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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 출처 끝부분 소개>
실학은 실사구시의 약칭으로 '학문을 닦고 옛 것을 좋아하며, 실제의 일에서 옳은 것을 구한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실학이란 17세기 초 조선에서 형성되어 전개된 진보적 사회 사조 및 학문 연구 방법을 의미한다. 당시 양반 출신의 선진적인 지식인 계층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서양 자연과학 사상의 영향 아래 사물 혹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실제 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하려고 하였다.
이른바 실학은 '실사구시'를 학문 연구의 방법으로 견지하고, '실용지학'을 학문 연구의 대상과 내용으로 하며, '경세치용'을 학문 연구의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첫째, 부국 유민을 위하여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의 사회 개혁을 주장하고, 둘째, 조선의 역사, 지리 풍속, 언어, 문학을 연구하며, 셋째 천문학, 수학, 물리학, 의학, 농학 등의 자연 과학 지식을 연구하였다.
결국 실학파 학자들은 실제 생활과 생산에 유리하거나 유용한 학문을 모두 실학 연구의 대상과 내용으로 삼았고, 그렇게 해서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것으로 실학과 성리학은 실학에 대한 견해에서 원칙적으로 구별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학은 당시 조선의 필연적인 학문이었다.
주자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조선성리학으로 고유의 철학을 지니게 된 조선이, 성리학 상의 공리공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실학 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의 학자들이 실학이라는 별개의 학문을 따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생활에 쓰이는 학문을 지향해야 하는 당위성은 팽배해 있었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조선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으며, 서양의 보다 진보된 과학과 기술은 공리공담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자리잡았다. 이런 실학의 극성기에 화성이 건설 되었다는 것은 곧 화성이 실학의 산물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화성의 기본 설계를 누가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화성성역의궤에 분명치 않다. 어제성화주략이라는 정조의 기본 지침이 있으나 국왕 자신이 직접 화성을 설계했을 리는 없었을 테고 실학자들의 사상이 화성의 기본에 무르녹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보면 다산이 성설을 지어서 정조에게 바쳤다는 기록과 성설의 대강이 들어 있는데, 그렇다면 왜 화성성역의궤에는 성역의 기본이 되는 설계와 설계자에 대한 기록이 미흡한 것일까?
공역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과 공역 일수들은 낱낱이 기록하면서 가장 중요한 기본 설계자의 이름은 왜 뺀 것일까? 그리고 과연 정조의 어제성화주략은 다산의 성설일까?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다산의 이름이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화성 성역 이전에 이미 배다리를 설계해서 그 능력을 인정 받은 다산이었고, 그의 저술에 들어 있다시피, 그리고 번암 채제공이 다산의 강력한 후원자였다는 점에서도 다산의 누락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화성의 기본 설계는 다산의 작품이다.
다만 화성성역의궤에서 다산의 이름이 누락 된 것은 의궤의 발간 시점이 당시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고, 그 주인공이 다산이었음을 상기할 때, 의궤에서 다산의 이름을 고의적으로 누락한 인상이 짙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산과 실학자들의 사상이 화성에 녹아 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 중 군현제의 내용에 따라 수원부 읍치소를 과감하게 옮긴 점은 수원의 출발부터 실학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다산의 사상을 존중하여 성설을 받아들여 활용한 점과 거중기, 녹로, 활차 등의 공사 편의 기계를 제작 사용한 점은 실학이 화성의 모토가 되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즉, 국가를 보다 공고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이런 점들은 공리공담의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조선의 새로운 출발이다. 그리고 수원이 바야흐로 조선 실학의 실험장이자 연구장이라는 의미도 되겠다. 실학파 학자들이 중국에서 보아온 벽돌집의 구조와 효능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화성 건축에 실현한 점도 수원이 실학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조선은 이제 첨단 과학 도시를 소유하였던 것이다. 곧, 수원은 그 출발부터 첨단을 지향한 신도시였다.
