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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존경할 인물을 발굴하여 이를 기리는 것은
죽은 이를 위함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하는 길이다. -
1. 공칠과삼(功七過三)
중국에 유통 중인 지폐는 1, 5, 20, 10, 50, 100위엔 6 종류이나 모두 같은 모택동 전주석의 초상이 삽입되어 있다. 많은 영웅들이 할거한 중국의 화폐에서 모택동 한 사람의 초상을 6가지 지폐에 모두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택동은 1893년 중국 호남성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 호남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중앙정치국, 중앙위원회의 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1954~1959)을 역임하고 1976년 9월 9일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1인체제의 독재정권 확립을 위해 너무나 많은 정적들을 숙청했다. 1968년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키고 1971년에는 그의 정치적 동지였던 린뱌오(林彪)를 숙청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많은 가담자들이 살해되었거나 아직도 박해를 받고 있다.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추진했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0년 동안 중국을 혼란에 몰아넣었고, 중국 역사를 30년쯤 퇴보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성보다 코드 즉 당성을 중시한 문화대혁명으로 장기간 대학은 폐쇄되고, 교육 과학 기술 등 전문분야의 지도를 당성이 강한 비전문가가 장악하여 전문지식 수준이 하락되었고 노(老) 전문가는 후계자 마저 양성하지 못하여 사회 발전에 큰 장애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모택동 통치의 급진적인 측면은 오늘날 혹독한 비판 대상이 되어 더 이상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건국의 아버지로서 모택동 개인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그는 중국인의 정체성과 자신감을 지키는 구심점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막강한 독재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그는 진시황 이후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공산당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고(대륙통일),
(2)넓은 땅 수 많은 사투리로 중국인 서로 간의 의사소통에도 통역사가 필요할 정도의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만다린을 표준어로 선정하여 학교 교육을 통해 보급함으로 언어적 통일 기반을 만들었고(언어통일),
(3)척관법 등 다양하던 도량형 기준을 미터와 그램 체제로 통일하여(도량형통일) 경제운영의 기본을 확립하였다. 이 결과로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달걀도 저울로 달아 거래하고 있다.
그의 공과에 대한 중국사회의 평가는 아주 단순 명료한 공칠과삼(功七過三)이다.
재직 시 그가 저질은 과오도 많지만 그의 공로가 과오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중국인들은 모든 종류의 지폐에는 물론 천안문 광장에도 그의 초상을 내리지 않고 그를 존경하고 있다. 그가 한국의 지도자였다면 지금 그렇게 편안하게 영민할 수 있을 것인가?
훌륭한 업적의 뒤편에 항상 과오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도 지나간 지도자들의 과오를 그들의 업적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국처럼 눈 감아 줄 수는 없는 것 일가?
역사상 존경할 인물을 발굴하여 이를 기리는 것은 죽은 이를 위함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하는 길이다.
역사적으로 우러러 볼 인물이 많을수록 국민적 유대감은 강해지고 국제사회에서의 그 나라의 위상도 높아진다.
그러기에 한 시대를 이끌다 간 우리 지도자들의 과오를 새삼스레 색출하여 공과를 따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위업을 찾아내어 선양함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미래를 위하는 길이 아닌가?
2.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관한 일화 두 토막
지금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은 이 나라의 건국(建國) 대통령인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정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일 듯하다.
그 결과로 지금 가장 많은 고등학교가 채택하고 있는 <금성출판사> 간행 <한국 근ㆍ현대사>에는
김일성(金日成)의 사진과 김정일(金正日)의 사진이 각기 3매와 2매가 실려 있는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은 김구(金九)와 함께 찍은 사진 1매가 달랑 실려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 이승만에게는 독재와 장기집권의 오명(汚名)이 씌워져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오명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공적(功績)이 있는 위인(偉人)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 주고 북한이 걸어간 길을 가지 않게 만들어 준 은인(恩人)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평가는 그것 대로 하되 그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도 역시 그것 대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여 당시를 체험하지 못하고 오직 책을 통하여, 또는 전문(傳聞)을 통하여, 그를 접해야 하는 후대(後代)들이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사실적(寫實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열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친일(親日)’ 문제를 가지고 그를 비난한다.
