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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아이를 가진지 벌써 6개월이 넘어서고 있다. 병원입구에서 주차문제로 옥신각신. 아이는 건강하단다. 녀석은 차츰 아내와 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신기할 뿐이다. 인천에서 출발한 명렬형이 차가 막혀 꼼짝을 못하고 있단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을 아내에게 할애하고서 기대와 설레임으로 다랑쉬의 제1회 답사를 떠났다.
10월 16일이 오대산 단풍의 절정이라는 지난주 방송내용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뭔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다랑쉬의 설립취지가 떠나는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영동고속도로 현장에서 건설역군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진섭이가 성수기라 숙박할 곳을 찾지 못한 우리 일행을 위해 하루밤 묵을 곳을 마련해 놓았단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 온선생님은 벌써 원주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이미 상당한 시간을 지체한 지라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실 온선생님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심상치 않은데...
남원주를 지나 온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원주 영업소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단다. PC방과 만화방 등 곳곳에서 시간을 죽이시고 결국 우리와 합류, 창단 멤버 모두가 오대산을 향해 떠나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혹자는 웃을지도 모르지만 떠나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순간이었다고 확신한다). 원주를 출발할 때 진섭이에게 전화로 알려주고 약속장소인 평창휴게소로 떠났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한참이나 떨었던 온선생님은 따듯한 차안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답사와 홈페이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대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깥은 상당히 추웠고 근처의 숲들은 어둠 속에 묻히기 시작했다. 자연의 포근함, 어둠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 따듯한 차안의 안락함. 모든 것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도시의 현란한 밤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이기에 이런 느낌들이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한 30분정도 달려 우리는 평창휴게소에 도착했다. 약속장소에 먼저 나와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진섭이와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벗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서로간에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강원도의 먹거리 구경에 나섰다.
속사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8번 국도를 따라 한참을 산 속으로 들어갔다. 주위는 이미 깜깜해져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었고 차량의 전조등만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한 15분쯤 달렸을까, 오래된 한옥이 두어채 남짓한 식당에 도착했다. 운두령! 그 옛날 인제쪽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꼭 넘어야 했단다. 여기 산적들이 많았다나? 그 다음은 얘기 안해도....
아무튼 평창군에서 가장 유명한 송어회집이 바로 여기 '운두령(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0374-332-1943)'이라는데, 모두 "아아…"하며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는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로 조금 기다려야 자리가 나니 커피한잔씩 하며 기다리라고 하셨다. 강원도의 깨끗한 밤공기를 마시며 지난 일들을 묻고 답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살을 약간 찌푸리기도 했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방은 운두령의 첫방 바로 1번 방이었다. 송어회! 사실 회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는데 태어나서 한번도 맛보지 못했다. 맛이 어떨까? 약간의 기대와 허기짐. 과연 회를 담은 접시는 내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회 밑에 깔아놓은 옥돌이 비법이라나…. 상추, 깻잎 등 야채를 넣고 초장과 참기름, 콩가루를 넣어 함께 비벼먹는 송어회 맛은 강원도의 감자술과 함께 우리일행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무 맛있는 저녁과 술과 벗들이 함께한 운두령의 1번방. 다랑쉬의 첫 답사,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좋았다. 우리는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거하게 한 상 받고 나니 또 생각 나는게 있지 않은가? 운두령으로 올라오는 길 오른편에 있던 운치있는 찻집 '감자꽃 필무렵(강원도 평차군 용평면 노동리 ☎0374-333-6724)'. 이곳에 오면 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게 된다. 나무뿌리를 가지고 온갖 물건(?)들을 만드는 것이 이 집 주인어른의 취미인가보다. 탁자, 의자 등등....그리고 아래로 한 45도정도 처진 뻣뻣한 남근과 엎드린 여인. 여하튼 재미있는 곳이다. 이미 겨울이 온 듯 바깥날씨는 추운데 벽난로의 장작은 끊임없는 열기로 우리의 볼을 상기시킨다.
