 중위는 순천에 파견된 2개 중대를 지휘하는 선임장교였고, 지창수(인사처 선임하사) 상사는 정낙현과 함께 4연대 1기생 출신이었다.
한편 김지회의 경우는 중앙당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원이라는 것을 다른 남로당 세포들이 전혀 알지 못했지만, 4연대 때부터 진보적인 행동을 간간이 표출했기 때문에 남로당계열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편 군대 내 좌익세력에 대해서 정부는 사찰을 계속 하고 있었다. 백선엽은 여수 14연대를 국방경비대 내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 때 백선엽이 지목한 반란세력은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선엽의 정보활동에 따라 체포된 오동기 전 14연대 연대장은 김구를 추종하는 인물이었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11일에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위한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0월 초순에 다시 시작된 유격대의 공격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에는 제주도의 9연대뿐만 아니라 6연대 1개 대대, 부산 5연대의 1개 대대와 해군함정이 증원될 예정이었다. 여기에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14연대의 1개 대대까지 증원하여 미군과 국방경비대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려고 했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선포했다. 중산간 마을에 대해 초토화 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공개적 표명이었다. 이제 14연대는 제주도민을 상대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처지에 빠졌다.
3) 군인봉기와 지방좌익세력의 참여
1948년 10월 19일, 여수 제14연대는 제주도 출병을 위한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여수 14연대 봉기는 하사관인 지창수 상사가 주도하였다.
나팔소리에 따라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모이자 지창수는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지창수가 연설을 마치자, 미리 봉기계획을 논의했던 남로당 세포원들과 대부분의 사병들은 “옳소”하고 찬성을 표시를 했고, 이를 반대한 하사관 3명은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 당했다. 봉기한 사병들을 제지하려던 장교들은 사살되거나 피신해야만 했다.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뒤, 여수인민위원회는 10월 24일자로 『여수인민보』를 발간했다. 이 신문에는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작성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서가 있다. 이 글은 14연대 군인들이 봉기한 이유를 그들 스스로가 가장 명확히 표현하고 있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문헌이다. 따라서 이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봉기세력의 생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 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게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 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분단정권을 거부하고 독립된 통일조국을 위해 투쟁에 나선 제주도민을 죽이러 가는 파병을 거부한다는 주장은 군인 봉기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대한민국 국방군은 침공하는 외국 군대에 싸우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지, 동족 농민과 청년․부녀자들에게 총을 쏘고, 죽이기 위해 국방군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출병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간주했다. 여수봉기 뒤에 탈출한 박승훈 연대장조차 기자회견에서 14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제주도 출병을 희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제주도를 전남과 같은 지역권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서도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는 주요한 정서 중의 하나였다. 성명서에는 쌀 수집이나 토지개혁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는 나타나고 있지 않은 반면, 강한 반미․반제국주의 의식을 표출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병사위원회의 성명서만으로 볼 때,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는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 보다는 당면한 제주도파병을 반대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연대 주력은 19일 새벽에 이미 여수를 점령하고, 오전 9시 30분 경 순천역에 도착했다. 역에 있던 순천 경찰은 이미 도망간 다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다. 여수에서 온 14연대 병력이 순천역에 도착하자,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2개 중대가 즉시 봉기군에 합류했다.
광주에 있는 제5여단 사령부(Camp Sykes)는 10월 20일 새벽 1시 30분 경 전남경찰국으로부터 여수 봉기의 소식을 연락 받았다. 광주에 남아있던 최고위급 장교는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이었다. 그는 즉각 총사령부와 미군 고문관에 보고하는 한편 장병들에게 비상소집을 발령했다. 4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한 4연대 2중대의 중대장은 순천 낙안 출신의 김동희였다. 그는 같은 국방경비대 군인끼리 싸운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봉기군과 순천 경찰간에 전투가 벌어지자 경찰의 배후를 공격했다. 진압하러 왔던 4연대 2중대가 오히려 봉기에 합류함으로써 봉기군은 원군을 얻었고 그 결과 순천의 기마대와 인근 지역에서 증원 나왔던 경찰은 봉기군의 군사력 앞에 맥없이 무너져 버려 오후 3시 경에는 순천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여수를 점령한지 몇 시간만에 순천까지 장악한 14연대 봉기군은 밤사이에 세 그룹으로 군대를 재편했다. 3개 편대 중 첫 번째 부대는 벌교방면(서쪽), 두 번째 부대는 학구방면(북쪽 방향), 세 번째 부대는 광양방면(동쪽)으로 진출했다.
봉기가 일어나자 남로당 전남도당에서는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14연대의 여수봉기는 당시 남로당이 취하고 있던 투쟁방침과는 어긋나는 점이 많았지만, 도당 지도부는 이미 봉기가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봉기가 당의 전략방침에 따라 계획성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봉기의 발발과 확산 과정으로 볼 때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남도당은 여수봉기를 일단 ‘당의 거사’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4연대는 여수를 점령한 뒤 제일 먼저 인민위원회를 읍사무소에 설치했다. 아침부터 여수의 도심지인 중앙동 근처에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성명서’, ‘여수 인민에게 고함’, ‘여수인민위원회 성명서’ 등과 인민대회를 알리는 벽보가 붙었고, “미군철수”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도 나붙었다.
인민위원회 의장단에는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5명이 뽑혔고, 의장에는 이용기, 보안서장에는 유목윤이 선출되었다. 여수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이용기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여섯 항목의 정책을 발표했다.
첫째, 친일파․모리간상배를 비롯하여 이승만 도당들이 단선단정을 추진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서북청년회․한민당․독립촉성국민회․대동청년단․민족청년단 등을 반동단체로 규정하고 악질적인 간부들을 징치하되 반드시 보안서의 엄정한 조사를 거쳐 사형, 징역, 취체, 석방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여 처리할 것입니다.
둘째, 친일파․모리 간상배들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은행예금을 동결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것입니다.
셋째, 적산가옥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가 관권을 이용하여 억지로 빼앗은 집들을 재조사해서 정당한 연고권자에게 되돌려 줄 것입니다.
넷째, 매판 자본가들이 세운 사업장의 운영권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다섯째, 식량영단의 문을 열어 굶주리는 우리 인민대중에게 쌀을 배급해 줄 것입니다.
여섯째,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무산대중에게도 은행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인민위원회는 위의 여섯 가지 정책에 따라 행정을 펼쳤다. 14연대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해방군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군인이 여수 시내로 나가면 주변에 있는 상인들과 시민들은 일어나서 환영했다.
순천에서도 14연대 군인들이 시내를 점령한 10월 20일 밤, 여맹과 민청이 지하에서 나와 간판을 걸었고 인민위원회도 재건되었다. 순천에서는 이날 밤, 인민군 사령부와 순천군내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표로 순천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남로당을 비롯한 대중단체들은 지하 활동을 끝내고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로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여 식량배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세력 처단 등의 기초적인 행정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총을 잡고 봉기군을 원조했으며, 여학생들과 여성 조직원들은 봉기군에게 밥을 해주는 등의 방식으로 봉기군을 도왔다. 직장에서는 종업원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공장을 접수했다.
여수와 순천에서 만들어진 인민위원회는 기본적으로 해방 직후 등장했던 지방인민위원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북한에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 남북 분단정권이 이미 기정사실로 된 상황에서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대중봉기는 남한정권을 완전히 부정했다. 인민위원회는 대한민국의 법령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들이 내세운 혁명과업과 그 활동은 이승만정부와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이었다. 봉기 대중에게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모리 간상배들이 추진한 단독정부였고, 은행예금은 이들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것에 불과했다. 많은 경찰들이 사복을 입고 도망치거나 붙잡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여수의 유명한 자본가였던 김영준과 우익청년단장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3. 봉기의 진압과 민간인학살
1) 군경의 합동진압작전
봉기 소식을 들은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는 10월 20일 오전에 관계자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H. S. Roberts)가 소집한 이 회의에는 미군측에서 국방경비대 고문 하우스만(James H. Hausman), G-2 소속의 존 리드(John P. Reed), 전 5여단 고문인 트레드웰(J. H. W. Treadwell) 대위, 현 5여단 고문 프레이(Robert F. Frey) 대위가 참석했고, 국방경비대측에서는 채병덕 참모총장, 정일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정보국장,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여수 진압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일단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군사고문단이었다. 미군은 진압작전을 펼칠 때에는 미국인 군사고문단 장교를 대동하도록 했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책임자로, 그리고 송호성 총사령관의 고문자격으로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에 배속됐다. 하우스만은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국방경비대 창설에 초석을 놓았고, 광범한 한국인 인맥을 기반으로 1980년대까지 한국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하우스만은 특히 미군정시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장관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국무회의에 국방부장관의 고문관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구체적인 진압작전은 10월 20일 오후, 서울에서 군 지휘부가 광주에 도착한 후에 수립되기 시작했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 21일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 제5여단 사령부에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는 한편 진압작전에는 서울과 대북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병력 그리고 제주도항쟁을 진압하는 데 투여된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대전(제2연대) 전주(제3연대), 광주(제4연대), 부산(제5연대), 대구(제6연대), 군산(제12연대), 마산(제15연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가운데 총 11개 대대가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들 병력 중 제2, 6, 12, 15연대는 원용덕이 지휘하는 제2여단으로 소속되었고, 제3, 4연대는 김백일 지휘하는 제5여단에 소속되었다. 부산의 5연대는 해안경비대와 함께 여수 앞 바다에서 해상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봉기군 세력을 진압할만한 교통․통신장비나 작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작전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 군사고문단도 여순봉기가 터졌을 때 무기, 군수, 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이 과연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역할은 단지 군 작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조언해주는 선에 머물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미군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하우스만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받은 임무서에는 토벌사령부가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적혀 있었고 토벌사령부의 조직과 작전을 지원하고 감독하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돼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우스만이 언급한 작전이란 전투 목표가 달성되기까지 필요한 일련의 군사 행동을 말한다. 작전은 인사이동, 전략, 전술, 군대이동, 훈련뿐만 아니라 인원․장비에 대한 보급, 환자의 후송 등의 근무지원이 포함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미 군사고문단원은 여수진압작전에서 인사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에 배치된 미 군사고문단원들은 초기부터 진압군을 지휘할 국방경비대 지휘관들을 선정했다. 미군이 남한 봉기에 개입하게 된 배경은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승만 정부가 세워졌다 하더라도 1948년 8월 24일 이승만-하지 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군대의 작전권은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미 군사고문단의 개입을 무엇보다 가치 있게 만든 것은 이승만정권이 여순사건을 극복함으로써 반공국가 형성에 박차를 가했다는 점일 것이다.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던 이승만 정권은 정권에 도전하는 반란을 진압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의 도움으로 생존에 성공한 이승만 정권은 남한에 극단적인 반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이러한 것들이 미 군사고문단이 여순사건 진압에 개입하여 얻은 효과였다.
