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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날밤ㆍ삼다도 소식
가거라 삼팔선ㆍ고향소식
청년고향ㆍ청춘고백
전주대도서관 앞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천지를 태울수 있다. - 탈무드 -
빈축[嚬蹙] 사는 행동을 하지말고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 보면 증자[曾子]는 하루 세번 자신을 살핀다는 이야기가 있다
[曾子曰 吾 日三省吾身 爲人謨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왈 오 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나는 하루에 세 차례씩이나 스스로를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있어 성실치 못하지는 않았던가?
벗과 더불어 시귐에 있어 신의가 없지는 않았는가?
내가 제대로 익히지 않은 바를 남에게 전하지는 않았던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들은 것 등을 제데로 확인을 해보지도 않고 남에게 함부로
전달하거나 가르치다간 낭패[狼狽]를 당하거나 남의 빈축[嚬蹙]을 살 수가 있다
[현대사] 1988년(1세) #1
1. 쌍팔년도 雙八年度
쌍팔년도. 흘러간 옛날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되는 말. 썰렁하거나 고리타분한 개그를 일컬어 쌍팔년도 개그라고 하는 식. 우리가 흔히 쌍팔년도라고 부르는 해는 사실 1988년이 아니라 1955년이다. 사실은 단기 4288년인 1955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광복 직후에는 대한민국을 연호로 쓰다가 1948년 9월 25일에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하여 단기가 공식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킨 해인 1961년 12월 2일에 폐지 법령이 선포되어 서기를 공용 연호로 쓰게 되었고, 1962년 1월 1일부터는 단기의 공식적인 사용이 중단되었다. 그러면서 단기 역시 잊혀져갔다. 출처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로 알려져 있다. 이 시절은 전쟁 직후 사실상 법 질서가 무너진 혼란기를 의미하는 말로 통하며, '쌍팔년도 군대'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시대가 새 천년(2000년) 새 세기(21세기)로 바뀐 요즘에는 위와 같이 '쌍팔년도'가 1988년을 가리키는 말로 인식되기도 하는 모양. 좀 더 직설적인 용법은 쌍팔년도 올림픽 시절. 2012년 기준으로 사반세기가 흐르다보니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쌍팔년도 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인 이 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단순히 호황기냐 불황기냐의 차이가 아니라, 그냥 자신이 없었던 옛 시기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격. 이런 용법으로 쓰이는 경우 쌍팔년도가 단기 4288년이냐 서기 1988년이냐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2]
2. 1988 서울 올림픽 Seoul Olympic Games
대한민국은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의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1]
1) 개요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 일원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 정식 명칭은 제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신화를 입증하고 이후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된 대사건.
삼태극이라고 불리는 휘장이며 이 엠블럼은 KBS 신관 정면에도 붙어있다. 올림픽 당시 국제 방송 센터로 사용되었기 때문. 휘장 도안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前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인 양승춘이 맡았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올림픽 구호(캐치프레이즈)로 많이 쓰였다. 실제 개회식 당시 IOC 위원장이었던 사마란치가 축사 말미에 저 말을 한국어 그대로 외치기도 했다.
당시 서울특별시청 앞 광장(서울광장, 정확히는 프라자 호텔쪽)에 있던 화단 맨 위와 전광판에 나온 녀석이 호돌이다.
당시 서울특별시청은 이렇게 앞부분에 올림픽 기념 장식패널이 붙었었다. 전광판 날짜로 봐서 개최 10일 째인 9월 26일 찍은 사진인 걸로 추정된다.[3]
2) 호돌이 Hodori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마스코트. 모티브는 호랑이이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상모를 썼으며 목에는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륜기 메달이 걸려있는 것이 특징. 상모는 S자 모양으로 배치하여 역동성과 Seoul을 강조했다.
캐릭터 디자인은 공모를 통해서 1983년 디자이너 김현이 제안한 지금의 호돌이 캐릭터를 선정하였으며 최종 공모 당선작에서 수정을 가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호돌이 캐릭터. 공식 캐릭터가 발표된 이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름 공모를 하였고 이듬해인 1984년 4월 호돌이(HODORI)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여성형 캐릭터는 호순이. 이름을 채택하는 과정에 범돌이, 복돌이(...) 등이 후보에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호돌이로 낙점되었다.
참고로 1987년에 MBC에서 <달려라 호돌이>에 주인공으로 나왔고, 금성출판사에서 호돌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책도 나왔다. 호돌이와 함께 친구들, 동행 교수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내용인데 여기서 주인공이 호돌이를 부를 때 쓰는 주문이 지금 보면 상당히 아햏햏하다. 작가도 좀 오그라든다고 생각했는지 이후에는 호돌이를 소환하는(...) 주문 없이도 주인공 일행과 계속해서 여행하게 설정해놨다.