화성을 설명할 때에는 꼭 거중기가 거론된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동식 크레인에 해당해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200여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보면 이는 대단한 과학 기술 능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서양의 발전된 과학 기술이 중국을 통해 들어온 산물 중의 하나가 거중기라고 할 텐데, 다산의 거중도설은 중국의 기기도설에 들어 있는 거중기와는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즉, 서양의 진보된 과학 기술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 중국의 기기도설 중 거중기에 관한 부분이라면, 다산의 거중기는 보다 더 발전된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용적인 거중기였다. 이는 조선의 모든 문화 역량이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면서도 특화 시켜나간 한 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거중기에 이르면 서양의 과학 기술마저도 녹여내어서 조선의 과학 기술로 빚어놓는 놀라운 과학적 능력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거중기의 사용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벽의 축조에는 거중기의 사용이 필요 없을 뿐더러 거중기를 이동하여 설치하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므로 화성의 중요 시설물 중 무거운 자재를 들어 올릴 때 주로 사용했을 것이다.
꼭 실학자들의 생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조선의 절정기에 화성이 건설되었다는 것은 실질적이고도 실용적인 시설물의 건설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행궁을 보위하면서 주민들의 생업을 보살필 것인가가 아마 축성 계획의 기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화성과 그 주민이 안정되어야만 현륭원의 보호도 가능한 것이다. 동서남북 성문의 배치에서 볼 수 있듯이 주민들의 생활과 보호를 위해 시설물들을 가장 정당한 위치에 설치하였다.
이 적당한 위치라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곧바로 방위력과 연결되니 견고한 성으로서도 화성은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사대문 말고도 다섯 개의 암문이 화
성에는 시설되었으니 이는 곧 전시의 고립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큰 뜻은 주민들의 보호에 있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평상시에 논밭으로 일하러 가거나, 성 밖으로 외출할 때 일일이 성문을 통과하기란 사실 꺼림칙한 일이다. 그러나 암문을 통과하면 이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물론 암문에도 군사가 번을 서겠지만 집 근처에 있는 암문은 아무래도 친숙할 수 밖에 없다. 문으로만 보아도 실용적인 성임을 알 수 있으니 다른 제도도 이에 대입해서 실용성을 찾아보아야겠다.
조선 시대 유생들의 학습 내용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선 전공 필수에 해당하는 학문, 역사, 철학이 있어서 이성 훈련을 받았다. 이 이성 훈련만으로 학습의 범위가 제한되었다면 그들의 생활은 삭막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감성 훈련도 동시에 받았으니 바로 시와 글씨, 그리고 그림이다. 그래서 조선 사대부의 생활을 줄여서 말한다면 문文, 사史, 철哲로 이성 교육을 시詩, 서書, 화畵로 감성 교육을 받았다고 하겠다. 전인 교육이 이미 조선에서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소규모 열린 교육으로 학문의 내용에는 성리학 일변도의 문과 교육 내용만 들어 있던 것이 아니다. 수리학, 천문학, 의학 등의 이과 교육도 들어 있어서 학문의 균형을 지켰다. 삼국 시대부터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해서 혜성 등의 출현을 기록했고, 첨성대의 건설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뿌리 깊은 전통은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공식적인 인정이 되는 과거에서는 잡과雜科로 분류하고 말았다. 게다가 서양의 진보된 과학 기술이 들어오면서부터 전래의 이과 교육은 힘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과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 든 것은 아니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였을 것이다
청나라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과 명나라의 공백을 이용해서 탄생한 나라다. 그들의 출발은 여진족인데 여진족은 세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에 공물을 바치던 부족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틈에 끼어 있던 나라가 임진왜란으로 두 나라가 휘청거리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고, 조선은 대국 명나라를 섬기면서 그 법통을 이을 것이라는 자부심이 그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런데 여진족은 어느새 야금야금 명나라를 잠식해 들어가 마침내 나라를 세우고 청이라 했다.
