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군의 역사 중 석기시대의 유적은 충분히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나 아직 상세한 발굴이 되지 않아 부분적인 사실들만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청동기 시대의 유적 중 지석묘군이 있음이 밝혀졌고 삼국시대이전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해있다고만 알려져 왔으나 최근 장수군과 문화원의 노력으로 가야시대의 유적이 대량으로 산재해 있다는 것이 지표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의 혼합된 지배형태가 보이며 고려시대이후 황희 정승, 백장선생, 손재 김남택 선생 등의 학자들이 대거 장수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많은 후학들이 배출되었고 전라좌도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전라도를 학문의 도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의암 주논개를 비롯한 백용성 조사, 정인승박사가 탄생하는 등 깊은 학문과 충효열의 고장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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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군은 면적 533.64㎢, 7개 읍면으로 전라북도 동부에 위치하여 동경 127 ,북위 35에 펼쳐 있으며 군의 동부는 소백산맥이 서부는 노령산맥이 뻗어 있어 장수읍, 장계면 일대의 분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군전체면적의 70%)를 이룬다. 군의 동쪽에는 시루봉(1,162m)·남덕유산(南德裕山 : 1,508m)·깃대봉(1,015m)·백운산(白雲山 : 1,279m)·월경산(月鏡山 : 980m)·봉화산(烽火山 : 920m) 등이 솟아 있어 경상남도와의 경계를 이루며, 서부에는 천반산(天盤山 : 647m)·성수산(聖壽山 : 1,059m)·팔공산(八公山 : 1,151m)·묘복산(猫伏山 : 846m) 등이 솟아 있다. 경상남도 거창, 함양군과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은 남원시, 서는 임실군, 진안군, 북은 무주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또한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사이의 분지로서 호남정맥의 종산인 장안산(長安山, 해발1237m)이 있고,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를 이룬다. 연평균강수량 1,100~1,200㎜, 연평균 기온 12~13℃, 평균해발 430m이다. 호남지방을 동부의 산악지대와 서부의 평야지대로 갈라놓고 있는 산줄기가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다. 백두대간의 산줄기에 우뚝 솟은 장수 영취산에서 북서쪽으로 주화산까지 뻗은 금남호남정맥이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유역으로 갈라놓는다. 금강 섬진강 상류지역의 풍부한 물과 구릉지역, 험준한 산악권역을 바탕으로 특정한 세력을 확장하기에 유리하였고 동서남북의 다른 세력집단이 꼭 넘어야 할 관문으로 발전하였으며 동서의 중요한 역사적 관문지로는 육십령이 있다.
우리나라의 민족이나 역사를 단지 사학적 입장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인즉 인류학, 고고학, 언어학, 등의 힘을 빌리어 연구해야할 것이나 아직 장수에도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만한 사료들이 정립되어있지는 않다. 장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흔적은 계남면 침곡리 54점(군산대학교박물관, 2002)의 출토유물에서 찾을 수 있지만 발굴조사로 이어지지 않아 그 성격이 드러나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천천면 월곡리 반월마을 입구 빗살무늬 토기와 석기류가 수습되었다(윤독향강원종, 2001, 전북대학교박물관). 장수천을 따라 정착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 장수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장수군에도 마한의 소국과 관련된 세력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다만 1989년 천천면 남양리의 청동.철기유물과 최근 계남면 침곡리에서 조사된 3기의 주거지(군산대학교박물관, 2002), 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 장계면 장계리 문화마을 조성지역의 유적 등이 수습되었는데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는 이 시대의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어 원삼국시대(삼한시대)에도 선진지역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을 진단할 수 있다. 마한 이래로 줄곧 백제문화권에 속했던 것으로 인식된 전북 동부지역 토착세력의 실체를 밝히는데 값진 고고학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이 청동기 시대의 70여기의 지석묘와 가야계통의 밀집된 100여기의 고총이다. 장수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발전하였던 토착세력집단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기 이전까지 백제가 아닌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주고 있다. 장수에 산재된 청동기문화유적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79년이다. 그 해 장계면 삼봉리 북방식 지석묘를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문화유적이 없던 곳으로 인식되어 온 장수에도 문화유적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유적을 알리기 위한 손길은 깊이 있게 미치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 까지만 하여도 장계면 삼봉리 일대는 30여기의 지석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개발에 밀리어 지금은 그 흔적을 살피기 어렵다. 1989년 천천면 남양리에서 발견된 유적을 시작으로 1988년 전북 향토문화연구회의 문화재 지표조사, 1993년 군산대학교박물관 지표조사를 비롯하여 1999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계남면 호덕리와 장계면 삼봉리에서는 장수군의 토착세력집단과 관련된 가야계 석곽묘에서 가야토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그리고 산서면 봉서.척동간 도로확포장 구간에서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목이 긴 항아리)가 부장된 가야계 석곽묘가 조사되었다.1970년대에는 금제 귀걸이와 목걸이가 발견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1998년 천천면 월곡리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과 석제 방추차(판석형 가락바퀴,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인류가 개발한 가장 오래된 방적기구)가 수습되었다. 