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코쿠헨로
(1)
시작하면서
시차(時差)도 없는 가장 가까운 나라,
그러나 가장 아득하게 멀고도 먼 나라,
일본.
임진과 정유, 반(半) 밀레니엄(millennium)이 지난 일은 젖혀두고 가장 짧다 해도
압제의 굴레를 벗은지 종심(從心)의 세월이 흘렀건만 정리가 잘 되는 머리와 달리
가슴은 옛 그대로다.
항일, 반일의 정서가.
시코쿠헨로는 바로 그 일본 땅이다.
2011년 4월에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의 프랑스 루트 사아군
(Sahagun)에서 강렬한 인력(引力)을 느끼고도 3년이나 미뤄온 이유다.
어쩌면 영영 닫혀버리고 말았을 헨로미치(遍路道)의 문을 열게 한 것은 세월호다.
2014년 4월 16일의 침몰이 나를 무작정 밖으로 내몰았으니까.
안에서 버티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팽목항에 가서 부딛혀 보기도 했고, 울릉도로 달아나 마냥 걸어도 보았지만 결국
49박 50일, 짧은 기간이나마 멀리 떠나고 말았다.
걷기에 올인함으로서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비겁한 현실도피?
소학교(小學校:現초등학교) 1~3학년 담임선생이었던 쿠로다(黑田).
일본군 고초(伍長:한국군 하사)였던 그의 망령이 수시로 살아나고 있는 한 제대로
보일 리 없는 일본, 일본인.
44일 걸은, 88템플(temple)을 거치는 1.200여km와 5박 6일의 워킹(walking)에서
적대적 감성으로 인한 부정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애를 많이 썼음을 미리
밝히고 이 글을 시작한다.
니혼고 와카라나이
2014년 9월 2일 09시 50분에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제주에어가 칸사이(關西) 국제
공항에 착륙한 시각은 예정보다 20여분 빠른 11시 반쯤.
1997년,서태평양의 미국령 괌(Guam)에 가고 올 때 환승한 적이 있기는 해도 오래 전
일이기 때문인지 생소한 느낌의 공항.
연착에 대비해 여유롭게 예약한 도쿠시마 행 고속버스(13시 50분발)를 앞 당겨(12시
25분) 탈 수 있게 된 것은 초행인 내게는 잘 끼운 첫 단추에 다름 아니었다.
나루토(鳴門) 해협을 건너 토쿠시마역(德島驛/四國)에 도착한 시각은 14시 45분.
환승한 JR시코쿠열차편(高德線)으로 16시 08분에 시코쿠헨로 1번절((靈山寺)이 있는
반도역(板東驛)에 도착함으로서 6시간 남짓 만에 비행기, 버스, 열차 등 교통승용구에
의한 이동을 마쳤다.
나루토시(市)의 자그마한 시골역이지만 헨로미치(遍路道) 분위기를 풍기는 반도역.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의 프랑스길 들머리역인 생장 피드 포르
(Saint Jean Pied de Port)에 비견되는 역이라 할까.
헨로미치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까미노'처럼 되길
갈망하고 있으나 전체적 분위기는 문화적 상이점 이상의 차이가 극명해 보이지만.
각종 홍보판뿐 아니라 길 가장자리의 연록 라인이 확실하게 안내하건만 늙은 길손을
불러들여 차를 대접하고 자상하게 설명하는 우동집 초로남(初老男).
그러나, 인사와 기본적인 몇마디 나누는 것으로 끝내면 좋으련만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들을 내 어찌 다 알아듣겠는가.
아직 얼떨떨하며 88 레이조(靈場)의 1번후다쇼(札所)인 료젠지(靈山寺)에 가는 것 외
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한국늙은이를 난처하게 할 뿐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하게 할 수 없지 않은가.
"와다구시 니혼고 와카라나이"(나 일본어 모릅니다)
80살의 건강한 일본 늙은이로 알고 스스럼없이 친절을 베풀며 신명이 난 상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게 될 줄이야.
이후, 이 말을 무수히 사용할 수 밖에 없었으며 한국 영감임을 알고는 못내 아쉬운 듯
하면서도 더욱 친절했고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으니까.
(그렇다고, 도움 받기 위해 부러 한국 늙은이임을 밝힌 적은 결단코 없었다.
