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더의 피를 끓게 하는 100년 넘은 엇박자 엔진소리
- "미쳤구나!" 펄쩍 뛰던 가족이 어느새 "나도 탈 수 있어?"
- 범상찮은 복장·분위기 불구 풍경 즐기는 도로 위의 신사
곁눈으로 봐도 불량스럽다. 복면에 검은 선글라스, 가죽재킷과 부츠, 몸을 치렁치렁 감싼 금속 체인에 굵은 목걸이와 반지하며…. 허리춤에 작은 단도를 찬 이도 보인다. 오토바이 없이 외진 골목길에서 마주쳤더라면 꽤 당혹스러울 법하다.
육중한 차체에 엔진음이 귀청을 때리는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이들을 볼 때가 있다. 범접하기 난감한 분위기와 할리우드 영화로 '도로의 이단아' 쯤으로 오해받는 그들이다. '무섭다' '멋있다' '부럽다'란 생각에 앞서 궁금증 하나가 고개를 든다. 대관절 뭐 하는 사람들일까?.
막상 헬멧을 벗고 복면을 푸니 순박한 얼굴들이 나온다. 다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재롱부리는 손자의 유혹을 뿌리치고 바이크를 끌고 나온 60대도 꽤 있다. 어라, 여자도 한 명 끼어 있다. 부산에서 유일한 부부 라이더란다.
바이크의 대명사인 할리 데이비슨의 뿌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1903년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어느 낡은 판잣집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스무 살 친구 사이인 윌리엄 할리와 아더 데이비슨이 자전거 체인에 동력장치를 연결하면서 현대 모터사이클의 역사가 시작됐다.
우리나라에 할리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지는 올해로 11년째. 3500~4000대 정도가 국내 도로를 달리고 있다.
근데, 이런 시끄럽고 불편함이 할리의 매력이란다. 단순한 오토바이를 넘어 100년 전통을 이어간다는 라이더의 자부심도 상당하다. 할리가 왜 모든 라이더들의 로망이 되었을까.
할리에 중독된 라이더들과 투어를 하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살짝 엿봤다.
'두둥 두둥 두두둥'.
지난 13일 이른 아침의 부산 을숙도공원. 배기량 1500cc가 넘는 할리 데이비슨의 묵직한 엔진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한두 대도 아니고 10여 대가 모여 토해내는 굉음은 가만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려진다. 듣기에 따라 드릴로 땅을 파는 듯한 불규칙한 엇박자 엔진음, 할리의 가장 큰 브랜드다. 말발굽 소리 같기도 하고 인간의 심장박동 같기도 하단다. 여하튼 이 소리에 중독돼 할리에 빠져든 이가 대부분이다. 100년간 변치 않았다는 엔진소리는 특허등록을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부산·경남 지역 할리 동호회(다이나믹클럽) H.O.G.의 정기투어가 있는 날이다. H.O.G.란 'Harley Owners Group'의 약자. 할리 데이비슨을 소유한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할리란 오토바이를 매개로 자생적으로 생겨난 전 세계적인 동호회다. 130개국 100만 명 이상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국내에는 130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짐작했던 대로 행색이 다들 유별나다. 말 붙이기 부담스럽다. 할리 경력이 많고 애착이 강할수록 복장과 액세서리는 더 튀고 요란해진다. 회원 중에 '홍일점'이 눈에 띈다. 올해 서른셋인 김효정 씨. 할리에 빠진 애인의 등 뒤에 앉아 몇 년을 '더부살이'하다 몇달 전 면허증을 따고 소원하던 애마를 구했다. 임신 6개월의 부른 배를 안고 일본의 고속도로를 누볐을 만큼 그녀 역시 못 말리는 할리 마니아다. 그때 애인이자 지금의 남편인 김동우(42)씨는 국내에 할리가 들어오면서부터 타기 시작한 경력 10년의 베테랑. 부산 모임을 이끌고 있다. 부부 라이더로선 부산·경남에서 유일하다.
할리 데이비슨 부산·경남 동호회 다이나믹클럽 회원들. | |
아니나 다를까 '황새 쫓는 뱁새'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꼈다. 통행량이 많은 시내에선 그럭저럭 대열을 맞췄지만 한적한 국도로 빠질수록 스쿠터의 한계를 절감했다. 게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민망할 지경이다. 길게 늘어선 할리를 향해 동경의 눈빛을 던지다가도 중간에 낀 스쿠터를 보면 키득키득 웃는다. 결국 스쿠터를 길가에 세우고 2인승 '탠덤 주행'으로 바꿨다. 예상은 했지만 씁쓸하다.
