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Mattehorn (4478m)
회른리 산장 지붕위에서의 파안대소! 우리는 즐거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메던 알프스에 왔기에...
비박으로 반쪽난 얼굴에 입술은 낙빙을 맞아서 터졌다
첫날 600미터 대빙벽 해치울 때
정상에서 고무장갑 거꾸로 덮어쓰고(그 당시에는 고어장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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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뉴질의 권정철 입니다 갑자기 팔팔했던 그 옛날이 생각나서 한번 올려봅니다.
물론 지금 작성한 게 아니고 글 자체도 20년 전의 글입니다. 아마 지금보다는 감정의 기복이
많이 글에 나타났을 거 라는 생각이 듭니다.
1987년 어렵게 어렵게 비자까지 받고 소양교육까지 받고서 나간 첫 원정 이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어렴픗이 오늘날의 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럽니다.
좀 지루하시겠지만 천천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년전을 떠올리면서 권정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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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호른 북벽 등정기(1987. 8. 14 - 28)
김치, 라면, 짜장면, 쌀밥, 된장국... 비록 얼마 안되는 기간이었지만 스위스에서 우리가부르짖던, 우리의 음식들이다. 뮌헨에서의 3박4일동안 난 정말 라면이 미치도록 먹고 싶었고 살레바(salewa) 공장에서 내어준 방에서 드디어 라면을 끓여먹던 순간, 난 정말 나답지 않게 쪼르르 눈물을 흘려야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대한민국이 최고구나...
공장 책임자 미스터 후버의 비서가 미인이라고해서 잔뜩 기대했지만 비만한 아가씨여서 조금 실망했었고 정광식씨가 했던 것처럼 빈방을 살레바에서 하나 얻어걸렀을 때와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넘어오던 기차안에서 살레바에서 구입한 등산장비의 관세환급을 위해 세관원에게서 확인도장을 받을 때 정광식씨가 쓴 '꿈속의 알프스' 처럼 되어가는것에 전율을 느끼면서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그 어떤 감을 잡을수 있었다.
마테호른 초입의 후리산장에서 회른리산장에 먼저 들어가있던 대원들과 통화를 위해 "I would like to conversation with Korean" 이라고 해서 나온 승회와 통화할 때 난 무지무지 기뻤으며 등반 12시간전 승회가 잘못 사가지고 온 소금을 쌀로 바꾸기 위해 하산을 하면서, 마테호른 중턱의 십자가 상에서 등반의 성공을 빌었고, 등반을 마친 며칠후 눈보라 속에서 무거운 배낭과 함께 철수하면서 그 십자가상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었다.
북벽으로 출발전 쩨르마트(Zermartt)에서 사왔던 제일 싸구려 4프랑짜리 이름도 모르는 질긴 고기를 뜯었으며 초저녁부터 잠을 자기위해 침상에 누웠을때는 오만가지 잡념으로 이리저리 뒤척였고 01시 북벽 출발전 무게를 줄이기 위해 그 무거운(?) 스카프까지 벗었고 말없이 등반조를 챙겨주는 경선이형에게 나의 뒷머리를 잘라주면서 마지막 결의를 다졌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그놈의북벽을 오르면서 또다시 내가 이런짓을 하면 개새끼라고 몇번이나 다짐을 했고(문식이가 다 들었다) 북벽 좌측의 회른리 릿지를 오르는 클라이머들을 보면서 자꾸만 그쪽으로 빠지고 싶은 유혹을 참을수가 없었으며, 꿀라르가 끝나는 부분에서 비박할 때 바라본 반짝이는 쩨르마트의 불빛과 하켄하나에 몸믈 의지하면서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위해 온몸을 비틀때는 죽고싶은 괴로움이었다.
다음날 정상직전에서 탈진과 하이포써미아로 더 이상 움직일 여력이 없었을 때 한 인간의 나약함과 겨우 4천4백에서 내가 이렇게 되는구나하는 비애와 나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오른 정상에서의 허무감. 왜 올랐던가... 명예? 성취감? 자기도취도 아닌 그 어떤 허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홍이가 떨어지면서 겪은 근 1시간 동안의 갈등과 공포, 책임감으로 뒤엉킨 나의 마테호른 북벽.
스위스는 아름다웠으며 스위스 사람들이 산을 가꾸는 마음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더 중요한 사실은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마르고 닳도록..영원히...
8월 14일 금요일 청암산우회 회원들의 환송속에 공항을 떠났다. 금년 1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산화한 일현이 형과 성모, 그리고 용찬이의 죽음이 헛되지않도록 기필코 알프스의 정수리에 깃발을 꼽겠다는 각오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원정대장 : 전홍(28) 촬영 : 이경선(30) 회계 : 권정철(29) 장비 : 최승회(25) 식량 : 김문식(24)
비행기는 홍콩에 22시에 도착해서 23시20분에 출발했다. 그 사이에 면세점에 나가서 니콘 자동카메라를 140달러에 샀다. 114,800원이다. 싼건지 아닌지 아리송하다. 여기까지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탔는데 여기서 빈자리는 서양애들로 채워졌다. 홍콩까지 널널하게 누워서 왔는데 이제는 3명이 빡빡하게 앉아서 간다. 지금 비행기가 막 이륙중이다. 끄적거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그만 쓰라고 한다. 애들 때문에 시끄럽다. 23시 30분이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내옆에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로 피아노 유학을 간다는 황모양이 탔는데 안경낀 예쁘장한 얼굴인데 말을 잘하지 않는다.
인도의 봄베이 도착이 04시 30분. 비행기 밖으로 나가서 공항내를 어슬렁 거렸다. 못사는 나라답게 공항이 썰렁하다. 비브람 신은 우리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쭉 내민다. 볼것도 없는데 검색은 까다롭다. 엽서 10장을 2달러나 주고 샀다. 비행기로 와서 우리팀들에게 하나씩 돌리고 미스 황도 하나 주었다. 지금까지 잠을 못자서 머리가 아프다. 잠을 자야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8월 15일 토요일 금요일 저녁에 서울을 떠나서 토요일 아침에 드디어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서 바로 기차역과 연결된 곳으로 나와서 나하고 홍이는 장비구입차 독일의 뮌헨으로, 경선이 형과 승회, 문식이는 마테호른이 있는 젤마트로 각각 흩어졌다. 뮌헨가는 기차표를 끊는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뮌헨 이라고 주문하면 알아듣질 못한다. 걔들은 뮤니히 라고 그러거나 뮌현 이라고 강하게 발음을 해야 알아먹었다. 영어가 아니라 독일말을 해야하는 것이다.
한참을 달려 온작 인종들이 득실거리는 독일의 뮌헨역에 도착했다. Munchen HBF 라고 적혀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와는 다른, 진짜로 내가 유럽의 중심부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한다. 스위스 애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보이는 노랑머리들이 쫘악 깔려있다. 마치 노랑머리들의 집합소 같다. 역앞에서 먹음직스러운 햄버거 같은 것을 주문했는데 하나에 5마르크가 넘는다. 작은 매주 한병과 함께 임가심을 했다.
