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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남선교회 출애굽 성지순례 일지(2012.1.15 - 1.25)
-순례지역: 이집트(고센), 이스라엘(예루살렘, 갈릴리), 요르단
-참가자(총15명): 김현웅(총괄)/이명희, 장영길(기도회)/김미정, 이종희(인원관리)/조영숙, 최길선(사진)/민영란, 고영준(기록)/이명숙, 이광현(회계)/박예송, 김명섭(평가회)/유윤선/김상훈
-인솔자: 오세만 팀장(천지항공)
-현지 가이드: 이집트(모종문 선교사), 이스라엘(심연선 자매), 요르단(문효심 자매)
1/15(주일) 1일
1. 인천공항 집합(22:00)
- 떠나는 날 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저녁예배 참석하여 새남찬양대 찬양담당 후 8시30분경 공항버스에 승차하여 인천공항으로 향하였습니다.
1시간여 후에 공항에 도착하여 만나기로 한 J-18 카운터앞으로 가니 이미 다른 분들(이하 “성지순례 팀원들”이라고 하겠음)이 대부분 도착해 있었습니다.
- 낮에 교회에서 뵌 분들이지만 다시 한번 새롭게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 다”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성지순례라는 일생일대의 큰 영적 경험을 앞두고, 다소 흥분되고 들뜨기 까지 한 모습들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차분히 출국수속을 기다리는 분들도 있고...
- 잠시 시간을 내어 대부분의 팀원들은 모바일 폰(핸드폰)의 로밍을 위해 해당 서비스코너를 방문하였습니다. 스마트폰인 경우에는 자동으로 해외로밍이 되므로 별도의 수속은 불필요하였으나, 내 경우에는 임대료(기본 1일 2천원)를 지불하고 기기를 임대하였습니다.
- 출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부친 후에 출국 gate를 통과하여 면세구역에 진입하고, 약 1시간의 개인시간을 가진 후 밤12시까지 비행기 탑승 gate 앞에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2. 출발전 기도 및 출발(1/16 00:35)
-gate 에 들어서기 전에 팀원전체가 조용한 곳에 모여 1분여 간 기도후 장영길 집사님의 대표기도로 출국 절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밤12시 35분, 예정대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행(카타르의 도하 경유) 카타르항공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무사히 이륙하여 성지순례의 장도에 올랐습니다.
1/16(월)2일
1. 경유지 도하(04:45 도착, 07:30 출발)
- 경유지인 도하에는 예정보다 다소 이른 시각에 도착하였으며, 출발시간까지 2시간여 시간이 남아 도하공항 면세점 등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2. 첫 목적지 알렉산드리아 도착(10:00)
- 알렉산드리아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다 찾았으나, 여권확인 과정에서 그 곳 컴퓨터가 다운되어 40여분간 입국심사가 지연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작년 1/25일의 시민혁명(?)으로 인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하고 현재는 군부가 주요 행정업무와 치안을 담당하고 있으며, 공항검색대에도 군인들이 배치되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로 나오신 모종문 선교사의 설명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는 BC 331년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도시로서 로마시대까지는 지중해 연안의 3대 도시중의 하나로 크게 번영을 누렸던 도시라고 하며, 현재의 인구는 약600만명으로 이집트 제2의도시입니다.
- 마가 순교지
예수님의 제자인 마가는 AD43년 이 곳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그리하여 이집트 최초의 교황이 되었으며 46년에 순교하였습니다.
마가의 순교지로 추정되는 곳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너편, 지중해 바닷가 를 지나는 대로변에 기념탑이 건립되었습니다.
- 마가 기념교회
초대 교황인 마가를 기념하여 1950년 설립된 콥틱교회로서, 교회안쪽에 지성소가 설치되어있는데 이는 콥틱교회의 특징이며, 콥틱교회는 금요일 오후에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 기념교회 지하에 마가의 유골 일부가 보존되어있다고 합니다.
- 와디 나투른 지역 수도원
마가의 선교이후 그 지역에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AD 360년경 건축된 미나수도원입니다. 현재는 건물터의 일부 흔적만이 남아있는데, 침례를 집례하던 물받이 시설의 흔적과 침례를 받기위해 와서 대기하던 숙소 등 유적지에 대한 발굴작업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이 미나수도원을 본따서 1693년 미나수도원이 복원되었으며 1976년 증축되어 현재는 콥틱정교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역시 지성소가 설치되어있습니다.
마가의 선교 유적등을 살피다가 점심시간을 넘겨 다소 늦은 점심을 알렉산드리아 시내 지중해변에 있는 음식점(ATHINEOS)에서 현지식으로 하였습니다. 밥과 생선구이, 빵, soup 등이 나왔는데, 비교적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의 첫 현지식이었습니다.
식사후 오후 4시경,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2002년 건립된 이 도서관은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형상을 본 떠 만든 건물로, 건물 뒷 벽에 세계 각국의 글자를 새겨 넣어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고있습니다. 한글도 당연히 새겨져 있는데, 강/름/세 등 세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연유로 그 세 글자가 선정되었는지는 모르나 세계에 그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는 한글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집트는 인구 약8,000만명으로서 수도인 카이로에만 2,200만명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전국토중의 95%정도는 사막과 광야 지역으로 경작이 어렵고 이 나라의 젖줄인 나일강 주변지역(5%)만이 경작이 가능하여 대부분의 인구가 그곳에 모여 산다고 합니다. 관광수입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매년 약1,000만명이 관광을 와서 약 60억달러의 수입이 창출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어릴때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문맹률이 50%에 달할정도이며, 강수량이 연중 평균50-100mm에 불과해 비가 많이 내리면 대도시의 교총체증이 심각해진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가 100여명에 달하는 데, 이집트는 종교의 자유가 없어서 선교에 애로가 많다고 합니다. 가이드인 모 선교사님도 27년전에 입국하여 선교를 하고 있지만, 정식 비자나 영주권, 시민권 등을 발급해주지 않아서 일정기간 마다 갱신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슬람국가이긴 하지만, 콥틱정교회도 비교적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합니다. 인구의 10-20%가 콥틱정교회를 믿으며, 작년에 하야한 무바라크 전 대통령도 이 교회소속이라고 합니다. 콥틱정교회는 크리스마스를 매면 1월7일에 지키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아직 아기예수 탄생 장식을 그대로 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일정을 마치고 5시40분경 카이로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를 싣고가는 중형버스는 31인승으로 그리 깨끗하지 못한 버스였는데,
당초 국내여행사의 약속은 인원이 20명 미만이더라도 45인승 버스를 주기로 하였는데 다소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현지사정을 감안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3. 카이로 도착
- 오후 퇴근시간의 traffic에 걸리기도 하고 또 열악한 도로 사정등으로 속도를 많이 낼 수 없어서 카이로에는 밤늦은 시간인 9시넘어 도착하였으며, 우선 저녁식사부터하기로 하고, 카이로외곽에 위치한 한식 부페식당인 “김가네식당”으로 갔습니다.
한국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첫 숙소인 그랜드피라미드 호텔에 여장을 푼 시각이 밤10시40분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지순례 여행의 첫날 밤이 깊어갔습니다.
- 그랜드피라미드 호텔은 2개동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호텔로 마당 한가운데에 수영장이 있고 그 주변에 천막형태의 연수실이 마련되어 있는 등 외관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호텔 방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 첫날 예정보다 너무 늦게 도착하였고 총15시간에 달하는 비행기 여행과 늦은 첫날 일정 등으로 모든 팀원들의 피로가 누적되어 평가회는 생략하였습니다.
1/17(화)3일
- 아침기도회는 버스에 승차하여 출발과 함께 찬송과 성경말씀 봉독, 기도 순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첫날이라서 연장자이신 장영길 집사님이 인도하였습니다.
1. 카이로 지역
- 피라미드
호텔에서 그리멀지 않은 10여분 거리의 기자(Giza) 지역내에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있었습니다. 세 개의 피라미드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아왔던 그 피라미드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니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셋중에서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가로 세로가 각각 230m, 높이가 146.5m 로서 대략 40층 건물높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현재는 맨 윗부분이 뜯겨져나가서 높이는 137m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5톤-15톤의 무게를 가진 돌 230만-260만개로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BC 2,500년경에 쿠푸왕의 돌무덤으로 건축되었다고 하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전의 일이지요. 일설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거주할 때 피라미드 조성작업에 노예의 형태로 동원되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합니다만, 아브라함의 이집트로의 이주는 이보다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이집트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일정한 댓가를 받고 동원되었다고 보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라고 합니다. 현재는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옆에 있는 카프레왕과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와 함께 제4왕조 왕들의 장례복합단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쪽에 만들어진 스핑크스는 석회암으로 된 바위산을 조각하여 인간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태양신을 상징하며 피라미드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코 부분이 상당부분 떨어져 나가서 다소 흉칙한 모습이지만, 전체적으로 그 옛날 그 정도로 정확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던 이집트인의 뛰어난 자질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서, 피라미드 앞쪽 두 단 위의 약50여미터를 걸어 볼 수 있도록 허용하여 다들 올라가서 조심스레 걸어보았습니다. 이어서 이곳 저곳 사진찍기 적당한 곳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으며, 앞발을 구부리고 앉은 자세의 스핑크스를 배경으로도 단체 기념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지요.
-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프랑스학자가 처음으로 이집트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을 시작하여 현재 약 10만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는 고고학 박물관에 갔습니다. 실제로 전시되는 것은 그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곳 말고도 세계 여러 곳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이집트 고대 유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고 하지요.
각 시대별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방대한 양의 유물을 하루만에 다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도 없었을 터인데, 현지 가이드의 훌륭한 설명을 이어폰을 쓰고 들을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갓 태어난 모세를 강에서 건져 구해 키웠다는 이집트 공주의 두상을 볼 수 있었으며, 9세에 즉위해 18세에 죽은 투탕카멘왕의 관을 보았습니다. 모두 7개의 관이 크기별로 만들어져, 차례로 관 속에 넣어나가는 방식으로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여러 개의 크기가 조금씩 커지도록 만들어진 러시아 인형을 만든 방식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별도로 입장료(1인당 20달러)를 부담하면서까지 꼭 보라고 권유받았던 미이라 전시실을 보았습니다.