이 찻집의 가장 독특한 메뉴는 바로 '마가목차(₩3,000)'. 마가목(Sorbus commixta HEDL)은 일본 및 우리나라 제주도, 남부지방, 중부지방, 강원도 등지 해발 500∼1,200m의 지역에 자생한다. 5-6월에 흰색꽃이 피고 10월에 빨간 열매가 나무전체에 달리고 잎이진 뒤에도 열매가 그대로 남아있어 관상가치가 높은 조경수목이기도 하다. 민간에서 수피(樹皮)를 열매와 함께 중풍(中風), 보혈(補血), 양모(養毛), 구충(驅蟲)에 약으로 쓰이는 것만 봐도 마가목차의 생약적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곳 평창에 오면 '운두령'과 '감자꽃 필무렵' 들러 맛있는 저녁과 마가목차의 깊고 그윽한 맛을 음미해 볼일이다.
운두령을 넘어가는 해발 830m에 자리잡은 중규모의 모텔 '7-Stadium 초원(☎0374-334-1145)'. 진섭이가 우리 일행을 위해 예약해둔 조용한 곳이었다. 방에 도착해 서로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진섭이는 숙소를 떠났다. 방은 넓고 넉넉했다. 한 십여명이 와도 충분할 것 같고 가격도 저렴하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오늘일과를 정리하고 2000년도 답사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10월 17일 오대산의 아침은 차갑고 맑았다. 멀리 산에는 단풍이 산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냥 숲은 아름답다. 뭐라고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푸근하고 아름답다. 내 기관지를 간지럽히지 않는 맑은 공기. 정신을 맑게 하는 차가운 느낌. 이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는 곳에선 쉽게 마주칠 수 없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내가 생활하고 있는 곳에선 이슬 머금고 풀벌레들의 안식처가 되어준 이름 모를 풀꽃들을 만날 수 없는 걸까? 우리는 좀더 편한 것, 안락한 것, 쉬운 것, 소위 말하는 좋다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절제되지 못한 생활방식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아직도 우리는 경제가 이러쿵 저러쿵, 운운하며 이곳 저곳을 끝없이 파헤치고 있다.
이런 저런 상념을 떨쳐버리고 우리 일행은 오대산을 향해 떠났다. 숙소를 나와 8번국도를 타고 한15분 정도 달리니 방아다리약수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장료는 ₩1,000.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약수터 입구의 작은 관리사무소에서 우리를 반겼다. 관리공단 직원들의 유니폼이 멋지게 바뀐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미국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입구에서 약수터까지 약 200여미터, 들어가는 길가 양옆에서 전나무(Abies holophylla)들이 도열을 한다. 전나무는 소나무과의 침엽수로 서늘하고 다습한 고산지대에 생육한다. 공해에 상당히 약하기 때문에 도심의 조경수로는 적합하지 않다. 수고가 보통 20∼40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로 하늘을 찌를 듯 수직적으로 자란다. 보통 야산에서 볼 수 있는 나무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에 이국적 느낌도 준다. 이곳 오대산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나무 아닌가! 그들은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렇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약수터로 오르는 산길 오른쪽 아래로 쳐진 철조망. 여기서도 인간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계방산 남쪽 기슭의 이 방아다리약수는 북한의 삼방약수(山防藥水, 1923년에 발견된 약수로 함경남도 안변군 소재)와 더불어 2대 명천(名泉)으로 꼽혔으며 조선총독부에서 천연기념물 2호로 지정하기도 했다. 방아다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이 일대의 지형이 방아다리 같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옛날 이 일대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던 한 아낙네가 바위 한가운데 움푹 파인 곳에 곡식을 넣고 방아를 찧다가 파인 곳이 갈라지면서 약수가 솟았기 때문에 방아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약수터명의 세 번째 이야기는 80여년전 경상도 출신인 50대 후반의 이 모씨가 위장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을 떠돌다 노자가 떨어져 이 근처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근처에 약수가 있으니 백일동안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 뒤에 이 약수터를 발견하고 위장병을 다 고쳤다고 하였다.
