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시조(시조문학 2008.여름호 167)
P:260.
하동 가는 길 / 이지엽
가야 할 길은 몇 번이고 잘못 들면서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많은 잘못 들었을 거라고
내 그대 찾아가는 길 애초부터 없었을 거라고
그러나 길 들어서면 거기 어울리는 풍경 있듯
뒤란 간장맛 우리내는 5월 햇살도 있으리
독신(篤信)의 서늘한 뜨락 펑펑 꽃들은 피어나리.
길이 하동에 결국 닿지 못한다 해도
하동은 그 자리 있고 그대 또한 그러러니.
사람은 몸 가운데라도 창을 내기 마련 안니가.
바다가 꼭 목적이 아니라면 바다는.
어디에나 있고 또 아무 데도 없으리니
꽃핀 길 한때의 나무 밑에 잠시 짐을 내려두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사랑은 남아
애써 섬들은 제 희망의 노란 불씨를 깨무는가
미답(未踏)의 투명한 시간이 겨우 수사(修士)처럼 지나는 저녁.
*서연정 시조시인의 추천(작품감상 문=시조문학 P:261~262 수록)
나를 찾아 가는 여정 (서연정/시조시인)
하동은 어디인가? 김동리 소설 <역마>의 배경으로 유명한 화개장터, 박
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 최참판댁, 600년대 나당연합군이 구축
하였다는 고소성, 평사리·하동·송림공원, 쌍계사,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살이의 서늘한 애환들을 안고 흘러가는 섬진강의 고장이다.
하지만 작품 속 하동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그대’를 지칭하는 또다
른 이름이다. 그런데‘가야 할 길을 몇 번이고 잘못 들’게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갈래의 길을 가지고 있어서 찾아들기 어려운 지점에 있다.
그곳은 스스로가 드러나지 않으려고 꼭꼭 숨어 있는 장소처럼 보인다. 하
지만‘어디에나 있고 또 아무 데도 없’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곳은 시
적화자인‘내(나)’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비밀스럽게 숨겨 둔 곳인지도 모
른다.
시적화자는 어디에서든‘거기 어울리는 풍경’을‘눈부신 사랑’으로 바
라볼 수 있는‘독신(篤信)의 서늘한 뜨락’을 가지고 있다. 생에 대한 이러한
여유로움과 낙관은, 7행부터 9행까지에서 나타나는 그대에 대한 시적화자
의 강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적화자는 늘 움직이지만 그대는
지도에서 한순간 사라질 리 없는 하동이라는 지역처럼, 영원히 자기가 떠
나온 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신뢰의 뿌리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대’는 하동을 찾아 움직이는 길이 아니라 하동 그 자체
이고, 하동과 연결된 여러 길의 끝이어서 종내는 만나게 될 존재이며, 시적
화자가 이상 속에 붙박아둔 형상이기 때문이다.
‘바다가 꼭 목적이 아니라면 바다는, /어디에나 있고 또 아무 데도 없으
리니’에서 독자는 칸트의‘무목적의 목적성’과 만난다.“ 하동이 꼭 목적이
아니라면 하동은, 어디에나 있고 또 아무 데도 없으리니”로 바꿔 읽어보면,
이 여정은 실용적 목적의식 없이 그것 그대로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목적
지를 정해 두고 떠난 길은 목적지에 안착했을 때라야 그 여정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지 없는 여정은 그 자체가 자유로운 목적이어서 삶이나
사랑, 또는 자아를 어떤 모습으로 실현하든 괜찮다. 나그네는‘꽃핀 길 한
때의 나무 밑에 잠시 짐을 내려두’었다가 다시 훌훌 길을 나선다. 새로 시
작하는 길이 고난이라 해도‘몸 가운데라도 창을 내어’‘겨울 수사(修士)’
처럼 묵묵히 또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치열한 고독 속에서 자신의
여정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동으로 가는 이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그대’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르는
말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 경험을“본성을 바꾸는 치명적인 도약”이라고
하였다.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익
숙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갑자기 진부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그 동안 잃어
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해낼 때, 현현하는‘그대’앞에서 시적화자도 독
자도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된 상태의 진짜 고독감에 사무친
다. 이 시 속에서 고독의 맛은 천일염과 발효의 과정을 간직한 것이어서, 꽃
과 신록을 버무려내는‘5월 햇살’이 우려낸 간장의 맛처럼 짜디짜다.
(서연정 /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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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 정완영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의 권속은 아니다.
두메 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을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린 회향(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위 十月 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韓國 천년의 시장기여.
세월도 팔짱을 끼고
情으로나 가는 거다.
*정순랑 시조시인 추천(작품감상 문=시조문학=P264~265)
작 / 품 / 감 / 상 (정순량/시조시인)
白水鄭婉永선생님이 자작 대표시를 뽑을 때 빼놓지 않고 앞자리에 올려놓는 1979년 작품인 <감>이 내가‘다시 읽고 싶은 시조’로 뽑은 작품이 다. 白水書簡集<기러기 葉信>에 내게 보내신 서신 셋이 실렸는데 그 중 두 개는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씨 없는 고산곶감을 보내드릴 때마다 답신을 보낸 내용이다. ‘감과 한국의 겨울밤은 한갓 동화이거나 설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유의 깊이에 자리 잡은 하나의 등불 같은 과일입니다. 겨울밤의 시장기를 잘 달래겠습니다.’2000년 至月中浣老白. 이 글의 내용이 곧‘감’이라는 작품을 감상하는 기초요 중심이 된다고 여겨진다.