67년간 재위하면서 많은 일을 한 람세스2세의 미이라 등 10여개의 미이라(영어로는 mummy)를 보았습니다만, 사람이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물론 왕은 신적인 존재였으므로 언젠가는 다시 그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믿어서, 최고의 매장기술을 발휘하여 만들어 놓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론 덧없는 인생의 추한 끝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이라는 “봐도 후회, 안봐도 후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 구 카이로지역 모세 기념회당
이어서, 예레미야의 가묘가 있으며 모세가 두 손 들고 기도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는 모세 기념회당에 들렀습니다. 정식 명칭은 Ben-Ezra Synagogue 로서 유대인 기념회당입니다. 통상 synagogue 라고하면 회당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의 종교의식이 열리기도 하며, 지도자의 개인의견을 발표하기도 하는 그런 모임의 장소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앞에 놓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시던 곳도 이런 회당이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 성가족 피난교회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2세미만의 아이들을 찾아내 죽이라고 한 해롯임금의 명령을 피해 와서 약 3년6개월간 가족들과 함께 피신와서 사셨던 지역이라고 알려진 곳에 성가족 피난교회를 세웠습니다.(11세기경) 이 교회도 역시 콥틱교회였는데, 특이한 것은 교회 내부에 12개의 돌 기둥이 세워져 있고 천장은 노아의 방주의 지붕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12개의 기둥은 예수님의 12제자를 상징한다고 하는 데 그중의 하나는 다른 것과 달리 기둥 윗부분에 아무런 조각 장식이 없이 그대로 세워져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점심은 “아리랑”이라는 한국식당에서 한식으로 먹었습니다. 여행 시작한 지 며칠되지 않았는데 벌써 우리 음식이 그립습니다. 집을 떠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입니다.....
2. 고센지역 비돔
-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난와서 살던 지역이라고 알려진 고센 지역 텔마스쿠타 즉 비돔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수에즈 운하 옆에 위치한 숙소에 가는 길에 있었는데, 언덕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야트막한 황량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집터의 흔적을 보이는 유적이 몇군데 남아있긴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어려운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카이로에서 달려온 길은 폭 10여미터 내외의 수로를 끼고 도로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비돔은 수로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그 수로에서 물을 공급받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이 해질 무렵이라 어둑어둑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근처 동네의 아이들이 여럿 버스 주위에 우루루 몰려들어 사탕이나 초콜렛 같은 먹을 것이나 돈(1달러)을 달라고 손을 벌립니다. 측은히 여겨서 한 아이에게 주면 계속 달라고 몰려들어 곤욕을 치른다는 가이드의 설명입니다.
몇장의 사진을 찍고 계속이동하여 수에즈 운하 근처에 있는 호텔--실제로는 군장교 휴양시설인 Sport Support Resort 라고 함--에 저녁 일곱시 경 도착하였습니다.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고 있는 데, 찾는 이가 별로 없는 겨울철에 외부인들을 특별히 숙박시키는 모양입니다. 비교적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었습니다만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아서 좀 곤혹스러웠습니다. 반면에, 좋은 점은 지중해의 포트 사이드(Port Said)와 홍해의 수에즈(Suez)항구를 잇는 162Km 길이의 수에즈 운하 바로 옆에 위치하여 수시로 오가는 대형 화물선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이미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왕조의 12왕조인 BC1800년대 부터 운하를 파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그 후 19세기 들어 프랑스와 영국 등 이해관계국과의 우여곡절 끝에 1869년에 완공되었으며 수차례의 보강공사를 거쳐 현재는 최대 폭200m, 수심 20m 정도의 세계최대의 운하가 되었으며, 양방향 통행은 불가하므로 오전에는 지중해쪽으로만 보내고, 오후에는 홍해쪽으로만 보내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멀리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45일정도가 소요되던 것을 이 운하를 통해 대기시간 포함하여 약15시간이면 통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850대의 배가 출입하고 있으며, 연간 통행료 수입액이 약40억달러에 달해 이집트 경상수입의 4%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 우리 일행들만 모여 1층식당에서 여유있게 현지식으로 저녁 식사를 한 후 약1시간 동안 평가회를 가졌습니다. 김명섭 장로님의 사회로 이틀간의 여행소감과 간단한 자기소개 등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어서 내일 있을 시내산 등정과 관련된 준비사항 등에 대해 인솔자와 이광현 집사님의 안내가 있었습니다.
1/18(수)4일
- 아침식사를 하는 데 마침 수에즈 운하를 통해 ‘한진’ 해운의 컨테이너선이 위풍당당하게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다들 아이들처럼 환호를 보냈습니다. 외국에서 성지순례중에 국적 선박을 보니 반가왔습니다. 식사를 조속히 마친 후 짐을 꾸려서 버스에 싣고 드디어 본격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을 따라 순례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버스출발과 함께 최길선집사님의 인도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출애굽기 24장의 말씀을 같이 교독하며 오늘 일정을 미리 마음에 그리며 깊이 새겨 두었습니다.
- 마라
첫 목적지인 ‘마라’를 향해 가는 중에 인솔자로부터 긴급 연락이 전달되었는데, 르비딤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현지인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집트 총선거의 진행 등에 대해 정치적인 불만을 품고, 차량통행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에 직면하여,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전문되기로는 이미 다른 순례팀이 그곳을 통과하려다가 길이 막혀 여러 시간동안 발이 묶여 있다는 것이며, 우리도 만일 그곳에서 발이 묶이면 시내산 일정 뿐 아니라 이후의 일정에도 어떤 영향이 있을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두가지로, 그대로 강행하는 방안과 '마라'까지만 둘러보고 길을 우회하여 바란광야 쪽으로 돌아서 시나이 반도 우측도로를 타고 내려가 시내산에 도착하는 방안이었습니다. 이 경우, 시내산 도착시각이 당초 예정하던 오후2-3시경이 아니라 빨라도 4시 이후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회의 결과, 결국 마라까지만 가고 아쉽지만 우회하여 가기로 하여 함만 파라운 온천지역과 르비딤은 들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으나 현지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저 하나님의 뜻인 줄 믿고 모든 팀원들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쓴 물을 먹을 수 있는 단물로 변화시켜주신 마라의 우물터를 둘러 보았습니다.
유목민들을 총칭하는 베두인들이 살고 있는 작은 오아시스 지역같은 마라에는 우물터가 있고, 주변에는 야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만, 잘 조성된 유적지 같은 인상은 주지 못했습니다. 몇몇 남녀 베두인들도 삶에 지친 듯 겨울철이라서 인지 그다지 활기가 넘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바란광야는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황량한 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으로서, 물이 일시적으로나마 흘렀던 지역에 자라는 로뎀나무와 싯딤나무 등이 간간이 눈에 띄고, 멀리 바위산과 부서진 돌 들이 주변에 널린 버려진 땅 같은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로 지나갔다는 얘기는 없으나, ‘신’광야나 ‘시내’광야도 이 곳과 큰 차이는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신광야의 경우는 서쪽에 홍해가 있으므로 그 생태계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들어가 살 엄두를 낼 수 없는 광야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의 인도가 있었기에만 가능했던 그들의 목숨을 건 여정이었음을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팀원들의 모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라에서 바란광야를 횡단하여 요르단 국경지역인 ‘타바’로 가는 길에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몇Km 북쪽에 위치한 ‘느웨바’로 갔습니다. 그 곳 한국음식점에서 중식후 오후 2시30분경 다시 시내산으로 향해 버스는 출발하였습니다. 이집트의 동쪽 끝 작은 읍 정도의 마을인 느웨바에 한국 식당이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한식식당이지만 식재료는 그 곳에서 난 것들이라 한국의 맛은 제대로 낼 수 없었으나, 그래도 먼 이역에서 먹을 수 있는 우리 음식이니 반가웠습니다. 대추야자를 판매하기에 몇몇 분들이 선물용으로 구입하였는데 가격은 kg당 8달러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공포장을 위해 압축해놓은 제품이라서 맛은 둘째치고 포장을 뜯고 보니 모양이 그리 아름답지 못해 다소 실망스러웠던게 사실입니다. 선물 구입하기 전에 미리 가이드나 인솔자가 정보를 알려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첨언하면, 대추야자 제품은 역시 이스라엘 것이 다소 가격은 비쌌지만(kg당 13달러정도) 좋았습니다. 이집트것은 중간 정도로 8달러선이고, 요르단제품은 5-6달러정도로 가장 저렴했는데, 다들 맛은 괜챦았습니다만 원 재료의 질적차이나 포장기술 등이 이스라엘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몸에 좋고 소화에도 좋아 선물용으로 많이들 구입한다고 합니다.
- 시내산으로 이동
시내산이 가까워지면서 과연 어느 산이 시내산인지 가늠하며 가슴이 설레임을 느끼던 중 드디어 오후4시경에 시내산 근처에 도착하여 하차 한 후에 등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조금 올라가니 ‘성캐터린’수도원이 오른쪽에 보였습니다. 주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인 헬레나가 모세가 본 떨기나무와 성모마리아 기념교회를 보호하기위해 황제에게 부탁하여 세운 수도원입니다. 성벽의 놓이가 15m에 달해 지금까지 외부세력에게 침략당한 일이 없으며, 따라서 4세기에 제작된 성경중의 한 권인 시내산 사본과 희귀한 다른 성경 및 고대 성화 등 중요한 유물들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 수도원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친 수도사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오지 못하고 경내에 마련된 묘지에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수도원에 문이 따로 없으며 높다랗게 뚤린 창문을 퉁해 도르레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줄을 당겨서 올리고 내려 사람이나 물건들을 보내고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높고 작은 창문에 줄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현재는 약30여명의 수도사가 안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밤길을 대비하여 랜턴이나 손전등을 준비하고 목도리와 모자 등 방한 준비도 하고, 4시 30분경 드디어 생전 처음 낙타를 타고 시내산에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앞다리를 굽히고 앉았어도 낙타의 등 높이가 생각보다 높아서 처음 탈 때에, 두손은 등을 감싼 안장위에 솟아있는 나무 손잡이를 잡고 허리는 뒤로 제치면서 올라타야 용이하게 탈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대로 해 보니 잘 탈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움직이면서 낙타 등정의 재미를 느끼면서 즐기게 되었습니다.