서울특별시의 해치 이전 공식 마스코트였던 왕범이는 설정상 호돌이와 호순이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종종 호돌이는 잊혀졌다느니 왜 캐릭터로 안 쓰느냐하는 의견이 보이는데 바로 저작권이 IOC에게 가있기 때문이다. 올림픽 끝나고 써봐야 IOC에게 돈줘야 쓸 수 있다. 참고로 다른 올림픽 마스코트 캐릭터도 마찬가지. 그래서 올림픽 마스코트는 대회가 끝나고 나면 상품화하기 매우 어렵다. 심지어 도자기 모양으로 되어 있는 中자 마스코트 모형 하나도 200~300만원은 족히 들 정도다.[4]
3) 유치과정(개최지 선정 과정)
1979년 8월 서울특별시가 유치 계획을 발표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뛰어들었다. 최초 구상은 박종규 당시 IOC위원이었다고 한다. 박종규는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으로서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였고, IOC위원 겸 사격연맹회장으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 듯 체육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는 우리나라가 최초로 유치한 세계구급 스포츠대회이다. 변변한 경기장도 없던 한국 체육계에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박종규가 이런 활동의 일환으로 박정희를 설득해서 올림픽 유치를 준비하게 된다. 실제로 1970년대 말 추진되었던 충청남도 지역에 신행정수도를 건설하려는 도시계획에 1996년 올림픽 주경기장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미루어 추정해보면 새로 지어질 행정수도로 1988, 1992년 유치전에 참여해서 인지도를 높힌 다음에 1996년 유치에 승부수를 띄우려는 계획이었던거 같다.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정치적 혼란 속에 올림픽 유치 계획은 완전히 잊혀졌다. 박종규 자신도 정치 규제로 인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올림픽 유치 계획은 표류하게 된다.
정통성이 없었던 제5공화국은 어떻게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스포츠를 장려하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 속에서 올림픽 유치 계획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 배경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본인 세지마 류조(일본 극우의 대부. 의외로 지한파였다. 한국에 강력한 반공 정권이 세워지길 바라는 뜻에서 남한을 지원하려 한 것.[5])가 있었다. 경쟁도시가 자기 나라 나고야인데, 정작 자신은 서울 유치를 돕겠다고 전두환에게 올림픽 유치를 권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개최 도시가 될 서울특별시가 2조원이 넘는 예산 부담을 이유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이는 1980년 1차 실사단 조사에서 서울시가 전혀 협조를 안 하는 최악의 상황을 낳고 만다. 거기에 국무총리 남덕우가 재정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고 나섰다.
다행히 이 당시 유치 후보 도시가 나고야를 빼면 전무했기 때문에 단독 개최지 선정이라는 모양새 안 나는 결과를 원하지 않던 IOC는 그냥 서울의 계획안을 통과시킨다. 1972 뮌헨 올림픽의 검은 9월 사건(팔레스타인의 테러로 17명 사망)으로 보안비용이 폭증하고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 여파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론이 퍼지던 시점이었다. 중앙정부의 지원없이 올림픽을 유치했던 몬트리올 시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그래서 원래 계획중이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알제리의 알제, 그리스의 아테네가 모두 발을 뺐다.
그러자 무조건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심한 정부가 정권의 2인자격인 노태우 정무제2장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뛰어들면서 정부와 현대그룹의 인력을 총동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치전에 뛰어든다. 사실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 결심을 국내에 보여주기 위한 얼굴마담이고, 실질적인 유치는 정주영과 박종규의 공이다. 하지만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를 전적으로 자신의 공으로 내세우고 정주영을 무시했다. 이게 훗날 정주영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사실 노태우가 그렇게 나올만 한게 일단 박종규는 1985년에 죽었고, 게다가 죽기 전까지도 공직생활을 못했던 고로......
나고야의 경우 이미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준비했기 때문에 서울로서는 승산이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오죽했으면 유치 도시가 어디인가보다는 나고야가 몇 표까지 얻느냐에 관심이 집중될 정도였고, 서울의 경우에는 달랑 3표만 나올거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그 3표의 정체는 바로 대한민국, 미국, 대만. 대한민국이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없고 미국은 당시 일본의 급성장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대만은 수교국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민국이 가장 큰 수교국이었기에 당연히 서울을 절대적으로 밀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은 당시 아시안 게임 개최 경험마저 없었기 때문에, 먼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이는 아시안 게임 유치전의 상대국이 하필이면, 북한의 평양이라 더 신경써야 하는 대목이었다. (이라크의 바그다드도 함께 참여했는데, 둘다 중도 포기.)
하지만 노신영 외무부 장관 등은 대륙간 안배원칙을 고려할 때 12년 만에 아시아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리는걸 탐탁치 않아 할 것이며, 20세기가 지나면 중국 등이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시 그의 견해는 지금와서 보면 상당한 혜안이라 할 수 있는데,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중국의 베이징은 마지막 4차 투표를 제외하고는 계속 선두를 유지했으니, 만약 1981년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지레 겁먹고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면 사실상 한국에서의 올림픽 유치는 요원했을 것이다.
한국은 일본과 아시안 게임 빅딜을 제안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 빅딜은 86년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를 일본이 보장하고 대신 한국은 88년 올림픽 신청을 포기하는 건데, 일본이 이를 거절한다. 너무 유치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결국 1986 서울 아시안 게임도 유치하고 88년 올림픽도 유치하게 된 거 보면 일본 안습.. 이 때문에 뒷날 일본이 한국의 연막 전술에 당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서울은 그러한 초기의 불리함을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통해 극복하여. 방심하고 느긋하게 유치를 준비한 일본 측에 비해 온갖 노력과 성의를 다한 한국 측의 유치 준비에 나고야의 절대우세 분위기는 개최지 결정 당일에는 백중세(세력이 엇비슷함)로 예측될 정도로 상황이 돌변했다. 특히 컨벤션(회의)과 프리젠테이션(시각설명회)에서 잇따라 우세를 점하면서 상황을 호전시켰다. 일본 측 프리젠테이션 연사는 영어를 못했고, 반대로 한국 측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아울러 양자 대결 구도에서 처음 개최하는 쪽에게 기회를 달라는 호소가 먹혔다.
