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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왕국(스웨덴어: Konungariket Sverige 코눙아리케트 스베리예[*] 듣기 (도움말·정보), 문화어: 스웨리예)
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반부를 차지하는 입헌 군주국이며 수도는 스톡홀름이다.
스웨덴의 선사 시대는 후기 구석기인 기원전 12,000년경 남부 지방의 브로메 문화(Bromme Culture)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석기 기술을 사용하였으며 나무 열매를 채집하고
순록이나 물고기를 사냥하였다.
기원전 4천 년경의 푼넬 비커 문화(Funnel-beaker Culture)에서는 농사와 가축 길들이기가 시작되었고 다듬어진 돌도끼와 장식된 토기가 부장품으로 발굴된다.
청동기는 기원전 1,700년경에 시작되는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구리가 나지 않으므로 이 시기의 금속은 수입 후 가공된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단층의 긴 목조건물과 농장을 갖추었다.
스베아족(고대 스웨덴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98년의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등장한다. 바이킹 시대의 스웨덴인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세계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장악하고 이 길을 통해 대대적인 해상 원정을 벌였다. 스웨덴인들은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으나 11세기에 올로프 솃코눙이
스웨덴 왕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스웨덴은 제후 연합체였고 군주제도는 라이벌 관계에 있는 왕조들, 더 나아가서는 왕과 봉건제후들의 대립 관계로 주기적인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다.
1397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에리크 13세)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왕이 되어 1439년까지 스웨덴을 통치하였다. 그의 퇴위 후 80여 년에 걸쳐 스웨덴의
섭정들과 덴마크의 왕들은 3왕국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이 되었다.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즉위한 구스타브 1세 바사(재위 1523-1560)는 1718년까지 계속된 바사 왕조의 계보를 확립하고 루터교로 이행하는 종교개혁을 강행하였다.
그의 후계자들 치세에 스웨덴은 루터교, 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서 커다란 난항을 겪었다.
161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즉위와 함께 스웨덴은 루터교로 복귀하였다. 구스타브 2세는 발트 해를 스웨덴의 바다로 만드는 한편 독일 개신교 측의 후견인으로
30년 전쟁(1618-1648)에 참전하였으나 전신 각부에 집중 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초강대국 스웨덴(스웨덴 제국 혹은 발트 제국)은 약 1세기 가량 계속되었으나
칼 12세가 강행한 러시아와의 대북방 전쟁(1700-1721)이 실패로 끝나 와해되었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세기 후반에 구스타브 3세가 국가 중흥에 많은 공헌을 했으나 끝내 암살됨으로써 원점으로 돌아갔다. 스웨덴의 대외 전쟁 참가는 핀란드를
상실하게 된 나폴레옹 전쟁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대규모 군사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입헌군주제는 1849년에 실현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리가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에게 비자를 제공, 입국시켰다. 1946년에 국제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한국 전쟁 때 대한민국에 야전병원부대를 지원하였다.
1946년 총리가 된 타게 에를란데르는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23년 뒤 올로프 팔메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몇 년 뒤 사임하였다. 팔메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월남전쟁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여, 양국 간의 물의를 빚고 말았다.
이후 다시 임명되었지만, 1986년 재직 중 암살되었다. 이후에는 잉바르 칼손이 총리가 되었다.
2006년 프레드리크 라인펠트가 새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보수정권이 재출범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하는 국가이다.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동쪽에 있으며 서쪽에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가 있다.
스웨덴 동쪽에는 핀란드가 있고 남쪽에는 덴마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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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연중 기온이 온화하다.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동일 위도상의 다른 지역보다 따뜻하여 남부와 중부 지방은 여름에 종종 25 ~ 30℃에 이른다.
북부 지방은 북극 기후의 영향으로 6개월간 영하의 온도가 계속된다.
현재 국왕은 1972년에 즉위한 칼 16세 구스타프이다.
그러나 명목상 국가원수에 불과하며, 최고 지도자는 총리인 프레드리크 레인펠트이다.
고대 게르만 족의 부족인 스베아족과 고트족이 융합하여 오늘날의 스웨덴인을 형성하였다.
스웨덴의 통계청(Statistiska centralbyrån)에 따르면 2004년 8월 12일을 전후로 스웨덴의 전체 인구가 처음으로 9백만 명을 돌파했다. 스웨덴의 인구는 북부 원주민인
17,000명의 사미인들을 포함한다. 핀란드와의 국경에 주로 사는 5만 명의 핀란드계 스웨덴인들도 원주민 소수 민족이나 20세기 이후에 스웨덴에 이민 온 핀란드인
1, 2세대가 45만 명 정도로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스웨덴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민을 내보내는 나라였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로 바뀌었다. 2004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3.3%가 외국 태생이고 약 5분의 1이 이민자거나
그 자녀들일 만큼 최근 이민자 출신이 많다. 이민자들의 출신지는 핀란드, 구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터키, 이란, 칠레, 그리고 기타 북유럽 국가 순이다. 스웨덴은 내전에
놓여있던 나라들로부터 피난민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스웨덴의 이민정책은 국가의 자부심과 같이 취급될 정도로 이민자들에게 관대하다. 이들은 정계에도 올랐다. 가령 1986년에 암살된 전 총리 올로프 팔메는 네덜란드인의 후손이다.