저 앞을 보니 아내인 이명숙 권사도 여유있게 낙타타기를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팀원들이 금방 낙타에 익숙해져서 사막지역의 순한 피조물인 낙타에 몸을 맡기고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낙타는 안내하는 줄 잡는 사람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데, 줄잡이가 아무 소리도 안내면 멈춰서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가끔은 뒤에 서 가던 녀석이 앞지르기를 하려는 듯 서둘러 올라가는 바람에 다소 조바심이 나곤 하였습니다. 길 바로 옆은 높은 낭떠러지 같은 지역인데 말입니다.
시내산 등정은 통상 새벽 일출을 보는 일정과 오후 일몰을 보는 일정으로 구분되는데, 대부분은 새벽일정을 택한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이어지는 다음일정에 지장을 주지않기 위해 일부러 하루를 더 늘려서 여유있게 오후일정으로 계획을 하였었는데, 예상치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오후 일정이 2-3시간 지연되어 결국 시내산에는 해가 진 이후 어둠이 깔린 상태에서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낙타를 타고 2,285m 정상 아래쪽까지 가는 데 1시간 40분정도 소요되고(저녁6시 10분경에 750개의 돌계단 아래 도착) 거기서부터 돌계단을 올라 6시50분경에 정상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 넓지않은 정상에는 지금은 문이 닫혀있는 작은 규모의 모세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위가 깜깜하여 주변을 전혀 볼 수가 없었으며, 교회옆 빈 터에 한데 모여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았던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또다른 사명을 주실 것을 간구하며, 주신 사명을 성실히 실천에 옮길 것도 다짐하고, 각자의 긴급한 기도제목을 내놓고 약20여분간 통성으로 기도한 후, 7시 15분경 왔던 길로 하산을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주변은 어둠으로 인하여 제대로 볼 수가 없었으나 우리는 하늘에 은가루처럼 뿌려져 있는 밝은 별 들의 무리와 북두칠성 등 수많은 이름 모를 별자리들을 보며 환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는 여간해서 볼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날의 일정중에, 김미정 권사님이 감기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등정에 수고를 많이 하셨고, 김현웅 집사님은 아침에 드신 삶은 달걀이 상했는지 속이 안좋아서 점심도 굶고 고생을 많이 하였으나 불굴의 투혼으로 정상을 밟는 용기를 내 주셔서, 두 분을 위해 다른 팀원들이 큰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 저녁 9시10경에 하산을 완료하여 숙소인 Morgen Hotel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가나긴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등정 시작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일몰도 보지 못하고 서둘러서 하산하느라고 좀 더 의미있는 시내산 순례가 되지못하였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차라리, 늦어졌다면 다음날 새벽등정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리하지 않은 일정 진행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현지 가이드나 인솔자의 안내보다는 우리 팀원들의 확고한 의지와 주장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즉, 꼭 필요한 순례일정은 여유있게 천천히 그 의미와 뜻을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 곳 호텔 역시 다른 이집트의 호텔들처럼 난방과 온수 서비스가 별로 좋지 않았고 시설도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 워낙 사막지역이라서 불부족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막이나 광야 지역이라도 겨울철에는 방한준비를 잘 해야 할 것임을 실감하였습니다. 물론 출발하기전에 여행사의 안내가 충분히 있었으나 막상 현지에 와 보니 실감이 났습니다.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바람이 차고 세며, 아침 저녁으로는 낮 기온과의 일교차가 커서 감기에 잘 걸릴 것 같았습니다.
1/19(목)5일
- 이집트에서의 3박4일의 일정을 끝내고 일찍 기상하여 6시에 조식을 들고 7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이스라엘로 향하였습니다.
아침기도회는 이종희 집사님이 인도하여 시편121편을 교독하고, 전 팀원들이 전날의 값진 체험을 돌아보며 열심히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 이스라엘과의 국경지역의 하나인 타바 국경을 통해 이스라엘에 입국하였습니다. 당초 인솔자의 지나친 우려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용이하게 빠른 시간안에 진행되어 이집트 출국과 이스라엘 입국 수속이 오전 10시경에 마무리됨으로써 네 번째 날 일정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 국경지역 입국장 로비에는 이스라엘 현지 가이드인 심연선 자매가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마음씨 좋게 생긴 운전 기사인 이브 이브라힘(51세)이 몰고 온 대형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여정은 비교적 안락한 버스여행이 되었습니다.
국경지역과 인접한 도시인 ‘에일랏(EILAT)' 항구를 지났는데 이곳은 최종목적지까지 가기위해 경유하는 수출입 자동차의 선적항으로도 알려진 도시며, 이스라엘의 경우 홍해를 접하고 있는 유일한 휴양도시라서 휴가철에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붐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은 780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75%가 유대인이고 20%가 아랍인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약3만달러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이지요. 흔히 말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강소국)’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랍인중에는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는 그룹과 유대인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지내는 그룹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과거 보다는 두 민족간의 관계가 많이 호전된 상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화폐단위는 세겔이라고 하는 데, 현재는 NIS(New Israeli Sequel)이라고 불립니다. 2012.1월 현재 1US$는 3.5NIS 입니다.
입국이후 네게브 사막지역을 약 3시간 거쳐 사해로 왔는데, 중간에 롯의 아내의 소금기둥이라고 불리우는 곳을 보았습니다. 사람 서있는 모습과 비슷한 형상의 바위가 멀리 보였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이스라엘이 아닌 요르단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유대산지 지역내에 멀리보이는 ‘마사다’는 로마시대때 유대 원리주의자들 300여명이 최후까지 로마에 대항하여 항전하던 고원지대인데 로마군대에 포위되어 버티다가 결국 모두 자살하고 5인 만이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살던 ‘들염소의 샘’ 이라고 해석되는 ‘엔게디’를 통과하여, 홍해와 사해의 중간 지대인 아라바계곡(신명기 1장에 나옴)과 네겝을 지나고, 사해의 북쪽 해변에 도착하였습니다.
사해는 성경에서는 염해, 동해 또는 아라바해 등으로 불리우는 데 우리에겐 사해(Dead Sea)가 가장 친숙하고 공식적으로도 영어로 그렇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해발 -410m로서 지구상에서 지표면보다 가장 낮은 지역이며 최장 80km, 폭은 6-17km에 이르는 바다같은 호수인데, 염분이 최고35% 정도로서 일반적인 바다의 염도(4-8%)의 4-5배에 달합니다. 보통 김치를 담글때배추를 절이는 염도가 28%정도라고 하니까 얼마나 짠 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실제로 ‘칼리아’라고 하는 북부 사해 한 리조트지역내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든 후에 사해 체험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남자 팀원들과 일부 용감하신 여자 분들이 직접 사해에 들어가서 몸이 둥둥 뜨는 경험을 하면서 모두들 신기해 했습니다. 바닥은 고운 진흙이었는데 워낙 미끄러워서 제대로 서있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며, 고품질의 머드 화장품 원료로 쓰인다고 합니다. 모두들 열심히 팔다리와 얼굴에 진흙 맛사지를 하고 햇볕에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광현 집사님이 사해체험을 가장 실속있게 즐기고 ‘머드맛사지’도 실감나게 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들 뿐 만 아니라 여러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찬 바람이 다소 부는 선선한 날씨임에도 열심히 사해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무료 샤워시설도 잘 되어있는 등 비교적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입장료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 여리고(Jericho) 지역으로 이동
사해체험으로 성지순례의 엄숙함에서 다소나마 분위기를 전환시킨 후에 우리는 여리고로 이동하였습니다. 베냐민자손에게 분배된 성읍으로서(수 18:21) 옛부터 달의 도시라고 알려져있는 오아시스의 도시이며, 기생 라합이 살던 성읍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요.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으로 되어있어 다른 이스라엘의 유대인 지역과 다른 분위기- 다소 를 띠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요단강을 건너 처음 들어온 땅이 바로 여리고 지역인데, 엘리사의 샘(왕하 2:12)으로 알려져 있는 샘물이 나오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물이 풍부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또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버스로 시내를 둘러본 후에 우리는 삭개오의 뽕나무로 알려져 있는 돌무화과 나무를 찾았습니다. 소문대로 라면 수령이 2000년이 훨씬 넘어야 하는데 실제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올라갔던 나무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다른 돌무화과 나무보다 훨씬 크고 잎이 무성하여 그런 추정을 가능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근처에 있는 엘리사의 샘도 둘러보았습니다.
- 쿰란
이어서 과거 유대교의 한 종파였던 에세네파가 살던 기도공동체인 쿰란을 찾았습니다. 쿰란이란 이름은 그 지역과 가까운 언덕 옆을 지나는 와디(wadi;건천)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합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오직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하며 금욕과 기도, 말씀읽기에만 주력하는 등 공동체생활을 해 왔다고 합니다. 이곳이 유명해 진 것은 지난 1947년 이 곳 주변의 한 동굴에서 주전 2세기경의 히브리성경 사본과 성경의 주석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해주변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사해사본’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근처를 지나던 양치는 목자 두 사람이 우연히 큰 바위산 위쪽에 있는 동굴안으로 돌을 던졌는데 항아리에 맞는 소리가 나서 들어가 그 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거 로마군의 침략으로 그 지역을 뺏길 위기에 처했을 때 높다란 동굴에 그것을 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주변에 있는 동굴의 숫자는 대략 850여개인데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은 4번동굴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던 그들의 손에서 그 사본은 고서수집상에게 넘어갔고 다시 유명한 고고학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사해사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인 듯 합니다. 지금까지 쿰란지역에서 발견된 성경사본은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성경이라고 합니다.
