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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래 목사님 2010 1월 24 디모데후서 말씀 - 교회 하락에 대한 대항과 예방1.
1. 교회 하락에 대한 예방대책
디모데후서는 A.D 67년경 바울이 두 번째 감옥에 갇혀서 순교하기 직전에 쓰여진 서신으로 주제는 교회 하락에 대한 대항과 예방이다. 사도시대가 지나면서 교회는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질적으로는 저하되었다.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인지, 희랍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인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바울은 이것을 미리 예견하고 디모데에게 당부를 했던 것이다.
교회가 하락했다는 것은 예수 시대와 사도 시대에 비해서 교회가 질이 떨어지고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극도로 변질된 것이 국교화된 것이다.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로마의 정치와 유대 종교에 의해서 버림받았던 예수가 국교화됨으로써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영광을 받은 것 같았지만 내용은 질이 떨어져 버려서 예수의 정신, 그 영은 사라지고 종교적인 형태와 조직과 교리만 강화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락한 것을 어떻게 바로 잡고 지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교회를 올바로 지키려면 올바른 교리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희랍 사람들은 지식적이어서 지식이 잘못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하든지 교리를 틀림없이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그런 것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예수님을 보고 왜 하나님이라고 하느냐?’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실 때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람인 네가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하느냐?”며 분노했지만 제자들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데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는 데가 없다. 그런데 사도시대가 지나고 희랍 세계에 들어오면서 그런 데 대해서 의문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관계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으면 아버지는 어디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연구하고 연구해서 나온 것이 소위 삼위일체론인 것이다. 어떤 분이 양태론 명태론이라는 말을 했는데 일반 신자들은 그런 데 대해서 관심도 없지만 신학적으로는 예민한 문제여서 양태론자라 해서 이단으로 정죄했던 역사가 있다. 시간이 나면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런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데는 도움이 안된다. 삼위일체론을 믿는다고 더 구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양태론을 믿는다고 구원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그것을 가지고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며 싸우는 것이다.
1.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붙잡음으로
교회 하락에 대한 대책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다. 교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하락하지 않을 수 있다. 생명의 약속, 이것이 중요하다. 교회는 생명이지 조직이 아니다. 조직은 이론적으로 만든 것이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교회는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은혜로 된 것이다.
교회를 지키려면 교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고 근원이 있다. 그러므로 그 근원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교리를 붙잡으면 안된다.
교리는 원인도 아니고 근원도 아니다. 단지 생겨난 어떤 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어항에서 놀고 있는 금붕어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런데 그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가를 연구해서 이론적으로 기술한 것이 금붕어의 교리다. 그러나 그 교리로 다시 금붕어를 만들 수는 없다.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은 이론을 가지고 다시 만들 수 있다. 학자들이 어떤 이론을 만들면 그 이론을 재구성해서 물건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생명은 만들 수 없다. 과학자들은 생명을 규명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게놈지도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해도 그것은 지식에 불과하지 그것으로 다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관계를 갖지 않고는 사람이 만들어질 방법이 없다.
이론과 생명은 다르다. 이론은 이론대로의 길이 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그에 대한 이론이 먼저 있어야 한다. 과학적인 세계는 이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이론으로 정립해 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을 알고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론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삼위일체론을 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없다. 결국은 공리공론인 것이다. 단지 머리를 만족케 하려고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머리가 복잡하니까 그것을 정리해 보려고 만든 것이 교리다. 교리로는 교회를 붙잡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정통성으로, 신학으로 교회를 붙잡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단마다 신학이 있는 것이다. 신학이 있어야 교단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
생명은 일차적 생명과 이차적 생명,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일차적 생명은 동물적 생명이다. 동물적 생명은 정신 기능을 포함하는 기계적 생명이다. 기계적인 생명이기 때문에 내 의지와 관계없이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시간이 되면 졸린 것이다. 아무리 내 의지로 배가 고프지 않으려 해도 안되고 졸지 않으려고 해도 안된다. 운전을 하다가 졸면 사고가 날 줄 알면서도 왜 조는가? 기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일차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일차적 생명은 교회와 간접적으로는 관계가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다.
