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옥의 新 남도기행 - 담양으로 신비의 전설여행을 |
입력시간 : 2008. 11.18. 00:00 |
김옥의 新 남도기행-나주 영산강 추억 여행 |
입력시간 : 2008. 11.04. 00:00 |
|
|
|
|
민족존망의 기로에서 신화의 깃발을 세우다 3대 해전중의 하나인 명량 대첩은 1597년(선조 30) 정유년에 왜군이 재차 칩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킴으로써 전무후무한 대승의 금자탑을 쌓는 명량대첩의 신화가 탄생한다. (정유년 선조 30년(1597년 4월 1일~12월 30일)) 충무사와 명량 대첩비 우수영 학동리에서 이 충무공의 발자취를 가장 먼저 만난다. 길 왼편 돌계단 언덕에 충무사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옛 우수영 터로 우수영 성지의 동문 밖이다. 충무사를 오르는 돌계단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충무사를 자기 몸처럼 정성으로 지키고 이 충무공을 하늘처럼 받들어 섬겼던 박포엽 할머니(2002년도에 작고)가 목포 유달산에서 가져온 돌로 85 계단을 쌓았던 계단이다. 계단 중간 오른편에는 전라좌수영내 주둔했던 장수들의 선정과 공적을 담은 영세불망비 30여기가 자리하고 있다.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마멸되었지만 숙연한 마음으로 비를 쓰다듬는다. 전라수영이 우수영(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된 것은 성종10년(1479)에 여수에 좌수영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우수영이 된 것이다. 우수영 온 마을 일대가 우수영 성터이다. 대부분 토사에 묻혀 황폐되었거나 분실, 훼손 되고 말았으며 북벽(北壁) 중간 부분에 북문터만 남아 있다. 북문터 성내에는 건항(乾降) 17년 임신(壬申) 9월, 가경(嘉慶) 9년 갑자(甲子)년에 세운 우물 건립비와 중수비 그리고 여섯 개의 돌기둥이 세워진 육각형의 우물이 남아있다. 돌 지주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통제를 했단 것으로 보인다. 비석군 앞에는 제를 지냈던 돌 제단이 남아있다. 해남군에서는 성지 복원 사업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복원 공사가 완성되면 충무공의 충혼의 기상이 우리들 가슴깊이 되살아날 것이다. 새로이 단장된 성루에 올라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우수영 팔경을 되찾게될것이다. 명량 대첩 기념비는 나라에 큰일이 생기려고 하면 물방울이 맺힌다고 한다. 6 25전쟁 때, 1980년 5·18 민중항쟁 때 이 비에서는 두 말이 넘은 량의 땀이 나왔다고 한다. 우수영 관광지
진도대교가 보이고 다리 아래에는 늘 거센 물살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울둘목(해남 화원 반도와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명량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기를 통하여 해전 사상 유례 없는 가장 위대한 전투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량대첩기념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정유재란 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격파해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수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명량대첩 탑과 어록비가 있다. 충무공 을 중심으로 관군과 의병들의 전투모습이 조각된 군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거북선의 실제모형과 판옥선의 모형, 명랑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각종 무기류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때의 활약상을 담은 슬라이드를 상영해 주고 있다. 진도대교와 명량(울돌목) 진도대교는 길이 384m, 폭11.7m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이다. 해남 문내면 학동리에 머리를 베고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두발을 뻗고 누워있다. 진도대교에서 내려다보는 명량 해협의 물 흐름은 폭포 소리와도 같다. 흰 거품을 일으키며 회오리 물결을 보면 가슴이 섬뜩하다. 물길은 동양 최대의 시속을 지닌 11노트의 조수가 흐르며 해협의 폭이 좁은데다가 해구가 깊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물살이 이에 부딪쳤다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거칠게 휘감아 돌아 흐른다. 물빛조차 지독하게 차갑다. 굉음은 수장된 왜군들의 넋들의 처절한 아우성일까? 명량 대첩의 신화 1597년 7월 15일 칠천량(거제시 하청면의 칠천도와 거제 본 섬 사이의 만) 해전에서 원균(1540∼1597)의 패전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자 1597년(선조 30)에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로 기용하였다. 이순신은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러 칠천량에서 패해 온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을 정비하고 또 1척을 수리하여 총 13척으로 왜병과의 싸움에 대비하였다. 9월 14일 적의 함대가 해남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 13척의 전함을 이끌고 진지를 진도 벽파진에서 우수영 명량해협으로 옮기고 울돌목 유속을 이용한 작전을 짰다. 독굴산(노적봉)에 짚이엉을 엮어서 노적더미로 만들었고 망금산 동편 산자락에 터를 다듬어 군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동원 강강술래를 시키고 녹진 뒤의 백토지 흙을 바다에 흘려 쌀뜨물인양 위장 전술을 펼쳐 적을 속였다. 