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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8일∼11.9일 1박 2일의 일정으로, 한국스카우트 서울남부연맹이 주관하고, 교육인적자원부가 후원한 '청소년 문학기행'을 떠나는 날. 평소와 다르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배부할 자료 중, 빠진 내용이 있어 복사를 하기 위해 6시 20분경 학교로 향했다. 차들이 한산한 도로에는 바람까지 씻어내리듯 가랑비가 내렸다. 출퇴근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출발 한지 10분 남짓 지나서야 학교에 도착을 했다. 7시 18분, 자료를 복사했다. 개인 짐을 넣은 배낭을 메고 약속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만날 학생들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교문을 나섰다.
스카우트연맹 앞에서 양선우과장을 만나기로 한 8시까지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바쁜 마음으로 달마산 쪽에서 내려오는 빈 택시가 오는지를 뒤돌아보면서 걸었다. 학교 앞에서는 빈 택시를 타는 것은 평소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흑석동 84번 버스 정류장 쪽에서는 택시를 잡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을 하기 위해,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등 뒤에서 빗길에 들리는 차 소리에 귀기울이고 빈 택시가 아닐까 싶을 때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84번 버스 정류장이었다.
7시 28분, 콜택시로 부르지 않았는데, 택시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세요. KBS본관요.' 큰 도로로 빠져나온 택시는 여의도를 향해 한강 위를 달리는 보트처럼 달렸다. 해가 뜨지 않은 무거운 그림자같이 잔뜩 흐린 날씨, 한강 다리 위를 출근 차량들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줄을 서기 시작했다. 3cm 열린 창으로 회색의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숨을 쉴 때마다 빈 속에 연하게 타서 마신 커피향이 진했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배 아픈 사람이 화장실을 급히 찾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하늘은 비를 쏟아놓을 장소와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7시 41분, 스카우트연맹 앞에 도착을 했다. 택시를 내린 곳은 '고려관광버스'가 주차해 있는 뒤였다. '서울72바 2111' 1박 2일 청소년 문학기행 장소인 강원도 만해 마을과 봉평 가산 이효석 문학관,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를 태우고 갈 버스라는 생각을 했다. 양선우과장을 기다리면서 비에 젖은 노란 낙엽을 쓸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40의 생각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7시 46분, 날씨가 걱정스러웠다. 관광버스 앞에 주차된 아방떼 승용차에 떨어지는 단풍이 모자이크를 만드는 것을 바라보며 약속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정수 대장님' 뒤를 돌아봤다. 양선우과장이 반갑게 나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준비물을 가지러 가는 양선우과장과 서울남부연맹 사무실로 들어갔다. 양선우과장이 타서 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안병일부장이 출근을 했다. 6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안병일부장의 배웅을 받고 내려왔고 버스를 탔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버스는 화곡동에 있는 성지중고등학교를 향했다. 피곤에 잠깐 눈을 감은 순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성지중고등학교에 거의 도착을 할 즈음에는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양선우과장도 나도 걱정이 되었다. 8시 40분 학교 앞에 도착을 했다. 준비를 하고 있던 학생들 몇 명이 우산도 쓰지않고 뛰듯이 버스를 탔다.
이 학교는 1978. 3. 15일 개교를 했고, 2001. 2. 9일 도시형 대안학교로 지정을 받았다고 연혁에 적혀있었다. 현관 왼쪽에는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희망이 있는 학교'라고 적힌 것에 눈에 띄었다. 인간 사랑, 사회적 책임, 삶의 기쁨과 보람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시 55분경, 서울남부연맹 안병선국장께서 우리들의 출발을 배웅하기 위해 도착을 하셨다. 학교장님과 인사를 했다. 그리고, '청소년 문학기행'에 동행을 할, 이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이종진선생님을 양선우과장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인사를 나눴다.
