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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운동
1919년 봄 3·1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로 파리 평화 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보낸 것이 탄로되어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게 피체, 박해를 받은 사건으로,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 또는 파리장서 사건이라 하며 청원서를 파리장서라 한다. 3·1 운동이 국내 시위에 주력했다면 파리장서 운동은 세계 언론을 환기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하 겠다. 이 운동은 거창에서 곽 종석(郭 鍾錫)이 주도 하였으며, 또 거창 출신 김 재면(金 在 明), 변 양석(卞 穰錫), 이 승래(李 承來), 윤 인하(尹 寅夏), 박 종권(朴 鍾權), 윤 철수(尹 哲洙) 등 6명이 연서하였으므로 거창이 그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일제는 1918년 11월 전후 국제 회의에 대비하여 이 완용(李 完用)을 조선의 정당 대표로 김 윤식(金允植)을 유림 대표로 삼고 소위 독립 불원서라는 것을 조작하여 일본 정부에 제출케 한 일이 있었다. 1919년 정월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자 서울 유림들 사이에 일제의 간계를 봉쇄하기 위한 파리 평화 회의에의 독립 청원서 제출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이무렵 곽 종석의 문인인 윤 충하(尹 忠夏)는 서울에서의 움직임을 보고, 1919년 2월 19일 다전(茶田) 으로 곽 종석을 찾아와, 세계 정세와 서울 유림의 동정을 상세히 전하고 곽 종석이 선두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으며, 고종 인산일을 기하여 전국 유림의 서명을 받기로 논의하였다. 곽 종석은 이미 80을 바라보는 노구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곽 연, 김 황(金 榥) 두 사람을 2월 26일 서울에 파견하여 윤 충하와 회동하였다.
이보다 앞서 한 용운(韓 龍雲)은 거창으로 곽 종석을 찾아와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 을 요청하여 동의받았으나, 그가 상경한 2월 24일에는 이미 인쇄가 끝난 후였다.
이와는 별도로 성 태영(成 泰英)과 김 창숙(金 昌淑)도 서면 연락으로 장서운동을 꾀하다가 곽 연,김 황을 만나 합류하였고, 김 창숙이 모친 병환으로 2월 25일에야 상경하니 역시 선언 서의 인쇄가 끝난 후였다. 이러한 이유로 3·1 독립선언서 서명 민족대표에 유림이 참여치 못하였는 바, 이것이 오히려 장서운동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당초 장서운동은 전국 유림을 총망라할 계획이었으나 3·1운동이 일어남으로서 일제의 감시 가 삼엄하였고, 또 시일이 촉박하여 부득이 영남과 기호에만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김 창숙은 곽 연, 김 황을 독립청원서 문안 작성을 위해 곽 종석에게 보내고 자신은 3 월 8일 서울을 출발하여 성주에 들렀다가 곽 종석을 찾아왔다. 김 창숙을 반가이 맞이한 곽 종석은 "전국 유림 이 일어나 대의를 세계 만방에 천명하게 된 것으로 이몸이 참답게 죽을 곳을 얻었다."하고, 독립청원서 문안 작성은 성주에 사는 회당(晦堂) 장 석영(張 錫英)에게 이미 부탁했으니, 거 기에 가서 찾으라 하였다. 김 창숙은 몇몇 사람을 만나 자금 조달과 서명을 받기 위해 김천 과 영주에 들렀다가 정 석영을 찾았는데, 이 때 청원서 문안은 곽 종석에게 보낸 후였고, 그 사본을 받아보니 약간 미흡한 곳이 있어서 곽 종석과 상담하기 위해 다시 거창으로 왔다. 김 창숙을 만난 곽 종석은 정 석영이 지은 문안을 보고, 자신이 별도로 작성한 초고를 내어 주었는데 이것이 오늘에 전하는 장서이다.