이차적 생명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생명보다 더 깊은 심성적 생명이다. 심성적 생명은 양심, 이성 등을 포함하는 생명이다. 정신과 마음을 같게 볼 수 없는 것은 정신은 기계적이지만 마음은 기계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신비하게 생각하지만 이것도 역시 창조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된 생명과 다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로 얻어진 인격적 생명이다. 사람에게 원래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일차적 생명과 이차적 생명으로 만들어졌다. 일차적 생명보다 이차적 생명은 폭이 넓고 융통성이 많다. 그렇지만 영원한 생명은 아니다. 마음과 사상과 이성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다. 인격적 생명은 부활로 얻어진 생명이다. 죽고 다시 산 거기서 어떤 삶이 있는데 그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구속함을 받았다. 원래의 위치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사람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담 이후에 사람은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자리에 있지 않았다. 육신은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의 인격, 사람의 위치는 그대로 있지 않았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엉뚱한 데로 빗나가 버렸던 것이다. 억류되었던 상태는 원래 이스라엘의 위치가 아니다. 그 위치를 제자리로, 하나님의 백성의 위치로 바꿔 놓은 것이 구속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통해서 바로의 노예였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들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고 원래 하나님을 섬기도록 예정된 백성인데 중간에 사연을 인해서 바로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 상태에서 구출해 낸 것이 유월절이다. 그들은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양고기를 먹고 그 다음날 그곳을 탈출해 나왔다. 그래서 그 피로 구속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하셨다. 문설주에 피가 발려져 있으면 죽음이 넘어갔던 것이다. 그 방 안에 있던 사람은 유월절을 통해서 광야로 나왔다. 광야로 나온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성막을 건축했다. 바로를 위해서 국고성을 건축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전을 건축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성막의 실재는 생명나무다. 에덴동산에서는 구속의 과정이 필요 없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저절로 하나님의 동산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2:16-17).” 하시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동산을 지키게 하셨다. 동산은 성막이고 성전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지키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동산을 지키지 못하고 추방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모형으로서 성막을 지시하고 건축하게 하셨다. 이 성막이 왕국시대에는 성전이 되었고 예수 시대에는 예수님 자신이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이고(요1:14),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성막이 되신 것이다. 이제는 예수라는 한 인격이 성막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교회가 성막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 창세기에 나왔던 에덴동산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거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하나님이 거하시는 동산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의 인격의 확대다. 오늘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사실은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생명나무로 묘사했는데 이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우리는 비정상적인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멀쩡한 사람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지만 병이 들면 병원에 가야 한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병원에서 지시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하고 먹으라는 것은 먹어야 한다. 집에 있을 때는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옷을 입었는데 병원에 가니까 옷도 환자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음식도 병원에서 주는 것을 먹어야 하며 아픈 주사도 맞아야 한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상태다. 몸이 아프니까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있지만 누구나 병원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고 빨리 병원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생명나무의 실재 안에 없었기 때문에 구속이라는 병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방황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게 된 것이 방황이다. 자기 문제로 방황하는 사람도 있고 사업을 하다가 방황하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표현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소리를 확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마이크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다른 것이 될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오히려 여러 가지 피해가 생기게 된다. 무엇이든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역기능이 나타난다. 자기 위치에 있는 개는 주인에게 유용하지만 자기 위치를 떠난 개는 사람을 문다. 만물은 다 정해진 위치가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역기능이 나타난다. 이것이 방황이다. 전쟁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원망하고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이다. 사람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역기능이 발생되어 공연히 미워하고 싸우기도 하는 것이다. 정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좌충우돌하는 것이다.
사람이 언제 정상 기능을 발휘하는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때가 정상 기능을 발휘하는 때다. 그때 사람은 안정된다. 누가 자기를 때려도 ‘몰라서 그렇구나.’라고 하게 된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도를 통해서나 수양을 해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분은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을 하셨던 것이다. 자기 위치에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자기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지만 자기 위치가 불안하면 남을 괴롭게 한다. 회사에서도 자기 위치가 확고한 사람은 남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자기 위치가 불안한 사람은 어찌하든지 남을 긁으려고 한다. 왜 인류 역사가 이렇게 복잡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람이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 결여되어서다.
세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들은 어떠한가? 왜 싸우는가? 잡을 것도 없는데 서로 자기가 잡으려고 싸우는 것이다. 교회에서 잡아봤자 무엇이 되겠는가? 장로나 목사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데도 자기 위치가 불안정하니까 서로 권력을 더 잡아 보려고 싸우는 것이다. 자기 위치가 확고한 사람은 장로를 하라고 해도 힘들고 귀찮아서 안하려고 하지만 자기 위치가 불안한 사람은 돈을 들여서라도 표를 얻으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위치가 확정되어 있으면 안정이 된다. 교회도 영원한 생명으로 확정된 교회는 안정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무엇이 부럽겠으며 무엇을 시기할 일이 있겠는가! 아무 것도 필요없어진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보면 ‘몰라서 저렇구나. 기다려 봐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교회가 하락하는 것을 붙잡으려면, 교회를 바로 하려면 교리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며 정치도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한다.