9시 6분, 24명의 학생들을 태우고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부터 운전수 쪽 두 번째 의자에 앉은 노란 잠바를 입은 여학생 한 명이 어제 두 시간밖에 못 잤다, 머리도 감지 못했다고 하면서 투덜거렸다. 오늘 출발하는 것을 제대로 알지를 못했던지,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서도 짜증과 신경질을 부렸다. 그런가하면, 출입문 쪽 내 뒤에 앉은 남학생 한 명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라이브를 했다. 노래방에서 90점 이상 나올 노래 솜씨였다. '선생님, 거기 가면 왠만한 편의시설 있겠죠? 서울 촌놈이라 설악산은 안 가봐서...........' 나는 남학생이 왜 그렇게 편의시설이 있느냐고 묻는지 말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교사가 아닌 사람이라면 어떠했을까? 문학에 관심이 있는 청소년이나, 스카우트 대원들 중, 학교로부터 추천받아 행사를 하는 것이 좋았겠다. 아마도 양선우과장은 이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출발부터 이런 아이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함께 동행을 하신 학교의 이종진선생님께서 아이들이 힘들게 하면 얘기를 하라고도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솔직한 삶이 출발부터 마음에 들었다.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학생들이라는 것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몇몇 학생들에게서 느끼고 함께 한 일이었기에 처음 만나는 학생들이었지만 정이 생겼다.
9시 25분, 내 뒤에 앉은 남학생은 'MT인줄 알았어.' 조금은 문학기행이라는 말에 못 마땅한 눈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표지를 포함해 15P 분량의 [2003 청소년 문학기행] 자료를 나눠주었다. 양선우과장이 나의 이력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나는 과정과 일정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빠른 시간내에 어떻게 하는 것이 이들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누구게? (대답이 없다.)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대답이 없다.) 입학식을 한 후 어느날 복도를 지나는데, 1학년 여학생 두 명이 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구게? 여학생들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아랑곳하지 않고, 또 똑같이 내가 누구게? 여학생들은 더욱 이상하게 나를 쳐다봤다. 내가 이정수야 했다. (그러자 눈 뜨고 앉은 학생들 몇 명은 고개를 갸우둥거렸다.) 텔레비전에서 나 못 봤니? 내가 이정수라고. 여학생 한 명이 나를 자세히 살피더니 메이크업을 안 하셨군요. 했다.' 나의 이름을 학생들에게 알리는 것이 이렇게 길었다. 나의 이와 같은 소개에 또렷하게 관심을 표시하는 학생도 몇 있었으나, 머리를 염색한 남학생은 맨 뒷좌석에서 다리를 벌리고 자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어떤 얘기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또 이런 얘기를 했다. '하루는 아침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저만치서 내 쪽으로 낯 익은 남학생이 걸어오고 있는거야. 그곳에 출입문이 있었다. 나는 그 남학생에게 너 왜 이쪽으로 오니?라고 물었지. 그랬더니 '비둘기가 닭이 되려나봐요.' 하는 거야. 대답이 이상하지.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남학생이 걸어온 곳을 봤지. 그런데, 그곳에는 4∼5마리의 비둘기들이 어제 학생들이 흘려놓은 과자를 쪼아먹고 있는데 모두를 배가 빵빵한거야.'
또 이런 말도 했다. '학생들이 나 보고 변태라고 한다. 왜 그런가하면 '97년도에 남녀공학이 되었거든. 어느 날 운동장에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여학생 몇 명이서 계단에 앉아 있는거야. 다리를 벌리고. 그래서 나는 그 여학생들에게 야, 너희 팬티 보인다 그랬지. 그 이후 학생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나의 말에 한 두 명은 눈을 뜨고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흔들리는 버스의 의자를 잡고, 1박 2일간의 과정과 일정에 대해 설명을 간략하게 했다.
