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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공무원 문예대전 최우수 국무총리상 수상작)
청 산 도
나오는 사람들
정선생(28세 교사)과 부모, 청자(20세 하숙집 딸), 광자와 명자(청자 친구들), 청자 어머니 박씨, 청자 아버지 곽씨, 성기사(한전 근무), 김선생(초등교사), 명자 부모님, 아이, 동네청년1,2,3
무대
중앙에 하숙집 대청마루 마당, 마루 오른쪽 왼쪽에 하숙방, 무대 왼편에 유체꽃밭 그 위로 갯바위가 있다. 막이 열리면 금방 물질을 마치고 온 듯, 해녀복을 입은 청자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해물을 손질하고 있다.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린다.
청자 : (노래) ♬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청산도 아가씨
정선생 등장. 가방과 짐보따리를 들고 있다.
정선생 : 아가씨, 여기가 하숙집 맞습니까.
청자 : 예, 맞는데요. (정선생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속으로) 옴마야, 참 잘 생겼네. (얼른 얼굴을 고치고) 하숙 하러 오셨나요. 이리 들어오세요.(만면에 웃음을 띠며 짐을 받고 안방을 향해 외친다.) 엄니, 손님 오셨어요.
안방 문이 열리고, 박씨 얼굴을 내민다.
박씨 : 어서 오시우.
정선생 :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신세 지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청자 : (독백으로) 옴마야, 예의도 바르셔라. 그리고 잘 부탁하는 거는 또 뭐래? 내가 먼저 잘 부탁드릴 판이구만.
정선생, 박씨 안내 받으며 왼쪽 방으로 들어간다. 청자, 신난 듯 전복을 썰어댄다.
청자 : 아무래도 선생님 같지? (박씨에게) 엄니, 누구시데여?
박씨 : 이번 중학교에 발령 받은 선생님이시란다. 왜 관심 있냐?
청자 : 참말로 엄니는 못할 말이 없네. 아, 집에 온 손님 직업이 뭣인지 물어도 못 봐?
박씨 : 그래그래, 온 성기사가 그렇게도 쫓아다녀도 모른 척 하더만.(눈을 흘긴다.)
청자: (못들은 척) 전복 있는데 술상 좀 볼까, 엄니?
박씨 : 그래라.
이때 김선생, 성기사 입장.
성기사 : 손님 왔다고요?
박씨 : 옴마, 언제 벌써 알았디야?
성기사 : 부두에서 하숙집 찾는다는 말 들었지요. (정선생 마루로 나온다)
정선생 : 처음 뵙겠습니다.
성기사, 김선생이랑 인사를 나누는 동안, 청자 옷을 곱게 갈아입고 술상을 들고 나온다. 그때 광자 명자 대문간에서 안을 훔쳐보며 가만가만 청자를 부른다.
광자 : (다가온 청자에게 가만히) 얘, 청자야. 누구야?
청자 : 응, 이번에 온 중학교 선생님.
명자 : 옴마야, 잘 생겼다아.
청자 : (명자 머리를 쥐어박으며) 넌 네 꺼나 신경 쓰세요.
박씨 : 누구 왔냐?
청자 : 아니, 아니오. (명자, 광자 급히 퇴장)
이윽고 마루엔 술판이 벌어진다. 박씨도 합류한다.
김선생 : (성기사를 돌아보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하숙집 입소 기념 신고식 합시다.
성기사 : 좋아 좋아.
정선생 : 신고식이오?
박씨 : 이 집 전통이라우. 한번 잘 살아보자는 뜻으로 온 사람마다 한다우.
정선생 :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성기사 : 뭐 어렵게 생각할 것 없구. 술 사고 노래하고 하면 되는 거유. 술이야 소주 댓병으로 몇 병 사면 되고, 안주야 지천으로 있으니께. 자, 먼저 노래부텀 부르시오.
성기사 젓가락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재촉한다. 박씨도 어깨춤을 춘다. 정선생, 마지못해 일어나 노래를 부른다. 제법 잘 부르는 솜씨다. 청자, 부엌에서 엿들으며 좋아서 입이 찢어진다. 밖에선 광자 명자가 와서 듣는다. 노래 합창소리가 어울려지는 가운데, 바다에 나간 아버지 곽씨가 돌아온다. 어깨엔 그물, 손엔 물고기 몇 마리가 들려있다. 광자 명자 뒤에서 에헴 헛기침을 한다. 광자 명자 놀라서 도망간다. 마당으로 들어서며
곽씨 : 웬 잔치판이디야?
