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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였다. 그의 몸에서는 특별한 향기가 난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그가 부흥강사로 떠나면 꼭 몇 사람씩 교인들이 따라나서 밤을 새우고 돌아왔다. 교인들은 그가 강사로 전국을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그가 없을 때에는 그 목사를 위한 기도회로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철야 기도를 했기 때문에 교회는 성령의 열기가 식지 않았고 또 그가 돌아오면 꼭 몇 명씩 새 교우가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 철새처럼 또 떠나갔지만 교회는 긴장과 생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목사를 초청하여 심방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부목사나 전도사의 심방은 거절하였다. 원목사가 심방해 주어야 모든 가정이 성령 충만, 기쁨 충만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너무나 시원하게 성경의 요절을 들어가며 축복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유의 은사도 있어 그가 안수해 주면 병이 낫기도 한다고 했다. 심방을 못 받은 가정은 어떤 여 집사 집만 특별히 자주 심방을 해준다고 불만이었다. 그러더니 목사와 그 여 집사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급기야 여자 문제로 말썽이 생겨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목사 지지파가 생겨 꼬리를 친 여 집사가 떠나야지 왜 목사가 떠나느냐 목사도 실수할 수 있으니 한 달 쯤 기도원에 가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야 한다는 목사 옹호파가 있는가 하면 경건하게 살면서 양 무리의 본이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하고 목사가 된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는가? 기도원 아니라 어디 가서 금식 기도하고 돌아와도 그의 가증스러운 기도와 축도는 더 이상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그런 인간은 교계에서 추방 되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맞서는 사람들이 있어 목사가 떠난 뒤에도 교인들은 얼마 동안은 두 파로 갈라져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가 떠난 뒤 바로 목사 청빙위원회가 구성되고 노회에 임시 당회장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교회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목사가 잘 갈리기 때문에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또 어쩌면 신이 난 정치 장로가 있었다. 이 위원회를 통해 새 목사를 물색하게 되었다. 교인들은 이번만큼은 조용히 설교를 잘하는 40대 중반의, 신대원 이상의 학력을 가진 목사로 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어서 위원회에서는 신문 광고를 하지 않고 스카우트를 하기로 했다. “말씀교회 추계 대 사경회”라는 명칭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 밤을 암암리에 스카우트한 목사 5명을 초빙하여 말씀 잔치를 베풀었다. 부흥회에 맛들인 교인들은 모든 목사의 설교가 영감에 넘치는 설교가 아니라고 시큰둥하였다. 그러나 당회의 젊은 유 장로는 지금은 7⋅80년대처럼 대형 부흥회 시대도 아니며 부흥강사처럼 밖으로 나돌지 않고 차분히 교회를 가족처럼 보살피는 목자가 필요하다고 설명을 잘 한 뒤 전 교인이 투표하여 3명을 고르고 당회에 일임하여 그 중 한 분을 뽑아 목사를 초빙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회에서 추천한 첫째 분은 자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목자를 교인이 저울질하는 교회는 가지 않겠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따라서 둘째 순위에 놓인 분을 모시기로 하였다. 둘째 번 천 목사는 외국에서 설교학으로 학위를 했을 뿐 아니라 매우 지성적이고 차분한 분이어서 성령파 목사를 모신 반동으로 오히려 차분하고 지성적인 천 목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설교는 매우 깊이가 있었다. 그 설교에는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할 뿐 아니라 말씀에 새 눈을 뜨게 하는 각성제가 들어있어서 대학생들이나 지성인들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노인들은 잠이 온다고 했고 뜨거운 흥분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성령 못 받고 설교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새벽기도 때 “생명의 삶”으로 큐티를 인도 했고 기도할 때에는 큰 소리를 내어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하면서 이웃 사람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안으로 향한 기도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소리가 큰 사람이 있으면 행간을 걸어 다니며 머리에 손을 대고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기도하면서 흥분하고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고 했다. 신앙에 감정은 금물이라는 것이었다. 