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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딜런의 문학
장르 너머의 장르, 밥 딜런의 세계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1941년생 밥 딜런은 지금도 매년 평균 100회에 달하는 ‘월드 투어’(“네버 엔딩 투어”) 콘서트를 계속하고 있다. 미네소타주 광산 도시 히빙의 평범한 유대인 가정 출신이었던 로버트 알렌 짐머만(Robert Allen Zimmerman)은 1961년 2월말 뉴욕의 그린위치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시인 딜런 토마스를 따라 이름을 밥 딜런이라 바꾸고, 자신을 산전수전 다 겪은 ‘부랑아’로 꾸며댔다. ‘부랑아’라는 이미지는 ‘시골 출신의 평범한 얼치기 소년’이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전략이었지만, 그대로 평생 예술가로서의 밥 딜런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기표가 되었다. 그는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으며 끝없이 새로운 지평을 찾아 헤매는 ‘노마드’ 예술가이며, 실제로 그가 만든 수많은 노래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떠돌이, 부랑아(hobo, drifter, floater)이다. 그는 자신을 범주화하고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와 싸우며 자신을 끝없는 ‘되기(becoming)’의 과정에 세운다.
첫 앨범에는 이 노래 외에도 <고속도로 위에서 Standing on the Highway>, <길 위의 남자 Man on the Street>, <걷다 죽게 해주오 Let Me Die in My Footsteps>, <집시 루 Gypsy Lou>, <오랫동안 떠나 돌아가지 않으리 Long Time Gone>, <떠돌이 노름꾼 윌리 Rambling, Gambling Willy) 같은 노래들이 실려 있는데, 제목에서도 드러나다시피 일관되게 국외자, 아웃사이더, 부랑자들의 ‘길 위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첫 앨범에서의 이런 징후들은 그가 출발부터 정처 없는 ‘유목의 공간(nomadic space)’에 자신을 밀어 넣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가 지금까지 내놓은 38개의 스튜디오 앨범들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생산이었으며, 정주(定住)를 거부하는 유목의 예술가가 거쳐온 수많은 고원(高原)들이다. <떠돌이 노름꾼 윌리>의 마지막 후렴 “어디서 노름을 하건 그대를 제대로 아는 이 아무도 없지”처럼 밥 딜런이 어떤 주제로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할지 그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첫 앨범에서 그가 포크, 발라드, 블루스로 뿌리 뽑힌 부랑자들의 삶과 죽음을 노래했다면, 이어지는 앨범들을 통하여 그는 언플러그드(unplugged) 포크를 무기로 하는 저항 음악의 상징으로 부상하였고, 대중들이 그의 저항에 열광하며 최고의 찬사를 보낼 무렵 갑자기 일렉트릭에 플러그(접속)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록으로 전환해 환상적인 기타 연주와 폭발적인 사운드로 다시 기세를 올린 딜런은 이번에는 기독교의 ‘전도사’로 갑자기 변신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60년대 초반에 밥 딜런의 연인이었으며 그와 함께 저항의 상징이었던 존 바에즈(Joan Baez)가 팔순이 된 지금까지도 포크의 전설로 일관되게 남아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한마디로, 존 바에즈가 ‘범생이’ 가수라면, 밥 딜런은 끝없는 ‘되기(becoming)’의 과정에 있는 ‘생성’의 예술가이다. 1941년생 동갑인 존 바에즈가 포크계의 모범적이고 건실한 교장 선생님이라면, 밥 딜런은 고통과 번민으로 일그러진, 예민하고도 신경질적인 예술가이다.
I.