스웨덴은 스웨덴어(svenska)를 공용어로 지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스웨덴어는 같은 북게르만어군인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와 비슷하고 특히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노르웨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 상당한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노르웨이어와 유사하다. 반면, 말이 아니라 글은 노르웨이어(보크몰)는 덴마크어와 비슷하고, 스웨덴어와는 차이를 보인다. 스웨덴 남부의 일부 지역은
덴마크어에 가까우며, 남북에 걸쳐 기다란 국토로 말미암아 지역에 따른 사투리의 차이가 꽤 있다. 북부의 사미인들이 쓰는 말은 1960년대까지도 억눌렸다.(이 점은
다른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이유로 이웃 핀란드의 주민 약 7%가 스웨덴어를 쓰며, 스웨덴어가 핀란드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정해져 있다.
1999년부터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5개의 소수 언어를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사미어, 메앤키엘리어(Meänkieli, 토르네달렌 핀란드어), 표준 핀란드어, 로마니어,
이디시어이다.
사미어는 스웨덴에서 7천 명 정도가 사용하며 아리에플로그(Arjeplog), 옐리바레(Gällivare), 요크모크(Jokkmokk), 키루나(Kiruna) 시와 그 주변의 정부기관, 법정,
유치원, 양로원에서 쓸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핀란드어와 메앤키엘리어는 옐리바레, 하파란다(Haparanda), 키루나, 파얄라(Pajala), 외베르토르네오(Övertorneå)
시와 그 주변에서 쓸 수 있다.
11세기 이전에 스웨덴인들은, 노르드교라는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가 있었다. 웁살라에는 웁살라 사원이 중심지였다. 11세기부터 스웨덴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바꿨다.
인구의 87%는 루터교 소속인 스웨덴 교회(Svenska kyrkan) 신자이다. 스웨덴의 국민교회(folkkyrka)인 스웨덴 교회는 2000년까지는 국교(statskyrka)였다가 국가와 분리되었다.
이밖의 기독교 교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침례교가 있다. 사미인들의 일부는 애니미즘 신앙을 따른다. 최근 이민으로 인해 이슬람교 교인들도 있다. 스웨덴 인구의
이 나라는 세계적으로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어릴 때부터 영어 교육을 받아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영어로 무리없는 소통이 가능하다.
스웨덴의 교육은 크게 4단계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는 유치원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의무적 과정은 아니고, 1세부터 6세까지를 위한 과정이다. 두 번째는 의무교육
과정이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 관계없이 교육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근거하여 모든 공교육 시스템은 무료로
제공된다. 7세에서 16세까지는 법에 의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등학교이다. 고등학교는 의무는 아니지만 무료이다. 네 번째 단계는
대학교 과정이다. 스웨덴에는 총 61개의 대학교 교육기관이 있다. 대학교 교육도 무상으로 제공되며, 유학생도 2011년 봄학기 까지는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다.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북부 변경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과 지배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이 있었다. 스웨덴은 수백년간 자국의 영토가 전쟁에
개입된 적 없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정적인 나라였으며 무장 중립 노선을 유지해 유럽이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때에도 전쟁에 흽쓸리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
특수기에 스웨덴 경제의 붐을 가져왔으며 이때에 쌓인 경제력이 스웨덴의 복지를 가능하게 하였다.[2] 정부는 외부의 적에 대한 침략보다 국민을 더 신경쓸 수가 있었다.
스웨덴은 세계적으로 국가 경쟁력이 높은 나라이다. 경제강대국으로 2004년 기준 스웨덴의 1인당 GDP는 $38,412이고 경제성장률은 3.5%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GDP 대비 R&D 지출이 4.3%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술 수준을 자랑한다. 널리 알려진 스웨덴의 대표 기업으로는 Volvo(볼보, 자동차), Ericsson(에릭슨, 통신),
Electrolux(일렉트로룩스, 가전), IKEA(이케아, 가구) 등이 있다. 유럽 연합에 가입한 국가이긴 하지만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자체 화폐인 크로나(Krona, 왕관을 뜻하는
crown에서 유래)를 쓴다. 화폐 단위 표기는 ':-'를 사용하며 통화 기호는 SEK이다.
스웨덴은 북유럽 제1의 광공업국이다. 철광석의 생산이 세계 10위 안에 들며, 큰 수출품이 되고 있다. 대신 석탄이 별로 생산되지 않아 많이 수입하는 형편이다. 자동차,
기계, 철강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이 제품의 수출량이 큰 편이다.
무역 상대국은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영국, 미국 등이다.
