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용제 똑 바로 알고 쓰자"는 말이 뭐가 잘못인가>
어느 회사의 '안전보건교육실'이라는 커다란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화려한 산업안전보건 포스터들이 스무장 가량 벽에 붙어 있었는데, 그 포스터들을 찬찬히 살펴 보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그 포스터의 내용들이 모두 산업재해의 원인을 '노동자의 부주의'로 돌리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내용이 한 장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벽을 주욱 돌아가면 끝까지 살펴 보았은데, 결국 산업재해의 원인을 노동자의 부주의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본 포스터는 단 한 장도 없었습니다.
그 중에 '유기용제 똑 바로 알고 쓰자'는 내용의 포스터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유기용제를 똑 바로 알고 쓰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그 표어 속에는 '노동자들이 유기용제를 똑 바로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하기 때문에 유기용제 중독이 발생한다'는 잘못된 시각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국소배기장치를 철저히 하자'라든가... '작업장의 공기를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는 시설을 하자'라는 내용의 포스터가 단 한 장만 있었더라도, 그날 제가 절망적인 느낌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유기용제에 대해 똑 바로 알지 못한 채 함부로 사용하기 때문에 유기용제 중독이 발생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권력과 자본의 관점입니다. 이에 반해 '인체에 해로운 유기용제를 제작, 판매, 사용하도록 하는 정부의 잘못된 제도와 눈 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의 반사회적 행위가 노동자들을 유기용제 중독에 몰아 넣는다'는 것은 노동의 관점입니다. 어느 것이 옳을까요?
반드시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한 채 노동자들더러 '유기용제를 똑 바로 알고 사용하라'는 것만 강조해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할 것입니다.
<물질안전보건자료 제도를 활용하자>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에는 '물질안전보건자료'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사업주는 화학물질 또는 화학물질을 함유한 제제를 제조, 수입, 사용, 운반, 저장하고자 할 때에는 물질안전보건자료(M.S.D.S.-Material Safety Data Sheet)를 작성하여 취급자가 쉽게 볼 수 있는 장소에 게시 또는 비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료에는 ①화학물질의 명칭 ②안전보건상의 취급주의 사항 ③환경에 미치는 영향 ④기타 노동부령이 정하는 사항 등 그 물질에 관한 모든 백과사전적 내용이 갖추어져야 하고, 경고 표식을 부착해야 하고, 노동자에게 그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야 하고, 작업 공정별로 관리 요령을 게시해야 하고, 그 물질을 다른 회사에 양도, 제공하는 경우에도 MSDS를 같이 양도 또는 제공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을 어길 때에는 사업주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제도가 생긴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89년에 처음으로 저희들이 이 제도를 마련할 것을 주장했을 때에는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정신 나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얼마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정신 나간' 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아무런 요구와 노력을 하지 않으면 회사는 굳이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이 제도를 시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느 회사에서는 회사가 유기용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노동자가 그 유기용제를 통째로 들고 회사 관리자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들어가 바닥에 부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냄새가 지독했던지 관리자들이 5분도 못 견디고 모두 나가 버리더랍니다.
심지어는 회사의 관리자가 자꾸 '안전하다'고 거짓말을 하니까 "얼마나 안전한지 한 번 보자"면서 유기용제를 관리자의 머리 위에 부어버린 노조 간부도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 회사에서 '물질안전보건자료'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기 시작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니, 힘 들게 마련된 이 제도가 현장에서 시행되도록 하는 것은 역시 노동자들의 몫입니다. 물질안전보건자료 제도가 일찌기 생겨서 철저히 시행되었다면 이 땅에 'LG전자부품 유기용제 중독'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