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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리 잠시 내방으로 들어오게.”
1996년 어느 가을날 , 다니고 있던 직장의 상무이사님이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을 조용히 자기 방으로 불렀다.
“조만간 회사 내에 큰 구조조정이 단행될 예정이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이참에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데 좀 도와 줄 수 있겠나?”
나이 사십 중반이라는 그리 오래지 않은 삶에서 나의 첫 번째 어려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정말로 구조조정 예고와 함께 대대적인 명예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몇몇 직원은 상무님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능력이 있었고 친화력이 좋아 사내에서도 따르는 사람이 많은 인기가 있는 분이었기에 충분히 잘 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했는가? 운이 없으려니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상무님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연이어 IMF가 우리나라를 덮치게 되면서 갓 시작한 회사는 6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다시 직장을 구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쉽게 될 줄 알았던 재취업의 기회는 생각만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까스로 찾아낸 회사도 IMF의 높은 파고를 이기지 못하여 몇 달을 다니지 못한채 부도를 내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 여기저기 직장을 옮겨봤으나 결과가 좋지 않았고, 휴직기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옥죄어오는 생활고에 자포자기(自抛自棄)하는 심정으로 구직을 포기하고 다른 방도를 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대전에서 유통업을 하는 손사장님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손사장님은 유통, 도매업을 가르쳐 줄 테니 판촉물 납품업을 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 특별히 해야 할 것이 없었던지라 손사장님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홀로 대전으로 내려와 손사장님에게 상품구매, 납품처를 개발하는 법 등, 판촉물 도매업에 대해서 배웠다. 약 일 년 정도 업무를 배우고 난 후 독립해서 대전에 조그만 사무실과 창고를 얻어 판촉물 도매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8년 말 경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거래처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1년여가 지나서는 제법 거래처도 늘어났다. 또한 납품하던 거래처가 다른 업체를 여러 곳 소개해 주기도 했다. 각고의 노력과 주위의 도움으로 매출이 조금씩 늘어 2, 3년 후에는 연 5~6억 정도의 비교적 안정된 매출과 이윤을 얻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의 고생은 없을 듯 했고 사업이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는 듯 했다.
그제야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탓에 사정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서울에 그대로 남겨두고 왔던 집사람을 대전으로 불렀고 조그만 아파트도 장만해 이사를 갔다. 이제 실직의 아픈 시련과 몇 년간의 방황을 딛고 예전의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003년경부터 국내 소비경기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카드대란이 온 것이다. 거시경제 지표야 어찌됐던 급격한 국내소비 경기의 하강은 우리 같은 판촉물업체에게 직격탄이었다. 소비자들의 지갑이 꽁꽁 닫히면서 시장에는 돈이 흐르지 않았다.
급기야 납품받던 업체들이 하나둘씩 폐업을 하기 시작했다. 한때 80 ~ 90 곳에 이르던 거래업체가 30곳 아래로 떨어졌다. 한 곳, 두 곳 부도업체가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악성 미수채권이 점점 늘어났다. 마침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업의 채산성이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한편 판촉물을 납품할 수 있는 대상업체가 점점 줄어들자 동종업자들끼리의 납품가격파괴와 덤핑납품 현상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듯 동종업체 간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더 이상은 판촉물 납품의 수익만으로는 사무실 운영경비를 충당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덩달아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보유한 여유자금도 제법 있었을 뿐 아니라 금융권을 이용한 담보대출도 받을 수 있었기에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이리저리 샘을 따져보니 총 가용할 수 있는 자산이 약 3억원 가량이었다.
