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시 문학관을 가다
김도솔
문학회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의 문학관을 답사하기 위해 출발하는 날.
처음으로 문학 기행을 갈 수 있는 기회라 마음이 들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야 깜박 잠이 들어 쪽잠을 잤다. 아침 일찍 들뜬 마음으로 회원들과 합류해 장도에 오른다.
아직 봄이라기엔 이른 2월, 서글픈 비가 때때로 진눈깨비가 되어 추적추적 내린다.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오랫동안 사모하던 님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바쁘다.
네 시간여 걸려서 고창 질마재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지붕마다 국화꽃이 그려져 있고 담장에는 누님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저절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마을을 지나니 곧 바로, 소요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는 곳에 폐교된 초등학교(선운분교)를 보수하여 문학관으로 꾸민 건물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담쟁이덩굴이었다. 우뚝 솟은 전망대를 칭칭 동여매고 있는 덩굴이 비에 젖어 시커먼 구렁이가 꿈틀대는 듯한 모양새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비가 서글프게 내려서인지 문학관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조용조용한 말씨에서 여인의 기품이 느껴진다.
일층에 있는 휴게실로 이동해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여인의 안내에 따라 전시실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일층에는 미당의 연표를 정리해 놓은 것과 대표 시집, 육필 원고들이 전시되어 있다. 휴게실에서는 선생이 지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가족사진 등을 볼 수 있다. 미당이 시인이 되는 데는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다독가였던 외할머니는 손자인 미당에게 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물 서너 살 무렵, 남편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여 일찍 청상이 된 뒤, 그 긴 외로움을 책으로 달래 온 걸까. 때로 바닷물이 불어 집 마당까지 들어오면, 할아버지가 찾아오셨다며 볼이 발그레 붉어지도록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런 외할머니의 밑에서 자랐으니, 선생이 감수성 풍부한 소년으로 자라는 건 너무 당연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열 살 무렵, 미당은 인촌 김성수 선생집의 마름 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줄포로 이사를 하는데, 훗날 줄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왜 냄새’라고 회고한다. 줄포의 포구에는 외국 상인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을 따라온 여인들의 비누 냄새가 왜 냄새였던 것이다. 미당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았기도 하거니와, 일본인 여선생님이 무척 예뻐해 주었는데, 그 때문에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시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도 마음에 부는 바람은 어쩌지 못하였는지, 중․고등학교 시절 다니는 학교마다 제대로 졸업을 못하고 방황을 했다고 한다.
선생의 시 중에 <선운사 동구>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에는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스물네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생은 흑석도에 작은 기와집 한 채를 사고 유산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그때 다 누렸노라고 한다. 그렇게 흥청망청 하다 보니 재산을 금세 다 탕진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다. 나룻배를 타고 선운사 입구까지 나온 다음, 십리를 걸어서 버스를 타려고 하니, 목이 컬컬해서 주막을 찾았는데 주막집에서 나온 주모가 뜻밖에 너무도 훌륭한 여인이었다. 어느 궁에 데려다 놓으면 후궁이 되고도 남을 만한 절색인데다 권주가로 부르는 육자배기 가락이 마치 당시 국창인 이화중선의 목소리가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하였다. 술에 취하고 여인에 취해 황홀한 시간을 보내던 미당은 내년에 동백꽃이 필 무렵에 꼭 한번 오시라는 여인의 말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그 후로도 잊지 못하고 지내다가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고향에 내려왔을 때, 선생은 뛰는 가슴으로 주막집을 찾았다. 그러나 주막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텃밭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물어보니 육이오 때 빨치산에 의해 주막은 불타고 여인은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너무 서글픈 마음에 시를 한 수 쓴 것이 바로 <선운사 동구>라고 한다. 훗날 선생은 그때 마신 술이 일생에 가장 향기롭고 맛있는 술이었다고 회고한다.
큰 아들이 태어나고 오랫동안 동생을 보지 못하다가 16년 만에 둘째 아들을 본 선생은 아들을 손수 가르치기 위해 당신도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 불어, 독어, 라틴어, 그리스어까지 온갖 외국어를 섭렵하셨다 한다. 선생은 ‘둘째 아들이 내 명줄을 늘려 주었다’고 말할 만큼, 그때부터 건강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다고 한다.
문학관은 전시실 하나하나가 오밀조밀 꾸며져 있어, 계단을 따라 올라 가면서 선생의 자취를 찬찬히 되짚어 보기 좋다. 가족관에는 아내와 보낸 오손도손 단란했던 시간이 담긴 사진들과 여기저기서 보내온 팬들의 편지들도 전시되어 있었고, 생전에 아끼던 책이며 모자, 파이프담배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선생은 술과 담배를 무척 즐겨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맥주를 특히 즐기셨다고 한다. 선생의 발길 닿은 곳마다 맥주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 있다고 할 정도로 맥주애호가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자, 선생은 일절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가 스무 날 만에 아내를 따라 가셨다한다. 마지막까지 신으셨던 하얀 고무신이 댓돌위에 놓여 있어서, 가슴이 찡해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전시관 또 한 층에는, 선생이 쓴 친일에 관련된 글들을 모아 놓고 있다. 알려져 있듯이,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선생의 친일 행적과 군사정권 예찬에 관해서는 역사적 평가가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 숨기지 않고 선생의 인간적인 비애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시관을 다 둘러본 뒤 오층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자, 앞으로는 탁 트인 바다와 곰소만이, 오른편으로는 선생이 영면해 계신 묘소가 보인다. 뒤로는 소요산의 소요봉과 문필봉이 문학관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예부터 문필봉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큰 문인이나 학자가 난다고 했는데, 이 문필봉이 있어서 선생 같은 큰 문인이 나지 않았나 싶다. 왼편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초가집은 선생의 생가다. 생가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선생이 잠들어 계신다고 한다.
20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당 서정주 시인. 일제 강점기의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사회의 갈등이 문학으로 표출되었던 시대에 사람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서정시는 우리 문학을 한 단계 끌어 올렸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은 미당의 시 안에서 더욱 빛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흐릿한 차창을 손바닥으로 닦다가 문득 선생을 생각했다.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로만 말갛게 선명해지는 밤의 풍경……. 어쩌면 선생은, 그 자신의 손바닥으로 우리의 유리창을 닦아준 것이 아닐까. 우리네 고유의 서정과 모국어를 곱게 닦아온 선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눈앞이 이토록 환한 것일지도 모른다. 창밖의 먼 불빛들이 그렇다고 대답하듯 반짝이고 있다.
ㅡ문예지 『작가 사상』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