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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회에서는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마치시고 無門關에 들어가시는 분들에게 법호를 수여하는데, 법호를 받으시는 분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도 되고 하여 선도회 관례상 각자의 인생지도(과거, 현재 및 미래의 전망)를 A4용지 한장에서 한장반 이내로 제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인생지도를 법호수여시 회원 분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으로 끝났었는데, 본인의 승인 아래 게시하면 좋겠다는 법경법사님의 의견에 따라 이 코너를 신설합니다.
禪 입문기, 邁過門檻
선도회에서는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마치시고『무문관無門關』으로 들어가시는 분들에게 법호를 수여한다. 법호를 받으시는 분들은 관례상 본인의 과거, 현재 및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인생지도>라는 제목으로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금수산 영하산방에서는 예전 인생지도를 포함하면서 그 폭을 넓혀, 선객으로의 입문 소감 내지는 지금까지의 선 체험까지를 포함하는 <선禪 입문기入門記>를 카페에 올리도록 하고 있다.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투과 하면서 느꼈던 감회感懷나 혹은『무문관無門關』을 공부하면서 겪었던 선체험禪體驗 등을 선문禪門의 문지방을 넘었다고 하여 <禪입문기, 매과문함邁過門檻>에 게시하고 있는데, 문턱을 넘었으니 이제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선객禪客으로써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 공부하시라는 의미도 되겠다. 본인뿐 아니라 후학들을 위한 이정표里程標가 되었으면 하는 의미다.
지식知識의 탐구, 신비神秘의 타파
전원電元 조영준趙永俊, 제천모임 법사/전 동아제약연구소 수석연구원
(법사 권영두『생활 속의 참선수행 이야기』운주사 pp. 300~307. 박영재 엮음, 宗達 이희익老師 입적 20주기 기념『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네』 pp. 186~192. 일부 수정)
‘천국과 지옥’의 기억
사람들은 누구나 초능력이나 신비한 것에 끌린다. 필자도 마찬가지로 실버 마인드 컨트롤 강습을 받기도 하였고, 초월명상 등 명상법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고등학교 불교 반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조계사 불교학생회에 나갔을 때 이야기다. 갑자기 법문 요청을 받은 무진장(혜명)스님이 설법을 하러 자리에 앉으시더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으라고 하셨다.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필자는 답답한 마음에 “모르는 것을 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쓰윽 보시더니 냉소적으로 한마디 하셨다. “뭘 모르는 지도 몰라?” 그리고는 또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뭘 아시는데요?” 라고 말하는데, 동시에 보다 못한 선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저희는 학생이니 (중략)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지긋이 필자를 노려보시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학생들이 그런 허망한 것에 관심을 가져서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다. 다음은 그 대강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한 일본 순사가 스님을 찾아온다. “스님이 도가 높다고 하던데,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는지 한 번 말해 보시오.” 짚신을 삼고 있던 스님은 못 들은 척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스님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순사는 “날 무시하시오?” 하며 시퍼런 칼을 뽑아 스님의 목에 대고는 금방 찌를 기세로 다그쳤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 스님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순사는 “저 놈 잡아라!” 하면서 스님의 뒤를 쫒기 시작하였고, 산으로 도망치던 스님은 막다른 길에 다다라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순사는 칼을 높이 들고 “네 이놈!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아라!” 하면서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스님 왈, “이곳이 지옥이니라.” 이 말에 깜짝 놀란 순사는 칼을 내려놓으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사죄하고 절을 하니, 그때 스님 왈, “이곳이 바로 천국이니라.”
나중에 보니 이 이야기는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 선사의 일화 ^ 를 당시 상황에 맞게 바꾸어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어쨌든 처음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설법은 필자에게 강렬하게 남아, 이후에도 ‘천국과 지옥’이란 말이 나오면 언뜻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렇게 스님들이 법문을 듣곤 하였는데, 한 번은 육환장을 집고 서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법문을 하던 스님의 단호한 모습과 구도자의 카리스마에 경외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속세를 떠나 깊은 산중에 홀로 수행하는 삶, 모든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그리고 무엇이든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도인의 풍모를 향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 어느 날 선사에게 한 무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지옥과 극락은 정말 있는 것입니까?” 선사는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인가?” “저는 무사입니다.” 선사는 무사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무사라고? 어느 주군主君이 자네를 데리고 있나? 내가 보기엔 꼭 거지대장 같은데 말이야.” 무사는 분노가 치밀었다. 무사로서 모욕을 당하는 것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사는 벌떡 일어나 칼을 빼들고 선사의 목을 겨누었다. 선사의 목이 곧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찰나였다. 그러나 선사는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당신은 칼을 갖고 있지. 그래, 그 칼이 내 목을 벨만큼 예리한지 어디 한번 시험 해보게.” 칼을 빼들긴 했으나 선사의 초연함에 무사는 칼을 거두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조금 전에 지옥의 문이 열렸었다.” 이 말에 무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무사는 무언가 깨달음이 있어 칼을 던지고 선사 앞에 꿇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이때 선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는 극락의 문이 열렸다.”