순천 북방에서 벌어진 학구전투는 진압군에게 자신감을 갖게 한 최초의 승리였다. 진압군은 순천을 공격했으나 초기에는 봉기군의 저항에 직면하여 쉽게 순천을 공략하지는 못했다. 봉기군도 진압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더 이상 저항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야음을 이용해 순천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이후 진압군은 비교적 손쉽게 순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여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10월 24일부터 시작된 진압군의 공격은 치밀한 작전 계획을 갖고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봉기군과 지방 좌익세력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여수를 방어하던 봉기군과 지방 좌익세력도 더 이상 여수를 고집할 수는 없어 후퇴하였다. 여수에 대한 초기 진압작전에 실패하자 진압군은 기계화 부대와 해안경비대 그리고 연락용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초토화 진압작전에 나섰다.
여순 진압에서는 군 역사상 최초로 육․해․공군 합동작전이 실시되었고, 육군 부대들 간의 연합작전도 여순사건이 첫 경험이었다.
순천․여수 시내에 들어갈 때 진압군은 박격포 사격으로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순천 공격에서부터 사용된 박격포 사격은 적을 제압하는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여수에서는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만큼 대대적으로 사용되었다.
2) 민간인 협력자 색출과 학살
(1) 협력자 색출과 군법회의
진압군은 수색과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잔여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 시내에서 벌어진 진압작전은 집집을 샅샅이 훑어 나가면서 이 잡듯이 뒤지는 철저한 소탕작전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던 좌익 저항세력은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시내로 압축해 들어온 진압군은 집집에 들이닥쳐 느닷없이 방문을 덜컥 열어젖히면서 “손 들엇” 하는 짤막한 외침소리와 함께 싸늘한 총구를 가슴에 들이댔다. 집안에 있으면 봉기군으로 여겨 무조건 쏴버린다고 경고하고는 주민들을 집밖으로 내몰았다. 진압군은 봉기군으로 의심되거나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사살했다. 나이 어린 한 학생의 손목을 잡고 냄새를 맡은 진압 군인은 화약냄새가 난다며 끌고가 죽이기도 했다.
진압군과 경찰은 국민학교 운동장에 시민들을 수용하여 협력자를 적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인과 부녀자들을 운동장 모퉁이로 가게 한 뒤, 20~40대 남자들에게는 옷을 벗고 팬티만 입게 했다. 순천을 점령한 군경은 이미 14연대에 가담한 혐의자 22명을 사형했다. 이 시신 옆에서는 5천여 명의 심문이 진행 중이었다. 한 신문은 일본군 철모를 쓴 경관 한 명이 혐의자를 취조하고 있으며, 학교 교정 담 뒤에서는 부녀자들이 매맞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를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원 대로우는 그의 보고서에서 여수에서 진압군의 주요한 목표는 ‘약탈’(sacking)과 ‘강간’(raping)이었으며, “의심할 것도 없이 이 과정은 가장 난폭한 꿈이 이루어지듯이 진행”되었다고 적었다.
협력자를 지목하는 일은 반란에서 살아남은 그 지역의 경찰, 우익인사, 우익단체 청년들이 맡았다. 외부로부터 작전에 참가한 경찰관들은 지역 사정에 어두워 많은 수가 봉기세력에게 죽음을 당했는데, 살아남은 경찰관들도 며칠 밤을 새운 탓에 피로하고 과도한 긴장으로 흥분된 한 상태였다. 충혈된 눈으로 사나워진 경찰들은 순천에서 총살된 채 썩고 있는 동료들을 보고 나서는 감정이 더욱 복받쳤다. 이들이 가리킨 단 한 번의 손가락질이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그러나 운동장에 모인 그 많은 혐의자 중 누가 과연 봉기군에 협조했는가를 적확하게 골라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사실상 없었다. 살아남은 경찰은 사건 당시에는 숨어 있었거나, 탈출했거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경우였으므로 민간인 협조자를 일일이 구별해낼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물론 붙잡혔던 경찰 중에는 자신을 체포한 좌익인물들 정도는 알 수 있었겠지만 주요 좌익인물들은 14연대와 함께 이미 탈출한 뒤였다.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이루어진 색출 때문에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협력 혐의가 없는 시민이라도 운수가 나쁘면 착각이나 개인감정에 의해서 죽음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다.
협력자 색출의 후유증은 사건이 종결된 뒤에도 계속해서 여수 시민들을 괴롭혔다. 누가, 어떻게 참여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으로 타당한 기준이나 자세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색출작업이 계속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地下足袋 , 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봉기군으로 간주되었다. 흰 고무신은 지방좌익세력에게 처형당한 우익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제조한 것이었는데,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가 이를 배급했기 때문이었다. 또 국방경비대가 입고 있던 군용 표시가 있는 속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혐의대상이었다. 진압된 뒤 겉옷은 버릴 수 있지만 속옷은 갈아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 이 기준들은 원래 14연대 봉기군을 색출하기 위한 기준이었지만, 진압군은 이런 외모의 사람들 모두를 봉기군 협력자로 간주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외모나 다른 사람의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 강요된 자백 등의 기준에 의해 심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당시 인민위원회에 출입했던 사람이나 밥을 얻어먹으러 좌익을 따라다닌 사람 등 14연대 봉기 군인이나 좌익과 인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혐의를 받았다. 당시 ‘호박잎 하나라도 반란군에 준 사람’은 모두 혐의자로 몰렸다. 결국 진압군의 혐의에서 벗어나려면, 국군이 올 때까지 집 안에 완전히 숨어 있어야만 했다.
봉기군이 여수를 일주일 동안이나 점령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라도 시민과 학생에 대한 조사는 신중하고 면밀해야만 했다. 하지만 ‘빨갱이’로 의심받는 시민과 학생들에겐 관용이란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한 학생이거나 군인들에게 밥 한끼 해주거나, 봉기군을 숨겨주거나 아니면 봉기군이 남기고 간 소지품이나 흔적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봉기군에 협조한 사람으로 찍혀 억울하게 죽어갔다. 진압군과 그 후 진주한 경찰대는 여수 시민 대다수가 ‘빨갱이’로 봉기에 참가한 것이라고 속단하면서 ‘최대의 증오와 적대심’으로 시민을 상대했던 것이다.
여수 현지의 진압작전을 주도한 것은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백선엽, 김백일, 박기병, 백인엽 등 진압작전의 일등 공신들은 만주국에서 익힌 임진격살(臨陣擊殺)을 잊지 않았다. 임진격살이란 군과 경찰의 재량으로 적대하는 세력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임진격살권은 만주국이 붕괴될 때까지도 지속되었는데, 만주군 출신들은 시민들을 상대로 임진격살이라는 즉결 처분을 실시했던 것이다. 즉결처분에 필요한 증거는 혐의로 충분했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 이로 인해 시내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4연대가 여수를 장악했던 때에는 인민위원회가 이른바‘반동분자’로 간주된 경찰관, 우익인사, 우익 청년단체원들을 지목하여 처벌했다. 이에 따라 처벌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일반 시민들은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압군은 전 시민을 혐의자로 의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수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온 협력자 색출과정은 어떤 이의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시민들은 도저히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손가락 총으로 상징되는 협력자 색출은 같은 지역 공동체 성원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붕괴시켰다. 협력자 색출로 형성된 공포와 죽음 뒤에는 지역 공동체 성원들간에 불신과 증오가 내면화되었다.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 또는 죽어야 한다라는 인식 하에 실시된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은 작게는 여수․순천이라는 지역사회를 완전히 찢어 놓았다. 여순사건을 통해 이전부터 존재한 좌우익 세력의 정치적 갈등은 이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결사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여, 적군과 아군의 분명한 구별 아래 진행되는 전장의 논리, 군사 논리를 내재화 시켰다.