복면에 요란한 엔진음, 크고 번쩍이는 차체, 할리의 이런 반항아적인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일 뿐이었다. 패션이자 오랜 전통이다. 불량끼 그득해 보여도 주행 에티켓만큼은 신사급이다. 스피드에 집착하는 폭주가 아니라, 여유롭게 풍경과 크루징을 즐기는 게 할리를 타는 목적. 해서 정속 주행이 원칙이다. 또 지그재그 형태로 대형을 갖춰 차선 하나만 달리기 때문에 주위 차량의 흐름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광복절 간선도로에 뛰쳐 나오는 철없는 폭주족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안전도 필수. 선두 바이크가 라디오 주파수를 이용해 무전으로 다른 회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맨 끝 라이더는 차선을 바꿀 때 길을 터주는 역할을 맡는다. 수신호를 통해 주행이나 도로 상황을 수시로 교환한다. 마치 편대를 갖춘 철새들의 비행 같다.
회원 상당수가 중장년 이상이어서 회원 간 깍듯한 매너도 필수 덕목이다. 마산 부근 휴게소에 잠시 들렀을 때다. 화장실 입구에서 회원 두 명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유를 물으니 "어른들 많은데 앞에서 담배 물기 좀 그렇잖아요"라고 답한다. 어른들 눈치를 봐야 한다는 이들은 올해 마흔아홉이다.
말 나온 김에 할리 데이비슨이 왜 좋은지도 물었다. 생활이 규칙적으로 변하고 가정에 충실해지게 되더란다. "다들 오토바이 타겠다면 가족들이 미쳤다고 야단입니다. 하지만 조금 있어 보면 그게 아니거든요. 집에 일찍 들어가죠, 술 끊죠. 나중엔 집사람이 자기도 탈 수 있느냐고 물어옵니다." 다른 회원들도 처지가 비슷하다. 사고뭉치쯤 여겨지던 할리가 가져다 준 놀라운 변화다.
지글지글 불판에 불고기가 익어가는 점심식사 자리. 짬을 이용해 신입회원의 팀복 착복식이 거행됐다. 정식회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신고식이다. 아까 휴게소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한 명이 주인공이다. 가입한 지 3개월이 됐는데 이제야 정회원이 됐다. 할리를 몬다고 해서 아무나 할리 가족(H.O.G.)이 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온 종일 함께 투어를 했지만 할리 데이비슨에 중독되거나 그들 문화를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래봐야 오토바이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되묻거나 '비싼 취미' 쯤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다. 이날 모인 바이크의 가격은 2000만 원부터 5000만 원까지. 복장과 액세서리에 들어간 비용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빠듯하게 사는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분명 괴리가 있다.
하지만 단지 경제적인 것만으로 이들을 이해하기나 평가하기도 어렵다. 차체가 원체 커 속도 내기도 여의치 않고 주체하기도 어려운, 행여 탈이라도 나면 아무 정비소에 맡기지도 못하는 불편한 오토바이에 매료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할리라는 브랜드가 잉태한 긴 역사와 문화를 향유하는 즐거움으로 이해해야 정답에 근접할 듯 싶다.
예정된 사천 앞바다에는 닿지 못하고 문산에서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벌초를 끝낸 차량들이 쏟아지면서 도로가 꽉 막혔다. 갈 때에 비해 길은 훨씬 멀고 지루하다. 하지만 대형을 흐트러뜨리거나 요리조리 빠져들지 않았다. 물론 길이 트여도 과도하게 스피드를 올리지도 않았다. 한 명이 즐기면 레저에 불과하지만 뭉치면 문화가 되고 전통이 되는 법. 할리라는 문화 안에서 이들은 라이더의 로망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 10월25일 한국판 '메모리얼 데이' 할리 200대 부산 도심 수놓는다
- '유엔의 날' 맞아 제1회 나라사랑 부산투어
이번 행사는 날로 퇴색되고 잊혀지는 유엔의 날을 기념하고 시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부산시와 교육청 등의 지원을 받아 나라사랑부산협의회가 주최한다.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한국전 참전 21개국의 국기를 부착한 할리 바이크 퍼레이드는 해운대를 출발, 부산대앞~동래~시청~서면~남포동 등 시내 전 지역을 관통해 유엔기념공원에서 헌화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행사에 동원되는 할리 바이크들은 자원봉사 형태로 할리 동호인 H.O.G. 한국지부 동호회 회원들이 돕는다. 200대 가운데 부산·경남 지역에선 70대 정도가 참가한다. 지난 1999년 처음 300명으로 결성된 H.O.G. 한국지부는 현재 190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