10시 4분, 하남톨게이터를 지날 때, 기사님이 가지고 다니는 영화 CD 중 '글래디에이터'를 틀었다. 계획대로 준비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CD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영화를 보는 것도 생각을 갖고 감상을 하면, 독서다 하는 것을 알려주려고 준비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10시 13분, 팔당 4터널을 지난 버스는 10시 40분, 휴게실에 내렸다. 11시 55분 학생들은 버스에 탔다. 그런데, 한 명의 여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타지 않았냐는 말에 학생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 뒤에서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남학생은 여학생 이름을 얘기를 하면서 화장실에 똥 싸러 갔다고 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여자 화장실 앞에서 이름을 불렀다. 3번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네 번째, 대답을 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여학생은 여기까지 와서 부르느냐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배를 잡고 속이 쓰리다고 했다. 시원한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했다. 가락국수라도 사 줄까라는 말에 물을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럼 오뎅국물은 어떠냐고 했다.(좋다는 표정을 읽었다.) 몇 발자국 앞에 오뎅을 파는 곳이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오뎅 국물만 팔겠느냐고 했다. 우리들 사이를 궁금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주머니에게 1,000원을 드릴테니까 오뎅 국물만 달라는 나의 말에 여학생은 오뎅 국물 먹는데 무슨 돈을 주냐고 투덜거렸다. 아주머니는 오뎅국물을 그냥 주시겠다고 했다. 가지고 가서 먹고 싶다는 말에 1회용 그릇에 담아주시면서 파도 올리고 후추도 쳐 주었다. 국물을 한 번 마신 여학생은 짜다면서 먹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내가 남은 국물을 다 마셨다. 여학생은 내게 안 짜냐고 물었다. 국물이 짜긴 짰다. 아무래도 여학생의 속이 많이 쓰리구나 생각했다. 버스는 11시 1분 출발했다. 어떤 학생도 늦게 탄 여학생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11시 40분, 홍천의 단풍 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버스는 비를 흠뻑 맞으며 도로를 달렸다. 농촌의 들녘에는 탈곡을 한 볏짚들이 논바닥에 깔려있었다. 오래지 않아 눈이 쌓일 것만 같은 풍경들이다. 2차선 도로는 드라이브 코스처럼 좋았다. 빗길이라 버스는 서행을 했다. 11시 53분, 양양을 99km 남겨둔 지점, 왼쪽 도로변 무허가 건물, 70년대 간판 같은 모양의 청국장집이 보였다. 청국장 냄새가 빈 속에 아침을 굶은 배고픔과 한가로운 마을 풍경에 취해 어지러웠다. 철정교를 지나고 있었다. 12시 30분 가남휴게소에서 잠시 의자에 뻣뻣해진 허리를 펴기 위해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에 출발했다.
오후 1시 15분, 비는 계속 내렸고 버스는 우리들을 만해마을에 내려놓았다. 만해마을 로비(문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학생들은 현관 왼쪽에 있는 컴퓨터를 한 대씩 차지하고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거나, 자주 들리는 사이트를 열어보았다. 몇몇 학생들은 밖으로 나갔고, 이곳저곳을 관심있게 보았다. 점심식사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1시 25분에 먹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은 후, 1시 50분 강당에 모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만해마을'에서 각자 두 가지씩만 알아보자고 했다. 만해 실천 선양회의 법사 한 분이 청소년 문학기행을 온 학생들에게 만해 한용운선생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삶(불교와 독립운동가)에 초점을 맞춰 설명을 해 주었다. 조용한 성품에 사투리 장작 타는 듯한 어투가 느껴지는 산사의 수도승같은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셨다. 특히,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3.1독립선언을 한 후,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갈 때, '민족 대표답게 데려가라.........'며, 승용차 1대로 구치소로 이동을 했다는 얘기와 선생님은 구치소에 들어가서 변호사를 쓰지 않았으며, 사식을 하지 않았으며, 보석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한 겨울의 소나무와 매화 같은 분이셨던 만해 한용운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문인의 집'을 나와 법사님의 안내를 받았다.
맹세를 세우는 장소인 '서원보전'에서 학생들 각자는 맹세를 했을 것이다. '서원보전'을 지나 11계단을 오를 때 하늘을 봤다. 이처럼 하루에 한번 이상 하늘은 본다면, 쓸데없는 생각(번뇌)을 벗어 낼 것만 같았다. 탱화(진리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대신 자연 채광을 살린 법당에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섰다. 노스님 한 분과 몇 분의 손님이 계셨다. 노스님은 우리들에게 '그 뭐해요. 절 해요............' 그 분들 중에는 동국대학교 총장 내외분도 계셨다. 노스님께서 모두들 절을 한 뒤에 두 분을 소개해 주셔서 안 일이다. 법당에서 법사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다음에는 범종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그곳에서 몇몇 학생들은 종을 치면서 자신의 소원을 땅과 하늘에 알렸다.
다음 장소로 안내 받은 곳은 박물관이었다. 벽에는 [님의 침묵]이 적혀있었다. 모두를 입을 맞춰 낭송을 하자고 법사님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제대로 맞지 않자, 아나운서와 다름없는 맑은 소리를 가진 여학생 한 명에게 낭송을 부탁했다. 밖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비에 젖은 몸을 움츠리게 했다. 2시 45분, 만해마을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버스가 있는 곳까지 법사님은 우리들을 배웅해 주셨다.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남으시는지, 언제던지 다시 한번 찾아줄 것을 부탁하셨다. 비를 일광욕하듯 맞으며, 서로의 이별에 아쉬움을 간직한채로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3시에 만해마을을 출발했다.
