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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즐기는 자만이 홀로 오를 수 있다
카풀루~후세계곡 차락차빙하 , 카네빙하 답사
테라스 위에 올라 앉은 카네 마을.
카풀루(Khapulu) 옛 궁전으로 오른다.
새벽에 내린 비로 공기는 청명하고 시간의 여유를 즐긴다.
다행히 카풀루에 도착하자마자 바자르에서 전에 원정대의 요리사로 일했던 임란(Imran)과 이스마일(Ismail)을 만났고,
자연스레 그들의 마을인 후세 계곡의 칸데까지 갈 차편이 해결되어서였다.
구불구불 오르는 길 언저리에 서서 아래로 바라본 강은 사막의 모래벌판처럼 펼쳐진다.
카라코룸의 동쪽 끝 티벳고원에서 발원한 샤이욕(Shyok) 강은
북서쪽으로 흘러 이곳에서 살토로(Saltoro) 강과 후쉐(Hushe) 강을 만나 대하(大河)의 면모를 갖춘다.
넓은 곳은 너비가 4km가 족히 되는 듯하다.
카풀루 원주민은 샤이욕 강과 같이 티벳이 그 뿌리이며,
여기에서 다른 지류를 만났듯 티벳 문화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받아들여 그들만의 생활방식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가벼운 호주머니 때문에 차락차 빙하로 바꿔
착찬(Chaqchan) 모스크가 나타난다.
14세기 처음으로 들어온 이슬람 선지자 사이드 알리 함다니(Syed Ali Hamdani)가 건축했다고 전해진다.
세월의 무게에 주저앉았을 지붕은 새롭게 함석으로 덮어 조화를 이루지 못하나
나무기둥과 문들의 조각에서는 여전히 성스러움이 배어 나온다.
조금 더 오르자 바위절벽이 버티고 섰다.
카풀루는 독자적인 얍고(Yabgo) 왕조가 지배하여 오랫동안 계승되어 왔었다.
4,000~8,000m봉을 안은 대산맥에 의해 격리되었던 은둔의 왕국은 1840년 잠무 & 카시미르의 도그라(Dogra)병에 의해 정복된다.
절벽 위의 왕궁은 파괴되고 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세워졌다.
카네빙하 끝에 숨겨진 암봉. 정상부가 툭 잘렸다.
카시미르에서 옮겨 심었다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마당 좌우로 섰고,
4층 궁전 건물 전면 중앙에는 목조로 깎아 만든 발코니가 두드러져 나와 있다.
머리에 실크 숄을 두른 공주가 정원을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후둑후둑 넓은 플라타너스 잎에 비가 떨어진다. 돌아갈 시간이다.
친구들을 만난 바자르에는 군인과 보급품을 실은 군용트럭으로 분주하다.
현재 카풀루는 시아첸 분쟁에 따른 국경방어 전초기지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인도와 분리 독립하고, 카라코룸의 산에 도전하려는 등반대가 줄을 잇는다.
발토로 빙하 유역의 8,000m급 봉우리들은 가셔브룸1봉(8,068m)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1961년부터 인도 중국과의 국경 분쟁으로 74년까지 외국인 방문이 금지되었다가 국경 조정으로 다시 개방된다.
그러나 당시 파키스탄의 영토로 되어 있던 시아첸 빙하 지역을 인도군이 점령함으로써
살토로 지역은 1985년부터 다시 폐쇄되었고, 발토로와 후세는 정부에 허가를 내야 하는 규제지역으로 정해졌다.
살토로 빙하가 아우른 산들은 카라코룸에서도 가장 많은 미답봉과 대암벽들이 남아 있어
히말라야니스트에게는 꿈의 세계로 비쳐진다.
그러나 그곳은 원주민과 군인만이 허락된다.
그러던 2,000년 돈이라는 열쇠에 굳게 닫혀졌던 자물통이 열렸다.
