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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박 13일 동안 걸은 '한 많은 휴전선 155 마일' 을 상세하게 돌이켜 보기 전에 결론부터
말하면 "최악의 통일이라도 최선의 분단보다 낫다".
우리 민족에게 통일보다 더 좋은 선(善)은 없다는 것이다.
휴전선 남방한계선(민통선)에 최대로 밀착하여 400km는 족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에
무수히 확인한 결론이다.
남과 북, 양쪽이 무기 자랑에 열올리고 있다.
서로 헐뜯으며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짓은 권력을 쥔 양쪽 기득권층과 전쟁이 발발하면 국제선 비행기로 몰려
갈 집단의 치기(稚氣)에 다름 아니며 민초들은 하여가(何如歌)를 부를 뿐이다.
155 마일 휴전선에는 수십만의 젊은이와 온갖 살인 무기가 배치되어 있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대지와 현대식 건물도 엄청나다.
여기에 투입되는 국가 예산 또한 천문학적이다.
이 모두는 국부의 백해무익한 낭비일 뿐이다.
혈기왕성한 수십만의 젊은이가 부가가치가 높은 생산 현장에 투입되고 탱크는 트랙터로
개조하고 대포와 총칼로 농기구를 만들며(구약성서 이사야2:4) 휴전선의 방대한 땅에서
곡식이 자라고 군막사들은 현대식 농장과 친환경 공장이 되는 현실을 상상해 보라.
그래서 아무리 나쁜 통일이라도 통일 외에는 선이 없다는 결론이다.
이북의 황금자원과 우수한 노동력은 고려에서 제외하더라도.
평화 없는 평화전망대
어림잡아 1.500km가 넘는 해안에 밀착한 길, '서남동 길' 을 마친 후 생각난 길이 휴전선
155마일이다.
지체없이 휴전선의 통과 지자체들로 부터 지도를 공급받았다.
집을 나설 때 내 배낭에는 이것 외에는 먹고 자는데 지장 없을 도구들 뿐이었다.
참으로 무모한 출발이었으나 언제나, 어데서나 그래왔듯이 해결의 키(key)는 늘 현장에
있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없다.
예정일보다 하루 늦게(2013년 5월 7일)강화도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의
출발점은 월곶돈대의 연미정이었다.
당초의 예정지 김포의 애기봉에서 좀 더 서쪽으로 연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미정보다 10km 이상 서북 정점인 평화전망대를 순환하는 버스에 올랐다.
출발점이 수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복수가 아닌 단수(alone, solo)의 장점이며 늘 홀로인 이유도 된다.
동행자가 있다면 이렇듯 단독으로, 즉흥적으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
한강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사건이 많았던 섬 강화도.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중요 접전지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에는 한 때 수도였으며 항몽 삼별초 혁명정부가 수립되었던 땅이다.
이조중기에는 정묘와 병자 두 호란으로 왕실에 부대껴야 했고 말기에는 병인과 신미 두
양요라는 거센 서풍에 화를 입었던 섬이다.
지금은 뭍이 되었지만 타고 온 버스와 함께 도강하던 때, 1004계단(?)을 밟고 마니산의
참성단에 오르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머리'를 뜻하는 摩利山을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할 음모로 摩尼로 개명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산이다)
하마터면 강화도 처녀와 캐나다 유학길에 오를 뻔 했던 1960년대 중반의 일도.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을 뜻하는 돈대, 양사면 철산리 산6-1.
평화전망대는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는 민통선 북방지역, 강화도의 최북단
북장돈대와 의두돈대 일대에 서서 북쪽 개풍군 최서남단과 마주하고 있다.
상거가 2km 안팎에 불과하며 서로 빤히 바라보는 서해의 남과 북.
강화대교처럼 진즉 다리가 놓였을 법한데 다리는 커녕 한 나라 한 민족이면서도 휴전선,
민통선이라는 해괴한 이름의 족쇄에 채여 으르렁대고 있다.
통한의 쇠사슬을 끊어버리려 하는 절규인가 너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한
자기방어의 몸부림인가.