이 같은 분열은 지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먼저 반공 국민이 되어야만 했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입구였다. 협력자 색출과정은 공산주의 협력자들로 규정된 사람들이 입구를 통과할 때, 어떤 운명을 겪을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승만정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내적 외부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정원을 더럽히는 잡초는 뿌리채 뽑아내야 했고, 이승만 반공체제에서 거세되어야 할 잡초는 공산주의자로 상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계속된 숙청작업을 통해 건설되었고, 여순사건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이후 공산주의 혐의자를 제거하는 하나의 경험과 실례로서 간직되었다.
군․경찰은 진압작전 중인 경우에, 또는 탈출 또는 반항의 위험이 있다고 간주된 경우에는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상당수 즉결처형 했다. 군법회의는 재판의 형식을 띠었지만, 사실상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한 증언에 따르면 여수종산국민학교에서 법무관 4명이 재판을 했는데, 혐의자가 한 명씩 법무관 앞에 나와 각각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법무관 옆에는 경찰이 서 있다가, 혐의자가 앞에 가면 이름을 확인하고 대충 조사 한 다음 바로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재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법무관을 만나는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곤 했다.
혐의자 체포부터 군법재판까지의 과정을 책임지고 있던 부대는 군기대였지만, 그 중에서도 제2여단 군기대가 가장 광범한 활동을 했다. 대전에 본부를 둔 제2여단 군기대는 여순봉기 협력자 3천 여명을 압송하여 대전형무소에 감금시키고 취조를 진행했고, 11월 30일 경 대전형무소에서 취조가 끝난 3백여 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하지만 불과 한달 사이에 3천 명을 취조한 제2여단 군기대의 총원은 15명에 불과했다. 산술적으로 보더라도, 한 명의 군기대원이 쉬지 않고 하루에 20명씩의 혐의자를 취조해야만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주한 미군사고문단 보고서는 한국군 장교들이 오전에 6~70건을 판결하고, 오후에는 처형을 감독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연대장이 임명한 군인들로 구성된 군법회의는 되도록 사형을 선고하려고 노력했다. 시일이 지날수록 처형의 방식도 변해갔다. 처음에는 사형집행이 총살형으로 이루어졌지만, 탄약이 부족할 때에는 죽창이 사용되었다. 사형집행이 계속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사형에 임하는 병사들의 감각도 무디어져 갔다. 여러 번 죽창으로 찌르기를 반복한 병사들은 지쳐갔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제비뽑기를 하여 죽일 사람을 선택했다고 한다. 학살 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하나의 유희로 전락했던 것이다.
(2) 공산주의자로 명명하기 : 황두연․ 박찬길․ 송욱의 경우 (생략)
(3) 인명․재산 피해
여순사건의 진압작전 과정에서는 인명과 재산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했지만, 이에 대한 총괄적인 통계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과연 몇 명이나 희생을 당했는지에 대한 통계도 제각각 이었다. 현재 인명과 재산피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작성한 몇 가지 통계에 불과하다.
정부의 각 기관이 조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과연 이 통계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한다. 제일 처음 이루어진 11월 1일의 조사에서 밝혀진 4,974명의 인명 피해 숫자 가 거의 한달 뒤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3,260명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11월 한달 내내 구례 등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봉기군의 투쟁이 계속 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인명 피해는 늘면 늘었지 감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정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여순사건 동안 좌익 봉기군에 의해 희생된 인명 피해는 최소 3,260명에서부터 최대 5,530명에 이르기 때문에 사실상 이 통계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1997년도부터 2003년까지 여수지역과 순천군 외곽지역(구 승주군), 두 지역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희생자 수를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여수지역에서 희생된 인명수는 총 884명이다. 이 가운데 좌익(봉기군․지방좌익)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155명이고 우익(진압군․경찰)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531명이다. 우익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은 전체 희생자 가운데 총 77%이며,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23%이다. 우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좌익에 의한 희생자보다 약 3배가 넘는다.
순천 외곽지역도 이와 비슷하다. 순천 외곽지역에서는 모두 1,320명이 희생당했는데, 이중 231명(22%)이 좌익에 의해 희생되었고, 835명(78%)은 우익에 의해 희생당했다. 좌익에 의한 희생보다는 우익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 숫자가 약 3.5배로 많다.
이 두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위의 두 지역 통계가 매우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을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즉, 이 두 지역의 통계는 좌익에 의한 희생보다 우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약 3배 이상 높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희생자 대부분은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소년과 청장년층 이었다. 여수지역에서는 이 연령층이 전체 희생자의 96%를 점하며, 순천외곽지역의 경우에는 84%에 이른다.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자가 젊은 층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진압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시민들의 피해는 이에 비할 수 없이 막대했다. 길가의 집들과 주요 건물들에는 전투과정에서 생긴 총탄 자국으로 벌집 뚫어지듯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피해는 직접적인 전투과정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압군이 시내를 장악한 다음 피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여수에 진압군이 들어왔던 10월 26일 목조건물이 많았던 여수 서시장과 27일 충무동 시민극장 주변에서 일어난 화재는 여수 시내의 중심가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서교동, 중앙동, 교동, 수장동이 전소됐고 석천동, 덕대동, 철산동은 일부가 불탔다. 이 지역이 시내 중심가였던 만큼 은행, 금융조합, 경찰서, 우편국, 토지행정처, 여수일보사, 금강․여수호텔, 여수극장, 각 병원 공장 등 각종의 근대적 건물들이 완전히 불에 타 여수읍의 가옥소실은 2천여 호에 이르렀고 피해액만도 100억 원에 이르렀다.
4. 이승만정권의 반공공세와 반공체제의 구축
1) 이승만정권의 반공 공세
(1) 김구 세력에 대한 견제
정부가 여순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일반인에게 공포한 것은 사건 발생 이틀이 지난 10월 21일 오전 11시가 되어서였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기자회견 석상에서 여순사건의 발생 과정을 일반 국민에게 공개했다.
이범석은 국군이 일으킨 반란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며, 그 주모자는 여수 14연대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밝혔다. 오동기가 국내외 극우 진영의 정치가들과 연락하여 러시아 10월혁명과 비슷한 전국적인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정부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조직인 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 사건에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했다는 국무총리의 발표는 일반인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극우정객’이란 통일정부수립을 도모하고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세력 즉 김구 등의 한독당세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극우정객의 당사자로 지목된 김구는 10월 27일 중앙사특파원과의 회견에서 극우세력이 관련되었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 선뜻 부정하였다. 하지만 김구의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은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으로 인식한 정부의 맥락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면 당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여순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도 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미군은 여순사건의 주동자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미군은 기본적으로 이승만정권의 안정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김구의 한독당세력과 국회 소장파세력을 이승만정권을 위협하는 불안요소의 하나로 보고 있었다. 미 고문단원은 한국의 미래는 이승만정권이 얼마나 ‘반대파’들을 빠르고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가에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미군은 반란이 김구세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거나 김구의 쿠데타설이 나돈다는 식으로 김구의 혐의를 계속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기본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여순사건을 김구세력이 일으켰다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반란의 진원지로서 김구세력을 지목하고 이를 통해 공격을 취하고자 했던 이승만정부의 의도는 김구가 관련설을 부정하고 일반 여론도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는 김구가 가지고 있던 정치력과 신망이 혁명의용군 사건이라는 조작된 사건으로는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점, 아무리 눈엣가시라 할지라도 정치의 장에서 김구를 사라지게 하기에는 아직도 김구의 영향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한민당이 스스로 야당의 역할을 자임하고 김구의 한독당과 국회 내 소장파가 반이승만 세력으로 결집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정권은 여순사건을 활용하여 우익 지배층의 역학관계를 재편하고 이승만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지형을 만들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밑으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일부 우익세력에 의한 쿠데타적 행동으로 국민에게 선전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을 재편하는데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정적을 압살하려던 이승만정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듬해 김구 암살과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이루어진다.
(2) 공산당 음모로서의 여순사건
김구가 여순사건 관련을 분명하게 부인하고 일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자, 권력에서 소외된 극우정객과 공산주의자들이 합동으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는 정부의 발표는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그 범위가 점차 변화하게 된다. 이 같은 정부의 입장변화는 여수에 대한 초기 진압작전이 실패하면서 여순사건에 대한 불안감이 체제 위기로까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취해졌다. 반체제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통하여 위기를 돌파하려는 이승만정부의 책략은 여순사건의 주체를 소련과 북한을 포함하는 좌익 반체제 세력으로 설정하게 했다.