여기는 역의 안과 바같이 거의 구별이 없다. 개찰구도 없고 그냥 타고 내리면 된다. 이쪽 사람들에겐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계단에 앉아 책을 읽있는 이쁘장한 아가씨에게 살레바공장이 있는 탈키르쉬너 스트라쉐의 주소를 물었더니 잘모른다. 우리와는 반대쪽으로 가라고 한다. 반대편으로 건너가 한참 얼쩡거리다가 택시기사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토요일 오후인데 시내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 뮌헨 인구가 100만이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는 크다. 몇번이나 묻고서야 살레바공장에 도착했다. 마치 시골의 제재소 같다. 입구에 있는 20개쯤 되는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인기척이 없다. 우리는 여기서 물건구입하고 잠까지 자야하는데... 토요일이라고 퇴근을 모두 햇는가보다. 그 앞에 쪼그리고 있다가 잘만한 장소를 찾아서 헤메다가 15분 거리에 있는 공원을 발견했다. 일단 짐을 다시 역앞으로 와서 하루에 2마르크하는 보관소에 보관시켜 놓고 다시 공원으로 가서 하늘의 별을 보고 잤다. 이번 원정에서 내가 회계인데 원정비를 가까스로 마련했기 때문에 긴축에 긴축을 해야했던 것이다.
8월 16일 일요일 아침 일찍 기상했다. 여기서도 조깅과 스트레칭을 했다. 그 대단한 알프스 마의 3대북벽중에 하나를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항상 부담이 되니까. 새벽녘에 웬 아저씨가 우리가 자는 바로 옆 벤치에서 자고 있었다. 점퍼만 하나 입고서. 우리가 기상했을때는 사라지고 없었고 빈자리엔 맥주병만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오늘이 일요일 인지라 살레바에 가도 별수가 없다. 다시 역으로 가면서 사진도 찍고 상점 구경도 하고 영화포스터 구경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영하는 베드룸윈도우, 슈바제네거의 프로텍터, 그리고 007영화 네버세이 네버어게인 등이 붙어있다. 섹스샵 이라는데는 동전을 넣으면 포르노비데오가 나오는데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쬐끔은 있었는데 대사를 위해 그만 두었다.
역에가서 물을 하나 샀다. Mineral Wasser라고 적혀있는 3마르크 50페니히 짜리이다. 베개만한 큼지막한 빵을(샌드위치는 작고 너무 비싸다) 6마르크에 2개사서 고기 넣어 먹을려고 이것저것 가격을 물어보니까 짜증을 낸다. 두께가 1밀리정도 밖에 안되는 고기를 손바닥만하게 썰어서 두 개 사니까 2마르크가 넘었다. 여기 오면서 비누를 가지고 오지 않아 이곳저곳 기웃거렸지만 일요일인 관계로 상점문을 대부분 닫아 버려 못사고 역구내에서 할머니가 운영하는 화장품점 같은곳에서 우리나라 1회용 비누수준의 조잡한걸 50페니히에 사고 치약도 5그램짜리 연고같은걸로 50페니히, 거기에 역시 1회용 화장지 같은것을 50페니히에 사서 기쁜 마음으로 배낭에 넣었다.
오늘 뮌헨은 전부 관광객 뿐인 것 같다. 배낭족이 많이 눈에 띄고 또 자전거를 굉장히 이용한다. 홍이가 전혜린씨가 살던 위빙겐 스트라쎄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뮌헨 유니버시티로 향했다. 어느정도 시내를 벗어 나니까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나왔다. 시청 쯤 되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명동처럼 붐비는 곳을 수염에다가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서 걸었다. 이쪽의 상점들은 역주변에 비해 세련되고 무척 고급서러워 보인다.
그곳을 지나 계속 내려가니까 강이 나왔다. 무척 깨끗하다. 스위스 쮜리히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때의 강은 회색빛깔이었는데 이곳은 아주 푸르고 낚시꾼도 보이는 오리와 갈매기도 있는 강이다. 군데군데 모래가 있는 곳에는 훌렁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인다. 날씨가 아주 좋다. 마치 우리나라 10월의 날씨같다. 서울같으면 지금 찐득찐득하고 움직이면 땀이 나는 날씨지만 여기는 배낭을 메고가도 땀이 전혀 나지 않는다. 이런게 대륙의 날씨인가 보다.
중간중간 길가의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며 졸나게 큰 빵(얘들은 여기에 꽃씨같은걸 넣어서 냄새가 나서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게 크고 싸기 때문에 샀던 것이다)을 뜯어 먹었다. 물가의 오리들한테 던져 주었더니 구름같이 몰려든다. 길이 헤깔릴때는 이제 요령이 생겨서 여자들이나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줄때가 많다. 어디가나 노인들은 친절한가 보다. 서구의 노인들은 또한 불쌍해 보인다. 이쪽 젊은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왜소하고 어딘가 침울하고 외로워 보인다.
뮌헨 대학교를 지나갈 때 보니까 공원같은데서 무슨 장날인지 500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땡볕인데도 탁자놓고 의자놓고 앉아서 와글와글거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시끄러운 그곳을 빠져나와서 전혜린의 위빙겐으로 갔다. 뮌헨의 거리가 어디서나 비슷해 보인다. 틀린게 있다면 사람 다니는 보도블럭 주변에 노천카페가 많고 가로수도 굵직한 플라타나스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군데군데 노점상도 있고 중고차로 판다는 문구의 차들도 널려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대학로 같아 보이는데 거리 자체는 우리 대학로의 2배쯤 되어 보인다.
가도가도 위빙겐 스트라쎄가 나타나지 않아서 길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웨어 이즈 위빙겐 스트라쎄?" 지나가던 아저씨 날보고 씨익 웃더니 "올 이즈 위빙겐, 디스 이즈 위빙겐 스트라쎄" 라며 웃는다. 아! 그렇구나 여기 대학로 같은곳이, 이렇게 자유로운 곳이 전혜린이로 하여금 이곳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전혜린씨가 살아있다면 지금의 대학로를 미치도록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사진한장 찍고 미네랄워터 마시면서 벤치에서 빵 뜯어 먹다가 터벅터벅 걸어서 어제 밤에 잣던 우리의 보금자리 공원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빵 뜯어먹고 버티고 있는데 어둗어둑 해지니까 웬 까만머리의 독일애들이 오더니 자기들을 투르가이라고 소개하며 같은 민족이라고 반가워한다. 웬 투르가이? 아마 터키에서 온 투르크족인가 보다. 아무리 터키가 동양의 끝자락에 있다고 해도 같은 민족이라니... 좀 심했다. 그러더니 가라데를 아느냐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마자 태권도라는 소리가 걔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앞차기, 옆차기, 내려찍기 등의 우리말과함께 시범을 보인다.
