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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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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 스크랩 또 다른 고산서원 이야기
[함양]인산시인 추천 0 조회 31 10.12.31 20: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고산서원(孤山書院)
소 재 지 :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62
건축시기 :  100여 년 전으로 추정
사액시기 :  1715년(숙종 41)
소 유 자 :  고산 동중계(孤山 洞中契)


건축 배경
고산서원은 주천대 부근에서 우거(寓居)하며 후학을 가르친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와 울진현령 재임 시 지역의 교육사업에 많은 공적을 남긴 서파(西波) 오도일(吳道一), 주천대와 고산에 머물렀던 생육신의 한 사람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을 배향하기 위한 곳이다.

1686년(숙종 10)에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이 울진 현령으로 재임 시 동방의 백이(伯夷)라 부르는 동봉 김시습을 배향하자고 고을 유림에게 설파하였다. 동봉이 머물렀던 주천대(酒泉坮)와 고산(孤山) 인근에 자기의 녹봉(祿捧)을 기증하여 동봉묘(東峯廟)를 짓고 동봉서원(東峯書院)이라 불렀다. 그 뒤 구암서원(龜巖書院)이라 고쳐 불렀다. 고을 사람들은 지역 문풍 진작에 공이 많았던 서파를 위하여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까지 한다. 1713년(숙종 39)에 고을 선비들이 선생의 고매한 인격을 숭모하여 고산정사(孤山精舍)에 사당을 짓고 고산사(孤山祠)라 하였다. 2년 뒤 1715년(숙종 41)에 고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87년(정조 11)에 현령 신대곤(申大坤)의 경제적 지원으로 만휴와 서파 쌍묘(雙廟)를 합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1914년경 지역 유림이 공의로 서원이 있었던 동네의 가정집을 매입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 구성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집형으로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팔작집이다. 광천을 끼고 남쪽으로 성류산이 보인다. 약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가옥으로 추정된다.


현판
고산서원(孤山書院)
해서체(楷書體)로 된 대자(大字) 현판으로 건물에 게첨(揭添)되어 있다.
고산서원 사적기(孤山書院 事蹟記)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이 지은 것으로 고산서원의 유래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주천대기(酒泉坮記)
임만휴(任萬休)가 주천대에 우거할 때 주천대의 이름을 짓고 주변 풍광과 명소를 읊은 기문이다.

내력과기능

향사일
* 향사일: 양력 5월 3일

훼철된 서원을 다시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4년경 지방 유림이 개인 집을 사들여 매년 음 4월 15일에 동봉, 만휴, 서파를 추모하고 정례시회를 열어 왔다. 아울러 고산동중계(孤山洞中契)의 결산도 함께 보았다. 지금은 모심기 철 등의 농번기 관계로 양력 5월 3일로 동중 곗날을 새로 정하였다.



관련문서
- 고산 동중계(孤山 洞中契) 문서
고산서원을 운영하기 위한 동중계 문서로 두루마리 1권이 있다. 그 외 보관하고 있는 책으로 환여승람 1권, 격몽요결 1권, 매월당 김시습 문집 2권이 있다

 