그리고는 조선에 외교를 열자고 들쑤신다. 처음에는 형제 관계를 맺자고 하나 조선은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이다.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등 간신히 약조를 맺고 전쟁을 끝냈지만 불씨는 남아 있어서 군신 관계로 외교 교섭을 벌여오는가 하면 공물을 바치라고 한다. 조선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어서 희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지는 해였고, 청나라는 뜨는 해였다.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것일까.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보여준 의리에 대해 지나친 숭명주의가 팽배하여 망해가는 명나라만 붙잡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랬으니 여진족 청에 대해 감정이 더욱 안 좋아져서 좌시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는 드디어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되어 조선 역사 상 최대의 수난을 당하게 된다. 즉, 조선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를 당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척화파 삼학사 윤집, 오달제, 홍익한을 필두로 왕자들을 볼모로 잡아가는가 하면, 60만명의 포로를 청으로 압송하기에 이른다. 특히 잡혀간 사람 중 여성이 많아서 돈을 받고 풀어주기는 하지만 예치 국가인 조선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이 보다 빠르게 들어올 수 있었던 기회도 동시에 제공되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아담 샬 신부를 대하고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기술을 흠모하게 된 점이었다.
그런데 국왕 인조와 대신들은 소현세자의 발 빠른 움직임에 냉소적이었다. 그러다가 100여년 가까이 지나서야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고 청에 들어와있던 서양의 과학 기술에 눈 뜨게 되니 북학파 실학자들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국법으로 금지한 천주교 신자가 날로 늘어나게 되니 금압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진보적 학자들은 천주교에 묻어 들어온 서양의 과학 기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니 화성의 건설과 때맞추어 활동했던 다산의 업적은 그로 말미암는다.
본래의 화성 축조 계획은 토성으로 건설하는 방안이었다. 석성으로 건설하는 것이 견고성과 수비에서 앞선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비와 자재 조달의 어려움으로 토성이 낙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 과정에서 새 수원부의 근처에 질 좋은 화강석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석성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그리고 북학파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벽돌의 부분적인 사용이 확정되었다. 또한 여러 전란에서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여 치성의 적확한 설치, 포루의 설치, 옹성의 설치, 여장의 크기와 넓이 및 높이까지 산출해내게 된다.
수원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버드내에 남수문과 북수문을 내면서 어떻게 하면 시설물이 물의 저항을 견딜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로 버드내 상류에서 북수문 과 남수문에 직접 저항을 받는 부분에 마치 배의 머리처럼 앞이 뾰족한 오각 기둥 돌을 시설한다. 이는 과거의 돌다리들에서 볼 수 있었던 사각 기둥을 45도로 돌려 놓는 토목술에서 한단계 더 발전시킨 결과인데 종전의 사각 기둥 형태에서 오각 기둥의 형태로 변모시킨 것이다. 오각 기둥의 뾰족한 부분을 상류로 배치하고 나니 물의 저항은 저항대로 줄일 수 있으면서, 시설물의 안전은 또 안전대로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문루를 자랑하는 장안문과 팔달문의 경우 초대형의 무지개 돌문을 설치하는데 있어서도 정확한 작도와 시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텐데 이를 완벽하게 시설한 점은 과학 건축의 한 측면을 보이는 것이다.
거중기의 사용은 어떤 형태로든 화성의 건설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커다랗고 무거운 돌을 적당한 높이까지 들어올린다는 것은 건설의 발전을 의미한다.
다산이 거중기를 고안하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던 중국의 '기기도설'은 독일인 선교사 요한 테렌스의 저술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기기도설을 보고 참작하였을 뿐 전혀
다른 기계를 만들어냈다. 8개의 도르래를 사용하여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올리는가 하면, 밧줄을 물레에 감아 더욱 큰 힘을 쓰게 했던 것이다.
이는 공기의 단축이라는 과학성도 중요하지만 작업자의 안전도에서도 뛰어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기존의 수레는 바퀴가 커서 짐을 싣거나 내리는데 힘이 많이 들었고 열악한 도로 사정에도 맞지 않아서 작고 튼튼한 바퀴를 가진 유형거를 개발,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이도록 했다. 녹로나 활차 등의 개발도 화성 성역의 공기를 단축하는데 한 몫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을 사용한 예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제 25대왕인 무녕왕릉이 벽돌로 축조되었고, 무녕왕릉 앞의 6호분 또한 벽돌 무덤이다. 통일신라시대 많이 쌓여진 전탑에서도 벽돌의 사용이 유구함을 알겠다.