1979년부터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진 장수문화유적의 분포현황은 지석묘29, 고분 76, 도요지 31, 건물지 8, 산성 12, 봉수대 10, 유물산포지 38, 도합 204곳에 분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서 축적된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장수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발전하였던 토착세력집단은 백제에 복속되기 이전까지 백제가 아닌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은 장수군 전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그중 봉토의 직경이 10M이상 되는 중.대형급 고총이 100여기, 하위계층과 관련된 분묘유적 20여개소가 분포된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이는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던 강력한 토착세력집단이 존재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기 33년(백제 다수왕 6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문자로 본다면 장수지역에 군현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초고왕 연대쯤으로 추측되지만 언제부터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었는지 알 수 없다. 장수군에 최초로 현이 등장한 것은 백제의 백이군과 우평현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장계면에 백이군, 장수에는 우평현이 설치되었다. 장수에서는 불교사원이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이 양악리 뒤편 심방사(尋訪寺)인데 사리탑(양악탑, 지방유형문화재21호)과 함께 건물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때부터 이미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국경싸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쪽으로는 번암면 유정리 산성외 3개의 토성과 산성, 장수의 용계산성 외 1개, 계남면 침곡리의 산성, 장계면 오동리의 산성, 삼봉리 산성, 명덕리 산성 등 10여개가 넘는 산성과 15개 이상의 봉수가 있다. 다만, 산성의 건축이 삼국시대에만 이루어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가야시대 이전부터일 가능성이 높고 그 이름도 분명하지 않다. 장수지역에도 선사시대의 발굴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조속히 정립되기를 바라고 있다. 의자왕 20년(660)백제가 신라에 멸망하고 , 663년에는 주류성이 함락됨으로써 그 영토가 당과 신라에 양분되는 과정에서 장수군은 모두 신라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당의 방식으로 제도를 개편하면서 그 영속체제를 강화하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할 때 전국의 모든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그 때 백이(백해)군은 벽계군壁溪郡으로 고쳐 진안과 고택을 영현으로 하였으며 우평현은 고택현으로 고쳐 벽계군의 영현이 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개혁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혜공왕12년(776)에는 지명이 다시 바뀌는 과정에서 백이(백해), 우평으로 환원되었다. 고려시대에 다시 중국식의 한자명으로 바뀌는데 현종9년(1018) 고택현은 장수현, 벽계군은 장계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어느한군데도 수령관은 되지못하였고 계북면 양악리 일대의 양악소, 천천면 남양리 일대의 이방소, 천천면 와룡리 일대의 천잠소, 장수읍 대성리 일대의 복흥소 등과 함께 남원부임내의 속현이 되었다. 공양왕 3년(1391년) 장수현과 장계현이 감무관으로 독립되었고 그 부근의 양악소 등이 두현의 임내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장수현이 감무관으로 독립되었지만 실제로는 감무가 파견되지 않아 장계현의 감무가 겸임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 이후에는 백제와 신라와 같은 영토분쟁은 사라지고 고려의 숭불정책이 장수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장수읍 대성리 필덕마을에 있는 팔성사와 7암자, 산서면 마하리의 원흥사가 그것이다. 장수에 부족을 형성하고 살았던 황씨들의 기록과 해변에서의 왜구들의 잦은 침략행위 등은 험준한 장수에 아늑한 터전을 갖게 했던 원인의 하나로 보고 있다. 내륙으로 진출했던 왜구들을 격퇴하는 이성계 장군과 새벽에 울어야 하는 닭이 용의 계시에 의하여 저녁에 울어, 왜구를 물리치게 했다는 용계리에 얽힌 일화는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용의 의미와 함께 한다.
장수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조선태조 1년 (1392년)에는 일년전에 단행한 상황이 역전되어 장수현의 감무가 장계현을 다스렸으며 이어 양악소, 이방소, 천잠소, 복흥소 등과 함께 고을자체가 폐지되어 장수현의 직촌이 되었다. 즉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군이 설치되었고 고려때도 현으로 존속되었던 장계현이 없어지고 양악소를 비롯한 4개의 소와 함께 모두 장수현으로 통합되었다. 장수현은 태종3년(1413년)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고는 조선조 말까지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조선조에서는 억불숭유정책과 역성혁명에 대한 반감으로 숨어 지내는 신하들을 출사시키려 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하지 않고 다만 고려조 보문각 대제학으로 지내시다 출사에 응하지 않아 임내면(장계면) 호덕에 유배된 정신재 백장선생의 권유에 의해 방촌 황희 정승만이 응하였다 전한다. 그러나 황희정승 또한 양녕대군의 폐세자 논의에 반대한 이유로 장계면 도지촌(장계면 도장골)에 유배되어 살게 되었다. 정신재 선생과 방촌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던 임내면 일대는 당시 각처에서 책을 짊어지고 모여드는 학자들로 좌도인맥을 형성하여 전라도를 학문의 도로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인맥을 형성한 분들은 이조판서 손재 김남택, 예조판서 퇴휴재 송보산, 장수출신(임남면 조곡마을) 문장가 뇌계 유호인, 강원감사를 지내던 파은 박수기선생 등이며 주로 임내면, 임남면에 정착하였다. 1407년(태종7년) 장수에 향교가 설립되었고 1413(태종14년)년 장수현이 선창리에서 장수리로 이전되었으며 향교도 1686년(숙종12년)에 장수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사학이 성행하면서 장수에도 많은 서원이 생겼는데 황희정승의 출생지로 알려진 장수읍 선창리의 창계서원, 산서면 학선리의 압계서원, 장계면 송천리의 도암사, 천천면 춘송리의 용암사, 산서면의 사상리의 사동사, 계남면 화음리의 화산사 등이다. 고종32년(1895년)에 단행된 지방통치제도의 개편 때, 장수현이 장수군으로 되어 남원부에 속했다가 그 이듬해 13도의 설치로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광무10년(1906년)남원군 산서면, 번암면이 편입됨으로써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영역이 형성되었으며 1970년에는 장수면 대성리에 대성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979년 5월 1일에는 전국의 군청소재지를 읍으로 바꾸는 조치에 따라 장수면이 장수읍으로 승격되었고 1993년에는 계내면이 장계면으로 바뀌어 장수읍, 산서면, 번암면, 장계면, 계북면, 천천면, 계남면으로 1읍 6개면으로 구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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