학창 시절
대학은 필자에게 그저 젊음을 만끽하던 해방구였던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문학과 영화, 음악 등에 빠져 들었다. 문학 동아리 모임에 나가 작가를 만나고, 일요일에는 모든 영화관과 극장을 순례하였으며, 작가가 되겠다고 밤새워 시, 소설을 썼다. 또 대학 방송국에 들어가서는 전공공부는 제쳐두고 방송원고와 씨름하였으며, 방송극을 기획 공연하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게 된 동기도 상당부분 학문을 추구한다는데 있었다기보다는 좋아하던 영화나 음악의 본고장으로 간다는 데 의미가 더 컸었고, 그런 문화를 일구어 낸 사회는 어떨까라는 호기심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로 제작되었던 안정효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바로 그것이었다. ^
그때는 최루탄 연기 속을 뛰어다니며 데모를 하고, 학교는 몇 달씩 휴교를 반복하였으며,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가 옥상에서 몸을 던지던 혼란한 시기였다.^^ 필자는 탄압받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궁금증과 어쭙잖은 지성인으로써의 사명감으로, 졸업을 늦추면서까지 전공과는 무관한 사회학, 심리학, 국문학, 영화학 관련 과목들을 수강하였다. 그래서 화학을 전공하고 물리를 부전공하였지만 사회학과를 지원하게 되었고, 아이오와 대학 사회학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생으로 부딪힌 미국은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에 있어서는 필자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는 상상 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졌다. 필자가 자라온 사회와는 그 근본부터가 판이하게 달랐고, 학문이란 필자가 꿈꾸던 지식인으로서의 환상이 아니고 그냥 현실이었다. 거기에는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회학을 공부 하러 온 선배들이 여럿 있었지만, 경제적인 곤란과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 때 가졌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은, 통계와 씨름하는 수리사회학이 대세인 미국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다시 화학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공계인 화학과는 장학금도 많아 쉽게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 할 수 있었다.
^ 1994년 제작된 정지영 감독 작품. 고전영화 <황야의 7인>, <초원의 빛>, <미드나잇 카우보이> 등에 열광했던 교복세대 영화광들이 영화를 통해 겪는 에피소드와 이들이 자라 감독이 되고 시나리오작가가 된다는 이야기. 독고영재, 최민수, 김정현, 홍경인, 신혜수 출연. (제작노트에서 인용)
^^ 서강대 무역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 열사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며칠 후인 5월30일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투신하였다. 필자와는 한 동아리에서 잠시 같이 활동하였다. ‘5분 스피치’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김의기 열사 순서가 되자, 연단에 나가더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라고 하고 5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그냥 내려 왔다.
유학 생활
필자는 당시 새롭게 각광 받던 레이저에 대한 연구로 아이오와 대학에서 물리화학 석사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시절 열악했던 컴퓨터만 보다 마주친 진보된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 미주리 대학에서「컴퓨터 모델링을 통한 카오스적 분자운동」연구로 이론물리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갈 곳도 있었고 이론분야는 유럽이 강세여서 유럽으로 박사후 과정을 가고 싶었으나, 박사과정 중에 있던 아내와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시간에 있는 웨인 주립대를 선택, 그곳에서 생물학 관련 분자모델링 연구를 하게 되었다.
아내의 졸업을 기다리며 5년을 보내고, 필자는 한 제약회사 연구소 초청으로 신약 개발팀에 합류하게 되어 94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한국은 내 연구 자료를 보내려고 이메일 주소를 물었더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컴퓨터 분야가 열악한 실정이었고, 연구를 위한 인프라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국내 신약 1호를 꿈꾸며 개발 중이던 항생 물질에 대한 컴퓨터 모델링과 신물질에 대한 해외 제약회사 투자유치 관련 업무, 그리고 연구소 컴퓨터 및 인터넷 환경 조성에 관한 일들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유학중일 때 한국에서는『단丹』이란 소설이 한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필자는 그 책을 일고 학창시절 가졌던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여 단학이나 선도仙道수련 관련 책들을 공수空輸해와 독자적으로 수련을 하였다. 지도자 없이 시작한 그 수련이 길게 가지는 못했지만, 선도수련이 주는 효과는 충분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이란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구도의 길을 가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연구원으로 있던 디트로이트에는 무문사라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에 나가 예불도 보고 참선수행도 하였다.
