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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죽면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산그림촌
일죽면(一竹面)의 일죽면은 원래 죽산군에 속하였으나 조선 태종 13년 충청도 관활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으며, 고종 32년에는 남일면,남이면,저촌면,북일면,북이면 으로 분리되었다.그 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당시 5개면을 통합 하여 죽일면이라 하고 안성군에 편입시켰다. 1917년 6월 죽일면을 다시 일죽면으로 개칭하였고, 현재 15개 법정리와 42개 자연촌으로 되어있다. | |
1.唐村里(당촌리)
1)靑龍(청용)마을:당미르기, 당미력이 고구려말 寶藏王 때의 對唐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운 李次成장군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미륵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미륵불이 잘 보존될 때 이 마을에서 8명의 장사가 나온다고 하였으나, 일제시대 일본군이 이 전설을 듣고 불상과 돌미륵을 없애버 렸다고 한다. 불상과 미륵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당미르기,당미력이>라고 하였다. |
2)雲田(운전)마을:구름밭
조선 초에 唐村里 당미르기에 살던 李天達이란 사람이 분가하여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모양이 마치 구름 위에 뜬 밭(田)과 같다고 해서 <구름 밭>이라 하였다. 옛날에 큰 홍수가 나면 주변은 물에 잠기고 이 마을만이 물위에 나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밭처럼 보인다하여 <구름밭>이라고 하였다. |
2.菱菊里(능국리)
1)菊洞(국동)마을:국골 고려 때 新昌孟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陽智縣에 소속되었으나 고려 가 멸망한 후 마을이 황폐되어 사람이 살지 않았다가 德山尹氏 尹琯이 다시 이 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옛 고을이란 뜻으로 <舊고 을:국골>이라 불리다가 행정구역통폐합 때 <菊洞>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
2)菱洞(능동)마을:능내골, 능락골, 노적봉
이 마을에 慶州金氏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후에 한 巨富가 살고 있었는데 소작료로 거두어 쌓아 놓은 것이 마치 노적가리 같다고 하여 <노적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의 위치가 능선안에 있다고 하여 <능내골>로 불렸다. 능선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능락골:陵落谷>이라 하였다. |
3)盆洞(분동)마을:동물, 동우물
조선초기 이 마을에 礪山宋氏와 星州都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주민들 이 마실 우물을 찾아 여기저기 파다가 겨우 한 곳을 찾아 독(甕)을 묻어 물을 받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독우물:甕井>이라 부르다가 이 말이 변하여 <동우물>,<동물>이 되었다. |
4)蘆洞(노동)마을:가리골, 가재골
약 150여년 전에 全州李氏 李萬洙 3형제가 池內마을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 성되었는데, 이들이 이곳에 정착하던 첫 날 밤에 꿈속에서 한 도사가 나타나 마을 뒷개울에 가면 가 재가 많을 것이라 하여 다음날 뒷개울에 가보니 역시 꿈처럼 가재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가재울>이라고 했으며, 또 마을의 뒷산에 갈대가 많이 있다고하여 <가리골>이라 하였다. |
3.新興里(신흥리)
1)仙游(선유)마을:善慧村,스내 아주오랜 옛날부터 順興安氏 安養敎란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있는 仙游岩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부처 4位가 모셔져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보살상을 善慧菩薩像이라 하여 <선혜촌>이라 하다가 이 말이 변하여 <스내>가 되었으며, 仙游岩에서 선녀가 놀았다고 하여 <선유>라 하기도 한다. |
2)杜門(두문)마을:두무골
조선 초기에 安城李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그 후 약 150여년 전에 李 元植이란 사람이 용인군 外四面에서 현재의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기운이 세어서 다른 마을로 나가 힘을 겨루면 지는 일이 없는 壯 士들만 사는 마을이라 하여 <두목골:頭目一>로 부르다가 이 말이 변하여 <두무골>이 되었다. |
3)德峴(덕현)마을:한정골
약 50여년 전에 密陽朴氏 한 사람이 이곳의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고 하여 利川郡 실성면 대죽리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물 맛이 좋고 아주 찬 우물이 있어 이 우물을 <한정:寒井>이라 한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
4)池內(지내)마을:무안, 무아니
조선 초기에 仁同張氏가 이곳에 자리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한 선비가 이곳을 지 나다가 마을 앞의 연못이 마치 기러기가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무안>이라 하였다. 마을 의 생김새가 走馬脫鞍형이므로 말(馬)에 안장이 없다고 하여 <무안:無鞍>, 즉 <무아니>라 한다. |
4.和谷里(화곡리)
1)大和(대화)마을:새터 약 180여년 전에 어리실(愚谷)로 부터 식수와 식량이 부족하여 이곳으로 이주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새로운 마을이란 뜻으로 <새터>라고 하였다. |
2)愚谷(우곡)마을:어리실 임진왜란 당시 龍仁李氏, 原州元氏, 丹陽禹氏 등이 이곳으로 피난 왔다가 그대로 정착하 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다른 마을 사람에 비하여 착하고 겸손하며 우직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어리실>이라 하였다. 그 가운데는 다 섯 개의 작은 자연 마을이 있으니 상어리실,하어리실,정문말,골말,드나터가 그것이다. |
3)坪村(평촌)마을:수통목이