관련인물

주향자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悅卿)이다.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 등으로 썼다.
증조부 윤주(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의 옛 이름인 선사장씨(仙?張氏) 즉 울진장씨다. 5세에 이미 그가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다.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과 오대산 그리고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다. 이후는 주로 삼남지방을 유랑하여, 1463년에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31세 때부터 37세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잦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울진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인 것이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그는 울진장씨를 외가로 둔데다, 성류굴과 이곳 주천대까지 유람한 기록으로 말미암아 당시 울진현령 서파 오도일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그를 평소 숭모했던 나머지 주천대 옆에 동봉묘란 그의 사당을 짓게 되고 후일 고산서원에까지 배향된다. 서파가 쓴 동봉서원 상량문에서 ‘한 나라의 국민이 영원한 세월을 두고 모두 다 경건한 마음으로 우러러보며 본받을 만한 가장 모범적인 훌륭한 서원을 지을 수 없는가 오직 여기 이 집터에 새로운 사당과 서원을 지었으니 공경히 동봉선생을 우러러 생각하고 헤아려 보건대.... <중략> ...관동 땅 울진의 고요하고 한적한 이곳에 오시어 쉬어 가셨으니 어찌 이 고장의 영광이 아닌가. 이곳은 동봉의 외가인 울진장씨의 원파지지(源派之地)며, 성류굴은 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기이한 자취가 머물러 있는 곳이다. 성류사(聖留寺)는 성류굴에 있었던 절로 사흘 밤을 머물렀는데 주옥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옷깃을 여미며, 한없는 경의를 느끼게 되었다. 고매하신 어른의 지팡이와 신발이 그 절 방문 밖에 있었음을 상상할 때 곧 달려가 우러러 뵈옵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에 지방의 노인들과 의논하여 하루바삐 사당을 짓기를 도모하니 이 고을이 모두 기뻐하며 찬성하는지라 그를 사모함이 크다는 것을 알겠고, 많은 사람이 협력해주니......’에서 그가 얼마나 동봉을 숭모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매월당이 성류사에 묵으며 지은 시 한 수를 소개한다. 봄날에 성류굴 앞에 서서, 절벽과 흐르는 물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窟前春草?苔磯 山後巖花暎落暉
(굴 앞 봄풀은 이끼 낀 돌 위에서 일렁이고, 바위산 꽃들은 빛나게 떨어진다.)
更有一般淸意味 夜深巢鶴警人飛
(맑고 그윽한 맛 더욱 새롭고, 밤 깊은데 인기척에 놀란 학이 집 속에서 날아가네)
-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 1601~1673)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이 풍천(?川)으로 판서 국로(國老)의 손자이며 홍문관교리 수정(守正)의 아들이다. 호는 만휴(萬休), 자가 효백(孝伯),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1624년(인조 2)에 생원시 진사시, 1626년 정시문과에 각각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1628년 동생 지후(之後)가 반란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취정(就正)과 그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했다. 이 해 세상과의 연을 끊고 울진 행곡의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20여 년간 살게 된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종성부사(鐘城府使)로 기용되어 여진족에 대해 방비를 하고, 백성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1660년(현종 1) 예조참판을 거쳐 승지를 지내고 1670년 공조참판·병조참판·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경주부윤을 하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구미마을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만휴당집(萬休堂集)』, 『휴와야담(休窩野談)』 등이 있다.
- 서파(西波) 오도일(吳道一, 1645~1703)
본관이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가 서파(西坡)이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손자이며, 오달천(吳達天)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현종 14년(1673) 정시문과에 급제, 숙종 6년(1680) 병조좌랑(兵曹佐郞)·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 1682년 헌납(獻納), 1683년 지제교(知製敎)·이조좌랑(吏曹佐郞)·집의(執義)를 거쳐, 1686년 부응교(副應敎)?사간(司諫), 1687년 승지(承旨)가 되어 동인(東人)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89년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1694년 이조참의(吏曹參議)·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강원도 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都承旨)·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이듬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사직(司直)·이조참판(吏曹參判), 1698년 이조(吏曹)·공조(工曹)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양양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大提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에 유배되었다가 1703년 배소에서 죽었다.
1683년(숙종 9년) 7월에 울진 현령으로 부임하여 1686년(숙종 12년) 3월에 관직이 사복정(司僕正)으로 승진되어 서울로 갔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의 경계를 받았다. 술을 좋아하고 시문에 능하여 당시 울진 선비들의 칭송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 또한 주천대를 사랑하여 자주 이곳에 오기를 즐겼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성품 또한 강직한 까닭에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공직생활 30여 년간 집 한 칸 땅 한 평도 재산을 늘린 것이 없어 진정한 청백리의 표상이 되었다. 장성에서 귀양살이하다 채 1년도 못되어 죽었는데 그를 흠모하여 찾아와서 배우는 자가 수없이 많았고 상여가 나가는 날 고을 경계까지 따라 나와서 전송하는 자가 수백 명을 헤아렸으며, 그가 다스렸던 고을에서도 수백 리 먼 길에도 조문하여 애도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울진 현령 재임 시 각 면에 훈장을 두어 교육에 전념하고, 향약을 제정하여 미풍양속을 위해 지방교화에 많은 업적을 남긴다. 황림 윤사진(篁林 尹思進)이 쓴 ‘고산서원 사적기’에서 서파를 설명하면서 “학문을 좋아하여 재임 3년에 문화가 크게 진흥되었다......혹 서파공이 와서 동봉의 절의를 숭상하고 천양(闡揚)해주지 아니했으면 이 고을 선비들이 어찌 동봉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숭모할 수 있었겠는가......서파 선생이 이 고을에 와 다스릴 때 옛 촉(蜀)나라의 문옹(文翁) 같았고, 옛 조주(潮州)의 사람들이 한문공(韓文公)을 제사 지내던 일을 모방하여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그가 죽은 뒤 만휴묘(萬休廟)에 합향하고 다시 동봉과 합향하여 고산서원에 세 선생을 모셨다.”라고 하였다. 술을 즐긴 문인인 동시에 정치가로 청렴 강직하였다. 그의 유저(遺著)인 『서파선생문집』 30권이 오늘에 전한다.