1962년 첫 앨범 <<밥 딜런>>을 낸 이후 첫 3년 동안 밥 딜런의 음악적 장르는 포크였고, 그 컨텐츠는 저항 가수였다. 흑인 인권운동, 반전운동과 맞물리면서 딜런은 짧은 기간에 저항의 상징으로 부상되었다. 이 시기 밥 딜런의 멘토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이었다. 첫 앨범의 <우디에게 바치는 노래 Song to Woody>는 그의 음악적 출발이 거스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 우디 거스리는 우리가 잘 아는 <이 땅은 너의 땅 This Land is Your Land>로 유명한 포크 가수로 진보적 ‘포크 운동’의 기수였다. 밥 딜런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 거스리는 죽음을 앞둔 병석에 있었고, 밥 딜런은 거스리를 대체할 새로운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 짧은 3년 동안 <바람 속에 불고 있어 Blowing in the Wind>, <두번 생각하지 마. 됬어.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거센 비가 내릴 거예요 A Hard Rain’s A-Gonna Fall>, <세상은 변하고 있어 The Times They Are A-Changin’>를 발표하면서 딜런은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오 그때가 오리라
바람이 멈출 때
그리고 미풍이 숨쉬기를 멈출 때
허리케인이 불기 전
바람 속의 고요처럼
배가 들어올 그 시간에
오 바다들은 갈라지리
그리고 배는 물결을 치리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들은 흔들리리
그러면 조수는 울려 퍼지고
그리고 바람은 마구 두드리리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리
오 물고기들이 웃으리
그들이 길 밖을 헤엄칠 때
그리고 갈매기들이 미소 지을 때
그리고 모래 위 바위들은
자랑스레 서 있으리
배가 들어올 그 시간에
그리고 배를 혼란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말들은
말해지는 순간 이해되지 않으리
왜냐하면 바다의 사슬이
밤새 부서져 그것들은
대양의 밑바닥에 묻힐 것이므로
(……)
오 적들은 일어나리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눈으로
그리고 그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리
그러나 자기 살을 꼬집어보고 나서 꽤액 비명을 지르리
그리고 알리 이게 모두 현실이라는 것을
배가 들어올 그 시간에
그러면 그들은 양 손을 들어 올리리
당신들의 모든 요구대로 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뱃머리에서 외치리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라고
그리고 파라오의 부족처럼
그들은 조수에 빠져 죽으리
골리앗처럼, 그들은 정복당하리
―<배가 들어올 때 When the Ship Comes in> 부분
II.
통기타에 기반한 포크 음악만이 유일한 저항음악의 상징이 되고, 딜런이 포크의 대부로 각인될 무렵인 1965년 7월 25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estival)에서 밥 딜런은 통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을 들고 나타난다. 밥 딜런 뒤에는 일렉트릭으로 무장한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Paul Butterfield Blues Band)가 서 있었다. 그는 마지막 음향 체크 때 입고 있던 폴카(polka) 물방울 셔츠를 벗고, 대신에 가죽 잠바로 무장을 한 채 무대에 올랐다. 포크 시절의 하모니카는 여전히 목에 건 상태였다. 그가 마치 “군중들과 결투라도 하듯 자신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Fender Stratocaster) 기타를 검(劍)처럼 휘두르며” 강렬하고도 현란한 일렉트릭 사운드로 <매기 농장 Maggie’s Farm>을 부를 때, 청중들은 미국 대중음악사에서 록의 새로운 역사가 써지기 시작했음을 몰랐다. 포크 음악의 열렬한 신도들은 밥 딜런의 ‘배반’(?)을 눈치채고 야유와 고함을 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밥 딜런은 “다시는 매기 농장에서 일하지 않을 거야, 노우, 다시는 매기 농장에서 일 안 해”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록큰롤의 대로로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그것은 그를 포크 음악의 황제, 저항의 아이돌로 못 박으려는 대중들에게 보내는 장렬한 고별사였다. 딜런은 대중들이 그에게 씌워주었던 저항 가수의 가면을 이렇게 한순간에 찢어버렸다. 대중들은 당혹했으며 당시 포크의 대부였던 피트 시거(Pete Seeger)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도끼로 전선을 끊으려 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피트 시거는 한 티브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도끼로 전선을 끊고 싶었던 것은 딜런이 일렉트릭으로 돌아섰기 때문이 아니라, 음향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매기 농장>과 같은 훌륭한 노래의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딜런은 이어서 <구르는 돌처럼 Like a Rollng Stone>, <웃으려면 많은 것이 필요해, 울고 싶으면 기차를 타면 되지 It Takes a Lot to Laugh, It Takes a Train to Cry>를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 두 노래는 뉴포트 공연 바로 며칠 전에 나온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다시 찾은 61번 고속도로 Highway 61 Revisited>>(1965)에 실린 것들이다. 이 중에서도 <구르는 돌처럼>은 일반적인 싱글 트랙보다 두 배나 더 길어(6분 이상) 라디오 방송에도 적절치 않은 데다가 무겁고 부담스러운 일렉트릭 사운드 때문에 콜럼비아 레코드사도 출시를 망설였던 노래이다. 그러나 뉴포트 페스티벌에서 포크 음악의 신도들에게 ‘배반’의 음악이었던 이 노래는 빌보드(Billboard) 차트 2위까지 오르며 공전의 대 히트를 쳤고 미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포크는 그럭저럭 60년대 말까지 명맥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 주류는 아니었다.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그는 대중들을 둘로 분열시켰다. 어느 기자의 말대로 1965년 7월 25일, 일요일 밤, 딜런은 대중의 “절반을 전화(電化)시켰고, 나머지 절반을 감전사(感電死)시켰다.”
