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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산(眉山) 학교의 향수
누구에게나 초등학교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로새겨 진다. 초등학교시절은 인생의 전 과정을 놓고 볼 때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학창생활이고, 또 인생에서 공식적인 배움을 처음 시작하는 첫 배움의 인연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등시절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이 순수하고 꾸밈없는 때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육십여 년 전인 1958년 춘삼월에 나는 경북 예천군 보문면 한 산골학교인 미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학교까지 약 2 km 떨어진 산골마을로 우리는 모두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우리 동네는 내성천 넓은 백사장을 맑은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는 한 오십 여 호가사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간방리(澗芳里)였다. 미산국민학교는 부근의 산골아이들이 모여서 배우는 한 학년에 두 학급이 있는 작은 학교였다. 1반은 남자 반, 2반은 여자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수많은 추억들이 옛날 할머니들의 이야기보따리처럼 가득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의 기억에 우뚝한 것은 5, 6학년 때의 몇 가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5, 6학년 때였다. 2년간 담임을 해주셨던, 이 인호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생님은 명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신 문학도 출신이어서 문학적 풍취가 몸에 배여 있었다. 공부시간에 간간이 안데르센 동화이야기, 햄릿이야기 등의 신나는 얘기들을 들여 주시며 아이들의 꿈을 키우셨고, 학생들을 공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문학의 길로 안내해 주시곤 했다. 미산학교건물은 일본식 목조교사 두동과 콘크리트 건물 한 동이었는데, 검은 타르를 칠한 목조건물은 겨울철엔 햇볕에 타르송판이 따끈하게 달아 따뜻한 양지 터를 만들어 주었다. 쉬는 시간에는 학생들이 밀림의 미어 켓‘ 처럼 늘어서서 따스한 햇볕 속에서 눈을 감고 태양을 향하여 동화속의 나라들을 생각하며 망상을 즐기곤 했다. 목조 마루 바닥교실은 초칠을 해서 언제나 매끄러워 양말을 싣는 겨울철에는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기 위하여 꽤나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교실칸막이를 뜯어내면 훌륭한 전설 같은 극장으로 변신하여, 무성영화 「인간 이승만」 같은 영화도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갖가지 선생님이 키워주신 동심들을 학예회 등을 통해서 멋지게 펼칠 수가 있었다.
장난이 행복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숱하게 다투곤 했는데 5학년 때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나는 무슨 이유였는지도 모르게 승본동에서 제일 깡다구가 세다고 생각했던 장식이와 반 아이들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대판으로 싸웠다. 수업 종이 울려서 겨우 판을 거두고 교실에 들어왔으나, 교실분위기가 서먹함을 알아차리신 선생님은 학생들을 보고 “야! 너희들 왜이래, 누가 싸웠어?”라고 크게 다그치셨다. 아이들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익이와 식이가 싸웠어요.”라고 이실 직고 했다. 한참 침묵하시던 선생님은 “그럼, 너희들 둘은 오늘 수업마치고 남아”라 하시며 수업을 시작하셨다. 반의 부반장이었고 선생님의 아들이었던 나는 “야 이제 큰일 났구나! 이 일을 호랑이 선생님인 나의 아버지가 아시면 큰일인데 어떻게 하나? 이리 저리 고민하는 사이에 수업은 뒷전이었다.
이윽고 수업이 모두 끝났다. 장식이와 필자는 선생님의 양 손에 이끌려 학교 뒷산 금잔디 묘터 우리들의 일상의 놀이터로 갔다. 많은 우리 반 학생들도 함께 갔고, 거기서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너희 둘 여기서 사나이답게 한판 승부 하는 거야! 정정당당하게 모든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서 한 판 씨름으로 승부를 하는 거야! 이기는 자는 형! 지는 자는 동생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 후에 다시 싸우면 선생님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 하시며 선생님은 씨름을 부치셨다. 승부는 끝났고 나는 선생님께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내성천 냇가에서 늘 씨름을 해왔기에 내가 이겨도 장식이가 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후일 나는 이 일을 여러 날 곰곰이 생각했다. 선생님은 그때 32세의 청년 교사이셨다. 멋과 여유를 가득히 지니셨던 선생님! 문학도답게 솔로몬의 판결을 내리신 선생님을 평생 동안 내 모습에 새기고자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중등 교단에서 교사로 자리에 섰을 때나, 대학교단에서 40년 교단을 마감할 때나 선생님의 모습은 언제나 내 안에 살아 계셨다.