그러나 벽돌을 생산하고 시공하는데 있어 적지않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된다. 벽돌을 구워내기에 좋은 흙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벽돌 가마의 설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접착제의 개발도 어려운 일이어서 오랜 기간 동안 자주 쓰이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북학파 실학자들이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드나들면서 중국의 주택에 벽돌이 많이 쓰인 것을 보고 오게 되고 연구를 거듭한다.
특히 연암 박지원은 자신이 현감으로 있던 안의현에다 벽돌 가마를 설치하고 직접 벽돌을 구워내 사용하기도 한다. 또 1744년 강화부 유수 김시혁은 강화성을 수축할 때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공로로 그는 한성부 판윤에 승진하기까지 하니 벽돌이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가지 않아서 수축한 강화 벽돌성이 무너져 내리게 되어 벽돌의 사용에 한계가 있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수원의 화성 건설에 이르면 벽돌을 구워내고
사용하는데 자신이 생겨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벽돌은 잘 구워 시공만 잘하게 되면 석성보다 견고하다. 석성은 적의 중화기로 공격을 당하게 되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폐단이 없지 않으나, 벽돌로 쌓은 성은 같은 파괴력에 의해 손상을 입더라도 직접적으로 충격을 받은 부위만 허물어져 내리고 보수도 용이한 장점이 있다.
그래서 화성의 건축가들은 화성의 시설물과 성벽 중 중요한 부분에는 예외 없이 벽돌을 사용했다. 이 벽돌의 부분적인 사용은 그 효능이 이백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드러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벽돌의 사용은 자재의 규격화와 대량 생산성, 그리고 성벽이나 시설물의 형태에서도 효용이 드러나서 멋들어진 곡선을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탁월하다고 하겠다.
화성의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낱낱이 기록하여 편찬한 원행을묘정리의궤가 있고, 화성의 건설이 끝난 다음 편찬한 화성성역의궤가 있다. 두 책 모두 완전하게 남아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거니와 자세한 기록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은 이제 세계가 지켜야 하는 문화유산으로 격상되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된 큰 이유는 바로 화성성역의궤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아무리 전화를 입어 성이 훼손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화성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성성역의궤가 남아 있는 한. 실제로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된 부분을 1970년대에 복원할 때, 이 화성성역의궤가 큰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화성성역의궤를 화성의 시설과 화성을 건설하기 위한 방략이나 문서들을 총망라한 책이라고 한다면,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화성에서의 행사를 어떻게 치렀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전자가 그릇과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그릇에 담긴 내용물과 그에 관한 상세를 담은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책은 화성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기록인 것이다.
즉 화성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위의 두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의 편찬은 순조1년(1801) 9월에 이루어진다. 화성 건설이 끝난 지 5년여 만의 일이다. 이 세계적인 공사 보고서의 간행에는 조선의 숨은 역량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지만, 을묘년(1795)에 있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그대로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을묘의궤는 동활자인 정리자로 인쇄했고, 화성의궤는 정리자와 목조 활자인 생생자로 간행했다. 화성을 준공한 다음 정조는 이번 공사의 시말을 분명히 하라고 한다. 국가의 재정이 많이 들어갔고, 백성의 피땀 어린 정성이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정확한 공사 보고서의 작성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화성의 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다.