그렇다면 딜런이 어쿠스틱에서 일렉트릭으로 넘어간 것은 당시에 그에게 분노했던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가 포크의 사회 비판 정신을 버린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 그렇지 않다. 딜런의 전기 중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평가되는 『집으로 가는 길은 없네: 밥 딜런의 삶과 음악 No Direction Home: The Life and Music of Bob Dylan』(1986)에서 로버트 셸턴(Robert Shelt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딜런은 그 이전의 3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새로운 종류의 표현을 창조하고 있었다. 딜런의 “포크-록(folk-rock)”의 창조는 대중문화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딜런의 새로운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비틀즈(The Beatles)를 포함한 대부분의 록 뮤지션들은 활기도 없고, 보잘 것 없는 가사들을 사용하고 있었다.”(강조는 셸턴의 것) 셸턴의 주장대로 문제는 가사이다. 딜런은 일렉트릭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데뷔 초부터 보여주었던 포크 성향의 가사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다만 그는 포크 스타일의 가사에 록의 사운드를 입힌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포크로부터 멀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게다가 같은 해(1965) <<다시 찾은 61번 고속도로>> 직전에 나온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그것을 모두 가지고 돌아오다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그는 앨범의 한 면은 어쿠스틱으로, 다른 한 면은 일렉트릭으로 배치함으로써 이미 과도기를 거쳤다. 사회나 정치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인간의 내면으로 시야를 확대한 것은, 이미 네 번째 앨범인 <<밥 딜런의 또 다른 면 Another Sideof Bob Dylan>>(1964)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보면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이 보여준 변신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예고되고 준비된 것이었다. 일렉트릭으로 전환하면서 딜런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자기 세계를 확대하고 확산한 것이었다. 딜런에게 데뷔 초부터 최근까지 일관되게 중요한 것은 가사와 가사의 효과적 전달이다. 그의 음악이 문학과 ‘친족 유사성(family resmeblance)’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밥 딜런의 대부분의 가사가 대중들이 암송하기 힘들 정도로 길고, 게다가 스토리를 담은 내러티브가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말(word)’에 대한 딜런의 강박적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III.
1966년 7월 26일, 우드스탁의 그의 집 근처에서 일어난 오토바이 사고 덕분에, 그는 당시에 그가 그렇게 원했던 ‘고요한 침잠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이후 그는 자기만의 독특하고도 강력한 로큰롤의 세계를 앞세우며 더욱 주목을 받았고, 그 주목의 정점에서 1966년에는 찬사와 비난을 감수하며 월드 투어 콘서트를 감행했다. 데뷔한 후 불과 4~5년 사이에 저항의 아이돌에서 로큰롤의 새로운 기수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사실상 20대 중반의 청년 딜런은 지칠 대로 지쳤으며 대중들의 ‘혹독한’ 관심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1967년에 발매된 여덟 번째 앨범 <<존 웨슬리 하딩 John Wesley Harding>>은 바로 그 오토바이 사고로 그가 본의 아니게 얻은 ‘고요한 칩거’의 시기에 만든 것이다.