나에게 강한 메시지로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값진 좌우명을 선생님 내게 새겨 주셨다. 졸업 때 내통지표 가정통신란에 선생님은 “노력하라 얻을 것이다”라는 보통 선생님들이 잘 쓰지 않는 간결하고 강렬한 글로 내 평생의 삶의 신조를 심어 주셨다. 나에게 문학의 크나큰 힘을 깨워주신 선생님 덕택에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세상의 본질이 아름다움의 질서로 짜여 있음을 일찍이 알게 되었다. 후일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얘기 한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 초등학교에서 배운다고, 그리고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명문대학교를 나오는 것도 좋으나 참다운 교육을 하는 초등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한 가지 더 내가 지금생각해도 내가 놀랄 정도로 재미있었던 추억은 제기차기였다. 미산학교마당 뒤편은 대추나무가 빙 둘러서 자라고 있었고, 운동장 동·서쪽에는 드문드문 수영버들이 서 있었다. 운동장 동편 철봉대 부근에는 산봉우리만큼 큰 왕 수양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 밑은 아이들의 제일가는 놀이터였다. 사철 없이 그곳에서는 제기차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등 갖가지 놀이들이 벌어졌는데, 5학년 때인가 그날은 제기차기 시합이 벌어졌다. 나의 제기차기는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시작해서 그 다음 수업종이 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양발제기차기에서 무려 286개를 차서 아이들로부터 제기차기 왕이 되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학교 이름처럼 눈썹같이 소박하게 드리워진 뒷산언덕에 올라 철따라 이바구의 꽃을 피웠다. 봄날에는 할미꽃, 진달래, 꽃 싸움으로 동심을 견줬고, 녹음 푸르던 여름날엔 내성천 물놀이에 시간가는 줄 몰랐고, 수박서리, 참외서리가 오히려 멋으로 더불어 즐겼다. 미산국민학교의 가을은 이슬 머금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을 타고 유별나게 청초했다. 교정을 떼 지어 떠나는 하굣길엔, 빈 도시락을 가득히 채우던 벼메뚜기 잡기가 신나는 일이었다. 나의 선친은 우리 선생님보다 한 살 위였다. 두 분은 형제 같았고 똑같이 씀바귀와 메뚜기요리를 무척이나 즐기셨다. 창호지 문틈사이로 설한풍이 콧잔등을 시리게 하던 추운 겨울날엔, 학교 가는 길 가득히 쌓인 눈길이 갖가지 겨울 꿈을 그리게 했다. 눈 쌓인 운동장은 금방 동심의 나라가 되어, 하늘같은 선생님들과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난로 불에 눈 녹아 언 발을 양말을 벗어 말리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지금은 긴 세월 너무도 빛바랜 기억들이지만, 아직도 새기고 또 새기고 싶은 미산학교의 추억! 누가 추억은 애달프다고 하였는가?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학교를 떠나고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했다. 도대체 왜 이리 세월은 빠른지. 지나온 시간이 아쉬워 엉뚱하게 세월더러 원망을 해본다. 이젠 미산학교도 선생님들도 모두가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폐교가 된 미산학교는 향토 예술가들의 문화공간으로 변했다. 어쩌다 몇 년 만에 한번 기회가 생기면 미산학교를 추억하고 싶어 빈 교정을 맴돌다 온다. 아득한 추억들이 내 삶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행복한 꿈에 젖게 한다.
2. 청통 농가의 행복 예감
평생을 그리던 자연 속의 삶은 결국 정년과 함께 시작되었다. 40년 가까이 몸담았던 교단에서 정년을 하고 청통 주말 농장에다 집을 짓고 소박한 농촌생활을 시작한 지 5년이 되었다. 농촌의 향수를 못 잊어 20여 년 전에 장만한 주말농장 1,000 평 남짓한 땅에 200평 정도를 대지로 전용하여 농가를 지었다. 농가주택으로 불편이 없도록 주차장, 창고 등을 짓고 어릴 적에 특별히 호기심을 갖고 키워오던 닭장도 미리 지어 두었다.
