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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匡師 스크랩 강화학파 이광사(李匡師)의 초상
성헌 추천 0 조회 59 20.07.26 11: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화역사 문화연구소] 강화학파 이광사(李匡師)의 초상 2009.05.11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 1705-1777)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양명학자. 강화학파 학자로 정제두의 제자이다.


1705(숙종 31)~ 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양명학자.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수북(壽北). 소론이 영조 때 세력을 잃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고,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받을 때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학문이 이름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유배지를 완도군 신지도(新智島)로 옮겨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을 배워 아들에게 전수했으며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진서·초서·전서·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이룩했다.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 문학작품으로는 단군 이래의 역사를 읊은 〈동국악부 東國樂府〉 30수와 귀양지 신지도의 풍속과 생활을 그린 〈기속 記俗〉 등이 전하며, 서화작품으로는 〈행서사언시 行書四言詩〉·〈고승간화도 高僧看畵圖〉·〈산수도 山水圖〉 등이 전한다. 저서로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 圓嶠書訣〉·〈원교집선 圓嶠集選〉 등이 있다.

 

 

 

  원교 이광사 초상

李匡師(1705-1777)는 원교체를 완성하고 동국진체를 이룩한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이광사 초상> 화면 우상단에 ‘朝鮮國完山李公諱匡師字道甫號圓嶠先生遺像 … 此本卽 先生七十歲甲午冬畵師申漢枰所寫……’라고 쓰여 있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제작시기, 화가 등 내력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1775년에 이광사 말년의 모습을 신윤복의 아버지로 유명한 화원화가 신한평이 그린 것임이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필묘와 은근한 요철감을 표현하는 수법으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품격 있고 깊은 傳神을 성취하였다는 점에서 수준이 높은 역작이다. 또한 신한평이 초상으로 유명하였지만 전해지는 작품이 없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희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ㅇ 규격(세로x가로) : 66.8 x 53.7cm 

 

죽은 부인을 애도함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한데도 이한은 정녕 살아 있으니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 지리라

내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 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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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秋史 관련인물들(2.원교 이광사)  2007-04-17

 

 

(신한평, <원교 이광사초상>, 비단에 채색, 66.2 X 53.2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원교 이광사의 70세 초상으로 화원 신한평이 그렸다. 20여 년 유배객으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처연한 삶이 그의 초상에 어려 있다. 화원 신한평은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자를 도보(道甫), 호를 원교(圓嶠)라 했고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글씨의 名家여서 종고조부 李景奭, 증조부 李正英, 부친 李眞儉 등이 모두 명필이었다.

 

  원교는 인품도 높았고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였으며 또 명필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1755년, 전라도 나주에서 불온한 글을 벽에다 쓴 이른바 벽서사건이 일어나 큰아버지인 李眞儒가 처형될 때 원교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이규상의 『병세재언록』중 「서가록」을 보면 원교는 의금부에 끌려왔을 때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영조대왕이 이를 가긍히 여겨 귀양보냈다고 한다.

  이리하여 원교가 회령으로 귀양가자 3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유배지까지 따라왔다. 원교의 인품과 학식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것을 문제삼아 원교를 다시 전라도 신지도(新智島)로 移配시켰고, 원교는 거기에서 22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원교는 귀양살이 30년 동안 정말로 많은 글씨를 썼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무척 사랑하였다. 귀양지에서도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할 수 없이 아들.딸에게 대필까지 시켰다고 한다. 해남 대둔사, 구례 천은사 등 전라도 일대의 사찰 현판에 그의 글씨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법첩의 원조격인 왕희지 글씨를 바탕으로 國風化한 서체를 개발하여 마침내 공재 윤두서, 白下 尹淳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했다. 이것은 겸재 정선의 동국 진경산수와 그 문화적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광사, <천금첩(千金帖)> 중 행서. 24.3×16.6cm. 개인 소장. 원교 이광사의 행서는 매우 유려하고 친숙하다. 그리고 朝鮮色이 짙게 배어 있어 뭇 사람들이 따르고 존중하였다.)