그가 불모(不毛)의 땅에서 건국하면서 ‘친일’ 경력을 가진 전문가들을 ‘용인(用人)’의 차원에서 활용했다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미국으로부터 귀국할 때까지
수십년간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무릅쓰고 해외의 객지를 전전(輾轉)하면서 벌인
항일독립(抗日獨立) 운동에 대한 평가는 어째서 그렇게 인색해야 하는가?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과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그가 저술하여 태평양전쟁 발발과 더불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Japan Inside Out’(‘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한 번 읽어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또 그를 ‘미국의 앞잡이’로 모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읽어보아야 할 역사자료가 있다. <月刊朝鮮>이 11월호로 68회째 연재(連載)하고 있는 역작(力作) <孫世一의 비교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類型) - 이승만과 김구>가 그것이다.
더구나, 해방 이후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과 6.25 전쟁 전후 이승만이 전개했던 대미외교를 기록으로 접하는 기회를 갖는 사람이라면 이승만을 가리켜 ‘미국의 앞잡이’라고 폄하(貶下)하기는 어렵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50년10월1일 동부전선(東部戰線)에서 이루어진 국군의 38선 돌파는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양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권도(權道)로 일시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가 없다”고 난색을 표하는 정일권(丁一權) 육ㆍ해ㆍ공군 참모총장에게 “당신은 나의 참모총장이냐, 아니면 유엔군 참모총장이냐”고 몰아세워 결국 그의 38선 돌파 명령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38선 돌파가 결행된 날인 10월1일이 지금 <국군의 날>이 되어 있다.
1953년 6월 18일부터 21일까지 사흘에 걸쳐 부산·대구·영천·마산·광주·논산·부평 등지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국군 헌병들에 의하여 일제히 석방되었다.
이 조치로 35,451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26,424명이 석방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이 조치는 한국이 반대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판문점 휴전협상에 대한 그의 반대 의지를 극적으로 폭발시킨 거사였다. 이로 인하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던 판문점 휴전협상에는 예상치 않았던 위기가 조성되었다.
당황한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을 통하여 시도한 석방된 반공포로들의 재수용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협조 거부로 허사가 되었다.
결국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문제의 반공포로 석방 직후인 6월에는 로버트슨(Walter Robertson) 특사를, 그리고 다음 달인 7월에는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을 서울로 파견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반발을 무마하는 설득 외교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상 타결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 그리고 주한미군의 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안보공약을 미국으로부터 쟁취하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과시했다.
3. 박정희 대통령 서거 42주년 추도사
42년 전 오늘, 당신께서는 충격적으로 저희들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날 저는 한일공업 노동조합 분회장으로서, 출근길 지하철 바닥에 뿌려지는, “박정희대통령 유고” 호외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유신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되겠구나”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로 무기정학 되었습니다.
교련반대, 유신반대로 대학을 두 번 쫓겨났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히틀러의 아우토반처럼 독재 강화의 수단이라는 운동권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저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36년 뒤 제가 도지사가 되어서야, 경기북부 낙후지역 발전을 위해서 고속도로 건설이 필수적임을 깨닫고, 당신의 선견지명에 반대했던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마이카시대를 외치던 당신을 향해, 히틀러 나치 독재의 국민차 ‘폭스바겐’식 선동이라며 교수들과 우리 대학생들은 반대했지요.
우리나라는 자동차 제조기술도, 자본도, 시장도 없고, 후진국에서 그 어떤 나라도 자동차를 성공시킨 사례가 없다며, 조목조목 근거를 대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신은 우리나라를 세계 5대 자동차 생산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철, 자동차, 조선, 중화학, 전자, 방위산업 모든 부문에서 당신은 최고의 산업 혁명가였습니다.
포항, 울산, 구미, 창원, 안산 신도시를 건설한 당신은 최고의 도시 건설자였습니다.
박정희신도시에는 첨단산업 뿐만 아니라, 주택, 대학, 공원을 갖춤으로써, 최고 수준의 복합신도시를 최단시간에 건설했습니다. 당신 이후의 노태우 신도시, 이명박 뉴타운, 박근혜 행복도시, 3기 신도시 모두 베드타운일 뿐입니다.