잘못했다고 잡아다 놓고 징계를 하면 교회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중세에는 종교재판을 열어서 사형언도를 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처형했다. 사람을 쇠기둥에 매달아 놓고 불을 지르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지옥에 가라.”고 했던 것이다. 신성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사람을 죽이면서 써먹었을 정도로 완악해졌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폭군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인 것보다 오히려 기독교가 이교도를 죽인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왜 기독교가 그렇게 되었을까? 영원한 생명은 없고 교리와 제도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점에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안정되려면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되지 든든한 교리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교리를 주장하는 곳일수록 보수적이다. 보수주의라는 말은 교리주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보수적일수록 싸움이 많다. 자유주의적인 교회는 싸움이 별로 없지만 더 보수적이고 더 교리적이고 더 제도적일수록 더 싸우고 더 갈라졌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왜 그런가? 교회는 생명이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방 전에 일제는 모든 교파를 무시하고 조선기독교 하나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어 교파가 갈라지면서 ‘대한’이라는 말이 앞에 붙게 되었다. 조선기독교라는 것에서 풀려나왔기 때문에 대한예수교나 대한기독교 같은 말이 나왔다. 필요 없는 이름인데 ‘대한’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두 곳으로 갈라졌다. 기독교 장로교와 예수교 장로교다. 기독교 장로교는 지금까지도 하나밖에 없지만 예수교 장로교는 또 둘로 갈라졌고 그 중 하나는 그대로 있는데 더 보주적인 교파는 지금 수십 개로 갈라졌고 계속 갈라질 것이다. 교리적일수록 단합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리적일수록 더 폐쇠적이고 더 갈라진다. 교리로 묶어 놓으면 안전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묶어놓을수록 더욱 갈라진다. 바늘 끝만큼만 틀려도 안되니까 “너는 이단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지키는 길은 교리에 있지 않다. 제도에도 있지 않다. 영원한 생명에 있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무슨 교리를 알아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딤후1:1).
2.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붙잡음으로
교회 하락에 대한 대책 첫 번째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붙잡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도 많고 기도를 하는 사람도 많다. 요즘은 성경공부가 유행처럼 되어서 각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시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모르고 성경을 보는 것은 마치 한라산 속에 들어가서 한라산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남의 말이 아니라 내 말이다. 내가 그렇게 했던 것이다. 신학을 공부했고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10년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지 몰랐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내가 멍청해서였던가? 그렇지 않다. 나는 천재도 아니지만 아주 멍청한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모르고 성경을 읽었으며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성경을 배웠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불경에 비하면 얼마 안되지만 성경 신구약을 합하면 굉장히 많은데 이 안에는 별의별 말이 다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며 이렇게 보는 사람은 이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 보는 사람은 저렇게 볼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문서비평으로 보면 성경은 신성한 책이 아니라 이 문서 저 문서를 갖다 붙인 책인 것이다. 그렇게 연구하다 보면 창세기 1장을 가지고 일년 내내 연구해도 모자란다. 창세기를 한 사람이 쓴 것 같지만 문서상으로 비평을 해 보면 창세기 1장과 2장은 두 가지 상이한 고문서가 짜집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성경을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알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왜 교회가 있어야 하는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참 교회인지 알려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올바른 교리가 있어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서 빗나가 버리면 소용이 없다. 마이크를 금으로 엄청나게 좋게 만들었어도 소리가 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옛날에는 금으로 만든 로렉스 금장 시계가 결혼 예물로 수천만 원씩에 팔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기계식이었다. 지금은 전자 시계가 전세계를 통일했다. 기계식 시계는 아무리 좋아도 전자식 시계를 따라올 수 없다. 전자식이라야 시계가 정확하다. 그런데 왜 비싼 시계가 있는가? 그것은 껍데기를 비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천만 원짜리 시계라 해서 시간이 더 정확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시계를 보석으로, 금으로 만들어 놓았어도 시계는 시간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비싸도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는 소용이 없다. 근본 목적을 모르고 시계를 차고 다니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세계적으로 가장 시간이 잘 맞는 전자식 세이코 시계를 차고 있다. 기계식도 세이코가 정확했는데 전자식 시계는 세이코에서 처음 개발했다. 그래서 나는 비싸지는 않지만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 세이코 시계를 차고 있다.