당시의 조선이 지니고 있었던 탁월한 문화적 능력이 이 책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수한 책이요, 조선의 문화, 과학, 건축, 예술의 결정체다. 화성 건설의 계획에서부터 진행 상황, 그리고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물론, 그림이 필요한 경우는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도우려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하였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김 아무개가 어느 현장에서 몇 일을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 값으로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각 공종별, 현장별 구분과 참여 인원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하였는데, 특히 당시 서민들의 이름에 담겨 있는 소박한 사회성까지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예를 들면 김큰놈, 이작은놈, 지악발이 등의 이름을 金大老味, 李者斤老味, 池惡發 등으로 표기해서 마치 별명을 기록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신분제 사회에서 서민들의 위치가 어땠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각 시설물들의 건축적 특징과 시공에 관한 상세는 더욱 잘 되어 있어서 지금도 부분적인 보수를 할 때 화성성역의궤를 놓고 검토하는 것은 기본으로 되어 있다. 공사에 쓰였던 각종 기계와 기구들에 대한 원리와 제작 방법, 쓰임새 등도 빠뜨릴 수 없는 이 책의 장점이다. 기계나 기구들의 부품을 낱낱이 그려서 설명했고, 그 효과까지 알 수 있게 해놓았다. 화성의 뒤에는 이처럼 커다란 또 하나의 화성이 숨어 있다. 실오라기 하나까지도 낱낱이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주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실학 정신에 입각하여 사실을 과대 포장하거나 잘못을 은폐하려 하지 않는 편찬 의도와, 르네상스를 맞이한 조선의 문화적인 능력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엄청난 국책사업을 깨끗하게 마무리 짓고, 준공 보고서까지 완벽하게 펴낸 당시 조선의 경영 및 관리 능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화서문과 창룡문, 그리고 팔달문의 바깥쪽 돌벽에는 고운 정으로 다듬어서 판을 만들고 정성 들여 새겨놓은 글씨들이 있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석판이다. 감독은 누가 했고, 석수는 누구 등 몇 명이라고 새겼다. 화서문에 있는 실명판은 글씨가 많이 닳아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찾아봐야 겨우 보이지만 창룡문의 그것과 팔달문의 것은 잘 보인다. 특히 팔달문의 각자는 마치 어제 새긴 듯 선명하다. 장안문에도 실명판이 있었겠지만, 동란의 상처 때문인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실명판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첫째, 과거로부터 돌 일을 하는데는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새기는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돌 일이라는 것이 잘 해놓으면 견고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잘못하게 되면 사람이 크게 다칠 수 있는 것이다.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에서 남산신성을 쌓고 새긴 글을 보면 성이 삼년 안에 무너지면 책임을 지겠다는 글이 나오는데, 이런 전통들이 조선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감동이라는 직책의 이름인데, 요즘으로 치면 감리 혹은 감독이라는 뜻일 것이다. 조선에서는 커다란 공사가 벌어질 때마다 감동관을 임시로 두었는데 대개는 퇴역 관리가 맡는 것이 상례였던 듯하다.
감동의 동 자는 실오라기를 뜻하는 글자인데 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까지도 엄정히 감독하겠다는 뜻이고, 퇴역 관료가 이 일을 맡았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국가에 봉사하며 사심 없이 공사를 감독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셋째는 석수 아무개 등 몇 명이라고 새겨놓은 글인데 여기서 우리는 공역자들의 수평적 구조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틈만 있으면 수직적 구조를 생각해서 승진을 위한 암투를 끊임 없이 벌이는 지금의 속성에서 귀중한 한 글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평등할 등等.
공역 참여자의 이름과 작업 일수 등이 자세히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 절에서 짚고 나왔다. 그런데 하루가 아닌 반일의 기록까지 남겼다는 사실과 이름의 구체성은, 화성성역의궤의 간행을 위해 공사 단계에서부터 기록을 남겼다는 뜻이다.
즉, 공사를 시행하면서 각 공역소 별로 일지日誌 형태의 등록을 작성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고 그 기록들을 취합하여 의궤를 간행했으니 살아 있는 기록이 된 것이다.
화성의 건설이 논의되는 궁중 회의부터 관공서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 그리고 국왕의 지시 사항까지 수록한 것은 화성의궤가 단순히 화성에 국한된 공사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정조의 생각을 피부에 와 닿게 느낄 수 있으며, 당시 조정의 움직임과 지방의 형편까지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 술 더 떠서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하는 과정까지도 담고 있으며 의궤 간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직책까지도 알 수 있어서 조선의 자랑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다 느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화성의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관리와 경영의 능력이다.