선악을 판단하는데 감정이 개입되고 구제를 하는 데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기도의 용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지 말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그는 누구이며 자기는 어떤 죄인인지, 그가 자가를 구원해 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은혜의 통로가 어떻게 마려된 것인지, 거듭나서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황홀한지, 이 세상을 아우르는 천국의 크고 비밀한 세상이 계시되는 황홀함이 어떤 것이지, 새 힘이 어디서 솟아나며 주를 찬양하고 싶은 생각이 왜 솟는 것이지……. 그 은혜의 강에 자기를 던지고 잠시 지금까지 해오던 기도를 멈추고 오직 감사하며 주를 묵상하고 오래 참고 기다리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기도의 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경지였다. 어떤 사람들은 속이 후련하지 않다고 집에 가서 다시 큰 소리로 기도 하거나 아예 큰 소리로 울며 기도하는 다른 교회의 새벽기도에 나가기도 했다. 이런 내부 사정과는 달리 천 목사는 설교 잘하는 목사로 이웃에 소문이 났다. 그 목사는 새 바람을 일으키는 분이라고 극찬하며 자기 교회는 변화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소리도 들려 왔다. 특히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그 동안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왔다. 말씀교회는 목회자를 잘 만난 복 받은 교회라는 외부 소문 때문에 내부에서는 밖으로 들어내 놓고 불평을 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이런 새로운 변화는 교인들은 불안하게 하고 적응하기 힘들게 하기도 했다.
일년이 지나자 천 목사는 전 교인이 말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 주변에는 교회에 들어올까 말까하는 주변인들이 있는데 먼저 이들을 전도해서 교회 안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고 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 와서도 교회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받은 은사를 따라 역할을 맡고 헌신하는 자리에 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신할 뿐 아니라 이제는 헌신할 사람을 양육하는 핵심 멤버를 길러야겠다고 했다. 먼저 다음해를 위해 구역인도자와 성경공부 인도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아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와 밤 8시에 목사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교재는 자기가 개발한 책이었다. 직장인을 위해 밤에 모이는 반도 함께 개설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잘 모이지 않았으나 밤에 모이면 거의 12시가 되기까지 흩어지지 않고 열심을 내어 토론을 하게까지 되었다. 목사가 헌신적으로 너무 고생한다고 안타까워하며 목사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중보 기도모임도 생겼다. 이런 기도 모임은 전임 목사인 김성령 목사 때부터 잘 훈련 되어온 그런 모임이었다. 이렇게 다시 일년이 지나자 새 해 초부터는 모든 구역 인도자들을 훈련받은 사람들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구역 인도 교재도 목사 스스로 개발한 것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너무나 큰 혁명이었다. 지금까지는 나이 많은 장로나 권사들이 구역 인도를 했는데 교육을 안 받았다는 이유로 바꾸어버리니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구역 예배란 말씀만 배우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구역원의 사정을 알고 기도하며 보살피는 것이 구역인데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구역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한 편에서는 지루하게 책이나 읽고 헌금이나 걷는 것보다 훈련된 인도자가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특히 이것은 구역예배가 아니라 목사가 지난 주일에 설교한 내용을 가지고 묵상하고 말씀을 나누며 교제하는 일이었다. 그 뿐 아니라 목사는 주일마다 일부 예배 전에 그리고 점심 후에 전 교인을 특성에 맞게 반을 만들어 성경 공부 반을 개설했다. 이 때도 교재는 목사 자신이 개발한 것이었다. 교회의 구역예배, 성경공부 등을 모두 자기가 개발한 교재로 통일한다는 것은 모든 교인들에게 자기 목소리 외에 다른 목소리를 못 듣게 하는 세뇌공작이며 천 목사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생겼지만 목사는 모든 교인이 같은 날, 같은 내용으로 공부하고 묵상해야 견고한 공동체가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물론 인도자는 다 훈련받은 젊은이들이었다. 나이 든 분들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이건 즐거운 교회생활이 아니라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 학교 같다고 말했다. ‘주일에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찬송하고 설교에 은혜 받고 돌아가면 되지 신학생도 아닌데 무슨 공부가 필요한가? 설교를 듣고 구역예배 때는 그 말씀을 되씹고 깨닫고 실천한 것을 나누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다. 읽으면 어렵고 잠만 오는 성경은 설교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덧붙일 말이 무엇이 있는가?’