미국의 지미 친(Jimmy Chin) 원정대가 등반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파키스탄에서 관광회사를 경영하는 나지르 샤비르(Nazir Shabir)와 손을 잡고 로비를 벌여
카풀루의 군사령관 타히르(Tahir )장군의 허가를 받아냈다.
허가를 내준 것에 얼마나 고마웠으면 자신들이 등반한 무명의 암탑에 타히르 타워(Tahir Tower)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였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뻔하다.
살토로, 그래 살토로 빙하에 가고자함이다.
허가를 받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그래도 안 되면 몰래 잠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내 호주머니는 열쇠로 작용하지 못한다.
엄청난 입산허가비와 헬기 이용비, 운행비용에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하고는 씁쓸히 뒤돌아섰다
산들은 많고 미지의 계곡도 많다.
가보지 못한 카네, 차락차 빙하로 마음을 정리했다.
1시간 반을 달려 후세강을 건넌다.
카네 마을은 80가구로 강가 테라스 위에 있다.
마을 안쪽까지 도로는 아직 공사 중이라 경적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는
제각기 닭, 밀가루포대, 식용유 등을 양손에 들고 원형으로 모인 동네로 들어간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은 앞집 지붕이 뒷집 마당이 되기도 한다.
마을은 씨족으로 형성되어 카네의 절반 이상이 이스마일과 임란의 친척이라고 한다.
2004년 8월22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왔는데 임란이 난데없이 텔레비전을 보러가자고 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무슨 농이냐고 비웃었다.
들어간 그의 장인댁 처마 밑에는 때가 끼고 찢어진 중국제 플라스틱 신발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집안에서 가끔 고함소리로 터져 나온다.
후끈한 열기의 방에 정말 텔레비전이 있다.
임란이 원정대와 트레킹팀을 따라다니며 번 돈으로 산 것이라며 뿌듯한 웃음을 짓는다.
20여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빼곡하게 앉아 파키스탄 대 인도의 크리켓 경기를 보고 있다.
파키스탄 선수가 공격으로 나설 때면 ‘파키스탄 진다바드(파키스탄 만세)’를 함께 외치며 응원한다.
이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위성텔레비전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기의 소음은 응원소리에 묻혀 버렸다.
추적이는 비로 하루를 더 머무르고 카네 계곡(Khane Lungma)으로 들어간다.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마을 사람을 대동하지 않으면 혼자 여행은 제지된다.
카네 계곡은 군인이 아닌 카네 사람들의 땅이다.
주민들의 ‘허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계곡 초입은 통나무다리를 건너 북안으로 시작된다.
좌우 암벽은 높고 협곡이라 낙석 위험이 있다.
오를수록 가파르고 좁아지는 계곡은 채 2~3m도 되지 않아 계류가 작은 폭포를 이루고
길이 끊어진 듯하면 절벽에 겨우 잔돌로 매달아 쌓은 벼랑길이 띠로 연결된다.
자연적인 디딤돌을 이용하여 물을 건너길 여러 번,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다다른다.
가파른 언덕발치 백양나무 옆에는 맑은 샘물이 흘러나와 목을 적시고 그늘은 쉼터를 만든다.
꽃이 지고 빨간 몽우리를 맺은 야생장미와 버들은 물을 찾아내려온 듯 줄지어 냇가로 섰다
고마브랑사에서의 여유로운 오후.
빙하기에 깎여 만들어진 섬 같은 30여m 테라스 위에 올라서자 땅은 바짝 말라 열기가 뿜어져 올라온다.
정신없이 걸어 드디어 넓은 풀밭과 돌집이 나타난다.
목동 한 가족이 머물고 있는 고마 초지(Goma Brangsa·3,870m)다.
이곳에서 15분 정도 가면 맑은 물이 솟아 좋은 캠프지가 되어준다.
오직 홀로 있을 때만 우리는 자유롭다
점심나절 텐트를 쳤다.
내일은 여기에 텐트를 두고 빙하 원두까지 갔다가 카네로 내려가면 된다.
시간은 여유롭다. 납작한 돌 3개로 화덕을 만들고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다.