쿰란 유적지 입구 옆에 기념품센터가 있었습니다. 그 곳을 찾은 관람객들이 대부분 들러서 이 지역의 특산물을 구입하는 데 한국사람들이 특히 많이 찾는 것이 유명한 ‘사해진흙’으로 만든 화장품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예외없이 들러서 약30여분간 둘러보았습니다. 아토피 증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들을 위해 피부크림과 기념품 몇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나중에 출국시에 세금환급도 된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구입하더군요.
- 여리고의 시험산 조망
여리고 지역의 마지막 방문지는 예수님이 공생애초기에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셨다고 알려져 있는 시험산(the Mountain of Temptation)을 조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산 정상에는 올라가지 못하게 되어있다고 하여 산 밑 전망지에서 올려다 보았습니다. 과거에 어느 한국 선교사님이 신고없이 몰래 산 정상에 올라가서 통성기도하려다가 건너편 산 관측소에 주둔하는 이스라엘 군인에게 즉각 제지되어 곤혹을 치렀다는 얘기를 가이드가 알려주었습니다. 저도 가능하면 그 곳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을 마음으로 느끼며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바쁘게 보낸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숙소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13장에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멀리 넓은 지역을 조망하며 땅을 나누던 지역이라고 하는 곳에 설치되어있는 ‘베두인텐트’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막생활을 체험해보기로 하였습니다.
- 베두인 텐트에서 숙박
도착하자마자 안내센터로 들어가 그 곳 안내인의 설명에 따라, 유대인들이 흔히 입던 긴 ‘가운’을 다들 입고 텐트로 안내되었습니다. 머리 위로 입게 되어있으며 양 옆은 트여 있었습니다. 이곳은 젊은이들에게 자기 조상들의 출애굽시 장막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몇 년전부터 설치하여 운영하는 텐트라고 합니다. 약20m*15m의 직사각형 형태의 천막으로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서 많이 춥지는 않으나 짐자리가 불편한 것 외에도 화장실과 세면장이 공용으로 되어있고 텐트 밖에 따로 떨어져 있는 등 불편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긴 했지만 한번 좋은 경험을 해보기 위해 자청해서 우리가 추가한 일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팀원들은 비교적 만족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식사도 기대이상으로 잘 나왔고 아침식사도 그럭저럭 괜챦았습니다.
텐트 안에서 8명씩 둥근 상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은 한 가족이 식사하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두 번의 식사를 포함한 하루 숙박비용은 여늬 호텔과 비슷한 정도라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다른 텐트에서 지내기로 하고, 저녁식사 후에 각자의 짐을 옮겨 취침준비를 하였습니다.
남자 팀원들은 저녁8시30분부터 평가회를 하며, 내일 있을 예루살렘 입성(?)을 마음으로 준비하는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20(금)6일
- 아침기상 및 일출 감상
텐트에서의 잠을 설친 일부 팀원들은 해뜨기 전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일출보기를 준비하고, 김명섭장로님은 한국에서부터 어렵게 가져온 트럼펫을 꺼내 새벽미명에 아름다운 선율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아침6시부터 기다리던 일출은 30분여가 지나서야 저 멀리 산 위로 수줍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모두의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찬 손과 얼굴을 비비면서 기다린 보람이 있어, 붉고 맑은 아침해가 떠오르자 다들 환호하였습니다. 저마다의 소원을 하나님께 기원하며 해를 조망하였습니다. 시내산에서 아쉽게 경험하지 못했던 일출을 예루살렘 입성을 코앞에 두고 경험하게 하심을 감사하였습니다. 좋은 날씨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영하의 기온은 아닌 것 같지만 꽤 쌀쌀한 날씨 때문에 텐트에서 잠을 설친 분들도 있었습니다. 여자분들은 텐트안에 온풍기가 설치되어 있어 조금 추위가 덜 했다고 합니다. 장영길 집사님이 추위에 잠을 설쳐 몸이 안 좋다고 하여 다들 걱정을 하였습니다.
저녁식사와 비슷하게 빵과 치즈로 아침식사를 하고 버스로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광현 집사님의 인도로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 예루살렘으로 이동
예루살렘이란 이름의 유래는 ‘이르’ ‘샬롬’ 이라고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 맨 먼저 찾은 예수님 승천기념교회는 주후387년에 귀족 출신 부인인 포메니아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장소로 추정되는 감람산 정상에 기념교회를 지었는데, 그 후 패르시아군 등에 의해 파괴되는 등 수난을 겪고 현재는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내부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붕을 덮지 않았습니다. 그 곳 사원중앙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남겨놓았다는 오른 발자국 흔적이 찍힌 바윗돌이 하나 있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근처에 있는 주기도문 기념교회에도 가 보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셨던 동굴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주후 4세기에 이 지역에 성지순례를 왔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 헬레나에 의해 지어진 3개의 교회--예수님 부활 기념교회,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와 주기도문 교회--중의 하나로, 십자군 전쟁이후 이슬람교도들에게 넘어갔다가 현재는 칼멜수녀원에서 맡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여러나라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적어 벽에 부착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글로 된 주기도문도 물론 있었지요.
눈물교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던 곳이라고 알려진 곳에 세워진 교회인데, 주후6세기경에 처음 지어졌다가 그 자리에 1955년 현재의 모습으로 기념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올리브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피땀흘려 기도하시던 겟세마네동산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습니다. 바깥에서 본 교회의 지붕과 창문의 모습이 마치 예수님의 눈물이 좌우로 흘러내리는 형상을 닮았습니다.
- 히스기야 터널(Hezekiah's Tunnel)
이어서 간 곳은 히스기야터널입니다. 주전 701년경 히스기야왕이 산헤립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예루살렘성 밖의 기혼샘의 물줄기를 막고 대신 지하터널을 파서 성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수로 터널로서(왕하 20:20, 역대하 32:1-5)로마 제국 이전에 만들어진 수로로서는 가장 잘 만들어진 수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터널의 길이는 약530m이고 폭은 60-70cm 정도로 한 사람이 겨우 걸어 갈 수 있는 너비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터널 입구의 수로 시작부분과 끝부분의 높낮이가 불과 30cm 차이로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물이 흐르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터널 양 쪽에서 뚫기 시작한 공사였음에도 오차없이 중간에서 만나 개통될 수 있게 만든 당시의 토목 기술력이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팀원들 대부분은 미리 준비해 온대로 반바지를 입거나 바지를 걷어 올리고 슬리퍼나 샌달을 착용하고 손전등을 휴대한 채로 터널입구로부터 천천히 안으로 이동하며 물이 꽤많이 차 있는 수로를 걸어 들어갔습니다. 바깥보다 오히려 물이 따뜻하게 여겨져서 그리 춥지는 않았으며 중간중간에 낮은 곳에서는 ‘머리조심!!’을 외쳐가며 이동하였습니다. 바닥에 이끼가 끼지 않아서 미끄럽지가 않은 것을 보니 수로관리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약 20여분간의 터널여행 끝에 수로 출구에 도착하여 밖으로 나와 옷을 대충 말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좋은 체험이었습니다.
- 이어서,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신 베데스다 연못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근처에 양을 사고 파는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양의 못’으로도 불린 연못입니다. 후대에 있었던 지진으로 연못의 주변이 위쪽으로 융기되어 당시보다 연못은 10m 이상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 성지순례의 가장 중요한 일정중의 하나인 예수님의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평생에 한 번 와보기를 소원하는 그 곳에 우리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귀기울여 들으며 한 곳 한 곳 이동하며, 마음으로 에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이름붙여 놓은 14개의 장소를 하나하나 들렀습니다. 당초 이 길은 초대교회시대 순례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부터 골고다까지 걸으면서 기도드렸던 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안토니아 요새(제1,2처)부터 골고다(제10-14처)까지의 사이에 7개의 장소(제3처-9처)까지를 선정하여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로 이동하시다가 넘어지시고, 마리아를 만나시고,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진 곳,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린 곳, 예루살렘의 여인들에게 말씀하신 곳, 세 번째 넘어지신 곳, 이어서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며 후에 시신을 내린 곳과 예수님이 장사되신 곳 등 모두 14곳을 순례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기도처 마다 자그마한 안내표시가 붙어 있어서 잠깐 씩 서서 기도하며 이동하였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의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눅23:28) 제8처에서는 우리 모두 눈물과 회개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서서 우리의 지난 날과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았으며, 김명섭 장로님의 마무리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 보인 고백이 되었습니다. 제13처인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곳에서는 모두 그 돌판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주님의 고통과 희생, 우리를 위한 사랑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굴같은 곳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한쪽 편에서 그 무덤 안 쪽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길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보이신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장소인데, 그 길은 데체로 폭이 그리 넓지 않은(약3-4m) 마치 시장 골목 같은 분위기로서 기념품가게나 음식점 등이 계속 이어져 있어 기독교인들의 성지라고 하기에는 다소 관리가 소홀한 면이 있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눈으로 보고 만지는 유적이나 유물, 기념물 등에 너무 몰입해서는 안 되고,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그런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삶이 되어야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두들 십자가의 길을 가슴깊이 새기며 평생 기억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 당초 일정으로는 다음날(21일 토요일)에 예정되어있던 이스라엘 고고학 박물관 방문이 토요일의 휴무로 앞당겨서 금요일 오후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금요일 해진 후부터 안식일의 시작이라 오후 2시면 문을 닫는다고 하여 서둘러서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 등 다수의 성경사본과 해설서 등의 유물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이사야서의 필사본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박물관의 전시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역사를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시대구분에 따라 별도의 전시실을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된 전시물은 별로 볼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고난당하신 사실을 전하는 전시물에는 “the Jesus of Nazareth"라고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 박물관 방문후 낮1시40분경에 늦은 점심을 시내에 있는 팔레스타인 식당에서 들었습니다. 붉은 색 카페트로 장식되어 안락한 느낌이 드는 식당이었는데 비교적 먹을 만한 식사였습니다. 이 곳의 식사는 대개 야채와 토마토, 오이 등 과일을 다양한 소스나 치즈 등과 함께 빵(만두피 같은 둥글게 구운 빵)에 싸서 먼저 먹고, 이어서 메인음식으로 닭고기구이 등 육류메뉴가 제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야채종류가 다 인줄알고 열심히 두 세개씩 빵을 먹다가 나중에 고기가 제공되자 배가 불러 많이 먹지 못한 안타까운(?) 경험을 다 들 겪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지만 이슬람사람들은 먹기 때문에 이슬람식당에서는 우리도 돼지고기와 소고기, 닭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양고기는 별로 먹은 기억이 없네요.