교인들은 더욱 구역예배에 가기 싫어졌다. 전에는 시원찮은 인도자의 설교가 듣기 싫었는데 이제는 무슨 말을 하라고 시키니 더욱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점차 답답해진 교인들은 떠나 가버린 전임 김 목사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부흥강사는 지금까지 잘 방향을 잡아놓은 교인들을 흩어놓고 기독교를 무속 종교로 타락시킬 우려가 있다고 천 목사는 반대했다. 당회는 처음에는 목사의 의견을 좇아 부흥회를 반대했으나 교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부흥회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목사는 그러면 강사는 자기가 정하겠다고 말했다. 강단에 설교자를 세우는 것은 목사의 고유권한이라고 인식하고 있던 당회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2박 3일의 부흥회가 시작되었다. 박수를 하며 찬양을 하고 “주여!” 3창을 한 뒤 통성기도 후 강사가 단상에 올라왔다. 그런데 이 부흥강사는 강대상에 올려놓은 헌금 봉투를 들고 일일이 이름을 부르고 축복기도를 하는 순서는 빼버리고, 수북이 놓인 봉투는 쳐다보지도 않고 주기도문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설교만 했는데 병자가 낫고, 불면증이 사라지고, 가정문제가 해결된 실례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첫날 오후와 저녁시간 내내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설교로 말씀을 끝내었다. 주기도문을 너무 많이 외웠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생각하기 보다는 귀신을 내 쫓는 주문(呪文)처럼 아무 뜻도 모르고 외우고 있다고 말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려면 지금까지 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배운 모든 의식을 다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성수주일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려야 한다. 곗돈 붓듯이 내는 십일조가, 십일조가 아니다. 이런 율법적인 틀을 깨버리지 않으면 성도 들은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화석 같이 굳어진 사고의 틀 속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비하고 놀라운 세상을 체험할 수가 없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이 제한이 되고 화석화되기 때문이다. “기도합시다.” 하면 기관총을 쏘듯이 외쳐대는 전통을 버려야 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다고 상상해보라. 자비로운 하나님 앞에서 따발총 같은 간구가 나오겠는가?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이며 나는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욥은 하나님을 만난 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로소아다.” 라고 말 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무언으로 시작 되어야 한다. 기도는 구하고 응답 받는 것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에 넘치는 목소리로 “아버지!” 하고 그의 품에 안기는 느낌으로 부르게 되면 벌써 모든 간구가 이루어지고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 의로운 아버지시다. 그리고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들의 아버지시다. ……
강사는 이런 식으로 부흥회가 아니라 강해설교를 했기 때문에 처음에 회중 속에서 나온 몇 번의 ‘아멘’ 소리도 사라져버렸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여 집사 몇 사람이 신앙 상담을 위해 목사를 방문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 집사의 물음에 목사가 대답했다.
“집사님은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았지요.”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스스로 구원 받을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죄 없는 의로운 분이 우리 죄인을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구워해 주신 것입니다.”
“어디서 배우셨나요?”
“교회에서 배웠습니다.”
“그렇게 줄줄 외우는 것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집사님은 죄인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왜 죄인입니까?”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지요.”
“정말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고 느끼십니까?”
“그럼 왜 제가 죄인입니까?”
