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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산정사 원문보기 글쓴이: 모봉형진
4. 벽암록에 대하여 | ||
원오극근(園悟克勤) 스님이 풍주( 州) 협산(夾山) 영천원(靈泉院)의 방장실(方丈室), 즉 벽암실(碧巖室)이란 곳에서 1111년부터 1117년까지 7년에 걸쳐 설두중현(雪竇重顯) 스님이 선문답(禪問答) . 설화(說話) . 일사(逸事) 가운데 일백제(一百題)를 골라 뽑고 여기에 자기의 견해를 운문(韻文)의 형식으로 표현했던 설두백칙송고(雪竇百則頌古)를 애송(愛誦)하면서 자기의 선기(禪機)와 문장(文章)을 활용하여 설두 스님이 선택해 놓은 일백 칙의 화두의 머리에 결론적(結論的) 비평(批評 : 垂示)을 쓰고 화두와 송고의 각구(各句)에는 풍자적인 단평(短評: 著語)을 붙이고 다시 그 화두와 송고에 비평적인 주해(註解 : 評唱)를 덧붙여 엮은 선(禪)의 비판서(批判書)로 [무문관]과 더불어 선수행의 필독서로 널리 참구되고 있다. 그런데 [선림보훈(禪林寶訓)] 4권에 들어있는 심문담분(心聞曇賁)이 장구성(張九成)에게 보낸 편지에 [벽암록]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신진(新進)의 후학자(後學者)들은 원오 선사의 언구에 현혹되어 아침 저녁으로 벽암록에 쓰여있는 구절들을 외우는 것을 전부(全部)인 양 생각하였으며 그에 대한 그릇됨을 깨달은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슬픈 것은 수행자의 근성이 썩어 버린 것이다." 그 뒤 원오 선사의 법제자였던 대혜종고(大慧宗 ) 선사께서 이 악폐(惡弊)를 보고 [벽암록]의 목판을 모두 모아 불태워 버리고 스승의 주장을 과감히 배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맥락에서 대혜 선사가 벽암록을 태워버렸던 것이나 결국 원오 선사의 참뜻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벽암록]의 소중한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어 뒤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대중을 위해 1978년에 안동림씨가 풀어쓴 [벽암록(碧巖錄)]을 현암사에서 출판하였으며, 1988년에는 종달(宗達) 이희익 노사께서 풀어쓴 [벽암록(碧巖錄)]이 상아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 뒤 1933년 해인사 장경각에서 [벽암록]을 상중하 3권으로 나누어 출판하였다. 영문판으로는 1977년에 Thomas와 J. C. Cleary가 풀어쓴 [The Blue Cliff Record(벽암록)]를 Shambhala 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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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 | ||
[벽암록(碧巖錄)] 제3칙에 다음과 같은 화두가 담겨 있다. 마조(馬祖) 스님이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무렵 그 절의 원주(院主) 스님이 문병(問病)하러 와서 "스님! 요즈음 병세가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스님께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하고 대답했다. 말 그대로 하면 '해의 얼굴을 한 부처님! 달의 얼굴을 한 부처님!'이라는 것이 된다. 불명경(佛名經)에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세이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낮 하루밤이라고 쓰여 있다. 마조 스님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긴 수명을 가진 '일면불'과 짧은 수명은 가진 '월면불' 두 분의 이름을 외쳤는데 아마 마조 스님은 자기의 죽음을 느끼면서 사람의 일생은 길다고 하면 긴 것이고 짧다고 하면 짧은 것이나 아무튼 길거나 짧거나에 관계없이 일면불은 일면불로서, 월면불은 월면불로서 각각 매우 소중한 인생이라는 것을 강조했다고 헤아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 95년 8월호에서 이미 다루었던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른 인 관계식을 다시 이용해 보자. 일면불은 S' 좌표계에 대해 매우 빠른 속도로 상대운동을 하고 있는 S 좌표계에 사는 관측자이고 월면불은 S' 좌표계에 사는 관측자로 두 사람 모두 S' 좌표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측하고 있다고 하면 이 문제를 머리로 이해하기는 쉬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해의 차원에 불과한 것이며 마조 스님의 외침은 이해를 뛰어넘어 전 생애(生涯)를 건 체득의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어느 고인(古人)은 마조 스님의 "일면불! 월면불!"이라는 외침에 '황하의 물은 위쪽이나 아래쪽이나 철저하게 탁해 있다[黃河徹底濁].' 라고 덧불이고 [着語하고] 있다. 마조 스님의 배짱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이 '황하철저탁'의 경계도 뚜렷해지리라 생각된다. 