관련인물
-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서파(西波) 오도일(吳道一), 남윤(南?), 우암(憂庵) 윤시형(尹時衡), 전유추(田有秋), 임천(臨川) 남세영(南世英), 주형(朱炯), 전선(田銑), 장민핵(張旻?), 장응채(張應彩), 황림(篁林) 윤사진(?思進), 우와(愚窩) 전구원(田九?), 한재(寒齋) 주필대(朱必大)

 

마을이야기

울진 > 울진근남서면권 > 근남면 행곡4리
- 행곡4리
고산서원은 근남면 행곡4리에 있는데, 자연 부락명이 ‘구미(龜尾)마을’이다. 구미마을은 옛날 구암동(龜巖洞)으로 불리었다. 이 마을에 세거한 남상규의 우산세고(愚山世稿)에 ‘구암동(龜巖洞)’이라고 분명히 나오고 있다. 주천대 뒷산의 형세가 거북이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구암이라고 한다. 행곡은 원래 쌀고(米庫)라고 불렀는데, 이유인즉 마을 앞의 금산(錦山) 지맥(支脈)이 동쪽으로 뻗어 있고, 마을 앞 광천(光川) 건너 수십 척의 석벽(石壁) 중턱에 석실(石室)이 있었다. 신라 시대에 원효대사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수도(修道)하였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위구멍에서 쌀이 조금씩 나왔다 하여 이곳을 천량암(天糧岩)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미고(米庫) 즉 쌀고라 하였다. 후에 발음이 변하여 쌀구에서 살구로 살구 행자를 차용 행곡(杏谷)이라 부르고 있다. 행곡은 1리 ,2리, 3리, 4리로 되어 있다. 마을 중앙에 샘터가 있어 맑은 물이 솟아올라 연못을 이루었다는 유래가 있어 마을 이름을 샘실이라 부르는 행곡1리가 있는데, 1686년경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개척하였다 한다. 또 회임질(花林, 上川前, 海鹽洞)로 부르는 행곡3리가 있다. 이 마을은 옛날에 호수(湖水)로 이곳까지 밀려들어 온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었다 하여 해염동(海鹽洞)이라 한다. 지금도 ‘모래등질’이라는 곳의 모래가 바닷모래와 흡사하다 한다. 또는 냇물의 상류에 있었다 하여 상천전(上川前)이라고도 하고, 꽃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하여 화임질(花林)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은 1500년경에 단양우씨(丹陽禹氏)가 개척하였다 하나 분명치 않고, 1600년경에 정선전씨(旌善全氏)가 이주(移住)하여 화임질(花林)이라 부르고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내앞(川前)이라 부르는 천전 동네인 행곡2리가 있다. 이 마을은 고가(古家)와 돌담이 잘 어우러져 고색창연한 맛을 자아낸다. 마을 입구에는 1999년 4월 6일에 지정된 천연기념물 409호의 처진 소나무가 있다. 이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어 매우 희귀하다. 수령은 3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m, 가슴높이 둘레는 2m이다. 이 나무는 천전동(川前洞) 마을이 생겨날 때 심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마을의 상징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특히 나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애초 소나무주변에 송림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1960년 이후 주변의 소나무는 벌채되었으나, 이 소나무는 나무 모양이 아름답고 특이하게 생겨 벌목되지 않고 사람들의 보호 속에 살아남아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은 또 얼마 전에 방영한 TV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터널을 이룬 대숲과 더불어 최근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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