숙소는 잼버리장,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3시 40분 '문학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1시간 강의를 하기 위해 강당에 도착을 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강당이 있는 건물에는 관리인이 없는지, 양선우과장은 확인을 위해 관리실을 갔다왔다. 차 안에서 몇 분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언제 숙소에 들어가냐고 했다. 그리고, 몇 명은 배가 고프다고도 했다. 학생들은 숙소에 들어가 쉬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강의가 있다는 말에 더욱 더 추위에 떨었던 몸에 피곤까지 느껴졌다. 강의는 준비한 자료와는 다르게 했다. '문학의 이해'라는 일반적인 강의로는 피곤에 지치고 문학에 대해 관심이 부족한 학생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P 분량으로 준비한 '문학의 이해'라는 프린트를 받은 학생들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적는 란을 보고 싫은 소리들을 했다. 1)문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가슴에 담아 두고 살았던 답답했던 진실이나 침묵의 소리 중, 어느 것이던 각자 두 가지만 적어 봅시다. 3)휼륭한 삶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즉, 배우는 일, 돈 버는 일,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내 삶의 우선 순위 두 가지를 적고, 간결한 기도문을 작성해 보세요. 이 셋 질문은 연이어 있는 것이었고, 설명 중간 중간에 끼어 있던 물음이었다.
문학은 가치있는 경험이다라고 하면서, 칠판에 생각, 느낌, 상상, 경험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것들로 문학을 읽고 이해하고 쓰는 것이라는 것만은 설명을 해야 했다. 문학이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가장 쉽게 이야기며 노래다라는 것으로 이해를 돕고자 했다. 문학은 현실에서 나의 눈물과 아픔과 고통이 문학을 아름답게 하며,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오늘 문학기행에 동행한 학생들의 삶은 그대로 문학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문학의 기능이나, 전반적인 기초 이론에 대해서 강의를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문학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학생들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삶을 어떻게 문학을 하는 나의 삶과 코드를 맞춰 이해를 시킬 것인가,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까가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미칠 것 같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숙제 한번 해가지 않았던 나, 집에 오자마자 방에 가방을 던지고 구슬과 딱지가 들어있는 양동이를 들고 골목에서 놀았다. 동네 골목 유리창이 깨지면, 10개 중 9개는 말하나마나 범인이었을 정도로 개구쟁이었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프기 시작한 어머니, 그 어머니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식물인간으로 7년간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던 때부터 360°달라졌었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 '일기'는 내게 부모요, 친구요, 내 삶의 전부였다는 것을 얘기했다. 내게 글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절실했었다. 사람의 냄새를 잃어버진 내게 종이 냄새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런 내게 사춘기는 없었다. 뭔가 자신들과의 생각과 느낌이 통했는지, 그것이 아니면, 내게 사랑 말로 포장된 동정심을 느꼈는지, 추위와 배고픔에 졸린 눈을 감듯 뜨고 들으려 애쓰는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인간은 경험 이상 살 수 없는 법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너희들이 문학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토양(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한 가지 얘기를 더 했다. 나의 고향집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방이 할아버님의 사랑방이셨다. 겨울에는 농촌에서 할 일이 없으니, 동네 어른들이 내 집 사랑방에 마실을 오셔서 담배도 태우시고, 새끼와 가마니도 치고, 지나간 이야기도 나누시곤 하셨다. 할아버님은 겨울에 돌아가셨다. 며칠 지난 어느날. 동네 어른 한 분이 저녁 늦게 대문을 들어서셨다. 사랑방 앞 섬돌 위에 평소 할아버님께서 신고 다니시던 하얀 고무신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친구가 죽은 것을 아셨는지 쓸슬하게 대문을 걸어나가시던 모습을 어두운 마당에서 눈물로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발길이 닿던 곳. 평소와 다름없이 오셨다가 친구가 죽은 것을 깨닫고 걸음을 옮기시던 할어버님의 뒷모습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고 했다. 이것 또한 문학이 아닌가? 학생들은 손에 잡히듯 문학이 다가서지는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의 얘기에 관심있게 듣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삶이 경험이 곧 문학이다. 나와 함께 문학기행에 참가한 24명의 학생들은 문학의 이론을 잘 모르더라도 이미 이들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문학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눈빛에서 읽었을 때 행복했다. 나는 강의를 마치면서 '인생을 주먹 쥐고 살지말고 손뼉치며 삽시다.'라고 했다. 주먹의 뜻은 말하지 않았다. 학생들 스스로가 나름대로 주먹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했다. 강의는 4시 55분에 끝났다.