꿈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았네
불같은 숨을 쉬며 살아 계셨지
그리고 난 꿈에서 그들 중의 하나였네
그분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
오, 난 화가 나서 잠에서 깼네
너무 외롭고 두려웠네
난 손가락을 거울에 대고
머리를 숙이고 울었다네
―<나는 꿈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았네 I Dreamed I Saw St. Augustine> 부분
이 작품에서 그는 매우 진지하게 자신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성찰을 한다. “난 손가락을 거울에 대고/ 머리를 숙이고 울었다네”는 표현은 자기성찰의 진정성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어쿠스틱과 하모니카로 시작하여 일렉트릭과 드럼을 뒤에 가볍게 깔고 있는 곡이다. 중간 반주 부분은 일렉트릭과 하모니카의 아름다운 합주가 돋보이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평안한 곡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다른 가수들도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이 앨범엔 이 곡 외에도 <프랭키 리와 유다 사제의 발라드 The Ballad of Frankie Lee and Judas Priest>, <사악한 전령 The Wicked Messenger>과 같이 『성경』에서 직접 소재를 차용하고 그것을 사회적 현실에 빗댄 곡들도 함께 실려 있다. 이런 종교적 메시지의 곡들은 또한 <지주여 Dear Landlord>, <나는야 외로운 부랑자 I Am a Lonesome Hobo>와 같은 사회비판적인 곡들과 나란히 실려 있어서, ‘플러그인’ 이전과 이후에도 그에게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가 노골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의 전도사로 나간 것이 이로부터 무려 10년 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갑작스럽고도 돌출적인 ‘사건’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그가 “가스펠 시대”에 부른 작품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가스펠 시대(1979~1981)를 대표하는 앨범들은 <<느린 기차가 와 Slow Train Coming>>(1979), <<구원 받은 Saved>>(1980), 그리고 <<샷 오브 러브 Shot of Love>>(1981)이다.
당신은 무대 위를 깡충거리며 뛰어다니는 로큰롤 중독자일 수도 있어
당신은 여자들을 우리에 가둬놓고 멋대로 마약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
당신은 사업가거나 아니면 어떤 지체 높은 도둑놈일지도 몰라
사람들이 당신을 의사 양반 혹은 회장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그러나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거야, 진짜야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거야
글쎄, 그것이 악마일지도 아니면 주님일지도 몰라
그러나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거야
당신은 주 경찰관일수도 있고, 대변혁을 지향하는 젊은이일 수도 있지
당신은 어떤 거대한 티브이 네트워크의 우두머리일 수도 있어
당신은 부유할 수도 가난할 수도 있어, 당신은 장님이거나 절름발이일지도 몰라
당신은 다른 이름의 다른 나라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거야, 진짜야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거야
글쎄, 그것이 악마일지도 아니면 주님일지도 몰라
그러나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거야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거야 Gotta Serve Somebody> 부분
이 곡은 <<느린 기차가 와>>의 첫 번째 트랙에 실린 곡이다. 이 노래는 ‘가스펠 시기’의 도래를 선언하는 곡이자, ‘기독 전도사’로서의 자기 선언문과도 같은 곡이다. 이 곡은 빠른 비트와 강력한 록 사운드, 그리고 랩처럼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가지고 대중들에게 매우 공격적으로 다가갔다. 1965년 일렉트릭으로 전환함으로써 포크 지지자들과의 일대 전쟁을 치룬 딜런은 이번에는 기독교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들고 나옴으로써 자유로운 영혼의 록 뮤지션으로 그를 고정하려는 대중들과 다시 불화한다. 이 노래는 직업이나 사상, 처해있는 상황들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믿음 혹은 불신’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중간지대란 없으며 “악마”를 섬기거나 “주님”을 섬기거나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외치는 이 노래는 밥 딜런을 신화화했던 수많은 대중을 격앙시켰다. 