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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음속을 돌파한 제트 전투기 수퍼 세이버
제2차세계대전의 승리를위해 미국은 전시체제하에서 전 공업력을 풀가동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평화체제로 전환되면서 주문되었던 군수품은 취소되거나 또는 폐기처분되었다.
따라서 도산, 폐업하는 회사가 속출하여 많은 근로자가 해고되기에 이른다.
노스 아메리칸(North American)항공사는 2차대전 중 해군용 PBJ와 공군용 B-25 중폭격기를 생산하였으며,
2차대전 중 가장 뛰어난 항공기로 평가받는 P-51 머스탱을 생산했다.
전후에도 P-51은 계속 생산되어 타사에 비해 조금 유리한 입장에있었지만 노스 아메리칸은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제트 전투, 폭격기 개발에 착수했다.
P-15(F-51)머스탱과 1947년 자사가 개발한 아음속 주간 전투기 F-86 세이버는 한국전쟁에서 맹활약하게된다.
F-86 세이버로 1948년 9월 15일에 마하0.8의 세계기록을 수립했던 노스 아메리칸은 1949년 2월 3일, F-86을 마하1의 초음속에 도달시키는 연구에 착수했다.
전세계의 항공사들은 초음속 비행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장벽 - "소리의 장벽"에 도전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27일, 영국 하빌랜드 항공사 테스트 파일럿 지오페리는
D.H.108로 초음속에 도전했다가 기체가 분해되어 사망했다.
나중에 척 예거에의해 XS-1(X-1)이 음속의벽을 돌파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오로지 이론이었다.
X-1은 오직 음속 돌파를 위한 목적으로 특별한 형태로 제작되었지만 군용기는 그러한 형태를 가질 수 없어 개발에 큰 어려움이 요구되었다.
더글라스사도 D-558-I 스카이스트리크같은 기종을 개발하여 음속의 장벽에 도전하고 있었다.
소련에서도 미코얀의 주도하에 I-350 원형기를 개발하여 초음속에 도전하고있었다. 이 원형기는 거듭된 연구된 끝에 재연소식 엔진2기를가진 발군의 기체, MiG-19로 탄생하게된다.
연구에 착수한 노스 아메리칸은 우선 모형 기체와 고속의 풍동 테스트 기구를 개발하여 소규모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풍동 테스트실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단편적인 테이터만 얻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디자인의 획기적인 변화없이 현존하는 기체를 그대로 사용하여서는 기대된 속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35도 후퇴익인 F-86 세이버를 45도의 후퇴익으로 개조하고 공기 저항을 줄인다할지라도 엔진 파워가 모자라기 때문에 음속돌파는 불가능했다.
강력한 엔진없이는 음속 돌파가 불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1953년 5월 25일 에드워드 공군기지 상공 YF-100A 제1호기(52-5754)의 처녀 비행.
YF-100A 제1호기(52-5754)는 노스 아메리칸 테스트 파일럿 조지 웰치에의해
마하 1.1로 비행하여 세계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가되었다.
그러던 중 1949년 8월, 제너럴 일렉트릭은 노스 아메리칸에 새로운 엔진을 추천해왔다.
이 엔진은 J47 터보제트 엔진에 애프터버너를 채택하여
9,400 파운드(4263kg)/최대 13,000 파운드 (5896kg)의 추력이 기대되었다.
이 재연소식 엔진은 기존의 J47엔진과 크기가 같아 F-86의 동체를 크게 확장하지 않아도 되며
게다가 강력한 파워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자 노스 아메리칸은 신형기체 개발이 아닌 F-86A를 전천후 요격형 F-86D로 개발, 이 엔진을 장착하기로 계획했다.
노스 아메리칸은 3개의 제안(계획)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공군은 신형 주간 전투기개발을 요구하며 거절하였다. 사실 그 당시 공군은 그러한 항공기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F-100 수퍼 세이버는 F-86 세이버를 베이스로하여 개발한 기체이다.
첫 번째는 F-86D 세이버로서, 45도 후퇴익과 에리어 룰(area rule)을 적용 날씬한 동체로 음속에 가까운 속도의 전천후 요격기였다.
적국으로 간주된 소련에서 개발된 MiG-15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제트 전투기로 평가되지만 얼마후 자신들도 그에 못지않은 성능을가진 F-86세이버로 무장하게되니까 말이다.
비록 실전에서의 비교평가는 이루어지지않았지만.
1950년 6월 25일, 태평양건너 한반도에서 북한군이 남한을 기습공격했다.
