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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 사도 요한
요한복음 1장 6-8절, 21장 24-25절 / 1: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 21: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1.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
복음서의 명칭은 “~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에서 불리는 것이므로,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를 나타내 주고 있어 요한복음은 요한에 의하여 기록된 책임을 알려준다.
2.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두 제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인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다. 요한은 갈릴리의 어부 생활을 한 부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로 야고보의 형제이다. 요한이 야고보와 함께 말해질 때는 항상 뒤에 언급되는 것을 보아 아마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인 것으로 보인다.세베대와 살로메는 어부이나 여러 하인을 고용한 것으로 보아 비교적 부유한 집안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마 27:56; 막 1:19-20; 15:40; 16:1). 이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어느 날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일을 도와주는 중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마 4:21; 막 1:19-20; 눅 5:1-11)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삶을 살았다.
3. ‘우레의 아들’을 뜻하는 ‘보아너게’란 별명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
이런 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우뢰(천둥)의 아들’이란 뜻에서 ‘보아너게’란 별명을 얻은 것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보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두 형제의 불같은 성격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와 같은 별명을 주셨다고 대체적으로 본다. 이는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의 성격이 매우 강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이러한 성격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로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며 매우 열정적으로 따랐던 것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가 가까이 다가오므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자 지나가는 길인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사자 – 심부름꾼 – 를 앞서 보내 머물 방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길을 떠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 예수님을 모실 방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예수님을 거부하여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을 본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하였다. 이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리죠?"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은 어떤 사본에는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라는 말이 있다(왕하 1:10, 12 참조)는 설명을 달았는데, 이 사본에 의해 킹제임스흠정역은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번역하였으며, 한글킹제임스 또한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이 내리도록 명하여 마치 엘리야가 한 것처럼 그들을 살라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번역하였다. 이런 그들을 한글개역 및 개역개정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지 “꾸짖으셨다”라고만 되어 있으나, 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은 꾸짖어 말씀하시는 내용을 설명하기를 “어떤 사본 – 다른 고대 사본 - 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 있다. ‘너희가 어떠한 영에 속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사본에 의해 킹제임스흠정역은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번역하였고, 한글킹제임스 또한 “너희는 너희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지 못하고 있도다. 인자는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느니라.”라고 하시고는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번역의 입장을 취하고 있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마을에서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 – 구주 - 이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머물 방을 거부당함에 있을 때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띠었다.
그런데 이는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의 성격이 몹시 강하고 급하며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는 매우 거칠다는 것에서가 아니다. 두 형제의 분노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정면으로 불순종하는 악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지 않는 불의한 본성을 대하는 때문이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함의되어 있다. 출애굽기 22:26-27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이와 관련하여 신명기 24:10-1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네가 네 이웃에게 빌려 준 것이 있을 때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가 제시하는 담보물을 가져오지 마라. 너는 밖에 머물러 있고 네게 빌린 그 사람이 그 담보물을 가지고 나오게 하여라. 만약 그 사람이 가난하다면 그 담보물을 가진 채로 자지 말고, 해 질 무렵 그의 겉옷을 돌려주어 그가 덮고 자게 하여라. 그러면 그가 네게 고마워할 것이고 그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질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일꾼은 그가 너희의 형제든 네 성문 안 네 땅에서 사는 이방 사람이든 압제하지 마라.”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는 ‘약자보호법’이다. 유대인에게서 속옷은 겉옷보다 가격이 싸고 보잘 것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겉옷은 속옷보다 값비싼 것으로 가난한 자에게서는 재산목록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런 겉옷은 유대인의 가난한 자에게서 비싼 댓가를 치르고 입는 옷으로 그의 몸에 걸치고 있는 큰 재산이기도 하고, 겉옷은 낮에 길을 다니며 사람을 상대하는 예의를 갖추는 의복이기도 하지만,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에서 밤에는 덮고 자야하는 필수품으로 전당조차 잡힐 수 없는 품목으로, 만부득이함으로 겉옷을 담보로 맡겼을 경우에는 밤에는 주인에게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했다. 그런 겉옷을 송사를 걸면서까지 달라고 하는 빼앗음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불의함으로 다루셨다. (2) 그리고 이와 함께 유대인은 손님이 와 자신의 집에 하룻밤을 지낼 수 있기를 청하면 기쁨으로 기꺼이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이유로 “이스라엘 자손 그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였기 때문”(신 10:19 ; 출 22:21 ; 23:9)이라고 하신 데 따라 과거 나그네 신분으로 살아왔던 이스라엘 자손인 유대인은 하룻밤 머물 것을 찾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악함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보인 분노는 단지 자신들의 성격이 불같고 급하여 성질내는 것에서만 한 말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자비법을 따르지 않는 불의한 자들이 보이는 악함에 대한 반응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별명은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데 따른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본 이름에 별명을 지어주신 제자는 열둘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유일하다. 예수님이 이처럼 별명을 지어주신 것은 이들의 성격을 파악하고 거기에 걸맞는 이름이 불리게 하신 것에서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자로 있게 될지의 그들을 쓰실 사역과 관련해서다. (1) 예수님은 유대식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시면서 “이제 후로는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라고 하여 장차 수행할 복음 전파에 의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자를 부름에 있게 하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예수님은 시몬에게는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라고 별명을 주셨다. ‘게바’는 아람어식 이름(‘케파스’)으로 이를 헬라식으로 번역하면 ‘베드로’(‘페트로스’)이며, ‘돌’, ‘반석’, ‘바위’를 뜻한다. 