김형원 공보처차장은 일반인들은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중이 여기에 호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 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그들이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보처의 발표는 정부 조직의 한 부분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 발표는 우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정부의 초기 발표를 사실상 수정하고 사건의 주체를 민간 공산주의자로, 14연대 군인은 이에 종속되는 지위로 파악한 것이었다.
정부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불똥은 북한 공산주의세력으로 튀었다.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한 규정은 이런 식의 냉전적 설정으로 이동했다. 실제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분명히 확인되지도 않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뒤바뀜을 통해 내부 갈등의 책임을 밖의 확인되지 않은 실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지배층의 실정을 은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사건이 기본적으로 내부 갈등 때문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사주로 몰아감으로써 사건 주체의 정당성을 박탈해버리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
남북통일을 위한 평화협상 세력과의 투쟁을 통해 정권을 획득한 이승만정권은 이러한 적대 관계의 심화를 통해서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11월 4일 담화는 이러한 시각 속에서 나온 강경한 입장 표명이었다. 이 담화에서 이승만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는 말하였다. 불순분자 제거를 위해서는 어린아이까지 일일이 조사해야 한다는 강도 높은 표명은 대통령의 직위에서 맞지 않는 고압적이고 격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11월 8일 윤치영 내무부장관은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한 폭동이 1주일 전부터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남한의 남안(南岸)에서 군 반란이 터진지 몇 일 안된 이 즈음 북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빅 뉴스였다. 윤치영은 이 보도의 출처를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보를 독점하였지만,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에서는 이러한 폭동이 일어난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부의 각료들이 거짓말과 허위 보고를 남발한데는 신생정부의 근간인 군 내부에서 반란이 터져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정부 통치력에 결정적 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사건에 민간인까지 가담했다는 것은 이승만정부의 실정에 따른 민간인의 광범한 이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정부는 유엔의 한국승인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 허약한 정부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고 이를 은폐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주체세력에 대한 규정이 이동된 것을 정리해보면 맨 처음에는 ① 우익과 공산주의자의 연합이라는 초기 발표에서 ② 민간인 공산주의자가 주동이 되고 군인 일부가 일으킨 것으로 변화되었고 마지막에는 북한으로 그 화살을 돌려 ③ 소련-북한-남한의 공산주의자들로 바꾸어 발표했다. 김구세력을 공격하려는 이승만정부의 초기 시도가 실패한 것이 분명해지자 공산주의자들로 그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지만, 사건의 진상을 비껴가면서 정부 책임을 회피하려 한 점은 정부의 변함없는 일관된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3) ‘여학생의 부대’의 신화
여순사건에 학생들이 가담했다고 알려진 것은 국방부 발표를 통해서였다. 사건이 진압된 뒤인 11월 5일, 국방부가 서울 시내를 비롯한 남한 각지에 비행기로 살포한 ‘전국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도 봉기군이 “철모르는 중학생에게 무기를 주어 국군에 대항케 하고 양민을 도살케” 하였기 때문에 “선동에 빠진 중학생들은 토벌부대의 본의 아닌 총탄의 희생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진압과정의 한 일화는 학생의 봉기 가담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전참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사상이 한 번 머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사람이 지독하게 되는 것을 아십니까? 여수 진주(進駐)에서 생긴 일인데 여학생들이 카빈총을 치마 속에 감추어가지고 우리들 국군장교와 병사들을 유도합니다. 오라버니! 하고 재생의 환희에서 부르짖는 듯 우리들을 환영합니다. 무심코 앞에 갔을 때는 벌써 치마 속에서 팽! 소리가 나며 군인들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깜찍한 일을 보십시오. 이것들은 나이 겨우 열 여덟, 열 아홉 살 되는 것들입니다. (중략) 이러한 여중학생 몇 명을 잡아다가 고문을 했습니다. 그 꼴을 보느라고 너는 총살이다 위협했더니 처음엔 부인을 하며 엉엉 울다가 하나 둘 셋하고 구령을 불러서 정말 총살하는 듯한 모양을 보였더니 ”인민공화국 만세”를 높이 부릅니다.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평시에 학교 교육이 얼마나 민족적인 육성에 등한시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남는 노릇이올시다. 학교에 다닙네 하고 공산주의의 이념만을 머리에 집어넣는 공부를 한 셈이올시다.
학생들의 극렬한 참가를 상징하는 위의 ‘환상의 여학생부대’ 일화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여순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들에 실려 널리 유통되었다.
학생의 사건 참여는 여수 14연대가 여수에 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지역 실정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가장 잘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계층이었기 때문에 14연대 군인에게 길을 안내하는 등 군인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국군이 순천과 여수에 대한 진압작전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의 역할과 비중은 이전에 비해 달라진다.
순천에 대한 진압군의 탈환작전은 10월 21일부터 시작되었지만, 김지회 등의 반군 지휘관과 순천의 주요 좌익간부들로 이루어진 주력부대는 이미 광양방면의 백운산과 지리산 줄기의 인근 산악지대로 도피한 상태였다. 남아 있는 저항세력의 대부분이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시내 소탕작전의 주대상을 시민과 학생층으로 설정하게끔 했다. 여수도 이와 비슷했다.
진압군은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을 극렬한 저항으로 표현했지만 실상은 진압군의 공격을 죽창이나 총으로 방어하는 데 급급한 비조직적인 무모한 저항일 뿐이었다.
제대로 군사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시민이나 학생들의 전투가 명령 체계를 갖춘 정식 군대와 맞서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오장이 붉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정규군을 상대로 한 시민과 학생들의 전투는 더 이상 도망갈 곳 없는 남해안 반도라는 지리적 여건과 이미 신분이 노출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생존을 위한 ‘무모한 방어’에 불과했다.
여학생의 전투 참가의 실상 또한 모호하다. 병기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학생들이, 여학생은 더욱 그러한데, 진압군이 발표한 바와 같이 요소 요소에 배치된 몇몇 봉기군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싸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순천이 진압된 뒤 순천경찰서 뒷뜰에는 수백 명의 청년 학생, 노동자들이 웃옷을 벗긴 채 열을 지어 앉아 있었는데, 이중에는 15, 6세 되어 보이는 앳띤 여학생들도 있었다. 기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로 잡혀 왔느냐고 물어보자 “민애청 완장을 두르지 않으면 죽인다 하기에 민애청 완장을 두르고 있다가 잡혀왔어요”하고 울먹이며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압군은 학생들이 좌익교사 밑에서 교육받아 이들이 적화되었기 때문에 진압군에 맞서서 지독하게 싸울 수 있다고 강변했다.
여기서 송욱교장사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송욱 여수여중학교 교장이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적화사상이 교육계에 침투한 대표적 사례로 알려지면서 교육계 전반에 대한 의심으로 확산되었다. 교사들이 봉기군에 협조했으니 그 지도를 받은 학생들 또한 봉기군에 협조했다는 단순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물론 처음에 학생들의 행동은 자율적 행동으로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와 일부 교사들의 조종 아래 이루어진 행동으로 보도되었으나, 점점 나이 어린 학생들이 어찌 그런 놀라운 행동을 할 수 있는가하는 식으로 변해갔다.
이른바 ‘환상의 여학생부대’는 1차로 신문에 보도되어 활자화되고, 2차로는 이것이 근거가 되어 입에서 입으로 덧붙혀 옮겨지고, 3차로 또다시 여순사건을 언급하는 이후 기록에서 활자화되면서 실재하는 ‘신화’가 되었다.
순천과 여수에서 등장한 ‘환상의 여학생 부대’ 이야기가 비단 남한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1차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를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우익민병대 자유군단(Freikorps)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자유군단의 군인들은 총을 든 프롤레타리아트 여자가 자신을 유혹한 뒤 갑자기 치마 밑에서 소총을 꺼내 자신을 해치울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른바 ‘소총을 든 여자(Rifle-Women, Flitenweiber)' 이야기는 강한 군사주의적, 국가주의적 이념을 갖고 있었던 자유군단의 군인들에게 유포되었다.
독일 자유군단의 이야기는 여수의 ’환상의 여학생 부대‘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여자가 군인을 매복로로 유혹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숨겨져 있던 무기로 자신을 해친다는 점이다. 여순사건 때 여학생들은 군인들을 위협하는 주요한 반항세력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수많은 여학생이 체포되었다.