고속도로, 지하철, 항만, 공항 건설, 당신은 최고의 국토 건설자였습니다.
당신의 웅대한 구상과 최고의 마스터 플랜,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은
세계 역사상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습니다.
제가 늘 꿈꾸던 네 가지를, 제가 가장 미워했던 당신께서 모두 이루어 주셨습니다.
첫째. 배 부르게 먹는 꿈입니다.
농지개량, 통일벼생산, 비료공장건설, 댐 건설, 간척지개발 등 농업혁명으로 오 천년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둘째, 건강과 장수의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살아왔던 저희들에게 지금 같은 의료혁명은 꿈만 같습니다. 당신께서 추진하셨던 의료보험제도와 의료기술 수준은 미국인조차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셋째, 20대까지도 전기 없이 호롱불 켜고 살았던 저희들이
세계 최고수준의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당신의 원자력발전 덕택입니다.
넷째, 항상 물이 부족하여, 먹을 물 받으러 양동이를 지고 줄 서서 기다리던
저희들이었습니다. 농업용수도, 공업용수도 모두 부족한 물 부족국가에서 당신께서는 댐을 건설하고, 산림녹화를 하고, 수도시설을 발전시켜, 아무리 가물 때도 주방에서, 화장실에서, 맑은 물을 펑펑 쓸 수 있게 되었 다니, 꿈만 같습니다.
반공을 국시의 첫 번째로 삼으셨던 당신이 떠나신 후 42년만에 민주화가 도를 넘어, 지금 대한민국은 종북 주사파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한민국은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빨갱이, 떼강도들이 나라를 벌겋게 물들이고, 한강의 기적을 허물어 뜰이고 있습니다.
국가정보원에는 간첩 신영복의 글씨를 돌에 새겨 적화를 완성했습니다.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반일 죽창투쟁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핵•미사일로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한미동맹을 해체하고, 종전선언을 외치며, 주적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면 된다”던 당신을 향하여, “할 수 없다”고 침을 뱉던 제가,
이제는 당신의 무덤에 꽃을 바칩니다.
당신의 꿈은 식민지시대의 배고픔과 절망에서 자라났지만,
역사를 뛰어넘었고, 혁명적이었으며, 세계적이었습니다.
당신의 업적은 당신의 비운을 뛰어넘어,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당신의 무덤에 침을 뱉는 그 어떤 자도,
당신이 이룬 한강의 기적을 뛰어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2021년 10월 26일 김문수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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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래 오래 전에 화진포 이승만대통령 별장에 갔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오스트리아에서 틀니를 하지않고 틀니 비용을 갖이고 들어 왔습니다
그 때는 선진국인 오스트리아에서 틀니를 하지 않고 왜 딸라를 갖이고 들어 왔느냐고 하니까
이승만대통령이 1딸라도 아끼는데 어떻게 외국에서 1딸라 라도 씁니까? 하였습니다
애국자 입니다 ..
이승만박사가 대통령이 돼서 자유대한민국이 태어났습니다.
혼란의 틈에서 그래도 버틴 사람이 이승만박사입니다.
김 구는 민족주의자였기때문에 김일성과 공산사회주의에 끌려갔을지도 모릅니다.
통일이 되었다면 북조선공산사회주의 죽가로 현재의 대한민국은 없을 수도......
역사를 바로 알아야........
모택동은 우리에게 민족 상쟁의 비극을 유발시킨 인물 중 하나 임으로 우리가 존경할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공칠 과삼>은 그가 중국 사회에서 저질은 각종 만행에도 불구하고 그가 축은 후 중국 사회가 그에 대해 내린 평가 방법을 우리가 우리 역사상의 인물을 평가할 때 참고하자는 뜻으로 작성한 글 입니다. 역사상의 사건은 <그> 시절의 각종 여건을 감안하여 평가되어야 하며 <오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5천년 역사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한 마음으로 존경할 인물이 많지 않음은 이 역사적 사건의 평가를 평가 당시 여건을 기준으로 재 평가하기 때문은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