당시 그곳을 방문한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스님이 붓글씨를 써주시겠다고 하시며, “어떤 글을 원하느냐?”는 물음에 서슴없이 “이 생에 견성 성불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스님은 반색을 하며 나에게 ‘차생성불此生成佛’이란 휘호를 써주셨고, 지금도 걸어두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때는 거기 도반들과 윤청광 극본의「고승열전」이나 조계사 수선회修禪會에서 나온 숭산(崇山, 1927~2004), 혜암(惠菴, 1885~1985), 근일勤日 스님 등 스님들의 법문 녹음테이프를 길잡이 삼아 참선 수행을 하였다.
답사 여행
미국에서 연구에만 파묻혀 있던 필자에게 한국은 마냥 넓고 신기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부터 시작된 필자의 답사여행은 15권에 달하는『답사여행의 길잡이』를 모두 다 섭렵하였고, 이와 관련된 민속, 지리 등 책자를 들고 우리 땅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문화유산을 찾아 전국을 누빈 결과로 그때 까지는 생소하였던「폐사지 답사기」를 의학 잡지에 연재하기도 하였고, 항상 마음에 그리던『길 없는 길』에 등장하는 사찰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절과 암자들을 둘러보았으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성리학과는 달리 천대 받던 민중의 학문 명리학도 체계적으로 배웠고,^ 그동안 신비하게만 느껴지던 풍수지리를 강습회와 답사모임을 쫓아다니며 발로 뛰며 독파하였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 끈이 중국역사에 닿게 되는데, 이는 또 중국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통해 세계로 연결된다. 고구려 답사를 위해 중국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후로, 우리 문화유산만이 우수하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여러 나라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을 다시 가게 되었고, 몽골로 인도로 일본으로 동남아로 문명의 조각들을 모으고 재구성하며 각 나라 문화와 문명교류에 대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 조용헌 교수는 그의 책에서 명리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풀이하였다. 태극도에서 파생한 두 아들이 성리학과 명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성리학은 인간 성품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고 명리학은 사람의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나 같은 부모 밑의 두 아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성리학은 체제를 유지하는 학문이 되었고, 명리학은 체제에 저항하는 반체제의 술법이 되었다. 성리학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양지의 역사가 되었고 명리학은 달빛의 조명을 받아 음지의 잡술이 되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한의학은 영주권을 딴 셈이고, 풍수는 이제 겨우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사주 명리학은 불법체류자이다. 물론, 실제로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려 신뢰도에 문제가 많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함량미달이 양산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간과 하늘, 우주와의 관계를 해석한 동아시아 문명 5천 년의 성찰인 사주명리학이 이토록 변방에 머물면서 '잡술'로나 판단되는 현실은 애석하기 그지없다. 사주명리학의 당당한 복권! 그것은 우리 문화를 바로 찾는 길이며, 한자문화권에 속한 동아시아 문명의 끊어지지 않는 맥을 잇는 작업인 셈이다. (조용헌, 우리 문화 바로 찾기 1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 고려 초 태조 왕건 능과 고려 후기 공민왕 능의 묘지 풍수가 서로 다른데,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자생 풍수가 중국 풍수의 유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 고려 때 과거에 쓰였던 풍수 교과서가 사라지고, 우리와 지형이 다른 중국의 형기론(산악지대에서 발달)과 이기론(평야지대에서 발달) 계통의 풍수 책들이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된다. 이후 중국 풍수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오면 조상을 좋은 자리에 묻어 기복을 바라는 묘지풍수만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풍수는 시대를 따라 변하는데, 간단히 말해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드러나는 재미있는 민속학이며 인문학일 뿐이다.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요즘 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답사를 다녀보면 좋은 느낌을 받는 잘 가꾸어진 묘들을 보는데, 왕릉처럼 묘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 같다. 즉 땅의 지기를 받아서 부와 명예, 권력을 얻었다기보다는 부와 권력이 있었기에 좋다고 하는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것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묘지 자체가 자극이 되어 후손을 독려, 그 지위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직접적인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 현대는 서양까지 가세하여 다양한 풍수가 소개되고 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데는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 않는 가 보다. 최창조 교수가 공주 유구, 소위 명당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 갔을 때 일화다. 거기 사시는 노인 분에게 “명당에 사시니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노인은 “돈이 명당이지요! 돈 있으면 도시에 나가 편히 살지 여기 시골에 살겠습니까?”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에 자극 받아 풍수 선풍을 일으킨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풍수계의 이단아가 된다. 최창조 교수는 그 때 이후 새로운 풍수사상을 재정리하여 <도시풍수>라고 이름 하였다.