이 약수의 주성분은 규산, 라듐, 카리, 탄소, 산화철 등 12가지 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특히 철분이 많아 위장병, 신경통, 피부질환, 눈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아다리약수의 용출량은 풍부한 편이며 철분 성분 때문에 약수터 주변의 돌은 녹슬은 철판처럼 보인다. 맛은 탄산 때문에 톡 쏘며 짙은 녹냄새가 난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해 보이는 시대지만 자연이 만들어내는 이 물 한잔에 우리는 어떠한 수식어도 붙일 수 없었다. 약수터 바로 오른쪽에 당집이 있는데 이끼 낀 기와지붕은 주변 전나무숲과 어우러져 뭐라 말할 수 없는 고즈넉함과 신비감을 준다. 당집 위쪽에는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다. 약수터에서 월정사 입구로 이어지는 국도변은 이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 있다보면 모두들 시간이 가는지 계절이 바뀌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끊임없이 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그 자연의 순환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때로는 자연의 법칙 속에 살아가는 생물의 세계가 너무도 잔인하게 보이지만 자연은 그 모든 것을 품에 안고 아주 질서정연하게 모든 생물들을 통제한다. 다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들뿐!! 그렇게 자연은 또 깊은 겨울잠의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22분 상원사 도착. 월정사는 내려오는 길에 보기로 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는 그 나름의 맛이 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사이를 지날 때면 영화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낙엽 가득한 숲길의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느 신발회사 광고의 낙엽 지는 배경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제일 좋은 것은 나무와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상원사로 가고 있었다. 상원사에 거의 다다를 무렵 나의 이 아름다운 숲길이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관리공단은 주차장의 수용한계를 무시했고 그로 인해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주차료는 관리공단이 챙겼을 터이고 국립공원에서까지 우리는 자동차의 매연과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이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가? 우리는 아직도 자연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숲 속에서조차 자연을 우습게 알고 우리가 대단한 주인인냥 큰소리로 떠들며 거들먹거린다. 주변의 새소리와 작은 풀꽃과 바람소리에 왜 귀기울이지 않는가? 무슨 할말이 그리 많아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떠들어야 하는가?
이곳 오대산 상원사의 숲길도 역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ILP포장(벽돌포장) 이었다. 이미 전국을 덮고 있는 이 벽돌들의 번식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고즈넉한 숲길을 완전히 망쳐 놓았다.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상원사의 신축건물들 이었다. 너무나 놀라웠다. 한마디로 일축하면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3, 4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자꾸만 옛것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얼까? 이렇게 풍요한 시대에, 불가능이란 없어 보이는 이런 시대의 기술과 비교하면 정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선조들의 흔적들이 더욱 빛나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이 흐르면 손때가 타고 고색창연 해야 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지켜내고 만들어 내지 못한다.
자꾸만 이런 슬픈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던지며 상원사 앞을 지나 중대사를 향했다. 그래도 나무와 숲은 언제나 우리를 품어주지 않는가? 길가에 수줍은 처녀마냥 서있는 노란 생강나무(Lindera obtusiloba BLUME)가 우리를 반긴다. 나무얘기를 조금 해보자.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의 낙엽활엽관목으로 일본 중국 및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해발100∼1,600m 지역 산기슭 양지, 숲 속 및 전석지(轉石地) 등에 분포하는 방향성 식물이다. 수고는 3m안팎으로 내한성이 강하고 가뭄에도 잘 견딘다. 그러나 공해에 약하여 도심의 조경수로는 이용되고 있지 않다. 9월에 열매가 성숙되며 장과(漿果)는 흑색이고 나뭇가지를 꺾으면 생강 냄새가 나기 때문에 생강나무라하며 종자는 기름을 짜내서 부인들의 머릿기름으로 사용한 데서 동백나무, 산동백나무라 불리고 꽃이 가장 일찍 피기 때문에 황매화라 불리기도 한다. 생강나무 뒤로 간간히 복자기나무(Acer triflorum KOMARVO)도 보였다. 복자기나무는 단풍나무과의 낙엽활엽교목으로 높이가 10m이상 자란다. 한국과 만주가 원산지로 수피는 회백색이 나며 가지는 붉은빛이 돈다. 적습한 토양에서 잘 자라며 내음성이 강하나 양지바른 곳에서도 잘 자란다. 열매는 9∼10월에 익으며 시과(翅果)로 회백색이 나며 빳빳한 털이 빽빽이 나있다. 가을에 붉은색 단풍이 아름다운 나무다. 상원사에서 중대사로 올라가는 숲길에 본 나무는 복장나무(Acer mandshuricum MAXIMOWICZ)로 복자기나무와 함께 3개의 소엽(小葉)을 가지고 있으며 엽병은 털이 없고 붉은 빛이 돈다. 복장나무는 북한의 추운 곳에 자라고 잎에 가는 톱니가 있다. 복자기 나무는 잎에 톱니가 없다.