그들이 볼 때 ‘자유의 전사’였던 밥 딜런은 이제 ‘범생이’, ‘깡보수 예수 쟁이’가 되었으며, 이로서 그의 뮤지션 혹은 예술가로서의 삶도 끝장났다는 것이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예수’에게 밥 딜런을 빼앗긴 대중들은 분노하였으며, 분노한 대중들 앞에서 밥 딜런은 주눅 들기는커녕 1979~1981년의 3년 동안 ‘복음의 전도사’로서 자신의 과업에 철저하게 충실했다. 그는 이 기간에 수많은 콘서트를 통하여 기독교 이념을 노골적으로 전파하였으며 과거에 그를 아이돌로 만들었던 히트곡들을 거의 부르지 않았다. 콘서트 도중에 그는 종종 설교가로 돌변했으며, 1979년 아리조나 주에서 열린 한 콘서트에서는 대중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밖에 없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입장은 위 노래의 후렴에 나오는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밥 딜런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과 평론가들의 비판은 그가 지금까지처럼 기독교 담론을 그의 음악에 일부 섞은 것이 아니라, 그가 과거의 자신을 모두 부정하고 그 자리를 ‘예수’로 채워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위의 곡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식의 과격한 이분법은 사실상 그를 ‘기독 근본주의자’로 간주할만한 충분한 이유와 명목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은 이 시기 딜런 음악의 가사였지 사운드가 아니었다. 가령 기독 전도사로서의 자기 선언에 가까운 위의 노래 <누군가를 섬겨야만 해>를 담은 앨범 <<느린 기차가 와>>는 딜런에게 1979년 “남성 베스트 록 보컬” 그래미상(Grammy Award)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저명한 격주간 대중문화 잡지 『롤링 스톤 Rolling Stone 』의 평론가였던 잔 웨너(Jann Wenner)는 “이 새 앨범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이 음반이 지금까지 딜런이 만든 최고의 음반 중의 하나라는 느낌을 더욱 더 갖게 된다”고 하였다.
그룹 <롤링 스톤즈 Rolling Stones>의 기타리스트인 키스 리차즈(Keith Richards)는 딜런이 가스펠로 돈벌이를 하려고 한다면서 그를 “이윤의 예언자(the prophet of profit)”라고 비꼬았다. 실제로 딜런이 연이어 세 장의 가스펠 음반을 내면서 얼마나 많은 “이윤”을 얻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작업들이 대중가수로서 그의 경력에는 일종의 자살 행위(career suicide)였던 것은 분명하다. 세 장의 가스펠 음반을 낸 후 딜런은 이 음반이 보여준 세계에 대한 아무런 ‘작별’ 혹은 ‘포기’의 언급도 없이 또 다른 자신만의 음악의 세계로 넘어갔다. 어쨌든 이 시기는 대중가수 딜런에게 있어서 격심한 통증의 시기였고, 그 고통이 심해서였는지 자신의 자서전 『연대기들』에서도 이 시기에 대한 언급은 슬쩍 건너뛴다. 그러나 1984년 6월 21일 잡지 『롤링 스톤』과의 가진 다음의 인터뷰는 그가 여전히 ‘진지한’ 크리스천임을 잘 보여준다.
기자: <<느린 기차가 와>>, <<구원 받은>>, <<Shot of Love>>, 이 세 앨범들은 일종의 다시 태어난 종교적 경험(born-again religious experience)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것들인가요?
딜런: 전 그것을 절대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거든요. 그것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나는 내가 불가지론자(agnostic)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항상 어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a superior power)를 생각해왔어요, 즉 이 세상은 진짜가 아니고 앞으로 도래할 세상이 있다고 말이지요. 즉 어떤 영혼도 죽지 않았으며 모든 영혼은 신성(holiness) 안에서든, 불꽃 안에서든 살아있다고 생각해왔어요. 물론 아마도 많은 중간 지대(middle ground)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
기자: 당신은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는 사람입니까?
딜런: 네, 분명히요.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자입니다.
기자: 『구약』과 『신약』은 둘 다 똑같이 정당한 것인가요?
딜런: 저에게는요.
기자: 당신은 어떤 교회나 교회 모임(회중 synagogue)에 속해 있나요?
딜런: 그렇지는 않아요. 어, 독한 마음의 교회(the Church of the Poison Mind)에 속해 있지요[웃음].