청자 : (얼른 나와 고기를 받으며) 중학교로 발령받은 선생님이 오늘부터 우리 집에 하숙을 한대요.
곽씨 : 그려?
곽씨를 발견하고 모두 자리에 일어선다.
정선생 : 잘 부탁합니다.
곽씨 :(반갑게) 어따, 훤출한 청년이구마. 선생님이시라고?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귀한 손님이 왔는디, 얘 청자야!
청자 : 예, 아부지.
곽씨 : 너, 시방 오늘 잡아온 감성돔 모두 다 썰어라. 한번 허리끈 풀고 먹어 보자아.
곽씨, 잔을 돌리는데 정선생에게 뭔가 은근한 표정이다. 박씨도 정선생 곁에 앉아 있다. 성기사 눈치를 채고
성기사 : 제기, 오늘부터 인물 잘난 놈 덕 좀 볼란가비네. (그러나 얼른 장단을 맞춘다.)
무대 마루 쪽이 점점 암전되면서 유채꽃밭이 밝아진다. 노래 소리만 자그마하게 들려오고 있다. 청자, 집쪽을 돌아보며 유채꽃밭으로 온다. 곧 광자 명자 등장.
명자 : (좋아서 몸을 비비 꼬고 있는 청자에게) 청자야, 너 새로 온 정선생이 마음에 드는 거냐?
청자 : (배시시 웃으며) 응.
광자 : 성기사는 어떻게 하고.
청자 : 성기사야 광자 네 것 아니니?
명자 : 난 김선생님이 좋아.
청자 : 그래, 알았다 알았어.
광자 : 잘 될까?
청자 : 그야, 너네들 하기 나름이지.
광자 : 청자야.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잔 말이지?
셋이 쑥덕거린다. 이윽고 환하게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청자는 무대 오른쪽으로, 광자명자 무대 왼쪽으로 퇴장.
무대 밝아지면, 아침이다. 정선생이 수건을 두르고 마당으로 나온다. 청자, 부엌에서 나와 인사를 한다.
청자 : 잘 주무셨어요, 선생님?
정선생님 : 아, 네에.
이윽고 하숙집 사람들이 마당으로 모두 나온다. 가벼운 체조부터 세수까지 각자 할 일을 하는 동안 마루에 아침 밥상이 차려진다. 아침 드시라는 청자 목소리에 차례차례 밥상에 둘러앉는다. 말없이 밥을 먹는다. 속이 쓰린 듯 김선생이 배를 만진다.
김선생 : 아이고 나 죽겠네.
성기사 : 나도 눈에서 술이 뚝뚝 떨어지우.
김선생 : 근데, 정선생은 멀쩡허네?
성기사 : 노래 부르느라고 술 마실 시간이나 있었간디?
정선생, 빙그레 웃으며 밥을 먹는다. 청자 물그릇을 들고 와서 내려놓는다.
청자 : 근디 김선생님, 혹시 오늘이 선생님 생일이 아닌가요?
김선생 : (화들짝 놀라며) 아니 그걸 어떻게?
성기사 : 생일이라니, 정말이오?
청자 : 명자가 그러던디.
성기사 : 아니, 어떻게 알았디야.
곽씨 : 그거사 학교로 알아보면 금방이제. 그까짓 것쯤이야.
박씨 : 그럼 잔치 벌여야제. 뭐 좋아하신당가?
곽씨 : 내 오늘 바다에 가면 ‘샛서방 괴기’ 몽땅 걷어 올 것이여.
청자 : 아니어요. 명자가 오늘 물질하러 간대요.
김선생 : (싫다는 듯) 아니, 명자씨가 뭐하러 그런 일까지 합니까?
성기사 : 아따, 좋아하는 모양이제.
김선생 : 그러니까, 명자 씨가 왜 날 좋아하느냐고요.
성기사 : 그걸 몰라서 그러요? 사랑이란 것이 이유 따지고 하는 것인가?
박씨 : (곁에서 듣고 있다가) 아무렴, 그것이 그렇고 그런 것이제.
성기사 : (박씨 말에는 아랑곳없이) 청자씨, 안 그러요?
청자 : 나요? (상 들고 나가면서) 나 그런 것 몰라요. 성씨 아저씨나 많이 아세요.
성기사 :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쉰다) 나이가 죄지.
김선생 : (같이 한숨을 쉬며) 총각이 죄지.