그 결과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꺾고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쎄울!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음. 참고로 총회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상세한 득표수를 발표할 때는 프랑스어-영어순이었다.
절대로 서울을 지지하지 않을 나라들(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중압감(해당 국가 소속 심사위원 비율은 전체 위원 가운데 약 2할 정도였다.)과 북한의 각종 음해와 방해공작 속에서 52 대 27이라는 결과는 상당히 놀라운 것으로서 당시 급성장하는 일본을 경계한 서방 국가들을 비롯해, 일본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속에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이 있다. 이 때문인지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 후에도 선진국 및 강대국들 못지 않게 서남아 및 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한국 대통령이 현지 국가에 공식 방문한 사례는 전두환이 최초였고, 올림픽 유치 당시 참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저가로 전세기를 띄워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서울 올림픽 당시에 지켜졌다.
전두환 이후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은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프리카 3개국 순방(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이전까지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종종 방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뿐, 현지 방문은 없었다. 물론 이 보다 전두환이 국내를 비롯해 미국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다지지 못 해, 안 좋은 국내 여론을 잠식시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이를 만회해 보려는 속셈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향상과 더불어 외교노선 다변화에도 도움이 되는 등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드라마 제5공화국(BGM:Deus Non Vult-공익이 공익이 버스를 버스를 20번이나 혼자 타네)에서는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사할린에서 소련에게 격추됨)을 중심으로 당시 국내 정세 및 현안이 너무 복잡했던 까닭에 전두환이 일정에 잡힌 제3세계 순방외교를 취소하려고 했으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이 이들 제3세계 국가 덕분에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전두환을 설득해 결국 순방외교를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그 이후 얼마 안있다가 전두환은 예정에도 없던 친북 성향의 국가인 버마로의 순방외교를 청와대 참모진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북한의 타겟에 잡히게 되어 결국 버마 순방 중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1983년 10월 9일)라는 국가 초유의 사태를 겪게 되고, 김재익 등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정부 핵심 관료들을 대거 잃게 된다.
무엇보다 일본의 표밭으로 알려졌던 유럽 지역 표심 공략에는 스포츠 용품의 절대 강자인 아디다스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했다. 독자적인 스포츠 브랜드가 많지 않다는 점 때문에 일본보다 한국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당시로도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인 미즈노와 아식스가 있던 일본에 비해 한국은 오로지 국내에서나 유명한 프로스펙스 정도가 있을 뿐이여서 만일 일본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면 휘장사업 등에서 일본업체가 독차지할 것이 분명한 데 비해 한국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면 아디다스가 사업권을 따 내던가, 적어도 경쟁하는 일본업체의 승승장구를 막을 수 있다고 봐서 한국을 밀었다.
이것과 똑같은 이유로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권 추첨시 유럽세가 카타르를 지지하여 결국 카타르가 유치했다. 국제 대회 개최 노우하우가 거의 없는 나라이면서 오일머니만 많은 나라이다 보니 경기장 건설사업이나 방송 중계 및 IT 관련 사업들을 유럽업체가 수주할 수 있는 나라라고 본 것이다. (당시 경쟁국인 한국,일본,미국 같은 나라에서 유치했다면 거의 대부분 자국업체들이 사업수주를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유치단은 아디다스의 회장으로서 국제 스포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당시에는 나이키의 사세가 미약했다.) 홀스트 다슬러에게 스포츠마케팅 관련 이권을 보장해주고 그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많은 IOC 위원들을 한국을 지지하도록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슬러는 1982년 스포츠마케팅 회사인 ISL을 설립한다. 당시 정부의 특사격이던 박종규가 다슬러와 여러차례 만나면서 협상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중동지역의 경우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붐으로 80년대 초에는 이미 우리나라 유수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여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현지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었던데다, 결정적으로 일본이 올림픽 유치 준비를 앞두고서 쿠웨이트의 IOC 진출을 반대하는 삽질을 하는 바람에 쿠웨이트가 한국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같은 문화권으로서 유대감이 강한 나머지 중동 국가들의 표도 한국으로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나고야 시민들 사이에선 경기장 건설을 위한 환경파괴 등을 우려해서 올림픽 반대 움직임도 많았다. 일부 시민단체는 적극적인 유치반대 활동을 벌여 나고야의 올림픽 유치 명분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더구나 당시 아시아에서는 일본 외에는 올림픽 개최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1964년에 하계올림픽(도쿄)과 1972년에 동계올림픽(삿포로)을 이미 치룬 일본이 얼마 안돼서 연달아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에 대한 형평성 문제도 있었고...
참고로, 2005년에 개최된 등록박람회인 2005 아이치 엑스포가, 바로 1988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나고야가 그 한을 풀기 위해서 20여년간 노력한 끝에 유치한 엑스포이다(...)[3]
4) 정치적 혼란과 올림픽 개최
분단 상황에 대한 우려를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극복했지만, 북한의 방해는 여전히 심했다. 이미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일본을 지지했던 북한은 1987년까지 뜬금없는 공동 개최론을 주장했고, 급기야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했다.
대회 명칭을 평양-서울올림픽으로 해야한다는 등의 헛소리를 쏟아냈다. 이 일로 인해 원한을 가졌는지, 북한은 아시안게임 방해를 위해 아랍계 테러리스트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1986년 9월 14일)를 사주했다. 이 테러로 5명이 죽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 올림픽때 공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물론 이정도는 둘째 치고, 가장 유명한 사건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1987년 11월 29일, 이른바 KAL기 폭파 사건. 범인은 하치야 마유미. 본명 김현희).
