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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자전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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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사기행각에 당했다
"전북 임실 섬진강 생활체육공원~전남 광양 배알도 해수욕장 총 148km에 이르는 구간.
역사와 문화가 함께 있는 섬진강 자전거길, 6월 29일 개통."
"섬진강과 영산강을 잇는 26km의 자전거길도 함께 개통됨으로서 영산강 길(133km)과
섬진강 길(148km)이 이어져 모두 307km의 종주자전거길이 완성."
해당장관이 나와 준공식을 빛나게 했으며 "목포에서 출발해 광주,담양을 거쳐 광양까지
남도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전거로 즐길 수 있게 됐다"는데 어찌 군침 돌지 않겠는가.
더구나, "순창과 남원 경계에 일제때 철도를 놓다가 중단, 방치돼 있던 폐교각(219m)과
폐터널(390m)을 리모델링해 친환경적이고 안전한 자전거길로 새롭게 재탄생.
목교 중간에 설치된 투명강화유리 바닥의 ‘스카이 워크’는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해 섬진강 자전거길의 랜드마크가 될 것.
구례 구간에는 24km에 달하는 벚나무 터널 구간(각 12km씩 2개소).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에 뽑힌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벚나무 터널구간에는
기존 도로의 가장자리를 최대한 확, 포장해 안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조성.
광양의 폭넓은 제방구간에는 자전거길이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게 S자 형태의 자연스런
곡선으로 포장해 색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했고, 길 양 옆에 4계절 꽃나무를 심어서
자전거길에서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조성"
등 방송과 신문이 도배를 하는데 넘어가지 않고 배기겠는가.
마침, 개성공단입주기업 직원들의 공단재가동 촉구 국토종단 걷기행사에 동참하려다가
거절당한 때라 지체 없이 나섰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희대의 사기행각에 당했다.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위에 열거한 내용들이 새빨간 거짓임이 밝혀졌다.
간이 배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길이다.
장관을 비롯해 공무원이란 자들이 백주에 사기꾼에 다름 아닌 짓을 하는데도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줄줄이 베껴낸 소위 언론 종사자들을 뭐라고 평할까.
쓰레기에는 재활용품이라도 있는데 저들에게는 그럴 여지마저 없는 것 같다.
광양예찬 :앞문을 열면 숭어가 뛰고 뒷문을 열면 노루가 뛴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나는 마치 소풍 떠나기 전날 밤의 어린이였다.
늙은이와 어린이의 유사성을 들지 않더라도 공차증에 시달리고 있는 내가 차 없는 강변
길을 열흘 이상 신명나게 걸을 것을 상상하는데 어찌 아니 들뜨겠는가.
막막한 들머리 진입 때문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알만한 길을 택했다.
작년 서남동길에 걸었던 광양제철의 태인동에 속한 배알도를 들머리로.
2013년 7월 17일 새벽 4시 반,
밤새워 내리고도 왕성한 힘을 뽐내는 듯 여전한 장맛비에 아랑곳없이 우이동 집을 나섰
으나 고백컨대 약간 심란했다.
여수행 무궁화호 첫 열차가 대전권을 벗어날 때까지도 그랬으나 순천은 예보대로 폭염.
광양은 호남정맥종주(백운산)때 안면을 텄고 작년의 서남동길로 낯설지 않아 좋았으나
종합버스터미널의 홍보대까지 낯설지 않게 하려 함인가 그때 그대로 텅 비어 있다니.
홍보물로 채워 있어야 할 박스가 텅 비어있음은 관리 담당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인가.
그래도, 보기 드물게 친절하고 광양시의 홍보대사로 위촉해도 될 만큼 광양을 알리는데
열성적인 시외버스(태인동 경유) 기사를 만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택시타라는 하나같은 말 대신 지름길을 가르쳐 주고 그의 권고로 우리나라 김의 시식지
(始殖址/태인동 829-1, 궁기마을/전라남도 기념물 제113호)도 들러보게 되었으니까.
삼봉산(해발222m) 자락, 지금은 뭍이 된 땅이다.