그리고나서 자기 사범인 코리아노가 어디에 산다면서 계속 관심을 보이길래 태권도 시범을 조금 보여주었다. 금강경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애들을 보내고 나서 내가 태권도를 좀 더 열심히해서 더욱 멋진 시범을 보여줄걸...
8월 17일 월요일 어제 밤에는 벤치에서 자는 아저씨가 오지 않았다. 아침일찍 살레바 공장으로 가서 매장에서 장비를 샀다. 서울에서 팩스로 보낸 오더와 우리가 지금 고르는 것이 차이가 나니까 영어로 우리와 대화하던 젊은 애가 짜증을 낸다. 그놈이 물건을 내어놓는 사이에 2층에 올라가 공장책임자인 미스터 후버를 찾았더니 다음주까지 휴가라고 하면서 대신 그의 비서를 만나게 해주었다. 여비서가 미인이라고 들었는데 뚱뚱하기만 하지 별로로 보인다. 미스터 후버의 초청장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면서 매장에서의 D/C가 지금 30%인데 만약 후버가 휴가를 가지않고 있었다면 40%의 D/C도 가능한게 아니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럴리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장비가격이 무척 저렴했다. 아이젠 43,000원, 45미터 자일 39,000원, 120미터는 97,000원에다가 중국산 덕다운도 43,000원, 고글 27,000원, 그리고 우리나라 가면 10만원은 족히 받을 픽켈이 33,000원이다. 미치겠다. 개눈엔 똥만 보인다고 어떻게 빚을 내서라도 싸들고 가고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막 소개되고 있던 고어텍스가 그중 비싼편에 들어가는데 한벌에 12만 5천원이다. 이것저것해서 100만원 이상 구매했다.
장비구매가 끝나고나서 우리가 스위스의 젤마트로 가는 차가 없다. 어떻게 여기 있는 빈방에서 잘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기다리라고 그런다. 잠시후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오더니 노 프라브럼 이라면서 2층에 있는 방을 하나 내준다. 무척 큰 방인데 거기서 장비 풀어놓고 샤워하고 그방에 남아있던 쌀로 밥해먹고 우리 배낭에 어떻게 남아있던(식량은 마테호른 선발대가 모두 가져갔다) 단 하나의 라면을 끓여서 국물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우리 음식인가! 맨날 돈아낀다고 맛없는 식빵만 뜯어 먹었으니... 눈물이 다 나왔다.
식사후 다시 역으로 가서 짐을 가지고 왔다. 그다음 살레바에서 구매한 장비와 함께 재조정해서 배낭을 꾸렸다. 여기는 수돗물이 억수로 차다. 샤워할때는 너무 차가와서 어떻게 이 물을 내몸이 맞이할까 고민을 했었다. 며칠 묵은 빨래까지 해서 발코니에 널었더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번씩 본다. 고추장 하나로 저녁을 해먹고 홍이는 자고 나는 이제껏 사용한 경비를 정리해 봤다. 처음엔 100달러가, 다음엔 200달러, 그다음엔 30달러, 또 다음엔 10달러가 부족해서 내가 10달러 손해보기로 하고 12시가 넘어서 침대로 들어갔다.
8월 18일 화요일 기상 5시 30분. 허겁지겁 어제 남은 밥에 물넣어서 끓여먹고 역으로 가는데 전보다 짐이 무거워서 30분이나 걸렸다. 어렵사리 출발 7분전에 젤마트행 기차를 타는데 성공, 안도의 한숨과 함께 식당차로 가서 코카콜라 2병을 시켰더니 6마르크 80페니히란다. 곱하기 434원을 하면 자그마치 2,900원이 넘는다. 지금 오스트리아 국경을 지난다. 가도가도 들판이다. 이렇게 넓은 들판에서도 잘살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게 바로 바보같은 나라구나 하고 생각했다. 3박3일간의 독일에서 느낀점이 잇다면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마르고 닳도록, 미치도록, 영원히... 그리고 나는 간다. 내가 그렇게 그리던 꿈속의 ALPS로...
산쪽으로 들어와서 톱니바퀴로 진행되는 열차로 바꾸어 탔다. 사람들이 많지가 않아서 쭉 앉아오게 되어 편리했다. 도시쪽에서는 그런걸 못느꼈는데 시골로 들어오니까 동양인의 모습이 신기한지 우리들을 꽤나 응시한다. 내가보기에도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지극히 시골적이다. 촌스럽게 보이는 서양인들이라고 할까... 그중 어떤 아주머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오히려 내가 민망했다.
젤마트로 들어왔다. 우리나라의설악동같은 분위기에 전기자동차와 말이끄는 관광마차가 다닌다. 동네 어디에서도 피라밋같은 마테호른이 보인다. 상점을 따라 마을도로가 쭉 뻗어 있는데 대부분 관광객이나 스키어를 대상으로 하는 호텔이나 상점이 대부분이다. 동양인 관광객들은 일본인이 대부분이고 뎅그렁뎅그렁 거리며 말들이 지나갈때면 지금 내가 중세의 유럽에 온듯한 느낌이다. 가정집들이나 작은 호텔들의 베란다에는 어김없이 색색의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이쁘다.
일단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회른리산장 밑에 있는 후리산장까지 올랐다. 오후이어서 그런지 트레커도 스키어도 보이지 않는다. 여긴 전화가 드문편이어서 아까 젤마트 시내에서 전화하지 않은걸 후회하면서 케이블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가게에 들러서 양해를 구하고 그집 전화로 회른리에 있는 대원과 통화를 했다. 한국인 바꿔달라고 했더니 문식이가 나왔다. 그래도 후배놈들이 여기까지 무사히 찾아왔구나 라는 생각에 무척이나 반갑고 기뻤다.
이제는 완경사의 산길을 올라 3,700미터의 고도에 위치한 회른리 산장까지 간다. 맑은 하늘에 적당한 온도, 거기에 사방에 보이는 목초지와 4000미터가 넘는 고봉들, 우리는 신이 났다. 진정 여기가 알프스란 말인가!
중간쯤에서 바위들이 부서져있는 너덜지대에서 한참 쉬었다. 그렇게 고소증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내산행에서와 똑같은 느낌이다. 이제 목초지는 사라졌다. 이곳은 삭막한 바위부스러기 뿐이다. 높은곳으론 만년설이고...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간다. 우리같이 바위를 오르려는 사람들이 아니고 회른리 산장까지 가는 트레커들이다. 아주머니도 있고 애들도 있다. 마치 설악동에서 울산바위까지만 가는 사람들처럼...
멀리 회른리 산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깎아지른듯한 북벽도 보인다. 저기를 올라가야 하는구나. 아이구 어머니... 낙석의 천국이라는 마테호른 북벽. 아침 일찍 북벽 초입의 빙벽을 통과하지 않으면 총알처럼 떨어지는 낙석을 피할 수가 없다고 했다. 산장은 마치 마지막까지 올라가서 집을 지은 듯 위태하게 서있다. 해발 3,800m. 산장 주변엔 야외카페처럼 꾸며 놓았다. 망원경도 보이고... 여기서 사람들은 등정자들을 기다리고 구경하는가 보다. 산장에는 빨간 바탕의 십자가 문양이 있는 스위스 국가가 펄럭이고 있고 산장벽에는 회른리 회테라고 독일어로 쓰여져 있었다.