적 함대는 9월 15일 야간을 이용, 벽파 앞바다에 출현한 것은 9월 16일 오전 들물 때였다. 왜장들은 은빛, 금빛 휘황찬란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사령함 가장 자리에는 해상 전투 중 전함이 불에 타는 일이 없도록 막아준다고 믿는 부적으로 금빛 찬란한 ‘사치호코’(몸은 호랑이요 몸은 물고기 형태를 지닌 전설의 동물)를 조각하여 호기를 부렸지만 불멸의 영웅 이 순신 거북선 전함 앞에 처절하게 무너지게 되는 응징의 심판을 어찌 예견이라도 했겠는가. 거북선의 귀두는 용이 아닌던가. 천지조화를 일으킨다는 전설의 동물이 조선 수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장들은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될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을 모르고 오로지 승리에 취한 듯 비웃었다. 이 충무공은 수척의 병선으로 벽파 앞바다에서 대항하다가 도망하는 척하며 우수영으로 유인했다. 왜적은 지형이 어떠한지 전혀 모르고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전함을 보고 크게 비웃고 깔보며 달려들었다.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될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을 모른 채……. 조수가 썰물로 바뀌는 순간 도망치지 못하도록 미리 바다에 쇠줄을 걸었던 것을 끌어올려 퇴로를 차단시키고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학이진 전법을 펼치며 화포를 쏘고 비 오듯 한 활을 쏘아 날리니 왜군은 맥도 못 추리고 우왕좌왕 하다가 활에 맞고 화포에 배가 깨져 물에 빠져 죽은 왜군 수는 그 얼마나 많았던가. 이때 이오죠오의 성주였던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는 화포를 맞고 배가 깨져 물에 빠져 죽었으며 그의 친동생 도지우끼도 함께 전사했다. 불과 13척의 전함으로 불과 2시간 만에 300여 척의 왜선을 수장시킨 신화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군 피해는 고작 70명, 왜군 사상자는 최소 8천명이라고 하니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변 여행정보 TIP> 임란의 빛난 별들의 넋을 기리며 명나라 진린(陳璘) 제독의 후예 촌과 황조별묘(皇朝別廟) 산이면 덕송리에는 광동 진 씨 도독공파 진린 제독의 후예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황조 마을이 있다. 황조 마을에는 70여호 가구를 이루고 있다. 황조별묘는 명나라 도독 진린을 향사하는 곳이다. 충절사(忠節祠)―임란의 빛난 별 충장공 정운 장군. 충절사는 그의 고향인 옥천면 대산리에 있다. 충장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정운 장군(1543~1592)은 공조판서 정응정의 장자로 해남군 옥천면 대산 리에서 태어났다. 불과 7세 어린 나이 때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보검에 '정충보국'이라고 새겨 스스로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할 만큼 우국충절 의 인물이었다. 1952년 9월 1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다대포) 해전에서 왜적선 500여 척과 싸워 100여 척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 함대의 휘하 참모인 우부장으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길에 왜군의 철환에 맞아 순절하고 말았다. 만의총(萬義塚-몰 무덤)―의병들의 외침이 들리는가? 나라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온몸으로 항거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잠들어 있는 커다란 봉분은 옥천면 성산대교들 길가에 있다. 정유재란 시 소서행장이 이끄는 3만 왜군을 맞아 성산대교들 전투에서 산화한 만인의 영웅들의 넋이 고이 잠들어 있는 합장묘이다.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일만 의병들이 몰살당하고 말아 온 들판을 벌겋게 피로 물들이고 말았다. 왜군들의 시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산을 이루었고 엄청난 손실과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적들은 모두 퇴각하고 말았다. 이들의 희생으로 왜적들에게 대 타격을 입혀 마침내 대규모의 군사력을 약화 시켰기에 명랑대첩의 대승의 물꼬를 텄다. 명량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도 왜군을 막아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만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영세귀감이 된 일사보국의 정신은 후세토록 길이 빛날 것이다. 별미여행- 명가 용궁 해물탕
황점이 여사는 강인하고 부지런하다. 매일 새벽부터 목포 완도 여수 등 20군데가 넘는 수산시장을 누비며 신선한 재료를 구입한다. 부지런함은 타고난 자신의 운명이라도 한다. 맛의 승부사 근성이 따로 없다. 오직 싱싱한 생물만 올리는 게 그의 철학이다. 30여 가지의 싱싱한 해물을 이용한다, 조리과정에는 일절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시원한 맛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과연 남도의 명가다운 맛이 펄펄 살아있다. 문의-061-535-5161 메뉴-3만원(2인분), 4만원(3~4인분), 5만원(5~6인분) 해물탕 대(5만원) 중(4만원) 위치-해남읍내 |
김옥의 新 남도기행-목포, 숨은 보물 여행
김옥의 新 남도기행-곡성 관음사, 그리고 심청 | |||||||||||||
입력시간 : 2008. 09.16. 00:00 |
|
|
|
|
첫댓글 김옥님 맛난거는 혼자 다맛보고 다니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