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에 대하여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신라시대의 청소년 수련단체. 화랑이란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인데, 혹은 화판·선랑·국선·풍월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 군사적·사교적·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골품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여러 계층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이바지하였습니다.
기원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국가사회에 들어오면서 청소년 단체들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삼국지 후한서 등 여러 곳에 보이고 있습니다.
제정
4세기 들어 신라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사람이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서 등용하려던 제도로서 어여쁜 여성 두명을 가려 단장을 삼게 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화랑의 전신이라는 원화(原花)제도 였습니다. 처음 원화로 뽑힌 남모와 준정은 무리를 300여명이나 모았으나 얼마 뒤에는 두 여성 사이에 어여쁨을 다투며 시기하는 일이 생겨,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하는 사건이 생겨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발전
신라가 통일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많은 병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비록 그 확실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562년 대가야 정벌에 사다함이 화랑의 자격으로 참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이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대화랑은 설원랑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직과 수련방법
조직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한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어 있었으면 이 낭도들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수련방법
일정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한다.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 수련 의무기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나온 화랑에 대한 기록을 대략 정리해보면 화랑은 대개 15세에서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금강산이나 지리산 등 명승지를 찾아 다니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하였습니다.
성격
무사도로서의 성격과 놀이집단으로서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 궁극적 목표는 무사도로서의 성격입니다.
변천
삼국통일이후 귀족들의 문객 내지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 갑니다.그 뒤 고려시대에 팔관회에서 양가의 자제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하는 등 화랑도의 약간의 유풍이 남아있었습니다.
1)화랑 제도가 생겨난 년도는?
화랑도가 국가적 집단으로 조직 편성 된것은 신라 진흥왕37년인 576년의 일입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원래 화랑제도의 기원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가 거느리던 여자들로 조직된 '원화'라는 조직이었으나, 지소태후의 총애로 원화가 된 법흥왕의 딸 남모가 전대 원화였던 준정의 질투를 사게되어 준정의 계략으로 살해되자 576년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제도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2)생겨난 이유는?
일본학자 미지나 아키히데는 화랑의 기원을 원시 삼한시대의 청년집회로 보았고, 한국의 이기동씨는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에게 봉사하던 청소년집단을 모태로 생겨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종욱교수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근거로 화랑의 기원을 여자집단인 원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기원설화에 따르면 불심이 깊던 법흥왕이 미륵의 환신이라 믿은 미동을 거두어 최초의 화랑이 되었다고도 합니다만,
576년 지소태후에 의해 국가적 조직으로 편성되었을때의 화랑은 서라벌의 수비를 맏던 중앙군의 보조적 군사조직이었습니다.
3)최초의 1대화랑의스승은?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최초의 화랑은 법흥왕대의 위화랑입니다. 위화랑의 누이 벽화부인이 법흥왕의 애첩이라, 위화랑또한 법흥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법흥왕이 위화랑의 이름을 따서 '화랑'이라 칭했다고 하며, 최초의 풍월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화랑에 대한 기록은 최초의 화랑이며, 내물왕의 4대손으로 섬신공과 벽아부인의 자식이고, 그 누이가 소지왕과 법흥왕의 애첩이던 벽화부인이었다는 것 외에는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화랑도의 정신을 표현한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법사의 할아버지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당대 뛰어난 학자의 가르침을 받았겠지요.
4) 화랑은 귀족자제나 왕가쪽 자제분들만 들수있었다는데 평민은 1명도없었는지
있으면 어떻게 들어오게됐는지
화랑도는 최하 천민층을 제외한 모든 신분을 아우르는 제도였습니다.
즉, 귀족과 평민의 자제 모두가 가입가능한 제도로서 단순히 호국무사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고대원시사회에서 시작된 간 부족과 각 신분층의 갈등을 완화하는, 사회 통합적 기능도 함께 수행했습니다.
화랑도의 상층부를 형성하던 풍월주, 부제, 좌대화랑, 우대화랑, 전방대화랑, 좌화랑, 우화랑, 소화랑, 묘화랑등은 진골 및 대족의 자제가 구성하였으며, 지원에 의해 채워졌고, 낭도는 서민의 자녀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들로 준수하면 낭도가 될 수 있었고, 귀족의 자제도 낭도가 될 수 있었으나, 평민 낭도와는 차이가 있어, 귀족낭도들은 화랑이 될 수 도 있었습니다.
