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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인보 스크랩 "나는 천상 꿈꾸는 소녀"-엘리자리 원장-
아빠 추천 2 조회 356 19.01.18 10:4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미용인보(美容人譜)1

 

나는 천상 꿈꾸는 소녀

-엘리자리미용실 엘리자리 원장-

 

고은 시인은 주위 사람들 만 명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만인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이는 시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이다. 기자는 이를 차용하여 주변 미용인에 대한 시와 스토리를 매달 한 편씩 쓸 예정이다. 그 중에는 성공한 미용인도 있을 것이고 동네에서 나 홀로 미용실을 운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필자에겐 모두 소중하고 고귀한 미용인 자산이다. 우리는 미용으로 엮어진 떼려야 뗄 수 없는 미용가족이니까.

                         이완근(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alps0202@hanmail.net

 

 

 

엘리자리 원장을 처음 만나 건 1996년 여름이었다. 기자가 미용계에 입문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 해 10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헤어월드 ‘96워싱턴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엘리자리 원장은 이은주, 김인선 원장과 국가대표 선수로 뽑혔었다. 3명의 국가대표 중 엘리자리 원장은 국가대표 주장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대회에 출전하기 앞서 기자는 인터뷰 약속을 했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그 해 여름, 압구정동에 있는 엘리자리 미용실을 방문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당시 젊디젊었던 기자는 억수같이 오는 비에 마음을 충분히 빼앗기고 있었다.

처음 대면하는 엘리자리 원장의 미모는 어느 여배우 못지않았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보니 일반인의 화술이 아니었다. 그때 아프리카 늪지를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노자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기분이랄까, 대화가 미끌어졌다가 공중을 날았다가 무위에 이르렀다가 현실로 되돌아오는가 싶다가 다시 늪 속에 빠지고.... 아주 특이한 미용인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담배는 연신 얼마나 피워쌓는지. 그러나 불쾌한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는 내리는 비에 대해서, 시시껄렁한 삶에 대해서 몇 병의 막걸리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다. 헤어질 때 기자는 또 아프리카의 광활한 밀림을 생각했다.

워싱턴대회 때 기자는 취재차 그곳을 방문했고 그때 같이 1011일 동안 방미했던 미용인들과 많은 대화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워싱턴에서 당시 국제적 헤어모델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이혜경, 선경 자매도 만났다.

대회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엘리자리 원장과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국제대회를 치르고 나면 후일담이 많이 남는 법이다. 프랑스 M.C.B대회를 비롯, 몇 번의 대회가 더 있었고 그때마다 3명의 국가대표는 엘리자리, 김동분, 이복자 원장의 3명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 막간의 이유를 기자는 공유할 수 있었다.

마침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는 1998년 예정인 세계대회를 유치했다. 기자는 <헤어월드 대회>에 대해 매월 특집 기사를 게재했고, 자료를 얻기 위해 엘리자리 원장을 자주 마나곤 했다. 엘리자리 원장은 세계대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유럽의 미용 인사들과 많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엘리자리 원장과 만나기로 한 날은 꼭 비가 왔다는 것이다. 우연은 반복됐고 우리는 비가 오면 만나 술을 마시지 못 하는 엘리자리 원장은 담배를 피워댔고 기자는 막걸리를 마셔댔다.

세월이 흘러 <헤어월드 ‘98년 서울 대회>가 올림픽공원에서 열렸고 엘리자리 원장은 헤어바이나이트 부문 2, 개인 종합 5위의 쾌거를 이루었다. 당시 대한미용사회중앙회 회장은 마샬의 하종순 원장이었다. 서울대회를 마치고 하종순 회장은 중앙회장에 3번째 당선됐다. 200117대 중앙회장 선거가 있었고 4선에 도전했던 하종순 회장은 야당 단일 후보였던 강경남 후보에게 졌다. 하종순 회장의 국제대회 오른손 역할을 했던 엘리자리 원장도 새로운 중앙회와 멀어졌다. 기자는 엘리자리 원장의 국제적인 역할이 묻히는 게 아쉬워 몇 번 새로운 집행부와 같이할 것을 권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불발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엘리자리 원장도 개인적인 여러 사정으로 숍을 몇 번 옮기기도 했다. 우리는 그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 했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통화했다.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하면 오해할 수 있겠다. 우리는 순전히 미용 동지다.