아직 이른 시간이기 때문인지 한가롭기는 하나 천근 납덩이에 가슴이 짓눌리는 듯 했다.
피상적으로는 평화로우나 평화가 없으며, 평화의 불확실성을 확인해 줄 뿐인 곳이라는
느낌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평화란 통일을 전제로만 가능한데 화해와 통일의 의지보다 제압에 올인하는
분위기 아닌가.
워낙 흐린 날씨라 희미하게나마 북쪽은 물론 서서남 바다 건너 교동도도 포착되었다.
여러 해 전에 서울에서 걸어서 도착한 강화대로의 시종지(始終地)다.
유감스럽게도 날이 흐려서 보이는 모든 것이 막연할 뿐이지만 이름처럼 평화롭게 전망
하는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모든 것이 이분법이다.
히나의 민족이면서도 너희(彼)와 우리(我)는 동지 아니면 적이다.
평화전망대임에도 이곳은 제적봉(制赤峰)이다.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뜻이란다.
우리가 스스로 적대관계가 되었는가.
누가 우리를 불구대천의 수구처럼 만들어 놓았는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왜 왜곡하고 적으로 매도하는데만 혈안인가.
그럼에도 이곳에는 특이한 시 한 수가 오가는 이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강화도 최북단 758OP에서 해병대 소령(1974년 11월 3일당시) 김흔중이 절규하고 있는
'피한(彼恨)'이 다.
나의 조국 금수강산 / 두 동강이로 허리를 잘라 /
강화도를 휘감아 / 한강수는 유유히 흐르고
하루에도 두 차례 / 거슬러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 피눈물 고인 짙은 물줄기
뚝 건너 / 한 많은 사연이 있어 / 애절한 신음소리 끊이지 않고
한 핏줄 내 형제를 바라보며 / 손짓해도 못 본체 외면하면 /
목놓아 다시 불러 보아도 / 메아리 조차 허공으로 빗겨가니
좁은 가슴에 스미는 설음일랑 / 이 곳에 묻어두고 /
찬란한 미래의 꿈으로 / 비들기 나래를 펴리니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 강 건너에 /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 놓아 /단숨에 가고 오며 /
통일의 찬가를 부르리라.
누가 "불굴의 투지와 매서운 눈초리로 적을 제압하고 있다"는 해병의 시라 하겠는가.
기필코 오고야 말 통일의 날을 기대해도 된다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소위 강대국들의 음흉한 계산에 농락당했지만 단일
민족인 우리는 마침내 통일하고야 말 것이라는.
이 곳에서 맨 처음 나를 반겨준 이는 '2014아시안게임 홍보대사' 라는 직함도 갖고 있는
해설사 김옥분.
그녀의 이름에는 전통미가 담겨있으나 현대적 세련미를 풍기는 여인이다.
많은 해설사를 상대해 왔지만 카메라 앞에 선뜻 포즈(pose)를 취하는 이는 드물었는데.
2층 전망대의 남 해설사도 카메라 기피현상을 보였으니까.
민통구역을 걷다
전망대를 떠나 매표소를 나서는데 매표원이 궁금해 했다.
유일한 입출구인 이 곳을 통과하지 않은 영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출발점(평화전망대)에 도달하는 것 부터 알바로 시작한 것이다.
버스기사에게 신신부탁했건만 그는 목적지를 한참 지나서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병들의 전용로를 따라 뒷문으로 입장했으니 낯설 수 밖에.
아무리 걷는 것이 장기(長技/favourite)라 해도 그를 친절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같은 현상은 시골 대중교통의 현주소다.
민통선 지역의 맨 처음 걷는 길이 무시무시하게도 제적대로(制赤大路)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Civilian Control Zone)은 DMZ(Demilitarized Zone/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의 남쪽 5~20km에 걸쳐있는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된 지역을 말한단다.
민통선(Civilian Control Line, CCL)은 이 지역의 경계선을 말하며 나의 목표는 최대한
이 선에 밀착하여 걷는 것이다.