밑바닥이 그을려 시커먼 코펠에 맑은 샘물을 퍼 와 토닥토닥 소리를 내며 타는 화덕에 올려놓는다.
매트리스에 앉아 조여 맨 신발끈을 풀고 축축한 양말을 벗는다.
그리곤 찻물이 끊을 때까지 맨발로 풀밭 위를 어슬렁거린다.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사실 어제 밤에는 임란이 마련해준 이부자리에 누웠다가 결국 침낭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이젠 웬만큼 단련되었을 법도 한데 들끓는 벼룩과 이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홍차를 넣어 붉은 빛이 돌면 컵에 분유를 풀어 붓는다.
그리고 설탕 세 스푼, 이런 하나 하나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면 하찮은 것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처음 카라코룸 여행을 떠나 한 달이 지난 후 후세에서 칸데 마을로 내려오다가 쓰러진 적이 있다.
그 짧은 기간에 체중이 15kg 이상이 빠져 있었다.
올해 낭가파르바트 등반에서 루팔 베이스캠프를 떠나 등정하고 9일만에
반대편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3kg이 감소해 있었다.
아마 혼자만의 첫 여행이어서 육체적 고통보다 막막한 빙하에서,
눈이 내리는 고갯길에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독을 이겨내지 못함이었을 것이다.
오직 홀로 있을 때만 우리는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 또한 사랑하지 않으니,
오직 홀로 있을 때만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행과 같이 등반의 최종단계를 나는 단독등반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번의 히말라야 등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고독을 즐기는 자만이 홀로 오를 수 있다.
뒤쪽 계곡 저편으로 작년에 오르던 혼브록(Honbrok·6,459m)이 보인다.
랜턴 불빛에 반들거리는 얼음벽에 매달린 그 때의 두려움,
시간과 공간이 정지되어 버리고 오직 나만이 살아 움직여 버둥거린다는 느낌,
그래도 끝내 극복하여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안전한 모레인 빙하로 내려와 침낭에 누우면 당연 곯아떨어지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내일은 또 어디를 오를까 하고 상상을 하는 나는 먼 길을 걸어왔음에 틀림 없었다.
혼자의 여행과 등반은 다른 사람과 사물을 보다 넓게 만나고 인식하도록 만들어 준다.
여기에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여 이끈 영국의 등반가 크리스 보닝턴(Chris Bonnington)은 말한다.
“나는 우리 등반가들이 우리가 통과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산지 주민들과의 사이에 으레 벽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등반가들은 대원들끼리만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관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들만의 작은 세계에서 서로 의지하며 히말라야나 안데스 같은 산지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 양치기 꼬마 두 명이 신기한 표정으로 텐트에 들어와 저녁나절까지 놀다 갔다.
카네빙하 말단의 구리탁브랑사 여름 방목지에서 젖을 짜는 여인들.
다음날 툭 불거져 오른 카네 빙하의 모레인 말단을 거슬러 올랐다.
빙하 북쪽 암벽 밑에 구리탁(Gurithak Brangsa·4,295m)에는 여자들만이 소와 양젖을 짜고 있다.
양쪽에는 지도에 이름도 없는 6,000m 이하의 일곱여 봉우리를 대상으로 등반하는 원정대의 BC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각각의 봉에 임란의 아들과 딸의 이름이 붙었다.
카네 계곡의 등반과 트레킹은 불과 최근에 이루어졌다.
스페인, 미국팀이 1년에 한두 팀 정기적으로 찾고 있으며,
한국은 2002년에 임성묵(오버마운틴클럽)을 포함, 3명이 찾아와 아딜피크를 등반했다.
그는 올해에도 트랑고 등반을 마치고 혼자 이곳에 찾아왔다고 임란은 얘기했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마 그도 이번이 해외에서 첫 단독등반 시도였는데 짓누르는 고독이 어떤 것임을 깊이 느꼈을 것이다.
모레인 언덕을 따라 빙하 원두로 내달린다.