완도김, 광천김 등이 내로라 하나 360여년 전(1640~1660) 김여익(金汝瀷/1606~1660)
이 광양현 인호도(仁湖島/현 太仁洞)에서 최초로 김 양식방법을 발명, 보급하였단다.
'김'이라는 이름도 그의 성(姓)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광양 예찬도 잊지 않았다.
앞문을 열면 숭어가 뛰고 뒷문을 열면 노루가 뛴다는 말이 있을 만큼 부족할 것이 없고
"조선 제일은 전라도요 전라도의 으뜸은 광양"(朝鮮之 全羅道, 全羅道之 光陽), 즉 전국
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광양이라고.
이는 전국을 암행한 어사 박문수(朴文秀(1691~1756/영조때)의 종합평이라고 소개했다.
기이한 점은 동시대의 사람이며 풍수지리의 대가,택리지(擇理志)의 저자인 청담 이중환
(淸潭李重煥)이 박문수와 달리 광양에 대해 침묵한 것.
하긴, 그는 전라도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했지만 실은 전라도땅을 밟아보지 못했다고(夫
全羅則余所不見/擇理志 卜居總論 山水) 고백한 사람이니까.
태인도(太仁島)는 광양시 섬진강 하구에 위치한 섬이었으나 국가산업단지, 광양제철소
연관단지, 국민임대산업단지가 들어섬으로서 육지가 되었다.
건너편 망덕산(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을 향해 절하는(拜謁)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는 배알도 역시 섬진강 하구의 북단, 경남 하동군과의 경계에 있는 작은 솔섬이다.
지금은 해수욕장 기능은 상실되었으나 섬진강 하류와 남해의 푸른 바다가 만나는 해변
공원과 북쪽으로 뻗어있는 삼봉산은 해인동 주민의 오랜 벗이며 쉼터란다.
2번국도를 따라 태인대교를 향해 걸었다.
거창한 준공식을 치룬 섬진강자전거길의 배알도시종점에 가기 위해서는 태인대교 입구
에서 2번국도를 이탈하여 500여m쯤 우측으로 가야 한다.
시종점(始終點)의 의미는 시작하고 끝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바로 시작하고 마치는 태인대교 남단을 두고 왜 500여m 이상 중복 운행하는
배알도 해변공원으로 하여 헷갈리게 할까.
공원 바닥을 포장하듯 방부목을 깔면서.
이제는 방부목 시비할 여력마져 쇠진되었으며 나처럼 걷는 사람은 무심코 걷다가 하동,
남해로 빠지는 섬진대교 한하고 가기 싶상이겠다.
섬진강 자전거길에서 윤동주를 생각하다
폭염에 출발도 하기 전에 알바를 한탕 뛴 셈이다.
다시 태인대교 남단으로 나왔다.
조금만 손질하면 시종점으로 손색 없을 위치다.
강을 건너면 광양시 진월면이다.
태인대교에서 바라보면 강심에 박혀있는 짙푸른 배알도가 그림같다.
자전거길은 진월면 망덕산자락으로 난 861번 해안도로, 망덕길 양끝을 차용하고 있다.
해발 197m 망덕산(望德)은 덕유산이 보인다 하여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단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기한 한 줄기가 진안 주줄산에서 광양 백운산까지 호남정맥을
이루고, 호남정맥은 백운산에서 망덕산을 거쳐 섬진강 망덕포구로 뛰어든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상추막이골(신암리)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도 3도 550리의 긴
여정을 망덕포구에서 마감하고 광양만과 남해로 흘러간다.
그래서, 망덕포구는 기수역(汽水域/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염분이 적은 지역)으로 전어,
뱀장어, 재첩 등이 유명하단다.
특히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9월) 전어잔치는 늘 대성황이라고.
망덕포구의 긴 횟집거리도 진월교를 건너 선소(船所)마을 한하고 방부목 데크 판이다.
