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부터
모동, 모서 를 포함 중모현"으로 ,
화서 화동 화북을 포함 화령현' 으로 칭하여
중모의 중"자와 화령의 화"자를 따서
지금도 상주 서부 지역을 중화 5개면 "이라 부른다
따라서 중모장과 화령장은 산촌지역 사람들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삶의 터전이되어 왔는데
특이한것은 화령(화동 화서 화북) 지역은 6,25 동란당시
전장터로 치열한 싸움과 피난민이 많았으나
중모지역은 백화산 그늘속에서 비교적 안전한 피난생활을 하여왔다는것이
어르신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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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맞아 우리 중화지역의
6,25 전쟁당시 기록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갈령재 (화령장 ) 전투

화령장 전투가 원래 갈령전투라 기록되어있다
갈령은 충북괴산을 거쳐 화북면 소재지 - 갈령재 -화령장 -화동신이티재
를 통해 상주로 연하는 그당시 도로 요충지이며 특이 인민군들이 비밀리에 남하하는 루트였다
당시 국군이 우왕좌왕 하는동안 승승장구하며 남하하든 인민군15사단은
대구를 점령 목표로 갈령재에 다다르게된다
그러나 민간으로 가장 ,자전거를타고 정찰나온 인민군 전령을
화서면 상곡리마을 주민의 신고로 생포하고
전략을 자백받은
국군 제 17연대가 연대병력 약350 여명으로 상곡리 일대에 매복을 펼쳐 6일만에
인민군 15사단 선발대 약 1200 여명 병력을 몰살 시키게 되는데
기발나고 엄청난 전투가 벌어지게된다

갈령계곡 6,25당시 미군 지엠씨 트럭이나 넘어다니든 험준한고갯길 포장도로가 보인다
당시 15연대를 지휘하든 김석연 장군은 (당시대령)
인민군 과 같이 자신이 먼저 박박 머리를깎고
이마에 꽁지머리만 조금남겨 야간에 손으로 만지면 적군과 표시나게
육박전 전투를 준비하여
죽을 각오로 부하들의 용기를
1950 7. 17. 부터 25일 까지 약 일주일 동안
3분 1도 안되는 병력으로
적군을 골짜기로 몰아넣어
전멸을 시키고 뿔뿔이 도망치는 인민군은
야간에 육박전술로
몰아 한명도 남기지 않았다고한다
원로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면
그당시 도망가다 산속에숨어 있든 인민군 한두놈은
배가곺아 아직 밤톨만한 땡감을 몰래 따먹다가 붙잡혀 죽기도 했단 얘기다

겨우 넘나들수 있도록 도로를만든 기념으로 세운 비.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을 살린 총알자욱이
그 당시를 말해주듯 상쳐 투성이다

갈령재정상 고갯길이다 여기서 속리산 천황봉으로 백두대간을 잇는 등산로가있다
김석연 장군이 이전투에서 승리하므로서 낙동강 전선구축을 6일동안이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아군이 반격실마리를 갖개된
아주 중요한 전투로 다부동 전투다음으로 치열한
전투로 기록되고
지금도 국방대학원생 또는 중요 군 지휘관들이
화령장지구 전적비에 매년 참배하고 그당시
대승할수 있엇든 전술을 재연하고 실습하고 있다


화령 지역 주민들은 전란을 직접 경험하여
그런지는 몰라도 타지역 주민보다 애향심이 강하고
지역 의 표지석하나 기념비 하나라도 찿아 세우고
아직도 노인회관 지역원로 들의 의사를 묻고
지역일을 결정처리하는 것을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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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6,25,전쟁은
예견된것이였다고 한다
사변 1년전인 1949,년 초부터 인민군은 벌써 남한곳곳 요소요소에
내려와 배치되어 있었고
이미 파출소 중요기관이 습격을밭아 국방과 치안은
마비상태 방치상태였고
정부 고관들은 미국 영국서 공부한
신사들로 일요일은 어떠한일이 있어도
즐거운 나날만보넸다는것 역사로도 알수있다

화북파출소도 49, 4월경 피습을빋아 당시
직원들이 순직하고 화북지서장은
변소 ㄸ통속에숨었다가
농암으로 도망가는것을보고
주민들이 2개월간 돌을 이고지고 담을쌓아
의용경찰로 지역을 방위해온 돌담이 무너져
그돌로 내가 탑을쌓아
그당시 아픔을 기리고 있다

육군 간호장교 출신 화북보건 진료소장(김인숙)소설가에게
6,25당시 애환이 깃든
시한수부탁하여
새겨 놓고보니
그래도 잘했구나 생각듭니다

2001년 상주시장님게께 예산 조금받아 조경도하고 탑도 쌓았습니다
화북 갈령재 골짜기
세월이흘러도
찔레꽃 아카시아 흐벅지게 피고 지건만
아직 솜털도 가시지않은 어린 학도병의
엄마찿는 목소리가 들리는듯
.......
정말
우리가 조국를 사랑하는만큼
조국도 우릴 좀 사랑해
주길 바라면서
향불하나 피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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