작은 호수에서 빙하 안쪽으로 들어간다.
구름으로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전면에 성벽과 같이 막고 선 곳에서 빙하는 북쪽으로 세락을 만들며 연결된다.
그리고 멋진 암봉이 나타났다.
전설 속 티벳 키사르(Kisar) 왕이 비마(飛馬)를 타고 가다 잠시 쉬려고 칼로 쳐 자른 모양이다.
이 빙하 안에서 등반하고 싶어지는 봉이다.
4년 전 홍수로 끊어졌던 칸데(Khande) 다리는 아직 보수되지 않아 걸어서 후세 마을에 갔다.
낭마 계곡(Nangmah Lungma)에서 후세 마을까지 가는 도중에
강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카라다스(Karidas Lungma), 체리(Tseri Lungba)라는 작은 계곡이 있다.
근래에 작지만 미지로 남겨진 등반대상지를 찾는 팀이 이러한 계곡까지도 들어갔다.
렐라 피크 캠핑장(Lela Peak Camping & Hotel)에는 일본 트레킹단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칸데의 홍수 피해 주민에게 구호품은 물론
학교와 병원을 짓는 일로 매년 방문하고 있는 하츠요시 모리씨(森初芳·59)였다.
그는 브로드피크와 네팔의 초오유를 비롯하여 고봉을 오른 산악인으로, 2000년 혼브록을 오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가이드를 맡은 자민 알리는 일본에서 유학한 히말라야 트렉앤투어 소속으로,
일본 고객 유치에 힘쓰고 있으며,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세이시초에서 들여다본 차락차 빙하 주변의 산들.
일본팀에 포터로 고용되려는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있다.
과거에 여름이면 양 염소를 몰고 초지로 갔던 이들은 이제 주인님 사브(Sahib)의 짐을 지고 산을 오른다.
외국인의 지원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상수도가 생겼다.
이들 발티(Balti) 말에 가난이라는 단어가 있었을까.
옛날에는 그저 집 한 채, 작은 경작지, 가축 사오십여 마리로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수준을 가지고 살았고,
부족한 부분은 마을 공동체에서 서로 도왔다.
이제 이들은 누구나 가난하다고 말한다.
포터로 고용되려고 머리에 피가 나도록 서로 싸움박질을 하고 옆집에 지프차를 삼으로써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낀다.
곤도고로 고개에 고정로프를 설치하여 트레커들에게 이용료를 받는 조합을 결성할 당시
후세 마을은 난장판이 되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네팔 쿰부의 라마승의 말이다.
“원래 네팔은 두 개의 종교(-ism)가 있었다. 바로 힌두교(Hinduism)와 라마교(Lamaism)다.
근래에 가장 영향력 있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했다.
그것은 Turism(관광)으로 이제 중은 필요하지 않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후세는 없다.
스팡세르 뒤로 세락의 차락차 빙하와 암봉.
캠핑장의 주인은 한 달 전 한국인 한 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바로 일산의 최대식씨였다.
스카르두에서 받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후쉐계곡과 비아포~히스파 트레킹을 마쳤습니다…중략…
국내에 오시는 대로 시간 내어 전화 주십시오.
이 소중한 경험을 누구에게 얘기해야 통하겠습니까.
서로 겪었던 일들, 같이 음미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차락차 빙하 출입은 트레킹 허가서가 필요하다.
숙소 주인과 상주하는 경찰과의 회합에서 허가비에 상당하는 금액을 학교에 기부하고
경찰이 정하는 가이드 한 명을 동행하기로 하겠다는 제안에 그들은 동의했다.
결국 가이드는 숙소 주인 아들 알리 후세인(21)이 선정되었다.
멈추지 않은 비로 하루를 마을에서 지체하고 곤도고로로 가는 모리팀의 포터들과 함께 세이시초(Shaishcho)로 향했다.
길은 평탄하고 잘 나 있다.
세이시초에는 버드나무 그늘 아래 두 곳의 찻집과 넓은 캠프장이 마련되어 있다.
