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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제 4대 석탈해왕 9년 을축(서기 65년) 춘삼월에 왕(王)이 밤중에 금성(金城西) 서쪽 시림간에서 들려오는 계명성을 듣고 날이 밝자 사자를 보내어 이를 살피게 하였는데 그가 시림에 이르러 살펴보니 금색(金色)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곧 돌아와서 이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하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하고 이를 걷우어 길렀는데 그는 점점 자람에 따라 아주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고 또한 시림을 고쳐서 계림으로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로 삼았다.
알지(閼智)는 세한을 낳고 세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보를 낳고 욱보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 신라 13대 왕위에 오르니 신라김씨는 김알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가 곧 신라김씨왕조의 개창조이시다.
알지(閼智)의 후손 우징(祐徵)이 신라 제 45대 신무왕(新羅 第 45代 神武王)이시며 이의 제삼왕자 흥광공이 광산(光山)으로 이적하니 우리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始祖)라는 설이 가장 타당성이 있으나 지석이나, 이에 버금가는 결정적인 고증자료가 나오기 까지는 신라왕자공으로 하고 근사후일(謹俟後日)하기로 한다. (자료인용:대종회 홈페이지) |
▣김알지공(金閼智公)의 탄강(誕降) 인류가 도구를 발명하고 역사를 창조한 이래, 인간의 행위를 처음에는 신(神)이 하셨다 하였고, 차츰 인지가 계발되면서 인간이 한 일을 초인적 인간의 행위로 설명하였으며, 그 이후부터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한 그대로 인류사는 기록했다. 이를 통 털어 신격화시대, 초인격화시대, 인간 역사의 시대 순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우리 민족사에서는 단군시대나 고대의 건국되던 일들은 건국신화로 신성시했다. 신라 박혁거세는 백마의 알에서 탄생하였고, 석탈해는 까치의 보호아래 뗏목 속에서 나왔는데, 김씨 시조는 금궤 속에서 축복을 받으며 탄강 하였으니, 이 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각각 조금씩 다른 점이 있으니 두 문헌을 종합해서 옮겼다. 이 설화에서 김씨(金氏) 시조는 오색 찬란한 축복속에서 탄생하되 왕위를 사양한 겸양의 미덕을 은축하신 시조로 탄강하여 장차 김씨 왕이 겸양과 애민의 왕업과 서광을 보이는 설화로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계림세묘(鷄林世廟 경주 황남동)에 모시고 춘분에 제향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김알지 탄강신화 탈해왕 4년(60)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 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 있었다.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숲속을 밝히는 그 광명은 황금궤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고 그 나무아래에는 흰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은 궁궐로 달려가서 이 광경을 탈해왕에게 고하자 왕은 즉시 시림으로 거동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다. 이 아이를 「알지(閼智)」라 이름하니 알지란 곧 우리말로 「아기」를 뜻하는 것이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귀환하는데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일 왕위를 파사(婆娑)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후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또는 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았는데 미추는 김씨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올라 신라 13대왕이 되었다. |
※ 永平三年庚申[一云: 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 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 .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三國遺事原文》 券一 紀異二 金閼智脫解王代 |
☞ 해설
하늘에서 자주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거나 알(卵)대신에 금궤가 등장한 것 등을 모년 계림의 김알지 신화는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이자 난생설화(卵生神話)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김알지 탄생일은 탈해왕 9년(65)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삼국유사와는 약간 다르지만 시림에서 태어난 알지 기록은 역시 같다. 계림이란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하며 후에 국명으로도 되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계림」이라는 문자나 박제상이 왜왕에게 「鷄林」 운운하는 점, 신당서(新唐書) 백거이전(白居易傳)에 보는 계림과 송(宋)나라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 오식의 계림지(鷄林志) 왕란의 계림지 등 여러 가지 예를 감안 해 볼 때 계림은 신라의 국명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계림 유허비 ˙ 비각 의 전경(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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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림은 신라의 신성림(神聖林)이었고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도 모두 위와 같은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약 100여주의 고목이 우거져 있으며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비가 서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김알지 탄강신화
우리 나라 최고의 정사(正史)라고 일컬어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탈해(脫解)왕조(王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의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서기 65년) 3월, 왕은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빛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왕은 사람을 시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이를 열어 보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거두어 길렀다.그런데 그 아이는 자람에 따라서 아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 났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그가 금궤에서 나왔음을 연원(淵源)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또한 시림(始林)을 달리하여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
九年春三月. 王夜聞金城西, 始林樹間. 有鷄嗚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小檀掛樹技, 白鷄嗚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檀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 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檀 姓金氏, 改始林名鷄林,因以爲國號 《三國史記原文》卷一新羅本紀 第一脫解尼師今條 |
☞ 해설
알지는 석탈해왕의 아들 각간(角干) 강조(康造)의 딸(탈해왕의 손녀)을 배필(配匹)로 맞이하였으니, 이가 곧 마정부인(摩貞夫人) 석씨(昔氏)이다.