 

 완당은 이 원교『필결』에 후기를 쓰면서 원교를 혹독히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완당이 그렇게 나온데는 이유가 있었다.

  북비남첩론에 입각하여 북파를 지향하는 완당으로서는 남파에 뿌리를 둔 원교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으며, 원교의 시각이 조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바야흐로 국제적 시각에서 글씨를 논하고 예술을 펼치고 있던 완당이 보기에 못마땅했던 것이다.

  완당이 원교를 비판한 요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서가들은 북비에서 직접 배울 생각은 못하고 왕희지 글씨로 만든 『황정경(黃庭經)』『악의론(樂毅論)』 같은 法帖에 의지해왔는데 사실 왕희지의 글씨는 오래 전에 없어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왕희지 법첩이란 판각에 판각을 거듭하면서 변질되어 사실상 다 가짜인데 그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완당은 그 한심함을 이렇게 질타하였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서예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이르는 진체(晉體, 왕희지체)니 촉체(蜀體, 조맹부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런 것이 있다고 여겨 표준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진, 즉 왕희지)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당, 즉 구양순. 저수량)을 경유하여 진으로 들어가는 길을 삼는다면 거의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

  구양순.저수량 등 여러 사람은 무시하고 위로 종요와 왕희지에 접속하려 드는 것은 문앞 길도 거치지 않고 곧장 방 아랫목에 앉겠다는 격이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광사, <산회첩(散懷帖)> 중 <사언시), 각폭 24.3×16.6cm. 개인 소장. 원교 이광사의 해서에서는 목판 글씨를 깎은 듯한 필획이 구사되곤 했다. 이런 글씨를 잘못 흉내내면 속기가 드러나고 만다.

이런 논지에서 완당은 구양순을 글씨의 규범으로 삼았고 또 그를 통하여 추사체의 골격을 확립했다. 그러나 완당은 원교를 너무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원교필결후」로 인하여 원교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완당은 원교가 죽고 15년이나 지나서 태어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역사적 비평을 임해야 할 것을 완당은 동시대적 비평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역사상 인물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완당이 100년 전에 태어났어도 지금처럼 북비남첩론을 주장했을 것 같은가? 어림도 없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완당은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고 원교에게 잘못한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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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 이광사(李匡師) 초서(草書)| ‥─‥푸르른 글방 2012.01.20.

 

 

 이광사(李匡師) 초서(草書) 고시사첩(古詩四帖) 일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조선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명필이다. 또한 양명학자(陽明學者)이다.

그는 1755년(영조 31)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될 때 이에 연좌되어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가 진도(珍島)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스승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眞) ·초(草) ·전(篆) ·예(隸)에 모두 능하였고 원교체(圓嶠體)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였다. 이광사(李匡師)는 당시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의 그늘에 가려 잊혀진 인물이 됐고, 한 시절에는 그의 글씨마저 폄하(貶下)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추사(秋史)와 이광사(李匡師)의 일화로는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제주도로 유배길 에 해남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친구인 초의선사를 만난다.

그리고 이광사(李匡師)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글씨를 보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자네는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에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는가” 라며 호통을 친다. 추사의 극성에 못이긴 초의는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으로 바꾸어 단다.

  

세월이 흘러 추사는 귀양살이 8년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다시 초의선사와 만난다.

그리고 내려놓은 이광사(李匡師)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아직 보존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때는 내가 잘못 봤어”라고 말하고 제자리에 다시 달게 하여 지금까지 대흥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그리고 옆에는 추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도 있다. 아마 추사가 유배동안에 자기 반성의 더욱 성숙한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광사(李匡師)의 서체를 흠모(欽慕)하여 따른 서예가로 19세기 당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과 함께 “삼필(三筆)”로 불린 호남 최고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있다.