결국 공동 개최론을 단념한 북한은 대신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임수경 방북사건이 이 때 있었다)을 개최하여 올림픽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그 결과는...[3] 존재 자체가 흑역사인 북한에서 1980년대 후반에 저지른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3대 흑역사(서해갑문,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가 되어버렸다. 이 3대 흑역사와 더불어서 소련 붕괴로 수출길이 막히다시피했고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 생산량 감소가 겹쳐지면서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초래하게 된다. 더 심각한 건 북한에서는 이 3대 흑역사를 혁명과업의 치적으로 아직도 선전하고 있다는 점.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이 역시 진리.[6]
이런 북한과의 관계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소련과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의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6월 항쟁(1987년 6월 26일)의 와중에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 삼아 LA와 베를린 등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6.29 선언으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3]
5) 공산주의권 참가 문제
1980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 LA 올림픽에서 각각 서방 국가와 공산 국가가 보이콧을 한지라, 서울 올림픽에서도 공산 국가의 참가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는데, 중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천명해왔다. 당시 중국은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아시안 게임부터 유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원래 소련과 썩 사이가 좋지 않은 독자적 공산 국가였던데다 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를 의식해서 참가한 것이기에 다른 공산 국가의 참가에 별 영향이 없었다. 실제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아시아 공산국가들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는데,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에 크다 보니 묻혔던 것. 아무튼 중국만 갖고는 공산권의 서울 올림픽 참가 여부가 상당히 불투명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소련 위성국가인 동독이 참가 신청을 했는데, 동독의 경우 스포츠가 곧 국력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1984년 올림픽에 보이콧한 데 대한 자국 내 반발이 워낙 컸던지라 서울 올림픽에 참가신청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소련이었는데, 만약 이번에도 보이콧을 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다른 공산 국가마저 전부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었던 김운용(김운용이 IOC 위원이 된 시점은 박종규가 죽은 시점 이후로 보인다.) 등이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 소련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설득하였다. 소련 IOC 위원들은 김운용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영어로 대화할 생각이었는데, 김운용이 예상 밖으로 러시아어로 대화를 시작하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고. 때마침 소련에서도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마침내 1988년 초 소련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여러 공산 국가들이 이에 동참하면서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만에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되었다.
단, 완벽하게 모든 IOC 국가가 참가한 것은 아니라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일부 국가들은 참가를 거부하거나 포기했다. 에티오피아(1974~1991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와 쿠바를 비롯해 총 7개 국가(알바니아·마다가스카르(75~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세이셸(7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니카라과(쿠바의 지원으로 79~90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가 참가를 포기했으며, [28] 전 IOC 국가의 참가가 실현된 것은 다음 올림픽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였다. 그래서 동서화합의 올림픽이자, 동시에 마지막 보이콧이 벌어진 대회라는 기묘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소련 및 여러 공산권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대한민국 정부는 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 허용을 대가로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용인해준다쳐도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인공기를 게양하고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다만 시각을 조금 바꾸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결렬되었기에 남한 땅에서 북한 국기가 나타나고 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인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3]
6) 개막식
KBS 올림픽 개막식 중계 풀버젼. 3시간 40분에 달하는 크고 아름다운 러닝타임과 아나운서들의 깨알같은 설명들이 일품. 더불어 그 당시 TV광고들도 볼 수 있는 것이 매력이라 하겠다. 참고로 KBS1에서 방영했다.
개막식은 한국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올림픽 개막식이 보통 오후 3시 경에 시작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개막식 시간 조정에는 미국내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개막식 입장은 한글 ㄱㄴㄷ순대로 진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가나가 2번째, 홍콩이 159번째로 입장했다. 다만, 국가간의 관계 및 사정에 따라 순서가 뒤죽박죽 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란의 경우 원래 입장순서가 이라크 다음으로 배정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의 앙금 때문에 몇 나라 뒤로 순서를 미루기도 했다.
개막식에서 가장 인상깊던 장면은 행사 도중 윤태웅이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였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경기장 한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등장한 소년이 관중에게 손을 흔든 이 퍼포먼스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다.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 진영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한다. 기획한 사람은 당시 올림픽 개회식 준비에 참여하던 이어령.
이데일리TV 이슈&토크 시즌2 1회 '굴렁쇠 소년 윤태웅'.
굴렁쇠 소년 윤태웅은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나서 굴렁쇠 소년으로 뽑혔다고 한다. 현재는 헐(tvn '재밌는 TV 롤러 코스터'의 한 코너)에 고정출연하는 등 연기자로 활동중.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주자가 마지막에 바뀌기도 했다. 원래 누구가 다 예상하는 것처럼 손기정이 점화할 것으로 보였지만, 너무 뻔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에서 막판 방침을 바꾸게 된다.
손기정은 끝에서 두 번째 성화 봉송주자가 되었고,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온 후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였던 중거리 육상선수 임춘애에게 넘겼다. 그리고 임춘애가 트랙을 잠시 돌다가 점화자에게 넘긴 것. 성화 점화자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표어였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맞춰 평범한 시민들이 점화하게 되었다. 건국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라토너 김원탁(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금메달 출신이다. 황영조 바로 이전 짧게나마 한국 마라톤계를 빛냈던 선수), 섬마을 학교 선생님이던 정선만과 서울 예고 여고생 무용수이던 손미정이다.