이런 인터뷰를 보면 딜런이 돈벌이를 위해 가스펠을 했다는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다. 실제로 <<느린 기차가 와>>는 백만 장 이상이 팔렸고(돈벌이가 되었고) 딜런에게 그래미상을 안겨줌으로써 명예까지 보너스로 가져다주었지만, ‘돈벌이’ 자체가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음악은 미국 크리스천 음악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딜런이 세 장의 음반을 낸 후 그 자리를 떠나자, 기독교 음악 산업은 아미 그랜트(Amy Grant), 마이크 스미스(Michael W. Smith) 등 그들만의 본격적인 크리스천 음악가들을 양성한다. 그러나 딜런의 “크리스천 시기(Christian perios)”가 없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주목을 받게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크리스천 시기”의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독교적 주제는 딜런에게 있어서 사실상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다. 『밥 딜런: 영적인 삶 Bob Dylan; A Spiritual Life』(2017)의 저자인 스캇 마샬(Scott M. Marshall)의 분석에 따르면, 밥 딜런은 그가 공식적으로 기독교의 전도사로 나서기 전인 1961년에서 1978년에 이르는 시기에도 자신의 노래에 무려 89번이나 성경의 구절을 언급했다. 이런 점에서 크리스천 담론은 딜런의 변수(變數)가 아니라 상수(常數)이다. 그는 언제나 그 안에 있었고, 지금도 그 안에서 영혼의 피를 흘리고 있다.
IV.
딜런에게 지속되고 있는 것과 변화하고 있는 것은 크게 다음과 같다. 그에게 지속되면서 그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첫째 ‘거리의 비평가’로서싀 사회적 발언들이다. 딜런은 어쿠스틱을 버리고 일렉트릭을 집어든 이후에도 (대중의 오해와 달리) 평생 ‘길거리의 사유(street thinking)’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시스템의 문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저항 가수로만 보려는 모든 시각과 그가 저항 가수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버렸다는 지적은 둘 다 잘못된 것이다. 그는 협애한 ‘무리 짓기’가 또 다른 ‘진리 독점’임을 잘 알고 있으며, 진리를 유예하는 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유예는 ‘포기’가 아니라 ‘신중한 탐구’이다.
그렇다면 딜런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딜런의 『가사집 The Lyrics 1961-2012』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다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딜런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복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떠돌이, 노름꾼, 광부, 경찰, 공산주의자, 빨갱이, 흑인 소년, 배심원, KKK단원, 노예, 왕, 집시, 집시 여인, 지도자, 기차 승객, 강도, 살인자, 의사, 학자, 엄마, 아버지, 군인, 창녀, 판사, 간호사, 링컨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범죄자, 변호사, 저글링 하는 사람(juggler), 사기꾼, 점쟁이, 작가, 비평가, 상하의원, 아들, 딸, 인디언, 인권운동가, 정치가, 보안관, 장군, 정치계 거물, 부랑자(hobo), 무법자, 폭도, 빨갱이 사냥꾼, 인종차별주의자, 해고당한 노동자, 지방 검사, 주 방위군, 카우보이, 천사, 아기, 집시 여왕, 극빈자, 전도자, 교사, 현자, 고아, 성자, 도박꾼, 선원, 방랑자, 경비병, 해적, 부랑자, 광대, 공주, 나폴레옹, 최고사령관, 베토벤, 곡예사, 교수, 문둥이, 사기꾼, 스콧 피츠제럴드, 난장이, 하나님, 아브라함, 경찰국장, 폭동진압대, 신데렐라, 로미오, 노틀담의 꼽추, 착한 사마리아인, 오필리아(햄릿의 애인), 노아, 로빈 후드, 아인슈타인, 성직자, 보험회사 직원, 네로 