1948년 남한의 국방경비대원들은 수십 년 전 독일의 자유군단 군인들이 품었던 ‘소총을 든 여자’ 이야기를 알 수 없었다. 두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이야기가 대체 어떤 의미를 내포하기에 이토록 유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먼저 두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재와 주제들, 즉 스커트 밑(은밀한 곳), 소총(남성의 상징), 성적 유혹 등이 모두 성적인 상징과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이 때 등장하는 여자는 자신을 해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성적 매력을 가진 유혹으로 나타나며, 위협하는 무기 또한 성적인 맥락 안에 위치하고 있다. 강한 남성성을 소유한 군인에게 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은 하나의 유혹이지만, 동시에 이 유혹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혹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성적 유혹은 공산주의의 다른 상징이다. ‘소총을 든 여자’와 같이 ‘공산주의’는 반공주의 신념을 갖고 있는 군인도 거부하기 힘든 강한 유혹이지만 그 유혹에 걸려들면 자신을 파멸시켜 버리는 직접적인 공격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수 진압과정에서 나타났던 ‘환상의 여학생부대’는 대한민국 군인이 공산주의에 대해 대한민국 군인이 느꼈던 공포와 무의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공전선에 선 진압 군인에게 공산주의는 내면에 잠복된 유혹이었지만, 그것이 위협이라는 점을 깨닫고는 다시 안전한 군인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학생들이 여순사건에 가담하게 된 것은, 정부의 극과 극을 오가는 선전처럼. 순진한 상태에서 군인이나 좌익의 권유에 이끌렸던 것도 봉기 군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진압군에 맞섰던 것도 아니었다. 학생의 여순사건 참가에 대한 대조적으로 구별되는 양극적 이미지 모두는 정부와 진압군의 용도에 따라 퍼뜨린 것에 불과하였다. 순진한 학생이라는 이미지는 사건에 가담한 학생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였고, 극렬한 학생이라는 이미지는 여순진압작전의 무모함 때문에 생긴 민간인 피해, 즉 작전실패를 합리화하려는 호도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순사건에 교사와 학생이 가담했다는 보도는 정부가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을 수 있는 훌륭한 배경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4일 여순사건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앞잡이’가 되었고 여학생들도 심하게 봉기군에 가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대통령은 순진한 자녀들이 이같이 된 것은 부모와 교사에게 그 죄가 있는 것이므로 우선 각 학교의 각 정부기관에 서는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4) ‘반공 국민’의 형성
① 여순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생략)
② 사진을 통해 본 언론의 보도시각 (생략)
③ 문인조사반의 활동
진압군이 여수와 순천을 탈환하자, 정부는 문화계와 종교계를 대표하는 유력 인사들을 모아 현지에 파견했다. 문교부는 문인, 화가, 사진가를 모았고, 사회부는 천주교․기독교․대종교․불교 등의 종교단체 대표자들을 조직했다. 두 조사반은 현지를 둘러 본 뒤에 사건 실태와 향후 대처방안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각각 작성하였다.
문인조사반은 10명의 조사반으로 구성됐다. 제1대는 박종화(林鍾和), 김영랑(金永郞), 김규택(金奎澤), 정비석(鄭飛石), 최희연(崔禧淵) 등 5명으로 구성되었고, 제2대는 이헌구(李軒求), 최영수(崔永秀), 김송(金松), 정홍거(鄭弘巨), 이소녕(李韶寧)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 박종화, 정비석, 김송은 소설가였고, 김영랑은 시인이었으며, 평론가로는 이헌구가 있었다. 이 밖에도 화가 정홍거, 만화가 김규택과 최영수가 포함되었다. 사진가로는 최희연과 이소녕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당시에 이름이 잘 알려져 있던 문필가, 화가, 만화가, 사진작가들이었다. 문인조사반의 구성은 이와 같이 문화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주요 작가들로 이루어졌다. 문인조사반은 11월 3일부터 총 6일 동안 광주, 여수, 순천, 광양, 진주 등지를 둘러보았다.
조사반원들이 가장 많이 접촉했던 사람들은 군인, 지방 공무원, 학교 교장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고 생생한 정보를 가장 많이 제공해줄 수 있었던 군인들과의 접촉이 가장 많았다. 문인들의 글을 보면 조사반원들이 얼마나 군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박종화는 한 군인이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군경 갈등을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의견을 밝히자, “여기에 모든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인이 명료하게 드러난다”라고 탄복했다.
군인들은 대부분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논리를 설파했다. 특히 한 대위가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 이 이야기는 파견된 많은 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 같다. 이 군인은 여순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도대체 민족체계가 스지 않었습니다. 우리 정부가 엄연히 선 이상 국시와 국헌이 뚜렷이 서서 전민족이 이 곳에 움직여야 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민족지상’과 ‘국가지상’을 천번만번 부른듯 사상적임에 끝일뿐 온 군인, 온 학생, 온 민족에게 그 이념이 철저하도록 침투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떠하니 우리 민족은 이렇게 나아가야 하고, 이렇게 싸와야 하고, 이렇게 살어야 하고,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을! 확호부동하게 조직적으로 체계 있게 머리 속에 깊이 넣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공연한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자유주의가 이러한 혼란을 이르켜 놓은 것입니다.”(당시 표기 그대로 옮김)
이렇게 열변을 토하자, 이를 듣던 문인조사반원들은 “고개 숙여 묵묵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한다. 또한 한 청년장교는 반도들에게서는 우리를 동족이라고 생각하는 시늉조차도 찾아볼 길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도 정신무장을 제대로 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고, 양(楊) 중위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오직 순충보국(殉忠報國)이라는 일념뿐이라고 강조했다.
적어도 정부가 문인조사반원들을 파견할 때에는 이들이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일정한 학식과 견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인조사반이 남긴 글을 보면, 실상은 정반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지 실정을 파악하고 대처방법을 강구하러 내려간 문인들은 현지의 진압 군인들로부터 민족과 국가관에 대한 생생한 ‘민족정신’을 교육받는 기회를 가졌다.
조사반이 현지에 당도하여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진압작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집들은 불탔고, 사람들은 반군에 죽음을 당했거나 행방을 모르고, 반란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끌려나가 죽음을 당했다. 불에 타버린 집 앞에는 혼자 내버려진 여덟 살의 소년이 나무의자에 앉아 멍한 얼굴로 있었지만, 진압에 치중한 상황에서 이재민에 대한 구호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이런 상태를 목격한 한 문인은 “우리 민족은 도저히 미래에 대한 아무런 서광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여수지역을 이전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부흥예산만도 백 억원 대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이 폐허 속을 살아가는 시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왜 폐허가 된 시가지를 비롯한 물적인 피해는 보았지만, 그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소설가 정비석은 “솔직히 고백하여 이번 시찰의 결론을 일언으로 표현한다면 내가 느낀 것은 오직 암흑감 뿐이었다”라고 말하면서, 반란지역의 치안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시민들 사이에선 아직 불안한 공기가 농후하다고 파악했다. 반란지역의 암울한 공기와 무력감은 단지 집이 없어졌다거나, 시가지가 불탄 것에 원인이 있지 않았다. 시민들이 불안했던 이유는 사태수습에 나선 정부가 구체적인 조사 없이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처리하는데 있었다. 시민들이 진압군에게 안전한 신변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봉기지역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 동조자라고 의심받았고, 조그만 혐의라도 발견되면 군인들과 경찰이 곳곳에서 즉결처분을 실시했다.
문인조사반이 시민들의 공포와 무력감에 대해서는 둔감했던 반면에 봉기군이 벌인 비인간적 악행과 죄상에 대한 고발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더 많은 양을 할애하여 표현했다.
박종화는 반란자들이 “동족의 피를 보고 이리떼처럼 날치고 누깔을 빼고 해골을 바시고 죽은 자의 시체 위에 총탄을 80여 방이나 놓은 잔인무도한 식인귀적 야만의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고 고발했다.
고영환은 순천지구전투사령부 작전참모의 말을 인용하여, 반군의 잔혹상을 생생히 표현했다. 이 작전참모는 처음 순천읍에 들어 올 때는 반란도당에 대하여 그다지 큰 적개심을 품지 않았지만, 순천읍에 들어와서 무수히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보고서는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순천에서 그가 본 것은 “한 시체에 50, 60개 내지 80, 90개의 탄흔”이었고, “총살한 뒤에 눈알을 빼며 혹은 사지를 자르며 혹은 배를 가르고 오장을 헤쳐버린 것” 등이었다. 이러한 생생한 표현들은 작전참모가 적개심을 일으켰던 것처럼 독자들이 봉기군의 행동에 분노를 느끼고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선동적인 문구였다.
문인들은 ‘잔인무도한 귀축(鬼畜)들’, ‘천인공노할 귀축의 소행들’(이헌구), ‘잔인’ ‘괴악무쌍(怪惡無雙)’(고영환), ‘악의 승리’ ‘인간성 상실’ ‘저주의 보상’(김광섭)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봉기군의 만행을 표현했다. 봉기군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잔인한 짐승으로 여겨졌고, ‘절대 악’이었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의 표현처럼 반란자들은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존재였다.
봉기군의 잔혹한 행위를 묘사하는데서 소설가와 시인들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시인 김영랑은 「절망」이라는 시에서 봉기군들이 ‘악의 주독(酒毒)에 가득 취한’채 양민을 ‘산 채로 살을 깍기여 죽었나이다. 산채로 눈을 뽑혀 죽었나이다. 칼로가 아니라 탄환으로 쏘아서 사지를 갈갈히 끊어 불태웠나이다’라고 적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몇 몇 문인은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접근하면서 종교적인 언어로 봉기군의 만행을 표현했다. 김영랑은 인민재판에서 사형선고 받은 사람을 새벽에 여수경찰서에서 처형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새벽의 처형장」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에서 봉기군을 ‘마(魔)의 숨결’이라고 표현하였으며, 박종화도 ‘마의 반군 800명’이라고 표현했다.