특히 이름난 사찰에 가면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많이 볼 수 있다.

필자가 답사한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만 해도 아래와 같다.

 

*고창 선운사(禪雲寺) 천왕문(天王門), 정와 (靜窩)

*강진 백련사(白蓮寺) 대웅보전(大雄寶殿), 명부전(冥府殿), 만경루(萬景樓)

*지리산 (智異山泉隱寺) 극락보전(極樂寶殿), 명부전(冥府殿)

*해남 대흥사(大興寺) 대웅보전(大雄寶殿) 천불전(千佛殿,) 침계루(枕溪樓)

         해탈문(解脫門)

*김제 금산사(金山寺) 금강문(金剛門) 나한전(羅漢殿)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大雄寶殿) 설선당(設禪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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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서예 라이벌' 김정희-이광사 친필서첩 발굴 2012/02/16

 

원교서법(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제공)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히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와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의 친필 서첩이 발견됐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원장 최용철)은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 고전적(古典籍) 소장 기관인 동양문고 자료를 조사하던 중 김정희와 이광사의 서첩을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민족문화연구원은 최근 동양문고와 연구 협정을 체결하고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해 1차 자료 조사를 벌였다.

민족문화연구원은 "두 서첩은 동양문고 목록에는 올라와 있지 않지만 귀중본으로 분류돼 일반 고전적과는 별도로 보관돼 있었다"면서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던 두 사람의 서첩이 같은 청구기호로 묶여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서첩은 김정희의 '완당서첩(阮堂書帖)'과 이광사의 '원교서법'(圓嶠書法)으로,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

동양문고 자료 조사에 참여한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두 서첩 모두 친필 서첩"이라면서 "보존 상태도 상당히 깨끗했다"고 전했다.

심 교수는 "특히 이광사의 '원교서법'은 조선 후기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주역 해설서 '참동계'를 해서체로 쓴 것으로, 원교의 서체 연구는 물론 주역 연구에 있어 중요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광사는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대표적 명필이자 강화학파의 중심 인물.

그는 수십 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유배지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맥(書脈)을 계승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완성했다.

또 이번 1차 조사에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신대우의 장서인(藏書印. 자신의 소유임을 확인하기 위해 책에 찍는 인장)이 찍힌 박세당의 시문집 '서계집'(西溪集), 중국 문인 왕사정의 시(詩) 가운데 추사 김정희가 뽑아놓은 글을 제자인 심의평이 모아 필사한 '정화선존'(精華選存)' 등 국내에 없는 자료들이 발견됐다.

특히 강화학파의 대표 인물인 신대우의 장서인이 찍힌 책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강화학파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대우는 옹일전수(翁逸田수<늙은이 수>), 신대우인(申大羽印)이라는 장서인을 사용했다.

'정화선존'은 추사의 감식안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심 교수는 "중국과 우리나라 문인들이 주고받은 글을 묶은 '화동창수록', '연암집' 필사본 등 귀중본들이 많았다"면서 "자료 조사를 진행하면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이 발견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가 1924년 설립한 동양문고는 일본 최대의 동양학 연구도서관이자 세계 5대 동양학 연구도서관의 하나로 꼽힌다.

국보 5점, 중요문화재 7점을 포함해 95만 책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 한국 고전적 자료는 약 2천 종에 이른다.

민족문화연구원은 동양문고가 소장한 한국 고전적 자료 전체에 대한 서지 목록을 작성하고 주요 자료에 대해서는 디지털 원문 이미지를 제작하고 해제(解題)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또 2014년 6월까지 디지털화 작업을 완료해 온라인으로 일반에 자료를 공개할 방침이다.

민족문화연구원은 "전체 자료 조사를 통해 동양문고의 한국 고전적 자료 소장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는 점과 디지털 작업을 통해 중요 자료를 연구자들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원교서법(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제공)

 

 
완당서첩(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제공)

 

완당서첩(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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