5)백제 고구려에는 같은시대때 무슨 무술제도가있었는지
고구려의 경우 '사무랑'이라는 무사가 존재했었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정확한 기록을 읽은 적은 없네요. 화랑도가 신라사회에만 있었던 특이한 호국무사집단이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아마 백제와 고구려에는 율령으로 편성된 군대외에는 호국무사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6)화랑에서도 군대가치 제대를하나? 제대를하면 어디로가는지좀..
풍월주를 지낸 화랑들은 상선이 되어 그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정치적인 힘을 길러 상대등이 되거나, 시중등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김춘추의 경우는 왕이 되었습니다.
낭도들은 13 ~14 세때에 동도, 18~19세엔 평도, 23~24세 엔 대두가 되고, 30세가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종사하던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었습니다.
7)국선(國仙)·선랑(仙郞)·풍월주(風月主)·화판(花判) 이라는게 자세히 무슨뜻인지
화랑도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특히, 풍월주의 경우는 화랑의 우두머리를 말하며, 풍월주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상선이 되어 지위를 보장받았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화랑의 무리를 선도의 무리라고 하는데, 이는 곧 신선의 무리라는 뜻입니다. 국선, 선랑은 그러한 신선의 무리를 의미하며,
특히 8대 풍월주 문노를 따르던 화랑도들을 호국선이라고 불렀습니다.
화판또한 화랑과 같은 의미입니다.
8)그밖에 자세한것 좀 써주시면 합니다..
화랑도엔 32명의 풍월주와 1명의 원화가 존재합니다.
681년 신문왕대에 이르러 김유신계의 가야파 화랑도의 반역으로 문을 닫기까지 약 150여년 존속하였으며,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던 집단입니다.
화랑도의 풍월주는
1대 위화랑
2대 미진부 - 미실의 아버지
3대 모랑 - 법흥왕의 아들. 원화였던 남모의 동생.
어머니는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부인 부여씨
4대 이화랑 - 위화랑의 아들
5대 사다함
6대 세종 - 진흥왕의 동생
원화 미실 - 미진부의 딸, 세종의 부인, 진흥왕~ 진평왕대에 이르는 신라 최고의 권력자.
7대 설화랑
8대 문노 - 김유신이 받들던 신라 최고의 화랑
9대 비보랑 - 법흥왕의 손자
10대 미생랑 - 미진부의 아들. 미실의 동생.
11대 하종 - 세종과 미실의 아들
12대 보리 - 이화랑의 아들. 원광법사의 형
13대 용춘 - 진지왕의 아들.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14대 호림공 - 문노공의 사위
15대 유신공 - 신라 대영웅 김유신
16대 보종공 - 설화랑과 미실의 아들.
17대 염장공
18대 춘추공 - 무열왕 김춘추
19대 흠순공 - 김유신의 동생
20대 예원공 - 보리공의 아들
21대 선품공
22대 양도공
23대 군관공
24대 천광공 - 흠돌의 난 당시의 상대등. 신문왕을 돕지 않은 죄로 난이 진압된 후 처형됨. 이후 화백회의가 유명무실해 짐.
25대 춘장 - 염장공의 아들
26대 진공
27대 흠돌 - 김유신의 조카. 신문왕의 장인. 흠돌의 난을 일으킴.
28대 오기공 - 예원공의 아들. 화랑세기를 지은 김대문의 할아버지
29대 원선 - 흠순공의 아들. 유신의 조카.
30대 천관 - 군관공의 아들
31대 흠언 - 김흠돌의 아들
32대 신공 입니다.
풍월주를 배출하는 가문이 몇 있는데,
1세 위화랑 - 4세 이화랑 - 12세 보리공 - 20세 예원공 - 28세 오기공 의 가문이 가장 많은 풍월주를 배출한 가문이고,
부자가 계승한 경우는 9번으로 18명의 풍월주가 부자가 풍월주를 계승하였으며,
나머지 9명의 풍월주들도 모두 화랑을 배출한 가문 출신입니다.
또한 왕실출신의 풍월주도 8명이나 되며, 미실의 영향력으로 풍월주가 된 이는 무려 9명에 달합니다.
이처럼 화랑도의 풍월주는 신라 사회의 가장 유력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정치적 권력과도 직접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신문왕대에 이르러서야 김흠돌의 난에 의해 화랑도가 폐지되고 난 이후에야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이 확립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