엘리자리 원장은 소녀다, 천상 소녀의 모습을 지녔다. 무슨 말인가 하고 난 다음 까르르 까르르웃을 때는 마치 여고생 같다. 미용에 대한 자신감 속에 수줍음도 병행하고 있다.

지금 엘리자리 원장은 시를 쓰고 있다. 언젠가 가평에 있는 이윤학 시인을 소개해준다고 말했고 기자는 먼저 가서 이윤학 시인과 막걸리를 마시고 대취해 있었다. 뒤늦게 찾아온 엘리자리 원장은 이윤학 시인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뒤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점심쯤 이윤학 시인 집에서 깨어난 이윤학 시인과 기자는 밤새 누가 다녀갔는지 머리를 굴려도 누군지를 한참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엘리자리 원장과는 많은 추억을 공유했다. 국가대표 선수로서 뿐만 아니리 국제적인 경험까지 엘리자리 원장이 가지고 있는 역량은 상상 이상이다. 2001, 엘리자리 원장이 잘 나가던 시절(?), 기자는 ()웰라의 지원을 받아 <엘리자리의 컨슈머패션, 헤어바이나이트>라는 단행본과 비디오, CD를 세트로 몇 개월의 고생 끝에 제작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흐뭇하다. 일에 대한 열정이 서로 대단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엘리자리 원장은 적지 않은 나이가 됐다. 그러나 기자가 봤을 때 엘리자리 원장은 언제나 소녀다. 지금도 무언가를 꿈꾸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꿈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꼭 믿는다. 열정은 가는 세월이 결코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자리 원장께 비 오면 안부 전화하리라. 아니 전화하면 비 오리라.

 

바다가 된 소녀

-엘리자리 원장께

 

꿈꾸는

소녀가 있었다

그 꿈은 세계를 향한 것이었고

아침 이슬처럼 하얗고 찬연했다

그 꿈은 늪이었고 미로였다

꿈은 멀리 날았고,

날아갔다,

고 생각했다

꿈은 방향을 바꾸었고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이슬처럼 탱탱했던 꿈이

툭 튀어 올랐다

육신으로 다지고

마음으로 다스렸다

마침내 잔잔한 바다가 되었다

조용한 바다,

고래를 키우는 바다,

바람소리마저

잠재우고 있는 완성된 바다

 

솟구칠 날이 올 것이다

 

 

*엘리자리 원장 약력

   

엘리자리(본명 : 이현서, 이금연에서 개명)

*1981년 엘리자리 헤어살롱 오픈

*2005년 엘리자리 뷰티스쿨 오픈

*용인대학교 경영학 석사

*미용기능장 취득

*미용 교사 자격증 취득

*숙명여자대학고 평생교육원 교수 역임

*이화여대, 경원대 ,용인대, 한남대 전주대 등 특강 교수

*열린사이버대학교 4년제 객원 뷰티 학과장 역임

*(),중교육문화 인재교류 미용학부 이사

*현재 청담동 엘리자리 뷰티살롱 대표, 중국 심천점, 태국 방콕점 운영

 

<뷰티라이프> 201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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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9.01.18 22:26

    첫댓글 맞야요 이 완근 국장님
    오랫만에 객관적인 저의 관점을
    들여다 보니까! 새록 새록 그러한듯 합니다.
    삶은 누구나가 자기 삶을 산다는 것이
    철저하게 나를 찻야가는 길이 있는듯 합니다.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종국에 가서는바다에서
    이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 작성자 19.01.21 08:28

    소녀 감성을 유지한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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