문득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생각난다. "인간의 수십 년 일생은 수십억 년인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지만 하루살이의 인생에 비하면 꽤 긴 세월이다." 자! 어떻게 하면 긴 세월이라든가 짧은 세월이라든가 하는 상대적 견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부디 제방의 노사(老師)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허송 세월을 보내지 말고 한 스승밑에서 "일면불! 월면불!"하고 처절히 외치며 한 동안 다리를 틀고 앉아 진득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빠른 체득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일깨워 드리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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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문도일설(雲門倒一說) | ||
'벽암록' 제 15칙에 다음과 같은 시공관(時空觀)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때 중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만약 설법을 듣는 사람도 없고 설법할 때와 장소도 없었다면 부처님은 어떤 태도로 나오셨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운문 스님, "아무 것도 설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답했다〔擧 僧問雲門 不是目前機 亦非目前事 時如何 門云 倒一說〕. 이 화두는 선을 이론적으로만 추구하려는 의학도(醫學徒)들 사이에 성행하던 문제의 하나로 제대로 참선 수행을 하던 스님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만들어낸 짓궂은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의학도의 이런 질문에 당대의 대선객(大禪客)이었던 운문스님은 거침없이 "도일설(倒一說)"이라는 한 마디의 말로 이 의학도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운문 스님은 제자들이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물었던 대부분의 선 문답에 관해 짧은 한두 마디 말만으로 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어느 때 제자가 "어떤 것이 불(佛)입니까?"하고 묻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雲門 인 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 〕라고 하셨는데 이 이야기도 지금까지 널리 참구되고 있는 화두의 하나이다. 화두로 다시 돌아가 운문 스님에게 이 의학도가 "아무리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도 설법을 들을 청중도 없고 설법할 때와 장소가 없다면 부처님도 어쩔 수 없겠지요?"라고 정말 한심한 물음을 던졌다. 마치 중세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 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쓸데없는 논쟁과도 비슷하다. 보기를 들면 '바늘 끝에 천사들이 몇 명이나 앉을 수 있겠는가?'라는 논쟁도 했다고 한다. 이 의학도의 공간적 시간적 집착에 대해 운문 스님은 "아무 것도 설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운문 스님의 이런 답의 문구 자체는 아무리 머리로 분석을 해보아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단서는 하나도 없다. 오직 이 화두를 들고 온 몸을 다 던져 철저히 참선수행을 통해서만이 이 화두를 꿰뚫을 수 있을 뿐이다. 즉 운문 스님의 '도일설'이라는 이 한 마디는 즉시 의학도 자신을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의 가르침은 선 수행자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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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거사호설편편(龐居士好雪片片) | ||
'벽암록' 제 42칙에 선지(禪旨)에 투철한 재가(在家) 수행자였던 방(龐) 거사(居士)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방 거사가 약산(藥山) 선사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자 약산 선사께서 열사람의 선객(禪客)에게 명하여 산문(山門)까지 방 거사를 전송하도록 했다. 때 마침 겨울날인지라 눈이 펄펄 대공(大空)을 날으고 있었다. 이때 방 거사가 공중을 가리키며 "아! 탐스러운 눈송이! 송이 송이마다 딴 곳에는 떨어지지 않는구나!〔好雪 片片不落別處〕"라고 했다. 이때 전(全) 선객(禪客)이 "그러면 어디에 떨어집니까?〔落在什 處〕"하고 물었다. 그러자 방 거사가 즉시 전 선객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맞은 전 선객이 "거사님!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하고 대들었다. 