해리 트루먼 미대통령은 공군에게 적을 격퇴하도록 명령했다.
미 제5공군의 F-86 세이버는 한국 상공에서 MiG-15와 맞붙었다.
이 두기종은 거의 동등한 비행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F-86이 레이더 사격 조준기를 가진 점이 달랐다.
공군은 한국전쟁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미 공군 조종사들의 우수한 기량 때문에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제공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만약 MiG-15가 좀 더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미그 조종사가 좀 더 뛰어난 기량을 보유했더라면
또는 더 신형의 기체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미군의 손실은 막대했을 것이었다.
미 공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더 빠르고 강력한 신형 제공 전투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1951년 1월, 노스 아메리칸의 두 번째 제안은 F-86E였다.
F-86E는 F-86D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동체가 더 날렵하게 재 디자인된 형이었다.
공군은 "제공 전투기로 재 디자인한다면 고려해보겠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거절하였다.
1951년 5월 14일, 노스 아메리칸의 세 번째 제안은 F-86D와 F-86E의 장점들을 잘배합한 세이버 45였다.
세이버 45는 추력 15,000파운드(6803kg) 재연소식 플랫 앤 휘트니 J57-P-1 터보제트엔진을 장착하는 형이다.
세이버 45는 노스 아메리칸 사내명칭 NA-51-451(YF-100 1-NA)로서(1951년 5월), 20mm T-130기관포로 무장하고 전투 총중량은 23,750파운드(10,771kg)이며 이륙 총중량은 28,632파운드(12,987kg)였다. 그리고 전투행동반경은 1073 km이며 고도 35,000 피트(10,670m)에서 마하 1.3의 속도로 비행할 것으로 예상되어 있었다.
노스 아메리칸은 2대의 원형기와 공기역학 테스트용 1대, 그리고 무장 발달에필요한 자금을 투자하라고
공군에 요구하였다. 노스 아메리칸은 자금을 투자하면 더빨리 기체가 개발될 것이고,
그러면 공군은 더 빨리 신형기체로 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당시 공군은 긴급한 항공기보급이 필요했던 2차대전의 생산방식인 "날기 전에 먼저 구입한다"는 쿡-크레이기 플랜(Cook-Craigie Plan)을 "fly before you buy" - "당신이 구입하기 전에 하늘을 난다"는 안전한 도입방식으로 변경한 상태였기 때문에 노스 아메리칸사의 제안에 관련된 회의를 열었다.
아직 날지도않은 기체에대해 예산을 요청한다는 것은 공군의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Cook-Craigie 프로그램은 항공기가 신속히 전장에 보급되어야만 했던 1940년대에 항공기 개발 프로그램(사전 생산 주문)을 추진했던 로렌스 크레이기, 오버럴 쿡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개발초기의 원형기가 테스트 비행을 마치고 여기에서 발견된 결함들을 모두 수정한 다음의 대량 생산 시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낭비없이 테스트 비행동안 공작기계와 부품들을 미리 제작 확보하여 준비를 해 두었다가 일거에 양산하여 신속히 일선에 대량 보급한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기본 바탕이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부담이 큰 생산 방식으로 만약 A부품의 중대한 결함이 발생하였다면 미리 제작해두었던 A부품을 폐기 또는 수정해야하는 금전적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극단적 예를 들어 만일 항공기가 전반적인 실패작으로 판명된다면 새 항공기 도입에 쓸 거액의 예산을 폐기될 항공기와 생산설비, 부품들에 쏟아부어 넣은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공군은 노스 아메리칸이 소 수(원형기 2대와 테스트기 1대)의 자금만을 요구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적고, 추운 한국에서 진행 중인 전쟁과 신형 무기시스템 개발이 요구되는 상황인 점을 감안하여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군이 세이버 45의 개발을 승인하기까지는 약6개월이 더 걸렸다.
공군의 최종결정이 지연되자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노스 아메리칸은 자체 예산으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1951년 11월 1일, 공군은 정식 계약(AF33(600)-6545)을 통고한다.
원형 시제기 2대의 제작과 향후 약 94대 가량의 추가분이 발생하면 똑같은 제조시설을 사용하여 제작하도록 명시하였다.
공군은 1951년 12월 7일자로 세이버45를 F-100A 수퍼 세이버로 공식명명하여 미 공군의 센추리 시리즈 제1호기가 탄생하게되는 것이다.
수퍼 세이버는 숫자 "100"을 의미하는 애칭 "HUN"을 얻게된다.