5시 5분, 화장실이 급한 학생들은 볼 일을 보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식당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자기 소개를 하기로 했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니 모두들 잘 알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주야간 학생들이 섞여 있는 관계로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소개를 잘 하는 학생에게는 상품이 있다고 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틀에 맞춘 소개를 하였지만, 몇몇 학생들은 특별하게 자신을 소개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노래를 부른 학생도 있었다. 6시 15분 저녁을 황태찜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간에 대명콘도에서 잠시 버스를 세우고 시장을 봤다. 남학생 한 명은 학생들이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함께 내렸다. 6시 40분에 숙소를 향해 출발을 했다. 자작시 쓰기와 낭송이 끝난 후, 한 컵식 마실 맥주도 샀다.
숙소는 남학생 201호, 여학생 202호, 선생님 203호를 배정했다. 남학생들은 1층 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하고, 여학생은 2층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숙소에 짐을 들여놓고, 간단한 세면을 한 뒤에 24명의 학생들은 201호로 모였다. 그 때 시간 7시 10분이었다. 먼저 학생들에게 저녁 일정에 대해 설명을 했다. 노란 잠바를 입은 여학생(배가 아프다고 했다.)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였다. 나를 포함해 24명을 채운 방은 비좁았다. 7시 10분∼7시 50분까지 자작시 쓰고, 시화전 준비하기. 7시 50분∼8시 30분까지 자작시 낭송하기 10분간 휴식을 하고, 8시 40분∼9시 40분까지 만해와 가산선생님의 문학 이해 시간으로 운영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9시 50분∼10시 30분까지 맥주 한 컵씩 하면서 자유로운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10시 30분∼11시 30분까지는 각자 자유시간, 11시 30분에 취침을 하겠다고 했다. 나의 일정 발표 중간에 몇몇 학생들은 불만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나는 어떤 자세로 글을 써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4절지 색지를 하나씩 나눠주고, 네 곳 적당한 거리를 두고, 크레파스를 한 통씩 놓았다. 시화전을 어떻게 준비하느냐는 것을 설명했다. 준비해 갔던 견본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정작 시를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학생들은 막막해 했다. 중3∼고3까지의 학생들인데도 학교에서 시를 써보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시를 쉽게 이렇게 이해 시켰다. 시는 노래 가사다. 시를 쓴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노래 가사를 쓴다고 생각을 하거라. 그리고, 시의 내용은 마음을 판화로 찍어내듯 쓰면 된다고 했다. 나의 설명에 대부분 학생들은 그래도 어렵다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친구들에게 자기 소개를 잘 한 여학생이 나의 말 뜻을 잘 이해 한 듯 제일 먼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엎드리거나 누워서 자유로운 자세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중3 두 명의 여학생은 같이 옆에 두고 앉아서 말없이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교목을 입고 온 남학생 두 명은 무척이나 고민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 중 한 명의 남학생은 시 낭송 때까지 시화전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 학생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제출을 했다. 또 다른 남학생 한 명은 계속 고민을 하다가 종료시간 10분 남짓 남겨두고서야 시를 썼고, 4절지에 시화를 작성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20분이 더 지난 8시 10분에 학생들은 시화를 준비할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10분의 휴식시간을 준 다음 203호에 있던 김종진선생님과 양선우과장을 201호로 오시라고 했다. 시 낭송을 하기 위해서다.
김종진선생님에게는 학생들의 시 낭송을 듣고 4작품을 뽑아 달라고 했다. 양선우과장은 상품으로 도서 상품권을 준비했다. 시 낭송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만든 시화를 친구들이 볼 수 있도록 들고서 낭송을 했다. 학생들이 쓴 시를 싣는다.
<시간 -오성준> 수많은 시간들을 지나온 나/힘든 시간, 슬픈 시간, 기쁜 시간, 감사했던 시간/참 많은 시간들을 지나온 나/나를 저주했던 시간, 포기했던 시간/난! 안돼!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시간/그 수많은 시간들을 스승으로 존경하며/난 멋진 신사가 되련다.