고민 끝에 거래처 사장님의 권유로 월 평균매출이 삼천만원 이상이고 영업이익률이 30% 이상 된다는 건강식품 판매상을 인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래처의 재고상품과 영업팀을 인수하여 관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달 조금 팔리나 싶었던 상품은 얼마 있지 않아 거의 팔리지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도와주겠다던 거래처 사장님은 자신의 재고상품만 내게 안긴 채 슬쩍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서야 유행이 지난 상품이었고, 거래처 사장님이 재고 상품을 처리하기 위해 거짓정보를 제공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남의 말만 믿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예측으로 경험도 없이 성급히 뛰어든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면 실패가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야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기존 상품을 새로운 건강식품으로 교체하고 수금관리에 경험이 있는 직원을 새로이 뽑아 사업을 재정비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업사원들이 문제였다. 과도한 선급금을 요구하며 영업을 하지 않거나 태업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영업사원관리의 노하우가 전혀 없던 나는 이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먼저 도와주겠다고 속여서 자신의 재고를 처리했던 거래처 사장이 나타나 선수금을 주고 우리 영업팀을 매수해 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떠나 간 영업팀을 찾아가 이럴 수 있냐고 항변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 업계의 생리인지라 떠난 영업팀을 다시 데리고 오려면 그 쪽에서 받은 돈에 웃돈을 더 얹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젠 웃돈을 주고 영업팀을 데리고 올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마디 상의 없이 떠난 영업자를 웃돈을 주고 다시 붙잡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랴부랴 다른 영업팀을 수소문해 우리 사무실에서 일해 주길 요청했으나 여전히 웃돈을 요구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자금부족으로 다른 영업팀을 데려오지 못하게 되었고, 영업을 전혀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다시 원점인가? 악몽 같았던 수년 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을 찬찬히 다스리고 주변을 꼼꼼히 정리해 보기로 했다. 남은 것은 약간의 미수금과 관리 부실로 초래된 악성채권과 유동자산을 합쳐 오천만원 정도, 그것도 당장 현금화 할 수 있는 금액은 약 이천만원 뿐이었기에 그 동안 생각보다 많은 손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남은 것으로 무엇인가를 해보기에는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명 체인점이나 대리점 등 신규 사업을 하기에는 가지고 있는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뿐만 아니라 기왕에 하고 있는 일에서 나오는 이익이 조금이나마 사무실에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이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사업을 구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흘러갔고 가을 문턱에 이르러 추석이 다가왔다.
운명이었을까? 추석을 맞아 명절을 보내러 고향에 다녀 온 날 밤이었다. 11시가 넘어 몸도 마음도 피곤에 지쳐 일찍 잠을 청하였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아 TV를 켜게 되었다. 평소 잘 보지 않던 EBS방송을 무심결에 튼 순간, 그곳에서 이엠(EM)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운명이라는 말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때 EBS방송에서는 하나뿐인 지구라는 프로그램에서 ‘미생물 인간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특집 방송을 하고 있었다. 이엠(EM)으로 통칭되는 유용미생물로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 설거지, 빨래, 탈취, 세제, 유기비료, 수질정화 등- 을 보여주고, 이것이 얼마나 환경에 도움이 되는지를 실 예를 통해서 증명하고 있었다. 이엠(EM)은 일상생활에서 정말로 많은 부문에 활용되고 있었고, ‘저게 정말 가능하며, 그렇게 효과적일까?’ 하는 의문은 들었지만 나를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 만약 방송대로만 된다면 이엠(EM)을 이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을 것 같아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사무실에 출근한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이엠(EM)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선 인터넷을 뒤져 이엠(EM)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한편, 이엠(EM)을 구해 TV에서 말한 대로 쌀뜨물로 발효시킨 후 여직원과 함께 먼저 사용해 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정말 일상생활에 이엠(EM)이 접목되지 않을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사무실의 여직원도 덩달아 이엠(EM)에 매료되었고, 자발적으로 이엠(EM)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미생물에서 희망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그간의 자료 조사로 이엠(EM)을 가공제품의 원료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서 익히 알고 지내던 비누와 치약제조업체에 보내 시제품을 생산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시제품을 주위에 나누어주고 모니터링을 했다. 판촉용 상품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던 집사람이 샘플용 치약을 몇 번 써본 후에는 일곱 살짜리 딸에게 사용하던 유명 메이커의 유아용 치약 대신 내가 준 시제품 치약과 비누를 쓰게끔 하는 등,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것이다.’ 라고 생각한 나는 이엠(EM)을 사업화 하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구체적인 사업 계획에 착수하였다. OEM으로 제품을 생산하는데 3천만원, 인터넷 쇼핑몰구축, 판촉비, 사무실운영비등 으로 최소 5천만원의 자금이 필요하였으나, 가지고 있던 일부 자금은 대출이자, 사무실운영비 그리고 이엠(EM)시제품 개발비로 완전히 고갈되어 있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신념으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보고자 사업계획을 들고, 은행으로, 보험회사로, 2금융권으로 뛰어다녔으나 나의 사업계획은 뒤로한 채 보증인이나 담보가 필요하다는 대답만이 반복되었다.