석탈해왕은 당초에 알지를 수양(收養)하면서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 후 알지는 벼슬이 대보(大輔;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는 首相)에 이르렀고, 탈해왕은 왕위(王位)를 알지 에게 전수하려 하였으나, 알지는 굳이 사양하여 파사왕(姿娑王) 박씨(朴氏)에게 양보하였다.
왕위를 사양한 연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으나, 추측하건대 당시 국정상(國情上) 왕위를 양보하는 것이 곧 국익(國益)을 도모하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충정으로 그렇게 결단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7세손 미추대(味鄒代)에 제12왕 해(解)로 왕위(王位)에 오르니 金氏가 나라를 둔 처음이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
고려사에 이르기를 "경주는 원래 신라의 옛 도읍인데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개국건도(開國建都)하여 호(號)를 서야벌(徐耶伐)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노(斯盧)라 하고 후에 신라(新羅)라 칭(稱)하였으며 탈해9년(脫解九年)에 시림(始林)에 닭의 이채(異彩)로 인하여 다시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인(因)하여 국호로 하다가 기림왕10년(基臨王十年)에 다시 신라(新羅)로 호(號)하다."
▣동국통감(東國通監)과 여지승람(與地勝覽)의 기록
동국통감에 이르기를 "옛날 탈해가 계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궁중에 길러 대보공(大輔公)을 삼다".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시림 가운데 돌을 3자 높이로 쌓았다."라고 하였으며 , 속담에 전하기를 "알지를 해태할 때에 깎은 돌이 있는데 칼자국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최해(崔瀣)가 이르기를 "김씨가 귀족이 된 것은 대개 신라 초에 일어 났는데 속담에 전하기를 금궤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므로 성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신라김씨(新羅金氏) 본원(本源)과 광산김씨(光山金氏)]
신라(新羅) 제 4대 석탈해왕 9년 을축(서기 65년) 춘삼월에 왕(王)이 밤중에 금성(金城西) 서쪽 시림간에서 들려오는 계명성을 듣고 날이 밝자 사자를 보내어 이를 살피게 하였는데 그가 시림에 이르러 살펴보니
금색(金色)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곧 돌아와서 이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하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하고 이를 걷우어 길렀는데 그는 점점 자람에 따라 아주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고 또한 시림을 고쳐서 계림으로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로 삼았다.
알지(閼智)는 세한을 낳고 세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보를 낳고 욱보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 신라 13대 왕위에 오르니 신라김씨는 김알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가 곧 신라김씨왕조의 개창조이시다.
알지의 후손 신라 왕자 흥광(興光)공이 국난을 예견하고 광산(光山)으로 이적하니 우리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始祖)이시다. 시조공의 상계에 대해 헌강왕의 왕자, 신무왕의 왕자 양설이 있지만, 지석이나 이에 버금가는 결정적인 고증자료가 나오기까지는 신라 왕자공으로 하고 근사후일(謹俟後日)하기로 한다. (자료: 광산김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