뫀업 검사 후 공군의 요구사항에 부합하기위해서는 기체 재 설계가 필요했다.
동체 확대와 캐노피 개량, 수평미익이 동체 측면 아래로 약간 더 이동했다.
1952년 6월 23일, 공군은 설계 변경을 승인하였지만 폭탄 또는 로켓용 레크 설치와 비자동 방루식 연료탱크를 비자동 방루식 고무 블래더형으로 대체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에어 인테이크 변경과 직경 4.9m의 감속 낙하산 장착, 수직미익의 높이를 4.5m에서 4.2m로 낮추도록 요구하였다.
풍동 테스트 시설 및 이론 연구는 NACA(NASA)의 협조를 받도록 조언하였다.
공군이 폭장능력을 요구하자 당황했던 노스 아메리칸은 테스트 결과 F-100A가 약속한 마하 1.3의 속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결론을내리고 NACA의 도움을 얻기로하였다.
NACA의 도움을 받은 기체 제작자들은 날개의 전면을 얇고 예리하게 개조하고 더 많은 공기에너지가 엔진에 공급되도록 설계했다.
또한 공기 저항을 줄이기위하여 노즈를 9인치 연장했으며 익현(翼弦)의 비율을 조정하고 수직 미익의 두께를 줄이기로 결정하였다.
재설계로 주익 전면부의 두께가 F-86에비해 줄어들고(비율대 7%) 넓이는 28m2에서 35m2로 증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주익의 길이는 F-86에 비해 0.5m 짧았으나 동체 길이는 3m 증가되었다.
주익의 중심부 두께는 15.2cm이며 날개 끝단 부분은 7.6cm였다.
처음부터 보조익없이 설계되었으나 에일러론(aileron)을 설치하여 고도의 선회능력을 주었다.
또한 주익 전면에 5매의 자동식 슬래트를 설치하여 이륙시 양력증가와 급격히 높은 각도의 고속공격시 비행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하였다.
기수앞 달걀모양의 에어 인테이크는 이륙시 조종사의 시야를 개선하였으며 공기가 조종석 바로 아래로 통과하도록 하여 동체 넓이를 확장할 필요가 없었다.
동체 후부는 공기 저항을 덜 받도록 얇게 제작되어 엔진의 효율을 증가시켰다.
수평 미익은 높은 각도에서 공격시 피치 업을 막기위해 동체 아래쪽에 위치하도록 신중하게 설계하였다.
낮은 수평미익(slab tail)은 NACA가 XS-1에 사용하여 테스트한 바있었다.
감속 용 브레이크는 동체 하면에 설치하였고 어떠한 속도에서도 사용이 가능하였다.
엔진은 플랫 앤 휘트니 XJ57-P-7이며 재연소시 최대추력 14,800파운드(6713kg)까지 증가된다(비행 테스트가 아닌 육상 테스트에 의한 계산상).동체 내의 연료는 모두 5개의 비자동 방루식 블래드형 연료 탱크에 총750갤런을 적재하며
양쪽 주익에 각각 1개씩의 275갤런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할 수 있다.
고정 무장은 4문의 폰티악 T-160(나중에 M39) 20mm 기관포이며 조종석 하부와 측면에 각각 2문씩 설치되고 탄약은 275발을 휴대한다.
화력 통제 시스템 탑재가 기본인 시대가 되어 기수 상부에는 A-4 레이더(AN/APG-30) 사격 조준기가 설치되었다.
F-100 수퍼 세이버는 알루미늄이나 강철에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내열성을가진 티타늄 합금을 사용하게되는데 가공의 어려움 때문에 기체가격이 급상승하게된다.
티타늄은 고온의 배기열을 견디도록 동체후부에 사용되었고, 노스 아메리칸은 1954년에 F-100을 제작하느라 미국내에서 생산된 티타늄의 80%를 소비하게된다.
공군은 시제기의 비행이 실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설계와 뫀업의 우수성에 만족하였기 때문에 1952년 8월 26일, 250대 발주 계약을 계획하고 있었다.
공군과 노스 아메리칸은 2대의 시제기로만으로 테스트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판단하여 초도 생산되는 10대의 F-100A를 테스트기로 사용키로 합의하였다.