영농인의 출입만 허용된 이곳 민통구역에서 민간인에게 자유로운 길은 제적대로뿐이다.
특이하게도 민통선에 밀착한 길은 트랙터를 비롯한 영농구와 차량의 통행이 허용된데
반해 보행은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대로를 따라 걸으면서 호시탐탐 노린 것은 철조망뚝에 밀착해 난 농로였다.
철산삼거리를 지난 후 마침내 농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과감하게 농로를 택했다.
우둔한 늙은이인척 했다가 쫓겨나면 논둑 길이 출구가 될 것이니까.
첫 관문(초소)을 통과할 때는 조마조마했으나 의외로 무사했다.
철조망 둑에 오르는 것 외에는 묵인하는 듯 했다.
하기는,멀찌기 도로에서는 보이는 바다 저쪽 이북땅이 둑 아래 농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오히려 권할 만한 안전로일 듯 한데 왜 막을까.
논 가운데에 시멘트 콘크리트 참호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남방한계선 둑을 바다
쪽으로 꽤 물린 듯 하며 농토가 그만큼 확대된 것이리라.
너른 들판에서는 이앙(移秧)준비에 바쁜 기계들의 엔진소리만 요란할 뿐 최전방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곳 민통선에서 만난 농민들로부터는 건건사사 대치일변도인데다 마치 전쟁이 불가피
한 듯 요란법석인 위정자들, 언론들과 달리 긴장의 기미를 느낄 수 없다.
기득권 세력과 달리 민초들에게는 통일의 조건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긴 철조망 둑 아래로 난 농로를 따라 승천포(송해면 당산리)까지 나아갔다.
둑의 약간 안쪽에 고려 고종사적비(高麗高宗事蹟碑)가 서있는 곳이다.
강화도가 한때 고려의 수도가 된 것은 23대고종(재위1213~59)이 끈질긴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 강화도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재임중에 득세한 처족에 휘둘려 실권은 없었으나 금속활자를 만들고 팔만대장경을
간행하는 등 문화유산을 남긴 왕이다.
둘째 초소에서는 첫 초소의 묵인을 이유로 내세워 통과했으나 마을이 있는 돌머루(대산
리)의 셋째 초소에서 봉쇄당했다.
노인의 통과를 막으라는 명령이 앞 초소에서 왔다는 것이 달려나온 초병의 말이었다.
우기(雨期)에 대비해 둑을 보수중이던 해병들중 상사(?)의 당부가 있었으나 막무가내로
진행을 계속한데 대한 응징(?)일까.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므로 우회하라는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철조망 아래로 난 10여km 되는 농로를 따라 온 것만도 천만 다행한 일이다.
연미정에서 조강 저수지까지
연미정 아래 민통선제9검문소(월곶)를 벗어나 연미정에 오르기 전에 식사부터 했다.
아침 겸 점심인 이 식사(월곶 할머니식당)는 이 날뿐 아니라 휴전선 길의 첫 식사다.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의 모양이 제비 꼬리와 흡사하다 하여 연미정(燕尾亭).
강화읍 월곶리 242 월곶돈대에 서있는 이 정자는 정묘호란(丁卯胡亂/1627년)의 결과로
이조 12대왕 인조(仁祖)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단다.
예전에, 서해 ~ 도성 간을 운항하는 배가 밀물때를 기다리느라 닻을 내리고 대기했다던
곶(串) 위에 세워진 이 정자에는 꼭 올라가야 한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24호)라는 것이 그 까닭이 아니라 강화도가 최전방임을 눈으로
확인하려면 평화전망대와 더불어 반드시 올라야 하는 정자니까.
대부분의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코앞이 조강(祖江)이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모이는 할아버지강인데 휴전선이 되어 뱃길이 끊긴지 오래다.
직선거리 20km라는 개성 송악산도 선명하게 보인다는데 흐린 날씨를 탓하겠는가.
날씨와 관계없이 무시로 오르내릴 날이 오면 그만인 것을.
염하(鹽河)의 짠물과 조강 민물의 교차점인 유도(留島)는 휴전선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사람의 온기를 느낄 법한데 지금은 이름처럼 그냥 머물러 있을 뿐인 싸늘한 무인도다.
