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아연
|
1963년 대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
1992년 호주로 이민온 후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있다.
시드니에서 양식당 <라 포자>를 꾸리며 한국의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
김근태 고문을 생각하며- 신아연
2012. 1. 12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이제 영면에 들어가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 고문이 요즘 문득문득 생각납니다.
그분의 별세가 분노와 죄의식,
빚진 마음을 느끼게 한다는 세간의 말들에 나 또한 그러하다는 ‘말부조’는 못할망정
그러한 위무의 말이 제게는 마치 구슬프고 서러운 진혼곡처럼 들립니다.
더러 만났거나 아니 만났으되 만난 것과 진배없는 가엾고 서글픈 인연들이
김 고문의 죽음으로 인해 헐벗은 혼령처럼 너울대며 다시금 의식 안으로 걸어들어 온 탓입니다.
김 고문의 이름 앞에 떳떳이 놓인 ‘민주주의자’라는 수식어가
그분이 흘린 피의 대가인 양 선명하고 달라진 세상의 새 명패 같아 감격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굴비 두름으로 엮여 고통받던 가족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추 30년 전쯤,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 씨를 비롯하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만났던
그 가족들 말입니다.
더러는 눈빛만큼은 형형했지만 국가로부터 무단히도 미움과 트집을 잡히며
가난하고 남루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남편과 자식, 형제의 기한없는 옥살이에 기다림에는 이골이 났다면서도
그 고통의 분량만큼 희망 또한 옹골지게 키우던 사람들 속에 저 또한 섞여 있었습니다.
전에 한 번 글에 쓴 적이 있지만
1968년 8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1988년 8월,
올림픽 특사로 가석방된 제 선친의 가족 대표로
그때 대학교 3학년이었던 제가 민가협 회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학시절 내내 꽁무니에 형사가 따라 다니는 데다
저의 동향에 대해 학과장에게는 보고까지 요청해 놓은 상태에서
데모라도 있는 날은 특별 감시에 들어가고
어떤 때는 집에까지 쫓아오니 저는 저대로 어둡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 날은 으레 어머니도 일하다 말고 불려와 담당 형사에게 문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몇 달 간격으로 정해진 날짜에 찾아오는 공안담당 형사에게 "그런 일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 연결도 없어요...,그러믄요..."
죄인 아닌 죄인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끝을 흐리시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그런 날은 덤터기를 써야 하니 더 속이 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절이 보다 살벌했을 때는 동네 사람 눈이 무서워 6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전학도 '밥 먹듯' 해
제 작은 언니의 경우는 초등학교를 예닐곱 번이나 옮겨 다녔습니다.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어머니가 싫어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 우리 형제들은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도 없었습니다
양팔을 간격있게 벌려 우뚝 선 채 버스의 동그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버지 고문당하던 모습이 생각나 몸서리가 쳐지는데
그 상태로 하도 맞아서 눈알이 빠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는
어머니 말씀도 새삼 떠오르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던 취조실 석탄 난로를 엉겁결에 껴안아 얼굴에 중화상을 입었다는 서준식 씨,
남편의 사형선고에 충격을 받아 아내가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들도 거기서 들었습니다.
잔혹한 고문을 거친 장기수, 양심수의 가족들이라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
저는 가장 어린 회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민가협의 ‘잔다르크’는 아니었고
그 무렵 유난히 지쳐 하시던 어머니께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드릴 길이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아예 체념을 해야 하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자투리일망정 조금치라도 시국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민가협에서는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당시 제1 야당 부총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셨는데
그분은 제게 여성지 같은 데에 딸의 시각으로 수기를 쓰는 것이
‘윗선’을 건드리는 가장 호소력있는 방법이라고 조심스레 제안하시며
하지만 가뜩이나 연좌제가 있는데
그런 글로 인해 이담에 혼인할 때 더 지장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때 수기를 쓰지 않아서 그랬는진 몰라도 멀쩡히,
그것도 적령기에 저는 결혼을 했고
아버지와 같은 사건으로 복역 중이시던 신영복 선생의 글과 그림을 옥중 결혼 선물로 받아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시작된 아버지의 옥살이가 스물여섯 결혼하던 그 해에 끝이 났으니
돌이켜보면 참말로 ‘징한’ 세월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 ‘어치케 살았을꺼나’ 하고 혀를 차며 동정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구름 속에 있으면 구름을 모르듯이
저희 가족들 또한 ‘보통 사람들’처럼 울고 웃으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만 요즘처럼 아버지와 비슷한 일을 겪은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로 인해 그 가족들의 고통이 다시금 떠오를 때
묵은 상처가 들춰지며 한동안 울울한 심회에 젖게 된다는 점에서
안 겪어본 사람은 짐작할 수 없는 속내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김근태 고문의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상상할수 없는 힘든과거의 역사가 있었군요.
그럼에도 "안겪어본 ~ 단지 속내하나를 더..." 어떻게 이런표현을 할수 있는지요? .........
글을 읽는동안 울분이 폭발할뻔했슴다, 이런 쳐죽일놈들!! 일단 진정좀 해야겠어요. 푹 푹 ㄱ ㅅ ㄲ ㄷ
군화발로 민초를 짓밟던시절 역사는 신아연님의가정을 택하여 쓰셨군요.정의를 사수하려는 선열들의 숭고한 피흘림이 있었기에 민주화의꽃을 피워가고있읍니다.진실이 숨을쉬고있고 또한 그를 밝히드러내려하는이들에 의해 역사는 바르게 써내려왔읍니다. 그들의 피의흔적위에 오늘 우리가 서있읍니다. 고인의 영령앞에 다시 고개를 숙입니다.
가슴이 아리네요, 그당시 젊은시절의 우리는 분노를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피흘려 민주화를 이룬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존경을 전합니다
아.....
그런 아픔이... 민주화의 꽃은 그 피의 댓가 위에 피워진거겠죠.... 숙연함과 민주주의의 소중함, 그 댓가를 치루신
많은 분들에 대한 감사함이 들었습니다.....
일제시대 독립을위해 투쟁을 하다가 죽어간 그분들의 자녀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적이
있습니다. 일제 앞잡이들의 자식들은 많이 배우고 잘먹고 잘살아서 후대에도 잘살고, 이 나라를 찾는데
앞장섰던 그분들의 자녀들은 매맞고 쫓겨다니며 배우지 못해 힘든세월을 살고있다는데 지금은 그분들에게
누가 빚을 갚아야 하나요? 또한 이후에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 그분들과 후손들에게 우리는 빚진자입니다
아 ! 이런일이?
상상이 안되요 아마 저같으면 정신병원에라도, 존경합니다
반칙이 없는 세상이기를.... 위로 드리고싶습니다
죽일놈 덜 !!
참으로 힘든 세월 사셨군요. 국가의 폭력은 정권 유지를 위해 사용되어지고있죠 후진국이기에 ....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장면들 이군요.
다시봐도 가슴이 찡합니다... 울먹이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해는 되는데요 사실 실감이 나지는 않네요 후진국의 먼나라 이야기같아요 ... 그렇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우리 자녀시대에는 절대로 이런일이 없기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되기를
남한의 극우세력과 북한의 극좌세력이 남북한의 분단과 긴장관계를 서로 권력유지 기반으로 사용하는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을 막고 있다는것은 알만한 국민은 다 안다는..... 그러다보니 희생양의 도구로 사용하는것. 개 쉐이덜, 욕나오는거 굳이 참지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