문식이를, 승회를, 경선이 형을 다시 만났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그 반갑기가 말로 못할 정도로 기쁘다. 비로소 본격적인 북벽등반의 카운터 다운이 시작된 기분이다. 산장내부는 웬통 나무로 되어 있었다. 취사하는 곳이 따로 되어있는걸 제외하고는 우리와 비슷하다. 저녁을 먹고 2층 침상에 올라가서 잤다. 동양인은 우리 뿐이고 주변에 투숙객도 별로 없는 듯 모든 것이 조용하다. 창문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빛이 따스해 보인다.
되었다. 뮌헨에서 가지고 온 장비를 2층 산장 베란다겸 지붕에 펼쳤다. 출발시간을 다음날 01시로 했는데, 아뿔사! 밥을 할려고 쌀을 젤마트에서 사온게 쌀이 아니라 소금이 아닌가....
누가 샀느냐고 했더니 승회가 샀다고 한다. 젤마트 수퍼에서 쌀을 달라고 했더니 salt 즉 쌀과 발음이 비슷한 소금을 준 것이다. 약 1kg정도는 되어 보니는데 누가봐도 쌀봉투로 착각할 만큼 비슷하게 생겼다.
8월 19일 수요일 오랜만에 안락한 잠을 잤다. 아침을 해먹고 2층 베란다에서 장비를 풀어놓고 점검을 했다. 픽켈에 슬링도 묶고 아이젠도 점검하고 하다가 점심먹고는 빤히 보이는 회른리릿지 좌측에 있는 동벽 하단부로 적응훈련에 나갔다. 반팔차림으로 설빙벽에 다가 간다는 것이 신기했다. 한여름의 태양이지만 이동네는 그냥 따뜻할 뿐이다, 그러니 얼음이 그렇게 녹질 않는다. 밤이 되면 영하로 떨어지니까 또 얼고...
만년설이란걸 빨리 접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바삐 설벽으로 향하건만 빤히 보이는 것이 가도가도 끝이 없다. 이게 우리와는 다른 스케일 때문인가... 30분이면 떡을 칠 것 같았는데 1시간이 더 걸려서 설벽에 도착했다. 장비를 착용하고 빙벽에 가까운 설벽에 붙었다. 이런 것을 빙하라고 하는가... 눈도 아니고 얼음도 아닌 것이 딱딱하기만 하다. 반대편으로 횡단을 했다. 120m 자일을 반으로 잘라서 가지고 왔는데 규모가 크다가 보니까 자일 한동이 금방 끝이 난다. 별로 경사진 곳은 아니지만 쫄아있어서 원칙대로 전진하고 확보를 했다. 스나그를 하나 박아보니까 마치 얼음처럼 힘이 든다.
3피치 끊다가 철수했다. 멀리서 경선이 형은 우리를 촬영하고 있나 보다. 문식이 하고 승회와 함께 산장으로 돌아왔다. 산장에 오니까 홍이가 말고기를 끓이고 있었다. 젤마트 수퍼에서 제일 저렴한 고기라고 사온 것이 말고기란다. 말고기란걸 알았으면 사지 않았겠지만 선발대 중에서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으니...
말고기가 질기다고 하더니만 아무리 고아도 그게 그거다. 냄새도 좀 나고... 그렇지만 더 이상의 단백질 공급이 없는만큼 말갈비를 뜯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말고기를 먹는단 말인가... 산장에서 제공하는 날씨를 물어보니 내일 모레 계속해서 좋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밤 0시를 기해서 공격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홍이는 두사람 정도만 공격하고 나머지 두사람은 지원조로 회른리 릿지로 올라오기를 바라는 눈치인데 선뜻 내가 지원조다라고 나서질 않는다. 나도 여기까지 온이상 알프스 3대북벽중의 하나인 이곳에 꼭 붙어보고 싶었다. 또한 여기서 등반을 하지 못하면 다음 대상인 3대북벽 최난코스인 아이거는 나에게 무리인 것이다.
결국 홍이도 경선이 형을 제외하고 4명을 2개조로 나누어서 등반하기로 결정을 했다. 나는 문식이와 조를 이루고 홍이는 승회와 조를 이루어서 신속하게 등반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했다. 저녀해먹을 쌀이 없는 것이다. 젤마트에서 선발대가 오면서 사가지고 온 쌀이 소금이 아닌가... 웬 소금... 승회가 젤마트 수퍼에서 우리말로 쌀 주세요 했는데 물론 못알아 먹었는데 승회가 답답해서 쌀이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니까 소금의 쏠트(salt)와 발음이 비슷해 졌나보다. 이렇게 해서 결국 정상공격일은 하루 늦추어지고 다음날 내가 소금을 쌀로 바꾸기 위해서 내려 가기로 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을 내가 좀더 힘을 소진하기로 한 것이다. 질긴 말고기를 뜯고 나서 석양을 구경했다. 앞에 있는 몬테호자를 넘어가고 있는 태양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알프스에 온 유재원 선배가 귀국을 포기하고 여기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을만큼 알프스는 아름답고 장대했다. 언젠가 또 오리라. 그때는 등반이 아니라 아들 딸 마누라 데리고 여행이란걸로 오리라 하고 다짐을 한다.
8월 20일 목요일 아침 먹고 소금 한봉투를 가지고 젤마트로 내려갔다. 오늘밤 01시를 기해서 북벽공격을 하기로 했다. 그런 만큼 조심스럽게 다녀와야 할 형편이다. 몇시간 걸릴까... 왕복 5시간... 아니 6시간? 빨리 갔다와서 쉬는게 상책이리라. 그렇지만 힘은 좀 들더라도 고소적응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도 없는 길을 내려가다가 보니까 저만치서 우리나라의 케른같이 돌을 쌓아 놓은곳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오늘밤 그 무시무시한 3대 북벽 중의 하나로 향한다는 마음에, 종교가 없는 나였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서 다시 볼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마음놓고 행동할 수 있었다. 다시 후리산장에 도착해서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젤마트에 도착했다. 가르쳐준 수퍼에 도착해서 동료가 잘못해서 쌀대신 소금을 샀다고 하니까 터져있는 봉투이지만 아무소리 없이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수퍼에서 가장 싸다고 생각되는 갈비를 사고나서 다시 회른리 산장으로 출발했다.
시가지가 끝나는 곳에서 아무래도 정상공격이 마음에 걸려서 음식점에 들어갔다. 아는 음식이 하나도 없다. 비용도 만만찮고. 최고로 싸다고 한 가격이 자그마치 15마르크가 넘는다. 그중에서 프렌치 어이넌스 수프가 가장 저렴하여 시켰다. 맛이 느글느글 그 자체다. 그래도 열심히 접시를 비우고 길을 나섰다. 가끔 스키장비를 갖추고 산으로 향하고 있다. 한여름에 스키라... 좋은 나라다. 꼭대기 까지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젤마트로 내려오면 신이날거다. 슬루프가 3-4km는 되겠구먼.