방 거사 말하기를 "그대는 저 눈송이의 낙처(落處)도 모르고 진짜 선객인 양 건방지게 선객의 이름을 등에 지고 있으나 그대의 이름은 이미 염라대왕의 장부에 기입되어 있네!"라고 했다. 전 선객도 질세라 "거사님! 당신도 거사라고 하면서도 눈송이의 낙처를 모르고 있을 테지요!"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방 거사 또다시 한 대 후려갈기며 말하기를, "눈은 뜨고 있으나 장님과 같고 입은 열고 있으나 벙어리와 같구나!"라고 했다. 한편 이 화두에 대해 설두(雪竇) 선사는 방 거사를 거들며 한술 더 떠서, "첫 번째 물었을 때 눈덩이를 크게 만들어 즉시 전 선객의 얼굴에 던져 오만한 콧대를 꺾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따로 덧붙이고 있다. 사실 이미 오래 전에 만법(萬法)과 벗〔侶〕이 된 만년의 방 거사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우주와 합일(合一)된 묘경(妙境)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약산원(藥山院)을 떠나 고향인 양양(襄陽)으로 가려고 산문(山門)을 나섰을 때, 때마침 탐스럽게 내리고 있던 눈을 접하면서 "호설! 편편불락별처!"라고 당시의 묘경을 그저 무심(無心)히 토로했을 뿐 그 자신은 떨어지는 어떤 특정한 곳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시 말해 방 거사의 말은 평등에 즉(卽)한 대자연의 찬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 수행이 미숙했던 전 선객이 방 거사의 말에 얽매여, 즉차별관에 사로잡혀 눈송이의 낙처를 특정 지으려고 했던 것이다. 자! 그 당시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방 거사의 "호설! 편편불락별처!"라는 경계에 대해 무어라고 대꾸했겠는가! 찬찬히 살펴보시기 바란다. 다리를 틀고 앉아 '낙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며 한동안 빠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며 한동안 진땀을 흘려야만 비로소 뚜렷한 견해(見解)가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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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까지 이어진 포장도로 | ||
앞의 화두와 관련되어 내가 꼭 다루고자 했던 주제가 하나 있다. '절까지 이어진 쾌적한(?) 포장도로'이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20여 년 전만 해도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절들은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만 다다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방학 때마다 참선 수련회를 다닐 때면 도시에 살다가 수련회 첫날 물소리, 바람소리, 풀내음 등과 접하면서 정말 속세를 떠나 수행하러 가는 입산(入山)의 분위기가 저절로 감돌았으며, 마지막 날에는 새로운 각오로 속세에서도 물들지 않고 큰스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자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하산(下山)의 분위기를 맛보곤 하였었다. 한편 요즈음은 전국 어디를 다녀도 대부분 쾌적한 포장도로고 절 앞마당까지 이어져 있어서 이런 분위기는 전혀 맛볼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단지 분위기 탓만 하자고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로 인해 한국불교의 핵심인 청정한 '수행승가(修行僧家)'가 약화되지 않을까 하는 점인 것이다. 수행 승들이 큰스님들께서 계신 곳이나 청정 수행도략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설 때 산 아래에서부터 목적지까지 올라가는 동안 물소리, 바람소리 등의 자연과 접하면서 불퇴전(不退轉)의 구도심(救道心)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수행의 바탕인 기본 체력(오랫동안 다리를 틀고 앉아 있어도 끄덕 없는 다리 힘)도 저절로 길러지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나는 휴식차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잘 알려진 한 총림(叢林)을 접하면서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적이 있었다. 쾌적한 포장도로가 절 앞마당까지 이어져 있으면서 둘레의 수려한 자연경관은 완전히 훼손돼 있었는데 이는 관광 수입을 올리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나를 더욱 경악스럽게 한 것은 10대 이상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절 옆에 늘어서 있는 흉측한 콘크리트로 만든 사찰 전용 실내 주차장이었다. 과연 이렇게 많은 차가 수행 전문도량인 총림에 필요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사찰 행정용 승용차 1대, 사찰 운영을 위해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봉고차 1대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쾌적한 포장도로가 스님들의 수행에도 악영향을 미치겠지만 신도들의 신심에도 역시 악영향을 크게 미치리라고 본다. 