<산 -정현경> 푸른 옷을 입고 있던 산이/어느새 울긋불긋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화려한 구름 숄을 두르고/겨울로 가는 문턱에서/마지막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성큼 다가온 겨울에/ 아직은 아니라고/항의라도 하듯이
<나무 -김성희> 지치고 힘들 때/언제나 내게/힘이 되어 주던/기댈 수 있는 그대/내 맘속에 항상/그늘이 되어주는/그대를/사랑합니다.//
<강물처럼 -이태희> 기억 속에 있던 내 모든 추억이 강물처럼 흐른다./내게 있던 좋은 추억이 강물처럼 흐른다./내게 있던 방황의 추억이 강물처럼 흐른다.// 나의 사랑하는 여자가 날 강물처럼 흘려보낸다./나도 그 여자를 강물처럼 흘려보낸다./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간다.//새로운 추억도 또 다시 강물처럼 흘러간다./강물은 얼마나 흘러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 -김선익> 나는 누구인가?/ 바보인가?/그렇다 나는 정말/ 바보다.//자기 소개도 못하는/바보다 바보/ 자기 소개는 정말 어렵습니다.//
<하늘 -박정수> 하늘아 하늘아 푸른 하늘아/어찌하여 나는 너를 찾는지/네가 나를 찾을 때마다/나의 편안한 마음을 주는지/하늘아 하늘아 거기는 즐겁겠지./내가 언젠가 올라가게 되면/그 대 만나자꾸나 하늘아//
<구름 -황재진> 산과 맞닿는 구름/어린 시절 나에겐/때론 솜사탕 같던/때론 자동차 같던/때론 비행기 같던/구름이 이젠 그냥 하얀 구름일 뿐이다.//
<사랑 -최정민> 그땐 미처 몰랐습니다./사랑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사랑이// 그 땐 미처 몰랐습니다./이렇게 좋은 것인지/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이런 감정 느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감사하게 생각합니다.//항상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다./힘들지만//
<아악! -황보경> 아악! 나 시 잘 못 쓰는데/그래도 시 쓸게요//오늘 강원도 놀러와서 너무 추웠어요/그래도 재미있어요.//비록 저의 시가 님의 침묵만큼은 잘 못 쓰지만/생각 감정 경험을 바탕으로/시를 쓰고 있어요//아악! 다들 술 담배 줄이시고요/장수하시길 바랍니다.//
<꽃 -한상훈> 봄 여름 가을 겨울/꽃은 언제나 피고/언젠가 우리에게/향기와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네.//활짝 웃는 해바라기 꽃처럼/우리들 얼굴에도 활짝/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사랑의 지침서 -김정우> 사랑 이 두 글자/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말이다./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이 말/하지만 사랑의 지침서란 없다.//어느 누구도 사랑에 대해/정의 내릴 수 있는 자격은 없다.//사랑 그것은/내 안의 그대 말할 수 없는/감정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가을 들녘 -김선열> 서늘한 가을 들녘에/농부가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사나운 태풍으로 인해 농작물이 다 쓰러졌어도/농부는 좌절하지 않습니다.//담음을 위해 농부는 쓰러진 농작물을 일으켜 세우고/쓰러진 자신의 마음도 다 잡아봅니다.//아무리 험한 태풍이 다시 온다고 해도/이번 일을 통해 농부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왜냐하면 농부에게는 희망이 있으니까요.//
<이연(異緣) -홍난경> 그 누구도 널 외면한데도/나만은 이겨낼게 지켜줄게./해줄 수 있어 이제 시작인데/왜 자꾸만 밀어내려 해./ 왜 자꾸만 떠나려고 해//널 내 가슴 안에 감싸안고/이 세상을 마감하고 싶다.//인연이 아닌 채로 끝내는/ 불쌍한 우리 사랑은 다음 생애에는 인연이 되길/다음 생애 절대 변하지 않는 인연되길//
<후회 -손덕인> 헛점 투성이인 내 인생/뒤를 돌아보면 눈물만 흐르고/대책 없이 보이는 내 모습//앞을 내다보면 한숨만 나오고/이대로는 안 되는데/더 이상은 힘든데/나의 노력은 보여주질 못하고/나의 행동엔 만족하지 못하나/더 이상은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데/그게 너무도 힘든 이유는 왜일까?//
<앞으로 -박성훈> 걸어가/계속 가/멈추지마/가다보면 힘들지?/그럼 조금 후에/그리고 도 가/다 뒤를 곡 돌아봐/돌아보면 여지 것 온 길이/아까워서 끝까지 갈 거야//
<바램 -육지현> 그들은/언젠가 떠나갑니다./언젠가는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납니다.//그렇담 바라 건데/그들이/나를 조금이라도/하루라도 더 나를/기억하도록 해 주옵소서//
<사랑 -안혜준> 사랑의 반이 행복이라면/나머지 반은 슬픔입니다.//그러나 나는/햇살에 반했듯/당시에게도 반했고/음악에 취하듯/당신에게 취했습니다./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고민화> 그대가 힘들대 편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의자 같은 존재가 되고 쉽습니다.//그대가 뒤를 돌아봤을 대/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별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그대가 그리울 때/언제나 다시 떠올릴 수 있는/사진첩 같은 존재이고 싶습니다.//