곽 종석은 김 창숙으로 하여금 청원서 전문을 외우게 하고 곽 연에게 세필로 다시 쓰게 하 여 그것을 가지고 신총을 만들어 미투리 한 켤레를 쌌다. 김 창숙에게 중국에 가면 우리 독립 투사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데 특히 당대의 석학이며 중국 참의원 의원인 이 문치(李 文治)를 만나면 손 문(孫 文)을 움직여 줄 것이다 하였다. 이 문치는 몇 해 전 곽 종석을 내방, 같이 기거하면서 정치, 사회, 문학 등에 흉금을 터놓고 사귀었던 친 우다. 끝으로 김 창숙의 협조자로 이 현덕(李 鉉德)을 며칠 안에 상경시키겠다고 하였다. 그 날 밤 일본헌병들이 김 창숙을 찾고 있다는 전갈이 있어, 이웃집에 피신하여 밤이 새자 곧 출발하여 3월 14일 서울에 돌아왔다. 전국 각지를 분담하여 활동해 오던 사람들은 기약했던 3월 15일 일제히 성 태영의 집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추진 방법을 수의한 결과, 일헌의 경계가 날이 갈수록 엄하므로, 이 이상 지연시키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니 국내 활약 은 여기서 그치고 파리행 출발 준비를 서두르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거창에서 상경할 이 현 덕을 기다리던 김 창숙은 유 진태의 소개로 기호 유림의 영수인 지산(志山) 김 복한(金 福 漢)의 문인 임 경호(林 敬鎬)를 만나게 되었다. 김 복한은 승지로서 1895년부터 여러차례 의 병을 일으킨 바 있었고, 을사조약 때는 이 완용 등을 참수하라고 상소하다가 옥고를 겪기도 하였는데, 그도 역시 17명의 연서로 된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임 경호(林 敬鎬)로 하여금 파리 평화 회의에 발송하도록 시켜 임 경호는 같은 문인들과 함께 그 발송 준비를 획책하고 있는 참이라 하였다.
유 진태는 서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으나 같은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이룩된 독립 청원서를 휴대한 양인이 우연히 동석하게 된 것은 우리의 독립을 기필코 성취시키려는 천지신명이 도운 기연이라 하면서 손을 굳게 잡고 공동 행동을 합의하였으니, 3백여 년간 반목해오던 기호와 영남의 유림이 조국 광복이라는 대의 앞에 대동단결을 한 것 이다.
두 사람은 곧 기호본과 영남본의 문안을 검토하였는데, 그 내용이 비슷하였지만 영남본이 보다 간명하였으므로 영남본을 채택하기로 하고, 서명자 명단은 지역의 구별없이 열기하기 로 했는데 모두 137명 이었다. 그리고 파리에 파견할 대표로는 임 경호의 제의로 김 창숙으로 정하였다.
3월 23일 동지 10여인이 베푼 조촐한 송별연에 이어 이 득년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밤 10시발 봉천행 기차를 탔다. 3월 24일 새벽 안동역에 내린 김 창숙은 옛 친구 박 광(朴 洸) 을 만나 국내외의 연락을 부탁하고, 동 순태 지점에서 화물로 가장한 자금을 인수하고 봉천 의 서탑에서 이 조연(李 造然)으로부터 노령과 중국에 있는 동포들의 활약상의 들은 다음 3 월 28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는 이 동녕(李 東寧), 이 시영(李 始榮), 신 규식(申 圭植), 조 완구(趙 琬九), 손 진 형(孫 晋衡), 신 채호(申 采浩)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그동안의 활동 상황화 국제 정 세를 듣고, 3·1 운동 이후의 국내 정세와 독립 청원서의 작성 경위를 설명하고 파리고 갈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김 창숙의 파리 파견을 통역과 여비 등을 감안하여 중지하도록 하고, 그곳에 주재하고 있는 김 규식(金 奎植)에게 수송하여 그로 하여금 직접 평화 회의장 에 제출하기로 결의한 후, 청원문을 윤 충현(尹 忠顯)에게 위촉, 독어, 불어, 영어 등으로 번 역케 하였다. 각국 번역문을 수천 부씩 인쇄시켜서 김 규식에게 보낸 다음 김 창숙은 그것 과도 별도로 파리 평화 회의 의장 및 각국 대표들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 중요 기관, 언 론계, 그리고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어 국제 여론을 크게 환기 시켰다.
한편 김 복한(金 福漢)은 6월 초 검거 당시 중병으로 구속은 면했다가, 건강이 회복되어 8월 에 사건이 일단락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 감옥으로 이송, 12월 까지 옥고를 치루었다. 김 창숙은 계속 상해에 머무르면서 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925년 국내로 잠입, 8개월간 활동하다 일제에게 체포됨으로써 제2차 유림단사건이 일어나 게 되었다.