자가용을 타고 유행가 노래를 들으면서 바로 절 앞에서 내려 그저 기복적 신앙을 위한 물질적 시주나 하고 그 좋은 자연 경관과는 접할 사이도 없이 황급히 되돌아가는 신자들을 상상해보라! 진실한 신심이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러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심각한 문제라 생각된다. 더 나아가 앞에서 다루었던 방 거사와 전 선객 같은 멋진 일화는 더더욱 만들어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정말 선(禪)의 위기 상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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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산무한서(洞山無寒署) | ||
'벽암록' 제 43칙에 다음과 같은 계절(季節)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때 중이 동산(洞山) 스님에게 "추위와 더위가 닥쳐오면 어떻게 회피(廻避)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해 동산 스님, "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을 향(向)해 나아가지 못하는가?" 라고 응답했다. 중이 다시 "어떤 곳이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동산 스님, "추위가 오면 그대가 동사(凍死)할 정도로 춥고, 더위가 오면 그대가 타죽을 정도로 더운 그곳이 바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니라!"라고 답했다.〔擧 僧問洞山 寒署到來 如何廻避 山云 何不向無寒署處去 僧云 如何是無寒署處 山云 寒時寒殺 黎〕. 참고로 여기에서 동산 스님이 묻고 있는 중을 '도려( 黎)'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이 중은 당시 지해분별(知解分別)을 일삼았던 의학도(義學徒)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동산 스님에게 무한 서처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이 의학도는 아마도 무한 서처를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밖에 있는, 교학에서 추상적으로 말하고 있는 극락정토(極樂淨土)나 열반(涅槃)의 묘경(妙境)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하고 머리로만 헤아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를 측은하게 여긴 동산 스님은 이 중에게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며 밥이나 축내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추위가 오면 추위와 철저히 하나가 되고 더위가 오면 더위와 철저히 하나라 될 수 있도록 수행에 힘쓰라고 했던 것이다. 참고로 선(禪)에서 자주 쓰고 있는 '살(殺)'이라는 말은 '죽인다'라는 뜻이 아니고 바라보는 사물(事物)이나 처한 상황(狀況)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쓰고 있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이제 12월로 접어들어 또다시 추위가 몰려오는 때라 추위와 더위가 없는 무한서처(無寒署處)를 체득하라는 동산 스님의 이 화두는 더욱 실감 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골라 뽑아보았다. 자! 여러분! 부디 이 겨울 동안 '무한서처'라는 언구에 걸리지 말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무한처(無寒處)'를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찾아 보시기 바란다. 내 손은 왜 부처님 손과 같은가? 〔我手何似佛手〕 이 화두는 무문 스님이 무문관 48칙을 설한 것에 대해 무량종수(無量宗壽) 스님이 후학을 위해 황룡혜남(黃龍慧南) 스님이 설한 황룡삼관(黃龍三關)에 친절하게 세 귀절씩 덧붙여 감사의 뜻으로 지은 게송이다. 황룡삼관 가운데 첫 번째인 이 화두에 종수 스님이 다음과 같이 세 귀절을 덧붙였다. 등 뒤의 베개를 손으로 더듬어 찾아내고 〔摸得枕頭背後〕 나도 모르게 크게 웃은 〔不覺大笑呵呵〕 원래 온 몸 이것이 바로 손이었구나 〔元來通身是手〕 자! 내 손은 왜 부처님 손과 같은가? 얼른 경계를 나투어 보라! 선의 근본은 철저하게 자기를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온 우주에 있는 어떤 것도 자기가 아닌 것이 있겠는가?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우리 자신은 통째로 눈인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다. 또 들을 때 자신은 통째로 귀인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듣는 것이 아니다. 자! 무문 스님의 친절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첫 관문을 투과해보라! 내 발은 왜 노새의 발과 같은가?〔我脚何似驢脚〕 이 화두는 황룡삼관 가운데 두 번째 화두인데 여기서 종수 스님이 다음과 같은 이 세 구절을 덧붙였다. 