10시 50분경 중대사자암 도착. 주변은 온통 형형색색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단풍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중대사자암은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상원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문수동자가 지혜로운 동물의 왕인 사자를 타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은 문수동자가 살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이 암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의 노전(爐殿)으로서 노전승이 거처하는 곳이며 향각(香閣)이라 하기도 한다. 중대사자암 바로 앞에 단풍나무가 한그루 서있는데 이 나무 역시 고승의 지팡이는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근세의 거승 방한암(方漢岩)선사가 1926년 광주 봉은사에서 이곳 오대산 중대로 왔는데 가지고 온 단풍나무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란 것이라 한다. 이후 한암은 입적할 때까지 27년동안 산문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에는 항상 이런 신비한 얘기가 있어 좋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단풍나무 바로 아래에 산속의 고즈늑한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않는 엄청난 불사가 건립되고 있었다. 돈이 너무 많은 걸까?
우리는 중대사 오른편의 산신각(山神閣)을 한번 둘러보고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발길을 돌렸다. 붉고 노란 단풍이 예뻤다. 길 따라 키 큰 철쭉, 애기 단풍들도 나를 반긴다. 주변 감상에 열중하는 내 앞을 휙 지나가는 잘생긴 젊은 스님. 스님의 표정은 밝고 맑았다. 키작은 조릿대와 소나무 사이로 스님은 옷자락은 나부끼며 사라졌다. 옷소매의 여운이 좋았다. 몸무게가 늘어서 그런지 힘에 부치고 목도 말랐다. 오르는 길 왼편에 용안수(龍眼水)라는 샘물이 있어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이 일대의 지세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인데 용의 눈에 해당하는 곳이라 용안수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눈이 두 개인 것처럼 용안수도 두 개였는데 나머지 한 곳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11시 15분 적멸보궁(寂滅寶宮)도착. 오대산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 양산의 통도사, 인제의 봉정암, 영월의 법흥사, 정선의 정암사 -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곳이다.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시대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정골과 불사리를 직접 봉안한 곳들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지 않고 불단만 조성되어 있다. 다른 적멸보궁의 경우는 사리를 안치한 장소가 분명하지만 오대산의 적멸보궁은 어느 곳에 불사리가 안치되어 있는지 그 정확한 장소가 알려지지 않아 신비감을 더해 준다. 적멸보궁 바로 뒤편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증표로 높이 84㎝정도의 사리탑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가 사리탑비를 보러 적멸보궁 뒤로 다가갔을 때 한 아주머니가 사리탑 앞에서 울고 있었다. 이 곳 적멸보궁, 오대산은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 고통, 인간의 푸념도 함께 품어주고 있었다. 이제 적멸보궁을 다시 한번 보자. 먼저 등을 돌리자. 우리 등뒤에 선조들의 지혜가 번득임을 느끼자. 용안수가 용의 눈이고 적멸보궁이 용의 정수리라는 풍수학적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적멸보궁은 주변의 모든 산과 나무들을 가득 품에 안고 있었다. 주변 모두가 적멸보궁 이었다. 우리는 옛날의 것들을 구식이라 부른다. 그러나 구식의 시대에 살았던 선조들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구식의 시대에서 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느끼고, 가슴에 품었던 근심과 걱정들을 모두 바람에 날려버리고 산을 내려왔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비로봉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중대사자암을 지나 상원사을 지나기 전, 개울가에서 온선생님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셨다. 오대산 입구 매표소에서 사온 강원도 옥수수막걸리. 어제 먹다 남은 떡과 옥수수막걸리. 평소 술을 즐기지는 않지만 신선한 가을 오후 오대산 맑은 냇가는 이 세상 최고의 술집이었다. 한모금 두모금씩 목을 축이고 약간 볼그레한 얼굴빛 때문에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조금 꺼리며 월정사 부도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50분. 전나무가 병풍같다. 이끼낀 부도들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는 듯 했다. 