하나님의 근본 목적과 계획을 붙잡아야 한다. 이것을 붙잡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산삼을 캐는 심마니는 산삼을 찾아야 되지 그 큰 숲속에서 이 나무도 좋아 보이고 저 나무도 좋아 보이면 산삼을 캘 수 없다. 심마니는 오로지 산산 잎만 찾아야 하는 것이다. 나무를 하려면 마른 가지만 보여야 하는데 나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려고 보니까 이 가지도 좋게 보이고 저 가지도 좋게 보였다. 다른 사람은 간단하게 한 짐을 하는데 나는 살아 있는 가지만 보이니까 나무를 할 수 없었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면 엉뚱한 것만 찾게 된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주셨는가? 사람 되라고 주신 것이다. 간단하다. 아버지의 모든 말씀은 사람 되라는 말씀이다. 이런 말도 있고 저런 말도 있고 욕도 있지만 사람답게 되라고 하는 말씀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들을 때 무슨 말을 들어도 그것이 자기를 사랑해서 사람답게 되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들으면 간단하다. 그러면 다른 것은 다 없어지고 사람 되는 것만 남는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부모가 화를 내고 욕을 하는지 모르면 아버지의 마음은 어디로 가 버리고 그것만 남는다. 우리 중에 어떤 형제는 그런 일로 정신병을 앓았다. 열일곱 살에 아들을 낳은 것이 창피했던지, 아니면 할아버지도 계시고 큰아버지도 계신데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던지 밭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에게 “이 자식, 다시는 나보고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한번 더 아버지라고 부르면 죽여버리겠다.”고 했던 것인데 그 말이 계속 박혀 있다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정신병이 되었던 것이다. 그 형제는 그 말을 진짜로 듣고 ‘이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도 그렇다. 자손만대에 저주를 내리겠다는 말씀이 있지만 무슨 목적으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면 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다스리고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함축해서 말하면 ‘사람 되는 것’, ‘사람노릇 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 되게 하려고 쓴 말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해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나. 그리스도와 하나 됨
그러나 사람은 타락했다. 그래서 나온 두 번째 방법이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넣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우리를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포함시켜서 그분과 하나 되게 하는 묘한 방법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보고 이것을 발견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죽음 속에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집어 넣으셨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인류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 포함시키신 것은 그분의 부활에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인류를 다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죽고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고 다시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대표자인 한 사람의 죽음 안에 모든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의 부활 안에 모든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다. 주와 함께 못박혔으니,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다. 로마서 5장에는 ‘함께’, ‘연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하려면 예수 안에 먼저 참여해야 한다. 예수 안에 참여되면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목적과 계획은 모든 인류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거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없으면 예수는 증거될 수 없다.
사도들이 없었으면 예수는 증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거슬리는 말을 해서 종교재판을 받고 로마의 사형제도에 의해서 사형당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 사람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이 사람의 죽음은 온 인류를 대표한 죽음이다.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온 인류의 새 생명을 위한 것이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로마 역사가가 기록한대로 로마의 형법에 의해서 사형당한 사람으로 끝났을 것이다. 로마 역사에는 ‘빌라도 시절에 예수라는 사람이 처형되었다.’고 한 줄만 기록되어 있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도 단 한 줄의 기록만이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탁월한 제자들이 그들의 체험 속에서 예수를 다시 살려내서 오늘 우리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예수를 알 수 없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은 것을 가지고 이렇게 알겠는가? 사람이 죽은 것을 아무리 보아도 모른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보고 요한이 보았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증거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은 에덴동산에 한 번 있었고 그것이 타락으로 인해서 실패하자 두 번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 회복하신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예시해 놓은 것이 유대인들의 출애굽이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 안에서 회복되었는가?
1) 예수는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음
예수는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였다. ‘독생자’라는 말은 한자로는 독생자(獨生子)이기도 하고 독생자(獨生者)이기도 한데 독생하신 분, 하나님에게서 바로 그대로 나온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유일하게 나온 아들(Only begotten Son)이다.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분이다. 그는 분명히 사람인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그를 볼 때 ‘하나님이 사람 속에 자신의 생명과 성품을 드러내면 저렇게 나타나겠구나.’라고 보였던 것이다.
골로새서 2장 9절에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하였다.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신성이 충만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인 이유다.
교회가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지 않는다면 예수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증거하겠는가? 바울이 아무리 그렇게 말했어도 바울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예수가 그런 분이라는 것이 증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를 보았겠는가? 바울을 보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지 바울이 없으면 알 수 없다. 바울이 없는데, 그런 사람이 없는데 책에서 보고 알겠는가?