아직 발을 내딛지고 않았는데 벌써 도착하였다 〔未擧步時踏著〕 마음먹은 대로 사해를 돌아다니고 〔一任四海橫行〕 다리가 셋인 양기의 당나귀에 거꾸로 걸터 앉았다 〔倒 揚岐三脚〕 이 역시 종수 스님의 친절한 배려이다. 앞에서 손은 존귀한 부처님 손과 같다고 했는데 왜 발은 흉한 노새의 발과 같다고 했을까 찬찬히 간구해 보라! 사실 온 우주는 바로 다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로 설명한 것이지 체득의 나툼은 아니다. 자! 다리가 우주 자체인 경계를 어떻게 나툴 것인지 잘 따져 보라! 사람마다 태어나기 전의 생연이 있다〔人人有箇生緣〕 이 화두는 황룡삼관의 마지막 화두로 정말 투과하기 어려운 화두인데 종수 스님이 역시 다음과 같이 세 구절을 덧붙였다. 각자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을 깨닫다〔各各透撤機先〕 나타는 뼈를 부러뜨려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那 折骨還父〕 오조 어찌 아버지의 연을 빌 것인가?〔五祖豈藉爺緣〕 원래 황룡 스님은 이 화두에 대해서는 물음만을 제자에게 던졌을 뿐 제자가 나툰 경계에 대해 일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한다. 사실 이 화두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父母未生前本來面目〕'라는 화두와 똑같은 것이다. 자! 잘 간구해보라! 참고로 종수 스님이 덧붙인 둘째구는 오등회원〔五燈會元〕제 2권에 있는 이야기로 나타 왕자가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주었고 뼈를 부러뜨려 아버지에게 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나타 왕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참된 몸을 사용하여 그의 부모를 위해 법을 설했다고 한다. 또 셋째구는 오조홍인(五祖弘忍) 스님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전생(前生)에 홍인 스님은 파두산(破頭山)에 살았던 재송도자(栽松道者)로 불리웠던 은자(隱者)였다. 전생의 그런 어느 날 그는 산 속에서 사조(四祖) 도신(道信)스님을 만나 스님 밑에서 선수행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난 도신 스님은 그대는 선수행을 하기에 너무 늙었으니 다시 태어나 선수행을 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재송도자는 주(周)씨 성을 가진 사람의 딸의 배를 빌어 아버지 없이 다시 태어났다. 그후 성장해 다시 도신 스님을 만나 마침내 그의 법(法)을 이어 받았다는 유래가 있다. 그런데 종수 스님은 이 마지막 구절에서 아버지와 무관한 본래의 자기 즉 참 나를 나투게 하여 생연의 깊은 뜻을 체득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까지 재가의 선수행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작은 선적 체험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루었으며 특히 간화선의 핵심인 화두를 다룬 「선수행의 필독서」편에서는 무문관(無門關)과 벽암록(碧巖錄)에 담긴, 조사(祖師) 스님들이 제자들에게 던진 화두들 가운데에서 몇 개를 추려 조사들의 시공관(時空觀)과 생사관(生死觀)을 드러내 보이고자 노력하였으나 밖으로 추구하는 다른 학문과는 달리 안으로 추구해 가는 선의 본질상 조사 스님들의 시공관은 이해의 차원에서 다뤄야 할 일이 아니라 체득의 차원에서 다뤄야 할 일이기 때문에 글로 쓴다는 데에는 커다란 벽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역시 불교는 체험의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출발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참나를 찾는 노력을 통해 시간의 길고 짧음, 공간상에서의 거리의 길고 짧음의 상대적인 관념을 뛰어 바른 시공관을 체득해 가면서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확고한 생사관을 토대로 일생을 보람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길이 가장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조사 스님들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시공관을 갖게 하기 위해 별의별 화두들을 문제로 내놓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이런 화두들을 철저히 타파한 제자들은 더 이상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천하를 떠돌아다니거나 머물면서 역시 자기 제자들을 깨우치게 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꾸준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은 이제는 이해는 충분히 되셨기 때문에 좋은 스승을 택해서 다리를 틀고 앉아 몸소 체득하는 일만 남아 있으니 꾸준히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언제가는 반드시 불조(佛祖)와 손을 맞잡고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乾坤獨步〕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