올림픽의 관례였던 성화 최종주자가 성화를 점화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뜨린 대회다. 이때 최종 성화 봉송주자였던 손기정 옹이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
위의 점화식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사상 최초로 계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화대를 점화한 올림픽이다. 이전까지는 성화대 옆에 계단이 놓여져 있었고 이를 올라가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으나,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도입한 후 새로운 점화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이 당시 평화의 상징으로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닭둘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개회식 때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성화대에 옹기종기 모여있다가 성화가 점화되는 순간……. 해외언론 만평에서도 이 비둘기들이 성화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건을 가지고 '불고기 왕국이라 성화 점화 때에도 불고기를 구웠다'고 꼬집기도 했으나 국내에서는 올림픽의 이미지가 실추될 것을 우려해서 이에 대한 공식적인 보도는 금지되고 그냥 떠도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이 비둘기가 타죽은 것 때문에 최근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최악의 개막식 중 하나로 꼽았다. 이 때를 교훈삼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는 비둘기를 폐회식때 풀어놓기로 했다.
맨 마지막 순서였던 한마당에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를 코리아나가 열창했는데,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자국의 의상을 입고 한데 어우러진 것은 물론이고 역대 올림픽 마스코트까지 총집합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특히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아미크(1976 몬트리올 올림픽,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로 아프리카와 카리브의 26개국이 불참), 미샤(1980 모스크바 올림픽,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대한민국 등 서방국가 67개국 불참), 샘(1984 LA 올림픽, 공산권 14개국 불참) 그리고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가히 최고의 퍼포먼스라는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
http://library.kspo.or.kr/movie/movie02_list.do
다른 고화질 개,폐회식 영상이나 대회경기, 86 아시안게임의 영상을 올림픽 자료실에서 볼수 있다. 단 WMP 기반이므로 일부 브라우저에서는 재생되지 않을 수 있다.[3]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포스터.
사진 출처 : http://www.88olympic.or.kr/manage/upload_files/attach/200711/2006082114435143002.jpg
박세직 체육부 장관이 제24회 1988 서울 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8]
1988년 9월 12일 함석헌은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600명의 소위 세계 민간지도자, 정치지도자,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서명한 '세계 평화 선언'을 낭독했다. 이 일에 참여한 함석헌은 재야와 운동권으로부터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를 했다며 심한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함석헌과 친밀했던 인사들도 비난을 함께 하였다. 그의 나이 89세였다. 1989년 2월 4일 그의 마지막 가는 그 날을 정진동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장으로 진행된 함석헌의 장례식에 재야운동권은 무심했고, 국무총리가 지원했다. 장례식 때 부조가 들어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의 그의 활동으로 인해 비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장례식에 재야의 참석이 적었다. 그러나 그 분은 위대한 인생을 사셨다. 함석헌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사람이 아플 때 그냥 앉아 있는 분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 주저하지 않고 언제 어느 곳이나 찾아가는 분이었다. 자기 소신을 지키며 사셨다. 이런 시대에 그의 희생이 따르지 않았다면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9]
[1] 엔하위키 미러 "1988"
https://mirror.enha.kr/wiki/1988%EB%85%84#rfn1
[2] 엔하위키 미러 "쌍팔년도"
https://mirror.enha.kr/wiki/%EC%8C%8D%ED%8C%94%EB%85%84%EB%8F%84
[3] 엔하위키 미러 "1988 서울 올림픽"
https://mirror.enha.kr/wiki/1988%20%EC%84%9C%EC%9A%B8%20%EC%98%AC%EB%A6%BC%ED%94%BD
[4] 엔하위키 미러 "호돌이"
https://mirror.enha.kr/wiki/%ED%98%B8%EB%8F%8C%EC%9D%B4
[5] 엔하위키 미러 "세지마 류조"
https://mirror.enha.kr/wiki/%EC%84%B8%EC%A7%80%EB%A7%88%20%EB%A5%98%EC%A1%B0#s-1.3
[6] 엔하위키 미러 "북한 80년대 3대 흑역사"
[7] 엔하위키 미러 "북한의 대남 도발사"
[8] 엔하위키 미러 "박세직"
https://mirror.enha.kr/wiki/%EB%B0%95%EC%84%B8%EC%A7%81
[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석헌"
[출처] [현대사] 1988년 #1|작성자 땅두지
[현대사] 1998년(1세) #2
2. 1988 서울 올림픽 Seoul Olympic Games
7) 코리아나 KOREANA
1962년 홍화자, 이애숙, 이승규, 이용규 등이 모여서 결성한 가수그룹. 과거에는 아리랑 싱어즈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0년에 코리아나(KOREANA)로 변경하였고 1988 서울올림픽 개막식 때 명곡 손에 손잡고를 부르면서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93년에는 대전 엑스포 주제곡인 그날은을 부르게 되면서 손에 손잡고에 이은 히트를 치게 되었다.
멤버 4명 모두 가족관계이다. 이용규, 이애숙은 이승규의 동생이고 홍화자는 이승규의 사촌형수이다. 이승규는 배우 클라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현재는 활동이 없는 편이나 홍화자는 2004년 솔로로 데뷔하여 독립하였다.[10]
클라라.[11]
8) 코리아나(Koreana)의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http://youtu.be/QgwGV-0k6JI (서울올림픽 개막식)
http://youtu.be/tc2hWJ2EjQs (영어판 뮤직비디오.)
한국어판 We are the world.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곡이다. 작사 : 톰 휘틀록(Tom Whitlock), 김문환, 작곡 : 조르조 모로더('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플래시 댄스', '탑건'의 OST 작곡가. 공익 광고 '옛날 어린이들은').