약 150여년 전에 順興安氏 安貞錫이 大和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 하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는데, 大和로 가는 길목에 농업용수를 끌어 들이기 위한 수통이 있다고 하여 <수통목이 >라 하였고, 또 이 마을은 들(坪)의 복판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평촌>이라 하기도 한다. | |
5. 古銀里(고은리)
1)巨雲(거운)마을:게운이, 거우니 약 180여년 전에 도둑 떼들에게 시달리던 海州吳時 吳遂喆 이란 사람 이 이곳으로 피해 와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는데, 여러 번 이사한 끝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게운이>,<거우니>라 하였다. |
2)古木(고목)마을:古木洞 약 250여년 전에 寧越辛氏와 海州吳氏가 살고 있었는데 도둑떼 들의 횡포를 피해서 吳 氏는 고개 너머 '巨雲'으로 이주해 갔고, 辛氏는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데 이 마을에는 약 500여년 묵은 향나무 古木이 있어서 이 마을을 <古木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3)銀石(은석)마을:어심터
약 550여년 전에 忠州魚氏와 靑松沈氏가 이곳에 자리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하여 <어심터:魚沈基> 라 하였으며, 그 마을 뒷산인 마옥산에서 銀과 같은 흰 돌이 많이 나온다 해서 <銀石>이라하였다. | |
6.芳草里(방초리)
1)草幕(초막)마을:초막골 조선 중기 原州元氏 元善良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 었는데 마을 모양이 말(馬)이 풀을 뜯는 형상이라 해서 <초막골>이라 불렀다. |
2)舟坪(배평):배뚜리, 배뚜기
조선 중기에 江華崔氏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인근 五芳마을은 배(舟)모양을 하고 있고 이 마을은 홍수가 나면 들이 물에 잠 겨 바다처럼 되어서 배를 매는 부두같다고 해서 <배두기>,<배뚜리>라 하였다. |
3)五芳(오방)마을:오뱅이
약 350여년 전쯤 金海金氏 金希正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마을 주위에는 다섯개의 마을이 있으니 곧 巨雲,草幕,舟坪,古木,한다리(혹은 利川,龍仁,竹山,長湖院,安城의 다섯개 마을을 뜻하 기도 한다)가 그 것으로 이마응은 그 다섯 마을로 통하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오뱅이>라 하였다. | |
7.注川里(주천리) 1)下洞(하동)마을:하리,학리 조선 선조 때 남평문씨 문학포(일설에는 문이남이라고도 한다)가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 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문학포는 학문이 높고 기개가 대쪽같은 사람이라 많은 후진 을 양성하였고, 또 학자도 만호이 배출하였다. 그러므로 이 마을을 <학리>라 부르게 되었다. |
2)下住川(하주천)마을:구장터
조선 초기에 全州李氏가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미을에는 5일마다 열리는 장터가 있었다고 해서 <구장터>로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때 <下注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
8.住里(가리)
1)上佳(상가)마을:상촌,웃마을,감니 처음에는 김해 김씨가 이 미을을 형성하였으나,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에 예조판서를 지낸 홍 명호(혹은 홍경주라고도 한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김해 김씨가 그 권세에 눌려 양성면으로 이주하고, 홍판서와 그 하인들이 이 마을을 다시 형성하여 <웃마을>이라 칭하다가 산세가 아름 다워 <주리>라 하였다가 후에 뒷산에 업경이 있어 <주업리>라 하던 것이 다시<감니>가 되었다. |
2)下佳(하가)마을:중리
경주최시가 상주마을에서 이곳을 이주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마을의 위치가 중간에 있다고 하여 마을을 <중리>라 하였다. |
9.금산리(금산리)
1)上山田(마을):웃산전리 신라 때 杞溪兪氏 兪在仁이 이곳에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신라시대 축조된 金山山城(김유신 장군이 쌓은 성이라고 전함) 아래에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산전:산전>이라 하다가, 金山里4개 마을 가 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상산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
2)下山田(하산전)마을:아랫산전리
조선 철종 때 咸安尹氏 尹錫禎이 한양에서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 러 바위위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한 노인이 이곳 큰 바위터에 집을 짓고 살면 부귀 영화를 누릴 것이라 하자 윤석정은 이 자리에 집터를 닦고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였으며, 그 후 그는 大興府使를 지내게 되었다. 이 마을이 김산산성 아래에 있다 고 하여 <산전>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개편 이후에 <하산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
3)票洞(율동)마을:오릿골,뱀쟁이
약 160여년 전에 무너진 고개에 살던 원주원씨 원재영이 대홍수에 집을 잃고 이곳에 이주 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다. 그 후 이 마을 이 있는 골짜기에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밤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4)금옥마을:오릿골,뱀쟁이
약 200여년 전에 咸安尹氏 慶州崔氏가 두 곳으로 나누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 다. 윤씨가 살던 마을은 마치 오리가 알을 품고 앉아 있는 모양같다고 해서 <오릿 골>이라 부르고, 최씨가 살던 마을은 뱀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뱀쟁이>라 불렀다. |
10.山北里(산북리)
1)山北(산북)마을:산대 약 500여년 전에 함안여씨 여하정이란 사람이 이곳에 이주하여 북향인 산 아래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산대:山垈>라 부르게 되었다. | |
11.竹林里(죽림리)