온통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로 위요된 공간에 서있는 부도들은 대부분 석종형이어서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 고승들의 사리답이란다. 같은 모양이지만 크기도 다르고 외부문양이 다 각각이다. 우리가 사는 속세는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고 새것과 편한 것만 추구하지만 이곳은 우리가 지켜내지 못하는 세월의 때가 묻은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간이 멈추어 서버린 듯한 고요함과 적막함에 휩싸여 아무런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옛 고승들은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이 평화스러움을 몇 장의 사진에 담고 월정사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52분. 전나무 사이로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애처로웠다.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월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것은 분명하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현재 선덕왕 12년(643년)이라는 설과 선덕왕 14년(645년)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월정사는 금당(金堂)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 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中門), 탑, 금당(金堂), 강당(講堂)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다른 것이란다. 조선 숙종, 영조, 순조, 헌종 때에 중건되기도 했고 6.25때는 10여동의 건물과 소장 문화재 및 사료들이 소실되는 불운을 격었지만 아름다움을 간직한 절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월정사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몇 년 전에 보았던 월정사는 온데 간데 없었다. 월정사 모든 건물의 지붕이 동기와로 입혀져 무슨 가발을 쓰고있는 듯한 절집들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한복입고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월정사에서 볼만한 것은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밖에는 없는 것 같다. 답사를 하고 좀더 다른 시각으로 우리자연과 문화유산을 보고 좋은 것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지금 이 시대를 살고있는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면 대부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도 팔각구층석탑은 군계일학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입구에 들어서면 본당인 적광전(寂光殿) 바로 앞에 우뚝 서있는 팔각구층석탑과 만나게 된다. 높이 15.2m. 국보 4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의 균형과 조형기법이 뛰어나다. 탑은 상륜부(上輪部)의 장식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몇차례 화재로 각 부재가 심한 손상을 입었으나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탑신부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나 급격히 줄지 않고 2층 옥신(屋身)부터는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1, 2, 6, 9층의 옥개석(屋蓋石) 색깔이 다른데 해체 수리시 보수한 것이다. 1970년 10월 전면 해체 보수를 할 당시 1층 옥신석과 5층 옥개석에서 많은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대부분 월정사 경내,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유일하게 남은 두 번째 볼거리는 석조보살좌상. 보물 139호로 지정된 이 보살상은 팔각구층석탑 앞에 세워져 있다. 둥그스럼한 얼굴에 피어있는 잔잔한 미소의 이 좌상은 강릉신복사 터 석조보살 좌상과 함께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의 상이다. 사실 처음 얼굴을 봤을 때는 웃는 얼굴 같기도 하고 미소를 짓는 얼굴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미소가 잔잔히 피어오름을 보게된다. 이런 소박함과 소탈함이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음이 옛분들의 발자취 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월정사내 기념품점을 둘러보고 국립공원 매표소 앞 서울식당을 찾았다. 시장하기도 했지만 고소한 참깨와 함께 무친 도토리묵과 산채비빔밥은 한마디로 참 맛있었다. 막걸리도 빠질 수 없는 메뉴!! 이 곳 서울식당은 유명 연애인과 운동선수들의 사인이 수없이 걸려 있고 단체관광객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정신없는 곳이었지만 우리는 구석자리에서 따듯하고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오후 2시. 오대산국립공원 입구의 한국자생식물원(KOREA BOTANIC GARDEN :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병내리 406 ☏ 0374-332-7069) 도착. 