전세계적으로 1,700만 장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고 추정된다. 이는 동양인 뮤지션으로서는 사상 최고의 싱글 판매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선 고작 10만 장이 팔렸다. 그리고 말 그대로 추정치일 뿐이다. 공식 판매량으로 1700만 장 인증 받은 게 아니다. 사실 당시엔 미국과 일본 정도를 제외하곤 판매량을 공식적으로 집계하는 시스템이 미약했기 때문에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음악 시장 넘사벽 1위인 미국에선 휘트니 휴스턴의 주제곡 때문에 판매량이 거의 없었으므로 1700만 장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역대 싱글 판매량 1위는 엘튼 존의 '바람 속의 초(Candle in the wind 1997)'. 대략 2500만 장 정도 팔렸다.
독일, 일본, 홍콩, 스위스, 스페인을 비롯한 17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데, 이 역시 입증 자료가 필요하다. 미국은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One moment in time' 를 주제곡으로 사용해서 제외한다.
여하튼 올림픽 기간 중 라디오 방송 리퀘스트 1위를 달리는 등 대단한 기록과 명성을 날린 덕분에 현재까지도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최고의 올림픽 공식 주제곡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애초에 올림픽에 제대로 된 주제곡이 없었으니...
특히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아미크, 미샤, 샘 그리고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는데 이는 말 그대로 전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가히 최고의 퍼포먼스.
올림픽 주제곡으로의 선정된 경위는 너무 우리 것에만 치중하지 말고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판매 네트워크를 가진 음반 기획사들에 일종의 지정 공모를 하는 방식으로 가장 유리한 조건을 한국에 제시하는 회사를 선정하는 것을 골자로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지정 공모를 한 음반 기획사들 중에 당시 '손에 손잡고' 를 제안한 폴리그램 측에서 음반 프로듀서는 조르조 모로더, 가수는 '코리아나' 로 하고 음반 제작 및 유통에 드는 비용을 모두 부담하며 가사 저작권을 조직위원회에 헌납 및 100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갱신할 경우에 이후 발생하는 수익금에 대하여 음반 1장당 3%를 로열티로 조직위원회에게 지급하기로 하는 등의 파격적 조건을 제시한 덕분에 선정이 되었다.
특히 모로더 프로듀서는 70~80년대에 신시사이저를 통한 혁신적인 연주로 전자 음악, 뉴웨이브, 하우스, 테크노 등의 음악 장르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각종 할리우드 영화 음악에도 참여하여 《플래시 댄스》, 《탑건》 등의 OST 타이틀곡(특히 《탑건》의 OST 타이틀곡 'Take my breath away' 는 '손에 손잡고' 와 상당히 비슷한 편곡 스타일을 보여주기도 한다.)을 작곡하며 아카데미 음악상을 3회씩이나 수상한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전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의 주제곡을 작곡하기에 검증되고 신뢰성이 높은 작곡가였다. 하지만 단순히 작곡가의 명성만 가지고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으며 모로더는 '손에 손잡고' 의 작곡을 위해 우리나라 노래를 3000곡씩이나 들었다고 할 정도로 쏟아붓는 열정도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선정 결과 발표 직후 국내 여론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올림픽으로 '우리의 모습을 세계인에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왜 외국 작곡가에게 그 기회를 주냐' 는 비난이 난무했다. 故 박세직 당시 조직위원장에 따르면 우리들 취향이 아니라 손님들 취향에 맞추게 하려고 그랬다고 한다.
'코리아나' 또한 당시에 해외 음악 트렌드와 정보를 얻기 어려웠던 국내에서는 '이 듣보잡 그룹은 누구냐' 며 교포들이 만든 3류 가수 수준으로 취급 당했다. 사실 '코리아나' 는 1970~80년대 당시 유럽에서 상당히 인기를 얻었던 그룹으로 1980년 당시 서독 ARD 인기프로 '무지크라덴(Musikladen)' 에서 유럽의 음악 그룹 Top 10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당시 해외에서는 명성도 대단했고 음악성도 알아주는 그룹이었기에 전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의 주제곡을 부르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명성과 실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참고로 코리아나와 함께 Top 10에 선정된 그룹들로 아바, 듀란 듀란, 칭기즈 칸 등이 있다. 흠좀무.
허나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가수들이 서울 올림픽을 주제로 한 곡들을 많이 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도 의뢰할 작곡가들이 있었기에 국내 뮤지션의 곡을 사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80년대를 대표하는 국내 뮤지션인 조용필 또한 서울올림픽 주제곡을 염두에 두고 '서울서울서울' 을 만들기도 했고 서울 올림픽 선정 직후 주제곡으로 가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가 유력하기도 했었다. 이쪽은 한국 가요계의 거장 길옥윤 작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곡 '손에 손잡고' 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는지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회에서는 국내 유수의 음악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당시 국내에서 만들어진 올림픽 관련 곡들과 '손에 손잡고' 를 직접 비교 감상 및 평가하는 공개 품평회라는 파격적인 이벤트를 열었다. 작곡가 조르조 모로더도 품평회에 직접 참석할 정도로 상당히 의욕적으로 준비하였으며 워낙 '손에 손잡고' 의 수준이 높았기에 음악 관계자들의 비교 감상 및 투표 결과 '손에 손잡고' 가 채택되며 그 이후로는 모두들 데꿀멍. 국내 음악 관계자들의 소견에 따르면 마음으로는 한국의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손에 손잡고' 가 친근감이 가고 활기찬 느낌도 나는 등 좋다며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은 이 노래가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확정되었다. 이후 영어가사 속에는 '아리랑' 을 넣도록 하였으며 한국어 가사는 서울대학교 김문환 교수에 의해 1988년 4월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올림픽 개최 직전까지도 주제곡을 죄다 한국어로 부르라는 요구가 빗발쳤는데 조직위원회 측에서는 국제행사에 한국어로만 부르면 안된다고 대립한 끝에 결국 개막식에서 1절은 한국어로, 2절은 영어로 불렀다고 한다.