회른리 산장이 보이고 우축으로 붉은 벽이 있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했다. 햇볕이 따가와서 바위밑에 햇볕이 없는 곳에 들어가서 한참이나 휴식을 취했다. 내심 오늘 밤 0시에 있을 정상공격이 무진장한 부담으로 작용을 한다. 고소적응에는 유리하겠지만 아무래도 체력손실은 어쩔수가 없을 것 같다. 쉬면서 회른리 산장쪽을 보니까 능선의 산길로 가기보다는 이쪽 꿀라르에서 바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 빨라 보였다. 아이젠은 없었지만 그렇게 심한 경사가 없고 바위도 덤성덤성 덮여 있어 내눈에는 할만한 것 처럼 보였다.
결국 어렵지만 빨리가는 길을 택했다. 산장 직전에 미끄러워서 고생을 했지만 무사히 산장에 도착했다. 발코니에서 외국애가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It's easy I climbed directly... " 동료들이 나를 반긴다. 하는 말이 오늘 오전에 그 유명한 라인홀트 메스너가 헬기를 타고 회른리 산장에 내렸다고 한다. 아마 북벽 등반을 위해서 왔는데 벽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아하! 유명한 사람들은 헬기로 이동하는구나. 그리고 벽상태가 좋지 않다는건 날씨가 나빠진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오늘 새벽에 출발을 한다. 여길 후딱해치워야 아이거에 가서 여유를 가질수가 있고, 또한 비싼 산장에 계속 있을 돈도 없다. 01시 출발을 위해 일찍 밥해먹고 자기로 했다. 갈비를 푹 고아서 다시한번 먹고 잠자리로 들어갔다.
8월 21일 금요일 01시에 북벽을 향해 출발했다. 어제는 18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밖은 환했지만 우리가 있는 2층 골방에 커튼을 모두 치고. 그렇지만 알수 없는 불안감에 눈만 감고 잠은 자질 못하고 0시까지 보냈나보다. 모두가 마찬가지 였으리라.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죽는다... 죽으면, 내가 죽으면... 어머니가 생각났다. 비몽사몽간에 온갖 꿈을 꾼 것 같다. 깨어나면 생각도 나지 않는...
0시에 일어나 전기도 넣어주지 않는 야밤에 헤드랜턴을 켜고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어제 내가 사가지고 온 쌀로 지은 밥 남은걸 데워서 먹었다. 그런데 도데체 말이나 되는 것인가... 이 음산한 북벽에 붙는다는 20세기의 클라이머가 음식데울 버너 하나없이 덤빈다는게... 무뎁포 그 자체다. 얼마되지도 않는 보험에도 들지 않고...
경선이 형이 일어나서 이것저것 챙겨준다. 고맙다. 말없이 행동하는 그가. 등산 스카프를 가지고 갈려다가 빼버렸다. 무겁지도 않는데. 우모복도 뺐다. 무거워서 떨어져 죽기보다는 차라리 떨면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남들은 고어텍스로 무장했지만 난 입지 않았다. 2벌밖에 사가지고 오지않은 것을 달라고 하기가 싫었다. 모바지에 내의없이 프로스펙스에서 만든 마이크로 텍스 하의를 입었다. 이건 내가 조깅용으로 입던 것이었다.
윗도리엔 모남방에 런닝없이 우리 회사 제품인 이태리로 수출하는 모스웨터를 입고 침낭커버와 비상식(소세지류를 많이 넣었다), 땅콩, 사탕, 초코렛을 넣었다. 더해서 사진기는 내가 휴대하고 픽켈과 허밍버드 햄머, 45m 자일 2동, 스나그 3개, 그외 하켄과 비나류를 휴대하고 산장을 나갈려다가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다. 서슴없이 아미나이프로 나의 뒷머리를 잘라 경선이 형에게 주었다. 꼭 살아오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절거덩 절거덩 쇳소리를 내면서 산장문을 밀치고 나오니 맑은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거린다. 회른리 능선과 북벽 초입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아이젠을 착용했다. 우리보다 먼저 여기 와있던 영국팀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4명이 뿍벽으로 떠나갔다. 열심히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는데 나의 오른쪽 아이젠에 이상이 나타났다. 네오밴드를 조이니까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젠 고리가 벗겨지는게 아닌가... 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철사가 있는지 묻고 두리번 거리다가 할수없이 4mm 코드슬링으로 아이젠을 묶었다.
01시 30분이 넘어서 다시 출발했다. 애당초 계획은 2명 1개조로 등반을 하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그 계획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80m 자일로 4명이 안자일렌 한 상태로 베르그슈른트(산과 빙하가만나는곳, 갈라진 틈)를 향해 전진했다. 설벽 쉬운곳을 하나넘어서 600m 빙벽 초입을 향해 트래버스할 때 먼저간 영국팀이 우리보다 훨씬 앞에 전진하고 있는 것을 그들의 랜턴불을 보고 알게 되었다.
어렵게 어렵게 북벽의 어프로치 지점을 찾아 왓다 갔다하고 있는데 100m 정도 위에서 영국팀이 꾸물거리는걸 발견했다. 우리보다 트래버스를 멀리 하더니 쟤들이 간길이 정확한가 보다. 우린 출발지점도 못찾아서 헤메고 있는데. 분명히 내가 젤마트에 쌀 바꾸러 갔을 때 대원들이 북벽정찰을 마쳤다고 했는데...
영국팀 불빛이 보이는 바로 밑까지 가서 올라갈려고 하니까 이번엔 커다란 크레바스가 앞을 가로 막는다. 할 수없이 한참 뒤로 빽을 했다. 그래서 찾아낸 곳이 이번에는 오버행으로 시작된다. 그렇지만 대안이 없다. 겨우 찾았다라는 안도감에 숨을 돌리면서 쉬고 있자니 위에 있던 영국팀이 떨어뜨리는 낙빙이 심하다. 삐∼융, 쒸∼익 하는 총알소리를 내며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낙빙속에서 머리에 쓴 헬멧으로 온몸을 커버하지만 결국 무지하게 큰 낙빙이 문식이를 때렸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잠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가 아이구... 라고 문식이의 죽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배낭과 옆구리를 함께 맞아서 그런대로 견딜만 하다고 한다. 아무도 오버행을 넘어갈 용기가 없는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시간은 벌써 3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크레바스가 눈으로 살짝 덮여 있어 조심스럽게 빙벽에 접근해서 픽켈과 햄머를 힘차게 휘둘러보니 오버행 초입이 푸석한 눈이어서 그런지 쑥쑥 들어가기만 할뿐 힘을 받지를 못한다. 어쩔도리가 없다. 픽켈이 힘을 먹어야 붙잡고 넘어갈텐데... 할수없이 오른쪽 다리를 옆으로 찍 벌려 오버행 조금 위에 있는 단단한 설벽에 가까스로 아이젠을 걸고 오른팔의 픽켈을 옆으로 이동시켜 고정 시킨후 몸을 들어 올리면서 잽싸게 왼팔의 햄머를 찍으면서 가까스로 무너지는 균형을 잡았다.
