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희 인문산책 1】
《사이펀》에서는 본지 편집위원인 꿈꾸는 미학자 ‘김종희 선생의 미학산책’을 연재합니다. 김종희 선생은 수필가이자 인문학자로 전국 곳곳에서 최고의 인문강사로 인기가 높습니다. 이번 연재는 김종희 선생이 석사는 철학을, 박사는 미술사학을 전공하면서 평소에 담아두었던 회화, 동양고전, 문학, 철학 등 예술 전반의 포괄적 자료를 바탕으로 꿈꾸는 미학자의 미학론을 일반들이 알기 쉽도록 연재해 나갈 것입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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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1967년 경북 선산 출생
-빈빈문화원 대표
-199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연재
-수필집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사랑도 기적처럼 올까요』
-인문채록집 『기억 장소 그리고 매축지 1, 2』, 『구술생애사로 경험하는 인문학』
-계간 《사이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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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와 마광수와 나와
김종희|수필가, 호모루텐스
초록의 층위가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의 감각도 초록의 변이처럼 연두 속에 파랑을 품었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하면서 마침내 깊어집니다. 어떤 감정이 솟는 것은 어떤 경험에 의한 결과겠지요. 감정이 언어로 표현될 때 개인의 경험은 그제서 존재로 드러납니다.
비늘처럼 결구 된 담쟁이 이파리가 햇살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지 어깨를 늘어뜨립니다. 쑥 뽑아 올린 줄기 끝에 너른 치마폭을 들썩거리는 담쟁이는 물기 없는 벽을 단단히 파고 들 기세입니다. 빳빳하게 먹인 풀 기운이 빠져나간 홑이불처럼 힘을 뺀 담쟁이 줄기가 불끈 힘을 줍니다. 담쟁이가 담을 의지하는 것인지 담이 담쟁이를 붙잡은 건지...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벽이 아니라 끌림인가 봅니다.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어떤 것들은 강렬한 자석처럼 감각을 끌어당기지요. 그것은 모래 폭풍 속에 펄럭이는 붉은 깃발 같은 아득함입니다. 초록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칠월. 아득함으로 향한 감각의 뿌리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 지독한 몽환의 순간 하필이면 사라가 생각났습니다. 감각의 주체로 살아가고자 했던 마광수의 ‘사라’... 그녀 사라의 즐거운 의식이 내게로 들어와 담쟁이처럼 흔들렸습니다. 아니 사라의 긴 손가락이 초록의 심지처럼 나를 감아 타오르기를 반복합니다.
나는 그때 김흥수의 하모니즘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가 한때 걸었던 1953년도 광복동 뒷골목을 따라 걷는 중이었습니다. 이국에서 건너온 <타임>지를 보며 푹 꺼진 소파, 서너 명의 화가들이 기대어 앉은 다방에서요. 침 묻은 검지에 딸려 넘어가는 낡은 잡지... 추상의 세계를 넘기던 그들의 옆구리에 파고들어 나는 가난한 화가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파랗게 엿보고 있었지요.
-지금 파리에서는 추상회화가 유행하고 있다는 데...
-그럼 우리도 추상을 해야지
-왜 우린 밤낮 남의 꽁무니만 따라가는가.
-우린 추상 다음에 오는 것을 해야지
예술을 옆구리에 낀 야전잠바는 화약 냄새 대신 물감 냄새가 묻어있습니다. 전쟁과 궁핍은 갑옷처럼 뻣뻣하지만 그럼에도 녹진한 눈빛이 다방에 깊이 번졌습니다. 늘어진 양말목을 끌어 올릴 때마다 뒤꿈치에 눌러 붙은 굳은 각질이 버석거렸습니다. 세탁하지 못한 소매는 반질거렸고요. 가난한 화가들의 물기 없는 말은 입김 서린 다방, 조도 낮은 벽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날. 남들이 가는 길을 무작정 따라갈 수는 없다고... 추상 다음의 것을 해야한다던 김흥수의 붉은 상징을 나는 좋아합니다. 하나의 화면에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을 병치하여 미적 경험을 이끌어내는 그의 세계는 낯섦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으로 소매를 잡아당깁니다. 육체적 존재와 정신적 존재, 감각적 욕망과 이성적 존재, 의식과 무의식의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고민은 시간을 뛰어넘어 물음표를 던집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세계로 끌어들이는 언어를 그는 ‘하모니즘’이라 명명했습니다.