오백 칸이 넘는 행궁을 건설하면서 전체 길이 5.7킬로미터의 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공사였다.
이런 공사를 차질 없이 완수했다는 것은 조선의 극성기에 무르녹아 있던 여러 가지의 자질들이 농축된 결과이겠고, 그 중에서 경영과 관리의 능력 또한 최대, 최고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신소재인 벽돌을 무리 없이 구워내서 탄탄하게 시공했고, 시설물들이 기능으로서만 지어진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미적 감각까지 내포하면서 지었다는 사실에서는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화성의 경영과 관리 능력은 아무래도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진경 문화와 실학의 토대 위에, 전래된 매운 손 맛과 직관에 의한 자연관, 그리고 단일 민족으로서의 유구한 경험이 최고조에 올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처음에 화성의 건설이 논의될 때 성역의 기간은 10년을 예상했었다. 기술적인 능력이야 이보다 훨씬 기간을 앞당길 수 있었겠으나, 기간을 여유 있게 잡아놓고 시공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반대 세력의 성토를 봉쇄하자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빠른 시간에 공사를 완성시켜 결집된 힘을 보여주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토성으로 축성하는 것을 의논하다가 남북변을 석성으로 하자는 논의가 잇달았고, 결국에는 성 전체를 석성으로 하되 벽돌을 구워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화성성역의 실제 기간은 34개월만에 완공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도 중간 중간의 정역 기간 약 6개월을 빼고 나면 실제 화성성역의 기간은 28개월에 불과하다. 이는 왕권 확립을 목표로 했건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목표로 했건, 혹은 수원의 건설로 얻어지는 정치적인 시너지 효과를 목표로 했건 정조와 정부의 대단한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지금의 논리로 화성성역을 한다면, 발전된 중장비와 서양의 건축 기술, 그리고 컴퓨터가 관리하는 체제에서 시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노력해도 2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는 불가능하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70년대 대대적인 화성의 복원이 이루어졌을 때의 기간이 3년 넘어 걸렸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행궁도 복원하지 않았으며, 성벽의 보수는 극히 일부분만 이루어진 점, 그리고 화성의 시설물 중 극히 일부분에 대한 보수를 했던 것을 감안하면 자명해진다.
화성 건설에서 퇴역 관료를 중용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에게는 축적된 경험이 있으며, 관리와 경영 등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생의 마지막 봉사라는 국가관이 그들에게 지배적이었을 것이므로 효과는 만점이었을 것이다. 어느 사회나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은 커다란 이익이 아닐 수 없다. 단지 경험이 많다고 해서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눈은 젊은이들의 눈보다 훨씬 높아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벽을 비롯해서 모든 시설물의 건설에는 책임자가 있었다. 기능을 가진 사람이거나 관리를 하는 사람이거나 책임자가 있었다. 이 책임자들은 한 곳의 시설 혹은 한쪽의 성벽만을 맡는 것이 아니라 공정에 따라서 한 부분을 완수하면 또 다른 부분으로 옮겨서 성역을 마무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공역의 나눔은 자연 경쟁심을 유발시킨다. 보다 빨리, 보다 잘 건설하고픈 것이 인지상정일진대, 화성의 건설이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에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경쟁이 한 몫을 했다고 보여진다.
모든 공역에는 돈이 들어간다.
화성성역 같은 국가적인 사업에는 많은 돈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분배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공사가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순조롭게 공사를 마무리할 수도 있다.
본래의 화성성역 재원은 군사가 번을 서지 않는 대가로 낸 정번전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는 우리나라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들어 있었다. 전시가 아니면 모든 군사가 번을 설 필요가 없으며, 번을 서지 않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대신 돈을 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이 돈에다 정부의 돈을 보태 화성을 건설하는 재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욕심이 작용하면 금전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화성성역의 경우를 보면 그 틈이 보이지 않는다. 현장 위주로 계산된 인건비의 지급과 자재들을 일괄 구입하여 각 현장에 나눠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관리 상의 허점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절대 군주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체하지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할 뿐이지 마음에서 우러난 사랑을 베풀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화성성역 이전부터 국가의 공역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인건비를 지불했고, 영우원의 수원부 천장으로 이사해야 하는 수원 주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으며, 화성의 건설 자체를 백성의 편에 서서 이끌어나가고자 노력했다.