- 식사후에는 널리 알려져있는 소위 ‘통곡의 벽’을 찾았습니다. 로마군에 의해 주후 70년에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벽의 일부로서, 주전 586년에 바빌론제국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될 때 최초 솔로몬에 의해 세워졌던 성전이 파괴되었다가 주후 64년경 헤롯왕에 의해 새성전이 완성되었었으나, 주후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은 다시 폐허가 되었는데 우리가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헤롯성전 중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유적으로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이곳에 순례를 와서 소원을 적은 쪽지를 벽의 틈새에 끼워가며 기도하면서 통곡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통곡의 벽 앞에 서서 두손을 벽에 대고 잠시 우리나라의 어려운 현실과 장래, 개인적인 기도 제목들을 내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곳은 남녀가 따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분되어 있는데, 남자들은 모자를 쓰거나 머리에 동그란 흰 덮개 같은 것을 쓰지 않으면 못 들어가게 하였으며, 여자들을 위해서는 우측에 별도의 장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입구에 흰 덮개가 준비되어있습니다.
- 다윗 성(City of David)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한 후 새왕국의 수도로 삼은 곳으로서, 북쪽에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티로페이온 골짜기와 만나고, 동쪽으로는 기드론골짜기로 이어지는 삼각형의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천연 요새였습니다. 현재의 다윗성의 크기는 남복으로 375m, 동서로 120m 정도입니다.
- 시온산(Mount Zion)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셨고 성령강림이 이루어진 곳입니다.(행1:12-14)마리아는 이곳에서 살다가 임종을 맞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온산은 원래 다윗의 성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나 다윗이 언약궤를 이곳에 옮겨서 제단을 쌓은 이래 이 언덕은 야훼의 거룩한 산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삼하 6:12-18) 시온산은 신약시대에는 성벽안에 위치해 있었으나 터키제국의 술레이만 2세가 성벽을 쌓으면서(1539년) 성벽밖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이어서,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를 찾았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약8km 떨어진 해발 770m의 산 위에 있는 도시입니다. 베들레헴(Bethlehem)은 히브리어 Bait(집)와 Lehem(빵)을 합친 합성어로서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옛부터 빵집이 많았는지 아니면 빵을 만드는 밀이 많이 생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래된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창세기에 야곱의 아내 라헬의 죽음과 관련하여 처음 등장하며 룻기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다윗이 태어나서 목동으로 자란 고향이기도 하지요. 구약성서에는 장차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날 것이라고 예언되어왔으며, 그 예언대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옴으로써 예수님이 이 곳에서 태어나시게 되어 그 예언을 성취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인 헬레나가 성지를 방문한 후 세운 세 개의 교회중의 하나가 주후 339년에 예수님 탄생하신 동굴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이 교회는 510년-529년 사이에 불타 버렸으며, 지금의 예수 탄생교회는 주후 531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완공한 것인데,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페르시아나 이슬람 여러 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이 교회는 허물지 않고 오히려 경배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현재 이 곳은 카톨릭을 대표하는 프란시스코회와 그리이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간에 현상유지법이 적용되는 곳입니다. 세 종파간에 교회의 소유권과 사용권에 관하여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대부분은 그리이스 정교회 소유라고 합니다.
-금요일 일정을 다 마치고 우리는 Ramada Royal Hotel에 숙박하였습니다.
당초에 계획했던 호텔보다 다소 업그레이드 된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정도 차이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금요일 저녁 안식일이라서 인지 호텔은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어른들은 대개 랍비들처럼 검은 색 망토를 걸치고 동그란 흰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아이들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므로 이렇게 호텔에 와서 식사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많은 웃지 못할 얘기들이 있는데, 특히 엘리베이터를 타더라도 층 버튼을 누르는 것도 일이므로 못하기 때문에, 대신 호텔측에서 전층에 자동으로 엘리베이터가 정차하도록 프로그램을 설정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타면 전 층에 다 정차하기 때문에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같은 외국인들을 위해서는 따로 엘리베이터를 몇 대 배정해 놓았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날 해서는 안 될 일을 수십가지 정해놓고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글쎄요, 본인들은 일을 하지 못하므로 호텔에 와서 식사를 시켜먹는다면 그 일은 결국 누가 하게 되는 것인지요? 예수님의 안식일에 관한 가르침이 다시금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시간에 아이들을 호텔 한 쪽에 모아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과거 조상들의 신앙 전통과 지켜야 할 일들에 관하여 후세들에게 가르치고 전해주기 위한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철저히 신앙교육을 시키는 민족이 또 어디 있을까요?
- 저녁식사는 호텔 식당에서 현지식 부페로 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투숙객들이 있을지 상상을 못했습니다. 규모나 겉 모습에 비해 호텔 식사는 별로 새롭지 못하였습니다.
1/21(토)7일
-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10분에 토요일의 일정을 위해 버스를 출발하였습니다. 아침기도회는 김현웅 집사님이 인도를 하였습니다. 날씨는 아주 청명하고 산뜻하여 우리나라의 맑은 늦가을 같았는데 바람은 제법 쌀쌀하여 다들 점퍼나 외투를 저며야 했습니다.
-먼저 간 곳은 시온산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최후의 만찬 기념교회’인데 마가의 모친의 집이라고 알려진 곳이며 그 2층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신 곳이라고 하며, 또한 예수님 승천 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 기념교회 1층에 다윗왕의 가묘가 있는데, 현재까지 다윗왕의 무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시온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전승되어 왔는데, 베드로의 설교 중에 다윗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말에 근거하여(행 2:29) 14세기에 그 다락방 있던 곳에 기념교회를 지으면서 그 1층에 다윗의 무덤을 만들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곳이 유대인들에게는 통곡의 벽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남녀 구분하여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 이어서 간 곳은 베드로 통곡교회인데, 시온산 남동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통곡교회의 이름 (Gallicantu)은 '닭의 울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곳은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터로 여겨지는 곳인데, 여기에 1931년 프랑스의 성모승천 수도회에서 베드로의 배신과 회개를 기념하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 시대에 주거지로 사용하였던 동굴과 물 저장 시설이 발굴되었는데, 또한 감옥으로 여겨지는 동굴도 발굴됨으로써 이곳에서 예수님이 잠시 갇혀 계시지 않았나 추정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감옥에는 4-5m 위쪽 천장 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아마도 위에서 죄수들을 구멍 안으로 던져 넣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와 이 모든 것을 다 보시고 계시던 예수님의 그 참담하셨을 마음을 생각하니, 오늘의 저희들의 마음이 심히 무겁고 비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닭이 우는 모습과 베드로가 손을 좌우로 흔들면서도 고뇌하는 모습이 함께 조각된 모자이크가 교회내부를 슬프게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배신과 회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시간 순서대로 그려 놓은 여러 장의 모자이크 작품이 우리의 눈을 끌었습니다.
과연 나는 베드로와 같은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을 것인가, 그럴 자신이 있는가, 나의 신앙 양심을 확고히 지킬 수 있을 것인가....많은 상념이 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 이어서 헤롯대왕이 구축한 인공도시인 가이사랴(Caesarea)를 찾았습니다.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에게 첫 이방인 설교를 행한 곳이기도 한데,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 황제인 Caesar에게 바친다는 의미에서 구축한 도시로서 지중해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거처하던 곳이라는 비석이 발견되었으며, 사각형의 경기장과 스탠드, 궁전 주춧돌 등이 일부 남아서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는 로마 당시에 만들어진 수로를 볼 수 있었는데, 갈멜산의 물을 가이사랴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축조한 인공수로입니다. 청록색의 지중해를 배경으로, 4-5m 높이의 아치모양의 수로 받침돌과 그 위에 30-40센티미터 높이로 돌을 이어놓아 만들어진 수로가 수십 미터 이상 이어져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3대명소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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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어, 갈멜산 근처의 야외공원에서 한식도시락으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성지순례 기간중에 이렇게 도시락으로 야외에서 먹는 것도 특이한 경험이었는데, 햇볕은 따스했지만 다소 찬 날씨에, 공원에 마련된 돌식탁에서 7-8명씩 둥글게 앉아 식사를 하였습니다. 몇분은 한국에서 준비해온 김과 볶은 고추장, 깻잎통조림 등을 내놓고 같이 나눠 먹었는데, 그 맛이 꿀맛이었습니다.
- 식사후에 간곳은 갈멜산(Mount Carmel)인데 ‘갈멜’이란 히브리어로 ‘케렘(포도밭)’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의 포도밭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 산 자락에는 이스라엘 제3의 도시인 하이파가 있어 예부터 물이 풍부한 비옥한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의 3대산은 갈멜산, 헤르몬산, 그리고 다볼산입니다.
갈멜산 위에는 엘리야 기념교회가 있는데, ‘불의 제단’이라는 의미의 ‘무흐라카’라고도 합니다. 즉,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바알신과 여호와 중에 한 신을 택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질책한 곳입니다. 현재 그 곳에는 1883년에 세워 진 카르멜 수도회가 있고 기념교회당 안에는 엘리야가 쌓았던 제단을 기념하여 12개의 돌로 된 제단이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 마당에 세워져 있는 엘리야의 동상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바알신을 발로 밟고 서서 칼을 높이 든 엘리야의 힘차고 자신에 참 모습이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엘리야기념교회 방문후 내려오는 길 옆 수풀 안쪽에 화려한 자태를 숨기고있던 빨간 백합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wild beautiful flowers를 '들에 핀 백합화'로 번역하였는데 백합화라는 이름 때문에 흰꽃이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은 붉은 꽃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므깃도(Megiddo)를 찾았는데, 요한계시록에는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으로 나타나는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 지역입니다. 성경에서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가나안의 요새였으며, 아마도 다윗왕때 점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솔로몬왕때에 이르러 견고하게 수축되어 강력한 북방요새가 되었습니다.