抗日, 反日과 다른 剋日의 정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동집(おへんろ亭)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 두 노파에게 끌려 들어갔다.
88영장중 최초로 연(緣)을 맺고 접대하는 집(寄り合いお接待/요리아이오세따이)이다.
다과를 내놓고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우편국의 창립기념 타월을 선물하고.
80살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67살 곤도(近藤久子/이 집 주인) 노파, 소녀 같은 수줍음이
남아 있으나 열성이 대단하다.
가타가나로 표기된 웰컴(welcome)을 비롯한 기초적인 영어 접대용어판을 벽에 부착
하고 읽어가며 대화를 시도하는 등.
역시 갈길 바쁜 한국 노인에게 호의를 다 베푼 후 500m쯤 밖의 절을 안내했다.
시코쿠와 시코쿠헨로
오후 5시에 업무(?)를 마친다는 1번 후다쇼(札所/靈山寺).
4시 50분에 도착한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분 뿐이었다.
외관은 살펴볼 수 있지만 5시가 넘으면 상대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침 7시에 출근, 문을 열고 오후 5시에 모두 퇴근해버린다는 절.
한국 늙은이에게는 시작부터 충격이다.
일본의 부처들은 돈만 벌어줄 뿐 제 때에 식사대접도 받지 못하는가.
'시코쿠(四国)'는 일본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일본열도를 구성하는 주요섬이지만 일본
본토의 4대 섬 중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18,299.04 km²의 섬이다.
(1,833.2km²제주도에 비하면 땅은 약 10배지만 인구는 6.63배(3,912,670:580,9900)로
인구밀도에서 제주도 보다 여유롭다고 할 수 있다)
옛 고키시치도(五畿七道)의 난카이도(南海道) 가운데 기이(紀伊)와 아와지(淡路) 2국
(國)을 제외한 아와(阿波), 사누키(讃岐), 이요(伊予), 도사(土佐) 등 4개의 구니(國)가
있었다 해서 시코쿠(四国)'라고 불리게 된 섬이란다.
지금은 토쿠시마(德島), 고치(高知), 에히메(愛媛), 카가와(香川)등 4개의 현으로 구성
되어 있지만.
'시코쿠헨로'(遍路)는 1.200여년전, 훗날의 칭호가 코보대사(弘法大師)인 승려 쿠카이
(空海/법명)가 수행을 위해 걸었다는 88사찰 일주 1.200여km를 말한다.
헨로의 88사찰(靈場)은 고야산 신곤슈(高野山 眞言宗)를 비롯해 10여개 신곤슈파(派)
80사찰과 4개의 기타파 8개 절로 되어 있는데 신곤슈의 개조는 쿠카이다.
사누키 국(現카가와현)산(産)으로 본명이 마오(眞魚)인 쿠카이(774~835)는 유교경전,
중국사서에 능통하며 일본자모 가타가나의 창조 등 학식과 재능이 출중한 학자였다.
산스크리트어를 아는 일본 최초의 학자로 불교에 귀의하여 중국(唐)청룡사(靑龍寺)의
혜과(惠果和尙)의 제자가 되었고 밀종의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 를 전수
했으며, '헨조콩고(遍照金剛)'라는 밀호를 받은 일본 불교의 거목이다.
수행의 길이 오늘날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재를 노리고 있으며 순례길
아닌 노다지 길로 변질되었다는 느낌이 발원(發願)의 절, 1번 사찰의 첫 인상이다.
815년(弘仁6년), 시코쿠의 동북에서 시계방향으로 순교(巡敎)할 때 불법을 설파하는
한 노사(老師)와 그를 둘러싸고 경청하는 많은 승려의 모습이 석가가 축화(竺和/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정경과 흡사하다고 느낀 코보대사.
그래서 그가 인도의 영산을 일본으로 옮겨온다는 뜻으로 지쿠와잔 료젠지(竺和山靈山
寺)라 이름지었다는 영장이건만.
이런 점에서는 사도 야고보의 길, 까미노도 다를 것 없다.