곽씨 : 꼴값들 하네. 아, 어서들 출근이나 허겨. 난 오늘 문어 통발이나 걷어 볼라니까, 일찍들 오셔.(퇴장)
잠시 후, 정선생이 가방을 들고 출근한다. 청자 부엌문 앞에서 가만히 손을 흔들고, 이어 김선생 성기사 순으로 퇴장. 집에는 박씨하고 청자만 남아 있다. 광자 명자 해녀복으로 등장.
광자 : 얘 청자야. 우리 물질하러 간다.
청자 : 응 그래. 어서 갔다 와.
명자 : 그동안 준비는 네가 다 해라이.
청자 : 염려 마.
광자 명자 퇴장하자 명자네 부부가 들이닥친다. 그리곤 청자와 몇 마디 소곤거리고 희희낙락이다.
명자 부 : 아예 우리 집안 사위 삼아버린다 이거제?
청자 :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쉬잇!
명자 모 : 고맙다, 청자야.
청자 : 아따, 아주머니도 참. 그 대신 내 일도 잘 부탁해요.
명자네 부모 퇴장하고, 청자 부엌으로 들어간다. 이내 도마소리가 요란하다. 소리 요란한 가운데 김선생과 정선생이 퇴근하여 들어온다.
정선생 : 다녀왔습니다.
청자 : (얼른 나와서 정선생 가방을 받아든다.) 어서 오세요.
김선생 : 내거는 안 받아 주나요.
청자 : 받아줄 사람 따로 있대요, 김 선 생 님 ! (강조하듯이 또박또박 끊어서 말한다.) 하여튼 어서 씻기나 하세요.
김선생, 정선생 마루에 앉고 성기사 들어온다. 성기사 손에 커다란 가오리가 들려 있다.
성기사 : 도락리 가는 길에 한 마리 얻어왔지. 하숙집 동지 생일인데, 그냥 말 수야 있나. (부엌, 박씨에게 건네준다.)
박씨 : 제법 크네.
정선생, 가오리 크기에 놀래 입을 벌리고 있다.
정선생 : 저게 짐승이야, 물고기야?
김선생 : 저건 아무 것도 아니라우. 두께가 한 뼘도 넘은 것도 있어요. 사람 두 팔 벌린 것보다 더 크니까. 2미터도 더 넘지요.
곽씨, 등장. 굉장한 물건을 메고 있다. 엄청난 크기의 문어다.
김선생 : 아저씨, 그것도 통발에 들어가 있었습니까?
곽씨 : 아냐, 이건 해녀들이 잡은 거야.
이윽고 광자, 명자 해녀복 차림으로 바구리를 이고 들어온다.
명자 : 청자야, 고기 가져 왔다.
청자, 나와서 바구리를 본다.
청자 : 이게 뭐야. 해삼 전복 …. 이런 속 보인다 속보여. 전부 정력에 좋다는 것뿐이네.
광자, 명자 웃으면서 급히 퇴장. 무대, 어두워진다. 청자가 광자 명자를 부르는 소리에 맞춰 무대, 밝아진다. 마루에 술상을 둘러 하숙집 식구들이 앉아있다. 광자, 명자 등장한다.
광자 : 김선생님, 축하해요오.
명자, 선물을 내민다. 그리곤 히, 웃으며 청자 뒤에 숨는다. 청자, 얼른 명자를 김선생 옆으로 밀어댄다.
청자 : 김선생님, 술 한 잔 받으세요.
드디어 노래가 쿵짝거리고, 사람들은 모두 슬로우 모션으로 마시고 붓고 따르고 춤추고 하다가 술에 취해 김선생, 성기사 순으로 하나 둘 쓰러진다. 곽씨와 박씨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정선생도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간다. 청자와 명자, 광자만 남는다.
청자 : 자, 시작하자. (명자를 돌아보며) 맘 크게 먹어라이.
명자 : (고개만 끄덕끄덕 한다.)
셋이서 마루에 쓰러진 김선생을 들고 오른쪽 방으로 간다. 오른쪽 방에는 이부자리가 펴져 있다. 명자를 남기고 둘은 나온다. 마루엔 쓰러져 자는 성기사만 있다. 광자, 성기사 볼에 뽀뽀한다.
광자 : 안뇽, 내 서방님. 다음 차례는 당신이야용.
청자 : 하이고, 가시내. 얼른 가자아! (광자를 끌고 나간다.)
잠시 후, 청자 광자가 명자네 부모들을 데리고 들어온다.
명자 모 : (들으란 듯이) 아이고, 청자야. 우리 명자 어디 있냐!