오버행을 5m정도 올라서니 시야에 길이가 600m나 된다는 대빙벽이 어슴프레 들어왔다. 경사가 급한 편이 아니어서 80m 자일로 40-50m 정도 전진하고 스나그 하나 박고 80m 모두나가서 확보하면 뒤에 있는 3명이 쥬마를 이용하거나 등반을 해서 올라오는 방법을 사용했다. 애당초 쥬마를 각자 지참하진 않은 것이다. 간혹 총알소리가 나면 헬멧을 고추세워 낙석에 대비를 하면서 추워서 곱은 손을 풀기위해 쉬지않고 픽켈질을 했다. 얼음을 찍으면 잘들어가지도 않고 부숴지기만 해서 흰눈이 살짝 덮인 부분만 골라 찍으면 그밑에 또 얼음이 있기 때문에 쉽게 박히고 힘도 절약할 수 있었다.
오른쪽 1시 반 방향으로 비스듬이 전진을 계속했다. 프론트 포인팅을 계속해서 발이 아파오면 오른쪽 아이젠은 전부를 얼음에 박고 왼발만 프론트 포인팅을 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스나그는 어느정도 안전성이 있지만 짤막한 바르트훜은 박는 과정에서 얼음이 모두 갈라져버려 사용을 못하고, 확보하면서 스나그의 보조로 몇 번 사용을 했다. 여전히 영국팀은 우리보다 100여m 앞에서등반을 하고 있었다. 경사가 약한 마테호른 빙벽이지만 이런 대빙벽이 난생 처음이어서 무척 조심스러워진다.
동녘이 환하게 밝아올 무렵 어느정도 시야가 틔였다. 많이 올라 왔겠지 했던 빙벽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었고 영국팀은 빙벽을 돌파하고 바위가 듬성듬성 있는곳에서 랜턴 불빛이 고정된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헤드랜턴을 껐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영광영광 대한민국 영광영광 대한민국" 이라고 여명이 밝아오는 ALPS에서 나는 신이나서 노래를 자꾸 불렀다. 4명이 한줄로 등반을 하다가 보니까 일부 주마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문식이가 세컨이다. 확보해준 문식이가 올라오면 다시 80m자일이 아까처럼 비스듬이 우측대각선으로 진행은 계속되고 간혹 총알소리가 나면 고개를 숙이고 그러다가 80자일아 모두 나가면 스나그를 박고 확보하고... 이런 짓의 연속이다. 도중에 내가 떨어지면 나는 최대 160m를 먹는다. 그러면 굴비엮여 있듯이 하나씩 떨어wu 나가겠지... 순간적인 전율로 나의 몸이 떨려오지만 실제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은채로 훤해진 오전 11시경에 우리는 바위가 드문드문 나와있는 부분까지 드디어 진출을 했다.
밑에서 볼때는 바위가 있는곳에는 꽤나 안정된 자리가 있을 것 같았는데 한국에서 읽어본 등반정보의 내용대로 어디 엉덩이 하나 붙일 공간이 없다. 게다가 확보용 하켄 하나 박을 마땅한 바위도 없이 그렇고 그런 경사의 빙벽과 바위가 계속 연결되고 있었다. 이제 빙벽이 끝나간다. 어제 새벽부터 계속 이짓을 하다가 보니까 힘도 없고 아이젠의 프론트 포인팅도 이제 불안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빙벽을 지나 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에서 하마터면 떨어질뻔 했는데 묘하게도 무너지는 밸런스가 잡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사히 바위지대에 도착해서 확보용 슬링으로 툭 틔어나온 바위를 묶어서 고정을 했다. 제발 바위가 빠지지 않기를 빌면서... 그다음 자기확보용 프렌드를 하나 설치하고 하켄도 하나 억지로 바위틈에 때려 넣어서 80자일을 고정 시켰다.
완료라고 기운차게 외치고 멍하니 서있다가 목이 말라서 산장에서 출발할 때 넣어가지고 온 하나밖에 없는 레몬을 껍질채로 깨물었다. 순간 시큼한 맛과 따가운 입술의 감촉을 느꼈다.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라고 생각은 하지만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먹지를 못했다. 거의 다 도둑고양이처럼 야금야금 먹어가다가 문식이 생각이 나서 1/4정도 남은 것을 바위에 끼워 두었다. 뒤따라온 문식이가 이걸 보더니 며칠간 물을 못먹은 사람마냥 정신없이 먹는다.
등반중 갈증이 심해서 확보할 때 마다 눈이나 특히 얼음을 깨어 먹었다. 얼음을 먹을 때 마다 돌멩이가 어그적 거렸지만 수통의 물이 반밖에 안남은 상태에서 아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입에서 피가 났다. 새빨간 피를 보니까 겁이 났다. 죽음이 떠올랐다. 죽음, 영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좌측으로 멀리 회른리 릿지가 보였다. 삶에대한 미련인가... 그쪽으로 가고 싶었다. 편안하게 두다리, 두팔을 흔들면서 걷는다는게 지상최대의 행복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4명이 모두 합류했다. 여기서부터는 승회가 바톤을 받아서 앞으로 나갔다. 이제부터는 끝없는 바위의 연속이다. 마찬가지 4명이 하나의 파티를 구성해서 오르기로 했고 선두는 45m 자일을 사용하기로 했다, 톱과 세컨이 45m 자일을 사용하고 써어드와 라스트가 80m 자일을 45m 자일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젠의 앞발톱으로 바위의 끝이나 모서리에 체중을 걸고 주마링으로, 혹은 손을 사용하거나 햄머로 얼음을 찍으면서, 제발 이놈의 바위가 빠지지 않기를 빌면서 아주 느린 속도로 전진을 계속했다.
이제 영국팀은 보이지도 않는다. 아주 바위지대를 넘어간 모양이다. 서너핏치 전진후 문식이가 선두에 나섰다. 나는 세 번째이다. 80자일이 나와 승혜사이에 걸려있어 선두가 45m 밖에 나가지 않아도 우리는 80자일을 사려야 하니까 힘이 무척 든다. 점심을 먹지도 못하고 저녁이 와버렸다. 모두가 바짝 쫄아있어 뭔가를 먹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무렵에 우리는 정상밑의 급커브를 이룬 바위지대를 눈앞에 두고 어디서 Bivouac을 할것이냐를 두고 망설이다가 오늘중으로 그곳을 돌파하기로 하고 어둠이 내릴때까지 계속 올랐지만 넘을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승회가 컨디션이 좋지않다며 빌빌거리고 있었다. 문식이가 마지막으로 45m 전진한 상태에서 날은 아주 어두워졌다. 그래서 현지점에서 비박에 들어갔다. 문식이가 제일 위에서 홍이하고 있게 되었고, 나와 승회는 그들보다 45m 밑에서 위치하게 되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엉덩이 하나 걸칠곳이 없다. 미치겠다. 이 커다란 벽에서 하다못해 바위구멍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거짓말 같다. 이렇게 깜깜해 질때까지 오른 이유도 저기가면 좋는 자리가 있겠지 있겠지... 기대를 한 탓이다. 벙어리 테라스에 우리가 때려박은 하켄 2개를 이용해서 자기확보를 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하켄을 하나 더 박았다. 그리고 우모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비박색을 덮어 썼다.
