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朗慧和尙塔碑)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는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경내의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비(石碑)는 신라(新羅)헌덕왕(憲德王) 때 당나라에 수학하고 돌아온 대낭혜(大朗慧) 화상(和尙) 무염(801∼888)을 위해 세워진 탑비(塔碑)로 비석(碑石)의 높이는 480cm, 폭은 150cm이며, 귀부(龜趺)위에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일반형 석비(石碑)이다.
신라(新羅) 시대의 비석(碑石)으로는 최대의 것이며, 아름다운 조각은 신라(新羅) 시대(時代) 석비(石碑)의 걸작(傑作)으로 꼽힌다. 특히 비좌(碑座)의 운문과 이수의 연화문, 용틀임 등은 당시 조각의 극치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최치원 사산비 가운데 하나로 비문(碑文)은 최치원이 짓고 글씨는 최인곤이 썼다. 모두 5,120자로 구성되어 있는 비문(碑文)은 1.5cm 크기의 해서(楷書)체이다.
내용은 건립 경위와 무염의 행적 및 공덕(公德)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碑)를 세운 연대는 신라 진성여왕 4년(890)으로 추정되며, 귀부(龜趺)가 심히 파괴(破壞)된 채 흙에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解體) 복원(復元)하였다.
대낭혜(大朗慧)는 속성(俗姓)이 김씨이고 골품(骨品)은 난득(難得)이며 신라 태종(太宗) 무열(武烈)왕의 팔세손이다.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2년(801)에 출생하여 법명(法名)은 무염 시호는 낭혜(朗慧)로 성주(聖主) 대사(大師)라고도 불렀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佛敎)에 뜻을 두고 법성(法性) 선사(禪師)에게 배웠으며 헌덕왕(憲德王) 말년(末年)에 당나라에 들어가 30년간 불도(佛道)를 닦다가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오합사(烏合寺)에 자리하면서 불도(佛道)를 이었다.
신라(新羅)에서도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이었으므로 큰 인물(人物)이 될 것을 예견하였으나 불문(佛門)을 두들김으로써 성직자(聖職者)가 되었는데 그가 이곳에 자리하면서 성인(聖人)이란 칭호(稱號)와 함께 그가 자리한 절도 성주사(聖住寺)라고 부르게 되었다.
※ 국보 제8호 성주사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를 2010년12월 27일 관보 제17413호(문화재청 고시 제2010-133호)하여 현재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朗慧和尙塔碑)로 변경되었다.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朗慧和尙塔碑)를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朗慧和尙塔碑)로 변경 2021년 10월 28일(목) / 문화재청공고제2021-3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