라이트 공군 발달 센터(WADC)는 테스트기가 한달에 약 540시간씩 테스트될것으로 예상하고 12대의 테스트기가 1954년 12월 전에 완성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그때까지 노스 아메리칸은 88대를 제작하여 공군에 전달하도록 약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재설계는 시제기인 YF-100A에 적용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따라서 엔진은 13,200파운드 추력의 XJ57-P-1엔진을 장착하게될 예정이어서
고도10,668m 상공에서 1210km/h의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되었다.
1953년 4월 24일,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에 인접한 잉글우드 노스 아메리칸 캘리포니아 공장에서 YF-I00A 제1호기(52-5754)가 제작완료되었다.
기체는 공식 공개후 해체된 다음 트럭에실려 모하비 사막의 에드워드 공군기지의 공군 비행 테스트 센터-AFFTC(Air Force Flight Test Center)로 운반되었다.
1953년 5월 25일, 에드워드 공군기지 상공은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전투기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로 마하의 벽을 깨뜨리기위한 도전이 시도되는 날이었다.
YF-100A 수퍼 세이버 시제기를 조종하게되는 사람은 노스 아메리칸 테스트 파일럿 조지 웰치(George Welch)였다.
웰치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하와이 제47 추적비행대대에 복무하고 있었으며 기습 당일 출격한 몇 않되는 조종사 중 1명이며 그는 P-40전투기로 일본기 4대 격추를 주장했다.
이날 웰치의 임무는 공군에게 약속한 대로 급강하가아닌 직선비행에서 음속의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공군 비행 테스트 센터의 프랭크 피터 에베레스트 중령이 추적 항공기 조종사로서 비행하게되는데, 그는 만약 웰치가 마(魔)의 마하1을 깨뜨리면 맥주를 사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자 웰치는 "성공하면 2잔을 사주십시요"라고 제안하였다.
에베레스 중령은 나중에 15km 구간에서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첫 테스트비행에 나선 웰치는 이륙후 6100m 상공에 다달은 다음 수평 비행에 들어가 감속 브레이크 검사를 실시하였다.
그다음 다시 10,670m 고도까지 상승한다음 애프터 버너를 점화하여 최대 속도로 달려나갔다.
마침내 YF-100A 수퍼 세이버는 음속의 벽을 뚫었고, 에베레스트 중령은 손가락으로 맥주 2잔을 가리켰다.
오후에 실시된 두 번째 비행에서도 초음속으로 비행하여 YF-100A는 음속을 돌파한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로 공식 기록되었다.
오전의 최초 비행은 57분간 실시되었고 오후에는 20분 더 많은 시간을 비행하였다.YF-100 수퍼 세이버가 음속을 돌파하자 흥분한 노스 아메리칸 기술자들은 일제히 환호했다.웰치는 5월 27일에도 두 번의 비행을 실시하였다.
6월말까지 테스트 파일럿 다니엘 다넬과 조셉 린치도 합류하여 급강하 비행과 롤링, 피칭 안정성 비행 테스트를 실시하였다.민간 테스트 파일럿들은 모두 43회의 테스트 비행을 실시하였다.
두 번째 테스트 프로그램에는 비공식이지만 공군 조종사도 참여하여 1954년 7월부터 9월 17일까지 실시되었다.
공군은 노스 아메리칸이 애초 약속하였던 성능에 못미친다는 의심을 품고있었다.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 비행후 제출하였던 비행 테스트 보고서에 의하여 성능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테스트 비행에 참가하였던 조종사들은 YF-100A가 다른 기종에비해 최고의 기량을가진 항공기로 평가했다.
조금만 더 개량하면 아주 훌륭한 기종이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단점도 보고되었다.
이륙 및 착륙시 가시도 제한과 고속 비행중 불안정성이 보고되었다.
그리고 애프터버너를 점화하지 않고 12,190m 고도까지 도달하는데 16분이 걸렸으며
상승하는 동안 가시도 또한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떠한 고도에서도 방향 전환이 어려웠다.
마하의 속도에서 수직 미익과 방향타가 피치와 좌우 흔들림(요-yaw)현상을 안정 시키는 능력이 부족하여 기체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우려되었다.
터치 다운 속도가 너무 빨라 착륙은 그 어느 항공기보다 어려우며 특히 야간 착륙은 대단히 위험할 것으로 보고되었다.
노스 아메리칸도 경험이 풍부한 이들 공군 조종사들의 비관적 보고를 들었다.
보고서를 검토한 공군본부 지휘부는 예정된 계획에따라 도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고,이리하여 완벽하지 못한 상태의 수퍼 세이버가 공군에 전달되는 결과가되었다.