사과를 모르는 사람에게 산사과를 놓고 대구 사과를 설명하면 ‘이것은 작고 저것은 크겠구나.’라고 알겠지만 아무것도 없이 사과를 설명하면 아무리 설명해도 알 수 없다. 배를 보여 주면서 사과를 설명하면 아무리 잘 설명해도 듣는 사람은 배를 듣는다. 배에 대한 개념밖에 없는데 배를 보여주면서 사과를 설명한다고 알아듣겠는가? 불가능하다. 고구마를 갖다 놓고 사과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과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그 사람은 고구마를 사과라고 알아듣는다. 우리가 무어라고 설명하든지 사람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를 보고 안다. 우리를 보고 예수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증거다. 그래서 우리의 책임이 중요한 것이다.
2) 우리에게도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있음
우리에게도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나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것이나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체현(증거)이다. 하나님이 몸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다. 예수는 하나님의 체현이고 우리는 예수의 증거다. 증거와 체현과 실재는 하나다.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너무나 신성하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목적만큼 신성하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럽고 축복된 약속은 없다. 원숭이과에 불과한 이 육신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는 약속보다 더 아름다운 약속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 있는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백성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받은 약속은 지금 우리가 볼 때는 별 것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을 약속받았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이 부럽겠는가! 이보다 귀중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이 어디 있는가! 이런 약속을 받고도 다른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약속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창세전에 계획되었음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신의 성품에 참여해서 그분을 대신 하는 것이다.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생명은 남이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생명은 내 아들만 나를 대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생명의 일이다. 조직이나 제도나 교리로 할 수 없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창세 전에 계획되었다. 창세기 1장 1절 이전에 계획된 것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들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이고 사람을 지은 것도 바로 이 목적 때문이다. 사람을 지으신 이유를 가장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이것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다.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두신 목적이고 약속이다.
나는 이 탁자를 주문할 때 이런 형상을 내 속에 가지고 주문했고 목수는 이 탁자를 만들 때 이것을 계획하고 만들었다. 성구사에도 가 보았고 여러 군데 가 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이런 탁자가 없었다. 성구사에 있는 탁자는 서서 설교를 해야 되는 것이라서 우리에게 맞지 않았다. 삼십여 명이 앉아 있는 데서 거창한 강대상을 놓으려니 깨 벗고 돈 한 닢 찬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모양의 탁자를 짜려고 목공소를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려 보였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못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 목공소에서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만든 것이 이 탁자다. 성구사에서 파는 강대상처럼 거창하지 않으면서 편안하다. 앞쪽에 십자가도 없었는데 어떤 중학교 학생이 와 보고서 “그 교회에는 십자가도 없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붙여 놓았다. 나는 한 시간 내내 십자가를 말했는데도 나가면서 십자가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자살을 해서 죽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답답한 학생이었으니까 자살을 했을 것이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창세 전부터 있던 것이다.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요청해서 된 것도 아니다. ‘창세 전’이라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나 의지나 생각과 관계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나타났음(딤후1:10)
디모데후서 1장 9-10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하였다. 창세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던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확실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 이전에는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예수를 보니까 창세기 1장 26절에 있는 그림이 이 사람이라고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쓴 것이다. 이 배경은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이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고 한 배경도 창세기 1장 26-27절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창세기 1장 26-27절의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이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셨겠는가! 창세기 1장에서 계획했는데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폭군만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만유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왕이나 군주가 아니라 청지기다.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만물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할 자로 지어진 것이다. 집사는 집안 식구들에게 양식과 쓸 것을 분배하는 사람이다.
로마서 8장 19절에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 하였다. 피조물들도 자기들이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니까 소나 개나 닭이 받아야 할 것도 있을 것 같은데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해석이다.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라고 했는데 확대해서 생각해 보니 닭도 고대하고 있고 소나 개도 고대하고 있으며 나무 한 포기도 하나님의 성품을 자기들에게 분배해 줄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만물은 탄식하고 있다. 무엇인가 자기들에게 와야 할 것이 있는데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오심으로 이것이 나타났다. 분배자가 나타난 것이다.