이 곳은 이미 주전 3000년 경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식 신전이 발굴되었고 희생제사를 위해 사용된 높이 1.5m의 원통형 돌 구조의 제단과 솔로몬때 완성된 성벽, 성문등도 발굴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인데 말을 기르고 전쟁에 대비하여 관리하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므깃도는 이즈라엘 평원(Yizrael valley)의 남쪽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데, 갈멜산과 다볼산(Mt. Tavor), 나사렛(Nazareth) 등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이즈라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흩뿌리시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 므깃도에서 65번 도로를 타고 동북쪽으로 가다가 아풀라(Afula)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 나타나는 곳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Nazareth)입니다. 히브리어로 ‘수호자’ 또는 ‘파수꾼’을 의미하는 나짜르에서 연유한 지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140km, 갈릴리호수 근처의 큰 도시인 티베리아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마을입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곳이라 구약성경에는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만 신약 복음성경에는 여러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막1;24),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요 1:45) 등 이라고 여러차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자렛에 있는 수태고지 기념교회(Church of the Annunciation)를 찾았는데 이곳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수태하게 됨을 고지한 마리아의 집터위에 세운 교회라고 합니다. 당초 5세기초에 마리아가 살던 곳이라고 알려진 동굴위에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었으나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후 십자군시대때 큰 규모로 다시 건축되었으나 13세기에 이슬람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1969년에 가로네 추기경에 의해 축성되었다고 합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이곳을 상당히 중요한 성지중의 하나로 관리,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각국 카톨릭교회에서 보내온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는 모자이크와 그림 작품이 교회 벽에 많이 부착되어있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것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 그 옆에는 성 요셉교회(St. Joseph Church)가 있었는데, 목수일을 한 요셉의 작업장이 있었다고 하며, 예수님의 가족이 살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태고지교회에 비해 매우 소박하게 지어진 교회입니다.
- 나사렛근처에 있는 ‘가나 혼인잔치 기념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가나(Kfar Kana)는 나사렛의 북동쪽 인근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이적을 행하신 곳이며, 왕의 신하가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하면서 함께 가서 고쳐주시기를 청하자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표적을 행하신(요 4:46-54) 곳이기도 합니다. 기념교회는 1881년 프란치스칸 교회에 의해 세워졌는데 마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마을의 서쪽에서는 로마인들의 무덤과 우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다나엘을 언급하면서 가나가 한번 더 언급되고 있는데(요 1:43-50), 나다나엘은 사도 바돌로메와 동일인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 나다나엘 기념교회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고향인 이 가나는 비옥한 평야의 북쪽 구릉지대에 위치한 부자동네였으나 가나 남쪽의 나사렛은 해발 400m의 산 위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였습니다.
-토요일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갈릴리 호수(See of Galilee)의 남쪽을 돌아 동쪽으로 끼고 올라가면서 바다같은 넓은 호수와 주변의 밝은 불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우리에게는 호수로만 알려져 있으나,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으로 요단강 서쪽의 비옥한 평야와 산지로 이루어진 넓은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지역에 있는 내륙호수의 이름을 갈릴리호수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호수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접하고 있는 헤르몬산 기슭에 있는 세곳의 발원지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북쪽 요단강 상류로 흘러들어와 형성된 것입니다. 남북의 길이는 21km 이고 동서로는 가장 넓은 곳이 13km이며 전체 둘레는 52km에 이릅니다. 이 호수의 평균수심은 50m정도인데 해수면보다 212m 낮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널리 아는대로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무대가 이 갈릴리 지역이었으며 많은 기적이 이곳에서 행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이었습니다.(마 4:18, 행 1:11)
-이날 밤은 갈릴리 호수의 동쪽 해변에 위치한 엔게브 기브츠에서 운영하는 엔게브(Ein-Gev) Holiday Resort에서 숙박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으로 젖소를 기르고 채소를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는 기브츠로서, 가는 중에 젖소사육장을 여러 곳 볼 수 있었습니다. 여장을 풀고 숙소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그 식당에서 한국에서 같은 시기에 출발했던 20여명의 다른 성지순례팀을 만났습니다. 인천공항에서도 만났던 분들이라 반갑기도 하였습니다. 식사는 비교적 깨끗하고 정갈하였는데 특히 그 곳에서 재배하는 채소들은 아주 싱싱하고 풍부하여 우리 들의 식욕을 자극하였습니다.
빵과 치즈, 약간의 육류 등을 곁들여 유쾌한 식사를 하였습니다. 여행 출발한 지 1주일이 다 되어 가면서 중동지역의 현지음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식사후에 바람도 쐴 겸 호수 주변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바람이 다소 쌀쌀하였으나 견딜 만 하였으며, 말로 만 듣던 갈릴리 호수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기쁘고도 흥분된 마음에 자리에 누워도 잠이 금방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별장식 콘도처럼 지어진 숙소에서 모두들 긴 하루 여정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1/22(주일)8일
- 여행 중에 맞이한 주일 아침에 우리는 갈릴리호수에서 선상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찍 식사를 마치고 8시경에 숙소에서 약10분 거리에 있는 배 선착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선상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는 배가 몇 척 보였는데 미리 예약한 배 한척에 승선하자 선장아저씨는 애국가 노래 소리에 맞추어 태극기를 게양하여 한국인들이 그 배에 탑승한 것을 알렸습니다.
-지난 며칠동안 감기로 인해 여행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던 장영길 집사님의 인도로 선상예배를 드린 후에 각자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선상에서의 설교말씀과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지게 된 사실 등을 묵상하며 아름다운 주일 아침을 의미있게 보냈습니다. 파아란 맑은 하늘과 적당히 불어주는 초겨울 바람이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습니다. 이번 순례여행 중에 가장 기억나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잊지못할 선상기도회를 마치고 우리는 이스라엘에서의 마지막날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간 곳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하시던 곳에 세워진 팔복기념교회였습니다. 여덟가지 복에 관한 말씀을 교회의 천장벽에 새겨 넣었으며, 아름다운 정원과 기도처를 가지고 있는 교회인데 현재는 프란체스카 수녀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마침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 온 수십명의 순례자들이 그 곳을 찾아와서 비슷한 시간에 같이 교회 곳곳을 둘러보았으며, 잠시후에 그들은 정원 한 쪽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진솔한 모습으로 드렸습니다. 인솔자의 영어 설교가 곁을 지나가던 저희를 멈추게 하였습니다.
- 이어서 텔 단(Tel Dan; '단 언덕')에 들렀는데, 그 곳은 단 지파가 분배받은 지역으로 그 전에는 라이스(삿18:29) 또는 레셈(수19:47)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거의 북쪽 끝, 즉 갈릴리 호수 북동쪽의 골란고원(Golan Heights)지대의 북쪽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분열왕국시대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이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했던 곳이며(왕상12:28-29) 레위자손이 아닌 자를 임의로 제사장을 삼아 자기가 만든 산당에서 제사를 하게 한 곳으로서 우상숭배의 죄를 책망받을 때 자주 거론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물이 매우 풍부한 지역으로, 겨울철이었음에도 흐르는 물의 수량이 엄청나게 많아서 모두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약 45분간 천천히 트랙킹을 즐기면서 사진도 찍고 좋은 공기도 마음껏 마실 수 있었습니다.
- 단에서 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곳으로(마16:13) 지금은 바니아스(Banias)라고 불리는데 이는 헬라시대에 목양신인 판신(Pan God)을 섬기던 곳이었기에 파니아스(Panias)라고 불리던 데 기인합니다. 가나안시대부터 바알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고 헤롯왕은 가이사 아구스도를 위한 신전도 세우는 등 이방신의 우상이 넘치던 지역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큰 칭찬을 듣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높지않은 산 중간 쯤에 '판 신전'이 있었던 큰 동굴이 도로 저편 멀리서도 볼 수 있었으며 그 앞으로는 헤르몬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이곳을 거쳐 요단강을 이루며 남쪽으로 흘러서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것입니다.(요단강을 이루는 3개의 발원지 중의 하나임)
- 이어서 골란고원을 옆으로 보면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갈릴리 호수 북쪽의 도시인 가버나움(Capernaum)에 이릅니다.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 사시면서 선교의 중심지로 정한 곳입니다(마4:12-13).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셨으며, 가나에 계실 때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기도 하셨습니다(요4:46-54). 이 곳은 갈릴리 해변길(Via Maris)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세관과 군대초소가 있는 등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주거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는데 꽤 큰 규모의 건물터가 몇 개의 둥근 기둥과 함께 남아 있으며, 베드로의 집터라고 알려진 곳에는 팔각형 모양의 집터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그 위에 어선 모형의 현대식 교회인 '가버나움 교회'를 지었습니다.
- 이어서 가까운 근처에 있는 베드로 수위권 기념교회를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곳이라고 알려진 곳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요21:15-1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유명한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예수님께로부터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심을 받은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하시고 이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을 사도 베드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내 양을 먹이라'는 지상명령에 얼마나 부합된 삶을 살고 있는 지 많은 반성과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그때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처음 두 번은 'logos'로, 마지막 세 번째는 ‘philos'로 물으셨으나 베드로는 세 번 연속 'philos'라는 말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두 번이나 나를 logos로 사랑하느냐 하신 주님께 philos로 사랑합니다라고 답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베드로가 바로 오늘의 저희들입니다는 뜨거운 속죄의 마음, 죄송한 마음이 들어 주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logos로 사랑하시며, 그러므로 그렇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교회 마당 한 편에 세워져 있는, 예수님이 무릎을 꿇어 앉은 베드로에게 손을 들어 명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철제 조각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구름이 짖게 끼더니 비가 내리고 바람도 제법 세게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베드로의 물고기 식당이라는 곳에 들러 생선 튀김요리로 점심을 들었습니다. 꽤 큰 생선인데 갈릴리호수에서 잡은 것인지는 확실지 않으나 어부였던 베드로를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른 손님들도 많이 와서 제법 붐비는 식당이었습니다. 창밖으로는 제법 큰 파도가 치는 갈릴리호수를 볼 수 있었는데, 호수에 파도가 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그날 그런 파도치는 모습을 보게 되어, 예수님의 제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니 오후 2시30분경이었습니다. 3박4일간의 이스라엘 여정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버스는 우리를 요르단과의 국경도시인 벳샨(Beit She'an)쪽으로 싣고 달렸습니다. 1시간여 후에 국경지역(Check point)에 도착하여 먼저 출국수속을 하고 이어 요르단 입국수속을 하였는데, 이스라엘 현지인인 마음씨 좋게 생긴 분이 계속 따라 다니며 도와주어서 비교적 용이하게 빠른 시간안에 모든 수속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전직 경찰관이라고 하는데 유대인 같지는 않고 아마도 팔레스타인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 분들의 크고 작은 도움으로 이번 순례여정이 큰 어려움과 지체됨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여호와이레입니다.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떤 분이 하늘을 보더나 ‘와! 무지개다’하기에 저편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름다운 큰 무지개가 떠올라 있었습니다. 모두들 이스라엘에서의 여정을 잘 마치고, 또한 요르단여정을 무사히 잘 마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가이드였던 심연선자매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수고에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자매는 예루살렘 한인교회에서 피아노반주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자매인데 가이드자격시험을 통과하여 몇 년전부터 그 일도 열심히 감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인된 가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2년간의 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감독관 앞에서 가이드 실습을 한 후에 질의 응답도 통과해야만 자격증을 준다고 합니다. 영어도 잘 해야하는 것은 물론이지요.