낚시에는 100% 문외한인 늙은이지만 통일 후에는 아마도 조사들의 특급 선호지가 될
것이라고 점쳐지는 섬이다.
동쪽으로는 곧 다가가게 될 김포의 문수산과 애기봉이 지근이다.
문수산에서 내려다 보던 한남정맥 종주때와 뒤바뀐 위치다.
이 일대가 최전방이라는 불행한 개념이 하루 속히 바로잡히기를 염원했던 그 때 국내외
각지를 돌고 돌다가 결국 이 길을 걷게 될 것을 상상이라도 했을 법 한가.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 하는가.
연미정을 내려오는 걸음이 다시 천근이 되어갔다.
연미정 ~ 강화대교 간의 7km쯤은 강화나들길의 '심도역사문화길'(강화버스터미널에서
시작)이 반 이상이다.
유도와 최단 거리인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부터 염하강의 저편 김포시와 평행으로 남하
하는 강가 포장도로를 걸어야 한다.
최전방 또는 민통선이 아니면서도 접경 강이라는 까닭인지 경계가 삼엄하다.
언제 저지당할지 불안한 걸음과 달리 마음은 편하지만 차량들이 질주하는 포장차로는
분명히 지루하고 위험한 길이다.
버스편으로 건너던 아침과 달리 걸어서 강화대교를 되건너 김포땅으로 왔다.
1997년에 준공된 새 연육교다.
흉물처럼 서있는 옛 다리는 1970년에 개통되었으나 30년도 못되어 '노후와 교통량 감당
불가' 판정으로 폐교되었다면 너무 심한 부실공화국 아닌가.
전국의 무수한 다리들의 운명은 어떠할까.
2000년 세월에도 끄떡없는 다리를 만든 로마를 칭찬하면 사대주의일까.
눈 설지 않은 성동검문소도 예전에도 염웠했듯이 사라지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다시
빌며 염하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휴전선이 아닌 보구곶 진입도 막는데 DMZ 지역인 강령포에 얼씬하게 하겠는가.
버스편으로 검문소를 통과했으나 내가 김포평화누리길(문수산성 남문~ 애기봉입구)의
안내판을 잘못 읽은데서 온 착각이었다.
젊은 운전기사의 친절로 조강리 입구에 내림으로서 실수를 커버(cover)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시골버스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다.
민통선 마을 조강리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민통선 마을도 강화도와 다름 없이 평화로웠으며 평화누리길을
따라 애기봉 입구로 가는 길가에 조강리 저수지가 있다.
물가로 조대(釣臺)가 즐비하며 평일인데도 조사들이 제법 모여드는 것으로 보아 인기
있는 최전방 낚시터인 듯.
애매한 안내판으로 인해 DMZ 조강포(祖江浦) 앞 초소까지 진출했다.
애기봉 주둔 해병대의 최전방 초소다.
조강포는 연미정에서 내려다 보았던 조강의 김포쪽 포구다.
고려와 이조 때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일체의 세곡선과 물류 배들이 개경과
한양으로 갈 때 거쳐 갔던 나루터였단다.
서해안 해산물의 집산지, 이름난 고기잡이 포구였으나 1950년(동란)이후 80여호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눈 앞의 철책선과 논들이 그 자리란다.
산천 의구란 말 과연 옛 시인의 허사로다.
초소만 통과하면 군 전용도로를 통해 애기봉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빤히 보였다.
초병이 어딘가(상부?)에 전화를 했지만 통과시켜주라 할 리 있는가.
더구나 이미 전망대가 문닫는 시간(17시)인데.
다음 날 멀리 우회하여 가야 한단다.
트랙터도, 경운기도, 자전거 영감도, 아낙네 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나만 '노' 다.
민통선에서 나는 온종일 영농인을 선망하는 늙은 이방인이다.