이는 조선의 500여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애민 사상의 구현이랄 수 있다. 거중기 등 축성의 편의 기계들도 결국은 백성의 수고를 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랄 수 있는 것이고, 합리적인 관리 및 경영 정신도 종국에는 백성을 사랑한 정조의 마음으로 귀결된다
영우원의 수원부 천장은 정조 13년의 일이고 화성의 축성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시점은 3년이 지난 정조 16년 어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새 수원에는 구 수원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성역을 생각하지 않고 집을 지었다. 계획대로 성을 쌓자면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날 처지였다. 새 도시에 새 성을 쌓으면서 새로 이주해온 주민들을 성 밖으로 배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화성의 건축가들은 노심초사했다. 주민들을 모두 포용하자니 성이 길어져서 비용도 많이 들지만 모양도 보기에 좋지 않을 듯했다. 그들은 이 난제의 해답을 정조에게서 구하고자 했다. 정조는 역시 성군이었다. 성 밖으로 밀려날 민가들을 모두 성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성을 확장할 것을 지시했다.그리고 수원부를 관통하는 시내가 버드내이니 성벽을 세 번 구부렸다 펴서 내천川 자字에 합당하도록 하면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나면 성의 전체 모습이 버들잎 모양이 되고, 버드내의 유천柳川과도 맞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래서 화성의 평면은 나뭇잎 모양이 되었다. 정조의 말처럼 버들잎은 아니더라도 나뭇잎 모양으로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정조의 애민 정신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인건비의 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종전의 국가 사업 등 공역에서는 당연시해왔던 부역을 금지하고 인건비를 지불함으로써 정조의 애민 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정조가 즉위한 후 벌인 국가의 공역에서는 모두 인건비를 돈으로 지급했다. 첫번째 사업이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의 수축이었고, 두번째 사업이 문희묘의 신축 공사였는데 인건비를 지급했으므로 화성의 건설 계획에도 인건비의 지급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인건비를 지급하여 공역을 실행한다는 것은 우선, 국민 개개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인건비를 지급하되, 일당과 성과급을 적당히 혼용한 실학자들의 견해에 의해 진행된 화성의 건설은, 시공 기간을 단축하는데 한 몫을 했다. 또 국민 개개인의 능력 및 경쟁력은 그대로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니 조정으로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일당으로 노임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와 성과급으로 지급해야 하는 경우를 잘 가려서 시행하는 것도 관리 상의 묘책이었다.
한 예로, 석재의 조달 과정을 보면 크기에 따라 값을 따로 매겨 놓고 조달한 것은, 작업자들로 하여금 경쟁심과 목표 의식을 갖게 하여 커다란 효과를 보았다. 또한 석재를 떠내는 일과 나르는 일, 그리고 납품하는 일을 나눠서 함으로써 자재 조달의 효율을 높였다.
화성의 건설은 1794년(정조 18) 1월에 시작하여 1796년 9월 준공하게 된다.
공사가 막 시작되어 한창 본 궤도에 오를 무렵 정조는 화성의 일꾼들에게 왕실에서 특별히 제조한 제중단이라는 환약을 내려준다.(4월 28일)
어떤 증세에 먹는 특정한 약이라기보다는 몸을 보하는 성격의 약인 듯한데 이 약을 지급 받은 일꾼들은 약의 효능보다 국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한 술 더 떠서 척서단이라는 환약을 또 내려준다.(6월 25일) 이 척서단은 더위 먹은 데 먹는 약이니 무더위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척서단을 내린 지 보름 여 지나서 공사를 일시 중지시킨다.(7월 12일) 더위가 극심하니 일을 정지하고 쉬라는 하명이었다. 아무리 국왕 자신이 큰맘 먹고 벌이는 국가적 사업이라 해도 국민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마음에서였다.