명자 부 : 명자야, 명자야!
안방문이 열리고, 박씨 곽씨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온다.
곽씨 박씨 : 뭔 일이여.
명자 부 : 우리 명자가 여기 있다는 게 사실이여? 대체 어느 놈 방에 있어 ,응?
청자, 김선생 방을 가리키면서
청자 : 우린 몰라요.
광자 : 알아도 몰라요.
명자 부모, 방문을 열어젖힌다. 불을 켠다. 명자, 김선생을 꼭 껴안고 누워있다. 김선생도 알몸이다.
명자 모 : 에그머니, 이게 무슨 꼴이야. (꼭 껴안고 있는 명자를 보고) 세상에나 우리 집안 망했네, 아이고.(주저앉는다.)
명자 아버지, 김선생을 발로 차서 깨운다. 김선생, 잠결에 두리번거리다가 알몸인 것을 확인하고 기겁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명자도 같이 숨는다.
김선생 : (이불 속에서) 아, 어서 나가요. 아버지가 부르시잖아요.
명자 : (같이 이불 속에서) 나 혼자 어떻게 나가요.
명자 부 : (열통이 터진다는 듯) 아, 어서 안 나와?
김선생과 명자, 고개만 내밀고 두리번거리다가 명자 아버지가 이불을 확 걷어버리자, 할 수 없이 알몸으로 꿇어앉는다. 명자 아버지 곽씨를 보며
명자 부 : 형님 내외분은 증인을 서 주시요.
곽씨 박씨 :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렴, 서고말고.
명자 부 : 이제 어쩔텨, 엉!
명자 모 : 내 딸 신세 조져부렀네.
김선생 : (정신없이 머리만 조아린다.)
명자 부: 소위, 가르친다는 사람이… 말이여.(하면서 씩씩거리며 다그친다.) 아, 어쩔텨!
박씨가, 가엽다는 듯이 혀를 찬다. 청자 광자, 돌아보며 웃음을 참는다. 이윽고 박씨가 나선다.
박씨 : 사나이 대장부가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제.
명자 부 : (그래도 말이 없자 벌떡 일어선다.) 책임 못 질 거여?
김선생 : (싹싹 빌면서) 책임져야지요. 책임집니다.
청자 광자, 두 손 올리며 소리 없이 만세를 부른다. 잠시 후, 옷을 단정히 입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명자 아버지 일장훈계를 하고 있다.
며칠 후 대낮, 청자 혼자 집에 있다. 명자가 들어온다. 싱글벙글이다.
청자 : 신혼 재미 좋은가 보구나?
명자 : 첨엔 안 온다고 버티더니만, 인자는 나 없으면 못 산대.
청자 : 하긴, 아저씨 아주머니가 오죽이나 잘 할까.
명자 : 그 다음날 아버지가 억지로 데려오기를 잘 했제.
청자 : (웃으며) 옷보따리 들고 졸랑졸랑 따라가던 모습 훤하다야. 근디 그날 밤 허긴 혔냐?
명자 : (킥킥거리며) 그것도 술 취했더라야.
이때 광자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둘에게 삿대질을 한다.
광자 : 난 어쩔 거여!
명자 : 이 가시내 급하긴 급했구나.
광자 : 아, 어쩔 거여. 나도 다 준비 됐는디.
청자 : 그러면 오늘 밤에 일 치룰까. 광자, 너 내가 시킨 대로 해라이. 머스매들 몇 준비 시켜 놓고. 알았제?
광자 명자 퇴장. 박씨 곽씨가 들어오자 몇 마디 귀엣말로 일러준다. 곽씨 박씨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며 나간다. 정선생이 들어온다. 청자 낚싯대를 들려주며 갯바위를 가리킨다. 정선생 유채밭을 지나 갯바위로 가 낚싯대를 드리운다. 성기사 마침내 들어온다.
성기사 : 다녀왔습니다. 어? 근데, 다들 어디 갔나봐요.
청자 : 아, 네에. 저 엄니 아부지는 초상 난 데 갔구요. 정선생님은 낚시 갔어요. 저도 지금 초상집에 가려구요. 밥은 차려놨으니 드세요.
청자, 나간다. 성기사,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물리고, 방에 들어가 드러눕는다. 김선생이 가고 난 뒤라, 오른 쪽 방은 혼자 쓰고 있다. 빗소리가 들린다. 담배를 피다가 끄고 책을 본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광자가 등장한다. 두리번거리다가 불이 켜진 성기사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문고리를 잠근다. 비에 젖어 온몸이 드러나 보인다. 성기사 자리에 일어나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광자 : (두려운 듯이) 저 좀 있게 해주세요, 제발.