대상의 형태를 최소화하고 그것이 지닌 존재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 추상이라면 김흥수는 분명 추상 다음의 방식으로 새로운 화풍을 열었습니다. 이질적인 방식을 한 화면에 병치하는, 다시 말해 구상과 추상을 병치한 그의 알레고리는 이후 세계 화단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81년 미국화단에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킨 데비이드 살레가 등장하자, 비평가들은 살레를 현대미술의 최전선의 작가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김흥수는 데이비드 살레보다 7년을 앞서 하모니즘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습니다. 두 작품의 묘한 개연성에 지속적 의심을 할 수밖에요. 의심은 통념을 깨는 힘이잖아요. 김흥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가장 편안한 모양으로 잠든 여인의 육체를 봅니다. 여인의 침상에 나를 포개어 봅니다. 눈 뜬 동안의 긴장이 이완되고 힘을 뺀 육체의 반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한쪽은 슬쩍 끌어당겨 비스듬히 기대어 깊은 잠에 빠진 여인은 지금 850개의 병마개로 상징되는 다채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육체라는 그릇에 맺히는 꿈의 세계를 병치시킨 작품 「꿈」(123×92 /107×134. 1970~73. 한울문화재단)을 보고 나는 수십 날을 비틀거렸습니다.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 꿈은 의식인가요 무의식인가요. 꿈이란 가상의 공간을 가시의 공간으로 데리고 나온 김흥수의 언어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매 순간 다양한 사물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내가 본 것은 사물인가요. 사물에 씌워진 언어인가요. 사물의 존재적 의미인가요. 둥근 것을 본 것은 단지 내 육체에 딸린 감각기관이 보는 것은 아닌지요. 혹, 둥글다는 것은 관념에 머문 내 절대적 편견은 아닌가요. 김흥수가 우리에게 던진 것은 그의 세계가 우리의 미적 경험으로 다가와 의심과 질문으로 버무리어 마침내 나의 언어로 자리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요.
작품 「잉태」(142×245. 1989)는 또 어떻고요.
사랑의 황홀경과 아득함이 잉태로 이어지는 신비. 가장 난해한 소재를 이토록 오묘하게 표현하는 작가는 일찍이 없었다고 자부합니다. 물아무간, 황홀의 경지, 운우지정의 지경을 그 순간 보았습니다. 아득한 불랙홀을 마주한 그 순간 솟아오르는 감각이 어떻게 결결이 갈라지는지...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꿈틀거리는 고요 속으로 잠겨드는 김흥수의 결 속에 이끌리어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흡사 찐 가오리의 결이 갈라지듯 직선으로 곡선으로, 부드럽게 그러나 선명하게 의식과 무의식을 끌어당겼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그 경계를 스며들 듯 빠져나가는 어떤 숨길이 가쁘게 몰아치며 뱉어내는 분홍의 세계는 황홀지경입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경험으로 얻어지는 결실이 아닌가요. 시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 오감의 경험이 의식과 버무릴 때의 혼돈은 문자 언어로 줄을 세울 수 없지 않던가요. 너와 나의 모든 것이 어우러지고 버무리고 엉키고 풀리면서 마침내 교합의 정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의 파괴... 틀을 깨고 일제히 쏟아지는 기마병들은 붉은 바람을 일으키며 아득한 세계로 돌진합니다. 파괴는 창조에 이르는 것이라는 말... 신대륙을 향해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꼬리들의 세찬 물질은 폭포를 기어이 오르고야 말겠다는 연어의 비상입니다.
차마 드러내어 말하지 못했던 감각과 감정은 드러나는 순간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정서에서 섹스라는 말은 금기어가 되어 지금도 심해의 바닥을 기어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김흥수가 일으킨 파란은 육체적 경험에 머무는 일차적 차원이 아니지요. 감각적 존재와, 감각의 주체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규명이지요. 내밀한 맥놀이의 꿈틀거림... 기가 막힌 그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 언어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감각의 주체로서 인간, 통념을 깨고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담아냈으니 그가 그린 것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 아닌가요. 이런 물음표의 절정은 작품 「파계승」에서 보았습니다.
김흥수를 만나면서 지속적으로 나를 붙잡는 이가 마광수였습니다. 어쩌면 나는 내 의식을 예리하게 찌르는 마광수의 문장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유치할수록 성스러운 장미여관도 떠나오면 먼 곳이 되겠지요. 푸른 어스름이 지면 붉은 고요 속 첫눈이 내릴 것만 같은 그곳에 그의 문장이 서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어쩌면 3번과 4번 요추, 이끼 낀 골짜기를 뽀드득뽀드득 걷고 있을 사라의 하얀 손가락을 기다리는 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가장 더디게 흐르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이란 그 사람이 오는 방향으로 내 모든 감각이 우는 시간입니다. 그가 오고 있는 시간을 온몸으로 뻑뻑 빨아 당기는 뜨거움입니다. 세상은 젖어도 젖지 않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김흥수와 마광수와 나는 지금 칠월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