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1954년 양력 11월 6일 (음력 10월 11 일)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대양리 출생
1967년 2월 곡송초등학교 졸업
1970년 1월 김천 금릉(현 김천 중앙)중학교 졸업
1973년 1월 김천고등학교 졸업
1973년 : 대구에서 독서실 다니면서 재수
1974년 3월 : 울산공과대학 입학
1978년 2월 : 울산공과대학 조선과 졸업
1978년 5월-1980년 8월 육군 수송 병과로 강원도에서 군복무
1981년 3월 -1986년 4월 울산 현대중공업 선장설계부에서 4년,
기술영업부에서 1년 근무
1986년 4월-1986년 12월 : 부산에서 조선소 협력 업체 설계부 근무
1987년 7월 부산 옆의 김해로 이사
1988년 -1991년 : 김해 인근의 회사에서 생산직 근무
(신발 밑창 발포3개월 , FRP 2개월 , 천정크레인 4개월, 가구3 개월, 신발공장 2년)
1991년- 1993년 : 김해의 조선소 협력 업체 설계부 근무
1994년 : 진해고등학교에서 1년 기간제 기술교사.
1995년-2010년 11월 : 김해의 조선소 협력 업체에서 설계부 근무
2014년 10월 : 김천으로 이사
신앙 생활은 대략 1963년 국민학교 3학년 때 부터이다.
그전에도 아마 형이나 누구를 따라 교회에 가기는 몇번 갔을 것 같다.
6, 7 살 때 쯤 한 번은 교회에서 부흥회 할 때,
그 당시에는 신앙 생활도 하지 않던 아버지와 같이
교회 부흥회에 참석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의 20-30 평 되는 교회가 비좁아서 그랬는지
교회밖 50평 정도 되는 마당의 종각 옆에서 큰 북을 둥둥 치면서 한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나를 전도한 사람은 현제 경북 상주 어느 시골 교회에서
목사로 계신다고 들었다.
그 분도 가정 형편상 국민학교 다니다가 4학년 때인가
부산 옆의 가덕도 고아원에 갔다가
소아마비로 한 쪽 팔을 못쓴다.
대구신학은 졸업 했는지 모르겠다.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하는 자들은 정말 집안 식구들과 제사문제 ,
그리고 주일날 일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참고 견디면 다 지나 갑니다.
주안에서 좋은 마무리가 되도록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 부모님도 상당히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객지에 나가 있으니 신앙 생활에는 별로 어려움 없이 지냈다.
아버지도 그렇게 반대 하셨지만 돌아 가시기
몇년전 어떤 분들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다가
2002년 4월에 부르심을 받았다.
임종을 내가 지켜봤다.
김천병원에서 2-3일 있다가 집에 돌아면서 곧장 돌아 가셨다.
어머니도 몇번 교회 출석은 했지만 끝가지 고집하다가 84세로 요즈음 우리집에 와 계신다.
가끔 고향에 가서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따라 시키면 하신다.
가정 예배에 꼭 참석한다.
자고난 방이 예배 장소이니.
기도도 애들 처럼 따라 하신다.
곧 부르심을 받겠지요.
내가 다닌 대양교회는 1907년엔가 조그만 집에서 출발 했는가 보다.
역사로 보면 100 년이 좀 지났다.
우리 아버지 말로는 해방전에는 가끔 호주 선교사들이 다녀 간다고 하셨다.
순전 농촌 교회로 내가 주일학교 다닐 때(1963-1966년)는
주일 학생들은 50명 정도로 많았지만
어른들은 20-30명 되었고,
어릴 때는 조사가 있다가 그 다음 전도사, 강도사
목사를 모시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70 년 정도 이었다.
신학교 졸업하고 갓 신혼 지나서 그곳에 오신 분이 강도사 목사로 되었지요.
바울 사도가 그랬듯이
그 당시 믿는 사람들은 마을에서 별로 인기 없는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40 년이 지난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마을 사람들 거의가 교회 출석 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술 담배 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다니다가 말다가 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교회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교인들은 그런식이지만 촌에 젊은 사람이 없으니 교회에도 50대가 청년 입니다.
교인들은 인근 구미나 김천에 있는 사람도 차가 있으니 고향으로 와도 출석 100 명도 안됩니다.