양말이 젖어있어 자기확보 줄에 의지해서 양말을 벗었다. 안그래도 시린발을 맨발로 비박색속에 넣었더니 감각이 없어졌다. 게다가 벨트를 찬 상태에서 자기확보줄에 묶여 있다보니까 비박색에 몸을 넣어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지퍼가 가슴에서 채워지지를 않는다. 그리고 힘들면 앉아서도 잘 수 있응줄 알았는데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특히 헬멧을 쓴 머리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듯 한데 방법이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이 너무 시려서 할수없이 아까 벗어놓은 젖은 양말을 다시 신었다. 동상예방으로 양말의 젖은 부분이 발가락에 닿지 않도록 모양말의 중간부분으로 발을 감싸야했다. 아무리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몸을 누이고 싶어서 엉덩이만 걸친 좁은 테라스에서 몸능 옆으로 뉘여 보았다. 조금 편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엔 옆구리며 오른팔이 마구 쑤셔온다. 나중엔 내가 끝이 안보이는 절벽에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보잘 것 없는 하켄 3개를 믿고 바위할 때 볼트 따먹기 하듯이 온몸을 끌어 올렸다가 내리곤 했다.
발광을 하다시피 좀더 편한 자세를 찾아 거의 5분에 한번씩 자세를 바꾸었다. 승회 머리위로 발을 얹어두니 참 편했는데 승회자식이 곧바로 짱알짱알 거려서 그만 두었다. 어둠속에서 저멀리 젤마트의 불빛이 아름답게 빛났다. 저 불빛 아래에서 凡人들은 저녁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지상에서의 행복을 즐기고 있겠지... 북벽 북벽 이놈의 썩어 자빠질 북벽... 우리는 과연 내일엔 정상에 설 수 있을까... 이대로 죽는건 아닐까...
어머니의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최근까지 나하고 어울려 다니던 영선이의 얼굴도 휙하고 지나갔다. 그래! 난 죽지 않는다. 분명히 살아서 간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 비박색의 지퍼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여서 머리위로 비박색을 끌어 올리면 작은 불빛이 반짝반짝 거리면서 일어난다. 정전기 현상이다. 국내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이어서 신비롭기까지 하다. 마치 북벽은 거대한 전기 덩어리마냥 움직일 때 마다 불꽃이 일렁인다.
04시경에 위에서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른다. 난 한숩도 못잤는데... 승회를 깨웠다. 주섬주섬 양말을 신고 플라스틱 빙벽화를 신는데 아직까지 깜깜한 밤이어서 무지 힘이 든다. 신발을 여기서 한짝이라도 떨어뜨리면 아마 동상으로 발을 짤라야 될거다. 아니 동상이 문제가 아니로 이로 인해 대원 모두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짝 모두 신고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나서 휴우∼.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침니 비슷한 곳을 돌파하니 이제 정상벽이 시작된다. 경사는 그대로 이어지고 눈과 얼음은 이제 드문드문 보인다. 우리가 올라온 밑을 보는데 어제밤에 600m 빙벽에 붙어있던 2명이꼼지락 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느 팀인지 모르지만 외국애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고 아마 2시간 정도면 우리와 같은 위치가 될 것 같았다. 쉴때마다 갈증으로 인해 얼음을 깨어먹고 휴식을 위해 바위에 머리를 대고 쉬는데 눈이 자꾸 감긴다.
잠깐씩 잠을 자기위해 움직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한기로 인해 손과 발이 떨려왔다. 스웨터를 입고 북벽 오르는 놈은 없을거라고 생각하지만 기동성을 따지기 앞서 너무 추웠다. 이빨이 딱딱 마주치는데다가 점점 손에서 발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어느 순간에는 쥬마로 등반을 하기도 하고, 작은 프렌드 하나 믿고 몸이 허공에 메달리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last로 오르려니까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장비 회수에다가 80m 자일처리, 또 배낭에는 45m 자일이 들어있고, 하켄도 회수를 해야하고 너무 피곤했다. 기나긴 줄에 주마를 걸고 오르려니 혹시 빠지거나 절단되어 북벽 끝까지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무척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끝자를 몸에 묶어 놓고 등반을 하자니 줄이 너무 길게 늘어져서 회수가 불편하고. 나의 벨트 여기저기 달아놓은 회수한 슬링에 프렌드, 카라비너, 너트가 아이젠에 걸려 너무너무 피곤하다. 너트와 슬링, 프렌드가 너무 많았다. 바르트후크는 무용지물이고 우리들의 시행착오를 생각해 보았다.
승회와 내기를 했다. 12시전에 정상 도착하면 내가 커피 사주고 16시 전후에 도착하면 그놈이 커피를 사주기로. 그만큼 정상은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회른리능으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눈에 띄고. 다만 나의 상태가 좋지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탈진상태에 하이포써미아가 서서히 나에게 오고 있었다. 이 망할놈의 북벽... 평평한 땅은 한평도 없고 모두가 똑같은 각도로 삐죽삐죽 나와있는 갈라진 돌들. 얼음 그리고 눈들... 지겹다. 체력과의 싸움, 졸음과의 싸움, 갈증과의 싸움, 그리고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정상을 5핏치 정도 남겨두고 승회가 Top을 섰다. 이제 문식이가 나의 확보를 봐주니 갑자기 든든해졌다. 어느 순간엔 너무너무 힘이 들어 씨팔 못올라 가겠다는 말이 틔어 나왔지만 드디어 정상을 한 핏치 남겨둔 지점에 도착했다. 마지막 안간힘을 위해 쏘세지에 사탕에 초코렛을 정신없이 입에 쑤셔 넣었다. 그동안 먹은게 별로 없고 잠도 못잔 상태에서 너무 무리를 했는지 이제 내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 몽롱한 무의식의 상태다. 단순히 햄머로 바위든 얼음이던 찍고 왼손은 얼음 혹은 바위를 잡고 이젠 겨우 걸려있는 미약한 프론트 포인팅으로 한피치를 끝내면 가뿐 숨을 몰아쉬며 확보한 하켄을 빼내는게 정말 힘이 들었다.