뻬레그리노(Peregrino)와 헨로상(遍路さん)이 모두 순례자(Pilgrim)지만 예전의 수행
과는 거리가 먼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양의 동서를 망라해서 본래의 목적과 전혀 달리 후손들에게 중요 관광자원으로 각광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악명 높았던 만리장성(중국)과 원형경기장(이탈리아) 까지도.
그렇다 해도 '發願의 寺'인 1번 영장의 의미는 특별하다.
88번뇌와 동수로 개창한 88영장을 거치며 인간의 번뇌를 모두 물리치는 1.200km의 긴
여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고난을 극복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순례자니까.
(삼재를 모두 합한 인간의 번뇌는 108이 아니고 88이란다)
그럼에도, 납경(納經)과는 무관하지만 안내가 필요한 나로서는 막막한 처지가 되었다.
('납경'은 追善供養을 위해 經文을 베껴 靈場에 바치는 일을 말하며 그 창구를 '납경소'
라 하기 때문에 나와는 시종 무관한 곳이다)
1394년 ~ 1428년에 건조되었다는 다보탑(多寶塔)의 오지여래상(五智如來像) 앞에서
잠시 엉뚱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암자에 유폐되었었고 백두대간과 정맥들의 산사들과 연을 맺었으며 만덕선원 법장은
나를 "세상사를 두루 만행하시는 당신이 부처"라 했을 만큼 불교와 돈독한 관계인 나.
나 좀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일 때 헨로용품 판매소의 한 여인이
내 애로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퇴근하면서 한 문서를 주고 갔다.
"四國靈場八八ヶ所巡拜 步き遍路 一夜宿一覽"
헨로상에게 꼭 필요한 숙소 리스트다.(이 문서야말로 나의 헨로미치에서는 바이블에
버금갈 만큼 소중했다)
적응기간을 고려하여 먹거리는 인천공항에서 충분히 준비해 왔으므로 당장에 필요한
것은 잠자리인데 50m전방의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를 안내하는 일람표.
순례길에서 예약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까미노 체질(까미노는도착순이다) 나그네와
철저한 예약 위주의 일본인 간의 충돌에서 필패가 분명한데 얼마나 다행한가.
단숨에 달려갔으나 이럴 수가.
'클로스(close)' 한마디를 남기고 문을 닫아버리는 젊은 하우스 남(男).
게스트가 만원이라는 건지 영업을 접었다는 뜻인지 모호한 채 맥 없이 돌아섰다.
나는 순례자
어차피 기다리는 잠자리가 없다면 어두워질 때까지 걷는 것이 순례자의 일과다.
첫날이라 해서 느슨하겠는가.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라 서쪽 닛쇼잔 고쿠라쿠지(日照山極樂寺)를 향해 걸었다.
상거가 1km로 한 타운(德島縣 鳴門市 大麻町)에 있는 2번째 사찰이다.
'賀川豊彦記念館(NARUTO CITY KAGAWA TOYOHIKO MEMORIAL HALL)'
중간 쯤의 반도교(板東橋)를 건너다가 보게 된 대형 노변간판이다.
더러는 "인도의 간디, 독일의 슈바이쳐와 함께 20c의 3대 성자로 인정받고 있다" 고도
말하며 일본의 성 프란시스코라 할 수 있는 카가와 토요히코(1888 -1960)의 기념관이
북쪽 700m 지점에 있다는 안내판이다.
열정적 복음주의자, 일본 기독교사회주의자로 알려진 그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자전적
소설 '死線을 넘어서'를 통해서다.
민족간의 살륙이 막 멈춘 1950년대 중초반, 거동을 하지 못하는 몸으로 자그만 암자의
골방에 유폐되어 있을 때 읽은 일본어판(우리말로 번역되기 전) '死線を 越えて'였는데
그가 이곳 나루토 출신이라니.
내 순례 여정에는 없었으나 다른 모든 일정에 우선해야 할 방문지가 새로 등장했다.
그러나,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시각이라 환한 아침으로 미루고 고쿠라쿠지로 갔다.
슈쿠보(宿坊)가 있기 때문인지 납경소가 밤에도 불을 밝히고 있는 영장이다.
슈쿠보란 사찰에서 운영하는 사찰 내의 숙박소로 시설과 숙박비가 호텔급이란다.
헨로미찌 여정에서 숙박이 가능한 곳은 대략 10종이 있다.