장서의 시작부터 발송까지 큰 역할을 한 많은 인사들이 장서에 서명치 않았던 것은 만약 서 명 인사들이 모두 투옥되더라도 국내외에서의 활동과 연락을 계속하기 위한 제2진으로 대비 하기 위함이었다.
1925년의 제2차 유림단사건도 이같은 기성조직을 토대로 삼았던 것이니 김 창숙, 곽 연, 김 황 등을 비롯하여 이미 말한 바 있는 많은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천하 만물이 같이 나서 자라는 것이 진리인데 쟁탈과 권력으로 남의 목숨을 해쳐 나라까지 빼앗아 제것으로 만드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많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만국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 등을 누리게 하는데 만일 원통한 마음을 호소할 기회와 혜택을 주지 않는다면 어찌 여러분의 사명을 다한다 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피맺힌 심정을 호소 하니 자세히 살피십시오.
한국도 만방의 하나로 삼천리 강토와 2천만 겨레에 4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명국 임은 세계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강제적인 조약으로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행위를 말해 보겠습니다. 조약에서는 한국 독립을 지키겠다고 늘어 놓고, 실은 협박과 기만 으로 독립은 보호로, 보호는 합병으로 되어 이것이 마치 한국의 소원인 양 꾸몄으니 이는 한국은 물론 만국을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조국 독립을 잊지 않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참아가며 십 년을 견디어 왔습니다. 마침 여러분이 파리에서 회의를 열고 만방을 평 화롭게 이끌어 폴란드가 독립되었으니, 한국의 독립에도 협조해 주신다면 언제나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회의 결과 독립되었다는 기쁜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고종 임금님이 승하하셨 다고 하니, 이 슬픔과 원통함을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3월 1일 국장일에 온 국민이 독립만 세를 부르며 임금님의 영혼을 위로할 때 일본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맞서 죽음을 돌보지 않 았음은 우리의 원한과 충정의 터짐이요, 또한 여러분이 우리에게 기회와 용기를 준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후 아무런 변화 현상이 보이지 않음은 일본의 간사한 꾀가 여러분의 이목을 흐리게 한 것같아 다시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하늘은 모든 사물에게 자유와 활동력을 주었거늘 하물며 우리 삼천리 강토에 자치 능력이 없겠습니까. 일본은 우리의 풍속을 바꾸려 하나 이는 말이 아니며, 물론 대신 다스린다는 것 도 혼란만 있을 뿐 입니다. 거짓으로 한국은 일본에 붙이기를 원한다 하나, 우리 민족의 주체성은 우리만의 사 상과 문화에서 얻어진 것이므로 비록 일시적 억압에 굽힐지언정 민족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 음을 알면서, 세계 여론을 억압하려 함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존폐가 이번 회의에 달려 있음을 알고 나라 없는 삶보다 나라 있는 죽음 에 떳떳하기를 십 년 억울한 마음을 호소하고자 하오니 너무도 슬프고 야속하여 말문이 막 힙니다. 여러분이 세계의 여론에 따라 이를 순조롭게 처리한다면 우리도 나라를 찾을것이요, 세계 인류도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 언정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우리 이천만 생명만이 삶과 평화 속에서 버 림 받아야 되겠는지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오.곽 종석 (郭 鍾錫 :1846∼1919)
선생의 자는 연길(淵吉) 또는 명원(鳴遠)이요, 호는 회와(晦窩) 또는 면우(傘宇)이고, 본관은 현풍이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준 수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한주(寒洲) 이 진상(李 震相)에게 배웠다.