농가의 지리적 배경은 그런 대로 양호한 편이라고들 한다. 필자가 사는 대구의 동구 율하 휴먼시아 아파트에서는 자동차로 한 30분 거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약 3,000평 정도의 대장곡지라는 작은 못이 있다. 이 못을 필자는 언제나 작은 문천지라고 생각한다. 나의 영원한 향수 대구대학교의 상징인 56만 평의 거대한 문천지(文川池)와는 비교할 바 못되지만, 그것의 축소판처럼 자리하고 있다. ‘산을 등에 지고 물을 바라보는 자리(背山臨水)’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서 택지를 정할 때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형국이다. 집을 지을 때 앞에 강이나 개울, 연못이 있고 집 뒤에 산이 있으면 산의 기운인 음과 물의 기운 양이 서로 합해져서 산천의 생기를 북돋우며 만물이 잘 자라도록 해준다는 이야기이다. 풍수에 조예가 없고 관심 또한 별로인 필자는 그저 상식에서 집 앞에 물, 뒤가 산이니 육안으로도 느낌이 괜찮을 뿐이다.
최근에는 인근의 풍락제에 낚시금지령이 내려져 매일 태공들이 대장곡지 주위를 둘러싸고 낚시를 즐긴다. 코로나19 때문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주말이면 제법 적잖이 찾아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달이 사는 청정수였는데 지금은 물빛이 덜 푸르다. 그래도 청둥오리 비 오리는 겨울철이 되면 열심히 찾아온다. 비 오리들은 노는 모습이 유난히 한가롭고 서정적이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열심히 자맥질을 하다가도 또 이내 암수가 마음이 통하면 물위로 날개를 펼쳐 올리고 소리를 지르며, 빙빙 돌아 회전 놀이를 하다가 ‘까르륵’ 소리를 내며 행복한 사랑놀이를 한다.
사실 농사짓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더욱이 농사를 전업으로 해보지 않은 퇴직자들에게는 장시간 밭일에 매달리는 것은 되레 고역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처럼 날씨가 더운 날은 아침저녁으로 잠깐 일을 하고 낮으로는 책을 읽거나 쉰다. 농사일은 봄이 제일 바쁘고 힘 든다. 밭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는 일은 일 년 농사의 거의 절반이다. 나무전지와 약치기는 과수농사의 전부에 해당한다. 밭에서 채소를 키우는 일은 신토불이의 식단을 만들어주기에 조금 힘이 들더라도 전원생활의 기본이다. 필자도 야채는 종류대로 거의 다 가꾼다. 약을 덜 친 웰빙 야채들을 먹는다는 기다림에 봄이 되면 일찍부터 밭 가꾸기에 바쁘다. 밭에는 거의 다양한 야채와 약초 형 채소들이다. 정구지, 근대, 상추, 겨자, 취나물, 참나물, 곰치, 머위, 도라지, 더덕, 잔대, 미나리 등 신토불이 야채의 대부분을 키워서 먹는다. 평소 채식주의자인 필자가 좋아 하는 채소들로 텃밭은 야채 표본실이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아예 겨울김장담기는 텃밭에서 키운 배추와 무로 한다. 봄에는 싹트고 꽃피며, 여름에는 푸르름을 주고, 가을과 겨울에는 인생의 철리를 느끼게 하는 농촌은 언제나 삶의 진솔한 스승이다.
올해는 과수나무에 냉해가 와사 과수밭에 할 일이 많이 줄었다. 일손이 덜 가고 결실기가 빠르고 관리하기가 편해 자두나무를 주종으로 심었다. 매년 집안 가족들이 농약을 덜 친 과일을 먹는다는 기쁨에 과수 가꾸기는 계속되어 왔다. 수령이 20년에 가까운 나무도 몇 그루 있으나 대부분은 수령 5년생이다. 이미 주말농장으로 이용해왔던 밭이기에 다른 과수나무도 몇 그루가 종류별로 있다. 매실나무, 단감나무, 대추, 복숭아, 살구나무가 조금씩 식용으로 키우고 있다. 과수농사도 과일 외에도 계절의 멋을 알려주는 자연의 예술이다.
오래전 처음 주말농장을 시작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된 같은 직장의 J 화백으로부터 귀한 토종이팝나무 6그루를 선물로 받아 심었다. 이들이 함께 심은 목련, 벚나무와 함께 밭둑을 에워싸고 계절의 소식을 차례로 알려준다. 3월에는 마당 앞의 매화나무와 함께 밭둑 아래 늘어선 개나리가 봄의 전령사가 되고, 4월이 오면 먼저 벚나무가 꽃소식을 화려하게 전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벚꽃은 동경의 우에노 공원과 마가레트 미첼의 소설이자 명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떠올린다. 타라의 광토에서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끈질긴 사랑과 열정의 삶이 조용히 클로즈 업 되면서...