사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상당한 퀄리티를 가진 곡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에 비해 선정 당시 경합을 벌였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 는 노래상으로 활기차고 힘찬 리듬이 있지만 감동적인 하모니를 더했던 '손에 손잡고' 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며 2013년의 관점에서 들을 경우 상당히 촌스러운 느낌이 난다. 사실 김연자는 트로트 거장이지만 올림픽 주제곡을 트로트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곡을 작곡한 모로더부터가 전설의 뮤지션이다보니(...) 모로더 스타일의 신스 베이스 라인과 신시사이저 사운드,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인 멜로디와 코리아나의 힘찬 가창이 돋보이는 명곡. 게다가 냉전 종결 직전인 1988년을 살아가던 당시 세계인의 염원, 즉 세계 평화에 관한 가사 내용이 매우 감동적이기도 하다. 냉전 항목이나 기타 냉전 관련 작품들(왓치맨,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에서도 나오지만 냉전 당시의 사람들은 늘 제3차 세계대전 혹은 핵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가사
<한국어>
하늘높이 솟는 불
우리의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어디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슴 불타게 하자
하늘 향해 팔 벌려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 누리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영문>
See the fire in the sky
We feel the beating of our hearts together
This is our time to rise above
We know the chance is here to live forever for all time
Hand in hand we stand all across the land
We can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o live
Hand in hand we can start to understand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
Arirang*
Everytime we give it all
We feel the flame eternally inside us
Lift our hands up to the sky
The morning calm helps us to live in harmony for all time
Hand in hand we stand all across the land
We can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o live
Hand in hand we can start to understand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
Arirang*
* 위에 소개되었듯 한국측 요구로 들어간 가사 '아리랑'. 두유노 시리즈의 원조라고 할까... 한국 쓰레기 기자들이 외국인 스타를 만나면 물어보는 질문. 정확히는 "두 유 노(Do you know) ○○○?"하는 식이다.
술 마시고 노래방 갔을 때 마지막 곡으로 다 함께 이거 부르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 듯. 꽤 웃기는 풍경이 연출된다. 어쨌든 그 유명세 덕에 한국 사람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곡이다. 다만 부르는 순간 이게 쉬운 곡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정말이지 끝도 없이 올라가는 노래. 무려 남자키로 Bb4(2옥 시)까지 올라간다. 단순히 한 번 찍는 수준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개마고원처럼 높은 고음역대를 자랑한다(...)
태릉선수촌에서는 아침 6시만 되면 이 노래 중에서 '이제 모두 다 일어나~' 라는 부분이 나온다고 한다. 군대의 기상나팔처럼 태릉선수촌에선 이 노래가 기상송인 셈. MBC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심권호가 2012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는 후배 선수들을 위해 선택한 응원곡으로 이 곡을 소개하며 20대 청춘을 태릉선수촌에 뼈를 묻으며 올림픽 준비에 매진한 심권호의 애환이 담긴 사연에서 이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이 곡을 부른 코리아나가 위문공연차 선수촌을 방문하여 아침에 기상송을 직접 불러주기까지 하자 심권호는 코리아나 멤버들을 만나자마자 앞에서 대놓고 이 노래 싫다고 했다고(...)
1988 서울 올림픽의 방해를 겨냥하고 북한에서 저지른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1990년작 영화 《마유미》의 종반부에 이 노래가 삽입되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노래가 삽입된 장면이 상당히 우울하고 찡한 게 테러로 희생된 탑승객의 부친인 어느 할아버지가 아들이 테러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휠체어를 타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장면이 사람들이 환호와 갈채를 보내는 올림픽 개막식 장면과 함께 교차되며 나오기 때문이다. 지못미.
2008 베이징 올림픽 주제곡 선정 당시 총감독인 장이머우 감독은 "9만 8871곡의 응모작 중에서 서울 올림픽 주제곡 풍을 피하려 했으나 응모작 대다수가 서울 올림픽 노래와 유사해 고생했다" 라고 했다. 해당 동아닷컴 기사 http://news.donga.com/3/all/20080812/8615711/1.