1867년에 거창 신원으로 이사했으며 1880년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함에 밤에도 상복을 벗지 않고 온돌방에 들지 않았다. 1883년 금강산을 다녀 오면서 태백산중의 학산(鶴山)이 은 둔하기에 알맞다고 생각되어 이듬해에 그 곳으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 1895년 조정에서 경 국(經國)할 만한 재질이 있다고 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임명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그 해 8월의 민비 시해와 일본의 횡포에 분개하여 이듬해 봄에 상경하여 천하대의를 밝히라는 포고문을 지어 열국 공관에 보냈고 1896년 겨울에 거창 가북의 다전(茶田)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1899년 고종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에 임명되어 도 취임하지 않았다. 1903년 7월 통정대부 비서원승(通政大夫 秘書院丞)을 제수했으나 이를 사양했으며 다시 칙 임의관(勅任議官), 칙임비승(勅任秘丞)을 내려도 다 사양하였는데 고종 황제는 비성랑(秘書 郞)을 보내어 같이 입궐하라고 하였다. 이에 아무 직명없이 산야에 있을 때처럼 관복도 입 지 않은 채 알현(謁見)하기를 고집하니 고종 황제도 마침내 그 뜻을 받아들여 그 해 8월 28 일 유건(儒巾) 도포 차림으로 함녕전(咸寧殿)에서 배알하였다. 이 때 고종 황제는 치국(治 國)하는 길을 하문하였고 29일에는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을 제수하였으며, 9월 3일 다시 궁정에 불러 당장 급한 시무(時務)를 하문 받자 올바른 학문을 숭상하고(崇正學), 민심을 수 습하며(結民心), 군사 체제를 옳게 정하며(定軍制) 재정을 행함에 절약할 것(節財用) 등 시 무사조(時務四條)를 말하니 고종 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한양에 그가 거처할 저택을 하사하 게 하였으나 청빈한 원로 대신에게만 있었던 전례를 들어 완강히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선생은 10월에 상경하여 매국 5적을 참할 것을 상소 했고 11월에 고종 황제와의 대면을 청했으나 관리들이 임금께 알리지 않아 3일간을 기다려 도 아무런 통지가 없으므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선생은 가북의 다전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조국 광복의 지름길은 ?기 민족의 자주독립만이 있을 뿐이 라는 일념으로 이를 세계 만방에 선포하기 위해 전국 유림 대표 137인을 대표하여 1919년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파리정서(巴里長書)를 내게 되었다. 선생은 퇴계선생의 학문을 이어 받은 스승 이 진상에게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워 계승했고, 조선 예학자(朝鮮禮學者)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유(巨儒)로 문장에도 능숙하여 방대한 면우집(傘宇集)을 남겼다. 1963 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후손은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와 거창에 거주하고 있으며 거창 가조면 원천의 다천서당(茶川 書堂)과 산청군 단성면의 이동서원(泥東書院)에 제향되었고 그의 신도비는 김 창숙(金 昌淑) 이 지은 것이다.
김 재명 (金 在明)
자는 호현(晦賢), 호는 일산(一山)으로 본관은 선산이다. 1852년 남상면 대산리에서 출생하 였고, 독립 우동 당시 68세로 후손은 남상면 대산리에 살고 있다.
윤 인하 (尹 寅夏)
자는 경여(敬汝), 호는 심산(心山)이며 1855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 파평이다. 장서 운동 당시 65세로 후손은 남하면 양항리에 살고 있다.
이 승래 (李 承來)
호는 숙관(肅觀)이며 1856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전주이다. 장서 운동 당시 64세로 후손은 서울과 대전에 살고 있다.
변 양석 (卞 穰錫)
자는 명원(鳴遠), 호는 구당(苟堂)이다. 1859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士屛里)에서 출생하였 고 본관은 밀양이며 장서 운동 당시 61세로 후손은 가조면 병산과 경북 금릉군 감천면 양천 동에 살고 있다.
박 종권 (朴 鍾權)
자는 치종(致宗), 호는 회우(晦宇)이며 1861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밀양이다. 장서 운동 당시 59세로 후손은 남하면 양항리에 살고 있다.
윤 철수 (尹 哲洙)
자는 순명(舜明), 호는 해관(海觀)이며 1868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파평이다. 장서 운동 당시 59세로 후손은 남하면 양항리에 거주하고 있다. 파리장서의 발상지인 거창에서는 군민이 대동단결하여 파리장서비 건립 거창군 추진 위원회 를 결성하고 거창읍 상림리 옛 침류정 자리에 비를 세워 선인들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고 애 국 애족의 정신을 가다듬게 하고 있다. 비 건립은 1977년 9월 23일이고 10월 8일에 제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