황제,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칼립소 가수, 모나리자, 마약 판매상, 백작 부인, 하모니카 연주자, 장의사, 객실 청소부, 셰익스피어, 철도 인부, 사교계 신참 여성, 신앙인, 선교사, 예언자, 농부, 사업가, 전당포 주인, 흉악범, 성 아우구스티누스, 조커(joker), 도둑, 왕자, 하인, 유다 사제, 지주, 이민자, 전령, 제사장, 지명수배자, 음유시인, 소년, 무용수, 흑인 인권운동가, 교도관, 금발 여자, 칭기스칸, 호메로스, 전화 교환수, 사냥꾼, 늙은 창녀, 수학자, 목수, 바텐더, 이방인, 가톨릭 신부, 인질, 니체, 빌헬름 라이히, 수녀, 성모 마리아, 투우사, 장군, 광대, 백만장자, 집주인, 선한 목자, 대위, 배교도 여사제, 독재자, 사자, 메뚜기, 양, 마법사, 재향군인, 대사, 사교계 인사, 악마, 로큰롤 중독자, 회장, 급진파 청년, 방송국 사장, 부자, 가난뱅이, 맹인, 앉은뱅이, 공사장 인부, 시의회 의원, 모하메드, 부처, 예수, 아랍 족장, 사탄, 혁명가, 엉터리 치유자, 여성 혐오자, 노예상, 불신자, 바보, 칼 마르크스, 헨리 키신저, 간통자, 갱스터, 위선자, 니코데모, 루저, 미켈란젤로, 소총수, 병자, 절름발이, 불량배, 늙은 여자, 총통각하, 인도주의자, 박애주의자, 교황, 클라크 케이블, 순교자, 총잡이, 흑인, 가난한 백인, 꼽추, 베트남전 참전군인, 이교도, 성 베드로, 마르다, 오셀로, 데스데모나(오셀로의 부인), 밀주업자, 노동자, 노상강도, 요정, 과부, 고아, 기둥서방, 걸인, 행상인, 모조 천사, 경비원, 주교, 존 레넌…….
딜런의 음악에 대해 이런 식의 접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놀랄 수도 있다. 소설가도 아닌 한 대중가수의 노랫말에 이렇게 다양한 인물군들이 출현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딜런의 노래를 취향대로 골라 들으며 딜런의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않으면 이런 풍경을 절대 볼 수 없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배치 자체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구조이다. 1)군: 지배계급과 그들의 지배를 돕는 인물들 그리고 2)군: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하위 주체들(서발턴 subaltern)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사회 안에서 직·간접적인 긴장과 대립의 관계에 있으며, 마주치는 공간에서 이들의 이해관계는 늘 충돌한다. 다음으로 3)군: 이 두 계급 사이의 갈등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으며 계급적 대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대체로 하위주체들의 편에 서 있는 인물들이 있다. 4)군: 이 모든 관계로부터 일정 정도 초월해 있으나 궁극적으로 선(善)의 편에 서 있는 ‘종교적’ 인물들이 있다.
둘째, 딜런은 또한 그 모든 진정한 사유의 끝장이 신에 대한 성찰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의 한 분출로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 그가 가스펠 음반을 연이어 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예수쟁이(Jesus freak)”라고 비난했고, 이 시대를 소위 “가스펠 시대(Gospel period)”라고 괄호에 넣어버렸다. 어떤 팬들에게 딜런의 이 시대는 그 자체 ‘악몽’이었으며, 그들은 이 시대를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가스펠 시대 이전이나 이후에나 그는 단 한 번도 신에 대한 사유를 멈춘 적이 없다. 딜런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사유는 ‘변수(變數)’가 아니라 ‘항수(恒數)’이다. 신에 대한 모든 사유는 인간이 자신을 ‘약한 존재’로 인식할 때에만 가동된다. 오만한 인간은 절대 신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딜런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결핍의 존재임을 잘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늘 ‘저 너머’의 존재에 대하여 사유한다.
V.