두 번째 테스트 프로그램이 완료된날로부터 8일 후 F-100A 수퍼 세이버 제1호기(52-5756)가 제작 완료되었다.
10월 14일에는 시제기 제2호 YF-I00A 제2호기(52-5755)의 비행이 실시되었으며, 그로부터 12일 후 제작이 완료된 F-100A 수퍼 세이버 제1호기(52-5756)가 공군에 전달되었다.
YF-I00A 제2호기는 군사적 테스트와 평가를 받게되고
F-100A 수퍼 세이버 제1호기(52-5756)는 오직 비행테스트에만 사용될 계획이었다. 최종적으로 두 대의 YF-I00A 시제기는 1956년 8월 1일까지 총396회의 테스트 비행을 수행하게되며, 제2호기는 에드워드 공군기지 비행 테스트 센터에 영구 전시된다.
YF-100A 수퍼 세이버가 초음속으로 비행하긴 했지만 최고 속도 공식 기록은 미 해군이 보유하고 있었다.
미 해군 더글러스 XF4D-1 스카이레이가 3km 직선 구간에서 1,212km/h를 기록하였다.
속도 경쟁시대인 만큼 공군과 노스 아메리칸은 해군의 기록을 깨뜨리기로하였다.
YF-100A(54-5754) 조종사로 프랭크 피트 에베레스트(Frank K. (Pete) Everest) 중령이 선발되었다.
공군은 캘리포니아주 남동부 농장지대에 3km의 코스를 만들었다.
신기록을 공식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글러스 XF4D-1 스카이레이가 수립한 1,212km/h속도를 1%를 더 초과하는 속도인 1,224km/h로 3km를 달려야만했다.
그러나 여러번의 비행에서 더글러스 XF4D-1 스카이레이보다 1% 더 빠른 속도에 못 미치는 평균1,219km/h의 최고속도를 기록했다.
그러자 공군과 노스 아메리칸은 1% 여유 법칙을 적용받지 않는 15km 직선 구간비행을 선택했다.
이 구간은 F-86 세이버가 1,137km/h의 세계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랭크 에베레스트(Frank K. (Pete) Everest) 중령이 YF-100A(54-5754)로
15km 직선코스를 1215.261km/h의 속도로 비행하여 세계신기록을 수립하고있다
1953년 10월 29일. 캘리포니아 남동부 살톤 씨 상공
1953년 10월 29일,
에베레스트 중령은 15km 직선 구간에서 최고 속도 1215.261km/h를 기록함으로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였으며1234.875km/h의 기록도 하나 더 수립한다.
양산형 F-100A 수퍼 세이버는 1954년 10월 1일부터 전술공군 휘하 캘리포니아 조지 공군기지의 제479주간 전투비행단 소속 제436비행대대에 전달되었다.
이 실전배치 기체들은 나중에 대형 사고 발생 후 대형 수직 미익으로 대체하게된다.
1954년 10월 12일 아침 10시 46분경,
노스 아메리칸 테스트 파일럿 조지 웰치(George Welch)는 F-100A(52-5764)로 최대 속도에서 최대의 G를 테스트하기 위하여 팜데일 활주로를 이륙하였다.
7224m 고도에서 마하의 최대속도까지 비행하여 기체에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중력(7.33G이상으로 예상)극복 테스트였다.
웰치는 오전 11시에 고도 13,720m에 도달했다고 지상에 보고했다. 그 시각, 부근에서는 보잉 B-47이 7620m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13,720m 상공에서 평가를 마친 B-47 승무원들은 이 부근에서 또 다른 항공기가 정기적으로 테스트 평가 비행을 실시하고있음을 알고있었다.
얼마후 그들은 수직하강하는 기체를 발견했는데, 기체는 순식간에 오렌지색 화염과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B-47 승무원들은 지상에 비상사태를 통고하고 낙하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낙하산에 메달린 채 지상으로 낙하하는 웰치를 발견했으나 이미 그는 심각한 중상을 당한 상태였다.
팜데일 관제탑에서는 2개의 낙하산을 발견했는데, 1개는 기체에서 떨어져나온 감속 낙하산임이 밝혀진다.
관제탑으로부터 사고 소식을 전달받은 노스 아메리칸 테스트 파일럿 밥 베이커와 버드 포궤가 팜데일 활주로를 박차고 비상 출격하였다.