종교적 언어는 봉기군을 악마의 군대로 등치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각성의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이 같은 종교적 언어의 사용은 수사 차원을 넘어, 반공민족 형성에 필수적인 극명한 이분법 논리를 강화해 주었다. 즉 여순사건에서는 분명한 선악의 구분이 가능하며, 한쪽이 선하다면 한쪽은 악하다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악은 무슨 일이 있어도 파괴되어야 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이승만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이 발표했던 성명서를 살펴보면, 정부의 반공산주의적 담화나 전략이 반드시 파멸시켜야 할 적을 상정하는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맹목적인 선악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정부의 인식은 문인들의 감정적이며 다분히 종교적인 언어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여러 편의 역사소설을 쓴 바 있는 박종화는 여순봉기를 유구한 민족사의 흐름를 거역하는 죄악의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여수지역은 조선민족의 일대 시련기인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불타는 민족정기로 왜적의 해병을 막아낸 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민족을 위기로 빠뜨려 버렸고, 따라서 봉기자들은 ‘역사의 배반자’이자 ‘죄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인들은 여순사건을 어떻게 파악했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봉기군을 비난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여순사건에 대한 어떤 대응 방안을 내놓았던 것일까?
『반란과 민족의 각오』의 서언을 쓴 김광섭(金珖燮)은 시중에는 이번 사건의 원인을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 사상적 대립, 군경의 알력 또는 정부에 대한 반감 등 여러 가지로 지적하고 있지만, 이런 이유들은 진정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반란의 근본 원인은 “약소한 민족을 분열시키고 살육과 파괴로 유인하여 자기의 세력권을 확장할랴는 거대한 철의 장막” 때문이었다.
이 같은 주장은 여순사건의 배후세력을 소련으로 규정하고, 여순사건을 소련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간주한 이승만정부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국방부는 여순사건을 “소련 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정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자기 민족을 살해하면서까지 소련을 추종하는 노예 세력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이 반란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모든 분규는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근원은 두말할 필요 없이 북쪽의 공산주의자이며, 북한 정권을 괴뢰정권으로 만든 소련이라는 배후 세력이었다. 김광섭의 주장은 이 같은 정부의 반공주의 논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반복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문인조사반원이 만난 거의 모든 군인들이 철모를 내려치면서 강하게 외치고, 문인들이 동감했던 ‘민족’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보통 민족은 피를 나누고, 국경선으로 나누어진 같은 지역에 거주하며,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고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나눈 인민들로 구성된다. 한 민족이 혈연, 지역, 언어, 공통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구성된다고 본다면, 피를 흘리는 유혈의 갈등 과정 또한 공통의 역사에 속하므로 어떤 갈등이 나타났다고 해서 갑자기 전혀 다른 민족으로 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남한에서 여순사건이 벌어진 뒤, 이승만정부나 현지에 파견된 문인들은 민족의 범주에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참가한 자, 봉기에 협력했다고 간주되는 ‘혐의자’,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였다. 반란자들은 동족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만행과 살육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은 동족이 아니며 민족의 원수이자 적으로 간주되었다. 혈연, 지연, 언어적 요소는 민족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로 여전히 남았지만, 이제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이야말로 민족을 규정하는 1차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반공민족의 발견’은 이승만정권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두보였다. 여순사건은 ‘반공민족’을 탄생시키는 주요한 계기였던 것이다.
이승만정부로서는 이 사건을 ‘동족상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온적이고 동정적인 태도이며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었다. 이 같은 미온적인 입장은 교정되어야 했으며,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굳건한 반공 적대의식으로 무장한 민족의식의 확실한 정신교양이 필요했다.
문인들이 만난 많은 군인들은 철저한 민족의식의 고양과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19세 이하의 청소년에게는 군대적 훈련도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여순사건 뒤 각 학교에 정치적, 군사적 훈련을 실시할 수 있는 학도호국단을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민족정신은 단지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급박한 실천의 문제로 제기되었다. 여순사건 같은 비상사태는 ‘국가지상’, ‘민족지상’, ‘애국애족’ 같은 슬로건을 갖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 군인이 주장했던 것처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행동을 통한 신념으로서의 실천”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실천은 두말할 필요 없이, 여수․순천 등지에서 “자! 저들 반도를 쏘아라!”라는 실천 명제로, 봉기 혐의자들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로 나타났다.
문인들의 인식과 활동은 사실상 이승만정부의 그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문인들이 이승만정부가 의도했던 정치에 이용되었다고도 말 할 수 있겠다. 픽션을 만들어내는 소설가와 시인들로 이루어진 문인조사단은 현지 실정을 가장 감각적인 문체로 여과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였다. 만약 문인들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독자들(국민)은 봉기군의 만행에 대해 진압에 참여했던 군인들과 똑같이 적개심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고, 아직도 봉기군들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는 우매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인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민족의 범주에서 완전히 배제시켜 버렸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문인들만큼 확실하게 전달한 계층도 없었던 것이다.
④ 종교위문단의 활동 (생략)
2) 반공억압체제의 구축
(1) 계엄령 발포
계엄령은 순천에 대한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던 10월 22일 현지사령관에 의해 처음 내려졌다. 계엄선포문에는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과연 누가 이 권한을 부여한 것인지, 어떤 근거에서 부여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은 채, 반도를 은닉하거나 밀통하는 자에게는 사형에 처한다는 강도 높은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중앙정부가 내린 것도 아니고 현지사령관의 판단으로 자의적으로 내려진 이 계엄령은 아무런 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국군이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고 여수에 대한 공격이 감행되기 시작한 10월 25일, 계엄령은 ‘국무회의’ 결의를 통해 공포됐다.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령 제13호로 발표된 계엄령은 “여수군 및 순천군에서 발생한 군민 일부의 반란을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지경(合圍地境)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고 하였다. 이 ‘계엄선포에 관한 건’은 대통령과 국무총리(국방장관 겸임) 그리고 11명의 장관들이 참가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계엄령이 통과된 후 호남방면사령관은 26일자로 여수․순천지구에 임시계엄을 선포했다. 이 선포문은 군사에 관계 있는 행정․사법사무는 계엄사령관이 담당한다고 명시하였다. 22일 현지 사령관의 계엄령에 뒤이어 26일에 또 다시 군사령관에 의한 계엄령이 발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계엄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계엄법이 아직 제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무회의가 이를 ‘제정’하고 ‘의결’했던 것이다. 관보의 문구로 본다면 계엄령은 명백한 헌법위반이었다. 국무회의가 여순지구에 대한 계엄령을 발표 한 뒤에 중앙정부 차원에서 계엄령에 대해 추가적인 조치가 취해진 적은 없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해 발표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계엄령은 5일 뒤인 11월 1일에는 호남방면사령관 원용덕에 의해 여순지역에서 전남북으로 확대되었다. 계엄령 확대조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러한 사실조차도 즉각 보도되지 않다가 10여 일이 지난 11월 13일에야 신문에 보도됐다.
이와는 별도로 14연대 잔여병력이 지리산방면으로 이동하여 전투가 발생하자 남원지구사령관은 11월 1일 0시를 기해 남원지구에 계엄령을 발포하였고, 호남방면 작전군사령관은 11월 5일 전라남북도 지역에 통신제한 계엄령을 별도로 발포하였다가 6일이 지난 11일 상오 8시에 해제하였다.
이같이 계엄령은 특정한 지역에 대해서 내려진 것도 있었고, 통신분야같은 특정 분야에 대해서 발포되기도 하였다. 이는 지역 군사령관의 필요에 따라서 계엄령이 취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었다.
여순지역에 계엄령이 발포되었지만, 일제시대에 있었던 계엄령은 조선에서 한번도 실제로 발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작전을 수행하는 군 관계 인물까지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였다.
중앙정부가 내린 계엄령은 분명 합위지경이었지만 한 신문에는 임전지경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계엄하에서도 행정․사법권은 여전히 그대로 지속된다는 국회에서의 법무부장관의 공식적인 답변과는 달리 행정․사법이 해당 군 지역사령관의 관할하는 영역으로 보도되었다. 즉 당시의 계엄령은 해당 지역규정이나 해당되는 내용 모두에서 지극히 혼란된 채 사용되었다.
‘법령 없는 계엄령 선포’라는 상황에 대해 국회는 의문을 제기하고 정부를 추궁했다. 문제가 된 것은 정부가 어떤 법에 근거하여 계엄령을 발포했는가, 왜 국회의 동의를 얻지 않았는가, 계엄의 유효시기와 그 지역범위 등이었다.