당장에는 새 맛이라 걸을만 하지만 풍수재 아니라도 오래잖아 뒤틀린 널판들이 삐거덕
거리다가 튕겨나올 것이며 사람들의 기피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횟집들 사이에 특별한 집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알려진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유고를 잘 지켜
냈다는 공로로 '등록문화재 제341호'(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로 지정된 집이다.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민족적 저항시인 윤동주는 항일 동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되어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한데, 만주 간도지방 출생이며 1938년(22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할 때 최초로 남하한
그와 전남 광양 출생이며 5년 연하인 정병욱((鄭炳昱/1922~1982)은 어떤 인연?
발동한 궁금증을 누르고 걷기를 마친 후 뒤져보았다.
윤동주의 연보에 의하면 졸업하던 해 5월에 누상동(종로구) 김송(金松/소설가) 집에서
정병욱과 하숙했으나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9월에 다시 북아현동으로 옮겼다.
12월에 졸업후 곧 귀향했기 때문에 후배 정병욱과의 교유기간은 짧았으나 진지했던 듯.
당시의 지식인에게는 항일과 친일의 2분법 외에는 있을 수 없었으므로 그랬을 것이다.
윤동주는 출판이 좌절된 시집의 원고 2부를 필사하여 존경하는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
후배에게 1부씩 주었는데 정병욱의 소지분만 살아남았다는 것.
보관을 의뢰한 원고가 아니고 활자화 되지 않았을 뿐 자기의 시집을 필사해 기증한 것.
정병욱이 항일, 옥사한 선배와의 관계를 얼마쯤은 과장했을 것이다.
함께 간도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던 죽마고우 문익환 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미루어 본 결론이다.
도마에 오르고 있는 윤동주의 창씨개명도 유학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지만 성서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친 것처럼 개운치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는 간도 태생이다.
독립운동하기 좋은 여건을 가진 그가 굳이 창씨개명까지 하며 일본유학을 강행했다.
성삼문은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숙제를 원망했건만.
그의 연배 유학생 중에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도 있다.
일제의 말기적 과민반응에 비교적 유연하고 촉망되는 젊은 서정시인이 희생된 것이다.
27세에 옥중요절한데다 마루타 생체실험설까지 제기되어 우리 국민의 감성지수가 지나
치게 올라간 건 아닌지.
화장실이 마음의 편지를 보내는 곳?
데크의 끝자락 쉼터에서 장애인용 전동스쿠터에 앉은 두 촌로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81세인 박주윤 옹은 쉬었다 가라며 차조심을 강조했다.
교통사고로 장애인스쿠터에 의존하는 그들의 말은 연배의식에서 나온 주의환기 차원의
당부였겠지만 잠자고 있는 내 공차증을 깨운 것만은 분명했다.
차 없는 자전거길을 걸으러 온 늙은이가 공차증에 시달려야 한다면?
차량의 통행이 뜸해서 다행일 뿐 차로의 가장자리에 파란줄을 그었을 뿐인 일부 구간에
실망하고 있는데.
아동(鵝洞)마을 입구 청룡식당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861번도로를 떠나 차 없는 길이 남해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섬진강대교 밑으로 이어진다.
첫날 처음으로 편한 걸음이었으나 지극히 잠시일 뿐이었다.
자전거 전용으로 강따라 조성된 방부목 길이 위험천만이다.
차로와 다리가 차량의 하중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전부인가.
가냘픈 철빔(beam)이 자전거의 하중만 견뎌내면 되는가.
오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 후 '기상청 개청 이래 처음' 이라는 상투적인 면피용 용어가
사용될 것이다.
강 건너 하동쪽 섬진강도로(19번국도)를 달리는 차량들과 경비행기가 뜨고내리는 둔치
(고전면 전도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지점, 오사리에서는 산 하나가 절단나고 있다.
오사배수펌프장 앞에서 드디어 명실공히 자전거전용 섬진강 자전거길에 들어섰다.
맑고 아름다운, 원형 대로인 섬진강을 끼고 걷는 군더더기 없는 이 길을 걷기 위해 내가
온 것이다.
저녁놀이 섬진강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는 시각에 차 없는 자전거도로를 산책하는 마을
주민의 표정도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자전거길 준공을 뽐낼만 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잔뜩 고양된 환희는 얼마 가지 않아 맞닥뜨린 황당한 화장실이 앗아가버렸다.