위쪽 고개에서 한 무리의 독일 트레킹단이 내려왔다.
저녁을 먹고 난 후 그들은 플라스틱 드럼통을 두드리며 왈츠와 디스코를 춘다. 파티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날이 밝았다. 길은 동쪽으로 틀어 들어간다.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길을 건너 언덕으로 올라간다.
사진에서 보았던 계곡 안쪽으로 보여야 할 K6, K7, 나미카는 허리까지 구름을 두르고 있다.
틱추믹(Tikchumik)을 지나면서 알리 후세인은 비지땀에 짐이 무겁단다.
그의 배낭에서 내 짐은 텐트, 4일치의 감자와 밀가루 한 봉지뿐이다.
차락차 빙하와 초고리사 빙하(Chogorisa Gl.)가 만나는 지점에서 5m 절벽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그리곤 초고리사 빙하를 건너고 50m 절벽을 지그재그로 다시 오른다.
스팡세르(Spangser)에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결국 알리에게 모든 일정의 임금을 지불하고 돌려보냈다.
이 때의 심정은 50~60년대 활동했던 단독 탐험가인 알프레드 세시저(Wilfred Thesiger)가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할 때와 같았다.
‘나는 친구가 떠나는 것을 보면서 기뻤다.
우리는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지만, 친구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화가 났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친절하고 무던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영국인 여행가들처럼 나도 장기간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늦은 오후에 구름이 걷히면서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히 이곳은 벽 등반의 파라다이스라 할 만하다.
먼저 초고리사 빙하 위로 타사브락(Tasa Brakk)이 스산하게 나타난다.
남서봉(6,614m)은 78년 일본대가 등정했고, 주봉(c6,700m)은 미답으로 남아 있다.
지도에 차라쿠사(Charakusa)라고 표기된 차락차(Tsarak Tsa GL.)는 발티어로 빙하라는 뜻이다.
이 주위에 84년 동경대학팀이 남서릉으로 많은 볼트와 고정로프를 사용하여 초등한 K7(6,934m)은
지구상에서 순수 암벽으로는 인도의 창가방( Changabang·6,864m)과 더불어 가장 큰 벽으로 일컬어진다.
2004년 미국의 스티브 하우스(Steve House)는 41시간만에 새 루트로 이 봉에 올라
클라이밍지가 수여하는 그 해의 고산등반 부분에서 골든피톤상을 받았다.
이 봉 바로 북측에 6858m봉 독립 암봉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빙하 원두에 솟은 K6(7,282m)는 70년 오스트리아팀이 낭마계곡으로 초등했으나 북벽은 불가능하다고 평가했지만,
언제나 첨예한 알피니스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간다.
연이은 중앙봉(약 7,100m), 서봉(약 7,100m)은 미답으로 남아 있다.
이 외의 등반활동을 보면 70~80년대 이 지역은 초등을 하려는 일본의 독무대였지만
90년대 중반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온 산악인들은 낮지만 어려운 암벽과 암봉으로 시선을 돌린다.
2004년까지 세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등반활동이 이루어져 위에 언급한 몇몇의 미답봉을 제외한
파티브락(Fathi Brakk·약 5,600m), 파르핫브락(Parhat Brakk·약 5,600m), 낫세르브락(Nasser Brakk·약 5,200m),
나미카(Namika·6,325m)까지 등정되고 암봉에는 두세 개의 루트가 개척되었다.
스팡세르에서 빙하 가장자리 언덕을 따라 1시간 진행하면 빙하 안쪽으로 들어간다.
모레인과 얼음 빙하 위로 길을 찾아 빙하 북측에 넓은 곳으로 벗어나면
두 곳의 모레인이 흘러내린 잡석지대 사이에 K7 BC가 나온다.
29일, 프랑스팀이 궂은 날씨로 베이스캠프에서 쉬고 있다.
후세 포터들이 세이시초로 향하고 있다.