2)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밝히심
그리고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밝히셨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는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고 하였고 히브리서 2장 14-15절에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가장 걸리는 문제는 죽음이다. 사람은 무엇을 해도 죽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차피 죽는데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면 뭐하느냐? 멋대로 살다가 죽자.’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천당을 만들어 놓고 “아니다.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잘 믿고 좋은 행실을 하면 죽은 후에 천당에 가게 된다.”며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신 것은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잘하면 사후에 천당에서 영원한 보상이 된다면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서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고 먼저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인생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이 목적과 계획이 중요하다는 것을 밝혀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셨다. 사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다. 사탄이 최후로 우리를 잡고 있는 것이 사망이다. “네가 예수를 잘 믿느냐? 그러면 뭐하느냐 결국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데 네가 뭐를 하겠느냐?”고 잡고 있으니까 마지막에는 목이 졸려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망칠 수 있는 데가 천당이라고 생각한다. “죽어도 좋다. 지금은 이렇지만 천당에 가면 나는 영생복락을 누릴 것이다.”라며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이 싸움이 진즉 끝났으면 우리에게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이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싸움을 끝내셨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셨다. 사망이라는 올가미를 놓고 있는 놈을 제압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본대로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은 ‘내가 인생이 아니었다면, 인생을 초월할 수만 있다면 신과 같이 될 텐데’ 하기 때문에 올무에 걸려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인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심으로 한 방에 꺾으셨다.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 해서 사람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무엇이 사람인지 분명하게 구별해 주신 것이다.
오래 사는 것으로 보면 거북은 만 년을 살고 학은 천 년을 산다고 한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뱀은 얼마나 클지 모른다고 한다. 조건만 맞으면 계속 큰다고 한다. 나무도 얼마까지 사는지 수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조건만 맞으면 계속 산다. 미국의 어느 지역에는 삼천 년 이상 된 주목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나무는 뿌리가 갈 수만 있으면 산다. 오래 살기로 말하면 차라리 한 그루의 주목이 되어 삼천 년씩 살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래 산다 해서 사람인 것도 아니고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 해서 사람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목적과 계획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고 하나님을 살아내도록 지어졌다. 그러므로 이 목적과 계획을 붙잡아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50-52절에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른 세계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혈과 육, 돌가루로 밀가루를 만들 수 있는 혈과 육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 기계로 뽑는 짜장면도 있고 손으로 뽑는 짜장면도 있지만 짜장면은 짜장면이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나라다. 언제 썩지 아니할 것이 되는가? 그것은 돌로 떡을 만들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엉터리 같은 약속에 속지 않는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라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하나님 아들이 될 것이다.”라는 것도 거짓말이고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한 것도 거짓말이며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님 아들은 깨지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깨진다고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고 깨지지 않는다고 사람인 것도 아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안에 있는 것’이 사람이다.
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심
이 계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창세 전에 계획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우리의 의지나 실력과 관계없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서울대학교는 학생들의 소원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상 설립된 것이다. 인재를 양성하려고 국립대학 안에 의해 설립되었으니까 10년 후에 난 아이도 갈 수 있고 50년 후에 난 아이도 갈 수 있다. 학생 하나하나의 요청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니까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것이다. 창세 전에, 사람이 생기기 전에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 안되면 사람을 다시 만들어서라도 이루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사람이 이런데 되겠는가?’라며 믿지 못했지만 이 계획은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는 계획이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 안된다면 사람을 고쳐서라도 되게 하실 것이고 다시 만들어서라도 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먼저 계획하신 것이니까 하나님이 이루신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였다.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였는데 은혜가 무엇인가? 꼭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궁극적인 은혜는 하나님의 목적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공급이다. 병을 낫게 해 준 것도 은혜고 사업을 일으키게 도와준 것도 은혜이지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은혜는 이것이다.