“집사님은 죄인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교회에서 죄인이라고 세뇌한 겁니다. 집사님은 지식의 열매를 따 먹은 사람입니다. 남이 가르쳐 주어서 죄인이 아니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신앙 상담 뒤 이번 강사는 이단인 것이 틀림없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가만히 들어 와서 성도들을 현혹케 하는 거짓 교사나 적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한 내용으로 보아 그런 증거가 분명한 것도 아니었다. 젊은이들 중에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받았으며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날 저녁 신앙상담 시간에는 남자 집사들이 찾아 갔다. 정말 이단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목사님, 교회는 새벽기도를 잘하고, 십일조를 잘 바치며, 하나님의 일에 열광적으로 따르는 성도들이 많아야 부흥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먼저 목사를 떠보는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도 속에 우리는 새벽기도 잘 나갑니다. 십일조 잘 냅니다. 하나님 일 열심히 합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뢴다면 행위 신앙입니다. 이중 어떤 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하는 일에 보탬이 됩니까? 우리 같은 죄인이요 미물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데 일조할 수가 있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함으로, 즉 서로 사랑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복 받고, 병 낫고, 사업이 잘되고 성공하기 위해 기도하러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만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의 유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유익은 그런 개인적인 정욕을 다 버리고 경건의 훈련을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유리의 영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우리의 세계가 육체적인 곳에 한정되지 않고 영적인 세계까지 확장되어 주님이 다스리는 주권 하에 들어가게 되면 나는 그의 백성이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을 이 영역으로 인도하면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되고 그 하늘나라가 확장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엉뚱한데요. 이건 교회가 우리를 지금까지 세뇌한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우리를 세뇌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처럼 기도하고 그 기도대로 살아 보십시오. 여러분은 거듭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남자 집사들도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나왔다. 현 교회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단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야릇한 감정이 되었다.
이렇게 부흥강사는 2박 3일 내내 주기도문만 강해하고 떠나 버렸다. 울고 기도하고 축복 받고 …… 이런 카타르시스가 있어야 하는데 이 부흥회는 결국 스트레스만 더 쌓이게 했다. 이 부흥회 때문에 교회가 부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생겼다. 교인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천 목사는 신학교 교수나 할 일이지 목회자가 아니다. 책만 많고 책만 많이 읽으면 뭐하냐? 교인들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우는데……, 성령 안 받고 목회하는 목사가 목사냐? 성경 몰라서 신앙생활 못하는 사람 봤어? 매 주일 성경만 풀어 주는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교인들은 이제는 다른 목사들의 설교를 원했다. 그래서 각 선교회 헌신예배 때는 신령한 목사들을 초청하려 했다. 그러나 교파가 다르다, 신앙 노선이 다르다, 목사가 아니다 등등의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6년 째 되니까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도 목사에 대한 비난이 뜨기 시작했다.
‘목사는 자기 교만을 버리고 이 교회를 떠나라. 훌륭한 성경 교재도 많은데 왜 자기가 개발한 교재만 고집하는가? 예수님을 자기가 만든 현미경을 통해 보고 있으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 있게 잘 표현하여 성도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닮아갈 결단을 하게 하면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는 말씀의 선포이다. 당신만 설교 잘한다고 자기 절대화를 하지 말라. 또 목사만 신학교육을 받고 설교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 못이다. 우리 교회에서 훌륭한 강사의 말씀을 가로막고 못 듣게 하는 바리세인 같은 목사는 스스로 자숙하고 떠나라.’
당회에서는 목사에게 다음 일년은 부임한지 7년째이기 때문에 안식년 휴가로 일년간 성지 순례든 외국 여행이든 또 훌륭한 교회 순례든 어떤 방법으로든 영적으로 재충전을 받고 오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목사는 반대하였다. 자기는 안식년 휴가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 교인들의 불평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교회가 빛 가운데 서고자 할 때 언제나 일어나는 마귀의 장난이다. 일년 동안 강대상을 개방하면 6년간 쌓아놓은 공력이 무너진다. 이럴 때는 장로들이 자기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이 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다.’
이렇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천 목사도 자기의 철학과 정열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붕괴 직전이었다. 당회원들이 따로 모였다. 이 교회는 목회자가 7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다. 이 목사도 떠나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렇다할 흠을 발견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당회원이 지금까지 최후의 수단으로 썼던 “목사 자진 사퇴 권고”의 건의문을 연명으로 써서 서명하여 제출하였다.