2003년부터 파키스탄은 6,500m 이하의 봉우리를 무료로 개방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원정대는 10여 명씩 들어와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단독,
또는 두 명이 알파인스타일로 여러 봉우리를 오르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도 차락차 빙하 봉우리에는 많은 등반이 이루어질 것이다.
2005년 한국팀이 드리피카(Drifika 또는 Drafey Khar·6,444m)를 등정하고 소개해 차후 많은 팀들의 진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가볍게(Light Weight), 작게(Small is Beautiful) 떠나는 팀이 보다 넓고 깊게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후세계곡 차락차빙하 & 카네빙하 트레킹
이 두 계곡은 교통편이 이어지는 마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암봉의 천국이다.
트레커는 웅장함에, 등반가는 어디를 오를까 하는 즐거운 고민에 가슴이 뛸 것이다.
시즌은 6월 중순에서 9월까지다.
차락차 빙하는 이슬라마바드 관광국에서 1인당 50달러를 내고 트레킹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카네 빙하는 개방지역으로 허가서가 필요 없다.
교통
이슬라마바드~카풀루 구간
라왈핀디의 피르와다히 정류장의 NATCO(북부지역운송공사)에서 하루에 한 번 오전 8시에,
카풀루의 바자르에서 같은 시각 버스가 출발하여 30시간 포장도로를 달린다. 운임 720루피.
카풀루~칸데
12시~오후 1시 사이에 카풀루에서 출발하고 다음날 아침 5시에 칸데를 출발하여 1시간 반 비포장도로를 운행한다.운임 35루피.
현재 칸데 다리가 유실되어 후세까지 바로 연결되지 못하고 전세 지프(1,200루피 정도)를 타야 한다.
장비·식량
스카르두나 카풀루에서 준비하고 후세에는 식료품 가게가 여럿 있다.
질이 떨어지는 아이스액스, 크램폰, 침낭, 텐트, 매트리스도 대여하나 추천할 정도는 아니다.
차락차 빙하 운행
K7 BC까지 57.6km로 3일간 운행하며 이틀에 내려온다.
포터 임금은 4일 행정(Stage)으로 정해져 왕복 8일치를 지급해야한다.
임금 1스테이지당 300루피.
행정은 세이시초~틱추믹~스팡세르~K7 BC 방향으로 진행한다.
제1일
후세(3,050m)~세이시초(3,330m) 9.3km. 4시간 소요. 280m 등고.
성수기에는 주민들과 트레커가 붐빈다. 중간에 식수도 있다.
제2일
세이시초~틱추믹~스팡세르(4,000m) 8.5km. 4시간 소요. 670m 등고.
중간에 맑은 식수가 있고 초고리사 빙하로 내려서는 절벽에서 조심해야한다.
늦은 시즌에는 스팡세르에 물이 말라 빙하에서 떠와야 한다.
제3일
스팡세르~K7 BC(4,600m) 11km. 4시간 소요. 600m 등고. 좌우로 경치를 즐기며 느긋하게 걷는다.
빙하로 들어가면, 특히 빙하 초험자나 흐린 날에 포터들과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캠프지는 주위에 풀이 자라고 맑은 물이 흐른다. 이곳에서 하루 여유를 가지고 주위 트레킹을 하는 것이 좋다.
카네 빙하 운행 일정
카네에서 구리탁 BC까지는 3일 행정에 2일 운행하고 하루에 내려온다. 포터 임금은 왕복 6일치를 지불한다.
제1일
카네(2,775m)~고마 브랑사(3,870m) 4시간 소요 1,100m 등고. 협곡이라 낙석에 주의해야 한다.
캠프지와 식수는 좋다.
제2일
고마 브랑사~구리탁 브랑사(4,295m) 1시간 반 소요. 425m 등고. 캠프지와 식수 사정이 좋지 않다.
따라서 고마 브랑사에 캠프지를 두고 빙하 상류를 돌아보고 되돌아오는 것이 좋다.
김창호 쎄로또레 글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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