오사리 시평마을 앞 강변, 자전거길의 빨간 우체통 모양의 화장실이다.
하필 곧 배달될 희비애락의 소식이 모이는 우체통을 형상화 했을까.
더구나 화장실이 "마음의 편지를 보내는 곳"이라고?
그 알량한 머리들은 지체 없이 동해안 간절곶(울산시 울주군 서생면)에 서있는 초대형
'소망우체통'을 보고 오라.
비치되어 있는 전용 무료엽서에 사연을 담아 우체통에 투함하면 어김 없이 배달된다.
문득 소식 전하고 싶은 주자들이 잠시 멈춰서 엽서 한장 던지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할 것 같은가.
길에 도취되어 걷다가 해가 진 것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만나는 이들 붙들고 정자를 물었으나 없다거나 모른다 일색에 적잖이 당황되었다.
그까짓 하룻밤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믿음 없는 자여.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태평하게 한 '야훼 이레'를 잊었느냐.
걷다가 둔치의 나무 그늘 밑 아무데나 자리잡을 요량을 함으로서 여유로워졌는데 조금
더 전진하여 만난 이들로부터 100m도 못가서 정자가 2개나 있음을 안내받았다.
그들이 아니라도 어차피 곧 발견하게 될 정자들이다.
그보다 겨우 걷기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자전거길로 피서나온 그들이 더 염려되었다.
희미한 불에 의지해 쏜살같이 달리는 자전거가 때로는 환한 자동차보다 더 위험하다.
피아가 모두 피해자가 되며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다.
마(魔)의 자전거길이 되지 않으려면 전 구간에 걸친 대책이 시급하다.
돈탁(烏沙里 敦卓)마을 어귀의 정자 구인정(龜仁亭)이 섬진강길 첫밤을 맞아주었다.
"섬진강변으로 기어나오는 큰 거북 한마리를 본 마을처녀가 산이 움직인다고 외쳤다.
그녀의 눈에는 어슬렁대는 거북의 모습이 마치 움직이는 산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그 순간 거북은 사라지고 거북이 목을 빼 섬진강물을 마시는 형국의 산이 등장했다"
구인정의 유래란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의 장려상 수상 경력이 있는 100수(壽) 해송숲을 앞병풍으로 하여
섬진강가에 고즈넉이 자리한 돈탁마을은 500여년 된 김녕김씨 집성촌이란다.
(마을을 조금 지나면 김녕김씨 충의공파 돈탁소문중공원묘원이 있다)
원래 섬진강변에 돌더미가 많아 돌터미, 돈태기, 돈택 등으로 불리다가 일제(1914년)의
지명 한자화 작업때 敦卓(돈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는 마을 이름이란다.
37세대 150여명 주민의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안온한 느낌이다.
마을 앞 섬진강에는 작은 나루가 있다.
뗏목장이 섰다는 돈태기나루다.
임실,보성 등지의 벌목꾼들이 뗏목을 만들어 섬진강을 타고 여기까지 와서 팔고 갔단다.
제재소가 생기고, 운반 트럭들이 드나들고,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짐에 따라 주막들이
늘어나고 술도가까지 등장했다는 것.
지금은 모두가 '아, 옛날이어" 일 뿐이고 비닐하우스 오이와 수박이 주 생업수단이란다.
부지런하면 사는데 걱정 없다는데 돈탁마을만 그런가.
서울의 새벽버스(4시반 전후)와 지하철 첫차(5시반 전후)가 늘 만원인 것은 서울생활의
고달픔을 의미하는데도 왜 시골을 거부하고 서울로 집중하는가.
사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인가.
내 사는 의미는 무엇이기에 사는데 걱정없다는 마을에서 첫날부터 저녁을 굶는가.
마을과 상거가 있는데다 밤이라 물 구하기도 용이하지 않아 장기(長技)를 발휘한 것.
태인대교 건너 마리나식당에서 먹은 백반이 아침이며 점심겸 저녁이 된 셈이다.<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