오월이 오면 대구시 꽃 이팝나무가 하얀 떡고물 같은 꽃들을 하늘 높이 휘날린다. 이팝나무 꽃에는 순수의 품격이 하얀 떡고물처럼 서려 있다. 지금은 찔레꽃 계절이다. 찔레꽃은 생명력이 대단한 꽃이다. 밭 둑, 집 뒤 어디든지 틈만 생기면 납작 달라붙어 하얀 꽃송이를 촘촘히 피운다. 찔레꽃은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어린 시절 봄날 학교 다니는 길에 돋아나는 찔레순은 우리들의 신선한 간식거리도 되고, 하얀 찔레 꽃잎을 빈 도시락 가득이 채우고, 입안 가득이 넣고 씹으면 싸근한 맛이 별스럽던 꽃이다.
올해는 코로나 위기로 농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꽃가꾸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온갖 꽃들을 다 가꾸고 싶어 한다. 꽃 잔디, 팬지,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해바라기, 달리아, 나팔꽃, 불두화, 연산홍, 수국, 목단, 나리, 장미 야생화 금계국과 구절초를 비롯하여 틈틈이 꽃을 사서 심었다. 집둘레 울타리엔 줄장미를 심고, 가을의 품격인 국화도 심었다. 올해는 코로나 피난살이의 고난을 심고 싶은 꽃들을 실컷 심어서 보상했다.
필자는 이름자에 “날개 익(翼)”자가 있어서인 지 태생적으로 새를 좋아한다. 오래 전 10년 동안은 아파트 베란다에 새장을 놓고 관상용 가금류를 키웠다. 새 기르기의 입문 십자매를 비롯하여 카나리아, 문조, 호금조, 모란앵무 등을 베란다에 새장을 5단으로 놓고, 단골 조류사와 오랫동안 오고갔다. 그래서 청통 농가에 찾아오는 새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유별나다. 대부분이 이지역의 텃새들이다. 딱새. 물까지 직바구리, 노랑턱 할미새, 물떼새, 후투티, 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꾀꼬리 등은 제법 귀하고 예쁜 새들이다. 오색딱따구리, 물까치, 꾀꼬리, 후투티는 자태도 아름답지만 우는 소리가 아주 산듯하고 멋이 있다. 새를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과 생명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새를 오게 하려고 아랫집 창고 처마에 둥지도 만들어주고 마당에 모이도 남겨두곤 한다.
한 4년 전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시중의 계란을 사먹기가 힘들게 되자, 닭장만 지어 놓고 비워두었던 닭을 키우기 시작했다. 멀리 문경의 전문양계장까지 가서 병아리 몇 마리와 대학 뒤 부화장에서 육계 몇 마리를 사서 키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려 닭, 청계, 백봉 오골계 3종류를 키우고 있다. 매년 병아리를 자연부화도 하고 부화기 부화도하여 노하우를 축적해가는 중이다. 어미 닭이 병아리 키우는 모습과 병아리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어미닭은 병아리들에게 물도 한 모금 물어다주고, 모이를 찾아 꼭꼭거리며 새끼를 불러 딱딱한 모이는 부드럽게 씹어서 먹인다. 어쩌다 던져주는 맛있는 밥찌꺼기도 새끼가 먼저이다. 다른 닭들은 모두 제 먹기가 바쁜데 병아리가 있는 어미닭은 언제나 병아리가 먼저이다. 병아리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한 달만 크면 또래끼리 싸움연습, 달리기 연습, 날기 연습 등으로 닭장에 활력이 넘친다. 서로가 우르르 달려와 싸움판을 벌리다가도 금방 친구가 되어 서로 등도 긁어주고 물도 함께 먹으며 눈앞에 친구들이 없으면 금방 삐악거리며 서로를 찾는다. 닭 기르기는 자연사랑, 생명체험 교육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주말에는 코로나19로 갈 곳 없는 딸과 사위가 생후 7 개월 된 외손녀를 데리고 어김없이 찾아온다. 도시의 답답한 아파트보다 탁 트인 느낌이 있어서 좋고, 자연과 함께 마음 놓고 쉴 수 있어서 좋다. 매번 특별 메뉴를 챙겨서 이런저런 음식들 파티도 한다. 이제 청통 농가는 우리 가족 모두의 피안의 공간이다. 자연학습, 생명체험을 온 집안이 함께하는 해피플레이스이다. 매일 밤 카톡 영상통화를 하는 용인 수지의 손자 손녀와 함께 외손녀는 우리 부부의 세상에 없는 보물단지가 되었다. 나는 아이를 안으면서 “혜린이는 할아버지의 제일가는 멋진 친구야!”라고 큰소리로 얘기하면서 힘껏 안고 놀아준다. 아이를 볼 때는 언제나 내 나이와 아이의 나이를 합하여 반으로 나눈 것이 내 나이가 된다고 생각한다. 기쁜 마음이 행복의 묘약이기에... 아이가 옹알이를 하며 흥얼대고 노는 모습은 천국이요, 노화를 멈추는 최고의 엔 돌핀이다. 외손녀의 재롱에 취하며, 가족이 함께 나누는 소박한 청통 농가의 주말파티는 가장 귀한 행복의 옹달샘이다. 그래서 요즘 청통 농가에는 주말의 ‘코로나 웰빙 데이’가 이어지고 있다.