마이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기술자가 필요하다. 도금 기술자도 필요하고 사출 기술자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마이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확성을 하는 것이니까 확성을 잘하게 하는 사람이 진짜 기술자다. 도금을 잘하거나 모양 사출을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확성을 잘하게 하는 기술을 가진 자가 마이크 기술자이듯이 은혜가 많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해 주는 것이 진짜 은혜다. 누가 나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푸는 사람인가? 나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주는 사람이다. 여러가지 은혜가 많지만 이보다 큰 은혜는 없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가장 큰 은혜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고 사람에게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목적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 안에서 주신 은혜다. 마귀의 세력은 은혜 밖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계획을 세우셨는데 마귀가 중간에 장난을 쳤지만 마귀의 장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 전의 계획이다. 마귀가 생기기도 전에 있는 계획이니까 마귀가 당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계획된 상위 계획이니까 하위 계획으로는 안된다.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선은 주먹이 가깝다고 하지만 영원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해방이 되고 나니까 행정도 없고 사법도 없었다. 멀리 떨어진 낙도에는 경찰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공산주의 사상을 받은 사람들이 주도해서 야학도 하고 학교도 했는데 우리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공산당 노래를 부르면서 학교에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그 사람들이 가르쳐 준 노래가 공산당 노래였다. 책이 없으니까 노래 시간에 ‘민중의 기를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높이 들어라.’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승만 같은 놈 때려죽여라.’라는 노래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사라졌다. 그동안 무법천지였는데 밤에 경찰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노래를 가르치던 우리 담임 선생님은 어디로 가 버렸다. 그 후로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니까 주먹이 가깝다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저 위에서는 국립 경찰을 조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빨갱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 위에서 정부 형태가 결정되고 군대가 조직되고 경찰이 조직되었는데 밑에서 민중의 기를 높이 들자고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창세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상위 계획이 시행되면 마귀의 세력은 일시에 없어져 버린다.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마. 부활생명(영원한 생명)으로 이루어짐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고 둘째는 부활생명으로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15장 52절에는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하였고 15장 54절에는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고 다시 사셨고 사도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보고 그분의 증인이 되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헷갈린다. 도대체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나와서 뚜벅뚜벅 걸어다닐 수 있는지 상상이 안된다. 어떤 사람은 옆구리를 만져 보았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바지가랑이를 붙잡았다고 했고 마지막에는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다고 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고 어찌 된 것인지 꿈 속을 헤메는 것 같다.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 생생하게 본 것처럼 말하지만 꿈 속이나 마찬가지여서 아무것도 모른다.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방안에 나타났다고 했고 영인가 했더니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고 하셨다고 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구름을 타고 올라갔는가? 앞뒤도 맞지 않는 말 같다.
사도들은 어떻게 그것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증거했는가? 자기들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것은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와 달리 그 시대에 이런 말을 했다가는 맞아 죽을 일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이 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사도들은 이것을 자기의 생명으로 내놓고 증거하였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다. 확실하게 보았다. 자기들 속에서 확실하게 나타난 것을 보았던 것이다. 다시 살아난 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거한 것이다.
내 안에 증거가 없으면 내 생명을 걸고 증거할 수 없다. 내 안에 증거가 있으니까 내 생명을 걸고 증거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써 놓은 것을 보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대로 있었으면 나는 교리만 전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었고 요한복음에는 저렇게 기록되었다고 했을 것이다. 나로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살아나지 않는데 어떻게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하였다. 나도 돌로 떡을 만들려고 하던 사람인데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알았으니까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탄을 하나님 말씀으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구절은 신명기 8장 3절에 나온다. 그 말씀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하면 사탄이 물러갈 줄 아는 것이다. 그렇게 부적을 써 붙이듯이 주문만 외우면 사탄이 물러가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때 우리는 확실하게 그분의 증인이 된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속되었다.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분배받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게 되었다. 죽임을 당했지만 다시 산 자를 보았다. 종교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다시 사신 이를 보았다. 그 삶을 보았다. 이것이 창세 전의 계획이다.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만 먹었으면 저절로 이루어졌을 텐데 선악과를 먹고 끌려가서 종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돼!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안돼.’ 하는 절망 속에 있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를 보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창세기 2장보다 훨씬 더 전진적이고 권능적인 성취인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생명나무를 먹기만 하면 저절로 되는 일이었는데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전혀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보았다. 우리는 더 전진적이고 권능적인 은혜를 입은 것이다.
마귀가 방해를 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전진적으로 더욱 더 권능적으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신다. 반대자가 있어서 꺾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전진적으로 역사하신다. 도전자가 올수록 더욱 앞으로 전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너무 쉽게 되었다.
더 전진적이고 권능적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쉬운 것이다. 선생님의 실력이 많을수록 학생은 쉽게 배우지만 선생님의 실력이 없으면 학생은 고생한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2학년에게 배우면 매일 혼나야 하고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다. 6학년 학생에게 배우면 조금 낫겠지만 그것도 힘이 든다. 그래서 교육 대학을 나온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이다. 10년이나 공부를 더 했기 때문에 배우기가 쉬운 것이다. 가장 쉽게 가르치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선생님이다. 잘 모르는 학생을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까 더 유능한 선생이 되는 것이다. 천재들만 가르치면 발전할 수 없다. 저능아들을 가르쳐 봐야 발전할 수 있다. 모르는 학생이 알아듣도록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모르는 학생이 많을수록 선생님은 더 유능해진다. 인간이 부패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전진적이고 더욱 권능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제는 더욱 쉬워졌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다.
구약은 율법이라서 어렵다. 그래서 도저히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율법을 잘 지키는 백성을 만났다면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분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받은 그 백성은 우상숭배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보다 더 쉬운 것, 더 상위에 있는 것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은혜다.