정상직하에서 20여분 정도를 차례를 기다리느라 대기하고 있는데 나에게 하이포써미아가 왔다는걸 알았다. 추웠다. 그리고 자고 싶었다. 지난 1월 3일 눈사태로 묻혔다가 구조되어 양폭산장으로 내려갈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여기서 엎어진다면... 안된다. 그럴수는 없다. 이제 한피치만 오르면 되는데... 무작정 차례를 기다리는게 너무 지겨워서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 자일을 타이트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피치를 오른다. 올라가니 문식이가 확보를 보고 있었고 선두 2명은 벌써 정상에 면해잇는 설벽을 올라가 버린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나는 모두 함께 안자일해서 정상에 오르고 싶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문식이마저 어지러워하는 나를 두고 출발 해버리고 혼자 남아있다가 자일을 회수했다. 모두가 자기 한몸 가누기가 힘든 것이다. 자일 회수후 손에 들고 갈려다가 너무너무 힘이 없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위에서 올라오라는 성화가 대단하다. 카메라가 나에게 있어 그러리라.
힘이 하나도 없는 발을 이끌고 자일없이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설벽을 올랐다. 춥고 메스껍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 오는 가운데 머리는 깨질듯하고 누가 살짝만 건더려도 넘어질듯한 탈진 상태에서 정상을 밟았다. 정상은 길게 일직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고 50m 전방쯤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재빨리 사진기를 끄집어 내어서 촬영을 시작했다. 곧 어떻게 될 것 같더니 사진을 찍다가 보니까 조금 상태가 좋아졌다.
30-40분 정도 정상에 머물다가 19시가 넘어서 하산을 시작했다. 어느정도 내려와서 바위가 시작되는 곳에서부터는 안자일을 실시했다. 난 너무 힘이 없어 Bivouac을 권유했지만 홍이가 듣지를 않았다. 따뜻한 물 한컵이 몹시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안자일을 하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내려가는데 갑자기 강력한 힘에 의해 5m정도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추락이란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회른리릉에 설치되어 있던 고정자일을 움켜 잡았다.
잡자마자 또 미끄러지는데 대책이 없었다. 게다가 떨어지면서 배낭이 옆구리에 걸려서 행동에 아주 불편했다. 이대로 떨어지게 되면 몸에 달려있는 햄머나 픽켈이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잇어 벗어 던졌다. 그리고 고정자일이 달려있는 피톤의 고리에 나의 고정자일을 걸기위해 젖먹던 힘까지 썼지만 실패했다. 드디어 죽는구나... 아∼ 나에게도 예외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바로밑에 있는 문식이에게 소리쳤다. 절대 손을 놓지 말라고...
그러고나서 하켄을 하나 박아서 확보를 할까 하다가 픽켈에 있는 슬링을 풀어서 고정자일에 매듭을 하고 다시 그 슬링을 나의 안전벨트와 연결했다. 됐다! 이제 더 이상의 추락은 없을 것이다. 다음 버려진 배낭을 다시 챙겨서 여기저기 흩어진 장비와 필름을 줏어 담고 보조자일을 끄집어 내어서 다시한번 확보를 추가했다. 상황을 보니 선두로 내려가던 홍이와 나만 줄이 묶여 있었고 중간에 두놈은 자일에 카라비너 통과만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줄줄이 사탕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홍이를 불러 보았다. 응답이 없다. 어느정도 손상을 받았는지 알길이 없는 가운데 두 번째로 내려가던 승회말이 구석에 쳐박혀 꼼짝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운데 마산의 무학산악회 애들이 북벽 공격조를 써포트하기 위해 올라왔다가 우리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를 이용하여 회른리 산장으로 연락을 취하게 되었고 결국 구조헬기가 뜨게 되었다고 우리한테 연락을 해왔다.
곧 온다는 헬기를 기다린지 30분이 지났다. 날씨가 급변하면서 주변에 개스가 끼기 시작했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기다리는 헬기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었인가... 아무래도 떨어진 대장의 상태도 상태지만 공포에 빠져있는 후배들도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힘을 받을대로 받아서 도저히 풀려질 것 같지않은 안전벨트를 풀고서 내려 갈려다가 탈진된 나의 몸이 생각났다.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 과연 무엇이 최선인가... 헬기가 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홍이가 잘못된다면? 그럼 나의 잘못이 크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는데 까진 하다가 죽자... 그렇지만 내가 내려가다가 다시 떨어진다면? 다시 겁이 났다. 도저히 절벽 아래로 내려갈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헬기가 오지않아 드디어 나는 안전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타이트하게 힘을 받고 웬만한 힘으로는 끄떡도 하지않아 아미나이프를 끄집어 내었다. 잘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이걸 본 문식이가 "형! 참아" 라고 난리를 친다. 나 마저 어떻게 될까봐 불안한가 보다. 그걸 보니까 내가 경솔한게 아닌가하고 다시 생각하게 한다. 헬기 관계를 무학산악회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알아보고 있는데 멀리서 드디어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불빛을 번쩍이면서...
헬기에서 내려온 금속줄에 메달려 나의 몸이 올라갈 때는 꼭 떨어질 것 같았다. 찌익찌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이제는 완전히 암흑천지가 된 북벽을 등지고 나의 몸은 공중을 나르고 있었다.
우리를 싣고 헬기는 바로 젤마트로 내려왔다. 홍이는 입원을 하고. 그만큼 보험가입을 주장했지만 그에 대한 댓가는 잔인했다. 헬기처리 비용으로 나온 엄청난 비용을 갚을 때까지 우리는 여권을 그들에게 줘야했고 결국 별 뾰족한 수가 없어 우리는 남은 돈을 몽땅 건네주고서야 젤마트를 떠날수가 있었다.
부당한 구조비용에 대해 여론형성을 생각도 해보았고 한국에서 돈을 부쳐오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무엇보다도 한번 꺾인 사기는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상태로 다음 목표인 아이거에 간다손 치더라도 과연 누가 등반에 나설것이며 또 성공한다는 확률이 어느 정도가 될는지.. 게다가 회른리산장에 있는 우리 짐을 가지러 갔다오는데 알프스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한여름에 눈보라가.... 다음날 파란 하늘아래 젤마트에서 본 눈덮인 마테호른의 모습은 마치 백상어의 이빨을 보고 있는듯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당분간 등반은 어려워진 것이다.
우리는 귀국을 결정했다. 비행기표는 마련되어 있었지만 취리히 까지의 차비가 문제였다. 마침 한국에서 가지고 온 필름이 많이 남아있어 우리가 묵고 있던 역전앞의 반호프 호텔 복도에서 단돈 1달러에 판다는 홍보문도 부쳤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결국 경선이형이 애지중지하던 펜탁스 카메라를 안살려고하는 사진관에 억지로 팔아서 기차비를 마련해서 우리는 알프스를 떠났다.
꿈속의 알프스, 꿈을 꾼 것 같은 알프스, 한바탕 꿈이었다고 할 수 있는 나의 알프스, 해외여행의 처음이었고 해외원정의 처음이었던 1987년의 알프스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지금의 집사람과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생각하던 나에게 더넓은 세계가 있음을, 눈이 시리도록 아픈 대단한 아름다움이 있다는것을...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나한텐 대한민국이 최고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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