<아시나요 -김미숙> 아시나요 아직 당신을 그리워하는 제 마음/가는 곳마다 당신과 함께 했던 모든 추억들이 떠올라/나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제 모습을//아시나요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당신을 생각하면 할 수록/모질게 굴었던 제 모습이 떠올라/찢어질 듯 아파 오는 제 마음//아시나요 사랑은 기다림이라는 거/제 사랑 아직도 그대를 기다립니다.//
<사랑은 -고현애> 사랑은/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둘이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사랑은/눈물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눈물 흐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또 사랑은/서두르고 초조해 하는 것이 아니라/항상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디플 -안순원> 내 잎에 딱 맞는 디스플러스/너무 많이 있어서 줄담배를/피게 되네/한 개피 두 개피 세 개피 네 개피 다섯 개피/폐가 썩어도 좋다./나에 디플
<겨울 -박강범> 겨울엔........ 기다리던 눈이 오겠지./나쁜 기억들을 덮어주는/눈이 오겠지.. //겨울엔.... 연인들의 날이 오겠지./추웠던 겨울엔 연인들이/팔짱 끼고 녹여 주겠지.// 겨울엔 나는....../쓸쓸히 보내야겠지.//
시 낭송에서 오성준, 고민화, 홍난경, 이태희가 뽑혔다.
다음은 시 낭송에 대한 평가 시간이었다. 김종진선생님은 시 낭송을 듣고 평가하기를 너무 놀랍고 행복하다고 하시면서, 나이 천차반별인 너희들이 진로에 맞는 목표를 세우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음으로부터 제자들을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습니다. 나 그동안 힘들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행복하기를 노력합니다. 지켜봐 주세요..........' 나는 이렇게 새롭게 만난 제자들의 시를 평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긍정하겠습니다. 긍정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같아 너무도 기뻤다.
다음은 사제간에 맥주를 마시며, 어떤 얘기도 망설이지 않고 터놓기로 한 시간. 옷 속에 맥주를 숨긴 몇 명의 학생들이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남학생은 캔 맥주 한 캔, 여학생들은 종이컵으로 맥주 한 잔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여학생들은 왜 자기들은 한 캔을 주지 않느냐 차별을 하느냐고 불만을 섞어놓았다. 학생들은 술이 모자란다면서 아쉬워했다. 술을 마시고자 한 자리가 아니라, 사제간에 허물없는 관계를 맺고 이해하고자 준비한 자리였다. 이런 가르침을 학생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청소년 문학기행]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간 다음에는 분명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들의 얘기를 터놓지는 않았다. 술 자리도 끝나고 학생들만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11시 30에 취침을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은 알았다. 주야간 학생들 중 특히, 야간을 다니는 학생들이 잠을 자는 시간은 새벽 2∼3시가 보통인데, 그렇게 일찍 잠이 올 리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11시 30분, 오랜 여정에 피곤한 몇 명의 여학생만이 잠이 들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과 놀고 싶은데 맞춰주지 않아 불만이라고 했다. 12시 30분 잠 자는 학생들이 몇 명 늘었을 뿐이었다. 1시가 가까운 시간, 여학생 두 명이 방에서 얘기를 계속해서 잠을 잘 수 없다며, 김종진선생님과 내가 자는 방으로 건너왔다. 15명 이상은 잘 수 있는 넓은 방이기에 창가 쪽 아래에 이불을 깔고 자라고 했다. 두 명의 여학생은 조용히 깊은 잠을 잤다.
2시가 넘은 시간 둘러봤다. 그때까지 같은 야간이라도 학교에서는 서로에 대해 알지를 못했다며, 얘기를 하며 밤을 보내는 학생도 8명이나 되었다.
문학기행 둘째 날 7시에 일어났다. 8시 출발 예정이었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6명의 여학생들이 버스에 모두 탄 시간은 8시 15분이었다. 8시 30분 아침은 순두부를 먹었다. 9시 출발. 바람에 파도치듯 간밤에 내린 비가 버스 바퀴가 밟고 지날 때마다 고인 물이 날렸다. 봉평으로 가는 도로변에 펼쳐진 바다를 본 학생들은 내려서 바다를 보고 가자고 했다. 일정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잠시도 머물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창밖으로 펼쳐진 파도치는 바다를 구경하는 것으로 아쉽지만 만족해야만 했다.