예수님은 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이끌어내시며 그의 이름을 “너는 베드로라”라고 부르시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해 주셨다. (2) 그렇듯이 유대식의 이름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우뢰의 아들”(sons of thunder)이란 뜻으로 불리게 하시는 ‘보아너게’(Boanerges)라고 별명을 주심으로 장차 그를 쓰실 사역의 성격을 나타내 알려주시고 있다. 그것은 이 별명이 단순히 “성격이 급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장차 사도로서 수행해 나갈 사역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있게 될 것을 의도하고 있다.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뇌성치는 우뢰처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증거함에 있는 힘 있고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할 사명에 야고보와 요한이 있게 하실 것에서 “우레의 아들”이란 ‘보아너게’의 별명을 주셨다.
4.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알려주신 삶에 있은 야고보와 요한
(1) 야고보 :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받은 대로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서 참으로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증거함에 있다가 가장 먼저 순교하였다. 그는 약 A.D. 44년 시기에 헤롯 대왕(Herod Ⅰ)의 손자로, 헤롯 대왕이 마리암메 1세에게서 낳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Ⅰ)에 의해서 칼로 참수되는 처형을 받았다. 야고보를 처형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베드로를 투옥시키기도 하였으니, 이는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행 12:2-5).
(2) 요한 : 그리고 야고보의 동생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끝까지 곁에 있었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하나였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요한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런 그는 밧모섬에 유배되기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a) 요한복음서를 기록하는 것을 통해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보다 많이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소개하여 알려주었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그분의 행적을 통해서 자세히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b) 요한1,2,3서를 기록하는 것을 통해서는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하는 교회에 유입된 거짓 교사들로 인해 어지럽혀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잡아 세워주는 것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임을 말하며 바른 이해에 가질 것을 권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순전한 신앙에 있을 수 있게 하였으며, (c)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한 믿음에 있는 교회의 구원은 보존되어 마침내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을 바라봄에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읽게 하였다. 이런 그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라고 하신 말씀에 의해서 ‘사랑의 사도’라고 불렸는데,1)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요 1:6)고 하면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 그의 생애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라고 하신 그대로의 삶에 있었다. 그런 그는 비록 죽임을 당하는 순교에 있지는 않았지만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었으며, 풀려난 말년에서는 남은 생애를 소아시아 – 현재의 터키 지역 - 의 에베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구주이심을 전파하는 사역에 있다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
5. 하늘의 '우레 소리'를 말함에 있는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사도의 삶을 산 것을 보며 그 흠모에 있어 자신들도 그와 같이 살 것을 바란다. 그런데 누구나 다 그와 같이 살 수 있을 것인지. 디트리히 본 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무료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당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흠모한다고 해서, 소망한다고 해서 아무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이 누리는 은혜이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그분의 고난과 함께 하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다”(마 16:24; 막 8:34; 눅 9:23)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기를 부인함에 있으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뒤를 따름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아무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었을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요 20:19, 20, 22)라고 하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온(평안)이 두려움과 무서움을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누리는 안식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 자신들이 존재하는 각각의 위치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 안식을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잃었었으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해 실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시고는 그들에게 “평안하뇨?”, “평안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평안(샬롬)이 다른 말로는 ‘안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평안의 안식에 있어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이겨나간다. 이는 천상세계의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안식의 영원함을 현재적으로 구현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을 머뭇거리며 주저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떤 특정한 특별한 자가 아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게 되는 바, 모든 민족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나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분이 분부하신 모든 것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 준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우레와 같은 소리를 온 세상에 울려 퍼지게 전하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신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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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은 그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라고 불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받은 ‘사랑’을 교회에 전하며 사랑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런 그의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형제를 사랑하라.”,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다.” 특히 유명한 구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이다. 이는 요한의 노년에 행한 설교에서도 나타나는데, 초기 교회 전승에는 요한의 말년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노년의 그는 몸이 너무 쇠약해져 교회에서 긴 설교를 하지 못하고 반복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신자들이 왜 같은 말만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주님의 계명이요, 이것만 지켜도 충분하다.” 이는 전승에 의한 일화이기 때문에 실화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이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요한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