- 요르단에 입국하니 현지 가이드가 버스와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인 문효심 자매와 인사를 나누고, 버스로 요르단의 수도 암만까지 남쪽으로 세시간 여를 달려 갔습니다.
-요르단(Jordan)은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중서부에 위치해 있기에 고대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문명의 가교역할을 하였으며 현재는 시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등 중동 주요국가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교통중심지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요르단의 영토였던 요단강 서쪽지역(Westbank)은 1967년 3차 중동전쟁때 이스라엘에게 점령되어 빼앗겼습니다. 요단강 동쪽지역은 요단계곡지역(갈릴리호수로부터 사해를 지나 홍해에 이르는 낮고 좁은 계곡지역)과 그 오른쪽 편에 자리잡은 산악지역과 사막지역 등 3개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농경과 목축이 가능한 지역은 물을 얻을 수 있는 요단계곡지역뿐이므로 인구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왕의 대로(King's Road)는 고대로부터 국제교역로로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지나갔던 길이었으며 요르단의 중요한 성읍들이 이 도로 부근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도 사해 동쪽 요르단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르단은 12지파중에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정착하였던 곳인데, 그 전에는 아모리 족속과 암몬족속, 모압족속, 에돔족속 등이 살던 지역입니다. 사울이 암몬의 공격을 받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구원요청을 받고 암몬을 공격하여 승전한 곳이며, 그 후 다윗이 암몬의 수도인 랍바(지금의 암몬인데, 로마시대에는 빌라델피아로 불림)를 공격할 때에 밧세바의 사건이 일어났으며,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는 랍바 성 공격때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삼하 11:22-25).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서 마하나임으로 피신하였으며, 솔로몬왕 시대에 요르단은 이스라엘의 영토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의 고향이며 활동무대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요단강은 사해북쪽 끝에 있는 베다니였으며,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 의해 베다니에서 가까운 사해 동쪽의 마케루스(Machaerus) 요새의 옥에 갇혀 있다가(주후41년경)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 암만으로 가면서 우리는 야베스 길르앗과 그릿 시내, 숙곳, 얍복강을 지났습니다. 그릿 시내(Wadi Cherith)는 아합왕 때 길르앗 지방의 디셉 사람인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숨었던 시내로, 물이 다 마를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릿에 숨어있는 동안 엘리야에게 와디에서 물을 마시고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왕상 17:2-7).
사막지역에 있는 강을 뜻하는 단어에 ‘와디(Wadi)'와 ’나흘‘이 있는데, 와디는 건천이라고도 하며 평소에는 물이 말라있는 상태이지만 우기때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흐르는 강을 말하며, 나흘은 평상시에도 강물이 흐르는 강을 말합니다.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얍복강가 인데 그 얍복강이 바로 나흘입니다.
-숙곳(Succoth)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에 가축들을 위해 요단강 동쪽에 우리를 만든 곳입니다(창33:17). 후에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족을 추적하다가 숙곳 사람들에게 떡덩이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후에 승리후 귀환하다가 브누엘 사람들과 함께 숙곳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역사를 간직한 곳입니다.
-오랜 버스 여행 끝에 어둠이 내린 암만에 도착한 것은 여섯시 반을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이스라엘에서 이용한 버스와는 달리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뒤쪽에서는 기름냄새가 나서 가급적 앞쪽 좌석에 앉도록 좌석을 조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부들이 같이 앉으면 10개의 2인용 좌석이면 충분하여 뒷부분은 가방이나 소지품들을 갖다 놓기로 하였습니다. 국력의 차이인지 이스라엘에서 타던 버스는 꽤 안락하고 45인승이라 여유가 있었는데 요르단 버스는 중형인데다 낡아서 다소간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숙소인 Regency Palace Hotel에 도착하여 짐을 찾아서 여장을 풀고 식당에 모여 즐거운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 곳에서는 이틀을 묵게 되어 있었으므로 다음날 아침 또 짐을 꾸리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1/23(월)9일
-어제 오후에 잔뜩 흐린 암만지역의 날씨 때문에 오늘 혹시 눈이나 내려서 여행에 지장이 있을 지 걱정을 하였습니다만, 다행히 눈은 그치고 구름만 끼어있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7시경에 버스를 출발하여 페트라 지역으로 향하였습니다. 김명섭장로님이 아침기도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어제 오후에 요르단 남쪽 지방에 눈이 내렸는데, 많이는 내리지 않아서 여행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사막지역에 눈이 내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제 내린 하얀 눈을 요르단 사막지역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암만을 출발하여 처음 본 것은 아르논(Arnon)강인데, 모압지역의 북쪽에 있는 가장 큰 강입니다. 이 강은 아모리 족속과 모압의 경계가 되었으나 이스라엘이 정복한 후에는 르우벤지파와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이 강 이북지역은 물이 풍부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여러지파 중에서 처음에는 르우벤과 갓 지파가 분배받고자 하였으며, 가나안 정복 후에는 므낫세 반 지파도 분배받은 곳입니다.
-9시경에 도착한 곳은, 길하레셋(Kir-Hereseth)인데 '케락(Kerak) 성'이라고도 부르며 모압산지의 방어 요새였던 곳으로서 삼면이 깊은 계곡으로 둘러쌓인 천연의 요새입니다. 왕의 대로에 접하고 있어 고대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모압 길, 길헤레스 또는 길하레셋 등으로 언급되었으며, 한때는 모압왕국의 수도였고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는 중요한 기독교지역으로 페트라의 대주교가 이곳에 그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이 주둔하던 성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모압의 메사 왕이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죽은 후 조공을 바치지 않자 아합의 아들 여호람왕이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왕과 연합하여 이 곳 모압을 정벌하게 되는데, 패전을 거듭하던 메사 왕은 수도인 디본에서 이곳 케락성으로 후퇴하여 성안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승산이 없자 자신의 아들을 이스라엘 연합군이 바라보는 가운데 산 채로 불에 태워 모압족의 神인 그모스에게 바쳤다고 하며 이를 본 이스라엘연합군이 격노하여 포위를 풀고 떠났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왕하3:4-27) 메사왕은 이 승전의 사실을 석비에 기록하여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해발 1,050m정상에 있는 케락성에는 옛 요새의 한 부분과 십자군이 그 위에 다시 지은 성채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멀리서도 성의 전경이 우람하게 보이는데 계곡이 꽤 높고 가파른지대에 위치하여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찾은 날은 하늘은 맑았으나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어서 서있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성채안을여러곳 돌아 보았는데, 병사들이 묵던 숙소와 전투를 하던 참호를 볼 수 있었는데, 참호의 구멍이 안으로는 넓지만 바깥쪽으로는 좁게 뚤려 있어서 외부의 적을 내려다보면서 공격 할 수 있도록 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참고로,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케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있는데, 'Kingdom of Heaven'(천국)이라고 십자군 전쟁때 영국왕 제임스와 이슬람의 산디발 장군 간의 제2차 십자군전쟁 당시를 다루는 영화로서 이 성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요르단 일정의 꽃이라고도 할 만한 곳이 페트라(Petra)인데, 페트라는 '바위 또는 반석'이라는 의미이며, 성경에는 셀라(Sela)라는 이름으로 여러번 등장하고 있는 지역으로 바위 무덤이 매우 많이 만들어져 있는 곳입니다.
유다왕 아마샤는 에돔을 공격하여 소금골짜기에서 에돔 군사 1만명을 죽이고, 또 셀라를 공격하여 뺏고 그 곳 이름을 욕드엘이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왕하14:7, 대하 25:12) 선지자 이사야는 찬송의 노래에서 셀라의 주민들도 노래하라고 하였습니다.(사42:11)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며 요르단을 대표하는 페트라는 셀라로 추정되는 곳이므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페트라는 바위를 뜻하는 헬라어이며, 특히 사도 바울이 삼년동안 머물렀던 아라비아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합니다.(갈1:7)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한 주로 편입되었으며, 주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영향으로 많은 기독교 건축물이 건설되었으며 거대한 고대의 무덤이 수도원으로 개조되기도 하였습니다. 새로운 무역로가 이 곳에서 멀리 조성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곳은 1812년 스위스인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발견되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페트라는 해발 935m의 충적토로 된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적의 면적이 3백만m²에 이르는 거대한 유적지입니다.
과거에 페트라에는 많을 때는 5만여명이나 거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압벽사이의 좁은 협곡은 시크(the Siq)라고 하는데 낙타를 몰던 대상들이 교역을 위해 다니던 길이며, 길 옆에는 돌로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흘려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페트라 유적지 입구부터 좌우로 형형 색색의 바위와 중간중간에 만들어진 동굴모양의 무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코끼리를 닮은 바위등 각종 형태의 붉은 바위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듯 하였습니다. 약30-40분 걸어 들어가면 좁은 바위틈새를 지나자 '알 카즈나(Al-Khazna)' 신전이 나타나는데, 무덤입구를 커다란 바위 전체를 조각하여 원형기둥 6개의 2층 구조의 신전 형태로 만든 고대인들의 능력과 정성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 규모로 보아 왕의 무덤이라고 여겨진다고 합니다.