성기사 : 뭔 일 있어요?
광자 : 묻지 마시고 그냥 좀 있게 해 줘요.
성기사 : (가엾다는 듯) 그러지 말고, 이리 아랫목으로 와서 옷이나 말려요.
광자 : 그래도 될까요.
하면서, 슬금슬금 성기사 곁에 앉는다. 성기사 몸을 피한다.
광자 : 아, 추워라. (갑자기 손을 내밀어 성기사를 끌어안는다.) 따뜻해요, 우리 서방님.
성기사 : (기겁을 하면서 떼어놓으려 한다) 광자 씨. 이거 좀 놔요. 숨이 막혀요.
광자, 성기사를 쓰러뜨리고 올라탄다. 이때 청자 방문으로 다가가 동정을 살핀다. 이내 미소를 띠며 나간다. 곧 동네청년들이 들이닥친다.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있다. 성기사 방문을 발로 차며 소리소리 지른다.
동네청년1 : 문 열어, 이 잡것들.
동네청년2 : 광자 여기 있는 줄 다 알고 왔어. 문 열어 문!
동네청년3 : 성기사 , 너 죽는다이 !
광자 끄떡도 않고 성기사를 누르면서 자기 치마를 찢고 있다. 성기사,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윽고 문이 부셔진다. 청년들, 방안으로 들어온다. 광자, 얼른 구석으로 피하면서 울먹인다. 성기사 멍하니, 영문을 모르고 앉아있다.
동네청년1 :(광자 찢어진 치마를 들어보며) 요것들 봐라?
동네청년2 : 하, 성기사 이놈아 광자하고 거시기 하고 있었던 것 아녀?
동네청년3 : 일어나, 임마.(하면서 성기사 멱살을 잡는다.)
성기사 : 살려주세요.
동네청년1 : 멋이여? 요놈의 새끼. 감히 청산도 처녀를 털도 안 뽑고 따먹어? (몽둥이로 친다.)
광자 : (울면서) 오빠, 허리는 치지 마요.
동네청년2 : 알았다. 거기만 빼고 반 작살 낼란다.
성기사 비명을 지르면서 엎드린다. 어느새 청자와 곽씨 내외, 들어와서 듣고 있다. 동네청년들 엎드려서 빌고 있는 성기사를 내려다본다.
동네청년2 : 하, 요것이 살고는 싶은 모양이네그랴.
동네청년3 : 그냥 경찰서에 넘겨 버리지 그래. 어이, 배 엔진 걸게. 이노무시키 완도로 데려가서 경찰서에 넘기자고.
그때 곽씨 내외와 청자, 황급히 들어온다. 성기사 곽씨 내외를 보고 얼른 뒤에 숨는다.
곽씨 : 성기사, 이게 무슨 일인가.
성기사 : 나도 몰라요. 광자 씨가 살려주라면서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
동네청년1 : (눈을 부라리며 몽둥이를 치켜든다.) 멋이여? 요노무시키가 바른 대로 말 안 해?
성기사, 다시 숨고, 박씨가 찢겨진 치마를 들어보며
박씨 : 힘도 좋네 그려. (광자에게) 안 아프댜?
광자 : (흘겨보며) 아주머니도 참. 몰라유!
동네청년 2: 너 죽을래?
곽씨 : 아, 그러지 말고. 우리 흥분을 가라앉히고 앉아서 차근차근 이야기 하세.
동네청년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몽둥이를 흔들면서 연신 협박이다.
곽씨 : 어이, 성기사. 아무래도 자네가 일을 벌여도 크게 벌여 놨네 그려. 아, 생떼 같은 처녀를 욕을 보였으니, 이제 그만 책임지소.
성기사 : (숨 넘어 가는 소리로) 난 억울하요.
동네청년들 : (일제히) 요것이, 콱!!!
성기사,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있고, 광자는 혀를 낼름거리며 득의양양한 표정이다. 이윽고 무대 암전.
무대 밝아지면서, 박씨 푸념이 시작된다.
박씨 : 남 좋은 일시키고 나니, 인자는 내 딸이 문제일세 그려. (부엌에 대고) 청자야!
청자 : 왜유, 엄니.
박씨 : 너는 어떻게 할겨?
청자 : 다 계산이 되어 있어유.
박시 : 정말?
청자 : 하여튼 지켜만 봐유.