애기봉 진입 우회로를 묻고 저수지의 잘 지어진 정자들 중 하나에 집을 지을 요량으로
가게에 들렀다가 내 상대가 된 60대 장골(壯骨)남으로부터 의외의 감동펀치를 맞았다.
내 사정을 들은 그는 유료(有料/10.000원)인 정자 대신 난방시설이 잘 되어있는 관리인
사무실의 잠자리에서 편히 쉬라는 것.
그는 곧 관리인을 불러 당부(?)했고 그들은 조강마을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조강랜드는 저수지의 낚시터 운영을 비롯해 마을 공동체의 법인화 된 사업장이다.
지금은 낚시뿐이나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영역을 넓혀가기 위한 작업이 진행중이고.
수익사업이기는 해도 마을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이 주목적이며 이익금은 마을의 복지
프로그램 운영에 투입함으로서 금전관리로 인한 스캔들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앤단다.
이 사업의 주도자(대표)는 내게 감동을 먹인 장골남 이성재.
서울 경동고교 출신으로 본거지 서울을 버리고 이곳에 정착해 마을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그가 주동이 되어 술과 이야기 판이 벌어졌다.
후대(厚待)에 대한 답례로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 길 알카사렌 마을 공동체의 주말 식당
(메뉴 '카미노 이야기' 78번 글 참조) 운영 사례를 들려주었다.
낚시터 화장실로는 최고급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을 더욱 키워줄 만한 사례도 소개했다.
이즘에는 꽤 많이 보급된, 서남동 길에서 본 거진항(강원도 고성군)의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화장실을 팁으로.
낚시터 관리인에 이어 합석한 목장주(개미목장 정성모)는 강화도 장어를 대접하겠다고
다시 방문해 줄 것을 요망했다.
취중이기는 해도 어찌나 간곡했는지 휴전선 걷기를 마친 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빈말하지 않는 이와의 약속이니 꼭 지켜야 할 것이라는 대표의 당부도 잊지 않고 있다.
<계 속>
강화도버스터미널의 저 빨간 버스가 출발지를 수정하게 했다.
늙은이가 겁 없이 해병대 기지를 통과해 전망대에 도달했다. 하긴, 늙은이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통한의 휴전선길'에서 나를 반겨준 최초의 여인(평화전망대의 김옥분 해설사)
강화도 평화전망대
평화전망대와 마주하고 있는 북쪽 개풍군(모형과 실물/날씨가 워낙 흐려서)
호시탐탐 노려오던 민통선을 마침내 걷게 되었다(위)
철조망 사이로 개풍군이 코 앞이다(아래)
논 가운데 남아있는 참호들의 의미는?(위)
고려 고종 사적비(아래)
민통선의 이모저모(위/나의 강화도 민통선 길은 여기가 끝이다)
강화읍 월곶리 마지막 민통선검문소와 최초의 식당(아래)
연미정(위)과 위도와 조강(아래/뒤는 문수산)
강화대교 한하고 강화나들길(위)과 해안로(아래)가 상당부분 겹친다
강화대교의 양쪽(1/강화, 3/김포. 4.5/문수산 남문)
잘못 들어선 애기봉 길(위)과 다시 찾은 애기봉 길(아래)
애기봉(위1)만 바라보고 가다가 잘못 들어선 최전방 초소(위2)와 조강저수지, 매점 식당과
늙은이의 하룻밤 안식처 조강랜드 관리사무실(아래)
첫댓글 예, 그렇죠.
뭉치는 것이 흩어지는 것 보다 낫다고 선인들이 말해 왔었는데....
누구를 위한 분단인지? 아니 누구를 위한 대적인지?
밖에서든 안에서든 막아서는 세력들은 없어야 하는데....
조건없는 대화하자 하면 종북으로 빨갱이로 몰고.
원칙론을 말하면 수구세력으로 일베충으로 몰고.
회색이 존재할 수 없는 흰색 검은색, 니편 내편, 흑묘백묘 양비론.
희망있는 밝은 내일을 꿈꾸어 봅니다.
우리 민족에게 분단보다 더 큰 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나쁜 통일이라도 분단보다는 작은 악입니다.
통일의 당위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