9시 50분 현남톨게이터를 빠져나갈 즈음, 비가 또 다시 억수처럼 쏟아졌다. 10시 8분 강릉 휴게소에 도착을 했을 때 비는 그쳤다. 남학생 몇 명은 버스 안이 지루하였던지 남학생 화장실 입구에 있는 오락 펀치를 했다. 양선우과장은 최고점수가 나왔다. 머리에 노란 염색을 한 남학생조차 놀랐다. 10시 35분 휴게소를 출발했다.
버스는 새로 난 대관령길 6터널을 지나 11시 5분 장평톨게이터를 빠져나왔다. 11시 15분, 이효석 문학관 주차장에서 반별(쟁기, 메밀꽃, 물레방아, 장승)로 반기를 들고 기념 사진촬영을 했다. 그리고, 이효석 기념비가 있는 계단으로 문학관에 들어섰다. 잘 꾸며진 기념관 내부에 들어서면서 정면에 적힌 소설 속의 내용을 적어 놓은 글귀를 다 함께 읽게 했다.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븟한 달빛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기념관을 관람한 학생들은 영상관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서울 도착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늑장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기념관 입구에서 학생들에게 이것만은 알고 가자며, '로맨틱문학의 효시라고 불리는 '메밀꽃 필 무렵' 속에 나타난 이효석의 문학은 한 마디로 자연과 성(인간의 애욕)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다음 우리들이 갈 곳은 이효석생가였다. 이곳 생가는 찾는 사람들이 많아, 주인은 마당 쪽으로의 출입을 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학생들에게 생가 위 산 밑에 넓게 정리된 밭을 가리켰다. 저 곳이 메밀밭이라고 했다. 그리고, 생가 앞 쪽 도로를 지나 멀리 자리하고 있는 산을 가리키며, 이런 곳에서 너희가 살았었다면 글을 쓰지 않았겠냐고 물었다. 자유로운 성향을 지닌 학생들이 하룻밤을 자기까지 가족처럼 느끼는지 무엇을 설명할 때는 경청을 해 주는 것이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고마웠다.
버스는 생가를 멀리하고 도로 우측을 끼고, 가산공원을 지나 12시 40분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인 물레방아에 도착을 했다. 나는 여학생 한 명과 함께 물레방아 안에서 메밀꽃 필 무렵의 장면을 재연했다. 학생들은 조선시대 신방을 들여다 보듯, 문 틈 사이로 호기심있게 쳐다봤다. 물레방아 근처에 만들어놓은 마구간도 구경을 했다. 몇 마리의 나귀들 속에서 학생들은 소설에 등장했던 나귀가 어느 것인지를 찾는 모습들이었다.
1시 25분 버스를 타고 출발. 2시 50분, 여주 휴게소에서 마지막 휴식을 한 후에 3시 15분 서울로 출발을 했다. 버스를 타기 전에 남학생 한 명이 내게 '선생님 가르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말인가! 동서울 톨게이터까지는 서행과 지체없이 잘 빠졌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면서부터 차량들의 행렬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학기행의 출발 장소였던 화곡동 성지중고등학교 앞까지 가는 것을 바꿔, 여의나루역에서 내릴 것을 결정했다. 4시 40분경 3호선 여의나루역에서 학생들을 내려놓고 버스는 내년을 기약하고 출발했다.
이번 청소년 문학기행에 큰 관심을 갖으시고, 비가 오는 날에도 성지중고등학교까지 배웅을 하기 위해 나오신 안병선국장님. 학생들의 인솔을 위해 행사에 동행해 주신 성지중고등학교 김종진선생님. 그리고, 이번 행사를 준비에서부터 마무리까지 해 주신 서울남부연맹 양선우과장님 감사합니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24명의 학생들!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가슴으로 1박 2일간의 시간들을 읽고 살아줄 것을 기대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존경(존중)하고 사랑(이해)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해 한용운과 가산 이효석선생님에 대해 알고 배운 것도 많았겠지만, 자연과 사람 그리고,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달은 여행이요, 기행이었기를 바랍니다. 너희들과 1박 2일 문학기행을 갔다온 후, 어깨가 돌처럼 굳을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긍정하는 삶. 성공하는 삶을 살기를 나는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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