박씨 퇴장. 청자, 낚싯대를 챙긴다. 아이 한 명이 미끼를 가져다준다. 준비가 끝난 듯 청자가 채비를 둘러보며 미소를 짓는다. 정선생이 들어온다. 청자, 달려 나가 살갑게 맞이한다.
청자 : 오늘이 물때가 아주 좋은 날이래유.
정선생 : 미끼는요?
청자 : 그것도 준비 됐어요.
정선생 : 그럼 일찍 나갈까요.
정선생이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갯바위에 달이 밝는다. 청자 정선생 손을 잡고 유채밭을 지나 갯바위로 올라간다.
청자 : 릴은 원투로 던져놓고요. 우린 장대로 찌낚시 해요.
정선생 : 그러지요.
정선생이 릴을 던져 고정시킨다. 청자도 장대를 들고 있다. 고기를 마구 잡고 있다.
청자 : 선생님, 조심하세요. 갯바위가 물먹으면 아주 미끄러워요. 밤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대요.
정선생, 릴을 놓고 와서 장대를 던진다. 역시 고기가 정신없이 문다.
정선생 : 와, 참돔이다.
청자 : 저는 혹돔 잡았어요. 호호호!
이때 갑자기 릴이 울린다. 정선생 장대를 놓고 황급히 릴을 감는다. 그러나 아주 애를 쓰는 모양이다. 이때 명자, 광자 살금살금 정선생 뒤로 다가간다. 정신없이 릴을 감는 정선생을 살짝 밀어버린다. 정선생, 갯바위에서 요동치다가 요란한 비명을 울리며 바다로 빠져버린다. 명자 광자, 청자에게 V자를 만들어 보이며 퇴장.
정선생 : 사람 살려요!
청자, 갯바위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는다. 그리고 벗은 옷을 크게 돌리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친다. 달빛에 하얀 알몸이 선명하다. 지나가는 배 발동소리가 들린다. 명자 아버지 배다. 배에서 비추는 서치라이트에 알몸으로 날뛰고 있는 청자가 잡힌다. 명자 아버지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명자 부 : 저거, 청자 아녀?
명자 모 : 어서 가봅시다.
배가 다가온다.
명자 부 : 청자야! 너, 거기서 뭐하고 있냐?
청자 : 사람이 빠졌어요.
명자 부 : 멋이여?
명자 모 : 대관절 빠진 사람이 누구여?
청자 : (울면서) 정선생님이어요.
명자 부 : 정선생님?
청자 : 네에, 어서 건져주세요.
명자 모 : 아, 저기 있네, 저기.
명자 부 : 어디? 아, 저기. 정선생님 조금만 기둘리소야. 곧 건져드릴 테 니께.
잠시 후, 명자네 부모가 갯바위로 올라오고 정선생이 끌어올려진다. 청자, 얼른 가서 알몸으로 정선생을 감싸안는다. 그리고는 급히 인공호흡을 한다. 정선생, 꿀럭거리며 물을 토한다. 청자, 다시 감싸 안는다.
청자 : (훌쩍거리며) 정선생님….
정선생 : (정신을 차리고, 청자의 알몸을 바라본다. 이윽고 사정을 깨달은 듯, 감격해 한다.) 나를 그토록 살리고 싶었나요?
청자 : (고개를 끄덕이며) 네에 선생님. (정선생 품에 안긴다.)
광자, 명자 갯바위 밑에서 쾌재를 부른다. 명자네 부모도 박수를 친다. 청자, 정선생을 부축하고 나머지 모두 갯바위를 내려와 퇴장한다. 무대엔 달만 밝다. 암전.
무대, 다시 밝아지면서 기적소리가 들리고, 왼편으로 정선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등장한다.
정선생 모 :(걸음을 멈추며)아 글쎄, 내 귀한 자식 살리려고 애쓴 처자가 그래, 그때 알몸이었단 말이지?
정선생 : 네에. 그래야 알몸이 밤에는 잘 보이거든요.
정선생 부 : 얼마나 장한 일이냐 말이여.
정선생 : 성정도 밝고 순수해요.
정선생 모 : 섬처년데 얼마나 순진하겄냐.
유채밭 쪽으로 청자, 마중 나온다. 그리고 모시고 들어가서 정선생 부모님께 큰절을 올린다. 정선생 부모, 흐뭇하게 절을 받는다. 곁에서 청자 부모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꼴을 보면서 명자, 광자는 입을 막고 웃고 있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 울리면서, 막이 내린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