내가 주일 학교 다닐 때는 그 당시 20 평 정도에서 50 평 정도로 지었다가
1974년 쯤
지금은 70세가 넘었을 장훈두 목사님의 열성적인 기도와 노력, 성도들의 기도,
거기에 추가로 그 교회의 출신으로 객지에 나간
그 당시 대구 서현교회의 김종필 장로님이
크게 재정적으로 보태서
100 평 정도로 그 당시에는 농촌 교회치고는 상당히 잘 지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인 1967-1972 년 까지는 김천 제일 교회에 출석했다.
집에서 교회가는 것을 반대했으니
그 때 1967년에 어떻게 어렵게 돈 모아서 신약성경 80원 주고 샀었다.
그돈 80원 요즈음 내가 50 만원 모으기 보다 더 힘들게 모은 것이다.
그 책 몇 년동안 보았다.
그 당시 출석 교인이 200-250 명 정도로 김천에서는 규모 면으로 2번째 이었다.
몇 년전에 자리를 옮겨 크다랗게 지었다.
요즈음은 1,000 이나 1500명 정도 모이는지 모르겠다.
대구에서 재수할 때는 비산제일교회라는 출석 인원 50명 정도되는 교회에 출석 했다.
나는 학습은 김천제일교회에서 받고
세례는 대구비산 제일교회에서 받았다.
그 교회요즈음도 있는지 모르겠다.
대학 때는 학교 근처의 장검교회라는 곳에 다녔다.
1980년 즈음에 수정교회라고 이름도 바꾼 통합측 교회로
울산 무거로타리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조선소 다닐 때는 현대중공업 근처의 합동측 '명성교회'에 5년 동안 다녔다.
프로축구 울산구단 선수들이 많이 출석하는 인근의
통합측 '전하 교회' 보다는 크기가 좀 작았지요.
그 교회는 그 당시 설립한지 10년 정도 되었고 출석 인원이 300명 정도 되었는데
요근래 들어니 출석 인원이 1,000 명 정도 된다고 들었다.
그 곳이 내가 다닌 가장 큰 교회이다.
나는 집 가까운 교회에 출석 하는 것이 내 방침이다.
부산에서도 그랬고
지금 김해에서도 그렇다.
부산에서 1년 정도는 교인 50명 정도 되는 교회 다녔는데 정말 여러가지로 힘들었다.
그 교회 내가 있을 때에 이름을 바꾸었는데
몇년 후에 다시 원위치 했다가
몇 년전에 근처에 가보니 교회는 조그만하게 새로 지었는데 또다시 이름을 바꾸었더라구요.
그 당시의 교회를 이어 받았는지는 모르겠고.
사람 이름 바꾼다고 별 수 없듯 교회 이름 바꾼다고 별수 없어요.
교회 이름을 사주 보고 짓습니까?
대양리(大陽里)는 대양1리 대이와 대양2리 천동으로 나눠져 있다.
마을의 형성은 1530년(중종25년) 충청도 보은군수를 지낸
김희직(金希稷)이 이거해 살면서 비롯됐다.
대양(大陽)이라는 지명은 마을 서쪽에 있는 안골에
신라 때의 고찰인 대양사(大陽寺)가 있어
대양동으로 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축대와 돌계단이 남아있다.
또 다른 지명인 대이는 해발 280m인 마을 뒷산 매봉산이 풍수적으로 볼 때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포란(抱卵)의 형상으로
앞으로 큰 인물이 배출돼 마을을 크게 번성시킬 것이라 해서
‘큰 마을’이란 뜻의 대리(大里)라고 했는데
음이 변해 지금은 대이라 불린다.
대양산을 경계로 개령면 남전과 이웃하고 있는
대양2리 천동은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북면에 속했던 마을이었다. 1914년 곡송면으로 되면서 인근 대이마을과 합해 대양동이 됐고
1971년 천동과 음달마가 대양2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이 천동(泉洞), 샘골, 새암골 등과 같이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예로부터
마을 앞으로는 외현천,
뒤로는 맑은 물이 솟는 샘이 많아
조선 숙종 때 김옥경(金玉經)이란 선비가
천동(泉洞)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입구에는 부자(父子)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김해김씨 김갑생(金甲生)과 그의 아들 김해종(金海宗)이
주인공으로 김갑생(1606-1684)은
겨울에 잉어와 죽순(竹筍)을 구해 부친을 봉양했고
아들 김해종(1627-1705)은 겨울에 꿩고기를 구해 봉양하고
3년간 시묘를 다한 부자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이 마을에는 특히 부해리(미국 뉴저지주) 선교사에 의해
1906년 설립된 대양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