이런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밥 딜런은 특정한 범주 혹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에 갇히는 것을 거부했다. 부랑자 이미지로 가득한 첫 앨범을 냈을 때(21세)부터 평생을 정신적 유목민으로 살아왔으니 어찌 보면 이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인지도 모른다. 한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나에게 모든 게 다 괜찮다(everything was fine)고 가르쳤지요. 그것은 생각하고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어요. 교과서에 다 나와 있던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보세요. 모든 게 다 괜찮지는 않았거든요. 수많은 거짓말이 난무했고 그것들을 다 참아야 했지요. 다른 친구들도 나처럼 느꼈지만 아무도 떠들지 않았어요. 그들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거든요. 그렇지만 난 그게 두렵지 않았어요.”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밥 딜런의 다른 면>>(1964)을 제작할 무렵 밥 딜런은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사람들을 위해서 더 이상 노래를 쓰고 싶지 않아. 당신도 알잖아, 난 대변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이제부터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을 쓰고 싶어. 내가 쓰고 싶은 방식은 내가 이야기하거나 걷는 것처럼 내 안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야. (……) 난 그 어떤 운동의 일부가 아니야. 어떤 조직과도 함께 할 수가 없다고.”
밥 딜런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사물들을 규정하는 데(defining) 익숙하지가 않아요. 그 노래가 어떤 것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조차도 난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야말로 밥 딜런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잘 요약해준다. 사물을 ‘규정’하는 순간 지식과 정보의 위계가 생겨난다. 모든 형태의 규정은 중심을 설정하는 행위이며 어떤 것을 ‘중심’으로 설정하는 순간, 다른 것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사실 이런 입장은 딜런이 저항 가수로서 절정에 있을 때 부른 노래인 <바람 속에 불고 있어 Blowing in the Wind>에도 이미 나와 있다. 그는 유목민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한 고원의 절정에 있을 때 이미 다른 고원으로의 이동이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내려가야
인간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항해해야
모래 속에 잠들 수 있을까?
그래, 얼마나 자주 포탄들이 날아가야
영원히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
내 친구여, 대답은, 바람 속에 불고 있지
대답은 바람 속에 불고 있어
―<바람 속에 불고 있어 Blowing in the Wind> 부분
밥 딜런의 노래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수많은 가수의 커버 버전(cover version)들을 양산했던 이 노래의 후렴처럼, 딜런에게 있어서 정해진 진리는 없다. 진리란 불어오는 바람처럼 유동적이며, 바람을 독점할 수 없듯이 그 누구도 진리를 독차지할 수 없다. 사실 이 노래는 밥 딜런을 저항 음악의 기수로 만들었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자유분방한 밥 딜런>>, 1963)에 발표되었지만, 실제로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1962년 초봄이었고, 이 노래를 초연할 당시 딜런은 “지금 부를 이 곡은 저항곡이 아니며 그런 식의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항곡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저항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부터 이미 저항이 자기 음악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의 작품들이 과연 ‘문학상’에 적절한 대상인지 논란이 일었다.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시의 기원이 음악이며 오히려 현대 시가 시의 ‘심장’인 음악성을 상실해왔음을 지적했다. 반대자들은 음악과 문학의 범주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딜런의 ‘문학’이 과연 노벨상에 버금가는 성취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이유를 그가 “위대한 미국 노래의 전통 안에 새로운 시적 표현들을 창조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딜런의 ‘음악’과 ‘시적 표현들’은 분리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밀가루 반죽에서 그 안에 뒤섞인 물과 우유와 밀가루와 설탕을 따로 분리해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스웨덴 아카데미가 밝힌 노벨상 수여 이유는 이 분리 불가능성을 교묘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딜런의 작품들은 장르를 떠나 혹은 장르를 넘어서 하나의 ‘세계’이며, 그 세계에는 음악과 문학과 철학과 사상이 뒤범벅되어 있다. 단지 노래 가사만을 따로 떼어놓고 그것을 딜런의 ‘문학’이라고 부른다 해도, 내가 볼 때 그것은 결코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밀리지 않는다. 그는 말을 조합하고 배열해 ‘시’를 만드는 탁월한 ‘기술’의 소유자이다. 나는 그가 고도의 시적 언어의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음악과 퍼포먼스까지 더해 누구도 넘보기 힘든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은 우리가 그냥 ‘딜런의 세계’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장르 너머의 장르이다.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교수로 문학 이론, 현대사상, 대중문화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 연구서 『저항의 방식: 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 연구서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 『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경계에서의 글쓰기』,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을 냈다.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시와경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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