국회의원 질문에 대해 이인법무부장관은 여수와 순천지구에 대한 계엄령 선포는 대통령이 하는 것도 아니고 헌법 57조에 의한 것도 아니며, 반란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현지 군사령관이 ‘계엄법’에 의해 발동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는 계엄령이 군작전을 위한 실무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것이라는 해명이었다. 그는 또한 계엄령이 동란을 방지하는 긴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합위지대(合圍地帶)에서는 일반 행정과 사법권은 정지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계엄령은 10월 25일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이미 통과된 것이었고, 이 자리에는 이인법무부장관도 참석. 또한 이범석국방부장관은 10월 28일 국회 여순사건 보고에서 여순사건을 용이하게 처리하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계엄령을 발포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지에서는 군사령관이 행정권과 사법권 일체를 장악한 채 작전을 펼치고 있었고 즉결처분이 시시때때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인법무부장관이 계엄령은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이라고 사실과 다르게 국회에서 답변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인은 자신이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서명까지 한 계엄령이 대통령령으로 발포되었다고 할 경우, 당연히 국회의 사후승인이 필요한데, 이를 승인 받으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만약 계엄령을 헌법에 근거해 발포했다고 할 경우 국회의원들로부터 쏟아질 공격을 감당할 수 없고 더욱 더 문제를 확대시킬 소지를 갖고 있다고 이인은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 보고도 하지 않고 국회의 승인도 얻지 않고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정부가 헌법을 위반한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결국 이인의 답변은 계엄법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계엄령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현지사령관에게 떠넘기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 국회의원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는 계엄법이라는 법률은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 또한 계엄상태에서는 양민을 잡아다가 총살해도 좋은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는 계엄령이 여순지역의 시민에게 의미하는 핵심적인 문제. 실제로 계엄령은 현지 군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운용되었고 이에 따라 사건이 벌어진 지역에서는 즉결총살이 부지기수로 이루어졌다.
국회의원들의 계속되는 질문 앞에서 이인법무부장관은 “이 점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계엄법 제정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인정했다. 그의 발언은 같은 날 앞서 행했던, 현지사령관이 ‘계엄법에 의해서’ 계엄을 내렸다는 스스로의 발언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인법무부장관의 국회 답변은 ‘거짓’과 ‘자기모순’을 보이고 있었다.
여순진압과정에서 군과 경찰 등의 진압군측은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사건 가담자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은 채 의심되는 사람은 자세한 조사 없이 즉결처분을 단행했는데, 군경이 이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규정자체가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사용된 계엄령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순지역에서 이루어진 부역자색출 과정의 특징은 일반적인 법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여순진압작전에서 ‘인권’은 아득히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부역혐의가 있다는 다른 사람의 지적만으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의심받아 사형 당하는 무법천지가 되었는데, 계엄령은 이런 일을 군경이 할 수 있게끔 한 ‘마법의 카드’였다.
(2) 국가보안법의 제정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 직후에 국회에서 급박하게 제정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준전시 상태에서 내려졌던 계엄법의 기본 골격을 이어받은 ‘평상시의 계엄법’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의 기본적인 목표는 좌익세력을 색출하고 검거하는데 있었다. 형법보다 더 일찍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법 조문이 구체적이지 않아 자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컸고, 실행범이 아닌 목적범을 처벌하도록 만들어졌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기 이전, 국회에서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 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9월 3일에 김인식 의원 외 32명의 의원은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을 긴급 제정할 것을 요구하는 동의안을 올렸다. 그러나 이 법안은 처리되지 못하였다가, 여순사건이 발발한 후 국가보안법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약 한달 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통과되었다. 국가보안법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순사건이 가져온 남한 정치의 위기가 단지 이승만정권의 위기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입법부를 포함한 전반적인 체제의 위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부 못지 않게 국회 또한 위기감을 느꼈고, 여순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할 경우 이와 유사한 반란행위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국회 내 우익세력은 반란의 재발은 국회도 생존하기 어려운 체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을 입법할 것을 제안했던 김인식 의원은 만약 국가보안법이 있었다면 여순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좌익세력을 취체하거나 북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순석 의원은 ‘이 법이 잘되고 못되느냐에 따라 남한이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선다며 만약 이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인민공화국으로 변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보안법은 한국 사회를 반공이데올로기로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법이지만 막상 국회에서 통과될 때는 각 조문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소장파 중심의 진보적 국회의원들은 국가보안법이 선량한 남녀노소를 비롯한 전국민을 공산당 좌익으로 규정하는 법이며, 또한 이 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정부가 일반 민중을 믿지 못하고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소장파의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국가보안법이 규정하는 이적단체에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의 개각 요구를 도각(倒閣)으로 규정하여 국회를 가장 큰 이적단체로 만들어버렸던 것과 같이 국가보안법은 전 국민을 좌익 공산주의자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국현 의원은 이승만정부가 반정부=반국가라는 등식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여순작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승만정권은 민중을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 시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진압작전을 구사한 바 있었다. 시민을 대상으로 한 광범한 혐의자 색출작업이야말로 이승만정부를 위기에서 구원해주고 반란의 근원을 뿌리뽑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 당시 이루어진 피아 구별이라는 군사작전의 기본적 발상을 평상시에 적용한 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국민을 범법자로 양산한 최대의 법이었다.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검거된 사람은 4만 6,373건에 총 11만 8,621명이었다. 전국의 교도소를 가득 채운 것은 일반 형사범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들이었다. 당시 한 국회의원은 남한 교도소의 최고 수용인원이 약 5천 명이라고 밝혔지만, 1949년 9월 현재 전국교도소에 수감된 인원은 2만 2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 중 대부분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들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은 전체 수형자의 70%에 달하여 교도소는 수용 적정선을 넘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은 목적범을 처벌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이것이 다른 일반 형법과는 다른 국가보안법만의 특징이며, 다른 형법으로 대체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이 가져온 충격과 진압작전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대중적 봉기로서의 여순사건은 정부와 국회에 체제 위협의 위기감을 가져다주었고, 이러한 위기감이야말로 국가보안법을 탄생시킨 배경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의 구체적 내용들, 즉 범죄의 실행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졌다는 이유나 혐의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는 발상과 실천은 여순진압작전의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 국가보안법은 그 집행자가 적으로 간주되는 좌익세력을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언제든지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는데, 이는 여순진압과정에서 선보인 ‘손가락 총’과 ‘조사 없는 즉결 처벌’이라는 전장의 논리를 일상으로 계속 이어나간 것을 의미한다.
진압작전에서 국가의 물리력을 대표한 군대는 분명한 피아(彼我)의 구별 논리로 여순 시민을 가르고 처벌했다. 그리고 계엄령은 군대가 시민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사법과 행정적 기능을 맘껏 사용할 수 있는 법적 장치였다. 법적인 근거도 없는 계엄령 발포는 국가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국가보안법 또한 그것이 분명한 법적인 형태를 띠었다고 해서 국가 폭력의 수단이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은 진압작전의 전쟁 논리가 일상 생활에서도 의연히 관철될 수 있게 만든 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계엄령의 또 다른 모양의 연장이었고, 전장(戰場)을 일상화하는 것이었으며 여순진압작전의 양상을 전 사회에 파급시키는 것이었다.
(3) 숙군과 학도호국단 (생략)
결론
대한민국 수립 초기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군인 봉기에 지방 좌익이 참여하여 전남 동부지역 6개 군에 걸친 봉기였고, 이승만 반공체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그럼에도 그 동안 여순사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여순사건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여순사건은 ‘빨갱이’들이 일으켜 인민재판을 통해 수많은 양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좌익세력이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죽였는지에 대한 사실 검증은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에 대한 반공적 인식은 이승만정권 이래 수 십 년간 유지되어온 반공체제에서 생산되고 공고화되면서 사실 검증에 대한 필요성조차 제기하지 못하게 하였다.
여순사건은 군 내부에서 최초로 발생하였고, 여기에 지방 좌익 세력이 가담함으로써 신생 이승만정부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 봉기는 이승만정부와 미군이 대응하지 못할 만큼 치밀하게 계획된 봉기는 아니었다. 여수에서 일어난 봉기는 14연대 남로당 세포원들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봉기였고,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지역의 지역당까지도 봉기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14연대의 봉기는 빠르게 번져 나가, 하루만에 여수와 순천이 봉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더욱 더 놀라운 사태는 봉기를 주도한 14연대 남로당 세포인 하사관 세력이 소수에 불과했고, 봉기를 일으킨 다음에는 어떻게 진행할지도 뚜렷이 정해진 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좌익세력과 민중들이 대거 동참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14연대 봉기세력이 동족을 죽이러 가는 제주도 파병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친일파와 경찰을 타도하자는 호소가 민중들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경찰과 이승만 분단정권에 대한 불만은 14연대 일반 사병과 지역민들이 봉기에 참여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봉기는 몇 일만에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 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여 광범한 대중봉기로 발전했다. 인민위원회가 통치한 8일 동안의 여수와 3일 동안의 순천은 봉기군의 물리력으로 성벽을 쌓은 해방구였다.