1)麻林(마림)마을:만가리,마근가리 조선시대 경주이씨 이경석이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이 마을 뒷산에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만가리>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개편 이 후 삼(마)을 많이 재배한다고 하여 <麻林:마임>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2)宗排(종배)마을:종배
한양조씨가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竹林里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당시 조씨의 장남이 다른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지하였 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宗排>라 햇다. 옛부터 이곳은 대벌, 대지로 불려 왔는데 이 마을은 종 을 울릴만한 사람, 곧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鐘配:종배>라 하였다. |
12.長岩里(장암리)
1)장암:갈솔미,가루살미 가로지른 산 밑에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이 산에 소나무가 <갈솔미> 라 하였다. 또, 가로 놓인 산 밑에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가루살미>라 하였다. | |
13.松川里(송천리)
1)동부마을:주래 조선 말기에 全州李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의 모양이 배가 돌아오는 형태와 같다고 하여 <주래>라 하였다. 1980년 1월1일 행 정구역 개편 때에 淸渼橋와 삼성의 도로를 경게로 東部와 西部로 나누어 졌다. |
2)大松(대송)마을:한수리,한소리,한솔
옛날에는 이 마을에 부자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마실 물이 부족하여 주민들이 큰 고초를 겪으며 살았는데,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老僧이 물 한모금을 청하였다가 밥 은 주어도 물은 못주겠다고 하여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이 때, 노승은 큰 바위 밑에서 물 이 나올것이라고 일러 주었으며 그 말을 따라 그 곳을 파니 과연 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배모양으로 생긴 마을에 우물을 판 것은 곧 배및을 뚫은 격이 되어 그 마을은 망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200여년 전쯤 안성이씨 李鍾旭이 다시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한소리>,<한솔>이라 하였는데, 이는 마을 입구에 큰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
3)천둔리:내뚠이
옛날에 全州李氏 李進士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백면서생 시절에 술에 몹시 취하여 지 금의 장암리 상묘자리에서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저 건너 눈녹은 자리에 집을 짓고 살면 적어도 진사벼슬은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잠이 깬 이진사는 내 건너를 바라보니 과연 눈이 녹은 자리가 있기에 그 곳에 집을 짓고 살았더 니 진사벼슬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이 마을을 <내뚠이 >라 부르게 되었다. 옛날 이 마을에 장마가 지면 물이 들어 차는 것은 보아도 물이 빠 지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만 보이는 동네라 하여 <내둔이:천순->라 한다. | |
14.月井里(월정리)
1)신촌마을:다람물,다라물,달우물 조선 초기에 령산신씨 신종덕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는 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다람물>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람 물>이란 달우 물이 변한 말이다. 우물물이 얕아 우물속에 달이 비 친다 하여 <달우물>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또 조선초에 어떤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데 오색무지개가 뻗쳐 있어 그곳에 도착해보니 샘 이 있어 그 물을 먹어보니 단맛을 지니고 있어 <다라물>이라 했다. |
2)新光(신광)마을:주막거리
약 120여년 전쯤 안동권씨가 정착하여 주막을 짓고 술장사를 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주막이 있다고 해서 이곳을 <주막거리>라 하였다. |
3)內洞(내동)마을: 서라테 고려 때 禮讓陳氏 陳別將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위치가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4)신동마을:산막다람물
약 530여년 전에 함평윤씨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났다가 이곳에 들러 주위가 아 늑하고 경관이 좋은 것을 보고 후일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 였는데, 장미천에 뚝을 쌓기 전까지는 홍수만 지면 마을이 물에 잠기는 탓으로 주민들 이 뒷산으로 다람쥐처럼 기어 오른다고 해서 <산막다람물>이라 하게 되었다. |
5)신촌:정지물
이 마을에는 수질이 좋은 샘(井)이 있었는데 달이 떠올라 이 마을을 비추면 월하청지의 장관을 이룬다 하여 <정지물:精池->이라 하였다. | |
15.花鳳리(화봉리)
1)광주마을:송산,넓은 바위 조선 선조 때 玄風郭氏 郭嗣文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구 원병을 이끌고 왔을 때, 임진왜란을 평정한 공을 기려 이재송송 이라 하 고 이 마을 앞에 소나무가 많은 것과 이여송의 송자가 맞는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송산>이라 하게 되었다. 마을 뒷산에 봉황태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에 넓고 큰 바위가 있다고 하여 <넓은바위>라 하였다. |
2)胎峰(태봉)마을:태봉골
조선 중기 전주 이씨인 이득두가 이곳에 이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 다. 이 마을 앞산에 어떤 王子의 胎를 묻었다고 <태봉골>이라 불렀다. |
3)板橋(판교)마을:널다리골 조선 초기 봉화정씨가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 다. 이 마을 앞에는 삼남지방 한향으로 가는 널(版)로 만든 다리가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널다리:판교>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