3. 은해사 산책
코로나19로 청통 농가에서 피접을 시작하면서 은해사 일대를 산책할 기회가 많아 졌다. 오늘도 한적한 유월 첫날이라 은해사에 들르기로 했다. 지난번에 아내와 함께 와보고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은해사를 새롭게 알고 가끔 들르기로 했다. 이 그윽한 절이 나의 청통 농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부처님 오신 날 초파일 행사를 한 달 늦춰서 5월 30일에 했다. 초파일에는 주로 청도 운문사를 들렀었다. 이제 한 2년 전부터 은해사로 바꾸었다.
옛 절은 정서가 고향같이 푸근해서 좋고, 요즘 것은 스마트해서 좋다. 혼자 걷는 산책길은 생각의 여유를 넉넉하게 해줘서 좋다. 절의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길 솟는 소나무 숲은 은해사가 가진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일주문에서 입구까지 약 500m의 길에 만들어진 금포정 길은 불가의 뜻을 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속세와는 구별되는 불토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선언한다. 거목들의 자유롭게 멋대로 흩어져 서있는 모습이 세월을 순응하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를 말해주는 듯하다. 굽은 나무와 바로 선 나무들이 어우러져 한결 자유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설 힘이 있는 나무는 서고, 설 힘이 없는 나무는 누워서 제 뜻대로 모여 전체가 어우러진 모습이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멋이리라,
금포정(禁捕町)으로 이름 지어진 것은 조선조 숙종 때, 살생을 금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도량에 들어왔으니 그 안에서의 살생은 당연히 부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은해사는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던 생명존중 사상을 절 입구부터 일깨워 준다. 세월의 굴곡을 거역 없이 받아들이고 4,5백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낙락장송은 보는 이의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마음의 여유는 모든 구도자가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품성일 게다. 유가는 아이를 교육할 때 바른 나무를 닮으라고 한다. 그러나 생각을 좀 바꾸어 불가처럼 가져보면 나무가 바르고 굽는 게 그 무슨 상관인가. 바른 나무를 닮으라는 유가적 가르침은 때로는 사람을 필요이상으로 불편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솔 숲길 그늘 사이로는 아직도 철쭉이 여전했다. 쭉쭉 뻗은 소나무 숲 아래는 누군가 소원을 빌었을 작은 돌탑들이 정성을 담고 있었다. 금포정 숲길이 끝나고 은해사 본당 가는 다리를 건너기 바로 전 보기 드문 ‘사랑나무’가 정성스럽게 안내판으로 인사를 하고 있다. 100년 묵은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서로 붙어 있는 연리목이 절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연리목은 부부간, 연인간의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다. 특별히 절 앞에 서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제 인생을 비추는 마음은 백인백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존중하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길이라고 각인시켜주는 사랑나무! 그런데 우리 세대는 연리지 같은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못하고 살아간다. 은근과 무거움을 강조해온 유가적 풍습 때문이었을까? 그저 덤덤히 살아온 내 삶이 조금은 아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짧고 사랑은 영원한데...