경찰과 우익세력에 대한 신속한 처단은 해방 후 일어난 다른 대중봉기들과도 구별되는 것이었다. 우익세력에 대한 처형은 그 동안 응축되었다가 급속히 폭발한 계급적, 민족적 분노에 기반하고 있었다. 여수나 순천은 해방후 인민위원회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순사건 당시의 인민위원회는 급속히 재건되어 친일파와 반동 세력의 처형에 나섰다. 봉기군의 점령지역에서 벌어졌던 우익인사에 대한 처단은 해방후 사회적 과제의 해결이 좌절된 것에 따른 분노의 폭발이었다.
만약 여순봉기가 더 많은 지역으로 확대되어 더 많은 호응을 기대할 수 있었다면, 유혈적 처형은 더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순봉기는 전남동부 지역에 고립된 투쟁이었다. 여수와 순천만이 몇 일간의 안정을 누릴 수 있었을 뿐, 나머지 지역은 한 차례의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거나 봉기군과 진압군의 반복되는 점령과 재점령의 순환으로 끝났다. 초기에 불어났던 병사들의 봉기군으로의 합류도 시일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봉기의 확산 가능성을 타진하던 봉기군은 진압군이 포위를 좁혀오자 백운산과 지리산 등의 산악지대로 주력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군 수뇌부와 이승만정권은 봉기가 왜 빠르게 진압되지 않느냐고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채근했지만, 38선 경계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한 군대가 투입된 진압작전은 일주일만에 여수를 재점령할 수 있었다.
진압군의 대응이 처음부터 일사불란한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도 흔들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편의에 따라 변경되기도 했고, 초기에는 봉기군에 합류하거나 부대원들이 이탈하는 등의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진압군은 점차 대오를 정비할 수 있었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 군사고문단원과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진압작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 진압작전은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 경력이 있었던 김백일, 백선엽 등이 주도하였다.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군수, 인사를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제임스 하우스만과 리드 그리고 풀러 등의 주한 미 임시고문단원들은 작전계획을 짜고, 물자를 배급하며, 전투 결과를 점검했다. 미 군사고문단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승만정권은 여순사건을 빠른 시일 내에 진압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승만 반공체제도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여수작전에서 진압군이 맞서 싸운 대상은 봉기군이 아니라 시민과 학생들이었다. 진압군의 온갖 화력을 동원한 육․해․공군의 초토화 작전의 결과로 봉기의 진원지였던 여수 시내의 중심가는 전소되었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 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진압군과 경찰은 자신들의 진압작전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잔혹성에 대한 보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반란의 근거지가 응당 치루어야 할 대가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관련 법도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진 계엄령은 적으로 간주되는 봉기 지역의 민간인을 자의적으로 처형할 수 있게 한 ‘살인 면허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보다 진압군이 점령했을 때 민간인 희생자가 몇 배나 더 발생했다.
여수와 순천 지역민들이 희생된 것은 전투에서가 아니라, 진압작전이 끝난 시점부터였다. 변명과 이유를 따지지 않는 협력자 색출이 실시되었고, 혐의자에게는 철저한 응징이 가해졌다.
여순사건은 비교적 단시간 내에 진압되었고, 남한 정권을 흔들만한 계기도 되지 못했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도 남쪽의 해안 도시에서 시작된 군인들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이 일과성 사건만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현대사에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를 계기로 이승만 반공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대중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좌파의 이데올로기였다.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좌파는 친일파 척결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민족 담론을 전유하고 있었고, 토지개혁 같은 경제적 진보 정책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삼상안을 둘러싼 신탁논쟁을 거치면서 우익세력은 자신들을 민족주의 세력으로 변전하였다. 우익세력은 신탁통치안을 쟁점으로 이용하여 좌파를 소련을 추종하는 반민족 세력으로 매도하면서, 친일파 오명을 희석시키고 반공 애국자로 탄생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반공은 애국의 기호였고 민족의 기호로 등장했다. 반공 없이는 애국도 민족도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군정으로부터 국가기구를 이양 받은 이승만정권은 김구, 김규식 등의 세력이 선거에 불참함으로써 정통성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제도권 내에서도 국회 소장파 등이 반이승만 노선을 점점 더 분명히 표명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정권은 해방 후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과제인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 등의 문제에서 대중을 끌어들인 만한 견인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여순사건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대중들은 이승만정권을 지지하지 않고 있었다.
이 같은 정치적 상황에서 여순사건은 억압적인 물리적 폭력기구에 의존한 이승만의 반공 체제를 강화하고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이 발발 뒤 정부는 이 사건을 정적(김구)에 대한 견제와 반공투쟁에 이용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는 이승만정권이 갖는 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순사건 뒤 급속히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전장의 논리를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온 법이었다. 이승만정권은 국가보안법 제정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을 영속화하고 사회를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국가보안법은 어떤 행위에 근거하여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혐의만으로 처벌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여순사건 당시 계엄법 아래에서 혐의자들을 일방적으로 처분한 경험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보안법은 ‘일상의 계엄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경찰과 검찰의 공산주의자 탄압을 법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전국의 형무소를 국가보안법 사범으로 가득 채웠다.
국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사적 폭력을 인정하지 않고 폭력을 배타적,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라 할 때, 국가의 가장 큰 물리력을 구성하는 것은 경찰과 군대이다. 여순사건 이전에 이승만정권은 단지 경찰만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군대는 좌파의 침투공작과 모병과정의 다양성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일되지 못한 상태였다.
여순사건 뒤 이승만정권이 진행한 ‘숙군’은 공산주의자라는 혐의에 근거하여 사형, 징역 등의 방법으로 매우 엄중하게 실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정권에 반대하거나 숙군 주도세력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폭넓게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도 행위가 아니라 혐의에 근거한 처벌이라는 국가보안법의 논리가 의연히 관철되며, 사적 이해를 반공이라는 애국적 행위의 포장 아래 관철시키는 경우도 나타났다. 숙군을 통해 국군은 반공 군대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다른 조직과 비교되지 않는 강고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보루로 자리잡았다. 이제 경찰과 군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물리적 폭력기구의 정비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와 함께 이승만정권은 우익청년단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폐합하여 사적인 폭력을 공적인 영역으로 흡수했다. 청년단은 군대의 인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한편 경찰과 같이 활동하면서 지배층의 의도를 국민에게 관철하는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제도나 법 이외에도 반공체제 형성에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한 것은 반공이데올로기였다. 이승만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론에 대한 비판보다는 강한 적대 개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좌익을 짐승과 악마의 이미지로 고정화하는 일은 문인과 종교인 그리고 언론인이 맡았다. 문인과 종교인들은 답사기나 보고서 등을 통해 ‘인간성을 상실한’ 좌익 세력의 살육을 고발하고, 그들을 ‘잔인무도한 귀축’들로 표현했다. 이런 형상화를 통해 공산주의자는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찍혔다. 여순사건은 진정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산주의자의 잔혹한 행적은 확대 생산되어 유포되었고, 같은 민족으로서 가져야 할 일말의 동정심도 좌익세력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을 모든 악이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근원(source)으로 간주했다. 종교적색채를 강하게 띤 이러한 이승만의 반공 인식은 전사회에 유포되었다. 정부와 언론 그리고 종교사회단체들은 여순사건에서 나타난 공산주의자들의 잔혹성을 과대 포장하여 유통시켰다. 여순사건 당시에 친일파 경찰과 우익인사에 한정되어 제한적으로 실시되었던 처형이 이제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어 좌익 공산주의자를 짐승과 악마로 간주하는 소재로 사용되었고, 결국에는 민족 범주에서 좌파세력을 몰아내는데 이용되었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과 분리될 수 없는 짝이 되었다. 반공 없이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미래를 말할 수 없고, 대한민국에서 삶을 영위하려면 반드시 반공주의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승만 정권이 얘기한, ‘반공 민족’만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반공 국민에 소속된다는 것은 삶의 1차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조건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거주민은 반공 국민으로 충실하기 위해 다른 국민을 감시해야 했고 동시에 감시당해야만 했다. 반공체제는 한 몸 안에 정신분열적 요소를 동시에 가지도록 강요했고, 이것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하여 국민의 의무이자 도덕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사회감시체제는 위로부터 부과된 이데올로기를 생활 속에서 몸으로 실천하도록 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켰다. 감시체제가 구축되면서,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은 비록 그가 의식적인 공산주의자라고 할지라도 그 실천은 반공체제의 작동에 봉사하도록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신체를 장악하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이데올로기 작업이었다. 사회감시체제는 위로부터의 이데올로기를 강제로 주입한다는 차원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었다. 사회감시체제는 그것을 내면화시키고 도덕과 양심으로까지 승격시켜 국민이 스스로 자기조절 하도록 의도했다는 점에서 반공체제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었다.
여순사건 뒤 법과 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재구축된 이승만반공체제는 여순사건의 경험을 활용하고, 그 위기를 딛고 일어선 결과였다. 여순사건 뒤부터 1949년 중반기까지 이승만정권의 반공체제는 더욱 더 체계화되고 치밀해졌으며, 이승만정권은 이를 기반으로 1949년 중반기에 반이승만 세력과 좌익세력에 대해 강한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