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를 보면서 임진왜란을 다시한번쯤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관한 우리의 역사를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중 광개토대왕비에 있는 임나일본부설의 우리측의 비판을 적은것이 있어서 적어 본다.
김진명의 소설 황태자비납치사건 이란 책에서 보면 우리는 일본을 싫어하지만 일본인을 보면 그렇게 친절할수가 없다고,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정작 자기집에 세를 두지 않는다고 하더군..
길더라도 한번쯤은 읽어보고 역사를 한번쯤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적어본거야..
제목 : 임나 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비판
1. 개 요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정벌한 후 임나일본부라는 통치 기관을 설립하고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학설로 일명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한다. 이는 일제가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 사관으로,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대표적인 타율성 이론의 하나이다.
2. 비 판
일본이 그 근거로서 주장하는 것과 그에 대한 우리 학계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① 첫 번째 비판
근거 : 일본 서기 신공 황후 49년 조를 보면 “신공 황후가 보낸 왜군이 한반도에 건너가 7국과 4읍을 점령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였는데 562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7국과 4읍의 위치를 고증한 결과, 지금의 경남·경북의 대부분을 평 정하고 전남·전북과 충남의 일부를 정복하였으며, 백제왕의 조공을 받으면서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는데 그 중심 기관이 일본부이다.
비판 : 일본 서기는 8세기 초 일본의 왕가(천황가)를 미화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5세기 이전의 것은 신화적 전설로 간주하는 등 그 신빙성에 의문이 많은 책이다. 일본 고대사 연구가 혼미 상태인 것도 기록의 신빙성 때문인데, 유독 임나 관계 기록만은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것이 우선 문제이다. 그리고 일본 서기보다 먼저 저술된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든지 4세기의 일본은 열도조차 통합시키지 못한 상태 였기에 해외 침략의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일본측 근거는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국호도 7세기에 들어 와서야 사용되는데 그 이전에 일본부라는 용어가 있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② 두 번째 비판
근거 : 광개토 대왕 비문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이다.“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 ○○○羅 以爲臣民”이 그 내용인데 그들은 “왜가 신묘년 바다를 건너와 백제, 가야(?), 신라를 격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지배를 기정 사실화한다.
비판 : 일본측의 해석과 다르게 앞 부분의 주어는 왜이지만 뒷부분의 주어는 고구려로 볼 수도 있다. 즉,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기에, (고구려가) 백제(또는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인데, 실제, 이 비문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일본의 칭송을 위한 것은 아니며, 광개토 대왕비이기에 당연히 곳곳에 주어를 생략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한 역사적 사실도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 다. 그리고 1970년대 여러 사진·탁본·해독문을 조사한 후 일본 육군 참모부에 의해 상당 한 비문 변조가 행해졌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도 있기에 비문 자체의 내용조차 그 신빙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③ 세 번째 비판
근거 :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宋書) 왜국전을 보면 왜의 무왕에게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 加羅秦(辰)韓 慕(馬)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의 관직을 하사한 것은 임나 일본부의 사 실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비판 : 위의 관직명을 보면 임나와 가라가 중복된다든지, 마한·진한은 이미 멸망했는데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허구적인 명예직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남제에서도 백제 중신들 에게 조선 태수, 대방 태수의 관직과 더불어 당시 북위 지역인 북중국의 광양 태수, 청하 태수 등의 관직을 수여하고 있는 것처럼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왜왕의 요청에 의해 자신들 과는 관계없는 지역의 왕을 칭하는 것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송과 이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왕을 칭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기에 백제는 빠졌으리라고 볼 수 있다.
④ 네 번째 비판
근거 : 현재 일본의 이소노까미 신궁에 보관 중인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이 1873년 소개되 었는데 명문 속에 “供供侯王”의 供이 ‘바치다’는 뜻으로 해석되면서, 일본 서기에 "372년 백제 사신이 신공 황후에게 칠지도 한 자루를 바쳤다.”는 기록의 증거물로 제시된다. 즉,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다는 백제 봉헌설이다.
비판 : 명문의 侯王을 제후인 왕으로 해석하여 동진에서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동진 하사설도 있고, 후왕이 중국 사서에서 볼 수 있는 백제의 관직 이름이고 供이 ‘바치다’라는 뜻 이외에 ‘주다’는 의미도 있기에 당시 백제왕의 신하로 간주되던 왜왕에게 준 백제 하사설이 가장 유력하다.
⑤ 기타 비판
200여 년 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면 한국측 기록에 조그만 단서라도 남아 있을텐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유물이나 유적 또한 전무하다든지, 당시 일본 열도는 통일 제국이 형성되지 못한 분국 형태인데 바다 건너 식민지를 경영할 수 있었겠으며 식민지 경영의 필요성에 대한 명백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든지,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당시 가야는 왜보다 약 반 세기 앞선 선진 문화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왜의 가야 지배가 가능했겠는지 등의 의문이 있기에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은 명백해진다.
그리고 오히려 북한 김석형씨 같은 경우는 삼국 이전의 삼한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인들이 정치·군사적 거점을 구축하고, 이전 거주지인 백제·신라·임나·가야·진한·마한 등의 이름을 붙이고 본국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4세기 이후 일본에서 통일 기운이 형성되는 속에서 일본 내에 있는 가야의 분국인 임나에 설치한 것이 임나 일본 부라 하면서 송서 관직명의 문제점을 규명하고 있다. 7국 4읍의 위치도 일본에서 찾으면서 이에 따라 칠지도도 백제왕이 일본 내의 분국왕에게 하사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거꾸로 한반도인의 일본 진출을 증명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를 해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