한국자생식물원은 우리 자생꽃과 풀 1천여종을 오대산 산자락 3만 3천여 평에 심어 조성해 놓은 곳이다.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고 팜플렛과 자생초 또는 달력교환권을 구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보이는 것이 온실인데, 조경소재관, 분경·분화관, 재배온실로 구성되어 있다. 10월의 계절 탓인지 이미 꽃들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우리꽃의 아름다움과 식물소재의 종류들을 잘 분류해서 보여주려 노력한 흔적들이 보였다. 온실을 둘러보고 다리를 지나면 조그만 건물(cafe Bian)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꽃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만날 수 있고 또 자생식물에 대한 책과 각종 자료를 비치해 우리꽃에 대한 정보와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식물원에서 마련한 공간이란다. 건물 주위로 다양한 꽃들을 관찰할 수 있는 소로가 나있고, 구획이 지어져 여러종의 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수생식물을 볼 수 있는 연못과 관찰로도 함께 조성되어있다. 점차 소식물원이 많이 조성되고 생겨나야 할 시점에서 이러한 공간을 뜻밖에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좀더 좋은 아이디어와 소재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좋은 식물원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오대산에 오면 들를곳이 한곳 더 생겨 참 좋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허브나라로 떠났다. 3시 52분. 허브나라 도착. 봉평면에서 약 5분정도 차로 더 달리니 허브나라 표지판이 보였고 한 15분정도 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가니 그 유명한 허브나라에 도착했다. 들어가는 입구 왼쪽으로 있는 계곡이 명품이었다. 두 군데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곳인데 허브나라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한번 둘러보고 사진도 한 장 찍길 바란다. 온선생님은 초기 허브나라의 인상이 남아서 그런지 조금 실망하는 눈치셨지만 그래도 조성한 분들의 노고와 땀이 어려있는 곳이었다. 이런 일을 벌써 10년 전에 시작한 선각자들이었고 또 성공했지 않은가? 이 곳 또한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녹색의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길 희망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말 미래에는 이러한 장소가 많이 생겨나 우리 국민 모두가 자연 속에서 함께 숨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로 헐뜯지 않고 사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건물안의 상품점과 음식점을 둘러본 후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충주집터를 찾아 나섰다.
4시 47분, 봉평면 도착. 충주집터가 있었던 곳을 찾았다. 지금은 '95년 12월 10일 평창군수가 세운 비석만 있고 가옥은 없다. 소설 내용중 온선생님이 그리도 좋아하는 구절이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충주댁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 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요즘 신세대들이라면 뭔가 행동을 취했겠지만 소위 말하는 구세대들은 그저 얼굴이 붉어지고 또 극단적으로 치달은 결과가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이 무척이나 재미있다. 슬슬 시장끼가 돌아 막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뜨듯한 방안에 앉아 먹는 막국수와 수육은 과연 일품. 명렬형과 온선생님은 결국 소주한잔씩. 난 운전사. 장모님께서 과로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고 효석문화마을은 들리지 못하고 서울로 향했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해 지셔서 바쁘게 생활하고 계시니 다행이다.
큰 기대와 불안을 안고 떠났던 다랑쉬의 첫 번째 답사. 준비도 철저하지 못했고, 공부도 많이 하지 못하고 출발해 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숲과 나무는 언제나 의연하게 우리를 맞아준다. 떨어져 사는 벗들을 자주 보고싶어, 숲과 나무를 좀 더 가까이 보고싶어, 홍탁이 먹고싶어 그렇게 떠나자고 했다. 막걸리가 있어서 좋았고 먹다남은 차가운 떡이 있어서 좋았고 통깨가 듬뿍 들어간 도토리묵과 예쁘게 담겨져 나온 송어회가 있어서 좋았다. 그래도 더 좋았던 것은 벗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또 함께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서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은 여행이었다. 모두들 건강해서 좋고 건강한 자연을 만나서 좋았다. 그리고 이 건강한 자연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다랑쉬 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