이내 눈을 돌려 은해사만이 보여주는 피안의 사자들을 위한 안식처인 수림장에 들렸다. 누구나 대왕이 부르시면 가야할 마지막 길을 은해사는 절을 찾는 이들에게 생각하게 한다. 나의 마지막 쉼터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동편으로 전보다 훨씬 잘 다듬어진 수목장을 살폈다. 그전에는 아예 생각도 않았는데 이젠 마음이 좀 달라졌다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금세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잘 자란 나무를 보니 괜찮은 기분이 들었지만, 혹시 나무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절의 성보박물관 입구에서 들어서면, 정면에 추사 김정희의 사액 한문 글씨 「銀海寺」가 눈에 들어온다. 많은 서책과 탱화 등은 모두 세세히 열람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관리해 놓았다. 근대의 서화가 김규진의 초서체 은해사 편액 글씨는 사군자의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양면에 곁들어 사액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해사를 오늘의 유명 사찰로 키워온 고승 일타의 근영을 그린 초상화가 높은 이력사항과 함께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승 중의 고승 일타의 열반송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볼 수 있는 득도의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중생들에게는 언제쯤 도의 길이 열리게 될까?
은해사 서남쪽으로 계곡줄기를 따라 서서히 오르는 기기암 포장길은 올 때마다 느끼는 기분이지만 시원하고 아늑함이 있다. 약한 오르막길은 우거진 녹음이 더운 초여름에도 꽤나 시원했다. 자켓을 아예 벗어 등 뒤에 동여 메고, 새소리 물소리를 즐기며 가볍게 올랐다. 직박구리 후투티들이 마른 나무줄기를 부지런히 쪼며 열심히 먹거리를 찾고 있었다. 가뭄으로 안덕 폭포는 폭포라기에는 너무 물이 줄어, 물줄기가 아이들 오줌줄기 같다. 아예 돌려볼 마음을 접고 곧 바로 기기암을 올랐다. 수도승들의 수도장답게 아늑하고 고즈넉하다. 기기암은 기도도량으로 정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전 아내와 동행하면서 문득 한 일 년쯤 이런 암자에서 처사로 지내고 싶다고 했더니 아내의 대답이 시원했다. 그래요, 한 일이년 지내면서 베스트셀러 하나 쓰세요! 그래, 이런 곳이라면 비록 글재주는 모자라지만, 뭔가 나의 빈 마음이라도 채울만한 몇 줄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 번 초파일에는 귀룡나무가 만개한 꽃들로 길손의 걸음에 피로를 덜어 줬는데, 오늘은 시원한 나무 그늘로 손님들을 맞는다. 공짜로 보살님이 베푸는 커피 한잔을 마시며 암자에 대하여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다. 긴 역사가 스토리를 가득히 담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외형은 그다지 크지 않으나 신라시대 헌덕왕 8년(816)에 세웠다고 하니 벌써 천년하고도 이백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셈이다. 당시에는 국왕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안덕사(安德寺) 혹은 안흥사(安興寺)라고 불렀다. 그러다 고려시대 명종 16년(1186)에 기성(箕城) 대사가 머물면서 기기암으로 불렀는데, 그 뜻은 기기하다. “몸은 사바세계에 머물고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문다(身寄娑婆心寄極樂)”는 오묘한 뜻을 지녔다고. 불가의 깊은 뜻을 알 듯 말 듯하다. 일일이 손님들의 질문에 성심껏 답하며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보살님의 정결스런 화분관리가 불자의 불심을 읽게 한다. 유난히도 길손의 마음을 끌어 잡는 기기암! 그 옛날 백련암, 거조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삶의 심연을 되돌아보게 하는 은해사 탐방은 나이 탓이라고 함이 옳을까?
오른쪽 언덕배기에는 제법 단아하고 짜임새 있는 스님들의 수도장인 암자가 세워져 있었는데, 길손에겐 숨소리조차 전해지지 않는 시간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 수도승의 참선과 교학이 산사처럼 깊다는 느낌이었다. 이 같은 기도처를 옛날에는 12개나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8개가 남아서 스님들이 불교철학을 뿌리 깊게 탐구하게 하고 있으니 은해사는 참으로 절중의 절이 아닌가. 지난 날 젊은 교수시절 학생들과 함께, 은해사 백련암을 거쳐 팔공산 험로 갓 바위 길을 하루 종일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는 은해사가 이렇게나 멋진 명승사찰인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박천익(朴天翼)
필자는 예천군 보문면 간방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교 시절 문예부장을 하는 등 문학에 취미를 가졌으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 보니 문학의 길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학을 전공하면서도 경제사상, 경제철학 등에 관심을 갖고 “경제철학과 사상”, “경제사상의 이해”,“시장과 복지”, “파레토 복지경제학” 같은 넓은 의미의 문학 사상적인 몇 권의 책도 상재하였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에서 3년 반 동안 교단생활을 한 뒤, 1979년 3월1일부터 대구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봉직 한 뒤 5년 전 정년을 맞아 현재는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