슈쿠보를 비롯해 호텔과 유스호스텔, 료칸(旅館)과 민슈쿠(民宿) 등 5종과 츠야도(通
夜堂), 젠콘야도(善根宿), 코야(小屋)와 로슈쿠(露宿), 기타 등 5종.
슈쿠보는 88사찰중 20여곳만 운영하고 호텔은 영장과 무관하게 분포되어 있다.
비싼 슈쿠보와 호텔에 비해 저렴한 유스호스텔은 영장과 무관한데다 워낙 희소하다.
료칸, 민슈쿠의 비용 역시 헨로상에게는 벅찰 뿐 아니라 그 금액을 기꺼이 지불한다면
그는 이미 헨로상의 신분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순례자라 해서 의도적으로 편한 길을 피하고 고난의 길을 택하는 것은 온당치 않지만
역경이 두려워 안락한 길로 가는 것 역시 순례자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찰이 제공하는 츠야도는 무료지만 그 수가 적고 젠콘야도 역시 무료 또는 헨로상이
감당하기 편할 만큼 저렴하나 그 수효 또한 많지 않다.
코야(야숙이 가능한 휴게소/우리의 정자)와 공원의 노숙, 기타 하늘을 가려주는 곳 등
후자 5종이 헨로상의 보금자리다.
이같은 현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한국 늙은이의 '순례자의 본분' 역설에 납경소의
중년남(男)이 공감하는지 도우려 하는 듯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퇴짜 맞고 왔다니까 그 집에 전화를 해 '당분간 휴업' 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한 방안을 찾아냈다.
헨로용품매점 여직원(아침에 확인)에게 안내하도록 한 방안은 주차장의 소형승합차.
뒷자리 의자들을 들어내어 편하게 잘 수 있는 구조로 바뀐 차량이다.
조금 후에 그 여직원이 오니기리(御握り/주먹밥)를 쟁반에 받쳐들고 왔다.
영어를 하는 여인은 80살 순례자(pilgrim)라니까 놀라운 건강이라며 도울 일 없냔다.
"Do you need help"가 공기처럼 깔려 있는 까미노의 추억을 불러오는 말이다.
나는 순례자다.
일본의 불교 성지 88템플 탐방 코스 1.200km를 걷기 위해 한국에서 온.
비행기를 타야만 올 수 있으니까 탔고 고속버스와 열차가 가장 빠르고 경제적인 교통
수단이니까 이용했고 순례자니까 어두워질 때까지 걸었다.
도착한 지점에서 잠자리를 찾고 있었을 뿐인데 순례자에게는 더없이 편한 침실이다.
이것은 내가 임의로 계획했거나 예약해서 된 일이 아니다.
다만 이 하루에 주어진 여러 수단 중에서 최선이라고 믿은 것들을 선택한 결과일 뿐.
무책이 상책(No plan good plan)인 이유다.
사람이 아무리 계획해도 그것을 좌지우지 하는 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어느 것 하나만 빗나갔어도 오늘 나는 한국에서 여기까지 와서 편안한 잠자리에 들어
있지 못했을 것이니까.
그러므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아닌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서 야숙 문서를 입수했다면 내 오늘의 일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토쿠시마역 까지 가서 열차타는 과정을 생략하고 들머리를 나루토로 정했을 터.
그 까닭은 '시코쿠헨로' 말미에서 절로 밝혀질 것이다) (계 속)
칸사이국제공항에서 고속버스를 탈 때 문화의 충격을 느꼈다.
차량이 좌측통행을 하기 때문에 승차 문은 우측에 있는 것을 깜박 잊었으니까.
토쿠시마시 버스정류장(위)과 열차역(아래)
반도역(위)과 1번 료젠지로 가는 거리(아래)
료젠지(위)와 딱지 맞은 guest house(아래)
2번 고쿠라꾸지(위)와 헨로상 숙소(아래)
첫댓글 이제 시작되었군요.
'시코쿠헨로' 순례길에 대한 글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정리를 다 하지 못한채 시작했는데 방문하는 이가 의외로 많은 것이 부담되네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력, 체력입니다. 글과 사진이 풍요롭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카페로도 모셔갑니다. ( http://cafe.naver.com/cecilkorea) 4월에 또 유럽 가신다니....경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