또한 겨울로 접어드는 동짓달 초하루에는 다시 공사를 일시 정지 시킨다. 추위를 염려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큰 사정은 인건비를 지급할 돈이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절대 왕조 국가에서 인건비의 미 지급을 이유로 국가 사업을 중지한 것은 애민 정신의 표본이다
화성의 성벽은 구불구불하다.
어떤 이는 한국인의 큰 병폐인 마무리의 미흡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성의 건축가들이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줄 띄어놓고 반듯하게 성벽을 쌓으면 훨씬 편안하고 쉽게 공사를 마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평지에 성을 쌓더라도 성벽을 직선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연과 어울리는 성을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성을 쌓으니 마치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 절묘한 곡선이 나왔다.
더구나 구불구불한 성벽은 마치 병풍의 원리와도 같다. 일직선의 형태로는 병풍이 서 있을 수도 없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구불구불하니까 이 성벽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게 된다. 이 성벽을 바라보는 외적들의 마음으로 보면 화성은 무서운 성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네 개의 큰 문과 다섯 개의 샛문도 마찬가지다.
지세를 적절히 이용해 문들을 내었다. 그 곳에 문이 없었다면 더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위치를 골랐다. 이렇게 힘들여 건설하고 나서 그들은 그 공을 하늘로 돌렸다. 하늘에서 내려준 성이라고 겸손해 했다.
화성은 하늘에서 보면 하나의 나뭇잎이다.
전체 모습이 나뭇잎을 닮았다는 것은 앞 절에서 다루고 나왔는데, 화성 안의 대로와 골목길들은 잎맥이고, 잎을 나무에 붙어 있게 하는 잎자루까지 달려 있다. 완벽한 하나의 나뭇잎이다. 잎자루에 해당하는 부분은 산의 능선이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간 곳이다.
화성의 건축가들은 이것을 버리지 않았다. 능선을 어느 정도 끊어 놓으면 될 일을, 끊지 않고 용도를 길게 빼내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했다.
잎자루를 생각하고 시설했을 것이다. 화성의 나뭇잎은 여기서 그 절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도를 길게 빼서 맨 끝에는 화양루라는 각루를 하나 세웠다. 여름에 여기에 오르면 시원하기 그지 없다.
또 용도는 치성에 해당하기도 해서 성벽을 타고 넘나드는 적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으면서, 용도 자신에도 치성을 붙여서 스스로 보호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용도로 들어가는 문을 샛문으로 처리해서 적군 모르게 드나드는 비밀 통로로도 삼았으니, 문화의 절정기라는 것은 이런 삼중 사중의 꾀가 중첩되는 힘인 것이다
화성에는 여러 시설물들이 있다.
큰 문루가 넷 있고, 샛문이 다섯 있고, 각루와 포루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설들이 있다.
그런데 각 시설물들의 위치를 보면 모두가 절묘한 위치에 자리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적당한 거리감과 주변의 지세에 걸맞은 크기, 그리고 시설물과 시설물의 시야 확보까지. 엄밀한 계산에 기초하고 자연에 의지한 시설들이라 할 것이다.
또한 치성을 많이 돌출 시켰는데 치성의 위치와 지세와의 관계는 절묘하다 못해 경악할 지경이다. 치성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문제도 고민거리였던 듯 치성으로 그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치성 위에 망루를 세운 포루, 그리고 치성 아래 부분에 대포를 장치하고 위에는 망루 겸 포루를 세운 포루가 있어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각 시설물들이 있으면서 주변의 여건에 순응했다는 것은, 그리고 다중의 효과를 노려서 건설했다는 것은 삼차원 사차원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 비쳐진다.
<출처 소개>
위 글은 수원 화성을 소개하는 http://www.cosguide.com/culture/hawsung 에서 퍼온글입니다. 역사탐방연구회 염상균 선생님의 글(화성의 정신)의 일부분으로 위 홈페이지에 접속하시면 각종 자료 사진과 함께 수원 화성에 대한 자세하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살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