확립된 것은 1950년대 스웨덴이 유럽 1위의 경제 부국으로 등극한 후 제도적 측면에서 사회주의 모델을 차용한 것에서 시작한다. 스웨덴은 높은 복지와 함께 높은 세금
부담률이 특징이며 학교, 보육, 건강, 연금, 노인 복지, 사회복지 사업 등을 국가가 거의 무상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스웨덴 경제가 고성장 시대를 끝냄에 따라,
재정이 압박받고 있으며 심각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스웨덴 복지 제도도 변화를 재촉받고 있다. 다음은 사회민주주의 연대 문서자료실의
스웨덴 복지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스웨덴의 의료는 의료비를 본인과 나라가 같이 부담하고 있다. 스웨덴은 1년에 진료비가 900크로나(15만원)를 넘으면 바로 ‘무료 진료카드’가 나온다. 이때부터 병원
치료비는 모두 공짜다. 약값도 1800크로나(32만원) 이상은 내지 않는다. 환자가 부담하는 상한금액은 국회에서 결정하는데, 1998년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제도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입원비는 하루에 80크로나를 별도로 낸다. 입원했을 때 먹는 세 끼 식사와 간식 값이다.
이러한 복지를 유지하기 위해 월급의 50%를 세금으로 내지만 복지를 제공받기 때문에 국민들의 조세불만이 없다. 또한 노동자가 병이 나면 법으로 병가를 주도록 되어
있어서, 병이 났다고 해서 해고되는 부당해고 가 없으며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월급의 80%를 사회보험청에서 준다.
과거 스웨덴은 노동력의 유입을 위해 이민자의 정착을 장려 했으며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가장 좋은 나라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다른 유럽 각국과 마찬가지로 최근
스웨덴도 이민자 정책을 전환하는 추세다.
스웨덴에서 이민자들이 베짱이처럼 일하지 않고 과실만 빼먹는 기생충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한 스웨덴인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스웨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여기에 오면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민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다. 고령화 사회에서
젊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는 이민 유입이 최선의 방책이지만 불가피한 사회갈등을 낳는다는 데 고민이 있는 것이다.
2010년에는 스웨덴의 한 방송국이
부르카를 입은 한 무리의 무슬림 여성들이 복지급여를 받으려고 기다리던 백인 연금수급자를 밀치고 앞질러 가는 내용을 담은 스웨덴 민주당의 30초짜리
텔레비전 선거 광고를 방영을 거부했다가 일부를 불투명 처리하는 조건으로 내보낸 일이 있었다.
2010년 11월 38세 사회 스웨덴인이 말뫼 도심에서 ‘이민자 척결’을 외치며 총기를 난사해 1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친 사건이 있었다.
2010년 12월 스웨덴에서 발생한 사상 최초의 자살폭탄 테러가 무슬림에 관대한 스웨덴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수도 스톡홀름에서 터진 자살 폭탄 테러범은
이라크인으로 테러조직 알 카에다 관련 웹사이트가 "(테러범)타이무르 압델와하브(28)가 순교작전을 완수했다"고 하면서 스웨덴의 이민 정책에 대한 여론이
역풍을 맞고 있다.
스웨덴 요리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덴마크, 노르웨이)처럼 전통적으로 조리법이 단순한 편이다. 특히 생선 중 청어와 고기, 감자가 주요 식품 재료이며, 향신료의 사용은 적다.
유명한 요리로는 전통적으로 그레이비와 삶은 감자, 월귤잼을 곁들인 스웨덴식 미트볼과, 팬케이크, 루테피스크와 스웨덴식 부페인 스뫼르고스보르드 (스웨덴어: smörgåsbord)가 있다.
아크바비트 (스웨덴어: akvavit)는 인기있는 증류된 술이며, 스납스 (스웨덴어: snaps)를 마시는 것은 문화적 중요도를 가진다.
납작하고 건조하며 바삭바삭한 전통적인 빵인 크넥케브뢰 (스웨덴어: knäckebröd)는 근래에 들어 여러가지의 형태를 지니며 발전해왔다. 지역적으로 중요한 음식은 북스웨덴에는
발효한 청어인 수르스트뢰밍 (스웨덴어: surströmming)이 있으며,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에는 장어가 있다. 스웨덴은 전통적으로 외국의 영향에 개방적이며 18세기에 프랑스 요리
양국은 1959년에 수교하였다. 이때, 스웨덴은 북한과도 수교하였다. 스웨덴은 한국전쟁 때에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야전병원선을 파견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스톡홀름
(주 라트비아 대사관 겸임)에, 스웨덴은 서울에 각각 대사관을 두고 있다. 모두 2,050 명(재외국민 922 명, 시민권자 1,128 명)의 한민족들이 스웨덴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1988년 하계 올림픽 때 스웨덴은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은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스웨덴은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많지는 않으며, 같은 친서방 국가로서 협조를 하였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추축국에
적극적으로 지원한 스웨덴은 일본에도 어느 정도 지원하였다. 1964년 하계 올림픽, 2002년 FIFA 월드컵 때 대표팀을 파견하였다.
스웨덴은 미국과 관계는 친서방적인 노선으로 부드러운 외교 관계이며, 오늘날에도 스웨덴은 미국과 친선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