지상에서 발견된 웰치는 금속 파편에 치명적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조종석부분이 공중 폭발하였던 것이다. 결국 웰치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노스 아메리칸 사고팀은 사방에 흩뿌려진 기체 파편 수거 작업에 들어갔다.노스 아메리칸은 B-47 승무원들의 목격담을 듣고, 한편으로는 사고 원인 분석을위해 기체 잔해들을 이어붙이기로 하였다.
이어 11월 8일에도 플로리다 에그린 공군기지에서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1명의 조종사가 사망했고, 그다음날에도 사격 테스트에나선 프랭크 에모리 소령의 F-100A 수퍼 세이버(52-5771)가 추락하여 긴급 비상 탈출로 목숨은 건졌다.
2번의 대형사고를 포함한 총 6회의 사고가 발생하자 11월 10일, 공군은 모든 F-100A에대하여 비행 금지 명령을 내렸다.
긴급히 사고 원인 분석에 착수한 노스 아메리칸은 모의 테스트 비행을 준비했다.
기체에는 카메라가 장착되었고 기체가 분해되어도 조사 기기들은 정상 작동하도록 조치하였다.
카메라에 찍힌 꼬리 부분이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였지만 테스트는 계속 되었다.
풍동 테스트 기록결과는 냉혹하였다.
마하의 풍동 터널 속에 놓여진 기체는 수직 미익이 격렬히 흔들리다가 폭파 분해되어 버렸던 것이다.
마하의 속도에서 수직 미익과 방향타가 피치와 좌우 흔들림(요-yaw)현상 안정 능력의 부족으로 기체 통제력 상실을 우려했던 공군 테스트 파일럿들의 보고서가 현실로 증명된 것이었다.
원래 YF-100A는 고속 방향 안정을위해 대형 수직 미익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산형 F-100A는 설계 변경으로 인하여 크기를 줄였던 것이다.
사고 원인이 밝혀지자 노스 아메리칸은 마하 1.4에서의 비행 안정성 확대를 위하여 수직 미익의 면적을 27% 증가하고,
주익의 길이를 0.7m 연장하여 11.8m로 증가시켰으며 기체의 길이는 15.2m로 조금 더 증가하였다.
F-100A의 비행금지 명령은 1955년 2월에 해제되었다.
F-100A의 또다른 신기록은 1955년 2월 26일, 2438m상공에서 마하 1이상의 속도로 비행하던 노스 아메리칸 테스트 파일럿 조지 스미스가 기체 고장으로 긴급 비상 탈출, 마하의 속도에서 사출좌석으로 완벽히 탈출하는 기록을 세우게된다.
미 공군은 총273대의 F-100A를 주문하였으나 나중에 70대는 전투 폭격기형인 F-100C로 제작키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F-100A의 양산은 1955년 4월에 203대를 제작함으로서 완료되었다.
F-100A는 1958년 2월부터는 주방위공군도 장비하게되어 뉴멕시코주 제188전투요격비행대대에 처음 전달되었다.
공군은 수퍼 세이버를 단계적으로 퇴역시킬 계획이었으나 독일 베를린 위기가 발생하자 운용 연장키로 결정하여 1970년까지 운용한 후 전원 퇴역시켰다.
그리고 1958년 10월, F-100A는 대외 군사 원조 계획(MAP)에 따라 118대가 대만에 공급되었는데 이는 모두 F-100D형 수직 미익으로 대체된 기종이다.
또한 레이더 경고 시스템(RHAW)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대만 공군은 1979년까지 F-100A 수퍼 세이버를 운용하였다.
미공군은 1955년에 초음속 정찰/전투기를 원하고 있었고,
만약에 초음속 정찰기가 개발된다면 사용 중인 RF-84 썬더플래쉬와 RF-86 세이버 정찰기를 대체할 계획이었다.
그 당시 가용한 초음속 전투기는 F-100A 수퍼 세이버뿐이었다.
노스 아메리칸은 1955년 3월부터 4월까지 6대의 F-100A를 RF-100A정찰형으로 개조하였다.
동체 내의 M39 20mm 기관포를 제거하고 5기의 카메라가 장착되었다.
카메라 설치를위하여 동체하부가 증가되었으며 필름을 수납하기 위하여 측면도 약간 증가되었다.
제67전술정찰비행대 RF-100A 정찰기는 유럽과 일본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군이 성능이 더 좋은 RF-101 부두 정찰기를 도입함으로서 더 이상의 개조는 실시되지 않았다.
미 공군은 RF-100A 수퍼 세이버 정찰기를 대만 공군에 이관하였다.
출처 : 레프리카와 협력관계인 네이버 파워블로거 war file 님의 자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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