대표자가 이 글을 들고 목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목사님은 여러 가지 훌륭한 점이 많다. 우리 교회에 기여한 것도 많다. 그러나 우리 교회 교인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 건의문을 드리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탁자 위에 놓고 왔다. 목사가 ‘나는 법적으로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맞서면 교회는 갈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목사는 일개월간 기도원에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사라져 버렸다. 목사가 안 나타나자 한편에서는 훌륭한 목사를 쫓아내려고 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는 떠나야 한다고 후련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 교회가 요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교회에 나타난 목사는 “유레카”라는 제목으로 주일 설교를 하였다. 교인들은 ‘유레카’라는 듯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경 본문은 요한복음 16 : 21이었다. 성도들은 목사가 한 달 동안 기도한 뒤 어떤 설교를 할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설교는 기도의 깊이만큼 깊어진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 번에는 좀더 다른 설교를 예비해서 들려주리라고 기대했다. 부패한 교회를 위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설교를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교인을 무시하고 교만했던 것을 회개하는 설교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먼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며 과학자인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로 설교의 도입부분을 열었다. 이태리 남방에 있는 시라쿠사 섬에 있던 히에론 왕이 금세공인에게 맡겨 만든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닌지 알아내라는 명을 받고 머리를 짜내고 있던 아르키메데스가 하루는 목욕을 하고 있다가 물 속에서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에 이것은 아르키메데스의 부력의 원리라고 알려 졌는데 그는 이 부력을 이용하여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를 아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옷을 벗은 줄도 모르고 거리로 뛰어 나와 “유레카(발견했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였다. 새로 발견한 진리에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으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있었겠는가? 성경에는 이렇게 크고 비밀한 보물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 성경을 수십 번 통독하면서 이런 비밀의 창고를 열어보지 못하면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중세에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써진 말씀에서 구원은 행위가 아니며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에 그는 이 구절을 통해 그가 중생했으며 낙원에 이르는 열린 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느꼈다고 기록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묵고 있던 정원에서 “집어서 읽으라. 집어서 읽으라.”는 어린애들의 목소리를 듣고 성경을 편 곳이 로마서 13: 13-14였다. 그는 이 문장의 마지막 단어들을 읽고나자 모든 의심의 그림자들은 사라져버렸다고 쓰고 있다. 그는 구습을 완전히 벗은 것이다.
목사는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 제 친 어머니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아무도 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도 형제들도 싫었습니다. 오직 교회에 나와 울며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는 요한복음 16:21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홀연히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가셨지만 지금 천국에서 나를 보고 흐뭇해하고 기뻐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생에서는 세상에 난 아들을 보고 해산의 고통을 잊지는 못했어도 의로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천국에서 그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를 기뻐하시는 어머니를 볼 때 나는 힘을 얻고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지금 제가 고학을 하면서 이 자리에 온 것은 그 말씀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할 때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서 공부를 하던 젊은 사람들은 공부 도중 “내가 놀란 것은 이 교회 신도들이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정말 저 목사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목사라고 생각했다.
“여러분도 성경을 읽다가 ‘유레카’ 하고 외치는 순간이 있기를 빕니다.”
하고 설교를 마쳤다. 몇 사람을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멍청해진 표정이었다. 한 달 동안이나 기도를 하고 왔으면 태도를 분명히 하는 설교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너무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떠나겠다는 거야, 남아 있겠다는 거야?’
그날 오후 목사는 당회에 사의를 표하고 며칠 뒤 교회를 떠났다. 결국 칠년 징크스를 못 깬 것이다. 곧바로 당회는 목사가 사표를 노회에 제출한 것을 확인하고 노회에 임시당회장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하고 또 목사청빙위원회를 구성했다. 당회에 있는 정치 장로의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이런 일을 늘 겪어온 교인들은 또 새 목사가 오겠구나 하고 교회 땅을 밟고 들어와 예배를 드리고 또 교회 땅을 밟고 세상으로 나갔다.
“칠년도 못 채울 교회에 이번에는 어떤 목사가 올까? 말씀교회의 이름을 바꾸어야 되지 않을까?” 하고 밖에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얼마동안 그러다 말 것이었다. 천당 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