나에게 시조의 불씨를 나누어주신 분이 대학시절 은사이신 고 황희영 교수라면 시조의 불꽃을 활활 타게 하신 분이 바로 白水선생님이시다. 고마운 스승이시자 그 분의 문학정신을 닮고 싶은 멘토 이시다. 내가 60년대 말부터 10여년간 김천으로 거처를 옮겨가 살게 되었는데 거기서 白水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서울로 올라가신 후에도 대치동 은마 아파트를 비롯 이사하실 때마다 찾아뵙고 밤을 함께 지새며 이어지는 시조이야기를 녹음테이프에 담았는데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한 육성 녹음 테이프는 먼 훗날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白水선생님께서는‘감’을 남 다른 눈을 갖고 보셨다.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감이 아닌 감의 속내를 헤아려 또 다른 상징성을 부여했다. 한국의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 달라서 쉽게 놓치기 쉬운‘감’이라는 시의 소재로 한국의 서정성을 극대화 시켜 현대시조의 전형적 정서로 형상화 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白水선생님의 情恨이 배어나오고 있다.
감은 아무래도 太陽의 眷屬은 아니다. 감은 맛으로 먹는 과일이 아니다. 情으로 나눠드는 과일이다. 감은 달빛이 실리고 노을을 마시고 돌담 위 十月上天을 밝혀드는 등불이다. 감은 까마귀가 서리를 날리는 초가 지붕위에 타고 있는 韓國千年의 시장끼다. 감은 覲親왔다 돌아가는 누님이 媤家에 따들고 가는 눈물이다. 사랑이다. 서리가 내릴 즈음 시골 길을 가다가 감나무에 매달린 붉은 감을 볼 수 있는 데‘감’이 어떻게 하면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을 수 있는 걸까‘. 감’이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저렇게 볼을 붉히고 있는 걸까.
‘감’이 어쩌면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못 다랠 懷鄕의 절절한 심정을 자아내게 하는 걸까. 아마도 이 작품의 크라이막스요 절구라면 셋째 수 중장의‘한 톨감 외로이 타는 韓國千年의 시장끼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순량 /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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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달며 / 김선화
바늘 귀에 실이 잘 들어가지 않는 밤
문득 이불 깁던 등 굽은 실루엣
내 모습 어머니 같아 손톱 물고 앉았다
세월을 펄럭이며 바람결 흘러가고
빨랫줄에 햇살 함께 너울재던 하얀 홑청
올올이 건너온 시간. 숨바꼭질 하던 아이.
풀 먹인 이불 대청마루 위에 뒹굴면
바싹 마른 풀꽃 향기 은근한 품속에서
엉덩이 찰싹 붙이던 소리. 그목소리 듣고 싶다.
*홍성란 시조시인 추천(작품감상 문=시조문학:p:267~268)
작 / 품 / 감 / 상 (홍성란/시조시인)
단추를 달려고 서툰 솜씨로 바늘귀에 실을 꿴다. 화자도 이제 눈이 어두워졌는지 침 묻혀 빼낸 실 끝이 바늘귀를 가운데 두고 갈지자로 흔들린다. 문득 침침한 눈으로 이불을 꿰매던 늙은 어머니의 휜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 아련해 손톱물고 앉아 눈가에 그만 이슬이 맺히고 마는 화자를 떠올리는 내 가슴이 짠하게 젖어온다. 우리네 딸들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하지만 바람결에 흘러간 세월은 엄마를 닮아가는 제 모습에 놀라 가끔 피식 웃는 딸의 모습을 두고 간다. 화자도 나도 그게 싫어 가끔은 화가 난다. 그러나 엄마를 원망해 본 적은 없다. 엄마의 기운 생을 사랑한다. 붉은 흙이 고운 마당가 장대 높이 걸린 빨랫줄에서 햇살 받아 빛나는 홑청이 잘 마르고 있다. 화자는 어린 오빠 함께 펄럭이는 홑청과 옷가지 사이를 팔 벌려 달리면서 숨바꼭질도 했다. 그러면서 키가 크고 부끄러움도 알게 되고 어른이 되었다. 엄마를 닮은 어른이 되었다. 엄마는 풀 먹인 이불홑청을 다듬이질하여 반반하게 펴 놓고 솜이불을 반듯하게 감싸 홑청을 씌운다. 그 하얀 홑청에서는 바싹 마른 풀꽃향기가 났다. 그 향기 위에 뒹굴며 엄마의 바느질에 훼방을 놓는다. 그때“저리 안가!”하며 엉덩이 찰싹 붙이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들을 수 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는 한시도 곁을 떠나서는 안 되는 아기가 되었다. 오래 누워계시는 엄마 곁을 늙은 아버지와 지키며 엄마가 된 아이는 살림을 살고 대학원에 서 늦은 공부를 하며 시를 쓰고 있다. 말수 적어 생각이 깊은 딸은 평이平易한 시어로 잘 읽히면서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김선화는 만해정신을 기리는 시전문지 계간『유심』이 2006년 발굴한 신예다.
(홍성란 /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