이 노래의 후렴구 '손에 손잡고~' 부분부터가 김동률의 '아이처럼' 과 코드 진행이 살짝 비슷해서 '아이처럼' 을 부르다가 끝 부분에 꼭 '손에 손잡고~' 를 열창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듯하다. 개그콘서트에서 박휘순이 이 점을 착안해 노래 개그를 하며 '아이처럼' 의 "사랑한다 말하고~" 부분에 뒤에다 리듬이 그럭저럭 맞는 '손에 손잡고' 의 "~벽을 넘어서" 를 붙여 개그를 한 적이 있다. 반응은 그저 그런 편이었다. 왕비호도 한 적 있다. 그리고 쉰 밀회에서도...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1990년 4월 김일성 생일을 기념하여 체코 서커스단이 공연하던 도중 바로 이 노래의 멜로디가 연주되었다는 점이다. 더 압권인 건 김일성이 그걸 보고 박수를 쳤다는 것이다. MBC 뉴스데스크 보도내용을 보면 김일성과 북한 관객들이 어떤 노래인지를 아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했으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일성은 분명히 어떤 노래인지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박수를 친 것은 어떤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김일성과 북한 관객들 모두 그 음악이 나오는 순간 표정이 좀 굳어지긴 하더라[12]
9) 빅토리 The Victory
손에 손잡고와 앨범에 함께 실린 'The Victory(승리)' 또한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명곡이다. 이 곡 역시 조르조 모로더가 작곡한 곡으로 역동적이면서도 힘찬 리듬이 일품이며 올림픽 당시 '손에 손잡고' 이후 후속곡으로 나름 유명했다. '손에 손잡고' 와 달리 한국어 가사로 불러지지 않았으나 영어 가사 해석 내용을 보면 '손에 손잡고' 의 가사 못지않게 올림픽 본연의 취지에 맞는 좋은 내용으로 가사가 구성되어 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의 내부 자료에 따르면 이 곡이 사실 공식 주제가였고 '손에 손잡고' 는 개막곡일 뿐이었다는데 '손에 손잡고' 가 의외로 엄청난 인기를 끄는 바람에 두 곡의 운명이 뒤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근래에도 국내 가수들이 대규모 행사에서 단체곡으로 가끔 부르기도 하는데 원곡을 모르는 이들 쌍팔년 이후에 출생한 꼬꼬마들은 이 곡이 그냥 해외 팝송인 줄 알고 있기도 한다. 아니면 모 야구단(SK 와이번스)의 응원곡으로만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카더라
올림픽 당시 코리아나는 이 곡을 개사한 곡으로 펩시 CF에 출연하기도 했다. 코리아나의 멤버 이승규씨의 딸인 배우 클라라가 밝힌 뒷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CF 개런티가 무려 5억이었는데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40억에 육박하는 거액이라고... 흠좀무. 올림픽 당시 코리아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12]
가사
Doesn't matter if you win or lose only how you play the game
Gotta reach for the goal It's part of the soul
You've got to give it all that you've got
Competition is it's own reward training for it all your life
From somewhere inside there's a sense of pride
and you take it all of the way
To the Victory
To the Victory
경기에 이기고 지는것은 중요하지 않지
네 영혼 깊은곳에서 부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거야
네가 가진 모든것을 그곳에 쏟아부어서
경쟁은 그 자체로 네 인생을 단련시키는 보상을 준다네
내면의 어느곳에서부터 자부심을 비롯한 여러가지 형태로
승리를 향해~ 승리를 향해~
Waiting for the chance to do your best knowing you can give it all
There is a moment where you are beyond compare
And there is nothing that can stop you now
All you need is just one chance to show what it is that you're made of
You're feeling stronger now and you take the row
You are reaching for the highest star
To the Victory
To the Victory
네가 알고 있는 모든것을 쏟아부을 최고의 기회를 기다려
(타인과) 비교되는 것을 넘어서는 순간이 올꺼야
이제 너를 가로막는것은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필요한것은 네가 누구인지를 보여줄 단 한번의 기회야
네가 점점 강해지는것을 느끼고 자세를 잡아
넌 가장 높은 별에 닿을꺼야
승리를 향해~ 승리를 향해~
가사 출처 : 다음 뮤직 http://m.music.daum.net/song/vcliplyrics?song_id=8015305&album_id=478395
가사 해석 출처 : 네이트 지식인 http://ask.nate.com/qna/view.html?n=3994413
http://youtu.be/1fBS4rDJbfA 93' 대전엑스포 주제곡 - 그날은
[1] 엔하위키 미러 "1988"
https://mirror.enha.kr/wiki/1988%EB%85%84#rfn1
[2] 엔하위키 미러 "쌍팔년도"
https://mirror.enha.kr/wiki/%EC%8C%8D%ED%8C%94%EB%85%84%EB%8F%84
[3] 엔하위키 미러 "1988 서울 올림픽"
https://mirror.enha.kr/wiki/1988%20%EC%84%9C%EC%9A%B8%20%EC%98%AC%EB%A6%BC%ED%94%BD
[4] 엔하위키 미러 "호돌이"
https://mirror.enha.kr/wiki/%ED%98%B8%EB%8F%8C%EC%9D%B4
[5] 엔하위키 미러 "세지마 류조"
https://mirror.enha.kr/wiki/%EC%84%B8%EC%A7%80%EB%A7%88%20%EB%A5%98%EC%A1%B0#s-1.3
[6] 엔하위키 미러 "북한 80년대 3대 흑역사"
[7] 엔하위키 미러 "북한의 대남 도발사"
https://mirror.enha.kr/wiki/%EB%B6%81%ED%95%9C%EC%9D%98%20%EB%8C%80%EB%82%A8%20%EB%8F%84%EB%B0%9C%EC%82%AC#s-5
[8] 엔하위키 미러 "박세직"
https://mirror.enha.kr/wiki/%EB%B0%95%EC%84%B8%EC%A7%81
[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석헌"
[10] 엔하위키 미러 "코리아나"
https://mirror.enha.kr/wiki/%EC%BD%94%EB%A6%AC%EC%95%84%EB%82%98
[11] 엔하위키 미러 "클라라"
https://mirror.enha.kr/wiki/%ED%81%B4%EB%9D%BC%EB%9D%BC%28%EB%B0%B0%EC%9A%B0%29
[12] 엔하위키 미러 "손에 손잡고"
https://mirror.enha.kr/wiki/%EC%86%90%EC%97%90%20%EC%86%90%EC%9E%A1%EA%B3%A0
[출처] [현대사] 1998년 #2|작성자 땅두지