선도회와의 만남
미국에서 선도仙道 수련과 참선수행을 했던 필자에게 한국은 길거리에서도 도를 만나는 도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체계적인 호흡 수련을 위해 국선도를 시작하여 지금도 매일 수련을 하고 있고, 연구소에 온 조선족으로부터 법륜공法輪功^을 배워 연수원에서 신입사원을 지도하기도 하였으며, 선무도禪武道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골굴사骨窟寺에도 가서 수련하는 등 수행 단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참선수행을 체계적으로 하기위해서 조계사 수선회에도 가 보았다. 그러던 차, 필자에게는 대학 동문이기도 한 박영재 교수님의 『두문을 동시에 투과하다』라는 책을 아내를 통해 전해 받고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무릎을 쳤다.
그때까지 모든 수련은 수행과는 거리가 있는 사고파는 상품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스님들은 너무 권위적이고 고답적인 데다, 엄격해 보이는 예절과 불교의식에만 치중하는 것 같아 내켜하지 않았었는데, 선도회는 절차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간화선 수행에만 열중할 수 있는 재가선 단체였다.^^ 일정한 시간에 방문하여 그 동안 참구한 화두경계를 점검 받는 재가자에게는 안성맞춤의 수행단체였다. 지방에 있던 나는 화요일 새벽 두 시간 정도 차를 달려 서강대로 가 입실을 시작하였고, 주말 부부였던 나는 방해 받지 않고 하루 서너 시간 참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달여로 끝나게 되는데, 박영재 교수님이 교환 교수로 독일에 가시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법사님께 점검 받을 수도 있었으나 인연이 그것뿐이었는지, 무려 5년 동안 입실을 하지 못하였고, 국선도를 수련하면서 입실점검 없이 화두를 들곤 하였다. 항상 마음속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의 경계를 참구하던 어느 날, 이메일을 통해 점검 받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바로 박영재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내 ‘이메일을 통한 점검’을 문의하였다.
그런데 박영재 교수님은 이미 인터넷을 통한 입실지도를 하고 계셨고, 필자도 2003년부터 이메일을 통한 전자입실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을 더 참구하고서야 선도회 두 번째 화두인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을 타파 할 수 있었다. 그 화두를 풀고는 “겨우 이거였나!” 하며 허탈해 하였지만, 간화선 수행이 어떤 것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무심히 그 화두를 ‘염念’하는 것을 보면 필자에게는 항상 같이하는 그림자 같은 화두이다.
^ 법륜공法輪功(法轮功) 또는 법륜대법法輪大法 (法轮大法)이라고 부르며 불가기공의 한 종류이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겸비하고, 선사 문화를 기초로 하여 인간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수련을 하는 심신수련법이다. 우주의 최고 특성인 진眞, 선善, 인忍을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파룬궁은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데, 창시자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출신의 이홍지(李洪志, 리훙즈)이다.
^^ 선도회는 2009년 8월 14일 사단법인이 되면서,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여 깊은 통찰 체험을 바탕으로 나눔 실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본 원고에서는 편의상 선도회라고 칭한다.
선도회 인가
도道라고 하면 뜻 모를 권위와 엄격한 의식 그리고 법이니 진리니 하는 형이상학적 중압감이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그런 도에 대한 신비감, 법에 대한 권위를 타파하고 선의 일상화를 실현하신 분이 박영재 법사님이시다. 조선시대를 겪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진 임제종 간화선법을, 일제 강점기 일본 화산대의華山大義 선사로부터 이어 받으시고 씨를 뿌리신 분이 종달 이희익 노사님이시라면, 그 법을 현대식으로 체계화하고 널리 펴신 분이 법경 법사님이시다.
화려함이나 과시를 멀리하고, 묵묵히 맡으신 일만을 무심히 하시는 그를 통해, 필자는 구도자에 대한, 도인에 대한 필자의 선입견을 많이 수정하였다. 이 시대를 사는 미래의 수행자의 모습이랄까? 이는 선도회 무문관 과정을 마친 이에게 주는 법사 인가장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무문관을 끝내시고 꾸준히 정진해 오셨기에 선도회 법사로써 후학들의 입실 지도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필자는 법사님의 따뜻한 지도를 받으며 전자입실을 시작한지 5년, 2007년 선도회 간화선수행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나의 법사호 전원電元은 전자입실로 무문관 과정을 통과한 첫 번째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최진규가 쓴 『우리 비경 답사기』에는 경북 상주 용유담 근처 너럭바위에 쓰여 있는 동천洞天이라는 글씨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개운당 스님이라는 분이 주먹으로 썼다는 이 글씨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도 수련을 통해 주먹으로 글씨를 써봐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지금 없다. 이 세상 누구도 쓸 수 없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어릴 때부터 가졌던 신비에 대한 동경 또한 더불어 폐기하였다. 신비는 단지 모른다는 것이고, 알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좋은 취지로 시작된 인생지도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도 될 것이며, 앞으로 살아갈 이상을 현재에서 밝히는 일이 되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