백방의 노력이 허사되고 방황하던 때, 지인으로부터 중소기업청에서 소상공인의 창업과 육성을 지원해주는 제도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였고, 창업을 준비하는 자와 사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에게 사업컨설팅과 자금지원을 해 주는 소상공인지원센터와 부족한 담보를 해결하여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역신용보증 재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거창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아닌 나 같은 유통업자가 정부의 정책자금이나 보증기관을 이용할 수 있을지....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대전남부소상공인센터를 찾은 나는 이엠(EM)사업을 설명 하고, 상담사로부터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 상권분석, 컨설팅, 창업교육 등의 지원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5천만원의 자금 추천서와 자신감을 가지고 대전신용보증재단을 방문하였다. 사실 지인들로부터 들은 보증기관에 대한 선입견으로 불안한 마음이 있었으나 보증상담을 하면서 이내 안도되었다. 그동안 금융기관을 방문할 때 들었던 담보이야기는 뒤로한 채 사업계획에 대하여 귀 귀울여 주었고 사업전망과 사업의지 소요자금, 현재의 재무상황 등에 대하여 파악한 후 보증에 필요한 서류가 준비되면 현장실사 후에 보증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답변과 보증신청서류를 받아든 나는 다음날 바로 서류를 접수하였다.
며칠 후 대전신용보증재단에서 사업체를 실사하겠다고 연락이 오고 시제품과 그동안의 거래처관계 등을 세밀하게 파악해간지 1주일 만에 오천만원이라는 대출보증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시중 자금보다 훨씬 저렴한 이자와 상환조건으로. 한동안 풀이 죽어있던 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젖 먹던 힘까지 솟아나는 듯 했다.
이것이 작년(2005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 동안 고민해오던 사업자금을 보증서를 통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고 계획대로 이엠(EM)사업화에 투입하였다. 우선 치약과 비누를 OEM으로 생산키로 하고 준비하는 한편, 판로와 선전을 위해서 인터넷상에 이엠(EM) 전문 쇼핑몰을 준비했다. 드디어 작년 연말에 처음으로 치약과 세안비누가 생산 되었고, 쇼핑몰emmanin.com도 인터넷에 선보이게 되었다.
2006년초 가루비누와 빨래비누 등의 세제 상품을 더 개발하여 인터넷 쇼핑몰인 emmanin.com 에 올렸다. 그런데 너무 기대가 컸던가? 생각만큼 매출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엠(EM)이라는 너무 생소한 재료로 만든 제품이라서인지 판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열심히 판촉활동도 했고 여러 거래처를 돌아 다녔지만 처음 두어 달의 매출은 너무 초라했다. 언뜻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인테넷 쇼핑몰인 emmanin.com의 방문객수와 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이 조금씩 증가되는 것만으로도 열정을 불사르는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쇼핑몰을 방문한 고객의 문의에 밤을 새워 답을 해주고 문제점을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하늘도 돕는다고 했던가? 그렇게 두어 달이 흘러 큰 행운이 찾아왔다. 2월 중순 경 SBS의 아침 방송에서 이엠(EM)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활용법이 방송을 타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방송을 본 적잖은 사람들이 이엠(EM)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했고, 이 궁금증들이매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터넷 쇼핑몰에서만 매출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프라인으로도 조금씩 주문이 들어왔다. 그리고 사용해본 고객들의 좋은 평판이 재주문 뿐만 아니라 주위 분들에게 소개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꾸준한 매출 증가는 마침내 지난달 월간매출이 천오백만원을 넘어 서게 되는 등 가파른 매출 증가를 기록하여 누적 매출도 1억원을 넘게 되었다.
이엠(EM)을 처음 접하여 준비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기왕의 판촉물 사업도 조금 호전이 되어 얼마전에는 대출자금 중에 천만원을 미리 상환하는 기쁨도 누렸다. 아직은 성공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연말쯤에는 홈페이지도 새롭게 단장할 예정이고, 조그만 공장을 세워 이엠(EM)을 이용한 제품 몇 가지를 직접 만들어 볼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예정대로 된다면 연말쯤에는 대출자금의 일부를 더 상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소상공인지원센터의 컨설팅과 대전신용보증재단에서 보증해준 사업자금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약 소상공인지원제도가 있는지 조차 몰라 자금에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면, 이엠(EM)이라는 좋은 사업의 소재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냥 흘리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 지면을 빌어 사업자금을 지원해 주어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나갈 수 있게 도와준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아마도 나처럼 자금 때문에 애로를 겪고 있는 사람이 도처에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관계자 여러분의 수고로움으로 그런 분들을 도와주어 자영업자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