사탄의 계략이 높아지면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높아진다. 생명은 그렇다. 다른 생명의 도전을 받으면 더욱 강해진다. 산에 가 보면 나무들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자기 혼자 있으면 10m만 자랄 나무도 다른 나무들과 같이 있으면 30m를 자란다. 다른 나무에 깔리면 자기가 죽으니까 어찌하든지 뚫고 나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구불구불해서 재목으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소나무를 심을 때 대나무를 섞어서 심는다고 한다. 대나무가 똑바로 올라가니까 소나무도 대나무를 따라서 같이 뻗어서 곧게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를 심을 때는 장래를 생각해서 넓게 띄우지 말고 밀식을 해야 한다고 한다. 속아내더라도 밀식을 해야 나무가 잘 크지 넓게 심어 놓으면 제멋대로 옆으로 늘어져서 재목으로 쓸 수가 없다.
초창기에 어떤 목사님이 문경 집회에 오셨는데 “이렇게 시끄러운데서 어떻게 말씀을 합니까?”라고 하셨다. 그때는 천막 하나를 쳐 놓고 아이들과 다 같이 모여서 집회를 했으니 얼마나 시끄러웠겠는가! 조용한 데서 설교를 하시던 분이 보니 아수라장 같으니까 “어떻게 이런 데서 말씀을 하느냐?”고 하시기에 “시끄럽기 때문에 제가 노력을 훨씬 더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실력이 향상된 이유는 여러분이 시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을 조용하게 시켜 놓고 말씀을 했다면 나는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난장판이라도 나는 내 할 말을 해야 했고 어찌하든지 알아듣도록 하려니까 더욱 노력해야 했던 것이다.
시골에서 주일학교를 할 때도 그랬다. 유치원 아이부터 6학년 아이까지 한꺼번에 모아 놓으니까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반 공부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까 한꺼번에 모아놓고 가르쳐야 했다. 그러려니 조용하게 만들어야 했다. 유치원부터 6학년까지 조용하게 만들려면 조용한 데서 5학년만 담당하거나 6학년만 담당하는 선생과 차원이 달라야 한다. 나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유치원부터 6학년까지 조용하게 하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 대회에 나가서 쟁쟁한 교회의 교사들과 겨뤄서 설교 대회에서는 일등을 했고 동화대회에서는 이등을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좋은 조건에 있었지만 나는 너무나 악조건이었기 때문에 아주 유명한 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환경이 올 때 우리는 더 전진적이 될 수 있고 더 권능적이 될 수 있다.
더욱 실력이 있는 선생님에게 배울수록 학생은 더욱 쉽다. 더욱 실력 있는 하나님 앞에 가면 인생은 더욱 편안하다. 하나님은 만고풍상을 겪으신 분이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속에서 만고풍상을 겪어서 이제는 세상 어느 인류를 만나도 다 통과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 이루신다면 못 이루실 것이 있겠는가! 그런즉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 하나님이 너무 탁월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와 권능으로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신다.
나는 처음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들었을 때 너무나 좋았고 인생이 복되다고 알았다. 그래서 아멘하고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될지 안될지는 몰랐어도 그 계획 자체가 너무 좋았던 것이다. 나는 귀가 얇아서 남의 말을 잘 듣는다. 처음에는 반대하다가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설득당하는 사람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을 그렇게 강조하는지에 대해서 김성식 형제가 귀뜸해 주기를 국어는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것이고 수학은 분수를 알라는 것이며 영어는 남의 말을 잘 알아들으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것보다 더 횡재는 없다.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전진적인 능력으로 이루실 것이다. 이 생명으로만 교회 하락을 막고 새예루살렘으로 전진할 수 있다. 교리나 제도나 전통 같은 것은 전혀 무용하다. 교회 하락을 막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다. 오히려 이상한 것만 만들 뿐이다. 어떤 교리를 대항하려고 하다 보면 더욱 강화된 교리를 만들게 된다. 그렇게 만들다 보면 교리인지 예수인지 모르게 되고 만다. 예수를 믿는 것인지 교리를 믿는 것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니까 교리와 예수가 구별이 안되는 사람이어서 도저히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교리와 제도와 전통만 확립하면 교회가 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기독교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한다.
교회 하락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 내가 하락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이고 그분의 전진적인 능력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만 그것을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이고 교회가 하락되고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바를 수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전진적인 능력으로 이것을 이루실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먼저 앞서서 우리 앞에서 본이 되고 증거가 되고 체현이 되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으로 인해서 나타난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다 나타나야 될 것들이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하고 당신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아야 되는 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셔서 주의 약속을 사모하고 기다리고 붙잡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