-알 카즈나를 지나 10여분을 더 가면 로마시대때 만든 원형극장이 나타나는데 이것도 바위전체를 계단모양으로 깎아서 좌석형태로 만든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바다밑에 있던 해저지대가 융기하고 또 지각변동으로 좌우로 이동하여 오늘날 같이 좁은 협곡과 형형색색의 바위를 이룬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곳이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영화 '인디아나존스-성궤를 찾아서'의 지리적 배경이 되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여기서 영화를 촬영하였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성궤가 '알 카즈나' 신전 안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요. 주인공인 해리슨 포드가 말을 타고 좁은 협곡을 빠져나오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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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지역의 꼭대기에는 아론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호르산’이 있는데 현재의 지명으로는 ‘자발 하룬(아론의 산)’인데, 해발 1,593m의 꽤 높은 바위산입니다. 페트라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바위산으로서 모세의 형인 아론의 죽음에 대해 기록되어있는 민수기20장 22-29에 호르산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현재 호르산 꼭대기에는 모스크 형태의 무덤사원 건물이 남아있습니다.
-페트라 지역 안에는 그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색깔의 돌들을 곱게 갈아서 낙타그림을 그려서 유리병에 넣어 판매하는 상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 병에 10달러내외를 달라고 하는데 잘 흥정하면 7-8달러에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곳에서 그 기념품을 팔고 있었는데, 소위 정품이 아닌 것은 5달러 이하에도 살 수 있었습니다.
- 페트라를 약1시간 반 동안 둘러보고 오후4시경, 일행은 암만으로 이동하기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북쪽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휴게소에 잠시 들러 휴식을 취하면서 옆에 붙어 있는 기념품점을 둘러보았습니다.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볼거리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가격비교를 할 수 없고 품질이 검증되지 않아서 실제로 구입하는 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7시30분경에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나눈 뒤 8시40분 부터 이번 여행을 결산하는 의미에서 평가회를 가졌습니다. 호텔 1층의 세미나실을 잠시 빌려 약 1시간에 걸쳐, 이번 여행을 마치면서 느끼는 소감이나 즐거웠던 점, 아쉬운 점 또는 꼭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누었습니다. 대체로 만족스러웠던 순례여행이었으며, 날씨나 일정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 특별히 도와주셔서 큰 문제없이 잘 마칠 수 있었다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다만, 베두인 족들의 갑작스런 통행제한으로 바란광야쪽으로 우회하는 바람에 바로온천과 르비딤 등 두 군데를 방문하지 못하였고, 시내산 등정 일정도 몇시간 지연된 것이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예상치못한 사태가 발생 할 때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대안을 보다 꼼꼼히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정으로는 바란(Paran)광야를 횡단하면서 그 황량함에 놀란 것과 갈릴리 호수에서의 선상예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 예수님의 시신이 내려지던 장소 등등 각자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전해진 곳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유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 분이 감기로 고생을 하시고, 소화가 잘 안되서 어려움을 겪은 분들도 있었지만 여러분들의 기도와 도움으로 잘 극복할 수 있었음도 감사합니다. 여행을 마칠 때 쯤에는 모든 분들이 다 건강을 되찾아서 귀국할 때는 편안한 마음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1/24(화)10일
-마지막 밤을 보낸후 아침을 맞았는데 아주 화창하고 밝은 날이었습니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다소 바람이 강하게 부는 정도였습니다.
-아침식사후 모든 짐을 정리하여 7시경에 버스를 타고 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회는 고영준 집사가 인도하였는데, 오늘의 방문지인 느보산을 생각하면서 신명기 34장 1-8절 말씀을 택하였습니다. 신명기 34장에는,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땅(여리고 지역)을 바라보는 이곳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온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방문지는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1시간여 떨어진 마다바(Madaba)였는데, 성경에는 ‘메드바’로 불리며,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이 정복한 도시로서(민 21:30, 사15:2, 대상19:7) 르우벤 지파의 땅이었으며, 다윗왕이 암몬을 정복할 때 메드바에서의 전쟁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곳은 로마 비잔틴 시대의 요단강 동편 기독교 최대의 도시로서, 로마시대 초기에는 이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많이 순교당하기도 하였으며 8세기의 지진으로 상당부분 파괴됨으로써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가 터어키가 정복한 후에 기독교인들의 이주가 허용되어 비잔틴시대 교회터 위에 새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19세기말에 세워진 ‘성 조지’ 교회(그리스 정교회)의 내부 바닥에 보존되어있는 세계최대의 모자이크 성지 지도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는 주후6세기 로마의 유스틴황제 시대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가로5.6m, 세로 15.7m의 돌판에 색을 넣어 만든 대형지도였으나 현재는 2/3가량 훼손되어 10평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 지역의 지도는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성 조지 교회 옆 기념품가게에서 파는 모자이크 지도 복사품을 구입(3달러)하여 기념품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순례여정의 마지막 방문지인 느보산으로 향했습니다. 현재 모세기념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시야가(Shiyaaga)를 느보산이라고 부르지만(신 32:49, 34:1)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해발 835m의 ‘자발 느바’)은 아닙니다. 시야가는 해발710m의 산봉우리를 말하며 이곳을 성경에서 말하는 ‘비스가’로 추정하는 이유는 이곳의 지형적 특징이 성경에서의 묘사와 가장 유사하기 때문입니다.(신3:17, 4:49, 수12;3, 민21:20) 하지만 그리 높은 것은 아니며, 버스로 상당 높이까지 이미 올라온 상태라서 버스에서 내려서 10여분 걸어 가니 느보산 정상이었습니다. 마침 날씨가 쾌청하여 저 멀리 요단강과 그 건너편 여리고와 요단계곡과 예루살렘까지 어렴풋이 보이며, 남쪽으로는 멀리 사해와 유대광야도 볼 수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 당시인 4세기경에 이곳 시야가를 비스가로 여기고 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하였으며, 6세기에는 모세를 기념하는 바실리카로 다시 지어졌고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은 프란치스코 교회와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모세 기념교회 앞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조각가인 지오바니 판토니의 놋뱀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데,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놋 뱀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화시킨 뛰어난 작품입니다.
-또한 교회 입구 한쪽 편에는 로마교황청이 선정한 요르단내 기독교 5대 성지 중의 하나라는 석조기념비가 세워져있습니다. 2000년 요한 바오로2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로마교황청에서 요르단 5대 성지를 발표하였는데 참고로 이를 살펴보면, 1)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2)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은 느보산 3)세례 요한의 순교지인 마케루스 4)엘리야의 고향인 디셉(텔 엘리야스) 5)마리아가 헌신했다는 안자라교회 등 다섯 곳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을 들은 모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새삼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방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의 최종 준비처로서 전략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습니다.
느보산 정상에는 모세기념교회가 있는데, 모세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었음을 기념하기위해 는 모세 기념교회가 수년전에 폭설로 무너져 공사 중에 있었습니다. 현지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복원 공사는 예정대로라면 이미 끝났어야하는데 아직도 공사중이고 언제 마무리 될 지는 누구도 모른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곳을 의미하는 여러 설명이 나오는 데 다 같은 곳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비스가산 봉우리’, ‘아바림산’, ‘벳부올 맞은 편’ 이 이곳 느보산과 동일한 곳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요르단의 일반 현황을 소개해 드리면, 인구는 약600만명이고 수도인 암만에 약300만명이 모여 살고 있으며, 면적 88,000Km²의 2/3는 사막지역입니다. 따라서, 평균강수량은 400mm에 불과합니다.
정치체제는 의회제를 겸한 왕정이며 인구의 90%는 무슬림이고 10%정도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하원의원은 80석인데 최소 2인은 기독교인으로 선출하여야 한답니다. 상원은 전직 각료 등 원로와 지도층 인사들로 구성한다고 합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부터이며 일요일도 휴무한다고 합니다.
의무교육은 고등학교까지이며 국립대학은 6개가 있다고 합니다.
1인당GNP는 4,000달러이며 빈부격차가 큰 편이며 생활수준은 비교적 괜챦은데 학생이 전체인구의 40%에 달해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매우 적은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비산유국이므로 관광업이나 농업, 중계무역이 발달되어 있다고 합니다.
화폐단위는 ‘디나르’를 쓰는데, 2012.1월 현재 1JD=US$1.43 이라고 합니다.
-느보산에서의 일정을 끝으로 성지순례의 공식일정은 마무리가 되었고, 점심식사는 느보산에서 가까운 현지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하였습니다. 비교적 깨끗하고 전망도 좋은 식당이었습니다. 야채와 빵, 치즈와 치킨 등 언제 다시 이런 음식을 맛볼 수 있을 까 생각하면서 음미하듯 천천히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후에 버스편으로 암만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오후1시경이었습니다.
현지 가이드인 문효심 자매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입국장에 들어서니 입국할때도 도움을 주었던 인상좋은 현지 안내인이 나와 있었습니다.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출국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오후4시15분에 암만공항을 출발하여 중간 경유지인 카타르의 도하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도하공항에 도착하니 저녁 7시30분이었는데, 인천행 비행기는 이튿날(1/25) 새벽1시50분에 출발하게 되니 약5시간이 남았습니다. 공항에 마련된 간이 휴게실에서 잠시 쉬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인천행 비행기에 탐승하였습니다.
1월25일 11일
-인천공항에 내린 시각이 1월25일(수) 오후 4시30분경이었습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다 찾은 후에 대합실 한 쪽에 잠시 모여,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장영길 집사님의 대표기도 후에 이번 순례를 준비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이광현 집사님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시차적응 등 준비기간을 가진 후 적당한 날을 잡아 해단식을 갖기로 한 후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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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잘하셨습니다
감탄 했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훌륭하신 분하고 같이 여행한것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